[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지형지질

동양 최대 목초지 이룬 고위평탄면의 원형
횡계고원은 화강암 차별침식으로 형성된 분지성 고원

산지가 대부분인 우리나라는 대부분의 높은 산들이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동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다. 이는 황해 앞바다 인천을 출발하여 동해 앞바다 강릉으로 이어지는 영동고속도로를 달려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경기도 이천을 지나 강원도 문막에 이르기까지는 그다지 높지 않은 산지들로 이어지다가 원주를 지나면서부터는 급격히 산세가 높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새말 나들목을 지나면서 산세는 첩첩산중을 이루며 더욱 험준해지는데, 이곳을 통과하면서 나타나는 둔내~봉평~진부 제1, 제2, 제3터널로 이어지는 긴 터널들이 험한 산세를 잘 말해준다.

그런데 마지막 터널인 진부 제3터널을 통과하여 오대산과 월정사로 빠져나가는 진부 나들목을 지나, 용평스키장과 대관령목장이 위치한 횡계리 도암면에 이르는 관문 싸리재(800m)를 넘으면서 상황은 이내 급변한다. 앞서 달려온 이전 지역의 차창 밖 풍경과는 전혀 색다른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산 넘어 산으로 급준하게 이어지던 산세는 모두 어디론가 사라지고 갑자기 고즈넉해 보이는 언덕과도 같은 작은 기복의 구릉을 이루는 저평한 고원성 대지가 평온한 느낌으로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바로 대관령(832m) 고개를 눈앞에 두고 위치한 평창군 도암면의 횡계고원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높고 험한 산지가 많은 곳이라 하여 한국의 알프스라고 불리는 산악의 고장 강원도와는 잘 어울리지 않는 밋밋하고도 편평하게 생긴 구릉들이 능선을 따라 유연하게 이어지고 있는 모습이 특이하다.

높은 산지에 발달한 평탄면을 이루는 지형이라 하여 지형학 용어로는 고위평탄면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형은 특히 오대산에서 태백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의 허리자락에 집중되어 있는데, 소백산 부근과 전북 진안고원 부근에도 잘 발달해 있다. 이 가운데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의 원형을 찾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대관령이 위치한 횡계고원이다.

횡계고원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있는 대관령 길은 태백산맥에 놓인 고갯길 가운데 가장 교통량이 많다. 서울에서 가장 가까울 뿐만 아니라 옛날부터 일찍이 사람들이 사용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관령을 통하여 서울과 강릉을 오가기 이전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용되던 고갯길이 대관령 남쪽으로 놓여 있는데 이를 아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바로 강릉시 왕산면과 정선군 임계면을 연결하는 삽당령으로 현재 이 고갯길에 35번 국도가 나 있다.

삽당령은(680m) 대관령보다 약 150m 가량 낮은 고갯길로, 이 길이 언제부터 이용되어 왔는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월군, 정선군을 포함한 남한강 상류지역의 일부가 이미 신라 경덕왕(?-765) 때부터 명주(지금의 강릉)에 속했다는 사실로 보아 적어도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삽당령을 통하여 동사면의 강릉과 서사면의 임계~정선~영월~원주, 그리고 남한강 수계를 이용하여 서울과 개경을 오갔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 초에 들어서면서 토목기술력의 발달로 마차가 통과할 수 있게 되자 원주~안흥~방림~대화~진부~대관령~강릉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역로(驛路)가 놓여졌다. 남한강 수계를 이용하던 노선이 대관령 일대의 완경사 구릉지대를 통과하는 육로 중심의 노선으로 바뀐 것이다. 지금은 가장 짧은 노선인 둔내를 통과하여 원주~둔내~진부~대관령~강릉에 도달하는 노선을 통하여 서울에서 강릉을 오가고 있다.


화강암의 차별침식으로 형성된 분지성 고원

▲ 용평스키장에서 바라본 대관령에서 선자령으로 이어지는 고위평탄면. 횡계고원 일대의 완만한 구릉지는 겨울철 스포츠의 왕자라고 하는 스키장으로 활용하기에 제격이다. (위), 화강암이 풍화되어 형성된 마사토가 횡계고원 상부 표토층을 두껍게 덮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화강암의 풍화는 현재보다 기후가 온난다습했던 제3기와 제4기의 빙하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침식되어 형성된 것이다.(아래)
해발고도 800~1,300m에 위치한 대관령 일대의 횡계고원은 북쪽으로 동대산(1,433m), 황병산(1,407m), 소황병산(1,329m), 동쪽으로 매봉(1,173m), 곤신봉(1,128m), 대관령(832m), 서쪽으로 장군바위(1,140m), 싸리재(800m), 그리고 남쪽으로 발왕산(1,458m), 옥녀봉(1,146m) 등으로 둘러싸인 산간분지다. 그리고 분지 내부는 17~22도 정도의 완만하고 평활한 면경사로 50~100m의 기복이 있는 구릉성 지형을 이루고 있다. 인공위성 사진을 보면 분지 일대가 주변 산지들에 비하여 평탄면을 이루고 있음을 더욱 확연하게 알 수 있다.

어떻게 이렇게 높은 곳에 분지성 고원지대가 형성될 수 있었을까? 그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먼저 이곳 일대의 지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지질은 중생대 쥐라기 말 약 1억5천만~1억3천만 년 전 사이에 대보조산운동에 의해 관입된 흑운모 계열의 화강암이 기반암을 이룬다. 그러나 인접한 북쪽의 오대산 부근은 선캄브리아기 편마암 계열에 속하는 변성암이며, 남쪽으로 고루포기산과 발왕산 부근은 고생대 평안계 계열의 사암과 셰일로 이루어진 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은 단단한 암석이지만 일단 절리면을 따라 물과 접촉되면 쉽게 풍화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횡계고원 일대는 겨울철 눈이 많고 여름철 강수량이 많아 화강암의 풍화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기반암을 이루는 화강암은 비교적 온난다습했던 제3기를 거치면서 오랜 동안 지중에서 심층풍화가 진행되었으며, 이후 제4기의 여러 차례에 걸친 빙하를 거치면서 더욱 심하게 풍화되어 침식과 삭박을 받아 평탄한 지형이 된 것이다.

반면 북쪽에 위치한 오대산 부근의 편마암과 남쪽에 위치한 평안계 퇴적암은 화강암에 비하여 풍화와 침식에 강했기 때문에 횡계고원에 비하여 덜 깎여나가 험준한 산지를 이루게 되었다. 즉 횡계고원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이 주변 지역의 암석에 비하여 풍화와 침식에 약하기 때문에 보다 현저하게 침식이 진행되어 저평한 형태의 분지가 된 것이다.

한반도는 중생대 쥐라기와 백악기에 걸쳐 전국 규모의 커다란 지각변동을 겪은 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큰 지각변동 없이 오랜 기간 침탈과 삭박의 지질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지표면은 준평원 상의 평탄한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신생대 제3기, 약 2천3백만 년 전에 한반도는 다시 한 번 크게 요동치게 된다. 동해가 생겨나면서 그 영향으로 횡압력을 받아 심하게 요곡, 융기하게 된 것이다.


2천3백만 년 전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융기

▲ 강릉수력발전소동쪽으로 급경사를 이루는 우리나라의 산세를 이용한 독특한 발전양식을 취하고 있는 강릉수력발전소. 도암댐(좌)에 고인 물을 터널을 통해 산 넘어 강릉수력발전소(우)로 보내어 발전하는 것이다. 현재 수질오염으로 인하여 발전이 중단된 상태다.
이 과정에서 동해지각과 거의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던 한반도 지형면은 습곡과 단층의 영향을 받으며 융기했다. 이때 횡압력을 직접적으로 받은 동해안쪽은 융기량이 많아 급경사를 이루었으나, 서쪽 지역으로 가면서 융기량이 적었기 때문에 경사가 완만한 동고서저의 경동지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동해와 나란히 평행하게 달리며 솟아오른 낭림산맥과 태백산맥은 바로 이때 생겨났다.

그런데 이때 한반도가 솟아오르는 과정에서 과거 평활했던 지형면의 일부가 다른 지역에 비해 습곡의 영향을 덜 받은 가운데 그대로 융기하여 현재의 높은 고도 상에 평탄지로 남게 되었다. 대관령 일대의 횡계고원은 바로 이때 태백산맥이 만들어짐과 동시에 들어올려진 이후 덜 깎여나간 지형면이 현재의 높은 고도에 남은 것이다.

