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지리산 문화④

갈등과 대립의 끝, 화해와 대화의 시작인 지리산
유·불·선과 무속·문학·음악까지 배태한 모산

지리산은 백두대간의 끝이면서 새롭게 시작되는 곳으로, 한 마디로 백두대간의 기운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다. 그 기운 탓인지 지리산은 투쟁과 저항의 역사가 응집된 곳이며, 많은 인물과 사상을 낳았던 곳이다. 또한 그러면서 갈등을 해소하고 아픔을 어루만지려는 부단한 노력이 있었던 곳이다.

▲ 정여창의 학풍과 덕망을 흠모한 이들이 그를 추모해 ㅅ운 남계서원. 지리산 기슭인 함양에서 태어난 정여창과 남명 조식에서 지리산의 유학은 빛을 발했다.
전략요충지로서의 지리산
백두대간의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산은 최고봉인 천왕봉을 중심으로, 주능선 방향이 서남서~동북동으로 이어진다. 삼도봉을 중심으로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3개 도에 걸쳐 있으며, 구례·남원·함양·산청·하동 등 5개 시군에 속해 있다. 서쪽에 전남 구례, 북쪽에 전북 남원, 동북쪽에 경남 함양과 산청, 동남쪽에 경남 하동이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 지리산을 영호남의 경계를 짓는 산으로 인식해 왔다.

고대로부터 영남과 호남의 4대 관문이 있었는데, 안음의 황석산성, 진안의 웅치, 운봉의 팔량치, 구례의 석주관이 그것이었다. 특히 남쪽의 석주관과 북쪽의 팔량치는 고대부터 중요한 교통로이자 전략적 요충지로 주목하였다.

황석산성은 신라가 가야를 멸망시킨 후 백제와 맞서면서 축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팔량치 넘어 남원의 교룡산성은 백제가 신라를 막기 위해 세웠던 것이다. 이곳은 가야·삼국의 각축장이었고, 이들의 문화가 서로 혼합되어 있다.
▲ 경남 산청군의 단속사지 3층 석탑. 지리산 서쪽으로 화엄사가 세워진 반면 같은 시기에 동편에는 단속사가 세워졌다.
후삼국 시기 후백제 견훤은 신라 정벌의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기 위해 남원과 함양을 장악하였다. 고려 태조 왕건은 나주 지역의 정벌과 함께 남해안을 따라 승주(순천) 호족 박영규와 강주(진주)의 왕봉규와 연결되면서 후백제를 압박하였다.

고려 말 왜구가 경상도에서 전라도를 침공할 때에도 운봉을 넘으려다가 황산에서 이성계에 크게 패한 일이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일본군이 호남을 침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들 지역을 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가 진주대첩과 남원성 전투, 구례 석주관 전투였다.

한말에도 영남으로 진격하려는 호남의 동학농민군이 북쪽에서는 운봉을 사이에 두고 민보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남쪽에서는 광양·순천의 농민군이 하동과 진주로 나아가 영·호남 연합농민군을 구성하기도 하였다.

은둔지·피난처로서의 지리산
지리산은 천왕봉·반야봉·노고단의 3대 주봉과 함께 해발 1,500m 이상의 큰 봉만도 10개가 있고, 이곳에서 발원한 지류들의 강한 침식작용으로 깊은 계곡을 만들었다. 피아골, 밤밭골, 뱀사골, 연곡골 등 지리산 계곡은 약 80여 개나 되며, 길이가 10㎞ 이상의 계곡도 10여 개나 된다.

또한 불일폭포·구룡폭포·칠선폭포·가내소폭포·천령폭포·법천폭포 등 아름다운 풍광을 갖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남강이, 남서쪽으로는 섬진강이 흘러 강과 산의 조화가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리산의 10경을 꼽고 있지만, 사실 곳곳이 비경이요 선경이라, 단지 10경만을 꼽는 것은 좀 지나친 감이 있다. 조선시대 유학자인 남명 조식도 그것이 부질없는 것이라고 생각이라 하여,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두류산이 가까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하였다.

800여 리의 넓은 산역과 깊은 계곡과 준령은 선경에 비유되니 도인을 꿈꾸는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지리산은 신선이 사는 방장산으로도 불렸으며, 지금도 도인(道人)들의 이상향인 청학동이 있다. 신라 경덕왕 때 거문고의 대가 옥보고도 지리산 운상원에서 거문고를 배우고, 말년에 선도(仙道)를 얻어 승천하였다고 한다. 또한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도 은연 자중하는 도인의 자취를 흘렸다.
지리산은 피난처였다. 가혹한 부역과 조세를 피해 많은 농민들은 지리산을 찾았다. 조선시대에는 중들에게도 많은 부역을 부담시켰는데, 일반 백성들이야 말할 필요가 없었다.

지리산의 깊은 계곡에는 비교적 넓은 경작지를 갖추고 있는데, 큰 곳은 천 석이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섬진강, 남강 유역은 토양이 비옥하여 비교적 물산이 풍부한 편이었다. 그만큼 정부의 수탈도 뒤따랐고, 단성 농민봉기와 1862년 진주 농민봉기, 진주 형평사운동 등도 지리산의 사회경제적 배경에서 출발하였던 것이다.

동학농민군도 관군을 피해 지리산에 들어가 저항하였고, 의병부대들도 일본군에 쫓겨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여수·순천 사건과 빨치산의 활동 무대도 바로 지리산이었다. 깊은 계곡과 준령은 이들의 은신처로 적합하였고, 비교적 풍부한 물산은 장기간 머물며 전력을 정비하기에 적지였다. 십승지의 하나로 운봉 두류산 동점촌(현 산청군과 함양군 경계지역으로 추정)이 꼽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지리적 환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사상과 문화의 산실, 지리산
지리산은 우리 민족의 혼과 정서가 깃든 곳으로, 역사의 현장이다. 지리산은 어리석은 사람이 머물면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인데, 다분히 불교 색채를 띠고 있다. 또한 백두대간의 맥이 반도를 타고 내려와서 이곳까지 이어졌다고 하여 두류산(頭流山)이라고도 한다. 이 이름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즐겨 불렀으며, 유교 냄새를 풍기고 있다. 이밖에 신선이 산다는 삼신산의 하나인 방장산으로 불렸는데, 이는 도교의 영향이라고 하겠다. 지리산은 다양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문화, 즉 도교·불교·유교문화를 낳고 키웠다.

산신신앙과 신선사상

▲ 1) 남명 조식의 초상화. "산 중에서 두류산보다 큰 산은 없고 한 눈에 들어올 정도로 두류산이 가까이 있지만 여러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지리산을 묘사했다.
2)최치원의 초상화. 지리산의 유교는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산에는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신령한 힘을 가지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점쳐준다는 산신이 있다. 조상들은 대접을 소홀히 한다면 큰 벌을 내린다고 해서 산신에게 정성껏 제사를 지냈다.

지리산 천왕봉에는 1,000년 전에 성모사(聖母祠)라는 사당이 세워지고, 성모 석상을 봉안해 제사를 받들었다. 노고단에는 신라시대부터 선도성모(仙桃聖母)를 모시는 남악사(南岳祠)가 있었다. 성모는 나라의 수호신이었고, 매년 봄·가을에 국태민안과 풍년을 비는 제사를 지내왔다. 후대에 성모사의 성모는 고려 태조 왕건의 어머니로 신앙되었고, 남악사의 성모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 신앙되었다. 지리산은 결국 신라와 고려의 시조를 잉태했던 산이었던 것이다.

성모는 나라의 시조를 낳은 것만 아니라 불교 승려와 만나면서 무당을 낳았다. 무당의 시조 전설에 함양의 지리산 암천사(巖川寺)에 법우화상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천왕봉의 성모천왕(聖母天王)과 혼인하게 되어 8명의 딸을 낳아 무술(巫術)을 가르쳐 8도에 하나씩 보내어 무업을 행하였다고 한다.

교종과 구산문의 형성
불교가 본격적으로 수용되면서 지리산 자락에는 많은 사원과 암자, 승려들의 수도처가 만들어졌다. 특히 지리산에는 화엄종과 북종선, 구산문 중 3개 산문이 형성되었다.
지리산 서쪽으로 화엄사(구례)는 백제 때 창건되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대 연기조사(緣起祖師)에 의해 중창되었다. 연기는 754년 화엄경을 사경(寫經)하였고, 이후에는 석경(石經) 사업이 이루어졌다. 이는 신라인들이 화엄의 불국토인 연화장세계를 신라 땅에 구현하려는 의지의 산물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반대편 동쪽에는 단속사(산청)가 세워졌다. 신행(神行)이 759년 당나라에서 북종선을 배우고 돌아와 이곳에서 최초로 북종선을 전하였다.
지리산 북쪽으로 실상사(남원)가 있다. 이 사찰은 828년(흥덕왕 3) 홍척(洪陟)이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실상산문(實相山門)을 열면서 창건되었다. 그는 신라 하대 구산산문의 선구자였다.

