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르포
‘대장정의 대미, 최고조의 육체적 피로로 달래고 싶다’
한계령~대청~황철봉~상봉~신선봉~마산봉~진부령 구간
종주 후기
백두대간 개관

한계령이 지닌 매력의 절반은 안개의 몫이다. 아니,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경치가 빼어난 곳을 보면 누구나 갖다붙이는 ‘선경(仙境)’이란 말을 상투성의 나락에서 구해내는 것도 안개다. 안개는, 익숙한 풍광에도 약간의 기시감이나 낯섦뿐 아니라 추상성마저 느끼게 한다. 어쩌면 안개는, 조물주를 대신하여 그 일을 하는지도 모른다. 변덕이 심한 인간들이 조물주의 창조성에 심각한 의문을 품을지도 모르므로.

갓 떠오른 태양은 별보다 더 많을 안개 입자 하나하나에 빛살을 심고 있다. 윤곽만 보여주는 점봉산 동쪽 기슭의 바위 봉우리들이 은근하다. 한계령의 안개에서 몸을 빼내 설악루로 향하는 계단에 몸을 싣는다. 백두대간 대장정의 대미를 향한 첫 걸음이다. 드디어 설악이다.

한계령에서 진부령까지는 실거리 약 39km로 제법 길다. 하지만 우리는 미시령에서 한 번 끊는 구간 종주의 합리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설악산처럼 자연이 연주하는 절정의 선율은 한 호흡에 감상해야 한다. 마지막 산행의 아쉬움을, 최고조의 육체적 피로로 달래고 싶기도 했다.

▲ 하늘로 솟구치는 기암 사이로 온갖 생명을 품고 있는 설악산. 하나하나가 다 보석 같다.

‘설악을 알면 금강산도 허명’


역시 설악이다. 시작부터 된비알이다. 발바닥은 금방 골산의 고집스러움을 알아챈다. 살짝 언 땅을 밟을 때의 사각대는 소리도 상쾌하다. 계속 곧추서던 산허리는 1시간쯤 지나서야 살짝 낮아진다. 호흡을 가다듬는다. 몸과 산의 리듬이 공명하기 시작한다. 다시 등성이는 서북주릉 갈림길까지 허리를 세운다. 서북주릉을 200m쯤 앞둔 샘터 주위는 지난 여름 큰물 때 난 사태로 옛 모습을 잃어 버렸다. 앞으로 이곳의 물을 믿었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서북능선에서 끝청으로 향하는 취재팀.
서북주릉 갈림길에 올라서자 비로소 완전하게 설악의 품에 안긴 느낌이다. 이곳에서부터 끝청까지의 선율은 진양조 혹은 안단테. 용아와 공룡 같은 암릉과 기기묘묘한 바위봉우리를 둘러친 아득히 깊은 계곡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걷는다. 그렇다고 방심을 할 정도는 아니다. 오르내림의 폭이 크지 않을 뿐 녹록치 않은 바위들이 다리의 근육을 끝없이 긴장하게 한다.

여기서 잠시 설악산에 대한 개관이 필요할 것 같다. 우선 이름의 내력부터 살펴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르면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이 이듬해 여름에 이르러서야 녹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기록은 양양도호부편에 나오는 것으로 '부 서북쪽 50리에 있는 (양양도호부의) 진산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는 정도로 간단히 적혀 있다.

이에 비해 인제군편에서는 ‘한계산’이라 칭하고 그 형상이나 특징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한 대목을 보면 이렇다. '봉우리가 절벽을 이루었는데 높이가 천 길이나 되어서 기괴하기가 형언할 수 없고, 새도 날아서 지나가지 못하며, 행인들은 절벽이 떨어져 누르지나 않을까 걱정할 지경'이라며 '그 좋은 경치는 영서 지방의 으뜸'이라고 적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내설악이라 부르는 지역을 인제군에서는 한계산이라 불렀고, 외설악은 양양에서 설악이라 했다고 이해할 수 있겠다.

산경표에는 ‘설악’으로 표기한 다음 ‘일명 한계산’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한편, 대동여지도를 보면 봉정암 바로 옆 봉우리에 ‘한계산’, 신흥사 바로 위 봉우리에 ‘설악산’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를 오늘날 지도에 대입시켜 보면, 한계산은 대청봉이고 설악산은 황철봉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옛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정이 가능하다. 오늘날의 내설악 일대를 인제군에서 한계산이라 하고 대청봉을 주봉으로 봤고, 외설악을 양양도호부에서는 설악산이라 하고 황철봉을 주봉으로 여긴 듯하다. 택리지도 ‘설악’과 ‘한계산’을 각기 독립된 산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금강산에 대한 설명에 이어 두 산을 싸잡아 '남쪽은 설악과 한계인데 역시 돌산·돌샘이며 우뚝하게 뛰어났고 깊숙하게 싸늘하다. 겹쳐진 멧부리와 높은 숲이 하늘과 해를 가렸다'고 한 다음, 한계산에 대해서만 '만 길이나 되는 큰 폭포가 있다. 옛날 임진년에 당나라 장수가 보고서 여산폭포보다 훌륭하다 하였다'고 적고 있다.

옛날에도 설악산은 빼어난 산으로 인식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그러나 금강산에 비해서는 상당히 평가 절하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 까닭은, 말 타고 ‘유산(游山)’을 즐긴 양반들의 행태에서 비롯된 듯하다. 이를테면 양반들에게 설악산은 ‘신포도’였던 셈이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보면 육당 최남선이 남긴 ‘설악기행’은 대단히 흥미롭다. 한 대목을 보자.

'금강산은 너무 드러나서 마치 길가에서 술 파는 색시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스러움이 있음에 견주어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골짜기 속에 있으되 고운 모습으로 물속의 고기를 놀라게 하는 듯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 풍경의 지극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이라면 금강산이 아니라 설악산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할 것이다. 설악산은 그 경치를 낱낱이 헤어보면 그 빼어남이 결코 그 아래에 둘 것이 아니지만 원체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려지기는 금강산에 견주면 몇 천 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하니, 이는 아는 이가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이다.'

설악산을 사랑하는 이라면 누구나 최남선의 안목에 아주 통쾌해 할 것 같다.

배낭만 아니라면 산길 걷기 최고의 즐거움

▲ 대청봉 오름길. 기묘한 암봉으로 이루어진 설악산 전체 분위기와 달리 원만한 풍광을 보여 주는 곳이다.
끝청까지 부드러운 흐름을 보이던 산줄기는 중청에서 불끈 솟았다가 대청을 오르기 전 부드럽게 허리를 낮춘다. 소청을 왼쪽에 두고 중청 대피소로 흐르는 능선의 결은 설악산의 모든 능선 가운데서 가장 부드러울 것이다. 대청봉까지 가장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이 한계령 기점이기는 하지만, 5~6 시간은 필요하므로, 배고프고 지친 사람들에게 그 길은 비단결처럼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중청봉에서 바라본 대청봉의 모습은 대단히 원만하다. 가히 개성 강하고 고집 센 수많은 봉우리를 거두어 안을 만한 군자의 풍모다. 군자의 그늘에서 먹는 점심은 비록 라면이지만 견줄 데 없는 성찬이다.

대청봉에서 희운각으로 내려서는 길은 대단히 가파르다. 통상적인 대간 종주길은 대청봉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와 죽음의 계곡을 오른쪽에 끼고 희운각을 향한다. 하지만 이 길은 통행이 금지된 곳이다. 등산로도 많이 패여 있다. 가급적이면 빈 몸으로 대청봉을 올랐다가 내려와서 소청봉을 경유하여 희운각으로 가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소청봉~희운각 길로 가면 대간 종주가 아니라는 발상은 대단히 유치하고 기계적이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산과 산들이 연이어진 줄기 전체를 말한다. 기슭으로 가든 등성마루로 가든 대간종주로서 의미가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종주산행의 특성 상 능선을 밟는 것이 가장 쉽고 자연스러운 일일 뿐이다. 소위 마루금만 밟고 가는 것은 99.9% 불가능하다. 말 그대로 그렇게 하려면 공룡릉 같은 경우는 고난도의 암벽등반을 병행해야 한다.

희운각 앞 가야동 계곡의 그 맑은 물살은 여전하다. 하지만 지난 큰물 때 흘러내린 바위들 때문에 계곡의 모습은 예전 같지 않다. 특히 소청봉쪽 등산로 일대는 상처가 깊다. 엄밀한 의미에서, 인간의 눈으로 그것을 상처라고 하는 것은 옳은 표현이 아닐 것이다. 우리가 보는 어떤 빼어난 경치도 수억 년에 걸쳐 그러한 자연현상이 반복된 결과일 것이므로. 다만, 최근의 집중 호우는 인간의 무분별한 자원남용과 환경파괴의 결과이므로 인간의 잘못이 크다 하겠다.