현재 태백산맥을 비롯하여 소백산맥 등 전국 곳곳의 약 900m 이상의 산지에 약 300m 내외의 소기복을 이루며 발달해 있는 고위평탄면은 바로 이런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

그런데 고위평탄면은 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따라 동쪽 산지에 밀집하여 나타나는 것일까? 이는 지반융기의 축이 동쪽으로 치우쳐 있었기 때문으로, 융기량이 컸던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내륙 산정부에 준평원의 잔재인 고위평탄면이 집중적으로 분포하게 된 것이며, 또 산정부에 원형 그대로의 모습이 잘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남한산성이 위치한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495m) 정상부의 평탄한 지형면 또한 과거의 지형면 일부가 태백산맥 형성 당시 함께 융기한 것으로, 융기축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에서 멀어질수록 융기량이 적었음을 말해주는 증거라 할 수 있다. 이곳을 연구 조사했던 청주대학 지리교육과 권순식 교수(지형학)는 “현재 대관령 일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형면은 과거 융기했을 당시 그대로의 지형면은 아니라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준평원에 달했던 지형면은 융기한 이후에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침식을 받았기 때문에 지금의 지형이 융기할 당시 그대로의 지형(원지형)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설명이다. 다만 개석(開析)되고 남아 있는 지형면을 기준삼아 침식되기 이전의 지형으로 연장해보면 약 2천만 년 전의 원지형의 규모를 어느 정도 추정할 수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고위평탄면에는 남한강 최상류천인 차항천과 송천이 흐르고 있다. 평탄면에서 이 두 하천으로 흘러드는 지류를 따라 평탄면은 오랜 세월 침탈되고 삭박되어 정상부에서 볼 때, 곡(谷)의 깊이는 크게 약 200m 이상 패여 나갔을 정도로 큰 규모다. 따라서 권 교수의 말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고원 상에서 살펴볼 수 있는 지형면들은 바로 개석되고 남아 있는 잔류 지형면으로, 일종의 화석지형(relict form)에 해당된다.

대관령 지역은 해발고도가 높아 여름철에도 기온이 그리 높지 않고 비교적 서늘하다. 또한 백두대간의 중심축을 이루는 태백산맥의 한가운데에 위치하여 연 강수량이 약 1,500mm에 이를 만큼 풍부할 뿐만 아니라, 겨울철 눈이 많기로도 유명한 곳이다. 따라서 강수량이 적은 봄철에도 이곳은 겨울철에 쌓인 눈이 녹아 토양이 수분을 풍부하게 머금고 있어 목초재배에 유리하다.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 동양 최대 목초지 들어서

▲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 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곳으로 동양 최대의 목초지가 들어선 대관령 삼양목장. 험준한 주변산지와는 대조적으로 완만한 평탄대지를 이루는 이곳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고위평탄면 지형이다. 대관령의 강한 바람을 이용하여 발전하기 위해 풍력발전기를 세우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완만한 경사로 이어지는 구릉지대를 이루고 있어 방목에 유리하고 고산지대여서 모기와 진드기가 없으며, 가축의 먹이가 될 옥수수, 마초(馬草) 등이 잘 자라서 한우와 젖소 사육을 목적으로 현재 삼양목장과 한일목장을 비롯하여 여러 개의 목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과 함께 수도권에 신속하게 신선한 우유를 공급할 수 있게 되자 많은 목장들이 들어왔다.

그러나 최근 식생활 변화에 따른 우유 소비의 감소와 버터, 치즈, 분유 등의 낙농제품 수입으로 인하여 젖소 사육두수는 현저하게 줄어든 상태다. 현재 대관령 삼양목장에 들어서 있는 삼양축산의 경우 예전 3천 마리에 달했을 만큼 많았던 젖소가 2005년 현재 600마리밖에 되지 않는다.

도암면 소재지에서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송천을 따라 약 3km 가량 상류로 올라가면 여의도의 7.5배에 달하는 크기의 동양 최대의 목초지라고 할 수 있는 대관령 삼양목장에 이르게 된다. 목장 초지대로 들어서면 한국판 ‘사운드 오브 뮤직’의 한 장면이 떠오를 만큼 광활한 초원 위로 젖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평화로운 광경을 볼 수 있다. 최근 이곳은 한여름철 새로운 고원 피서지 명소로, 영화 촬영지로 각광을 받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횡계고원 일대의 지형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털을 깎아놓은 양 모양으로 자연식생인 삼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민둥산 모양이다. 대신 그 자리에는 젖소와 한우를 사육하기 위한 목장들이 들어서 있을 뿐만 아니라 무, 배추를 재배하는 고랭지 채소밭이 널려 있다. 1970년대 중반부터 목장이 들어서고 고랭지 농업이 널리 행해지기 시작하면서 울창했던 원시림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러나 이곳 일대의 원시림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훨씬 이전인 17세기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원래 이곳은 원시림으로 우거진 삼림지대를 이루고 있었으나,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 조선시대의 사회적 변화의 영향으로 화전민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울창한 거목들이 불태워지고 잘려나가기 시작했다. 화전민들은 귀리, 기장, 조, 옥수수, 콩과 같은 냉량성(冷凉性) 작물들을 재배하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했고, 19세기에 들어 함경도와 평안도 사람들이 이주해오면서 이들이 가져온 감자가 고랭지 농업의 대표적인 작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화전은 1966년 화전정리법이 시행되면서 급격히 감소하고 1970년대 들어서는 완전히 사라졌다.

한편 횡계고원 일대는 황태덕장으로도 잘 알려진 곳이다. 황태는 명태를 한겨울철 산간지역에서 추위와 바람 속에서 건조시킨 것을 말하는데, 이는 한겨울에 횡계고원 일대가 영하 15℃를 오르내릴 정도로 기온이 특별히 낮고 바람이 강하게 부는 곳으로 명태를 말리기에 적합한 기후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덕장이 시작된 것은 한국전쟁 당시 함흥, 원산, 명천 등지에서 덕장일을 하던 피난민들이 이곳 대관령 지역에 들어오면서부터라고 한다. 기후조건이 그들이 살던 지역과 유사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횡계고원 지역에서 덕장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화전이 사라지면서 화전민들이 대거 덕장으로 몰려들었기 때문에 횡계고원 지역은 인제의 용대리 덕장과 함께 황태의 고장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환경문제 야기하는 ‘현대판 화전’ 고랭지 채소재배

▲ 횡계고원을 관통하여 정선 방향으로 흐르는 송천은 비가 올 때면 누런 황토색으로 변한다. 그리고 도암면 소재지와 주변 스키장 등에서 방출되는 생활 오폐수가 함께 흘러들어 부영양화 현상으로 녹조류에 의해 물이 녹색을 띠는 경우도 흔하다. (위), 횡계고원 일대가 ‘현대판 화전’이라고 하는 고랭지 채소밭으로 개간되면서 집중호우가 내릴 때면 토양이 심하게 침탈, 유실되어 심각한 환경문제가 되고 있다.(아래)
1975년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서울에서 나귀를 타고 오면 약 7일이나 걸리던 길이 자동차로 3시간만에 이를 수 있게 되자, 산간오지나 다름없던 대관령 지역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소규모 자급자족 영농이 행해지던 전형적인 산촌 지역에 나타난 가장 특징적인 변화는 현재 이곳 주민들의 고소득원으로 자리 잡게 된 고랭지 농업의 성행이다.

횡계고원 일대는 해발고도가 약 800~1,300m에 달하여 한여름철 8월의 최고기온의 평균이 23.3℃밖에 되지 않을 정도이어서 평지에 비해 여름날씨는 거의 더위를 느끼지 못할 만큼 시원하다. 따라서 여름철 식물의 생장기간은 짧을 수밖에 없다. 배추는 보통 20℃에서 재배가 잘 되는 작물인데, 여름철 기온이 높아 저지대에서는 재배가 곤란하다. 기온이 23℃를 넘으면 무름병이 발생하여 배춧잎이 썩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횡계고원 일대에서는 가을에 생산되는 채소를 여름에 재배하여 출하할 수 있는 시기 상의 이점이 있다. 또한 영동고속도로가 이 지역을 통과하게 되면서 신속하게 수도권 시장으로 내다팔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지자 고랭지 채소재배가 널리 행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곳 또한 ‘현대판 화전’이라고도 불리는 고랭지 채소밭의 과다경작으로 심각한 환경문제가 야기되고 있다. 고랭지 채소밭의 토사들은 교결성(점성)이 약한 사질성 토양이기 때문에 약간의 비만 와도 빗물을 타고 쉽게 흘러내린다. 여름철 집중호우가 내릴 때 고랭지밭에서 유출되는 토사가 하천으로 흘러들어 엄청난 수질오염을 일으키는 것이다.

