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역사지리

스스로 주인 되는 푸른 정신 일깨운 산
유학자들은 ‘숨어 닦고 쉬며 노닌다’는 뜻 실천

그 이름조차도 덕스럽고 넉넉한 산 덕유산(德裕山)은 우리 겨레의 산 중에서도 언제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세상살이를 모두 겪고 소소한 마음으로 돌아온 이는 누구든 맑은 개울가 햇살 드는 양지녘의 따뜻한 산자락에 에워싸여 둥지를 틀고 싶은 그러한 곳이다.

옛 선현들은 ‘덕이 만물을 기르고 윤택하게 한다(德潤身)’고 하였는데, 덕이란 바로 산의 속성(體)을 일컬은 말인 것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산은 베푼다. 기를 베풀고 퍼지게 할 수 있어 만물을 살린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덕유산이란 이름은 산의 본성을 오롯이 담고 있는 산이름이 아니고 무엇인가.

덕유산의 지명 유래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화를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어 산속에 숨었던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전설이 있으니 얼마나 덕유산을 겨레를 살리는 신령스런 산으로 존숭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덕유산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은거하였고, 덕유산 지역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남쪽 지방 명산 중 덕유산이 가장 기이’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산줄기 계통에서 위로는 삼도봉과 아래로는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과 연결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한에서는 한라, 지리, 설악에 이어서 네 번째로 높은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다. 일찍이 미수 허목 (許穆·1595-1682)은 덕유산기(德裕山記)에 적기를 ‘남쪽 지방의 명산은 절정을 이루는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다(南方名山絶頂, 德裕最奇)’고 찬탄하기도 하였다.

덕유산은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 대봉, 지봉, 거봉, 덕유평전, 중봉을 넘어 향적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 덕유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수계(水系)로 보자면 덕유산은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이 발원함으로써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오늘날 덕유산은 그 산세와 위치로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되기도 한다. 미학적인 시각으로 보아 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이고, 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 의해 역사지리적인 사실을 고증하여 보면, 원래 덕유산은 현재 무주의 북덕유를 일컫는 것이었고, 남덕유산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봉황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쓴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도 조선 후기의 덕유산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에 인용하여 본다.

‘덕유산은 무주에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황봉, 불영봉, 향적봉이라 일컫는데, 향적봉이 더욱 높다. 산으로 들어가서 계곡을 건너는 것이 세 개인데 향적암(香積菴)이 있고, 남쪽에는 석정징벽(石井澄碧)이 있으며, 서쪽에는 향림(香林)이 있다. 즐비하게 서 있는 봉우리의 이름으로써 이 암자의 배경을 삼았으니 곧 상봉(上峯)이다. 봉우리 정상의 바위에는 단(壇)의 모양이 있고, 또 철마(鐵馬)와 철우(鐵牛)가 있으며, 동쪽에는 지봉(池峯)이 있고, 남쪽에는 계조굴이 있으며, 북쪽에는 칠불봉이 있는데, 모두 조령의 지맥이다. 서쪽으로 가면 대봉(臺峯)이 되고, 지봉, 백암봉, 불영봉, 황봉이 되는데, 백암에서 북쪽으로 돌면 향적봉이 된다. 그 서북쪽 산록의 골짜기가 매우 기이하다.’

충청, 전라, 경상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

덕유산은 한반도에서 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적 경계를 결정짓는 유역권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다’고 주목되고 있다.

덕유산의 권역은 전북 무주군 및 장수군과 경남 거창군 및 함양군, 그리고 충북 영동군 등 3개도 5개 군에 걸쳐 있으니 이러한 덕유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가야, 그리고 백제의 접경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역사경관이 덕유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와 신라의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덕유 남사면 지맥의 자락에 해당하는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도 발견된 바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청동기에는 집단적인 주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역사시대에 와서는 삼한시대와 가야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불교 사찰이 덕유산에 입지하기 시작하는데, 북상면의 송계사, 영각사 등이 이미 통일신라기에 건립된 사찰이고, 이러한 불교유적은 북상면 농산리의 석조여래입상, 갈계리의 삼층석탑 등에서 현존한다.

덕유산 자락에 취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특히 덕유산은 유학자들의 은거지요 은사(隱士)의 산으로 자리매김 될 만하다. 유환, 임훈, 정온, 신권, 송준길, 임수준, 임여남, 조상식, 신재서 등 수많은 선비들이 덕유산에서 은거하며 덕을 수양하였는데, 그들은 예기(禮記)에 ‘군자는 숨어 닦고 쉬며 노닌다(君子 藏焉, 修焉, 息焉, 遊焉)’는 뜻을 덕유산에서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유환(劉·1337-1409)은 고려조가 망하자 덕유산 남쪽의 거창군 장기리 창마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은거한 덕유산의 선비로서 정온(鄭蘊·1569-1641)과 신권, 송준길 등이 있다.