실상사의 정남쪽에는 쌍계사(하동)가 있다. 이 사찰은 혜소(774-850)가 830년(흥덕왕 5) 당나라에서 돌아와 세운 것이다. 그는 깨달음의 세계를 알지 못하고 오탁악세에 안주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굶주려도 먹지 못하고, 갈증이 나도 마시지 못한다'고 걱정하였다.
혜철(785-861)은 839년(신무왕 1) 당나라에서 돌아와 동리산(桐裏山) 태안사(곡성)를 창건하였다. 그의 선풍은 유식사상과도 연결을 가지면서 구산문 중 동리산문을 형성하게 되었다. 혜철의 제자 도선은 옥룡사(광양)를 세웠다.

도선은 풍수지리를 집대성한 승려였다. 그는 남해의 물가에서 이인(異人)을 만나 산천의 순역(順逆) 형세를 전해받고, 더욱 음양오행설을 깊이 연구하여 풍수지리를 집대성하였다. 이밖에도 지리산에는 많은 사찰이 있으나 이상에서 제시한 사찰은 역사가 오래되었고, 이후 불교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 1) 남명 조식이 61세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와 기거하다 여생을 마친 곳인 산천재.
2) 화엄사 경내의 사사자석탑과 석등. 여기에도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남명학파의 성립
현재 지리산 일대에는 함양 남계서원, 산청 덕계서원·도천서원, 진주 도동서원·임천서원 등의 서원과 각 시군의 향교와 구례의 매천사당, 곡성의 충렬사 등의 사우가 남아 있다.

지리산의 유교는 통일신라시대 유학자 최치원이 함양 태수로 부임하면서 시작되었다. 고려 말 강회백은 단속사에서 과거 공부를 하였고, 그 때 심어놓은 정당매(사실 100년 후 죽자 후손이 심어놓은 것)가 지금까지도 꽃을 피우고 있다.
지리산의 유학은 일두 정여창과 남명 조식에서 빛을 발하게 되었다. 정여창은 함양 태생으로 초기 사림세력의 영수인 김종직의 문인이었다. 그는 37세 때 모친상을 치르고 지리산을 찾아가 진양의 악양동 부근 섬진나루에 집을 짓고 대[竹]와 매화를 심으며 평생을 마치고자 한 적이 있었다.

그는 평소에 도가 없으면 먹을 것이 없고, 먹을 것이 없으면 백성이 없고, 백성이 없으면 나라가 서지 못한다고 하며 나라의 근본은 백성이라고 강조하였다. 사후 그의 학풍과 덕망을 흠모한 함양 사족은 물론이고 인근 지역 사림들의 재정 지원을 받아 그를 추모하는 남계서원이 세워지게 되었다.
남명 조식은 어릴 때 정신력과 담력을 기르기 위해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유학 서적 외에 노장과 불교 서적을 섭렵하기도 하였다.

그가 지리산과 인연을 맺은 것은 61세 때였다. 김해와 고향 합천 삼가에서 문인을 양성하다가 이때 지리산 자락 밑의 덕산으로 와 산천재에 거처하며 여생을 마쳤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평생 처사적인 선비 모습을 간직한 채 살았다. 또한 실천을 중시하였다는 것과 다양한 사상과 학문을 수용하려는 학문 자세를 잃지 않았다.

도가의 수련법을 익히기도 했으며, 승려와 교유하였으며, 양명학자들과도 교류하였다. 그의 이런 점은 문인들에게 계승되어 임진왜란 때 많은 문인이 의병활동에 나서는 정신적 배경이 되었고, 한말 황현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남명은 지리산 사람이라는 뜻으로 자신을 방장산인(方丈山人)이라고 하였는데, 그의 지리산 사랑은 그의 12번 이루어진 지리산 산행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지리산 앞에서 인간의 왜소함을 배웠고, 산행을 통해 선현들의 흔적을 더듬으며 부족한 자신을 수양하고자 하였다.

민중소설의 유행과 동편제
지리산은 행정구역 상 동과 서의 경계선이었지만 자연지리적 구분으로 지리산의 주능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을 나눌 수 있다. 주능선 남쪽을 겉지리(또는 외지리)라 하는데, 구례·하동·산청이 이에 속한다. 지리산 북쪽은 속지리(또는 내지리)로 남원·함양이 이에 속한다.

하동·산청 등 지리산의 남쪽은 북쪽과 많은 차이가 있다. 남쪽의 여름은 고온다습한 남동계절풍이 남동 사면에 부딪쳐 상승됨으로써 발생하는 지형성 강우로 많은 비가 내린다. 겨울은 산이 계절풍을 막아주고, 남해를 흐르는 동한난류의 영향으로 비교적 온화하다. 반면 북서쪽(남원·구례·함양)의 겨울은 한랭건조한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 기온이 낮고, 기온차가 심하다.

남쪽의 온화한 기후는 목화나 차의 재배에 적합하였다. 산청은 고려 말 목화 시배지였다. 이전까지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도 마포를 여러 겹 겹쳐 입으며 추위를 견뎌야 하였다. 목화 재배가 성공하고 보온성이 좋은 목면으로 의복을 만들어 입음으로써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었다. 이는 지리산이 주는 혜택이었다.

문익점이 지리산 일대에 목면을 재배한 것은 이 지역이 기후가 온난하고, 이미 중국에서 들여온 차(茶)가 하동의 지리산 자락에서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북쪽의 심한 기온차와 지역성 강우 등 자주 변하는 기후 조건에서 불교보다는 민간신앙에 더욱 매료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함양·남원을 중심으로 해서 변강쇠전·흥부전·춘향전 등 민중소설의 배경이 되었다. 지리산의 장승은 변강쇠전의 모티브가 되었고, 지리산의 신선사상은 흥부전의 강남제비와 박의 씨를 낳았다.

지리산은 문학 뿐만 아니라 음악을 배태하였다. 지리산의 대표적인 음악은 판소리인 동편제였다. 동편제는 남원·구례 등지의 전라도 동북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된 소리제였다. 동편제는 전라도 보성·광주·나주 등 서남지역에 전승된 서편제와 비교해 발성을 무겁게 하고 소리의 끝을 짧게 끊는다. 동편제 소리는 바로 지리산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지리산의 계곡과 폭포수 곳곳이 모두 소리공부터였기에 웅장하고 선이 굵은 남성적인 소리가 나온 것이다.

동편제 성립은 통일신라시대 거문고의 고수 옥보고와 불교 가요인 범패의 대가 혜소와 무관하지 않다. 옥보고는 지리산 운상원에서 50년 동안 거문고를 익힌 후 30여 곡을 지었다. 운상원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으나, 남원과 인접한 지리산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

불교 음악인 범패는 하동 쌍계사에서 시작되었다. 쌍계사를 창건한 혜소는 성품이 꾸밈 없고,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대하였다. 그는 이러한 자신이 몸소 닦은 실천행과 아울러 범패를 중생제도의 방법으로 이용하였다. 이후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또는 중생제도의 방법으로 많은 선사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 3) 지리산 남서쪽 기슭의 화엄사. 지리산에 가장 먼저 만개한 불교 사상인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4) 스님들이 재를 올릴 때 부르는 노래인 범패는 소리와 춤을 함께 하는 불교음악으로서, 지리산 쌍계사에서 시작되었다.
갈등과 대립을 초월, 하나로 융합하는 마당
어질고 인자한 사람은 산을 좋아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한다고 한다. 산과 바다는 그런 의미에서 서로 상반되는 대상으로 인식해왔다. 바다는 산에서 내려오는 계곡물과 시내물, 강물들을 모두 받아들인다. 서로 다른 물이 바다에 모이면 이제는 더 이상 서로가 아니라 하나가 된다.

도인을 꿈꾸며, 혹은 부세와 전쟁를 피해, 또는 호연지기를 위해 들어온 사람 등 모두 제각각의 사정으로 들어왔지만, 산을 그들을 구별하지 않는다. 산 또한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을 거부하지 않고 전부 거두어들인다. 산은 자신이 품에 안은 모든 것에 차별을 두지 않는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가 된다. 그런 의미에서 산과 바다는 둘이 아니다.