▲ 공룡의 등을 타고 넘는 취재팀.
희운각에서 신선대까지는 1시간 정도 가파른 오르막이 계속된다. 하지만 신선대가 안겨주는 조망의 즐거움을 생각하면 기꺼이 감수할 만하다. 말 그대로 신선대는, 신선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을 최고의 풍광을 펼쳐 보인다. 마침 해가 이울면서 산빛은 푸르스름해진다. 서서히 하늘금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산줄기 사이의 계곡에는 안개가 차오른다. 겹쳐진 산줄기들은 제각기 다른 존재감으로 산의 깊이를 더한다. 특히 용아릉은 절정의 자태로 내 마음 속에 문신처럼 새겨진다.

신선대에서 마등령까지, 이른바 공룡릉은 이번 구간의 클라이맥스라 부를 만하다. 풍광으로도 그렇고, 끝없이 오르내려야 하는 고통 체감지수로도 그렇다. 하지만 지루하지는 않다. 배낭 무게만 아니면 산길을 걷는 최고의 즐거움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산의 선율은 자진모리나 알레그로.

산이 어둠 속으로 다 가라앉기도 전에 열사흘 상현달이 화채능선 위로 떠오른다. 간월(看月)을 즐기는 사람들은 흔히 열나흘 달을 최고로 친다. 밝기로 치면 보름달에 크게 뒤지지 않는데, 약간 빈 듯한 모습이 더 좋다는 얘기겠다. 안분(安分)이 되기도 할 것이다.

헤드램프를 켜지 않고도 걷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오히려 내 몸뚱이가 만드는 그림자가 걷기를 방해할 정도다. 뜻하지 않은 달빛 산행의 복을 누리며 1275m봉 아래 샘터에 배낭을 부린다. 약간의 물기를 머금은 바람이 ‘밤새 안녕’을 묻는다. 예상을 넘어 안녕하다. 사실 한겨울 추위를 예상했으나 의외로 바람결이 맵지 않다.

최대한 느린 걸음으로 1275m봉을 오른다. 멀리서 보면 토끼 귀처럼 뾰족하게 솟은 두 개의 바위가 마주한 1275m봉은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아주 고마운 곳이다. 물과 잠자리를 제공해 줄 뿐만 아니라 랜드마크의 구실까지 해 주기 때문에 운행속도 조절의 기준이 되기도 한다. 단체 산행객들이 한꺼번에 쉴 수 있을 정도로 공간이 넉넉하다. 가까운 시일 내 이름이 붙여져서 ‘1275m봉’ 식으로 삭막하게 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1275m봉에서 마등령까지는 가파른 암반과 협곡 같은 바위벼랑 사이를 계속 오르내린다. 걷는 맛과 눈 맛이 좋아서 지루한 감은 없다. 특히 마등령을 1.1Km 앞둔 조망처는 공룡릉 동쪽 기슭의 바위 사이로 울산암의 풍광을 절대미감으로 부각시킨다. 저항령 너머 황철봉 기슭은 화채릉 같은 암봉군과 전혀 다른 울창한 숲으로 설악의 풍광에 깊이를 더해 준다.

백두대간 상 너덜의 대표적인 구간

마등령은 휴게소 같은 곳이다. 벤치도 마련돼 있고 동서쪽 기슭에 샘도 있다. 신흥사나 백담사로 내려서는 기점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다람쥐들이 사람들과 간식을 나눠먹는 곳인데 이번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 온 산에 도토리가 천지여서 그런 것 같다.
마등령에서 성큼 키를 높이면 1326.7m봉이다. 봉우리를 내려서면 너덜이다. 너덜은 너덜겅의 준말로 돌로 덮인 산기슭을 말한다. 작은 상자 크기에서 냉장고만한 바위들로만 뒤덮인 너덜은 백두대간에서는 설악산 일대가 대표적이다. 눈이 쌓인 계절에는 바위틈을 몰라서 스틱에 의존하지 않고는 걷기 어렵다. 특히 황철봉(1,318.8m)을 앞둔 저항령(1100m) 일대는 연이이서 너덜이 나타난다. 그렇지만 마치 바위로 된 사막을 연상시킬 정도로 장관을 이루는 너덜은 황철봉 아래다.

▲ 마등을 타고 넘어 황철봉으로 향하는 취재팀.

지리학에서는 너덜을 암괴원(岩塊原)이라 하고, 영어로는 block field라 일컫는 모양이다. 동글동글하거나 제멋대로 부서진 돌밭이 아니라 제법 크고 모난 돌덩이가 어느 정도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곳을 말한다고 보면 되겠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너덜과 지리학에서 말하는 너덜 즉 암괴원은 엄밀한 의미에서 차이가 있다고 하겠다. 어쨌든 황철봉 일대의 너덜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풍경으로 45억 년 지구 역사의 한 페이지를 보여준다.

1275m봉에서 미시령까지는 실거리 약 11km인데 7시간 안팎의 시간이 소요된다. 너덜이 체력을 심각하게 떨어뜨리지는 않지만 시간은 상당이 삼킨다.

너덜 지대를 벗어나 울산암 갈림길 전부터 미시령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미시령 직전의 억새 능선은 강아지마냥 뒹굴고 싶을 정도로 시원하다. 열나흘 달빛을 등에 지고 그 길을 내려가노라니 월간山지 선배들과 에코로바 직원 분들이 마중을 나온다.

대간 종주 이후 최초로 누군가가 지어놓은 밥을 먹는 호사를 누린 다음 마지막 구간 종주 기념 케이크를 자른다. 촛불을 켜 보지만 불꽃은 1초도 타오르지 못한다. 미시령 큰 바람이 대신 꺼 준 셈이다. 대간 종주 기념으로는 제격이다.

마지막 날. 천둥을 동반한 비바람이 거세다. 비를 맞고서라도 마지막 날인 만큼 운행을 강행하기로 마음먹었지만, 정도가 좀 세다. 하지만 하늘은 우리 편인가 보다. 오전 8시부터 비가 그치고 구름이 걷히기 시작한다. 무거운 짐을 다 들어내고 간식과 물만으로 하루산행 채비를 갖춘 다음 마음도 가볍게 상봉을 향하는 능선에 몸을 세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가벼운 마음에 몸까지 가볍게 한 탓인가. 세상 모든 바람이 작당이라도 하고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다. 미시령을 넘을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바람을 받아 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황동규 시인은 미시령의 바람을 이렇게 노래했다.

‘풍경 전체가 바람 속에 / 바람이 되어 흔들리고 / 설악산이 흔들리고 / 내 등뼈가 흔들리고 / 나는 나를 놓칠까봐 / 나를 품에 안고 마냥 허덕였다’(‘미시령 큰 바람’ 부분)

▲ 대간령을 지나 암봉에서 진부령 쪽으로 바라본 풍광. 수묵화 같은 첩첩 산줄기.

나는 정말 나를 놓칠까 봐 심각하게 허덕였다. 존재론적 허덕임과는 100% 무관하다. 만약 그 순간 마침 곁에 철기둥이 있어서 붙잡지 못했다면, 흔들릴 수조차 없었을지도 모른다. 난생 처음 온몸으로 받아본 ‘큰 바람’이다. 한참을 철기둥에 의지해 있다가 한 순간 바람이 수굿해지는 틈을 이용하여 비칠비칠 기어가듯 바람의 손아귀를 벗어나 상봉 기슭으로 다가간다.

상봉 아래 샘터는 여전하다. 어느 여름날 이곳에서 물봉선, 동자꽃과 인사를 나눈 일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깊은 잠 속에 빠져 있다. 상봉 암릉 지대를 비껴 돌아 살짝 내려서자 화암재다. 신선봉(12,04m)을 오른쪽에 두고 곧장 대간령으로 향한다. 숲속으로 수굿한 내리막이 길게 이어진다.

대간령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암봉을 오른다. 집채만한 바위들이 얼기설기 한 암봉에서부터는 고성군 토성면 일대와 동해가 눈에 들어온다. 일행들은 제각각의 속도로 마산을 향한다. 암봉에서 마산까지는 그리 힘든 길이 아니지만 앞에 제법 높은 봉우리를 앞두고 있어서 2시간은 족히 시간을 삼킨다.