덕유산의 은자 정온 선생은 안음현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한 후 경상도 관찰사와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68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화의로 결정되자 할복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월에 가마에 실려 내려와서도 집에 들지 않고 덕유산 모리에 숨어서 은거하다가 73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은 현재 북상면 농산리 673번지에 모리재라는 장소로 중수되었다. 인근의 위천면 강천리에는 선생의 종택이 있으며, 거기에는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신권 선생은 중종 때의 학자로서 학문에 부지런하여 성리학에 밝았고, 산천에 은거하면서 안빈낙도하며 수신(修身)하였다. 그는 1540년에 구연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현지에는 그의 사후에 세워진 구연서원과 그 문루인 관수루(觀水樓)가 있다.‘관수(觀水)’라는 뜻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연유한 것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은 웅덩이가 차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고 하여 학문을 수양함에 있어서의 올바른 지표와 자세를 가리킨 것이다.

관수루 곁의 계곡에는 수승대로 잘 알려진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 혹은 구연대가 있어 아름다운 계곡미와 수석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성천, 산수천, 분계천과 갈천이 합류하여 위천으로 모여서 빚어 놓은 덕유산 계곡의 절경 중의 하나다. 신권 선생은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미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자가 산수 간에 있으니(亭於山水間)
물을 사랑하고 산을 잃은 것은 아니네(愛水非遺山).
물은 산의 가에서 흘러나오고(水自山邊出)
산은 물을 따라 둘러 있는데(山從水上還)
신령한 구역이 여기에서 열리니(靈區由是闢)
즐거운 뜻이 더불어 관련된다네(樂意與相關)
그러나 인(仁)과 지(智)의 일을 생각하면(然爲仁智事)
모든 것이 오히려 부끄럽네(擧一猶唯顔)

병화와 전란 피하는 은신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은 율곡과 사계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나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병자호란 뒤에 북상면의 월성에 와서 초당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후인들이 성천서원을 세워서 중수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사선대(四仙臺)로, 이곳은 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송기(宋基) 혹은 송대(宋臺)라고도 불렸다. 이곳은 덕유산에 있는 신비스럽고 빼어난 신선경의 한 곳이다.

덕유산은 유학자들에게는 은거의 산이었지만,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병화와 전란을 피하는 피난 보신지이며, 또한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의 산실이기도 했다. 민중사에서 덕유산은 정감록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기도 하였고, 농민항쟁이나 동학혁명, 그리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십승지란 정감록에 소개된 열 곳 가량의 피난 보신의 땅으로서, 남격암산수십승 보길지지에 의하면,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茂朱舞豊北洞傍陰 德裕山 則無不避危)’고 하였으며, 피장처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는데 숨어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무풍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으로 현존하고, 원학동은 현재 북상면 월성 계곡, 혹은 거창읍 학리라는 설이 있다. 월성 계곡은 덕유산에서 산수미가 빼어난 곳의 하나이며, 학동에는 4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세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입지로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민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농민항쟁과 항일독립운동이다. 농민항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1년 11월 금산의 이광성(李光星) 등이 덕유산에 진을 치고 웅거하였다고 한다.

덕유산 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의 하나는 1906년부터 북상면 월성에서 시작한 것으로 북상면 출신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서 항일 의거를 결의하고 산중에 막사를 마련하고 활동하여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박화기 형제들은 덕유산의 의병 200명에게 자금과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1908년 7월11일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내용에도 덕유산에 약 40명의 독립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렇듯 덕유산은 겨레의 산의 역사에서 그 이름처럼 넉넉한 덕스러움으로 은자들과 민중들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주인 되는 푸른 정신을 일깨운 산이었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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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식생

깃대종 광릉요강꽃과 날개하늘나리를 살리자

백두대간 능선의 희귀식물 보전방안 찾아야

▲ 광릉요강꽃.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지정된 8종의 멸종위기식물 I급 가운데 하나로서 절멸위기에 처한 식물이며, 광릉, 화천 등 중부 지방에서 주로 자란다.

지구 온난화 때문에 전나무, 가문비나무, 주목 같은 북방계 침엽수들이 한반도에서 차츰 쇠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관심을 끌고 있다. 그러나 기상학자들은 평균기온이 올라가기는 하겠지만, 겨울철 가장 낮은 온도는 간헐적으로 계속하여 나타날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 100년 내에 충청 지방에 난대성 활엽수가 자라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내다본다. 난대성 식물들이 겨울철 간헐적인 맹추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식물 분포는 기후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다. 우리나라 산지 지역에서 기후는 그 산의 위도와 고도에 의해 결정된다. 이로 인해 산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류와 숫자가 달라진다. 한반도의 고산 거의 모두를 거느리고 있는 백두대간은 고도에 의한 식물 분포면에서 흥미로운 점들을 많이 제공한다.