많은 비가 올 때면 횡계고원을 관통하여 용평스키장 입구를 지나 정선 방향 수하리로 이르는 송천은 거의 누런 황토색으로 변한다. 거기에다 도암면 소재지와 용평레저타운에서 방출되는 생활 오폐수가 함께 흘러들어 부영양화 현상이 심해져 녹조류에 의해 물이 녹색을 띠는 경우도 다반사다. 이곳 주민들의 소득원이 된 고랭지 채소밭이 계속적으로 늘어나자 송천의 수질은 더욱 악화되어 하천으로서의 생명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001년 급기야 송천의 물을 막아 능경봉(1,123m) 넘어 강릉 남대천으로 물길을 돌려 발전하던 강릉 수력발전소가 발전을 멈추게 되었다. 횡계고원의 고랭지 채소밭에서 유출된 토사로 뒤범벅이 된 흙탕물이 강릉으로 넘어오면서 깨끗하기로 소문난 남대천이 썩어가자 강릉 주민들이 발전 중지를 요구하는 시위와 함께 피해 보상을 위한 소송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대관령과 풍력 발전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는 대관령은 바람이 강하기로 유명한 곳으로, 연평균 초속 7m의 세찬 바람은 풍력발전에 최적의 조건이다. 자연환경의 파괴를 우려하는 환경단체의 반대도 있었으나 1차분 14기의 풍력발전기가 세워져 2005년 12월 상업운전에 들어갔다.
강원도는 2006년 말까지 35기를 추가로 건립하여 총 49기의 풍력발전기를 가동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간 발전량은 약 24만5천MWh, 돈으로 환산하면 260억 원어치로 강릉시 7만 가구가 1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양이다.

한편 기존 대관령 고갯길 밑으로 터널을 뚫어 새롭게 놓인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으로 그동안 방치되었던 횡계리 옛 고속도로 대관령 하행선 휴게소가 새롭게 탈바꿈되었다. 강원도에서 2005년 11월 30억 원을 들여 지하 1층, 지상 1층 연면적 1,360㎡ 규모에 풍력발전을 비롯하여 미래 에너지를 소개하는 신·재생에너지 전시관을 개관한 것이다.

전시관에는 우리나라 에너지의 현 주소, 신·재생 에너지의 종류와 이용 가능성을 비롯하여 풍력발전의 원리와 개발현황 등이 알기 쉽게 소개되어 있으며, 물자동차, 바람악기, 태양전지벌레, 내가 만든 전기 등 미래 에너지를 활용한 다양한 체험공간까지 갖추어져 있어 학생들의 체험학습관으로도 손색이 없다.

이우평 백령중학교 교사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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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식생

채소밭에 송전탑에 멍든 대간 생태계
정상부까지 채소밭과 송전탑 들어서…민둥인가목, 금마타리 생육

백두대간의 주요 고개 가운데 하나인 대관령은 식물학적으로 볼 때 의미가 큰 곳이다. 대관령 구간에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영동고속도로가 지나던 대관령은 예로부터 백두대간으로 갈라진 영동과 영서를 연결시켜주는 중요한 고개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영동쪽에 강릉이라는 큰 고을이 예전부터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과 생활물품이 이동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백두대간으로 보면, 북쪽으로 선자령(1,157m), 매봉(1,173m)을 거쳐 오대산 국립공원의 노인봉(1,388m)으로 이어주는 중요한 고개이고, 남쪽으로는 능경봉(1,123m), 고루포기산(1,238m), 석병산(1,055m)을 거쳐 청옥산(1,403m)으로 연결된다.

▲ 눈개승마. 높은 산 숲속에 자라는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6~8월에 핀다. 울릉도에서는 어린 싹을 나물로 먹기 위해 재배하기도 한다.

대관령 습지에 제비동자꽃 등 북방계 식물 많아

▲ 제비동자꽃 - 습지에 자라는 석죽과의 북방계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대관령, 대암산 등지에서만 생육이 확인된 희귀식물이다. 꽃은 8~9월에 핀다.
대관령 지역도 동해를 따라 달리는 백두대간의 다른 구간들과 마찬가지로 동해쪽으로는 급한 경사를 이루고 있고, 서쪽으로 비교적 경사가 낮은 경동지괴 현상을 보인다. 따라서 강릉쪽으로 경사가 급한 반면 횡계쪽으로 펑퍼짐한 지형이 형성되어 있다. 펑퍼짐한 횡계쪽 사면이 식물 생육에 특별한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넓은 지역이 펑퍼짐한 지형을 이루다보니 이곳의 수계는 습지를 많이 형성하게 되었으며, 또한 고도는 해발 800m 이상이나 되므로 다른 곳에서는 자랄 수 없는 특별한 식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이 때문에 폐쇄된 대관령 휴게소를 중심으로 북쪽의 선자령쪽이나 남쪽의 고루포기산쪽 모두 봄부터 가을까지 희귀한 식물들이 끊이지 않고 꽃을 피운다.

▲ 놋젓가락나물 - 숲 가장자리에 드물게 자라는 미나리아 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핀다. 덩굴지는 줄기가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대관령의 습지는 어느 한 곳이 아니고, 백두대간에서 서쪽으로 흘러드는 계곡이 발원하는 어느 곳에나 형성되어 있다. 이들 습지에는 제비동자꽃, 촛대승마, 금꿩의다리, 놋젓가락나물, 개발나물, 궁궁이, 바디나물, 가는바디나물, 참좁쌀풀, 곰취, 꽃창포 등이 자라고 있다.

참좁쌀풀이나 금꿩의다리도 귀한 식물이기는 하지만, 이곳 습지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제비동자꽃을 꼽을 수 있다. 남한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북방계 식물인 제비동자꽃은 석죽과의 여러해살이풀로서, 높은 산의 풀밭에서 매우 드물게 자란다. 줄기는 높이 50~80cm이고, 잎은 잎자루가 없이 줄기에 마주난다. 꽃은 7~9월에 줄기 끝에서 짙은 홍색으로 피며, 꽃잎은 5장이고 끝이 가늘게 갈라진다. 세계적으로는 만주, 우수리, 일본에 분포한다.

▲ 노린재나무 - 전국의 산에 자라는 노린재나무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줄기를 태우면 노란 재가 생기므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제비동자꽃과 함께 습지 부근에 자라는 귀한 식물이 하나 더 있는데, 미나리아재비과의 놋젓가락나물이다. 전국에 자란다고 알려져 있기는 하지만,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귀하다. 이 식물은 투구꽃속에 속하는 여러해살이풀로, 투구꽃과는 달리 줄기가 덩굴지며 다른 물체에 감기는 특징이 있다. 덩굴진 줄기는 길이 2m에 이르며, 잎은 어긋난다. 꽃은 투구 모양이며, 8~9월에 줄기와 가지 끝에서 청자색으로 핀다. 독이 있는 뿌리를 한약재로 쓴다. 만주와 시베리아에도 분포한다.

대관령 일대는 신갈나무가 우점하여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숲속에는 투구꽃, 흰투구꽃, 모시대, 애기앉은부채, 은방울꽃 등이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능선의 양지바른 곳에는 동자꽃, 꿩의비름, 분홍바늘꽃, 큰용담, 마타리, 각시취, 가는쑥부쟁이, 개쑥부쟁이, 톱풀, 고려엉겅퀴, 산비장이 등이 자라고 있다.


백두대간의 대표적인 훼손지역

▲ 고광나무 - 전국의 산 숲속에 자라는 범의귀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4~6월에 핀다. 꽃잎은 4장이며, 암술대와 꽃받침통 밑부분에 털이 많이 난다.
대관령 남쪽에는 닭목재라는 백두대간 고개가 자리 잡고 있다. 백두대간 석병산 부근의 삽당령과 대관령의 중간쯤에 있으며, 강릉 시내와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를 잇는 지방도로가 지난다. 이 닭목재와 대관령의 딱 중간쯤에 고루포기산이 솟아 있다. 대관령 남쪽에서 대관령의 관문처럼 울타리를 치고 서 있는 셈인데, 거리상으로는 두 고개에서 6km 남짓씩 떨어져 있다.