불교가 들어오면서 산에는 산신이 아닌 부처나 보살로 대체되었다.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낙가산에는 관음보살이,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있어 중생을 제도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무불(巫佛)이 대립하였으나 종국에는 서로 하나로 신앙하게 되었다.
지리산에 가장 먼저 만개한 불교 사상인 화엄사상은 ‘이 세상 삼라만상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나 서로 대립하지 않고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는 사상이었다.

화엄사 경내의 사사자석탑과 석등도 불교와 유교의 조화를 꾀하고자 하는 깊은 의도가 숨겨져 있다. 효성이 지극한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조각해 놓은 이들 유물은 불교의 출가와 유교의 효도가 다르지 않고, 구도와 수기(修己)가 다르지 않으며, 제도(濟度)와 치인(治人)이 같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지리산의 사상 풍토는 조선시대 남명학파의 학풍과도 연결되고 있다.

도선은 화엄사에서 화엄을 배웠고, 이후 태안사 혜철에게서 유식과 선을 배웠을 뿐만 아니라 풍수지리 사상를 집대성한 신승(神僧)이기도 하였다. 전남 영암 출신이었던 그가 모든 불교종파와 사상을 융합하고, 도교적인 음양오행과 풍수를 집대성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지리산과 함께 강·바다 등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화해와 대화의 시작, 영호남의 화합
지리산의 사찰과 승려들 간의 교류는 영호남 구별없이 자유스럽게 유지되어왔다. 조선 인조 때 구례 화엄사를 중건했던 벽암선사는 하동 쌍계사 중건에도 관여하고 있었다. 남명의 문인은 영호남을 넘나들며 교류하였고, 영호남인의 통혼이 있었다. 동편제는 경상도 서부인 마산이나 진주 지역까지 확산되었다. 강을 따라 사람과 물산이 교류해 하동의 탑원장, 즉 오늘날 화개장터에는 영호남의 구별이 없다.

언제부터 영남과 호남이 대립과 갈등을 가졌는가. 경남 산청군의 지리산평화제에서는 지리산 최고봉인 천왕봉에 제신단을 만들고 평화·풍년을 기원하며, 이어 여수·순천반란사건에 죽은 무고한 민간인의 원혼을 달랜다고 한다. 지리산은 그렇게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고 있는데….

이제는 화해와 대화의 시작이다. 백두대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마음으로 영남과 호남의 갈등을 씻고, 좌우의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앞으로 전개될 통일을 위하여… .
지리산은 오래 전부터 그것을 말하고 있었다.
/글 여성구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책임연구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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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백두대간 지형지질③

지각변동으로 융기한 후 침식으로 백두대간 형성
태백산맥은 지질학적 구조선, 백두대간은 분수계에 근거한 산줄기 체계

한민족 우리 겨레의 영산인 백두산에서 뿌리를 내리고 두류산-낭림산-백산-북대봉-금강산-설악산-오대산-태백산-소백산-속리산-덕유산-지리산까지 줄기차게 달려온 장엄하고도 유장한 산줄기, 바로 백두대간이다. 단 한 번도 물줄기에 의해 잘리지 않고 이어져 내려온, 국토의 등뼈를 이루는 산줄기다. 따라서 백두대간에 대한 이해 없이 이 나라 이 땅에 대한 이해는 전적으로 불가능하다.

▲ 대관령이 위치한 횡계 고원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고위평탄면이 가장 전형적으로 발달한 곳으로, 해발 고도 800~1,300m에 이르는 곳에 50~100m의 소기복을 이룬 구릉성 지형이 나타나고 있다. 고원 한 가운데로 영동고속도로가 통과하고 있다.
일찍이 우리 선조들은 이 땅을 산과 강이 정연한 원칙에 따라 어우러져 있는 유기체와 같은 존재로 보았다. 그러므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장대한 산줄기를 이어오며 이 땅을 동서로 크게 갈라놓은 산줄기인 백두대간에는 이 땅위에 발을 내리고 사는 사람들의 정서와 기상, 그리고 자연관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우리나라 산줄기의 근간으로서 한반도 대자연의 한 가운데서 있는 이 백두대간은 어떻게 형성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으며, 또 우리 민족과 생을 함께 해온 동반자로서 백두대간은 어떤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일까.

태백산맥은 없다?
10여 년 전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산악계에서는 과거 우리 선조들이 전통적으로 인식해왔던 이 땅의 산줄기 백두대간의 의미를 되살리려는 움직임이 크게 일었다. 그 중심에는 1997년 의사 출신 산악인 조석필씨가 세상에 내놓은 <태백산맥은 없다>라는 책이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지질구조에 근거한 현행 산맥체계를 표현한 태백산맥을 과거 우리 선조들이 인식했던 전통적인 지리 개념에 근거한 백두대간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 백두대간의 석회석 채굴 광산. 산림과 동·식물 자원을 훼손할 뿐만 아니라 유역 하천의 수질 오염과 산사태를 유발하는 등 폐해가 매우 크다.
백두대간이라는 말은 조선 후기 실학자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산경표(山徑表)에 처음 나온다. 백두대간은 ‘산은 물을 건너지 못하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山自分水嶺)’는 개념을 중심으로 산의 흐름을 정한 것이기 때문에 산줄기가 계곡이나 강에 의해 끊어짐 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산줄기가 백두산과 통한다는 것이다.

산경표에 의하면 분수계를 따라 대간과 정간 그리고 13개의 정맥으로 분류했는데, 이러한 분수계를 따라 언어·풍속·생활 습관·기후 등 인문 및 자연 현상에 큰 차이를 나타내어 자연스럽게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선이 되었다. 그러므로 백두대간이란 개념에는 이 땅에 터를 잡고 살아온 우리 조상들이 땅과 물을 바라보는 시각,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관점이 포함돼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 태백산맥을 포함한 산맥체계는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藤文次郞·1856-1935)가 지질 구조에 근거하여 제시한 것으로, 실제 지형과 일치하지 않는 인위적인 구분이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삶과 크게 동떨어진 것이며, 여기에는 민족 정기를 말살하기 위한 일본인에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하여 사회 일각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그 비판의 화살은 지질 구조에 근거하여 산맥을 가르치는 필자가 몸담고 있는 지리 교육계로 곧장 날아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산맥 지도는 일제 강점기에 교육용으로 단순화시킨 것으로, 고토가 제시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만약 백두대간 개념에만 매달린다면 산맥의 성인(成因)과 관련하여 우리나라의 산맥 체계를 이해하고자 할 때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지형학과 지질학의 과학적인 지식에 기초한 사실을 전적으로 부정한 상태에서는 이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지질 구조에 근거한 현행 산맥 체계와 산줄기, 즉 분수계에 근거한 백두대간 체계는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태백산맥인가, 백두대간인가에 대한 논의는 하나를 없앤다고 해결될 성질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에게는 태백산맥도 중요하고 백두대간도 중요하다. 그러나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 땅이 힘겨운 산고(産苦) 끝에 만들어낸 산줄기, 백두대간에는 우리 민족의 정기와 생명이 살아 숨쉰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이다.

▲ 한반도 위성 사진. 동부로 고산지대가 몰려 있음을 볼 수 있다.
2300만 년 전 동해의 해저 지각이 융기하며 형성
그렇다면 이 땅의 조화와 질서를 한 아름에 품고 있는 백두대간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고생대 이래로 중생대에 여러 차례에 걸친 화산활동으로 큰 지각변동을 겪은 이후, 오랜 세월 동안 침식과 풍화를 받아 평탄화되어 준평원 지형을 유지해오고 있던 한반도는 신생대 제3기 중신세에 들어 다시 한 번 큰 격변을 겪게 된다.

한반도의 산지 지형은 지구를 덮고 있는 여러 개의 지각판들 가운데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과 태평양의 해양 지각판이 서로 수렴·충돌하는 지대에서 직·간접적으로 전달되어 오는 횡압력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약 2,300만 년 전에서 1,500만 년 전 사이에 태평양 해저 지각판과 유라시아 대륙 지각판이 충돌하며 대륙에 붙어 있던 일본 열도가 남쪽으로 떨어져 나가면서 대륙과 일본 열도 사이에 저지대의 분지를 이루는 새로운 지각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이 분지에 해수가 밀려들어오면서 동해가 생겨났다.