마산봉(1,051.9m). 설악산 국립공원권역을 벗어난 마지막 봉우리다. 길게 휴식을 취한 다음, 알파인 스키어처럼 잰 걸음으로 알프스 스키장으로 내려선다. 사실상 종주의 끝이다. 머리가 아니라 마음, 아니 마음보다는 몸으로 이 땅과 나눈 긴 대화에, 마침표가 아닌 쉼표를 찍는다. 당분간 침묵하고 싶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이 땅의 지문이 내 몸에 DNA로 기억되기를 희망했습니다. 어떤 장소에 대한 머릿속의 기억은 휘발성이 강합니다. 하지만 오감을 통해 각인된 기억은 여간해선 잊히지 않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면서 ‘몸’이야말로 가장 믿을 만한 인지수단이자 표현수단이란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본질적으로 허망한 육신에 대한 옹호가 아닙니다. 목숨 붙여 살아가는 동안에는 어느 순간에도 정직한 반응을 보이는 몸의 건강성이 자연의 본성에 가까이 다가가기를 희망했다는 얘깁니다. 심신 중 어느 한쪽의 우열을 따지는 것도 이분법적 발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 우리에게 ‘산수간을 노니는’ 풍류의 전통이 남아있다면 산행 문화가 바로 그것일 겁이다. 우리 백두대간 취재팀은 가장 느긋하게 산을 즐기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몸이 허락하는 만큼이었습니다.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백두대간과 보낸 것 같습니다. 워낙 빨리 변하는 세상이라 요즘은 2년 정도면 세대 차이가 난다고 합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함께한 소중한 인연들에 감사드립니다. 처음 종주를 함께 시작한 구인모 선생님, 사진가 손재식 선생님, 심산 작가를 비롯하여 이원영씨, 이동민 선배 등 힘이 되어준 분들이 너무 많습니다.

특히 멀리 진주에서 여러 번 참가한 조점선, 정인숙, 왕현수, 류육현, 강형복, 신동국씨 등 진서산악회 회원 여러분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물심양면으로 후원을 아끼지 않은 에코로바의 조병근 사장님과 정우동 이사님의 후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한 김종현형, 김석우 감독, 그리고 사진을 찍느라 고생을 한 허재성 기자에게도 감사를 드립니다.

끝으로, 때론 거친 숨결까지 날것으로 보낸 글, 너그럽게 읽어 주신 독자 여러분, 고맙습니다.

종주 팀의 ‘한 마디’

김종현-“네 번째 종주였지만, 산은 늘 다른 얼굴로 나를 유혹한다.”
김석우-“백두대간 종주가 아니었다면 결코 만나지 못했을 이름 없는 산들을 만나면서 인연의 소중함을 무겁게 느꼈다.”
허재성-“카메라 없이, 빈손으로 산으로 가고 싶다.”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이 땅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 그것이 백두대간이다. 비유컨대, 뿌리를 백두산 ‘하늘연못’에 두고 지리산을 꽃피운 한 그루 커다란 나무가 바로 백두대간인 것이다. 이러한 국토관의 연원은 신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옥룡기(玉龍記)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의 뿌리는 물이요 줄기는 나무다.'

고려사의 기록이다. 여기서 옥룡기라 함은 신라 말 후삼국 격변기의 선사이자 한국 풍수의 비조로 불리는 도선(827-898) 스님의 비결서를 이른다. 뿌리인 물은 백두산 천지, 줄기인 나무는 백두대간을 일컫는다. 이러한 지리인식은 택리지의 저자인 이중환(1690-1752)에 의해 체계화되고, 후대로 계승되어 신경준(1712-1781)의 산수고,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과 같은 지리서를 낳고, 정상기(1678-1752)의 동국지도를 이어 김정호(생몰 미상·1800-1864 사이로 추정)의 대동여지도로 꽃핀다. 조선 후기 실학의 빛나는 성취 가운데 하나가 백두대간의 발견인 것이다.

백두대간의 길이는 1,600Km로 추정한다. 그 중 남한 구간은 약 640km로 보는데, 포항 셀파산악회에서는 실측 거리가 734.65km라고 밝히고 있다.

백두대간이 이 땅의 줄기라면 당연히 가지가 있을 터, 그 가지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이다. 그리고 정맥들 사이에는 반드시 강이 흐른다. 그래서 한강의 북쪽 산줄기는 한북정맥, 한강의 남쪽 산줄기는 한남정맥, 낙동강의 동쪽 산줄기는 낙동정맥(흔히 태백산맥이라 부르는 산줄기)이라 칭한다. 한강 수계니 낙동강 수계니 하는 지역 구분이 산줄기로 울타리 쳐진 강의 유역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백두대간의 지형은 지금으로부터 약 2,300만 년 전에서 1,500만 년 사이에 태평양 해저 지각판과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이 충돌, 동해의 해저 지각이 융기하며 형성된 것이라 한다. 이때 서해쪽은 동해에 비해 적게 융기함으로써 비대칭적인 동고서저의 경동(傾東)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이다.

이렇듯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의 역사와 문화, 경제, 예술, 종교를 이해하는 일이자 우리 삶의 실체를 성찰하는 일이다. 특히 생태축으로서 백두대간의 건강은 우리네 삶의 건강과 불가분의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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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문화
‘천 봉우리의 흰 눈빛은 해일에 반사되고’
설악산의 미학과 관광

어떤 외국인이 우리더러 한국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많은 사람들은 무엇을 말할까? 아마도 우리 산천의 미를 첫번째로 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우리 국토를 일컬어 삼천리에 비단을 수놓은 듯 하다고 하여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는 관용어가 있고, 애국가에서도 화려강산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산천은 맑고 고우며 아름답다.

이러한 자연환경과 거기에 순응하고 조화하는 정착농경의 생활양식을 배경으로 친자연적인 전통문화가 형성되었고, 따라서 한국의 미학 속에는 자연미학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자연미학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자연적인 요소에서 산이 차지하는 비중과 중요성은 필수적이며 크다.

일반적으로 서양의 미학과 동양의 미학은 각각 문화와 자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대비될 수 있다. 같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여도 서양의 미학은 자연이 인위적으로 재구성되어 문화적으로 변용된 미학적 내용이 위주인 반면, 동양의 미학은 자연 그 자체의 형상과 의미가 미학의 주요 내용이자 대상이 된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세 나라인 한국, 중국, 일본도 미적 감각과 태도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의 스펙트럼처럼 약간의 편차가 드러난다. 동아시아의 미학은 거시적으로 자연미학이 위주가 되어 있지만, 미시적으로 보면 중국과 일본에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꾸거나 모사하여 조성하는 심미적 태도도 가지고 있는 반면, 한국에는 자연 그대로를 수용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고자 하는 심미적 태도를 나타내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의 전통적 미학은 가장 순수하고 근본적인 자연미학에 치중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청초호에서 바라본 설악산. 경관 좋은 산이 바다 가까이에 솟아 심미적 탐승과 관광을 겸할 수 있는 좋은 대상이 되어준다.

심미적 탐승이 주를 이룬 선조들의 탐방


이렇게 나라마다 자연을 보는 시선, 다시 말해 자연관(自然觀)이 다르고, 자연을 대하고 감상하는 심미적 태도가 다르기 때문에 산에 대한 관점과 태도에서도 당연히 차이가 난다. 서양에서 산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학적 대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시기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는데, 과거 서양 사람들은 산에 대하여 장애물 혹은 위험요소가 상존하는 지형 등 그리 곱지 않은 시선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오랫동안 산을 신앙적으로 숭배하고, 산악 경관의 아름다움을 심미적으로 찬탄해 마지않았으며, 심지어 이상향으로 인식하여 산자락에서 무릉도원과 같은 낙원을 꿈꾸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산악관은 관광의 행태에 있어서도 차이를 드러낸다.

우리의 옛 선조들은 대개가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자 하는 의도로 관광을 하였다. 산천경개의 풍광은 관광을 이끄는 필요충분조건이며, 옛 사람들이 했던 일종의 관광의 결과물로서 기록되었던 산행기(山行記, 遊山錄)와 시가(詩歌)들을 읽어보면 대부분 산의 심미적인 탐승이라고 할 만할 정도로, 산천의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고 느끼면서 자기 자신과 당시의 사회문화를 자연경관에 은유하고 투영하는 내용으로 일관되어 있다.

이렇게 보자면 한국의 전통적 관광문화의 특징은 산을 대상으로 했다고 요약할 수 있다. 당연하지만 설악산에도 역사적으로 홍유손, 이수광, 이세필 등 수많은 문인과 탐승객들이 방문하여 문학작품을 남기고 있다. 그중에 조선 중기의 학자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은 설악산을 이렇게 읊었다.