두타산(1,353m), 청옥산 이후에 상월산(970m), 석병산을 지나며 고도가 1,000m대로 낮아졌던 백두대간이 더욱 높이를 높이기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지형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고루포기산이지만, 생태적으로는 인간에 의해 훼손된 대표적인 곳이다. 대간 자체의 물리적 훼손은 고랭지채소밭과 송전철탑에 의해 일어났다. 산 남쪽의 대단위 고랭지채소밭은 태백의 매봉산, 삼척의 덕항산과 함께 백두대간 생태계를 파괴한 대표적인 고랭지 채소단지로 손꼽힌다.

또한, 횡계의 스키장 전력공급을 위해 강릉에서 횡계까지 세워진 송전탑은 백두대간 경관을 훼손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송전탑 주변과 송전탑 진입로에 귀화식물을 유입시켜 생태계를 훼손하고 있다. 강릉수력발전소에서 용평스키장의 횡계변전소까지 46개 송전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 가운데 많은 것이 백두대간에 들어서 있다. 고랭지채소밭에는 강원도가 외국 자본을 유치하여 2007년까지 풍력발전단지를 조성할 계획도 세워져 있다.

또 하나 고루포기산의 생태계 훼손을 가중시키고 있는 것은 산 남서쪽에 세워진 도암댐이라 할 수 있다. 발왕산(1,458m)과 고루포기산 사이의 계곡에 세워진 이 댐은 대관령 일대의 수계 즉, 소황병산(1,328m), 매봉, 곤신봉(1,127m), 선자령,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남쪽으로 형성된 펑퍼짐한 지역에서 모여드는 물을 가두는 댐이다. 이 수계를 흐르는 물은 송천을 흘러 정선 아우라지를 지나 조양강에 합류한 후, 동강으로 유입된다.

도암댐은 지난 1990년 5월 남한강 수계를 동해안으로 변경하는 유역변경 수로식으로 설치됐는데, 14km의 지하수로를 통해 강릉 남대천 상류의 강릉수력발전소까지 수송된다. 하지만 남대천의 수질오염 등으로 인해 2001년 3월 발전방류가 중단됐으며, 2002년 태풍 루사 피해 이후 영월 평창 정선지역 주민들이 댐 해체를 요구해 왔다. 동해 쪽으로의 방류가 중단된 이후, 동강의 수질을 악화시키는 요인 가운데 하나로 지적되어 환경단체의 댐 해체 요구도 있어 왔다.

고루포기산 정상은 채소밭과 송전탑으로 포위되어 있다. 채 50m도 안 되는 거리에 채소밭이 펼쳐지고, 대규모 송전탑이 정상 앞뒤로 두 기나 서 있다. 산 정상에서 닭목재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을 따라 고랭지채소밭이 띠를 두른 듯 조성되어 있는데, 능선에서 30~100m까지의 숲만 남아 있다. 백두대간 바로 옆에서 시작된 이 고랭지채소 재배단지는 직선거리로만 따져도 남북 5km, 동서 2km의 넓은 면적을 차지하며 조성돼 있다.

▲ 국수나무 -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가지의 껍질을 벗기면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채소밭이 코앞까지 치고 들어온 백두대간이지만 온전히 남아 있는 백두대간 숲은 소나무와 전나무가 간간이 섞인 수령 오래된 활엽수림으로서, 6월의 짙푸름을 자랑하고 있다. 트랙터 등 농기계를 쓸 수 없을 정도로 경사가 심해 소를 이용해 밭갈이를 하는 모습을 보며 여러 생각이 교차했다.

고랭지채소밭 사이에 한두 그루씩 남아 있는 가래나무, 신갈나무, 고로쇠의 노거수들이 개간하기 전 숲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노거수들 외에도 고광나무, 다래나무, 붉은병꽃나무, 노린재나무, 당단풍나무, 물푸레나무, 뽕잎피나무, 철쭉나무, 두릅나무, 국수나무 같은 떨기나무와 동자꽃, 눈빛승마, 터리풀, 노루오줌, 산외, 나래박쥐나물, 독활, 선밀나물 등이 남아 있다. 하지만, 사람 활동이 있는 곳에 어김없이 침입하는 귀화식물의 하나인 서양민들레와 서양톱풀 등도 여기저기서 눈에 띄었다.



채소밭 개간으로 활엽수림 사라져

▲ 백당나무 - 전국의 산에 자라는 인동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꽃차례 가장자리에만 큰 꽃이 달리는데, 이 꽃은 암술과 수술이 없는 무성화다.
마지막 고랭지채소밭에서 큰길을 따라 30m쯤 올라서니 백두대간 능선이다. 이 큰길은 송전탑을 놓기 위해 낸 길로서 백두대간을 따라 가다 정상만 살짝 우회한 후 정상 너머 송전탑까지 나 있다. 길가에는 서양민들레 등의 귀화식물과 함께 산자락에 사는 산딸기나무, 질경이 같은 식물들이 침입해서 둥굴레, 단풍취, 방아풀, 노루오줌, 산외, 노랑물봉선, 큰까치수영 등과 경쟁하며 살고 있다.

길가 주변은 이렇듯 교란이 심한 상태지만, 주변 숲은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신갈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숲속에는 신갈나무뿐만이 아니라 까치박달, 물푸레나무, 뽕잎피나무, 마가목, 당단풍나무, 함박꽃나무 등 큰키나무들이 섞여 자라고 있다. 신갈나무 고목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의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또한, 딱총나무, 붉은병꽃나무, 미역줄나무, 국수나무, 두릅나무 등의 떨기나무가 숲의 중간층을 이루고 있다. 해발 1,200m가 넘는 고산능선에서 이처럼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자라는 것은, 백두대간이 이 일대로 접어들면서 석병산, 자병산, 두타산 등지에서 나타났던 석회암지대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 산가막살나무 - 전국의 산 숲속에 자라는 인동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열매는 가을에 붉게 익으며, 신맛이 나고 큰 씨가 들어 있다.
정상 직전의 송전탑 부근에는 산가막살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다. 풀꽃으로는 은방울꽃과 쥐오줌풀의 꽃이 보인다. 가을에 화려한 꽃을 피울 각시취가 많다. 정상과 정상 주변의 숲에는 여러 종류의 풀과 나무들이 건강하게 자라고 있다. 산개벚지나무, 고로쇠나무, 당단풍나무, 붉은병꽃나무, 국수나무, 물푸레나무, 매발톱나무, 참조팝나무 같은 나무들과 이 나무들 아래에 참좁쌀풀, 수리취, 요강나물, 터리풀, 박새, 쥐오줌풀, 금강애기나리 등이 자라고 있다.

한국 특산식물인 참좁쌀풀은 개체수가 매우 많은데, 7월이면 노란 꽃밭을 만들 것이다. 검정색에 가까운 꽃빛을 내는 요강나물도 지천으로 꽃을 피우고 있다. 정상 바로 아래에서 붉은 꽃을 피운 떨기나무가 발걸음을 붙잡는다. 장미과의 민둥인가목이다.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높은 산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식물이 한두 개체가 아니라 서너 평 정도의 면적에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 민둥인가목 -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생열귀나무에 비해서 고지대에 자라며, 꽃빛깔이 연하다.
정상을 지나면 송전탑이 또 한 기 서 있다. 주변에는 귀화식물인 서양민들레가 큰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산딸기나무, 줄딸기 등도 철탑 공사를 한 탓에 이곳까지 침입해서 살고 있다. 철탑 바로 밑에는 이곳에 살지도 않는 비비추 종류를 식재해 놓았는데, 철탑이 생태계를 훼손한다는 비판에 억지 조경을 한 모양이다. 주변에는 미나리냉이, 눈개승마, 벌깨덩굴, 수리취, 나도하수오와 함께 참좁쌀풀이 큰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정상에서 백두대간을 타고 오목골 갈림길까지는 500여m 거리로 지척이다. 신갈나무가 순군락에 가까울 정도의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가끔씩 시닥나무, 고로쇠나무, 느릅나무, 가래나무 등이 섞여 자라는 게 보인다. 떨기나무로는 고광나무, 물참대, 까치밥나무, 오갈피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숲 바닥에는 족도리풀, 병조희풀, 흰진교, 피나물, 광릉갈퀴, 눈개승마, 금강제비꽃, 광대수염, 참좁쌀풀, 벌깨덩굴, 오리방풀, 미치광이풀, 속단, 당개지치, 애기앉은부채, 풀솜대, 연령초, 퉁둥굴레 등이 자라고 있다.