날개하늘나리 분포의 남방한계선

지리산이나 덕유산처럼 저위도에 자리 잡은 산에서도 북부지방에나 분포할 만한 식물들이 자라는 것은 고도가 높기 때문이라는 점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고도가 높은 곳이어서 그만큼 기온이 낮기 때문에 북방계 식물들이 자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 식물들의 분포는 빙하기 잔존식물 이론으로써 설명이 가능하다. 빙하기 때 저위도 지방까지 내려와 자라던 북방계 식물들이 기온이 올라가면서 저지대에서는 살지 못하고 높은 산에서만 살아 남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덕유산 일대에서 발견된 적이 있는 백합과의 날개하늘나리가 그런 예에 딱 맞는다. 이 식물이 이곳에서 발견된 것은 상식을 초월하는 일이다. 백두산 등 북부 지방에서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이 식물은 남한에서는 태백 일대에서 발견된 적이 있을 뿐이었다. 꽃이 크고 아름답기 때문에 채취꾼들의 표적이 되어 발견되자마자 사라질 위험이 높은 정도이기 때문에 자생한다면 눈에 띄기 쉬운 식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남한 다른 곳에서 자생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백두대간을 종주하며 식물을 조사한 적이 있는 국립수목원 이병천 박사로부터 이 식물이 덕유산에 있다는 얘기를 듣고 1997년에 현장을 확인한 바 있다. 궂은 날씨였고, 꽃의 상태도 좋지 않아서 사진으로 남기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슬라이드로 촬영하여 보관하고 있다.

금방망이라는 국화과 식물은 그 동안 한라산 정상에서만 살아남은 빙하기 잔존식물로 알려져 왔다. 이후 덕유산 능선과 태백산 일대에서 발견되었다. 덕유산에서는 필자 등이 1997년 조사하면서 밝혀졌다.

최근 이 식물은 뜻밖에도 서해안 섬들에서 발견되어 식물지리학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남한에서는 한라산과 백두대간의 몇 산에만 매우 드물게 자라는 고산식물이 백령도 등 서해안 섬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저지대에, 그것도 비교적 흔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혹시 다른 종으로 분화하여 적응한 것은 아닌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지만 아직 이에 대해 밝혀진 바가 없다.

이러한 생각은 백두산 등지에서 자라는 삼잎방망이라는 식물이 금방망이와 매우 유사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삼잎방망이는 금방망이와 여러 특징이 비슷하고 잎 모양만 다른데, 그 잎 모양이라는 것이 연속적으로 변하여 정확하게 구분하기 어렵다. 또한, 금방망이가 속하는 국화과 식물들은 현재 가장 왕성하게 종분화를 하고 있는 식물들이라는 점에서도 그런 추측이 가능하다. 백령도의 금방망이는 덕유산의 금방망이와 같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앞으로의 연구가 주목된다.

날개하늘나리나 금방망이는 능선에서 자라고 있으므로, 저위도지만 고도 높은 백두대간이 이 식물들의 분포를 결정지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이론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식물이 덕유산 일대에서 발견된다.

광릉요강꽃.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식물은 경기도 광릉에서 발견되어 우리말 이름을 얻었다. ‘요강’이라는 이름은 꽃 모양에서 유래하였다. 다른 이름은 치마난초인데, 잎에 난 주름과 잎 모양이 치마를 연상하게 하므로 붙여졌다.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이래 명지산, 천마산, 포천, 화천 등지에서 추가로 발견되었다. 이들 중부 지방에서 300km 이상 떨어진 이곳 덕유산 일대에서 발견된 것은 1990년대였다. 원광대학교 길봉섭 교수가 처음 보고하였으며, 필자는 1997년 이후 계속해서 모니터링을 해왔다.

원래 분포지에서 300km 떨어진 곳에 새 자생지

광릉요강꽃의 덕유산 분포는 빙하기 잔존 이론으로서는 해석하기 곤란한 점이 있다. 추운 곳에서만 사는 북방계 식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빙하기 잔존식물이라면 불연속 분포를 하더라도 해석이 가능하지만, 경기와 강원 일대에서만 한정되어 분포하는 식물이 뚝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덕유산의 광릉요강꽃은 원래 분포지인 경기와 강원의 그것에 비해 더욱 큰 가치가 있다 하겠다. 즉, 보전에서 있어서도 더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남덕유산 일대에서 비교적 흔하게 발견되는 흰참꽃이라는 진달래과의 떨기나무도 광릉요강꽃 못지않게 분포가 특이한 식물이다. 세계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이 식물은 우리나라의 경우 지리산, 가야산, 남덕유산 정상 일대의 바위지대에만 분포하는 희귀식물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홋카이도부터 큐슈까지 넓은 지역에 걸쳐서 자라는 식물이 한반도에서는 일본과 가까운 동해안 지역이 아니라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 지역에만 분포하는 것이 흥미롭다. 진달래나 철쭉나무와 같은 속에 속하는 식물이지만, 꽃이 흰 색으로서 매우 작으므로 쉽게 구별된다.