이후 동해 지각은 중심부의 연약대를 따라 해저가 점차 확장되었는데, 이때의 수평으로 밀쳐진 횡압력은 한반도가 위치한 서쪽 대륙 연변부를 들어올리는 힘으로 작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는 융기축이 동쪽으로 치우쳐 동해안 쪽은 높이 융기하여 급경사를 이루고, 서해안쪽은 동해안에 비하여 적게 융기하여 완경사를 이루는 비대칭적인 동고서저의 경동(傾東) 지형을 이루게 되었다. 백두대간의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등 고산들이 동해안 쪽에 집중 분포하게 된 이유는 바로 동쪽으로 치우친 지반의 융기 즉, 태백산맥의 형성으로 인하여 높이 솟아올랐기 때문이다.

고위평탄면은 산맥의 융기를 말해주는 증거 지형
한반도의 동쪽으로 치우쳐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는 태백산맥은 서울서 대관령 정상까지 직선거리로 약 200km인데 비해 대관령에서 동해까지는 약 20km로 그 비(比)가 10:1에 달할 만큼 동쪽으로는 급경사, 서쪽으로는 완경사를 이룬다. 동해안쪽에서는 마치 병풍을 두른 것처럼 가파르게 솟아 있지만, 정상부에 올라서면 기복이 작고 사면 경사가 완만한 구릉성 지형과 평탄한 고원성 지형이 곳곳에 넓게 분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지형을 두고 지형학 용어로 ‘고위평탄면’ 혹은 ‘고위침식면’이라고 한다.

이러한 지형들은 설악산, 오대산, 황병산, 태백산 등 태백산맥으로 이어지는 산지 곳곳의 정상부 능선 상에서 흔하게 살펴볼 수 있다. 특히, 삼양목장이 위치한 대관령과 평창군 도암면 횡계리 사이에 발달한 고위평탄면은 가장 전형적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이들 지형은 중생대 백악기 말 이래로 약 4,500만 년 동안의 오랜 세월에 걸쳐 침식을 받아 평탄해졌으며, 해수면과 큰 차이가 없는 저지대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신생대 제3기 중신세로 접어들면서 태백산맥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다른 지역과는 달리 습곡작용을 적게 받은 가운데 융기하였으며, 이후 침식과 풍화를 거치면서 현재의 구릉성 저기복 산지를 이루게 되었다. 해발 고도 500~900m의 고위면을 따라 발달한 이러한 저기복의 구릉성 평탄 지형들은 과거 한반도가 융기하기 이전의 지형을 보여주는 증거 지형으로, 태백산맥이 융기하여 형성되었음을 말해준다.

백두대간은 곧 문화적 차이의 경계

▲ 백두대간의 삼도봉. 충청(영동군)·전라(무주군)·경상(김천시)의 삼도(三道)를 구분 짓는 접점에 위치하여 삼도봉(1,176m)이라 일컫는다.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전 구간이 약 1,400km이고, 강원도 향로봉에서 지리산까지 남한만은 약 690km에 달한다. 남한만을 보면 남한 최북단의 향로봉(1,296m)을 비롯하여 설악산(1,708m), 오대산(1,563m), 태백산(1,567m), 소백산(1,439m), 속리산(1,058m), 덕유산(1,594m), 지리산(1,915m) 등 1,500m 안팎의 높은 산들이 연봉을 이루며 솟아 있다.

이렇게 험준한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길게 이어져 내려갔기 때문에 생활상도 대간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자연스럽게 양분되었다. 지질구조선에 따라 말하면, 태백산맥을 기준으로 동쪽의 영동(嶺東)과 서쪽의 영서(嶺西) 지역으로 구분되고, 소백산맥을 기준으로 호남권(전라도)과 영남권(경상도)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영동과 영서의 지역 구분에서 영(嶺)의 의미는 물론 단순한 고갯길이 아니라 장벽으로 이어진 산체, 즉 백두대간 자체를 말한다. 영남(嶺南)은 백두대간의 중부, 달리 말하면 소백산맥 중의 새재, 즉 조령(鳥嶺)을 기준으로 그 남쪽을 말한다. 호남(湖南)의 개념은 백두대간(소백산맥)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전북 장수에 위치한 덕유산 자락에서 발원하여 황해로 흘러드는 금강(과거에는 호강 湖江이라고 불렀음) 이남의 지역을 두고 일컫는 말이다.

이렇듯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라는 자연적인 장벽과 거기서 발원한 강으로 인하여 우리나라는 영동과 영서, 호남과 영남 지방 등으로 나뉘었다. 원활한 교통, 교류가 막히며 백두대간 동·서 양 지방 간에는 기후·풍토·언어·생활 습관 등에 큰 차이가 발생했다. 동서 간에 사람들의 말투를 갈라놓았으며, 음식 맛을 다르게 하였고, 가옥 구조와 영농 방식을 변화시키는 등, 동서 지방 간의 문화적 경계를 이루었다.

죽어 가는 백두대간을 살려야 한다

▲ 삼양목장이 위치한 횡계고원은 우리나라에서 고위평탄면 지형이 가장 모식적으로 나타나는 곳으로 최근 각종 영화 촬영지로 알려지면서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1990년대 초부터 일기 시작한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과 열기는 강원도 향로봉에서 지리산까지 국토의 등뼈를 밟아보려는 사람들의 종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하여 등산로가 넓혀지고 토사의 유출이 심해지는 등 백두대간의 자연성이 위협받는 결과를 낳기도 하여 최근에는 백두대간의 종주를 규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러나 현재 백두대간이 앓고 있는 환경 문제 가운데 등산객들에 의해 발생하는 환경 훼손 정도는 ‘새 발의 피’일 뿐이다. 1999년 백두대간의 환경 실태를 사례별로 조사·연구하여 발표한 녹색연합 서재철 생태보전국장은 백두대간의 환경 문제가 이보다 훨씬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지리산은 성삼재 도로개설로 자연 환경 파괴 및 생태계가 교란이 심화되고 있으며, 덕유산은 무주리조트 스키장 건설로 주목과 구상나무 군락의 훼손과 구천동계곡이 오염되고 있다. 속리산은 용화온천 개발로 남한강 상류 지역의 수질이 급격히 오염되고 있으며, 태백산에서 구룡산으로 이어지는 서북측 계곡은 군사 폭격 훈련장으로 이용되어 야생 동식물의 서식처가 크게 훼손되고 있다. 자병산은 한라시멘트 석회광산 개발로 보존 가치가 큰 임계 카르스트 지형이 파괴되고 있으며, 점봉산은 양수댐 건설로 천연림 보호구역의 파괴 및 남대천 수질 오염이 심화되는 등 백두대간 전 구간에 걸쳐 각종 난개발로 인하여 자연 환경이 크게 훼손되었다.

이처럼 백두대간이 흉물스럽게 파헤쳐지자 여러 환경단체들이 백두대간의 보호를 위해 한 목소리를 내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정부 차원에서도 생태의 보존과 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정부는 한반도의 핵심 산줄기이며 생태계의 보고인 백두대간을 잘 보전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2003년 12월31일 ‘백두대간 보호에 관한 법률(법률 제7038호)’을 제정·공포하고, 2005년 1월1일자로 시행에 들어간다. 그러나 백두대간이 통과하는 6개도의 30여 개 시군 자치단체들은 백두대간 보전의 필요성은 크게 공감하고 있지만, 백두대간 보호법이 개인의 재산권을 침해하고 지역 현실을 무시한 가운데 보호구역이 설정되었다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백두대간의 온전한 보전은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주민들의 협력 없이는 결코 성공을 거둘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나라 자연환경의 상징적 존재이기도 한 백두대간의 보전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시점에 와 있다. 주민들의 요구를 합리적으로 수용·조절하여 백두대간 보호법의 문제점을 보완, 이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데 우리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글 이우평 지질학자·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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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백두대간 역사지리②

온 국토 산천에 기를 생성시킨 ‘생명길’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인 산맥 대계

▲ 금대암에서 본 지리산 주능선. <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곳이라고 하여 두류(頭流)라고 한다’고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산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정해진 해답을 요구하는 형식논리적 질문이라기보다는 산과 우리의 근본적인 관계를 통찰하고, 우리의 생활과 문화에 배어 있는 산그늘과 같은 원형질, 그리고 겨레정신의 집단무의식에서 차지하는 산의 의미와 가치를 밝혀내는 화두(話頭)와도 같은 물음이다.