희귀식물 단풍터리풀과 생열귀나무 자라

▲ 생열귀나무 - 강원도 이북의 산자락에 자라는 장미과의 북방계 식물로, 꽃은 5~6월에 핀다. 전체에 날카로운 가시가 나며, 꽃은 진한 붉은 빛이다.
오목골 갈림길(1,180m)을 지나 대관령 전망대(1,187m)까지는 신갈나무 숲속에 복자기, 시닥나무, 돌배나무, 노린재나무, 회목나무, 회나무 등의 나무와 관중, 눈빛승마, 투구꽃, 노루삼, 선괭이눈, 큰괭이밥, 광릉갈퀴, 삿갓나물, 감자난초, 옥잠난초 등의 풀이 자라고 있다.

전망대에서 왕산골 갈림길이 있는 횡계현까지 가는 도중에는 아름드리로 자란 신갈나무와 피나무가 눈길을 끌고, 소나무도 간간이 볼 수 있다. 바위가 조금 발달한 숲속에는 금마타리와 세잎승마가 자라고 있다. 도깨비부채 대군락을 볼 수 있는 곳도 이 부근이다. 능선 바로 옆에 큰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데, 군락 보호를 위해 등산로를 우회시킨 곳이 있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보전에 힘쓰고 있는 듯하다.

▲ 붓꽃 -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6월에 핀다. 꽃봉오리의 모습이 붓을 닮아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횡계현에서 능경봉쪽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능선을 버리고 횡계쪽의 왕산골로 접어들면, 조림지가 나오는데 경사가 완만하여 곳곳에 습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 습지 주변에는 할미밀망, 참좁쌀풀, 초롱꽃, 산비장이, 꽃창포, 붓꽃, 애기원추리 등이 자라고 있고, 계곡가에서는 괴불나무와 신나무가 발견된다.

횡계에서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지방도에 나서면 단풍터리풀, 생열귀나무, 범꼬리 등을 만날 수 있다. 단풍터리풀은 장미과의 북방계 식물로 터리풀에 비해서 잎이 더욱 깊게 갈라지며, 잎 뒷면에 흰털이 많이 나는 특징으로 구분된다. 백두산을 비롯하여 만주, 몽골, 시베리아, 캄차카 등 고위도 지방에 분포한다. 남한에서는 이 일대를 비롯하여 강원도 몇몇 곳에서만 살고 있다.

눈개승마. 높은 산 숲속에 자라는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6~8월에 핀다. 울릉도에서는 어린 싹을 나물로 먹기 위해 재배하기도 한다. 습지에 자라는 석죽과의 북방계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대관령, 대암산 등지에서만 생육이 확인된 희귀식물이다. 꽃은 8~9월에 핀다.

▲ 신나무 - 전국의 산 계곡 주변에 자라는 단풍나무과의 큰키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단풍나무와 같은 속에 속하는 식물로서 열매에 날개가 붙어 있다.
숲 가장자리에 드물게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핀다. 덩굴지는 줄기가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전국의 산에 자라는 노린재나무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줄기를 태우면 노란 재가 생기므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전국의 산 숲속에 자라는 범의귀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4~6월에 핀다. 꽃잎은 4장이며, 암술대와 꽃받침통 밑부분에 털이 많이 난다.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가지의 껍질을 벗기면 국수처럼 희고 가늘어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전국의 산에 자라는 인동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꽃차례 가장자리에만 큰 꽃이 달리는데, 이 꽃은 암술과 수술이 없는 무성화다.

전국의 산 숲속에 자라는 인동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열매는 가을에 붉게 익으며, 신맛이 나고 큰 씨가 들어 있다.강원도 이북의 산자락에 자라는 장미과의 북방계 식물로, 꽃은 5~6월에 핀다. 전체에 날카로운 가시가 나며, 꽃은 진한 붉은 빛이다.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생열귀나무에 비해서 고지대에 자라며, 꽃빛깔이 연하다.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붓꽃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6월에 핀다. 꽃봉오리의 모습이 붓을 닮아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전국의 산 계곡 주변에 자라는 단풍나무과의 큰키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단풍나무와 같은 속에 속하는 식물로서 열매에 날개가 붙어 있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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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풍수

붉은 악마의 치우천왕은 고대 동이족 전쟁영웅
화이족 헌원황제는 삼황오제의 한 인물…지남철 역사도 이때 시작

▲ 대관령 표석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회에 출전한 태극전사들이 투혼을 불사르며 승리를 위하여 선전분투하고 있다. 한편 경기장 밖에서는 대규모 길거리 응원도 동시 진행되고 있는데, 특히 ‘붉은 악마(Red Devils)’의 조직적인 응원도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하고 있다. 붉은 악마는 1995년에 결성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서포터스 클럽이지만 이제는 한국인이라면 누구든지 붉은 악마 중에 한 사람이 되는 셈이다.

붉은 악마의 유래는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에 출전한 우리나라 축구팀은 예상외로 4강에 올라 세계를 놀라게 하였는데, 당시 외국 언론들이 우리 대표팀을 붉은 악령(Red Furies)으로 호칭하였는데, 이 표현이 ‘붉은 악마’로 번역되면서 영문으로는 쉬운 단어인 ‘Red Devils’ 로 수정한 것이다.

이후에 붉은 악마는 그 역사와 정통성을 상고시대의 전쟁과 승리의 신인 치우천왕(蚩尤天王)에서 찾게 된다. 그동안 역사적 인물인 치우천왕에 대하여 관심부족과 사료부족, 그리고 일제의 식민사관과 중국의 중화사관 등으로 인하여 상고사에 대한 인식과 연구가 미흡하였는데, 붉은 악마의 탄생을 계기로 국민들 사이에 치우천왕을 비롯하여 상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치우천왕은 누구이고 탁록대전의 진실은?

▲ 중국 하남성 탁록현 사당에 모셔진 치우천왕상.
판소리 열녀춘향수절가(烈女春香守節歌)를 보면 소위 ‘탈 승(乘) 자 노래’라는 대목이 있다. 내용인즉 이도령과 춘향이의 진한 농도의 사랑노름을 하는 대목 중에 치우(蚩尤)에 관한 대목이 나온다.

‘헌원씨(軒轅氏) 습용간과(習用干戈) 능작대무(能作大霧) 치우(蚩尤) 탁록야( 鹿野)에 사로잡고 승전고를 울리면서 지남거(指南車)를 높이 타고…’
판소리 가사의 내용처럼 황제는 습용간과(방패와 창을 다루는 법을 익힘)에 능하였고, 동이족인 치우는 능작대무(능히 짙은 안개를 만듦)하는 재주를 가졌다. 황제는 치우와의 전투 중 탁록(중국 하북성 탁록현으로 북경에서 서북쪽으로 120㎞쯤 떨어진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고 중국 각종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蚩尤作亂不用帝命於是黃帝乃徵師諸侯與蚩尤戰於 鹿之野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代神農氏是爲黃帝(치우가 난을 일으켜 황제의 명을 듣지 않으니, 이에 황제는 모든 제후들을 불러 탁록 벌판에서 치우와 싸웠다.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이에 모든 제후들이 황제헌원을 천자로 모시어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바로 황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헌원은 고대 중국의 제왕으로 황제의 이름으로 삼황오제(三皇=수인씨 燧人氏·복희씨 伏羲氏·신농씨 神農氏, 五帝=황제 皇帝·전욱 頊·제곡 帝 ·요 堯·순 舜) 중 한 사람이다.

또한 중국 호남성 마왕퇴에서 출토한 백서 십육경(十六經)에 의하면 황제가 탁록전쟁에서 승리한 뒤 치우의 가죽을 벗겨 화살의 과녁을 만들고 머리카락으로 매달아 놓았으며 몸을 잘게 다져 육장(肉醬)을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황제가 이 전쟁 초기에 패배한 이유는 치우가 전투할 때에는 항상 짙은 안개를 만든 상태에서 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황제는 하늘에 기도를 하였더니 구천현녀(九天玄女)가 내려와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 그리고 지남거(指南車·현재의 나침반) 제작방법을 가르쳐 주었고, 탁록전투에서 지남거를 활용하여 치우를 물리치고 승리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중국측 사료에는 대부분 치우천왕을 패배자로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산해경(山海經·고대 중국 및 국외의 지리를 다룬 지리서)에 나오는 치우의 형상은 목이 잘린 모습을 그려 놓을 정도다.