덕유산 국립공원 안에서는 남덕유산, 서봉 일대의 바위지대에서 발견된다. 남덕유산 일대의 고도가 조금 낮은 곳에 분포하는 노각나무도 분포 영역으로 볼 때 흰참꽃과 비슷하게 백두대간을 축으로 한 한반도 남부 지역에서만 자라서 특이하다. 6월에 아름다운 꽃이 피는 이 나무는 지리산, 덕유산, 소백산, 가야산 등지에 분포한다.

육십령에서 남덕유산을 거쳐 무룡산, 백암봉, 빼재에 이르는 백두대간 40여km 구간 가운데 고산식물 또는 북방계 식물이 가장 많이 분포하는 지역은 남덕유산 일대다. 특히 서봉과 남덕유산 일대의 암반이 발달한 지역에 많은 종류의 고산식물이 분포하고 있다. 등대시호, 솔나리, 땃두릅나무, 구름병아리난초, 가야산은분취, 참바위취, 큰앵초, 개회향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솔나리는 현재 환경부가 멸종위기식물 II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는 식물로서, 북방계 고산식물이다. 강원도에서는 설악산 등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지만, 남쪽에서는 몇몇 고산지역에서만 발견된다. 특히 남덕유산의 솔나리는 가야산 국립공원, 구미의 금오산과 함께 이 식물 분포의 남방한계선을 형성하는 지역에 자라는 것이므로 의미가 더욱 크다.

등대시호 역시 남덕유산이 분포의 남방한계선이다. 이 여러해살이풀은 남한에서는 설악산과 소백산 도솔봉, 속리산 등지의 바위지대에만 한정 분포하는 식물로서 솔나리보다도 생육지나 개체수가 적은 식물이다. 도솔봉과 속리산 일대에는 몇몇 개체만이 자라고 있지만, 남덕유산 일대에서는 이보다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다.

남덕유산에서 백암봉을 향해 북으로 향하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선백미꽃을 꼽을 수 있다. 설악산 등 몇몇 곳에서만 알려져 있는 이 식물은 자생지가 드물고, 꽃 색깔이 노란 색 또는 갈색으로 변이가 있으므로 전문가들도 구분하기 어려운 종류다. 백두대간 덕유산 구간의 능선에서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데, 이곳 개체들은 6월에 노란 꽃이 핀다.

이밖에도 이곳 능선에는 북방계 희귀고산식물인 두메닥나무, 환경부 멸종위기식물 II급인 자주솜대, 갈퀴현호색, 고본, 가야산은분취, 참바위취, 애기앉은부채, 한라부추, 죽대, 산오이풀, 꽃며느리밥풀, 난장이바위솔, 모싯대, 털쥐손이, 지리바꽃, 개쑥부쟁이, 까치밥나무, 정령엉겅퀴 등이 자라고 있다. 덕유산을 대표하는 식물로서 원추리 군락을 드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뿐만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식물들이 덕유산 능선에서 자라고 있는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조금 비껴나 앉은 덕유산 상봉 향적봉 일대에서도 북방계 고산식물이 자라고 있다. 일대의 주목 군락이 특징적인 경관을 형성하고 있으며, 이 속에 두메닥나무, 선좁쌀풀, 나도바람꽃, 족도리풀, 덩굴개별꽃, 꿩의다리, 모데미풀, 동의나물 등이 어우러져 자라고 있다.

덕유산 일대에서는 꽃 색깔이 다른 등 일반적인 종류들과 다른 특징을 보이는 변이체들도 발견된다. 보라색 계통의 꽃이 피는 벌깨덩굴, 처녀치마, 동자꽃, 한라부추, 꼬리풀, 속단 가운데에 흰 꽃을 피우는 흰벌깨덩굴, 흰처녀치마, 흰동자꽃, 흰한라부추, 흰꼬리풀, 흰속단 등이 발견되었고, 노란 열매를 다는 겨우살이와 달리 붉은 열매가 달리는 붉은겨우살이도 자라고 있다.

이들은 학술적으로는 품종 정도로 구분하여 그리 특별하게 다루지 않지만, 사진의 피사체로서는 호감이 가는 것임에 틀림없다. 생태학적으로는 이처럼 변이체를 많이 키워낸다는 것은 그만큼 백두대간 덕유산 일대의 생태적 환경이 다양함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귀한 식물 많지만 다양성 위협 요인도 날로 늘어

덕유산 숲속에서 발견되는 식물 가운데 특기할 만 것으로는 모데미풀, 꼬마은난초, 남부승마, 나도제비란, 미치광이풀, 수정란풀, 가지더부살이 등을 꼽을 수 있다.