우리는 흔히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다만 산이 국토에서 차지하는 면적의 비율만이 아니라, 우리 일상의 생활 및 문화와 심지어 의식에서조차 산의 비중과 영향이 그만큼 깊고 크다는 뜻으로 넓게 해석해야 마땅하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산은 겨레 정신의 유전인자요, 고유한 전통문화라는 그릇을 구워낸 가마였으며, 삶과 죽음으로 순환하는 생활의 근거이자 토대로서의 1차적인 생태환경이었다. 다시 말해 산은 우리의 생명과 겨레문화를 잉태한 태반이자 탯줄이었던 것이다.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취락의 입지와 공간구조를 살펴볼 때 나라의 수도나 지방도시, 그리고 마을 등 규모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삶의 터전은 산의 둥지에 입지하였고, 비록 평지에 입지한 취락이라도 주위의 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리의 삶의 과정이 이럴진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 역시도 산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우리가 흔히 죽어서 돌아가는 생명회귀의 공간을 ‘산소(山所)’라는 일반명사로 부르는 사실도 바로 산이 갖는 의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단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산의 정기를 받아서 태어나고, 산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마시고 밭을 일구며 살다가, 다시 산으로 돌아가는 순환의 과정이 바로 겨레의 삶의 궤적이었던 것이다.

백두대간은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인 셈
백두대간은 산과 우리네 삶의 궤적에서 등줄기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아니 우리는 백두대간으로 말미암아 지리생활사와 겨레정신사의 능선을 형성할 수 있었다.

백두대간은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그 속에는 우리가 그토록 지향했던 삶의 염원과 이상향이 산새의 둥지처럼 깃들어 있고, 산과 계곡의 너울을 닮은 우리의 춤사위와 노래가락, 그리고 전통 조형적 선(線)의 자연미학이 풀려나오며, 겨레정신사에서 무(巫)의 얼 울림과 불(佛)의 청정심과 유(儒)의 경(敬)이 비롯되고, 하늘로 이끄는 부정(父情)의 고결함과 땅으로 내려와 사람들을 품고 감싸는 모정(母情)의 아늑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요컨대 백두대간은 국토 생활사의 척추로서 온 국토 산천에 숨길과 기(氣)를 생성시키고 전달하는 ‘생명 길’인 것이다.
그러면 백두대간의 역사지리는 어떻게 살펴볼 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산수를 체계적으로 기술하려고 노력한 대표적인 사람 중의 하나가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다. 그는 ‘산수고(山水考)’와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서 그는 우리나라 산천의 구조를 체계적으로 탐구하고 있다. 산과 물의 경위(經緯)를 고찰한 ‘산수고’란 글의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 성모석상.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고, 노고단에는 여자 산신의 전설이 있어 무(巫)의 발원지가 되었다.
‘하나의 근본이 만 갈래진 것이 산이고, 만 갈래 다른 것이 하나로 합하는 것이 물이다. 나라의 산수는 열둘로 나타낼 수 있다. 백두산에서부터 나뉘어 열두 산이 되고, 열두 산은 나뉘어 팔도의 뭇 산이 된다. 팔도의 뭇 물은 합하여 열두 수(水)가 되고, 열두 수는 합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물이] 흐르고 [산이] 솟아오르는 형세와, [산이] 나뉘고 [물이] 모이는 묘리(妙理)는 여기에서 가히 볼 수가 있다. 열두 산은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여덟은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치, 지리산이라 일컫는다.’
신경준이 정한 우리나라의 열두 산에는 특징이 있다. 첫째로, 삼각산을 제외한 열한 개의 산들은 모두 백두대간의 본줄기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그 중에서 삼각산은 수도 한양의 진산(鎭山)이었기 때문에 열두 반열에 올랐음은 물론이다.

두번째 특징으로는 이 산들이 우리나라 산맥체계(대간, 정간, 정맥)의 분기점이 되는 산들이라는 것이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의 시작이고, 낭림산은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의 가지가 비롯하는 곳이며, 두류산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출발하는 곳이고, 분수령은 한북정맥의 가지가 뻗는 곳이며, 태백산은 낙동정맥, 속리산은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및 금북정맥이, 육십치는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끝맺는 곳인 동시에 낙남정맥의 줄기가 뻗어나가는 지점이다.

‘산수고’와 ‘여지고’ 이후에는 각각 산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와 강을 중심으로 한 지리서가 편찬되어 산천에 대한 인식이 한층 더 심화되기에 이른다. 그 중 우리나라의 산줄기 체계를 밝혀 놓은 것이 <산경표(山經表)>이며, 강줄기를 체계적으로 정리하려고 시도한 저작이 정약용(1762-1836)의 <대동수경(大同水經)>(1814)이다. 이 두 가지는 비로소 고산자(古山子) 김정호(?-1864)에 의해 지지(地志)와 지도로 완성되게 되니, 이것이 바로 그의 <대동지지(大東地志)>(1861-1866)와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1861)다.
대간과 정간과 정맥의 차이
<산경표>는 우리나라의 산줄기와 산의 갈래, 그리고 산의 위치를 족보식으로 체계화하여 나타낸 지리서다. 더욱이 이 책의 특징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는 우리나라 산맥의 대계(大系)를 백두대간, 장백정간, 그리고 13개 정맥으로 체계화하여 분류해 놓고 있다는 점이다.

그 중 특히 주목되는 점이 산맥에 대한 대간과 정간, 그리고 정맥이라는 계통적인 개념 체계다. 여기에서는, 우리나라의 산맥 구조를 큰 줄기[大幹] 하나와, 여기서 갈라진 곧은 줄기[正幹] 하나, 그리고 열세 개의 뻗은 산맥[正脈]으로 보았다. 정간과 정맥 개념을 구분하여 썼다는 사실도 깊은 의미가 있는데, 정맥은 산맥 중에 강물을 끼고 있는 것을 특화(特化)하여 일컫는 개념으로 보인다. 즉 장백정간과 기타 정맥의 산수체계를 비교하면 분명한 차이점이 발견되니, 정맥들은 모두가 큰 줄기 강물을 사이에 끼고 뻗어나가고 있으나 장백정간은 그렇지 않다.
▲ 지리산의 품에 안긴 삶터. 우리네 삶의 터전은 산을 벗어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었으니, 산에서 시작하여 산의 맥과 산의 길을 따라 확산되면서 주거지를 이루어나갔다.
우리나라 산맥의 큰 줄기는 백두산에서 비롯한다. 그리하여 백두대간인데, 백두산을 머리로 하여 금강산 태백산의 등뼈를 타고 내려오다가 속리산 허리에서 아래로 지리산까지 이르는 큰 줄기를 말한다. 그래서 지리산의 옛 이름인 두류산(頭流山)에 관하여 <동국여지승람>(16세기)에서 ‘백두산의 산맥이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곳이라고 하여 두류(頭流)라고 한다’고 밝혀놓은 것이다.

잠깐 여기서 우리는 숨을 돌려 지리산의 비밀과 의미에 접근할 수 있는 또 다른 접근 방식을 생각해 보자. 바로 동양의학의 정수를 이루는 한의학의 경락 및 혈 체계와 요가의 차크라 구조로 백두대간과 백두산 및 지리산의 위상에 적용하는 방법이다.

한의학적인 인체의 혈 구조로 비유하자면, 백두대간이 경락체계 상의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으로서 백두산이 머리 정수리에 있는 백회혈(百會穴)이라면 지리산은 성기와 항문 사이에 있는 회음혈(會陰穴)과 같은 지리적 위치에 있으니, 두 혈 자리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자 자리가 된다.

한편 요가의 인체구조로 비유해도 보다 선명하게 인식될 수 있다. 요가에서는 인체의 기가 응집되어 생명의 원천이 되는 곳을 차크라라고 하는데, 제1 차크라는 항문 차크라로서 한의학의 회음혈과 같은 부위이며, 한반도의 산맥체계에서는 지리산이 그곳에 해당한다. 제1 차크라 위로 제2 단전, 제3 배꼽, 제4 심장, 제5 목, 제6 미간, 그리고 제7 정수리 차크라로 이어지는 중앙 기도(氣道)가 마치 백두대간의 줄기처럼 뻗어 있으며, 정수리 차크라가 한의학의 백회혈로서 바로 백두산의 위치가 됨은 물론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요가에서 세계를 창조한 샤크티 여신이 인체에 머무는 장소가 항문 차크라이며, 여기에는 삼각형의 태궁(yoni)이 있는데, 이 태궁 속에는 여신 쿤달리니 샤크티가 뱀의 형상으로 기도의 입구에 서 있다는 것이다.