전쟁과 승리의 화신 치우천왕

그러나 한단고기(桓檀古記) 등 우리나라 역사서에 의하면 치우천왕은 단군조선 이전의 고대국가인 배달국(BC 3898-2333) 14대왕(재위기간 BC 2706-2598)이다. 치우천황은 도읍을 청구(靑邱·현 중국 산동성)로 옮기고 중국의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 강소성, 안휘성, 절강성까지 영토를 크게 확장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한 인물이다.

치우천왕 즉위 당시의 배달국 국력이 약화되면서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신병기 즉 철제무기와 갑옷으로 무장한 치우와 그의 부하장군을 보고 당시 미개인이던 중국인들은 동두철액(銅頭鐵額·구리 머리에 쇠 이마)이라고 표현하였다.

당시에 황제헌원은 치우천왕에게 반기를 들고 전쟁을 일으켜 73회의 전투를 하였으나 모두 패했다. 마지막 전투인 74번째 탁록대전에서 지남거(指南車)라는 도구를 만들어 배달국에 도전하였으나 결국 치우천왕에게 패배하여 항복하고 신시(神市)의 규범을 준수하겠다고 서약하였다고 하였는데, 중국측 기록에는 지남거 등의 도구를 전쟁에 사용하여 탁록대전에서 승리를 하였다고 한다.

중국측 사료엔 모두 치우천왕을 패배자이며 나쁘게 묘사했는데도 불구하고 과거 중국 장수들이 전쟁에 출정하기 전에 치우천왕에게 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치우천왕이 황제에게 패배하였다면 중국 제왕들이 국가의 존폐가 달려있는 중대한 전쟁에 앞서 치우천왕에게 승리를 기원하는 제를 올렸겠는가! 이런 점에서 중국측의 역사서는 근본적으로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된다.

그런데 최근 중국에서는 치우천왕의 묘를 복원하고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다. 황제는 화이족(華夷族·지금의 漢族)이고 치우천왕은 동이족(東夷族)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 다만 아쉬운 사실은 붉은 악마는 사천만이 넘는데 치우천왕의 사당은 아직 우리나라에 한 곳도 없다. 다만 황제가 전쟁에서 사용하였다는 지남거는 중대한 발명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안개 속의 대관령. 나침반은 정확한 방위와 지도를 판독하는 데 가장 편리한 도구다.

지남철은 누구 만들었는가??

백두대간 구간 중 대관령을 지나가는데 장시간 안개와 비가 시야를 가릴 뿐만 아니라 방위개념을 불분명하게 만든다. 이런 때 필요한 등산장비 중 하나가 바로 나침반이다. 지금은 나침반이 없어도 위성을 이용한 GPS(위성위치확인시스템)라는 첨단장비가 개발되어 나침반의 용도가 과거에 비하여 떨어졌지만, 중국의 4대 발명품인 나침반, 종이, 화약, 인쇄술 중 하나로 꼽는 것으로 보아도 당시 나침반의 발명은 위대한 발명품이다. 미지의 세계를 찾아가는 탐험가나 망망대해를 항해하는 선원에게는 생명과 같은 장비다.

과거에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것도 나침반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나침반에 대한 문헌상의 기록으로는 중국 동한(東漢)시대에 왕충(王充·27-100?)이 서기 85년경에 저술한 논형(論衡)이란 문헌에 ‘사남의 자루를 땅에 던지면 숟가락의 손잡이 부분이 남쪽을 향한다(司南之杓,投之於地,其 南)’라는 기록에 있다. 사남(司南)라는 숟가락 모양의 자성(磁性)를 가진 기구로 당시에 점복(占卜)도구로 사용하였다.

▲ 붉은 악마의 트레이드마크는 동이족이며 배달국의 14대왕인 치우천왕상이다(왼쪽), 고대 나침반인 사남(司南)의 복원모형도(오른쪽)
나침반이 가르키는 북쪽은 자북(磁北·magnetic north)이라고 하며, 도북(圖北·grid north)이나 진북(眞北·true north)과는 차이가 있다. 나침반이 가리키는 자북과 지구의 자전축에 따른 실제 북극인 진북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도북과 진북 사이는 도편각(圖偏角)이라고 하여 차이가 아주 적어 무시할 정도다. 그러나 지도와 나침반을 이용하여 정확한 방위를 사용하기 위하여 도자각(圖磁角·자북과 도북간의 차이)만큼 정치(定置)를 하여야 한다. 우리나라는 5도에서 10도 사이의 편차각이 되는데, 동해바다쪽으로 갈수록 편차각이 늘어나고 서해바다쪽으로 갈수록 편차각이 줄어든다.

11세기에 송의 과학자 심괄(沈括·1031-1095)이 지은 몽계필담(夢溪筆談, 1088년 저술) 24권 잡지(雜誌)편에 ‘方家以磁石磨針鋒, 則能指南, 然常微偏東, 不全南也. 水浮多蕩, 指爪及唇上皆可爲之, 運轉尤速, 但堅滑易墜,不若縷懸爲最善. 其法取新中獨縷, 以芥子許蠟, 綴于針腰, 無風處懸之 則針常指南. 其中有磨而指北者, 予家指南北者皆有之. 磁石之指南, 猶栢之指西, 莫可原其理(방술가는 자석으로 바늘 끝을 갈아 남쪽을 가리키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약간 동쪽으로 기울어져 있어 정남이 아니다.

물에 뜨게 하면 많이 흔들려 움직이고, 손톱 위에서나 그릇의 가장자리 위에서도 모두 가능하지만, 움직임이 너무 빠르면 단단하고 미끄러워 쉽게 떨어지기 때문에 차라리 실로 매다는 것이 제일 좋다. 이 방법은 새 명주실 한 올에 겨자씨 크기의 밀랍으로 바늘 허리와 같이 붙이고 바람이 없는 곳에 매달아 놓으면 바늘은 언제나 남쪽을 가리키게 된다.

바늘 중에는 마찰에 따라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도 있는데, 나의 집에는 남쪽과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모두 있다. 자석이 남쪽을 가리키는 것은 마치 잣나무가 서쪽을 가리키는 것과 같지만, 근원적인 이치를 알 수가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즉 자석의 바늘이 남북을 가리키지만, 진북(眞北)과 자북(磁北)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미 기술되어 있다. 자북과 진북 차이를 천 년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자북점은 캐나다 허드슨만 북동부에 있으며, 또한 자남극도 역시 지리적 남극과 일치하지 않는다. 즉 자북극과 자남극은 서로 지리적으로 정확한 지구 반대편 지점이 아니며, 자극점이 최근 4~5년간은 매년 40km 정도 북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

등산가들이 휴대용 GPS기기를 애용하여 나침반이 고전적인 장비로 생각하기 쉽지만, GPS는 방위측정 오차가 약 3도지만, 성능 좋은 나침반의 오차는 0.5도 이내로 정확성은 오히려 나침반의 성능이 뛰어나다. 그리고 나침반은 자성을 띤 나침을 이용하기 때문에 방위를 측정할 때 주변에 자침에 영향을 주는 물질이 있으면 오차가 생기기 때문에 주의하여야 한다.

GPS기기는 나침을 이용하지 않고 위성을 이용하기 때문에 주변에 자력이 있는 물질이 있어도 방위측정에 영향이 없으리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GPS기기도 나침반처럼 영향을 받는다.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나침반은 인류의 역사마저 바꿀 정도로 그동안 지대한 공로가 있었으며, 지금도 독자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특히 풍수지리에서는 중요한 필수품으로 방위를 측정하는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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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문헌고찰

복을 비는[希福] 고개가 복이 많은[百福] 고개로
백복령·삽당령·석병산·능경봉·선자령의 지명 고찰

산경표에 의하면, 닭목재[鷄項嶺]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능경봉 구간과 전 구간인 백봉령(百福嶺)에서 삽당령(揷當嶺)에 이르는 석병산 구간의 대간 주능선 상에는 백봉령과 삽당령 이외에는 다른 산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지도상에 분명하게 표시해 놓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 구간에 백복령, 삽운령(揷雲嶺), 삽현(鈒峴)을 표기하고, 이 일대의 주요 산 이름으로서 삽운령 북동쪽 방면으로 뻗은 가지 산줄기 상에 담정산(淡定山), 삽현 북서쪽 방면으로 뻗은 가지 산줄기 상에 소은백이산(所隱伯伊山)을 표기하고 있으나, 오늘날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석병산, 두리봉, 석두봉, 화란봉, 닭목재, 고루포기산, 능경봉 같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이 구간의 산봉 이름과 고개 이름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와 고지도 상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장 불분명한 곳 중 하나다.