모데미풀은 남덕유에서 북덕유를 향해 북으로 달려오던 백두대간이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는 백암봉~비봉 능선의 북쪽 수계가 이루는 숲속에서 발견된다. 개체수가 많을 뿐더러 생육 상태도 좋다. 한라산, 지리산, 덕유산, 소백산, 태백산, 점봉산, 설악산 등지에 분포하는 이 식물은 현재 소백산 일대에서 가장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고, 한라산과 설악산이 각각 분포의 남방한계선, 북방한계선이 되고 있다.

한라산, 강원도 광덕산 등 백두대간이 아닌 몇몇 산에서도 자라고 있지만, 주로 백두대간 상의 산들에서 발견된다. 이 때문에 필자는 남한의 백두대간을 대표하는 풀꽃을 꼽으라면 조심스레 이 식물을 추천하고 싶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속 식물이며, 4월 하순부터 5월 초순에 꽃이 핀다.

꼬마은난초는 주로 따뜻한 곳에 자라는 식물이다. 제주도, 울릉도 등지에 자라는데, 덕유산 일대에서는 적상산에서 발견되었다. 이른 봄 숲속에서 가냘프게 피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발견할 수 있는 꽃이다.

남부승마는 최근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이현우 박사가 우리나라 특산종으로 발표한 식물로서 아직까지 식물도감에도 기록되지 않은 종이다. 남부승마라는 우리말 이름은 필자가 처음 쓰기 시작하였는데, ‘남부’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한반도 남부 지방에서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이다. 지리산과 덕유산 일대의 숲속에서 자라며, 꽃은 7~9월에 핀다.

지난 2월부터 발효된 야생동식물보호법은 멸종위기에 처한 동물과 식물을 멸종위기식물 I급과 II급으로 지정하여 보호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따라 환경부는 64종의 식물을 멸종위기식물 I급 및 II급으로 지정하였는데, 이 가운데 덕유산에 분포하는 식물은 멸종위기식물 I급인 광릉요강꽃을 비롯하여, 멸종위기식물 II급인 솔나리, 가시오갈피, 자주솜대 등이다. 가시오갈피의 경우 우리나라에서 덕유산 일대에 가장 많은 숫자가 자라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덕유산은 이렇듯 귀한 식물들을 키워내고 있지만, 날로 식물 다양성이 위협받고 있는 실정이다. 이화여대 교수를 역임한 원로식물분류학자 이영노 박사는 사범대학을 갓 졸업하고 20대에 덕유산 자락의 안성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하며 덕유산 식물을 조사하던 시절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 향적봉 부근에서 설앵초라는 희귀고산식물을 발견하여 채집한 적이 있다고 증언한다. 하지만, 필자의 조사를 포함한 이후의 어떤 조사에서도 이 식물은 다시 발견되지 않고 있다.

덕유산 구간은 높이와 거리가 만만치 않아서 누구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거리가 길다는 것은 산역이 넓다는 것을 의미한다. 넓고 높은 산이 덕유산인 셈인데, 이런 덕에 덕유산에는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여러 식물들이 보금자리를 틀고 살아가고 있다.

필자는 오래 전 삿갓재대피소가 지어질 때 이에 대한 우려를 나타낸 적이 있다. 북덕유와 남덕유를 하루에 종주하기 어렵기 때문에 종주 탐방객이 상대적으로 적어서 백두대간 덕유산 구간의 많은 희귀식물들이 보전될 수 있었는데, 중간에 산장을 지으면 종주 등산객을 유입하는 결과를 낳고, 이는 결국 덕유산의 희귀고산식물과 고산생태계를 훼손하게 될 것이라는 논리였다. 탐방객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국립공원 관리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삿갓재대피소를 짓는다는 명분이 지금 잘 지켜지고 있는지 모르겠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 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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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운산 르포

황소걸음으로, 기나긴 오르막인 백운산정으로
중재~백운산~영취산~깃대봉~육십령 구간 답사

개 짓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을 열자 왈칵 겨울 아침이다. 눈이다. 천하는 순백이다. 때때로 하늘과 땅은 소리 없는 수작으로도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이 풍경소리 같다. 누굴까. 이렇게 우아한 소리의 발자국을 남길 줄 아는 새에게 ‘까, 마, 귀’라는 흉측한 이름을 달아준 사람은.

‘싸르락, 싸르락―.’ 눈 쓰는 소리에 산마을의 적막은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만인가. 이런 풍정 속에 서본 지가. 구름으로 몸을 바꿔 낮게 내려앉은 하늘. 거리감이 좁혀지면서 가까이 다가선 산. 성긴 눈발 사이로 퍼져 가는 굴뚝 연기. 중기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서 받은 백두대간의 깜짝 선물이다.