▲ 낙산사 의상대. 설악산은 동해 바닷가에 인접해 있어 산과 바다를 두루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다.
설악산 높이가 만 길이나 되어
봉래산과 영주까지 그 기운이 이어져 있네
천 봉우리의 흰 눈 빛은 해일에 반사되고
저 멀리 옥경에 상제들이 모였구나
(雪嶽之山高萬丈 / 懸空積氣連蓬瀛 /
千峰映雪海日晴 / 群帝集玉京)

누구든 산이 그리울 때가 있다. 삶이 고달프고 어깨가 무거워질 때, 무엇에도 갈피를 잡지 못하고 어디라도 떠나고 싶을 때, 많은 사람들은 동해의 푸른 바다를 떠올리고, 그 바다를 바라보며 장쾌한 형용으로 하늘을 버티고 있는 설악산에 마음이 끌린다.

설악산은 백두대간의 여러 산 중에서도 겉으로는 외설악의 수려한 아름다움이 빛나는 한편, 속으로는 내설악의 깊고 그윽한 계곡도 겸비하고 있으며, 망망대해의 동해바다에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목전이기도 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사시사철 찾는 곳이다.

특히 설악의 가을 단풍은 그 빛깔이 짙붉고 맑기로 유명한데, 이는 설악산의 청량한 기후와 식생의 생육 조건 및 토양조건에 기인한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관광(觀光)이란 한자말을 살펴보면 ‘빛(풍광)을 본다’는 뜻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관광이라는 말의 어원은 중국의 고전 역경(易經) 속에 ‘나라(國)의 빛(光)을 본다(觀)’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풍경과 풍속, 그리고 문물 등을 본다는 뜻이다.

우리는 빛과 풍광을 새로이 접하고, 경관과 장소의 아름다움을 감상함으로써 생명의 충만함과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관광의 실질적 의미는 얕게는 여가시간에 한가롭게 구경하는 정도에서부터, 자연과 문화의 일부로서 나의 온전성을 거울처럼 비춰보고 확인하는 실존적 체험의 심도 깊은 장이기도 하다. 특히 뛰어난 경관을 보이는 장소는 그 장소에 있는 사람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는 힘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을 장소의 혼(魂·genius loci)이라고 일컫는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설악산은 그 자태가 늠름하고 대장부의 기개를 한껏 드러내는 기상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울산바위의 장엄한 모습이 대표하듯이 골산(骨山)으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수려한 바위능선을 갖추고 있다. 특히 겨울에 온 몸을 덮고 있는 흰 눈은 깊은 인상을 주는데, 보는 이의 마음에 고결하고 성스러운 느낌으로 투영된다.

그래서 설악이라는 이름도 신증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말하듯이, ‘양양도호부의 진산(鎭山)으로 매우 높고 가파르다. 8월에 눈이 내리기 시작하여 여름이 되어야 녹는 까닭으로 이렇게 이름 지었다’고 하였다.

설악산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또 다른 장소는 설악의 동쪽에 거울처럼 말고 고요하게 펼쳐져 있는 영랑호와 청초호이다. 호수에 비치고 어리는 흰 설악의 자태는 형언할 수 없는 감상을 불러일으키는데, 마치 설악의 마음이 물가에 드리워 내 마음자락에 비치는 듯한 느낌마저 준다.

▲ 울산바위의 위용. 설악산이 골산(骨山)임을 쉽게 눈으로 확인시켜주는 상징적인 존재다.

한겨레의 역사와 문화 잉태한 태반

이제 백두대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재를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그동안 거쳐왔던 정겨운 산들을 다시 불러본다.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대덕산, 황악산, 속리산, 화령산, 황장산, 소백산, 선달산, 태백산, 덕항산, 두타산, 석병산, 오대산, 설악산에 이르는 수많은 산들이여. 그리고 다시금 백두대간의 화두를 되짚어 본다. ‘우리에게 백두대간은 무엇인가?’

우리는 흔히 백두대간이 국토의 중추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우리 생활과 문화와 심지어 의식에서조차 백두대간의 비중과 영향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백두대간은 겨레 정신의 중추이자, 전통문화라는 그릇을 구워낸 큰 가마였으며, 삶과 죽음의 순환고리를 이루는 토대이며, 국토 생태환경의 대간이었다. 요컨대 백두대간은 우리 겨레의 역사와 문화를 잉태한 태반이자 탯줄인 것이다.

우리네 삶의 터전은 백두대간을 제외하고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백두대간에서 시작하여 정간과 정맥의 통로를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취락의 입지와 공간구조를 살펴볼 때 나라의 수도나 지방도시, 그리고 마을 등 규모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삶의 터전은 백두대간에서 뻗은 정맥의 둥지에 입지하였다.

백두대간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백두대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밭을 일구며 살다가 다시 백두대간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이 바로 산을 둘러싼 겨레의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백두대간은 역사와 문화의 궤적에서 등줄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백두대간의 역사와 문화는 다양한 요소들의 총체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백두대간에 대한 학제적 연구는 ‘백두대간학’이라는 새로운 명칭으로 불러도 마땅하며, 백두대간이라는 큰 주제에는 지리학, 역사학, 사회학, 생태학, 미학, 민속학, 국문학 등의 수많은 세부 분과로 연구될 수 있을 것이다.

▲ 미시령.

그 중에서 백두대간의 문화사는 백두대간의 산지에 태어난 사람들이 산을 삶터로 삼아 경작을 하고 마을을 형성하여 살다가 죽어 일생을 마치는 전 과정의 생활사가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룬다. 생활사에는 경제사, 사회사, 풍속사, 주거사, 신앙사 등이 모두 포괄되어 복합적인 체계를 구성한다.

그리고 백두대간의 문화요소에 대한 체계적 분류와 정리도 시급하다. 무형적 문화요소로는 백두대간의 자연 미학, 대관령 성황제와 같은 각종 놀이와 축제, 민간신앙과 백두대간 권역에서 생겨난 설화, 전설, 민담 등이 있을 수 있다.

한편, 유형적 문화요소는 백두대간 영역에서 벌어지는 각종 산림생활사와 관련된 취락경관 및 가옥, 산간의 생활민속 문화, 산간의 풍토성을 배경으로 형성된 각종 민간신앙 시설 및 사찰을 대표로 하는 종교시설 등을 거론할 수 있다. 또한 교통시설(驛 등)과 숙박시설(院) 등을 유형적 역사경관으로 들 수 있겠고, 백두대간이 지니는 지형상의 군사적이고 전략적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각 요충지에 포진하고 있는 산성, 봉수 등과 같은 각종 군사시설 역시 중요한 유형적 문화요소라고 할 수 있겠다.

백두대간의 문화사 연재는 설악산 언저리의 남녘땅 북쪽 끝에서 발걸음을 멈춘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북한쪽의 백두대간으로는 가지 못하고 중도에 머물러 북녘 땅을 바라볼 수밖에 없는 한스러움을 어찌하랴? 어서 통일이 되어 우리 산천을 보듬고 답사하며 쓰는 백두대간의 문화사 그 북한편을 완성하기를 소망하며 글을 맺는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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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식생
지금도 북방계 미기록종 발견돼
장백제비꽃·큰잎쓴풀 등 새로 발견되고, 법정보호종 10종 생육

한반도의 가장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 중앙부에 자리 잡은 설악산(1,708m)은 남한에서는 한라산, 지리산에 이어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강원도 속초시, 인제군, 양양군, 고성군 등 4개 시군에 걸쳐 있다. 경관이 빼어나고 동물상과 식물상이 풍부해 1965년 천연기념물 제175호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된 이래, 1970년에는 제5호 국립공원, 1982년에는 유네스코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의 생물권보존지구로 지정되기도 했다.

해발 1,708m의 주봉 대청봉을 비롯해 백두대간을 이루며 미시령에서 대청봉까지 뻗어있는 북주릉, 대청봉에서 귀청봉(1,578m)을 거쳐 안산(1,430m)을 잇는 서북릉, 권금성과 화채봉(1320m)이 있는 화채릉, 가리봉(1,519m)을 품은 서릉 등이 설악산의 뼈대 구실을 하며 연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천불동계곡, 백담계곡, 흑선동계곡, 십이선녀탕계곡 등 깊고 긴 계곡들을 빚어내고 있다.

▲ 가는다리장구채. 북부지방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설악산에만 자생하는 희귀식물이다. 대청봉, 중청봉 등 설악산 높은 봉우리의 바위 겉에 붙어 자라서 훼손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꽃은 7월 중순부터 9월 하순까지 핀다.