때문에 이 일대의 산봉 고개 이름 등은 잘못 불리기도 하고, 땅이름 표기와 위치 따위가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땅이름들은 본래의 땅이름 의미와 유래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 왜곡성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산봉 고개 이름이 바로 전 구간의 석병산, 백봉령, 삽당령과 이번 구간의 주산인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이다.

▲ 석병산. 역대 지리지에 '기암괴석의 바위산이 병풍을 두른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을 지닌 담정산이 바로 석병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백봉령의 땅이름 표기와 유래

석병산 남동쪽에 자리한 ‘백복령’은 현금에 이르러 대체로 ‘白茯嶺’이라 쓰고, 그 유래에 대해서는 속설에 의하면, 예부터 이곳에서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白茯)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한약재로 쓰이는 ‘복령(茯笭)’은 한 글자로 ‘복(茯)’이라고만 지칭한 예가 없으며, 또한 그 빛깔에 따라 ‘백복령(白茯岺)’, ‘적복령(赤茯?)’이라고는 칭하여도 이를 ‘백복’, ‘적복’이라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는 1915년 전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이 고개 이름을 일제가 ‘白茯嶺’이라 잘못 표기한 데에서 유래된 왜곡된 표기로, 곧 한약재 ‘백복령’과 고개 이름 ‘백복령’의 음의 동일성에서 호사가들이 착각하고 오해한 땅이름일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원도에 속한 여러 고을의 토산물로서 거의 모두 복령(茯笭)을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백복령이란 토산물이 단지 이곳 석병산 구간의 백복령에만 많이 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백복령’이란 본래의 고개 이름은 동국여지희복승람과 동국여지지 삼척조에 의하면, ‘희복현(希福峴)’ 또는 ‘희복령(希福嶺)’이었다. 이는 글자 그대로 새긴다면 ‘복을 바라는 고개’, ‘복을 희망하는 고개’ 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아마도 이 고개 일원에 부근 지역 사람들이 복을 빌던 산신당 같은 당집이나, 신수(神樹)로 여기는 당목 따위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뒤에 ‘희복현(희복재)’은 발음하기가 좀 불편하여 ‘희’ 자를 희다는 ‘白’ 의 훈(訓)을 빌어 ‘백복령(白福嶺)’ 이라 칭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뒤에 또 ‘白福’ 이 의미상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다시 음은 그대로 두고 복이 많다는 의미로서 ‘百福嶺’이라 개칭된 것으로 추측된다. 곧 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에는 ‘希福峴’이라 일컬은 것으로 보이나, 조선 후기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삼척조에 의하면, 본명으로서 ‘白福嶺’, 그 일명으로서 ‘希福嶺’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 삼척조에 의하면, 희복현의 일명으로서 ‘百福嶺’을 언급하고 있고, 또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조에도 ‘百福嶺’ 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천 과정에 의하면, 백복령은 ‘百福嶺’이라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는 19세기 후엽의 대동여지도에서도 ‘白福嶺’ 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처럼 원 이름을 미루어 살펴볼 수 있는 ‘白福嶺’으로 표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백복령은 또 택리지 팔도총론 강원도조에 의하면, 이를 소리 나는대로 표기하여 ‘白鳳嶺(백봉령)’으로 표기하기도 하고, 또 해동지도에 의하면, ‘百復嶺’, ‘百腹嶺’으로 달리 표기한 예도 살필 수 있다.

한약재 백복령(白茯?)과 연관 시킨 이름은 전혀 관련이 없는 잘못된 이름 유래로 보이며, 이는 1915년도 전후 시기의 일제시대 지도에 ‘福’ 자를 ‘복령 茯’ 자로 잘못 표기한 데에서 유래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오늘날 최신교학세계지도집이나 한국지명총람 등에서 대체로 백복령을 ‘白茯嶺’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의 왜곡된 땅이름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1963에 국립건설연구소에서 편집 제작하여 초판한 오만분의일지형도에는 또 백복령을 ‘百伏嶺’이라 표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이를 참조하여 ‘白伏嶺’을 백복령의 공식적인 한자어 표기로 보기도 하지만(월간山 2006년 5월호), 이 또한 백복령의 본래 의미에서 더 많이 벗어난 것이다. 오늘날 백두대간과 관련한 책자에서 이 고개 이름을 더러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백봉령’이라고도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삽당령의 옛 이름은 삽운령

백복령에서 서북쪽 방면으로 올라가는 백두대간 상에는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서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생계령(生溪嶺)이 있다. 생례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전음(轉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생계령은 또 ‘쌍계령’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아마도 산계령이 경음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는 강릉시 서남쪽 백두대간 상에 ‘삽현(鈒峴)’과 ‘삽운령(揷雲嶺)’이란 두 고개를 표기하고 있는데, 삽운령을 삽현 남동쪽에 있는 것으로 표기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삽당령 고갯마루. 현재 이름의 뜻은 삼지창처럼 생겼다는 것인데, 어디에서 보아도 그런 형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삽당령은 석병산 서쪽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고개로,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고단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다. ‘揷當嶺’이란 표기는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조에 보인다. 이 이름은 ‘揷雲嶺’이란 표기와 유사해 혹시 삽운령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고산자의 대동지지 강릉 산천조에 의하면, 삽운령의 본명을 ‘목계령(木溪嶺)’으로도 언급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강릉시 목계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삽운령은 분명 삽당령으로 보아야 하나, 문제는 이 삽운령 북서쪽 백두대간 상에 삽현을 표기하고 있어서 혼란이 야기된다. 이는 아마도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고단리가 목계리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착오를 일으켜 삽현과 삽운령의 위치를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동지지 강릉 산천조에 의하면, 목계령 일명 삽운령은 강릉부 남쪽 50리 목계리 부근에, 삽현은 강릉부 남쪽 60리 고단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현재 강릉시 서쪽 35번 국도 상에는 북쪽에서 남쪽 정선군 임계 방면으로 가면서 목계리→송현리→고단리→임계 순으로 위치하고 있으므로, 강릉 부근의 백두대간 상에는 삽현 보다는 삽운령이 더 위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해야 맞다. 이에 의하면 ‘揷當嶺’ 은 ‘揷雲嶺’에서 유래된 표기로서, 삽당령의 옛 고개 이름은 ‘삽운령’ 일명 ‘목계령’ 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는 삽당령을 ‘揷唐嶺’으로, 생계령을 ‘雙溪嶺’으로 왜곡 표기하여 그것이 의도적이던 비의도적이던 본래의 땅이름에서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있다. 1963년 국립건설연구소가 제작한 오만분의일 지형도에서도 이 표기를 그대로 답습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揷唐嶺’이란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속설에 더러 이 고개 모습이 삼지창처럼 세 가닥으로 되어 있어서, 삽당령이라 불리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기도 하나, 창과 관련한 고개 이름은 오히려 창 삽(鈒) 자를 쓰고 있는, 생계령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삽현(鈒峴)’이 더 근접하지 않을까 한다.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 방면에서 삽당령으로 올라가 보면 좀 험준하기는 하지만 세 갈래 삼지창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특히 남쪽 송현리·고단리 방면으로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길은 매우 완만하여 그러한 모습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삽당령이란 이름의 의미를 우리말 관점에서 풀어보면 이 고개의 위치가 강릉과 임계 사이, 또는 동쪽 석병산과 서쪽 대화실산 사이에 있다는 의미의 ‘사이’의 옛말 ‘샅’과 산신당과 같은 당집을 뜻하는 ‘당’이 합해져 ‘샅(사이)’ 에 당집이 있는 고개’ 라는 뜻으로 ‘샅당령’이라 일컬은 것이 전음되어 ‘삽당령’이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고개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삽운령(揷雲嶺)’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새기면 ‘구름 속에 꽃혀 있는 고개’, 곧 이 고개가 동해 주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여 자주 구름과 안개 속에 솟아 있다고 하여 그러한 땅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사굴산문 굴산사와 범일국사

석병산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삽운령 북동쪽 줄기 상에 자리하고 있는 큰 산으로서 ‘담정산(淡定山)’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담정산으로 불리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담정산이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도 일찍부터 드러나고 있는 이름이다.

담정산이란 이름은 주봉(상봉)이 자리한 석병산이 기암괴석의 바위산이 병풍을 두른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20세기 무렵부터 석병산으로 불리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실전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대의 주산 이름이 담정산이었다는 근거는 아직도 남아 있다. 석병산 북쪽 줄기 상의 만덕봉 북쪽 골짜기를 지금까지도 담정계곡, 곧 담정골이라고도 하고, 일명 단경골[壇京谷·檀京洞]이라고도 부른다. 담정계곡은 그 맑은 물줄기가 2.5km나 이어지면서 비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현재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산 253번지에는 단경골 휴양지구로서 담정관광농원이 있다.