▲ 하늘에서 본 백운산(1,278.6m) 정상 일대.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에서는 가장 우람한 산으로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에 걸쳐 있다. 중재에서 시작되는 백운산 오름길은 구름 위로 솟구치는 듯한 된비알이다.<헬기 조종=심현보 산림청 산림보호국 기장>

백두대간의 산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 마을의 아침이 내게 묻는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 도대체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 사랑과 배신이 필요하냐고. 두고 온 서울을 생각한다. 내가 사는 그곳. 넘치는 잉여로 하여 가난한 곳. 소나기 같은 욕망의 사막. 그리하여 우리는 ‘한 모금 물’을 위해 산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다. 산에 목숨을 의탁하지 않는 도회의 사람들에게도 산은 목숨줄이다. 그래서 산은 신성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대간 종주가 힘든 이유들

민박집을 나설 때까지도 눈은 그치지 않는다. 올 겨울 산행에서 처음으로 스패츠까지 갖추고 중재로 향한다. 중기 마을에서 중재로 향하는 농로 초입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한눈에 봐도 대간꾼들임을 알겠다. ‘산꾼’이란 말처럼 ‘대간꾼’이란 말도 이제는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타고 온 승합차의 한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다. 눈길에 미끄러진 게 분명해 보였다. 대간 종주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사실 대간 종주는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가시기로 치면 대간 등성마루까지의 접근이 더하다. 여기에 시간을 내는 어려움까지 고려하면 걷는 일이 오히려 단순하다. 이래서 대간 종주가 힘들다는 거다.

▲ 민령에서 깃대봉(1,014.8m)으로 오르는 길의 억새 숲.

중기 마을에서 중재까지는 30분 남짓. 눈길에 적응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중재에서 배낭을 벗고 잠시 숨을 고른다. 고갯마루에서 백운산으로 향하는 대간 등성마루의 초입에는 수십 개의 표지기들이 걸려 있다. 구간 종주자들이 입산과 하산의 기점으로 삼는 고개마다 이런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는 서낭당을 떠올린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도깨비한테 홀리지 않은 다음에야 길 잃을 염려가 없는데 굳이 저렇게 흔적을 남겨야 할까 하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것을 건 사람들이 의식을 했건 하지 않았건,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유전자처럼 남아있는 산신에 대한 경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은 땅과 마을의 수호자인 서낭신을 모시는 제단을 특별히 꾸미지 않았다. 당집을 짓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 앞의 큰 나무나 고갯마루의 돌무더기로 제단을 삼았다. 고갯마루를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주워 돌무더기 위에 던졌다. 길가를 배회하는 잡귀로부터 나그네 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간의 표지기에서 나는 서낭신을 모시던 우리네 옛 전통의 희미한 핏줄을 본다. 저 티베트 고원의 기도깃발이 티베탄들의 자연신에 대한 경배라면, 대간의 표지기는 백두대간에 대한 대간꾼들의 우러름이다.

▲ 참나무 아래 눈 덮인 조릿대 숲을 지나 중고개재를 향하는 취재팀. 산죽의 청신한 기운이 백운산의 군더더기 없는 이미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중재에서 이어가는 대간 길은 시작부터 된비알이다. 코방아를 찧을 듯 10여 분 다복솔과 관목 숲을 헤쳐 나아가자 작은 봉우리다. 이곳에서부터 중고개재(755.3m)까지는 약간의 표고차로 리드미컬하게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중고개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왼쪽으로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로 내려서는 낙엽송 숲길의 밀밀한 허허로움이 꽤나 유혹적이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을 향하는 길은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높은 산을 앞에 두고 고도를 깎아먹는 이런 내리막길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게 던져주는 당근이 이런 것일까. 중고개재에서 백운산까지 도상 거리 약 3.2km 중 3km 정도는 계속되는 급한 오르막이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정도. 백두대간을 통틀어 봐도 이처럼 내리막이라고는 없이 줄창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높은 봉우리와 낮은 봉우리 사이에는 많은 봉우리들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백운산의 경우는 오로지 오르막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정상은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경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은 틀렸다. 사전 정보는 유용하다. 이러한 사정을 미리 알고 느긋하게 황소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백운산이란 이름에 값하는 풍광

백운산 정상을 1.2km 남겨둔 지점에서 조망 바위를 만난다. 눈은 그쳤고 발 아래는 구름바다다. 백운산(白雲山)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풍광이다. 복기를 하듯이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본다. 눈 아래로 봉화산과 멀리 지리산이 섬처럼 구름 위로 솟아 있다.

다시 몸을 돌려 세워 백운산을 향한다. 언뜻언뜻 하늘이 열리면서 갓 내린 눈 위로 은빛 빛살이 퍼떡인다. 자잘한 나뭇가지엔 솜털 같은 상고대가 열려 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참나무 우듬지 위로 설화가 만발이다. 2기의 무덤 곁에 억새 사이로 꽤 너른 헬기장 나온다. 헬기장 옆 올망졸망한 바위에 정상(1,278.6m) 표지석이 서 있다. 백운산 정상에서 지리산을 바라본다. 구름 사이로 천왕봉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지리의 연봉들이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낸다.