대간을 경계로 내외 설악 식물상 약간 달라


주봉인 대청봉을 중심으로 인제쪽을 내설악, 동해쪽을 외설악, 그리고 오색과 양양쪽을 남설악으로 편의상 구분하는데, 백두대간이 내외 설악을 가르고 있다. 외설악과 내설악은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들도 조금씩 다르다.

식물을 연구하는 입장에서 설악산만큼 내게 많은 것을 깨우치게 한 산도 없는데, 1996년에는 한 해 동안 10여 차례 이상 설악산 골골을 누비며 식물을 조사한 적이 있다. 그 해 6월, 공룡능선을 거쳐 중청산장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에 뜻밖의 식물을 만났다.

아침 햇살을 받은 천불동계곡의 모습을 사진에 담고 있을 때였는데, 바로 앞의 숲 바닥에서 무리를 지어 꽃을 피운 작은 풀들이 시선을 끌었다. 백합과의 자주솜대였다. 꽃이 필 때는 색깔이 연한 노란 색이지만, 나중에 짙은 자주색으로 변하는 특이한 습성을 가진 식물로, 언뜻 보면 전국에 흔하게 자라는 풀솜대와 비슷하게 생겨서 처음에는 두 식물을 구분하기 쉽지 않다.

당시까지는 지리산에만 생육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곳에서 처음 이 식물을 만나 생김새를 관찰한 이후에 덕유산, 소백산, 방태산, 태백산, 오대산 등지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한라송이풀도 그 해에 발견했다. 그동안 설악산 식물목록에 없었던 이 식물을 서북능선에서 발견하고는 백두산에 자라는 구름송이풀이라 굳게 믿었는데, 몇 년 후 한라산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한라송이풀을 가야산에서 직접 확인한 이후에 설악산의 이 식물을 다시 조사하게 되었고, 설악산에 자라는 이 식물도 한라송이풀이라는 것을 밝힐 수 있었다.

그 해 9월에는 또 하나의 남한 미기록 식물을 발견했다. 큰잎쓴풀이라는 용담과의 두해살이풀이었는데, 함경북도의 무산, 백두산, 포태산, 개마고원 등지에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북방계 식물로서, 그때까지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진 식물이었다. 설악산 능선을 하루 종일 혼자서 조사하던 중에 이 식물을 발견했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컸던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에 촬영한 사진이 도감에 실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공개되기도 했다. 큰잎쓴풀은 최근에 강원도의 다른 두 곳에서도 발견되었는데, 한 곳은 백두대간 주능선이고, 다른 한 곳은 낙동정맥 능선이다.


1.기생꽃
지리산, 가야산, 태백산, 대암산 등의 해발 1,400m 이상 지역에 드물게 자라는 북방계 식물로 환경부 지정 멸종위기 야생식물 II급이다.
2.난장이붓꽃 설악산 이북의 높은 산 능선 바위지대와 풀밭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월 중순부터 7월 초순까지 볼 수 있다.
3.눈잣나무 대청봉에 자라는 고산성 침엽수로 설악산이 분포의 남방한계선이다. 고산에서는 땅 위를 기지만, 평지에 심으면 곧추 자란다.
4.닻꽃 남한에서는 한라산과 화악산에서만 자라는 북방계 식물로, 설악산에서는 필자가 1999년에 처음 발견했다. 꽃은 6~8월에 핀다.

북방계 큰잎쓴풀 1996년에 처음 발견


1995년에는 자주솜대와 큰잎쓴풀 외에도 월귤을 발견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름도 비슷하고 소속되는 과도 진달래과로서 같은 홍월귤이라는 북방계 식물은 대청봉 일대에 몇몇 개체가 자라는 게 알려져 있었지만, 월귤은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 식물을 포함한 산앵도나무속 식물을 석사 논문 주제로 잡았던 필자지만, 남한에서 채집된 표본은 구경조차 못하였고, 북한에서 채집된 몇몇 표본만을 가지고 석사학위를 마쳤던 경험이 있는 터여서 기쁨은 더할 나위가 없었다.

속초에 살고 있는 산악사진가이자 자연다큐멘터리 촬영감독 성동규 선생이 설악산에 변산바람꽃이 자란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너도바람꽃을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갈 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당시는 변산바람꽃이 세상에 발표된 지 얼마 되지 않을 때여서 이 꽃이 자라는 곳으로서 변산반도 외에 마이산, 돌산도, 제주도 정도만이 알려져 있었다.

지금처럼 동해안을 따라서 경주까지 자란다는 사실도 모를 때였다. 그러니 제주도와 서남부 지방에만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에 뚝 떨어져서 살고 있으리라고는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댕댕이나무
한라산과 강원도 이북의 고산에 자라는 떨기나무로, 설악산에서는 대청봉, 귀떼기청봉 등 높은 봉우리에서 무리를 지어 자란다.
2.만주송이풀 설악산까지만 내려와 자라는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꽃은 5월부터 7월까지 피며, 설악산 능선의 몇몇 곳에서만 발견된다.
3.바람꽃 북부 지방의 높은 산 풀밭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고산식물로, 남한에서는 설악산 부근에서만 볼 수 있다. 꽃은 7월 초순부터 8월 중순까지 핀다.
4.산솜다리 설악산과 북부 지방의 높은 산에 자라는 한국특산의 여러해살이풀로 ‘에델바이스’라 부른다. 꽃은 5월 하순부터 7월 초순까지 핀다.

변산바람꽃을 눈 속에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곳

1999년 3월20일 설악산을 찾았다. 이맘때는 대청봉에 흰 눈이 쌓여 있을 시기여서 꽃이라고는 기대하기 어렵다. 하지만 설악산의 동쪽 사면은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어느 정도 봄기운을 느낄 수 있는 때이기도 하다. 성 감독은 설악동 부근의 어떤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곳곳에 잔설이 남아 있어서 새싹이라고는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그곳에서는 현호색 종류와 노루귀가 이미 꽃봉오리를 달고 있었고, 활짝 핀 변산바람꽃이 있었다.

누군가 옮겨 심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개체수가 많았고, 또 조금 떨어진 다른 곳에도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생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눈 속에 핀 변산바람꽃 사진은 설악산이 아니고서는 어디에서도 찍을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설악산에서 필자가 발견한 또 하나의 북방계 식물은 장백제비꽃이다.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백두산 등 북부지방에서 자라는 이 식물을 설악산의 능선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악산을 포함해 남한 어디에서도 발견된 적이 없는 북방계 식물이 과연 설악산에서 자랄 수 있을까? 2000년 초여름 처음 발견했을 때는 아쉽게도 꽃이 지고 열매가 달린 상태였다.

콩팥을 닮은 잎 모양만으로도 다른 제비꽃 종류들과 구별할 수는 있지만, 남한에서 처음 발견되는 것이니 꽃까지 확인한 후에 발표하겠다는 생각으로 이듬해 다시 찾아갔다. 하지만 이듬해에도 너무 일찍 가는 바람에 꽃봉오리밖에 볼 수가 없었다. 2002년 세 번째 찾아간 끝에 드디어 활짝 핀 꽃을 확인하고, 언론 등에 공식적으로 알리게 되었다.

북방계 식물인 닻꽃도 설악산 능선에서 발견했다. 여름철에 닻 모양의 특이한 꽃을 피우는 한해 또는 두해살이풀로 백두산, 만주, 몽골 등지에서는 저지대에서도 흔하게 자라지만, 남한에서는 한라산 아고산대 풀밭과 경기도 화악산 정상 부근 등지에만 매우 드물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설악산 식물목록에는 아직까지 기록되어 있지 않다. 1999년 여름에 능선에서 만나서 사진까지 찍은 적이 있는데, 이후에는 다시 만나지 못하였다.

설악산은 여러 종류의 희귀 양치식물과의 인연도 맺게 해주었다. 만년석송, 개석송, 주저리고사리, 좀미역고사리 같은 북방계 희귀 양치식물들은 물론이고, 남한에서 보고는 되어 있었지만 수십 년 동안 찾지 못하고 있던 비늘석송을 발견할 수 있었다. 백두산에서만 보았던 비늘석송을 서북능선에서 발견했을 때는 몇 해 전 한여름이었다.

지금까지 식물학자들이 조사한 것에 의하면 설악산에는 950여 종류의 고등식물이 자라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4,000여 종류의 식물 중 25%쯤에 해당하는 것으로, 1,800여 종류의 식물이 자라는 제주도 한라산이나 1,500여 종류가 자라는 지리산에는 못 미치는 수준이며, 오대산이나 치악산과 비슷한 수준이다.