단경골[壇京洞]이란 이름은 속전(俗傳)에 의하면, 고려 멸망 후 고려조의 유신들이 우왕(禑王)의 사패(祠牌·사당의 신주)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사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이곳 북쪽 골짜기의 동명(洞名)을 ‘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어떤이들은 담정계곡 서쪽에 위치한 칠성산의 옛 이름이 담정산이었던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나, 담정계곡 상류 쪽에 위치한 큰 산봉은 만덕봉이고, 이의 주산은 석병산이다. 강릉 일대 대관령 동쪽 성산면·왕산면 경계 지역에는 제왕산(帝王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는데, 고려 말에 우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피난했던 곳이라 전하는 제왕산성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고려 멸망 후 일부 충신들이 우왕과 인연이 있는 이곳 강릉의 깊은 산골 담정산 단경골에 들어와 은거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석병산의 큰 산줄기가 북으로 뻗어가면서 만덕봉에서 북동쪽 망기봉 방면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와 갈라지면서 계속 북쪽으로 뻗어가 형성한 칠성산 북쪽 기슭,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山門)의 본산 굴산사(?山寺)가 자리했던 곳이다.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9년(847)에 사굴산문을 개산한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가 창건한 대가람으로, 당시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으며, 수도 승려가 200여 명에 달하고, 쌀 씻은 물이 동해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현재 폐사지로 남아 있는 이곳 학산 마을 굴산사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일컬어지는, 보물 제86호로 지정된 두 개의 당간지주가 넓은 벌판에 우뚝 서 있고, 마을 뒷동산 기슭에는 보물 제85호로 지정된, 범일국사의 사리부도라 전하는 8각원당형의 굴산사지 부도가 남아 있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굴산사지 벌판 남쪽 방면을 바라보면 석병산 줄기가 뻗어온 칠성산과 망기봉·망덕봉의 웅장한 산세가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 또는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 둘리어 있다. 이곳의 선문 이름 사굴산은 아마도 부처가 설법했던 기사굴산(耆??山)의 약칭으로서 이른 말이라 생각된다.

학산 마을의 범일국사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다보면 길옆 들판에 돌우물[石泉]이 있고, 부도 뒷동산 산길 옆에는 학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모두 범일국사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적 유적지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땅이름 유래와 전설이 전한다.

옛날 학산 마을의 한 처녀가 아침에 굴산사 석천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떴는데, 그 물 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그 물을 마신 후 태기가 있어 마침내 옥동자를 낳게 되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아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아이를 강보에 싸서 뒷산 바위 밑에 버렸다. 처녀는 아이가 마음에 걸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들이 아이에게 조그맣고 새빨간 구슬 같은 것을 입에 넣어 먹어주며 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아이로 여겨졌으며 마을 사람들도 하늘이 점지하신 아이라 하므로 데려다 키웠다. 뒤에 자라서 서울 경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득도하여 마침내 국사가 되고,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아이를 버렸던 뒷산 바위는 학들이 아이를 보호해준 바위라 하여 학바위라 불리었으며,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梵日)이다.

범일국사는 흥덕왕 6년(831)에 당에 유학하여 선사인 염관 제안(鹽官 齊安)의 불법을 전해 받았으며, 일찍이 범일국사가 제안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제안이 범일을 진실로 동방의 보살이라고 칭송한 바 있는 당대의 고승이었다.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 후 백달산(白達山)에서 계속 정진하며 머물다가 뒤에 이곳 학산 일원에 사굴산문을 개산하고 크게 종풍을 떨쳤다. 국사는 입적 후 후대에 이르기까지 강릉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으며, 그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 곧 대관령의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다.


고루포기산과 능경봉

▲ 능경봉 정상. 강릉부지에는 소우음산, 일명 늦어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우음산은 발왕산을 지칭하기도 한다.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경계지역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은 역대 지리지 등의 고문헌 상에는 한자말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1915년 전후에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국의 산 이름을 거의 모두 한자말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고루포기산에 있어서는 한자말이 아닌 일본어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고산자는 일찍이 동국여지승람 등의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소은백산(所隱栢山)’ 또는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을 고루포기산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동여지도 13쪽에 의하면, 대관령 남서쪽으로 횡계천(橫溪川)을 사이에 두고 소은백이산과 발음봉(鉢音峯·현 발왕산)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지도 상에 수하호 물을 사이에 두고 동북쪽과 서남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 고루포기산 정상. 고산자 김정호는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소은백이산을 이 산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이 숨어 있는 산'으로 풀이해 선자령 북쪽에 있는 대공산성을 가리킨다는 옛 견해도 있다.
고루포기산은 곧 ‘所隱栢伊山’을 우리말 음과 훈(訓)으로 새겨 읽은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겠다. 고산자는 이 한자말 이름의 ‘所’ 자의 훈(訓)을 ‘곧(곳)’으로 보고 ‘所隱栢伊山’을 곧은백이산→고른배기산→골패기산→골포기산(고루포기산)’으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곧 우리말의 음과 훈을 빌려 혼용한 표기로 보고 이를 대동여지도에 구체적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고루포기산이란 이름은 고산자와 같은 견해에서 비롯되어 방언 상에서 오늘날 불리고 있는 것과 같이 전음(轉音)되어 정착된 우리말 이름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산자의 견해와 달리 1788년에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가 편찬한 강릉부지(江陵府誌)를 1871년에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가 재정리하여 편찬한 강릉부지에는 소은백이산을 대관령 북쪽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所隱栢山’ 또는 ‘所隱栢伊山’의 본래 의미는 ‘잣[城]이 숨겨져 있는 산’으로, 곧 대관령 북쪽, 선자령(仙子嶺) 북쪽에서 동으로 뻗은 산정에 보현산성 일명 대공산성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일컫게 된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후인들이 또 이 이름을 음과 훈을 혼용하여 달리 부르면서 ‘소은잣산→손잣산→선잘산→선자산’으로 전음되어 불리다가, 영동지역에서 보현사골을 경유하여 선자령을 넘어 영서 지방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둥그렇고 원만한 모습의 이 산을 영마루(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선자령’으로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의 강릉부지에서는 또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소우음산(所于音山)’을 대관령 남쪽 기슭에 있는 산으로서, 일명 능정산(凌頂山)으로도 불리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소우음산, 일명 능정산이 곧 지금의 대관령 남쪽 능경봉을 지칭한 것임은 음의 유사성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능경봉은 곧 능정봉(능정산)이 전음된 산봉 이름이라 하겠다.

능경봉은 동해 조망이 좋은 곳으로 새해 일출 산행지로도 좋은 산이다. 능경봉에 해 돋는 광경을 능정출일(能政出日)이라 하여 그 아름다운 경관을 횡계팔경(橫溪八景)의 하나로 일컫기도 한다. 때문에 대관령 이남에서 전망이 좋은 가장 높은 산봉을 이루고 있으므로 ‘높은 산정의 산’, ‘높은 산정의 봉우리’란 의미로 불리던 ‘능정산·능정봉’이 전음되어 ‘능경봉’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경봉의 본래 이름은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所于音山(소우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고산자의 대동지지 강릉조에 의하면, 이 산의 속명을 ‘발음봉(鉢音峯)’이라 언급하고 있고, 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지금의 평창군 용평리조트의 주산인 발왕산과 같은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소우음산’은 발음봉(산)→발왕산으로 전음되어 지금의 능경봉과는 다른 이름으로 이미 정착되어 불리고 있다.

그러나 1940년에 편찬된 강원도지(江原道誌) 산천조에 이 산 이름을 ‘소궁음산(所弓音山)’이라 하여 ‘于(우)’ 자를 ‘弓(궁)’ 자로 오기해 놓은 것을 보고 1996년에 강릉문화원에서 발행한 강릉시사(江陵市史) 지명조에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에 근거하여 이 산봉을 대관령 혹은 강릉쪽에서 능경봉 정수리를 올려다보면 그 모양새가 팽팽히 당겨서 파르르 떨리는 활시위 같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땅이름 유래와 의미 따위는 오자(誤字) 지명에 의거한 왜곡된 풀이일 뿐이다. 조선총독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는 또 능정봉의 ‘頂(정)’ 자를 ‘項(항)’ 자로 잘못 표기한 경우도 볼 수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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