▲ 중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취재팀. 성황나무 같은 들머리의 거목에서는 신령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캠프사이트로도 좋을(바람이 도와준다면) 헬기장 곳곳엔 하루 산행객들의 질펀한 점심 잔치가 한창이다.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다. 우리가 선 대간 등성이의 왼쪽이 전북 장수군이고 오른쪽이 경남 함양임을 실감한다.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고, 궁중 요리처럼 보이는 화려한 도시락도 있다. 대간 종주를 하면서 하루 산행객들이 가장 부러운 순간이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 잔 하세요’ 하면 절대 사양하지 않을 텐데, 끝내 그런 일은 없다. 그놈의 ‘무게’ 때문에 먹는 즐거움의 상당부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단무지 없는 짜장면(절대로 자장면은 아니다) 같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라 하여 식도락을 마냥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다. 차갑고 딱딱한 빵 조각도 달다. 아귀(餓鬼)에게도 축복이 있을진저. 다음으로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호사는 커피. 일회용 커피는 사절이다. 취재팀의 구인모 선생이 개발한 휴대용 드립에 필터를 걸고 원두커피를 내린다. 그런데 언제 보아도 이 휴대용 드립이 걸작이다. 60~70년대에 대중목욕탕에서 보았던, 때 건지는 그물을 축소시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이 드립은 눈 녹인 물의 각종 건더기(?)를 거를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만약 등산 장비메이커에서 이와 유사한 물건을 대량 생산한다면 분명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구인모 선생의 장비 튜닝 솜씨는 신의 경지다. 한 예로, 군용 숟가락(여럿이 코펠 밥을 먹을 때 재빨리 많은 양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품)도 그의 손을 거치면 딴 물건이 된다. 일단 가운데를 잘라 무게(?)를 줄이고, 리벳으로 두 개를 이었는데 그냥 이은 게 아니고 길이를 줄일 수 있는 접철식이다. 이쯤이면 가히 신의 경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백운산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육십령까지는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편안한 길이다. 중재에서 백운산까지의 종주자가 트레커였다면, 백운산에서 육십령까지의 종주자는 하이커로 보면 된다.

이 구간에서 나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가지 했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 도상 거리 약 2km와 백운산에서 영취산 아래 3km 지점까지 만보계로 걸음 수를 재봤다. 각각 7,200걸음과 7,150걸음. 쉬는 동안 헛걸음까지 들어간 숫자이므로 약 7,000걸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경사도에 의해 2km와 3km가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시간도 2시간 정도로 같았다. 여기서 평균값을 얻을 수 있겠다. 5km에 14,000걸음.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을 걷는 데 몇 걸음이 필요하고, 걷는 데만 드는 시간이 얼마일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걷는 데만 182만 걸음 필요

▲ (上) 백운산 정상 1.2km 전의 전망 바위에서 지리산 쪽으로 바라본 모습. 지리산은 구름바다에 빠져버렸다 (中) 영취산을 지나 대간 주릉에서 살짝 비껴나 솟은 덕운봉(956) 동쪽 기슭 (下) 덕운봉 근처 전망대 바위에 선 취재팀. 눈 위로는 백운산 정상, 눈 아래로는 함양군 서상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선 백두대간의 총길이를 보자.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정확한 길이는 신만이 알 것 같다. 자료에 따라서 도상거리 1,400km, 1,625km, 1,800km로 들쑥날쑥이다. 남한 구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640km, 680km, 690km로 자료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실거리는 얼마일까. 포항 셀파산악회에서 50m 단위로 끊어서 실측한 결과는 735.6km. 이들의 실측을 신뢰했을 때 도상거리 690km는 상당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참고로 GPS로 측정한 거리는 680km라 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어림잡아 도상거리 650km 정도로 추정하고, 5km에 14,000걸음이라는 평균값으로 총걸음 수를 계산해 보자. 1,820,000걸음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등성마루를 걷는 데만 182만 걸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감을 위해 서울~부산 간 걸음 수와 비교해 보자.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부산 고속터미널까지는 약 430km. 이 경우는 평지이므로 군인들의 제식 동작의 바른 걸음, 즉 보폭 77cm 1분 120보로 환산해 보자. 약 55만8천 걸음이다. 시간으로는 약 77시간. 하루에 10시간씩 걸으면 8일 정도.

걸음 수만으로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종주에 필요한 걸음 수를 서울 부산에 대입하면, 왕복을 하고도 편도로 한 번 더 갔다가 서울서 대전까지 갈 수 있다. 시쳇말로 진짜 장난 아니다. 다시 백두대간으로 돌아가서, 5km 14,000걸음을 4시간으로 잡았을 때 총 소요시간은 약 520시간. 잠도 자지 않고 걸으면 21일, 하루 10시간씩 걸으면 52일쯤 걸린다(겨울철이 아닌 경우). 뛰듯이 걷는 종주가 아니라면 실제로 이 정도가 소요된다.