하지만 희귀식물의 수로 말한다면 설악산은 한라산에 버금가거나 오히려 가치가 더 높을 정도의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설악산에는 그만큼 귀중한 식물이 많이 자라고 있다는 것인데 그 원인은 여러 가지다.

첫째, 북한에서 자라는 식물이 설악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북방계 식물이라 부르는 이 식물들은 백두산, 금강산 등 북한 지방에 분포하는 식물들로 남한에서는 설악산에서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설악산의 높은 위도와 고도가 빙하기 때 남하했던 북방계 식물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고, 또 백두대간이 식물의 이동통로 구실을 해줌으로써 많은 북방계 식물이 분포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식물로는 비늘석송, 눈잣나무, 두메오리나무, 가는다리장구채, 숲개별꽃, 바람꽃, 흰인가목, 홍월귤, 장백제비꽃, 금강봄맞이, 만주송이풀, 봉래꼬리풀, 난장이붓꽃 등을 꼽을 수 있으며, 설악산은 이들 분포의 남방한계선이 된다.

한편 설악산까지 올라와 자라는 남방계 식물들도 있는데, 설설고사리, 모데미풀, 사람주나무, 때죽나무, 변산바람꽃, 지리대사초 등이 그것이다. 설악산에 분포하는 북방계 식물과 남방계 식물은 모두 한반도 내에서 분포의 가장자리에 자라고 있는 것들로서, 다른 곳에 자라는 같은 종의 식물보다 보존가치가 더욱 크다.


1.자주솜대
환경부가 멸종위기 야생식물 II급으로 지정한 한국특산의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은 6월에 피며, 처음에는 연한 황색이지만 점차 자주색으로 바뀐다.
2.장백제비꽃 백두산 등 북한의 고산지대에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해살이풀로서, 2000년 필자가 설악산에서 처음 발견했다.
3.큰잎쓴풀 북한에 자라는 것으로 알려진 두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1996년 필자가 설악산 능선에서 처음 발견한 이래 최근에는 강원도 다른 곳에서도 발견됐다.

고산능선 보전이 설악산 생태계 보전의 지름길

설악산에 희귀식물이 많이 자라는 두 번째 이유는 높은 바위봉우리와 능선이 희귀 고산식물의 보금자리가 되기에 알맞은 환경조건을 형성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청봉 일대를 비롯하여 북주릉, 서북릉, 화채릉, 서릉 등이 높은 능선을 이루고 있으며, 더욱이 이들 능선에는 암반이 노출된 곳이 많고 어떤 곳은 고산초원지대를 형성하기도 하는데, 이런 곳에 많은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설악산 고산지대에 80여 종류의 고산식물이 자라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는데, 주저리고사리, 좀미역고사리, 눈향나무, 사스레나무, 참바위취, 산오이풀, 들쭉나무, 월귤, 만병초, 기생꽃, 등대시호, 한라송이풀, 자주쓴풀, 댕댕이나무, 배암나무, 땃두릅나무, 분홍바늘꽃, 닻꽃, 한라송이풀, 두메잔대, 솔체꽃, 다북떡쑥, 산솜다리, 바위솜나물, 자주솜대, 금강애기나리 등이 설악산을 대표하는 고산식물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 식물의 중요성은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이 많다는 데서도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특산식물은 407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설악산에는 이 중 65종류가 자란다. 또 우리나라 안에서도 설악산에만 자라는 특산식물도 15종류나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설악산의 한국특산식물 숫자는 한라산의 75종류에 다음 가는 것으로, 설악산보다 덩치가 큰 지리산의 42종류보다 많다.

이들 한국특산식물은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식물자원일 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희귀한 것들이 대부분이므로 적극적으로 보호하지 않으면 사라질 위험이 크다. 우리나라에서의 멸종이 곧 세계적인 멸종으로 뜻하므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특별한 보호조치가 필요하다.

설악산에는 정부가 법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식물들도 많이 자란다. 2005년 제정된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환경부가 지정해 특별관리하고 있는 64종의 멸종위기 야생식물 가운데 10종류가 자라고 있다. 연잎꿩의다리, 깽깽이풀, 한계령풀, 홍월귤, 기생꽃, 가시오갈피나무, 솜다리, 솔나리, 자주솜대, 털개불알꽃 등이 그것이다. 이 역시 한라산을 포함한 제주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숫자다.

설악산은 북녘 백두대간의 식물들을 어렴풋이 가늠해 볼 수 있는 남한 유일의 산이다. 가서 보지 못하는 북녘 땅의 식물들을 가장 많이 보듬어 키우고 있는 산이라는 점에서도 설악산은 우리나라의 생물다양성 보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설악산의 귀한 북방계 고산식물들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보금자리인 여러 능선을 잘 보전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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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지명
신성함의 뜻인 '살뫼'로도 불렸던 설악
살은 술, 수리, 수레, 소리 등으로도 파생

설악산 높이가 만 길이 되어
봉래산과 영주까지 그 기운 이어 있네
천 봉우리 눈빛은 바닷빛에 반사되고
저 멀리 옥경에 상제들 모였구나
동봉 노인이 거기에 머물러
거룩한 그 기상 하늘까지 뻗쳤다…

※동봉 노인은 김시습의 별호
雪嶽之山高萬丈 / 懸空積氣連蓬瀛 / 千峰映雪海日晴 / ?群帝集玉京 / 東峯老人住其間 / 高標歷落干靑冥…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記言) ‘강릉 도중에서 설악산 바라보며 감회를 쓰다’

▲ 설악산 원경. 우리나라 산들은 대부분 겨울에는 눈을 이고 있기 때문에 설악산만 눈을 이고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설 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개 수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러 이름으로 나오는 설악산 이름


설악산은 삼국사기에 설화산(雪華山)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불교에서는 설산(雪山), 또는 설봉산(雪峰山)이라고 불러왔다. 지금은 이 산을 대개 설악산이라고 하지만, 옛 지도들에선 대부분 뒤에 산 자가 빠진 설악(雪岳)이라고 표기해 놓고 있다. 설악산에 대한 이름 유래는 옛 문헌에 모두 눈(雪)과 관련지어 설명해 놓고 있다.

‘한가위부터 내리기 시작해 쌓인 눈이 하지에 이르러 비로소 녹으므로 설악(雪岳)이라 한다.’(동국여지승람)

‘산마루에 오래도록 눈이 쌓여 바위가 눈같이 희다고 하여 설악이라고 이름지었다.’(증보문헌비고)

▲ 한계령. 한계산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한계산(현 서북릉으로 추정)은 설악산과 다른 산으로 보았다.
설악산은 또 한계산(寒溪山)이라고도 불렸다고 하기도 하나, 엄밀히 말해서 설악산과 한계산은 같은 산이 아니었다. 다산시문집의 산수심원기(汕水尋源記)에 보면 ‘소양수의 발원지는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와 서북쪽으로 흘러 기린(基麟)의 옛 고을을 지나니 춘천부 동쪽 140리에 있다. 이른바 기린수(基麟水)요, 또 하나는 인제현 한계산(寒溪山)에서 나와(곧 설악산의 남쪽 산맥) 남쪽으로 흘러 서화(瑞和)의 옛 고을을 지나니 이른바 서화수(瑞和水)이다’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를 보아서도 두 이름이 같은 산을 가리키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설악산은 매월당 김시습(金時習·1435-1493)과 인연이 깊은 곳이기도 한데, 그에 관한 기록에서도 관련 사항을 알 수 있다.