지리산은 우리 땅에서 음(陰)의 극(極)
이러한 유비적(類比的)인 접근은 지리산에 숨겨진 지식고고학적인 비밀을 조명하는 유용한 방법론이 될 수 있다. 지리산의 천왕봉 아래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있었고, 노고단에는 여자 산신의 전설이 있어 무(巫)의 발원지가 되었던 사실은 샤크티라는 여신과 대비하여 볼 때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 지리산 기슭의 한 사찰인 법계사. 선조들이 지리산의 얼과 호흡하고 공명하며 펼쳐낸 ‘역사 경관’ 중 하나다.
그리고 뱀사골에서 뱀이란 땅이름 역시 뱀의 형상을 한 쿤달리니 샤크티와 대비될 수도 있다. 지리산의 신비로운 곳 ‘달궁’이란 지명은 태궁에 유비되는 ‘땅(딸->달)의 자궁’으로도 풀 수 있지 않을까? 풍수에서도 지리산은 우리 땅에서 음(陰)의 극(極)이고, 국토의 자궁의 표상으로서 어머니와 같은 중후한 지덕(地德)을 갖춘 산이라고 일컫는 것은 어찌 지리산의 형세에서만 연유했을 뿐이겠는가?

지리산 화개동천 어딘가에는 청학동과 같은 신선 세계의 이상향도 숨어 있고, 법계사, 화엄사 등의 이름에서 보는 것처럼 골짝마다 법계와 화엄의 극락정토를 구현해 놓은 사찰들이 당간을 높이 세우고 있으며, 천지를 한 몸으로 지탱할 듯한 꼿꼿한 기개를 갖춘 푸른 선비들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이들이 모두 지리산의 얼과 호흡하고 공명하며 정신문화를 펼친 역사의 산 증인이요 생생한 역사 경관들인 것이다.

지리산의 정신사에서 지리산인(智異山人)의 한 사람이라고 꼽을 만한 남명 조식(1501-1572)이 절창한 시를 한번 읽어본다.

천근이나 되는 저 종을 보게나(請看千石鍾)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는다네(非大無聲)
두류산(지리산)이 그렇지 아니한가(爭似頭流山)
하늘이 울어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다네(天鳴猶不鳴)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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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구간-지리산 르포①

잉걸불 같은 그리움의 산 지리산부터
천왕봉~노고단~정령치~고기리 르포

▲ 첩첩 유장한 지리산 연봉. 그 깊은 산 주름으로 하여 지리산은 한국인 모두에게 그리움의 산이 되는 건 아닐지.
잉걸불 같은 그리움의 산. 그렇다. 지리산은 그런 산이다. 그 산 그림자, 시정(市井)의 팍팍한 두레박질에 지친 영혼엔 영원한 안식의 요람이다.

만약 서울 종로 네거리(압구정 로데오 거리도 무방하다)에서 ‘나, 지리산 간다―!’ 하고 외친다면 어떤 반응이 돌아올까. 대부분 ‘얼마나 좋았으면, 아니 얼마나 좋을까?’ 하는 선망의 눈길을 보내지 않을까. 이미 마음은 중산리 어름에 닿아 있는 모습으로. 물론 ‘미친 놈!’이라는 반응도 섞여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더 진한 선망의 표현이 아닐까(그렇게 우기고 싶다).

산에 묻어둔 그리움을 꺼내 먹는 즐거움은 늘 과장된다. 무해한 과장이다. 그래서 제어가 어렵다. 눈썰매 타는 재미에 빠진 아이에게 꼭대기로 다시 걸어 오르는 수고가 조금도 문제되지 않는 것처럼, 산을 오르는 고통은 휘발성이 강하다. 오직 희열만이 사금(砂金)처럼 남는다. 하여, 우리(종주 취재팀, 그리고 독자)의 백두대간 종주도 ‘행복한 산행(山幸)’이어야 마땅하다.

‘속도’에 즐거움을 저당잡히지 말자

12월7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 터미널 특유의 부산스러움과 익명의 분위기가 싫지 않다. 느긋해진다. 자가용 승용차의 편리를 버리고 얻은 선물이다. 일탈의 불온한 자유보다 얼마나 건강한가. ‘산수간(山水間)을 노니는 즐거움’을 저잣거리에서 미리 맛본다.

같은 행색으로 만난 취재팀의 면면은 내 행복감에 구체성을 불어 넣는다. 좌장인 구인모 선생은 내게 산 보는 눈을 뜨게 해준 분이다. 그 분의 얼굴 주름만 봐도 나는 심산유곡을 느낀다. 사진가 손재식 선생은 나와 오랜 시간 작업을 해 왔다. 그와는 눈빛만으로도 느낌을 나눌 수 있다. 이들 두 분들과는 이미 백두대간을 종주한 바 있다. 그리고 또 심산씨(시나리오 작가)는 산악문학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지니고 있고, 김석우씨(영화감독)는 산악영화를 준비하고 있어 이들의 안목도 종주기의 표정을 풍부하게 해 줄 것이다.

▲ 천왕봉 오름길의 입석. 벽공 위로 천왕봉을 들어올리고 있다.
지난 밤 늦도록 지도를 펼치고 마음 산행을 한 탓일까. 버스에 몸을 싣자마자 눈꺼풀이 내려앉는다. 잠깐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저기 덕유산 좀 봐’ 하는 소리가 들린다. 손재식 선생이다. 역시 사진가답다. 정수리에 살짝 눈을 올려놓은 덕유산이 초로의 신사 같다. 나른한 관산(觀山)의 즐거움 속에서 진주에 닿는다.

일삼아 시외버스터미널로 가서 중산리 가는 버스를 탄다. 어차피 느긋한 산행을 즐기고자 한 바에는 어프로치 또한 고전적(?)인 방식이 좋지 않을까 해서다. 겨울에다 평일이어선지 등산복을 입은 사람은 우리들뿐이다. 산마을 사람들에 묻혀 가는 기분이 마치 고향 집으로 가는 느낌이다. 빛발이 사위어가면서 산 아래, 모든 것들이 산으로 삼투되기 시작한다. 앞으로 4일 동안 우리는 지리산의 한 부분으로 존재할 것이다.

중산리에서 월간山 일출맞이 산행 취재팀을 만났다. 평소에 자주 보는 얼굴인데도 반가움의 농도는 묽어지지 않는다. 늦은 저녁을 먹고 로타리산장(공식 명칭은 대피소지만 이 글에서는 산장으로 쓴다. 귀에 닿는 맛을 버리기 아까워서)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첫날밤을 보내기로 했다.
헤드램프를 징검다리 삼아 산으로 스며든다. 사그락 사그락, 살짝 얼어붙은 산길을 걷는 발자국 소리가 청명하다. 하늘도 청명하다. 잘 여문 별빛이 쏟아진다.

“나뭇가지에 별이 조롱조롱 열렸네.”
일출 취재에 동행한 진주의 산악인 유동훈씨의 말이다. 산사람의 ‘몸’이 쓴 시다. 머리로는 이런 표현을 쉽게 얻을 수 없다. ‘속도’에 즐거움을 저당 잡힌 산행으로는 어림도 없다. ‘보는 것은 하는 것만 못하고, 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 했다. 공자의 말이다.
로타리산장에서 첫날 밤, 오줌 누는 것을 핑계로 나는 몇 번이나 마당으로 나와 밤하늘을 우러러야 했다.

12월8일, 종주 취재팀에 두 명의 진주 산꾼이 합류했다. 이미 우리와 하룻밤을 지낸 김종현씨(흥한건설 진주~완사 간 도로공사 현장소장) 외에 새벽 버스 타고 조점선(진주 교보생명 직원), 정인숙씨(진서산악회)가 올라온 것이다. 남한 최고(最高)의 산을 동네 뒷산(?)으로 삼은 이들은 이미 백두대간 종주도 한 바 있다고 한다. 지리산을 젖샘으로 삼은 남강 물을 먹고 자란 그들은 확실한 ‘메이드 인 지리산’이다. 그들은 지리산을 잘 아는 것을 넘어 지리산과 친했다. 지리산과 육친적으로 만나는 그들의 모습에서 행복한 산행의 한 모범을 본다.

반야봉 두 봉우리 곡선의 미학이 가르치는 바

로타리산장에서 법계사로 키를 높이는 순간 입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6·25전쟁을 전후하여 법계사가 빨치산의 아지트였다는 설명이다. 이른바 ‘불꽃사단’, 지리산 하봉을 근거로 한 경남도당의 지휘본부가 법계사였다는 얘기다. 이 기막힌 모순이라니. 한국 근대사의 앙가슴이다.

더 이상 인간사의 비극이 산에 투사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산허리를 파헤치는 것보다 더 나쁜 형태의 자연에 대한 테러다. ‘산은 산, 물은 물(山是山 水是水)’이라는 말은 결코 암호 같은 선가의 화두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 사물을 보라는 것이다. 자연의 본성을 따르라는 것이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으로 오르는 길은 발걸음에 군더더기가 묻지 않는 암릉으로 시작된다. 이어서 푹신한 낙엽을 밟으며 숲을 헤치면 개선문이다. 벼랑 위에 선 입석과 산기슭 사이를 지난다고 붙인 이름인 것 같은데, 그래도 개선문이라는 이름은 좀 그렇다. 천왕봉으로 오르는 동문(東門)격인 이곳은, 다른 이름인 ‘개천문(開天門)’이 훨씬 잘 어울린다. 장터목에서 오르는 서문(西門)격인 ‘통천문(通天門)’과 짝하면 더욱 그렇다.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天柱)인 천왕봉으로 오르는, 하늘로 열린 길과 하늘로 통하는 길. 이래야 대구(對句)가 되지 않겠는가. 어쨌든 나는 개선문을 개천문으로 부르려 한다.

▲ 백두대간의 남쪽 들머리인 천왕봉에 선 취재팀. (왼쪽부터) 구인모(취재팀), 김종현(진주 진서산악회), 정인숙(진서산악회), 조점선(진주 교보생명 직원), 윤제학(취재팀, 필자), 김석우(취재팀).
개천문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다 보면 배낭을 내려놓지 않으면 안 될 곳에 서게 된다. 반야봉이 코앞으로 다가서는 듯하고, 그 왼쪽으로 노고단이 아슴아슴 희푸르다. 반야봉. 지리산의 단전 같은 곳이다. 원만한 두 봉우리가 절묘하게 하나를 이루는 경계 아닌 경계인 그 사이에서 나는 어렴풋이나마 반야의 뜻을 본다.

반야(般若)는 산스크리트어 prajna의 음역으로, 궁극의 지혜, 일체의 차별과 분별이 무너진 자리, 혹은 원융과 불이(不二)의 정신을 말한다. 불가에서는 근본적으로 사물을 피차(彼此), 성속(聖俗), 이사(理事) 따위로 나누어 보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의 삶은 끊임없이 둘 사이의 줄타기를 요구한다. 그렇다고 그 줄타기를 비관적으로 받아들일 건 없다. 그것이 바로 ‘업(業?카르마)닦음’이자 ‘업풀이’다. 살아내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평생 이쪽저쪽 살피다 탐진치(貪嗔癡)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반야봉의 두 봉우리 사이, 그 곡선의 미학이 가르치는 바. 차이의 인정, 차별의 타기(唾棄)다. 다시 봐도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조망의 즐거움을 접고 다시 길을 줄이자 천왕샘. 12월답지 않은 따뜻한 날씨인데도 천왕샘 위 벼랑에는 고드름이 달려 있다.
“저 고드름 따 먹어도 50만원 벌금 물까요?”
진지한 표정으로 엉뚱한 농담하길 좋아하는 손 선생의 말이다. 글쎄, 벌금 물 일까지는 아니겠지만 뒤에 올 사람을 위해 그냥 두는 것이 옳지 싶다.
흔히 한국 사람은 사철 선명한 계절의 순환을 복으로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겨울 지리산에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다 느낀다. 겨울답지 않은 날씨와 지리산의 높이 덕분이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으로 이어진 백두대간

천왕봉(1,915m). 드디어 백두대간의 남쪽 관문에 선다. 옛사람은 이 봉우리를 하늘을 받치는 기둥이라 하기도 했고, 사찰의 수호 신장인 사천왕에 빗대기도 했다. 전자에 부여된 의미를 확장하면 우리는 쉽게 백두대간의 실체를 그려볼 수 있다. 하늘을 받치는 기둥을 하나씩 이어 보면 된다. 지리산(천왕봉), 덕유산, 황학산, 속리산, 희양산, 소백산, 태백산, 두타산, 오대산, 설악산, 금강산…, 그리고 백두산.

▲ 영신봉에서 노을을 바라보는 취재팀.
우리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하늘 아래에 살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백두대간이 가지 친 정간과 정맥이 하늘의 비를 머금었다 풀어내며 우리를 살린다. 문명의 발달이 극에 달해 달나라로 출퇴근하는 시대가 온다 해도 인간의 삶은 천지의 조화가 아니고선 불가능하다.
선인은 또 다른 비유로 우리 국토의 실체를 일러 주었다. 이른바 수근목간(水根木幹), 우리 땅은 뿌리를 물(백두산 천지)에 둔 한 그루 나무라는 것이다. <고려사>에 도선 스님의 말로 기록되어 있다.

통천문을 향해 천왕봉을 내려선다. 말뜻에 따르자면 속계로 내려서는 셈이다. 하지만 만만치 않은 속계다. 오른쪽으로 길게 뻗은 지리산 최대의 칠선계곡과 왼쪽으로 중산리계곡으로 이어지는 협곡을 끼고 있다.
통천문을 지나 몇 개의 바위 봉우리를 지나면 평원 같은 고사목 지대다. 옛날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제석단이 있던 곳이다. 오른쪽으로 등산로에서 비껴 둥싯 제석봉(1,808m)이 솟아있다.

흔히 고사목 지대라고 부르는 제석단 일대는 자연적인 고사목 지대가 아니다. 본디 그곳은 구상나무가 원시림을 이루고 있던 곳으로, 현재의 모습은 6?25전쟁 후 도벌꾼들이 마구 잘라먹다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될 정도로 심각해지자 그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질렀기 때문이다. 구인모 선생은 1962년에 이곳에 왔을 때 장터목에 톱밥이 수북이 쌓여 있는 걸 봤다고 귀띔을 한다. 제재소까지 차려 놓고 도벌을 했다는 것이다.

무거운 마음으로 장터목산장에 도착했으나 금방 갠다. 국립공원 관리공단 직원들의 따뜻한 환대와 먼저 온 일출 취재팀이 지어놓은 따뜻한 밥이 있기 때문이다. 1653m 산마루에서의 포식=단순한 기쁨=장기 도보 산행의 백미. 너무 단순하지 않냐고? 이건 약과다. 불혹도 지천명도 넘긴 사람들이 맛있게 초코파이를 먹는 장면에서 단순은 완성된다.

옛날, 천왕봉 남쪽의 시천 사람들과 북쪽의 마천 사람들이 매년 봄가을 물물교환을 하던 장터목. 그 공평한 나눔의 현장을 상상하면서 연하봉(1,730m)을 향한다. 무시로 연기처럼 이내(煙霞)가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겠다.
연하선경을 지나자 홀연히, 무리지은 바위봉우리가 나타난다. 촛대봉이다. 휴식년제로 통제 구간인 곳이지만 관리공단의 허락을 얻어 조심스럽게 암릉을 밟아나가자 세석평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세석의 평전다움을 이곳에서 비로소 느낀다.

영신봉에서 일몰을 본다. 또 하루가 간다. 세석산장의 밤. 공단 직원들은 취재팀을 위해 세석의 생태에 대한 슬라이드를 보여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이어지는 우리들의 생태 토론. 자생 반달곰이 있느냐 없느냐? 지리산 생태에 밝은 유동훈씨는 10마리 생존 가능성을 추정한다. 생태 사진 작업을 한 바 있는 손 선생의 슬픈 결론은 최소 50개체 이하면 멸종은 필연이라는 것이다. 인공 복원의 상징, 반달이와 장군이의 운명은? 생태계의 후안무치한 포식자, 인간. 그 모진 이름이 왜 이리 부끄러운가.