-문종 때에 와서는 시습이 점차 장성하여, 벌써 널리 통달하고 남달리 유능하여 명예가 더욱 높았다. 노릉(魯陵) 단종(端宗))이 손위(遜位)하자, 시습은 책을 다 불사르고 집을 떠나 절로 도피하여 속세에 발길을 끊었다. 양주(楊州)의 수락산(水落山), 수춘(壽春=춘천)의 사탄향(史呑鄕), 동햇가의 설악산(雪嶽山), 한계산(寒溪山), 월성(月城)의 금오산(金鰲山)이 모두 시습이 머물던 곳이다. 스스로 호를 췌세옹(贅世翁)이라 하였고, 청한자(淸寒子), 동봉(東峯)이라고도 불렀다.(청사열전·淸士列傳)

연려실기술의 지리전고(地理典故)에서는 백두대간의 지맥을 따라 내려가면서 여러 산들과 고개들을 잘 나열해 놓았는데, 여기서도 한계산이 설악 바로 남쪽에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태백산으로부터 서쪽으로 내려가서 백계산(白階山)이 되고, 남쪽으로 부전령(赴戰嶺)이 되며, 서남쪽은 초황령(草黃嶺), 설한령(雪寒嶺)이 되며, 서쪽으로 뻗친 한 산맥은 평안도가 된다. 원 산맥 줄기는 남쪽으로 내려가서 상검산(上劍山), 하검산(下劍山), 오봉산(五峯山), 마유령(馬踰嶺), 두미령(頭尾嶺)이 되며, 또 동으로 꺾어졌다가 남쪽으로 내려가서 거모령(巨毛嶺), 쌍가령(雙加嶺), 거차리령(巨次里嶺)이 되고, 모흘(矛屹), 마유령(馬踰嶺), 노인치(老人峙)-이 세 고개느느 모두 안변, 영풍에 있음-가 되고 박달치(朴達峙)가 되며, 동쪽으로 꺾어져 세 지방의 분수령이 되는데, 동쪽에서 일어나 철령이 되고, 동북쪽으로는 황룡산(黃龍山)이 되고, 남쪽으로 뻗쳐서 축곶령(杻串嶺), 추지령(楸池嶺), 금강산, 회전령(檜田嶺), 진부령, 흘리령(屹里嶺), 석파령(石波嶺), 설악(雪岳), 한계산(寒溪山)이 되고, 오색령(五色嶺), 연수파(連水波), 오대산, 대관령, 두타산, 백복령(百復嶺)이 되었으며, 서쪽으로 꺾어져 태백산이 되고, 서남쪽으로는 우치(牛峙), 마아령(馬兒嶺), 소백산, 죽령이 되고, 또 불쑥 솟아서 월악(月岳), 주흘산(主屹山), 조령, 의양산(義陽山), 청화산(淸華山), 속리산, 화령(火嶺), 추풍령이 되고, 황악(黃嶽), 무풍령(舞?嶺), 대덕산, 덕유산, 육십치(六十峙), 본월치(本月峙), 팔량치(八良峙), 지리산이 된다.

지금의 설악산 남쪽 한계령(寒溪嶺)은 한계산 이름에 바탕을 둔 것이다.

설(雪) 지명은 전국에 무척 많아

설악산 외에도 전국에는 설(雪) 자가 들어간 산이 많다. 설성산(雪成山), 설봉산(雪峰山), 설한령(雪寒嶺), 설운령(雪雲嶺), 설마치(雪馬峙), 설령(雪嶺), 설암산(雪暗山), 설우산(雪雨山), 설주봉(雪柱峰) 등이 그것,

그러나, 이들 산을 서로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설’을 단순히 눈(雪)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대개의 산은 겨울이면 그 머리에 거의 계속 눈을 이고 있으며, 그 눈은 평지의 눈과는 달리 더 오래 머물러 있다. 따라서, 눈 덮인 산이라는 뜻으로 설(雪) 자를 붙인다면 우리나라의 더 많은 산들이 이렇게 이름 붙여졌어야 하고, 그것도 추운 지방인 북쪽에 많이 분포되어 있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즉, 남쪽에서 북쪽까지 골고루 분포되어 있으며, 그것도 큰 산보다는 작은 산들에 설뫼, 설봉, 설산 등 설 지명의 산이 더 많은 것도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언어나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지명들에서 설을 ‘살’의 음역(音譯)으로 많이 보고 있다. ‘살’은 우리 조상들이 오래 전부터 높음, 신성함 등의 뜻으로 이해해 왔던 말이었다. 노산 이은상 님은 설악산을 원래 ‘살뫼’라고 했을 것이라면서 금강산의 이름을 ‘서리뫼(霜嶽)’라 하는 것과 통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인 이름풀이에서 ‘설’이 이름에 들어가면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연상하기가 아주 쉽다. 그래서, 그러한 지명들이 대개 눈과 관련한 이야기가 붙어 다닌다. 충북 단양군 단양읍 장희리에는 설마동(雪馬洞)이라 하는 바위절벽이 있는데, 역시 겨울이면 바위 위에 쌓인 흰 눈과 우거진 소나무 위에 덮인 눈이 조화되어 마치 준마(駿馬)가 달리는 모습과 같아 설마(雪馬)라 했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이 이름은 작은 뫼의 뜻인 ‘솔마’에서 나온 이름이 아닐까 한다.

연철 현상에 의한 지명들

지명학자들은 설(雪)뿐 아니라 한자의 술(述), 주(酒), 살(乷) 등의 글자가 취해진 지명들을 모두 아울러살 무리의 지명으로 보고 있다. 수리(鷲), 수레(車)도 마찬가지다. 전국에는살 무리의 땅이름이 무척 많다. ?은 연철되어 ‘수리’로도 되었는데, 땅이름 중에는 이처럼 연철현상에 의한 것이 무척 많다.

-강(邊)→가사, 가스, 가지, 가재, 가자
-갈→가라, 가리, 가래
-곳, 곶(所-串)→고사, 고소, 고시, 고조, 고지
-감(神-大-黑)→가마, 고마, 고매, 고모, 고무, 고미, 구마, 구매, 거무
-날(下動)→나리, 나래
-둘, 돌(周-回)→두리, 두라, 두로, 두루, 두르, 디리 > 지리, 도라, 도리, 도래, 도로
-담(圓)→두미, 두마, 두무, 두모, 도마, 더미
-말(宗-山-頭)→마라, 마리, 모라, 모리
-맛, 맏(南)→마사, 마도
-빗(光)→비사, 비자
-발(原-國)→부리, 부로, 부래, 보로, 보리
-엄(母-大)→아미, 아무
-알→아리, 아라, 어리, 어라, 어래, 어로, 오리, 오로, 우리, 우라, 아루

갈이 가리로, 알이 아리로, 달이 두리로 지명에 흔히 나타나듯이 살은 사리, 사라, 수리로 많이 나타난다. 수리는 또 수레로도 음이 바뀌면서 수레너미(車踰)와 같은 파생지명도 만들어졌다. 수레너미는 차유(車踰) 외에 차현(車峴), 차령(車嶺) 등의 한자 이름으로도 되어 양주군 효촌리, 영동군 상도대리, 청원군 외천리, 예산군 차동리 등 여러 곳에 있다.

살무리의 지명들

살미라는 이름도 역시 같은 계열 지명인데, 이 이름은 한자로 미산(米山), 활산(活山), 전산(箭山), 거산(居山), 실산(失山) 등의 한자 지명으로 옮겨가기도 했다. 제천시 금성면의 살미는 살을 삶(生)과 연관지어 활(活) 자를 취해 활산리(活山里)라는 한자 지명으로 만들었다. 시흥시 미산동(米山洞)은 살미의 살을 쌀(米)로 보고 취해진 지명이다. 이곳에 있는 작은 산이 미산(米山)인데, 주민들 이야기로는 전에 이곳에 창고가 있어서 쌀을 산같이 높이 쌓아 올렸다고 해서 쌀미(쌀뫼)였다고 하나 믿기 어렵다. 이곳은 시흥시가 되기 전엔 소래(蘇萊邑) 지역이었는데, 소래 역시살 무리의 지명이 아닌가 한다.

살미는 또 전산(箭山), 시산(矢山)으로 되기도 하는데, 이는 살을 화살의 살로 보았기 때문이다. 거산(居山)이 되기도 한 것은 활산(活山)의 경우와 같다. 충주시(전에 중원군) 살미면(乷味面)은 달내(達川)의 지류인 상모천(上芼川)의 수리를 얻어서 벼농사가 성하고 쌀가마가 창터(倉垈)에 산처럼 쌓였기 때문에 쌀뫼라 했다고 하나, 역시 꾸며낸 이야기로 보인다.

강원도 이천군(伊川郡)과 황해도 신계군 사이에 있는 설화산(雪花山·581m)은 한자 그대로 이름을 풀면 눈꽃뫼가 되지만, 이 이름은 살고지의 음의역(音意譯)이다. 설은 살의 취음이고, 화(花)는 곶의 연철인 고지가 꽃의 옛말인 고지(곶)와 같기 때문이다. 서울 성동구 뚝섬에도 살고지가 있다. 한자로는 전관평(箭串坪)이라 하면서 화살과 관계되는 이태조와 태종 관계의 그럴 듯한 일화가 나와 있지만, 역시살 무리의 지명으로, 불쑥 튀어나간 곳의 뜻인 살곶에서 비롯됐을 것으로 보인다.