만복대-그 이름만으로도 마음 속에 억새가 일렁인다

▲ 폐허가 된 외국인 휴양촌 교회건물. 찰나에 불과한 인간사의 속절없음을 본다. 영원은 오직 변화하는 자연으로 존재한다.
12월9일. 식생복원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세석평전의 모습을 위안 삼으며 또 길을 나선다. 서리 앉은 산기슭에 별처럼 햇살이 돋아나고 있다.
벽소령을 지나 연하천까지 편안한 걸음이다. 사방 걸림 없는 조망, 눈 아래로 첩첩이 물결치는 산줄기. 걸음마다 모습을 달리하는 우리 산하의 진경. 지리산 100리 종주(실측거리는 25.5km, 바로 이 실측거리의 만만함 때문에 낭패를 겪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인형 세석분소장의 말을 전한다. 숫자의 우상, 준비 없는 산행의 부비트랩이다)의 즐거움이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연하천산장에서 점심을 먹고 명선봉을 오른다. 명선봉(1,586m) 앞으로 토끼봉(1,534m)과 삼도봉이 우뚝하다. 예전엔 삼도봉은 토끼봉과 나란히 섰다 하여 날라리봉으로 불리었으나 경남, 전남, 전북 삼도의 경계가 합쳐진 지점이라는 이유로 삼도봉으로 개명되었다. 지역감정의 완곡어법으로 들려서 뒷맛이 개운치 않다는 것이 취재팀 대부분의 반응이다. 토끼봉과 삼도봉 사이는 좌우로 수림이 바다처럼 펼쳐지는 화개재. 왼쪽 계곡을 따라 흐르면 칠불사와 쌍계사를 지나 화개장터에 닿는다. 그래서 고개 이름도 화개재다.

삼도봉을 지나 오른쪽으로 반야봉의 옆구리에 기대어 임걸령으로 내려선다. 옛날, 임걸이라는 도적 두목이 지리산 일대를 쥐락펴락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런데 내가 바로 여기서 그 옛날 임걸에게 치도곤을 당한 신세가 되고 만다. 조금씩 새큰거리던 왼쪽 무릎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아파온다. 글품 파느라 노트북만 끼고 산 벌이다. 기꺼이 받기로 했다. 씩씩하기만 한 진주의 두 ‘줌마 파워’에 경의를 표하면서.

지리산 주능선 중 가장 편하다는 삼도봉에서 노고단(1,507m)까지의 그 길을 나는 가장 고통스럽게 걸었다. 느린 걸음 탓에 깜깜한 길을 걸으며, 볼 것이 없다는 사실을 오히려 위안 삼았다. 행복한 산행의 필수 조건이 체력임을 절감한다. 머리에 우선하는 몸의 정직. 새삼 되새기는 산의 가르침이다.

12월10일. 노고단산장에서의 따듯한 하룻밤은 보너스까지 준비되어 있다. 아침밥을 마치기 바쁘게 김승희 과장이 촬영한 야생 삵을 본다. 2시간 동안 문수대 화장실에 숨어 기다리다 4마리 야생 삵을 관찰하고, 그 중 한 마리를 촬영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에서 김 과장은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산사람의 에너지와 직업적 긍지가 듬뿍 담긴 모습이다. 지리산의 야성이 회복될 것이라는 가냘픈 희망의 근거를 본다.

종석대(1,356m)에 올라 게으르게 사위를 살핀다. 노고단 천왕봉, 만복대는 물론 멀리 무등산까지 구름 위로 떠다닌다. 성삼재에 내려서서 배낭을 매만진 다음 호화로운(?) 오찬을 즐긴 후 만복대를 향한다.
만복대(1,433m). 입속에서 혓바닥만 굴려도 마음 속에 억새가 일렁이는 곳이다. 순한 능선으로, 두어 시간이면 족하지만 그리 만만한 길은 아니다. 작은고리봉(1,248m)과 같은 덩치 큰 봉우리들을 숨겨두고 있기 때문이다. 설악산의 공룡릉이 육식공룡의 잔등이라면 만복대 능선은 초식공룡의 그것이다.

▲ 세석 가는 길에서 바라본 반야봉(화면 왼쪽 높은 봉우리). 화면 위 오른 쪽의 아스라한 봉우리가 노고단이다.
산과 산 사이에, 우리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다

아픈 다리를 끌다시피 만복대 정상 아래에 이르자 반가운 얼굴이 마중을 나온다. 함께 출발하지 못한 심산씨가 가족과 함께 만복대에 막영 준비를 해 놓고 패잔병 같은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내 배낭이 그의 등에 눕는다.
우모복까지 꺼내 입고 만복대에서 밤을 맞는다. 매운 바람이 눈물샘을 들쑤신다. 그런데도 고개는 자꾸만 하늘로 젖혀진다. 별은 또 왜 그리 빛나는지. 찬 바람에 부르르 몸을 터는 큰 별의 등쌀에 작은 별들은 빛 부스러기처럼 종적 없이 반짝인다.

12월11일. 종주 첫 산행의 마지막 날이다. 산과 함께 깨어난다. 차오르는 빛과 스며드는 어둠 사이에 선다. 우리는 저마다 만복대의 기슭 한 자락씩 차지하고 해를 안는다. 날마다 맞이하는 똑 같은 해인데 왜 이리 각별한가. 자기최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것만일까? 하늘과 땅의 순일한 결합, 그 성스런 만남에 제의적으로 동참하는 까닭이라고 하면 너무 거창할까.

▲ 섬진강 긴 물줄기를 담은 지리산의 가슴을 본다. 노고단에서 광양 백운산 쪽을 바라본 모습.
음식 쓰레기 처리에 가까운 아침식사를 마치고 정령치로 내려선다. 반야봉 가지능선 위 잎 떨군 나뭇가지들이 강아지 솜털 같다. 그 위로 아침 햇살이 찰랑댄다.
정령치까지는 경쾌한 내리막. 휴게소에서 잠시 숨을 고른 다음 어슬렁거리듯 고리봉(1,304m)을 오른다. 주능선을 벗어난 샛길로 개령암지 마애불상군(보물 제1123호)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보인다. 마실 나서듯 그곳으로 발길을 옮긴다. 속도 경기하듯 해치우는 대간 종주자에겐 쓸데없는 걸음이다. 12구에 달하는 마애불이 숨은 그림처럼 돋을새김 돼 있다. 고려 양식으로 가장 큰 불상 옆에는 명월지불(明月之佛)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비로자나, 즉 빛의 부처라는 말이겠다. 신격화 된 빛의 초상에 합장의 예를 올린다.

고리봉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기리까지는 급전직하. 구르듯 미끄러져 아스팔트 위에 뒹구는 다른 시간을 만난다. 산과 산 사이에, 우리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다.

/글 윤제학·사진 손재식

진혁진의 백두대간과 산행정보

백두대간 구간별 코스
제1구간 : 천왕봉~세석~벽소령~삼도봉~화개재~노고단~성삼재
제2구간 : 성삼재~만복대~정령치~고기리~수정봉~고남산~사치재
제3구간 : 사치재~복성이재~치재~봉화산~광대치~월경산~중재
제4구간 : 중재~중고개재~백운산~영취산~민령~깃대봉~육십령
제5구간 : 육십령~할미봉~남덕유산~삿갓봉~동엽령~못봉~신풍령
제6구간 : 신풍령~삼봉산~소사재~삼도봉~대덕산~덕산재
제7구간 : 덕산재~부항령~삼도봉~밀목재~화주봉~우두령
제8구간 : 우두령~바람재~황악산~궤방령~가성산~눌의산~추평령
제9구간 : 추풍령~용문산~큰재~윗왕실임도~백학산~지기재
제10구간 : 지기재~신의터재~화령재~봉황산~갈령삼거리
제11구간 : 갈령삼거리~피앗재~속리산~문장대~밤티재~늘재
제12구간 : 늘재~청화산~밀재~대야산~불란치재~ 버리미기재
제13구간 : 버리미기재~악휘봉~은치재~희양산~백화산~이화령
제14구간 : 이화령~조령산~조령~마폐봉~부봉~탄항산~하늘재
제15구간 : 하늘재~포함산~대미산~새목재~차갓재~황장산~벌재
제16구간 : 벌재~문봉재~저수재~시루봉~묘적봉~도솔봉~죽령
제17구간 : 죽령~소백산~국망봉~늦은맥이고개~마당치~고치령
제18구간 : 고치령~마구령~갈곶산~늦은목이~선달산~도래기재
제19구간 : 도래기재~구룡산~곰넘이재~태백산~화방재
제20구간 : 화방재~함백산~두문동재~금대봉~매봉산~피재
제21구간 : 피재~건의령~푯대봉~덕항산~큰재~황장산~댓재
제22구간 : 댓재~두타산~청옥산~연칠성령~고적대~이기령~백복령
제23구간 : 백복령~석병산~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제24구간 : 대관령~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동대산~응복산~구룡령
제25구간 : 구룡령~갈전곡봉~조침령~단목령~점봉산~한계령
제26구간 : 한계령~대청봉~공룡릉~마등령~황철봉~미시령
제27구간 : 미시령~상봉~신선봉~대간령~마산~진부령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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