충북 제천의 청풍(淸風)은 이름만 들어도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데, 이곳의 삼국시대 지명은 사열이(沙熱伊)로 신라 경덕왕 때 청풍(淸風)으로 바꾼 것이다. 원래 사널이의 이두식 표기가 사열이인데, 개칭할 때 사널을 서늘하다의 서늘로 보고 청풍으로 바뀐, 아주 재미있는 예가 되었다. 그러나, 사널은 원래 시나르(시느리)로, 이 말은 새내(新川·間川)의 뜻으로 보인다. 사열을살 무리의 지명으로 볼 수 없는 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 내장산 서래봉(써레봉). 서래(西來)와 써레는 수리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보이는 산이 사라오름이다. 제주 12경 중 하나인 사라봉 낙조로 유명한 곳인데, 여기서의 사라도살 무리의 지명으로 보고 있다. 사라봉과 비슷한 이름으로, 내장산 근처의 서래봉(西來峰)이 있다. 써레를 달아 붙은 이름이라고도 하고, 달마조사(達摩祖師)가 양(梁)나라로부터 이곳에 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지만, 역시살 무리의 지명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종실록지리지의 경주부에도 사리(沙里)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옛이름이 활리(活里)였다는 것으로 보아 역시 살과 관련 있음을 알 수 있다.

송산(松山)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많이 깔려 있다. 대개 솔(松)과 관계지어진 것이 많지만, 꼭대기의 뜻인 수리, 술이 솔과 음을 닮아 솔뫼로 되었다가 바뀐 것도 많다. 술뫼는 한자로 술산(戌山)이나 주성(酒城)이 되기도 하였다. 대동여지도에 나오는 강원도 이천의 소리산(所伊山), 황해도 평산의 소라산(所羅山), 경기도 가평의 소의산(所衣山), 함경도 경원의 솔하천 등도살 무리의 지명으로 보인다.

청도군에 편입된 삼국시대의 한 지명인 솔이산현(率伊山縣)과 역시 당시의 지명으로 충북 옥천군에 편입된 소리산현(所利山縣)은 수리뫼로 유추되고 있다. 술천(述川)도 여주와 광주의 일부로 들어간 삼국시대의 한 지명이다. 얼핏 들으면 냇물이 솟는다는 뜻으로 들리는 솟내로 유추되는데, 한자로 술(述)이 취해진 것을 보아 살내의 음과 뜻을 따서 옮긴 것으로 보인다.

서울 노원구 상계동 북동쪽에 수락산(水落山)은 온 산이 모랫돌로 되어 있어 수목은 적으나 옥류동(玉流洞,) 금류동(金流洞,) 은선동(隱仙洞) 세 폭포를 이루어 수락(水落)이라 했다고 전해 오고 있으나, 술앗의 취음인 듯하다. 앗은 장소를 뜻하는 옛말로 부엌(불앗>부앗>부엌), 녘(동녘, 서녘 등), 바깥(밖앗>바깟>바깥), 뜨락(뜰앗>뜨랏>뜨락) 등의 말이 이에 연유한다.

수리는 원래 꼭대기나 으뜸의 뜻

수리봉(守理峰·단양·1,022m), 수리산(修理山·안양·474m), 수리치(樹裏峙·승주) 등 수리가 들어간 산이름이 많다. 지금의 경기 파주시로 들어간 서원군(瑞原郡)의 고구려 때 이름은 수리홀성(述爾忽城)으로 수릿골재의 옮김으로 보인다. 수리재는 정선 남면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 곳에 있다. 수리는 술(살)에 뿌리를 둔 말이어서 한자로는 대개 술(述) 자가 취해졌다. 삼국시대의 지명에 나오는 관술(管述), 우술(雨述), 아술(牙述), 황술(黃述) 등이 그 예다. 이들 지명은 칸수리, 볓수리, 겇수리, 느르수리 등으로 유추되는데, 지금의 강원도 북부 회양, 대전시 회덕, 아산, 영암 등이다.

수리의 음을 거의 그대로 딴 예에는 각각 지금의 인천, 파주에 속한 고구려 때의 지명인 수니홀(首爾忽)이 있다. 서술산(西述山), 술모산(述母山) 등도 수리뫼다. 수리는 꼭대기의 뜻을 지니는 말이었다. 그래서 지금의 말에도 정수리라는 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수리를 새 무리의 수리(鷲)로 보아, 취가 들어간 지명도 생겼다. 여수와 창녕에 있는 영취산(靈鷲山)은 아라수리 또는 올수리(얼수리)의 옮긴 이름으로 보이고, 북한 여러 곳과 양산시 등에 있는 취봉(鷲峰) 중에도 수리에서 나온 것이 많다.

수리, 술은 음이 술(酒)을 닮아 지명에 주 자가 취해지기도 했다. 경북 예천의 옛이름은 수리골인데, 그 훈을 술로 보고, 수주(水酒)로 했다가 예천(醴泉)으로 바꾼 것이다. 지금의 평창, 원주 부근의 삼국시대 지명인 주연(酒淵)도 수리못이 바뀐 이름으로 보고 있다. 수리는 수레와 음이 닮아 수레너미니 수레재니 하다가 한자로 차유현(車踰峴), 차령(車嶺), 차산(車山), 차의현(車衣峴) 등의 지명들을 낳았다.

시루(甑)를 닮았다고 해서 증봉(甑峰), 증산(甑山) 등의 이름이 붙었다는 산들이 무척 많다. 그러나, 이들 산 모양을 보면 실제로 시루를 닮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 그리 많지 않다. 지방에 따라 스리봉, 시리봉, 시래봉, 서리봉 등으로 조금씩 달리 불리는 것으로 보아 원래 수리를 뜻하는살 지명이었던 것이 시루, 시루봉으로 불리다가 그와 같은 한자식 이름으로 된 것이라고 본다. 시루의 방언으로는 시리(영호남), 실리(금릉), 실기(영양, 영덕), 슬구(강원 일부) 등이 있다.

수리, 수루, 수레, 시루 등은 서로 친척 관계의 낱말로, 이 말들의 뿌리말인 살은 꼭대기 또는 높은 산을 의미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러한 음이 들어간 산이름들도 그러한 쪽으로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양산 영축산. 예전 이름 영취산은 아라수리, 또는 올수리가 한자로 의역된 것이다.

살은 벼슬을 뜻하기도


지금까지살 계통의 지명들을 대충 훑어보았거니와, 이들 중에 대표적인 것은 수리라 할 수 있다. 수리라는 음의 바탕은 술로 보지만, 그 원뿌리는 으뜸의 뜻인 숟 또는 수(雄)에서 시작된 말로 보고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범어(梵語)에서 이 말이 나왔다고 하여 소슬산(所瑟山이)라는 지명도 기록해 놓고 있다.

살은 삼국시대의 관명(官名)으로도 나온다. 백제의 관명 중에 달솔(達率·수서에는 大率), 은솔(恩率), 덕솔(德率), 간솔(杆率), 나솔(奈率) 등이 나오는데, 달, 덕, 나 등은 각각 산(山), 언덕(阜), 내(川)를 뜻하여 이를 다스리는 으뜸 관직을 뜻하는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으뜸의 뜻인 수를 인명에 많이 취하였다. 신라 때의 인물로 수종(秀宗), 술랑(述郞), 술종(述宗) 등이 나오는데, 이들은 각각 수마로, 수리내, 수리마로가 그 원이름일 것이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수류지(須流枳)도 수리치의 음역으로 보인다. 신라 초기에 주다(酒多) 라는 관직명도 있는데, 고 양주동 님은 이 이름이 불한(角干)의 변한 이름인 수불한(<술한)의 한자식 표현이라고 했다.

고구려 관명의 의사살(意俟奢), 욕살(褥奢-褥薩) 등의 살(薩-生)도 벼슬을 뜻하는 옛말 ?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벼슬의 슬도 같은 바탕에서 나왔을 것으로 보인다. 또, 지금의 말의 크거나 힘셈의 뜻으로 새겨지는 수컷, 수놈의 수도 살이 그 뿌리일 것이다.

살은 많은 말을 낳고, 또 새끼를 쳤다. 생명의 원천이고 신성함을 뜻하는 이 말은 삶(살·生)과 연관지어 살림, 사람(살+암=사롬>사람), 사랑(살+앙), 슬기 등의 낱말을 이루게 했고, 이 말은 다시 설, 솔, 술, 수리, 수레 등으로 형태를 달리하면서 여러 가지 한자로 지명에 옮겨갔다. 최근 금강산 관광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된 강원도 고성의 명승지 삼일포(三日浦)도 원래 살개였을 것으로, 살개가 사흘개가 된 후에 한자로 뜻옮김된 것으로 보인다.

살은 또 물살의 살을 뜻하게도 되어 살고지, 살개 등의 지명을 낳았고, 수레, 솔, 시루, 수리 등과도 음이 닮아 전국에 이 계통의 지명을 무척 많이 깔아 놓게 된 것이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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