재미삼이 시작한 얘기였는데 너무 길어졌다. 개인적인 걸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참고는 될 것 같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신상 정보를 밝히자면, 키 168cm 몸무게 52kg으로 좀 왜소한 편이다.

햇살이 사선으로 비치며 산주름이 선명해질 무렵 영취산(1,076m)에 닿는다. 대간이 정맥 하나를 풀어 놓는 지점이다. 서쪽으로 무령고개를 넘어 남서쪽으로 장안산을 지나 주화산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진다. 한남금북정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남정맥은 대둔산과 계룡산을 올려 세우며 부여로 향하고, 호남정맥은 남서쪽으로 휘돌며 내장산과 추월산 무등산을 일으키고는 광양 백운산에서 발길을 멈춘다. 금강·섬진강·영산강·동진강·만경강·탐진강 등의 물줄기들이 모두 이 두 산줄기를 젖샘으로 몸집을 키워 대전·공주·부여·전주·광주·순천 등의 충청·호남 지역을 품에 안는다.

영취산에서 무령고개까지는 10분 정도의 내리막길.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샘과 캠프사이트가 있다.

영취산 정상에서 20분쯤 지나자 억새 숲이 나타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캠프사이트다. 오른쪽 기슭으로 100m쯤 내려가면 물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친다. 눈을 녹이기로 했다.

억새 숲에서 30분쯤 지나자 오른쪽으로 덕운봉이 보이고, 잠시 후에 영취산과 백운산이 한눈에 담기는 전망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전망을 즐기기 위해 좋은 캠프사이트를 지나친 우리는 등산로 위에 대충 집을 짓고 하루를 접는다. 옅은 구름에 어린 달무리가 곱다.

한 여인 논개의 이름을 떠올리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바람도 잠잠했는데, 900m의 고도는 밤새 우리가 내뿜은 숨결을 얼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텐트 안은 성애로 한 겹 덧씌워져 있다. 해독 불가능한 첨가물로 가득한 눈 녹인 물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나자 대기는 다시 태양의 온기로 충전된다. 산죽밭을 헤치며 깃대봉을 향한다. 민령을 지나도 과거 종주자들이 대간 줄기의 표지로 삼았던 송전철탑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철거 후의 흔적만 보인다. 철탑 자리를 지나 오름길의 정점에 서자 시야가 환히 열린다. 왼쪽 기슭 아래에 저수지가 보인다.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의 오동제(梧桐堤)다.

▲ 백운산 정상에서 서래봉(동쪽 가지줄기 위의 봉우리) 방향 조망.

한 여인을 떠올린다. 백두대간의 서쪽 기슭에서 태어나 동쪽 기슭에 묻힌 그 여인의 이름은 논개. 오늘날 우리는 그녀에게 ‘충절’을 헌사하고 있지만, 현실 속의 그녀에게 주어진 건 가혹한 운명뿐이었다. 주촌 마을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빚더미에 치인 외삼촌이 부자의 첩으로 그녀를 팔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는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모녀는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들며 최경회의 가솔이 된다. 이후 현감 부인인 죽자 그녀는 최경회의 아내가 되었다.

▲ 깃대봉에서 백운산 방향으로 바라본 대간의 등성마루. 울끈불끈 하면서도 순한, 그러면서도 장쾌한 우리 산줄기의 한 전형을 본다.

하지만 이건 모진 운명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회가 진주성 싸움에서 패하고 남강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에 그녀는 왜군들의 승전 연회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야우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당시 논개에게 바쳐진 헌사는 충절이 아니었다. 왜적의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에서는 장례마저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촌 마을의 맞은편, 백두대간 동쪽 기슭 함양군 서상면 방지 마을에 묻히게 되었다.

깃대봉(1,014.8m)에 서자 해가 머리 위에 걸린다. 눈앞으로 육십령 너머 할미봉과 서봉 그리고 남덕유산의 웅좌가 모습을 드러낸다. 깃대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듯한 형국이다. 선명한 능선길은 아니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하지만, 표지기만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이슥한 계곡을 지나는 듯한 내리막길이 편평해질 쯤, 코끝 찡할 정도로 반가운 샘이 나타난다. 깃대봉샘으로 이름 붙여진 샘이다. 살뜰히 보살핀 무주 사람들의 고마운 손길이 느껴진다.

하산길의 성찬은 역시 라면이 제격이다. 샘물로 포만감을 한 번 더 누린 다음 육십령을 향한다. 30분쯤 지나자 육십령 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드문드문 자동차 소리가 정겹다. 여운처럼 이어지는 산행의 즐거움이다. 산은 우리에게, 권태와 혐오, 혹은 지긋지긋함마저 느끼게 한 사물에 대해서도 말간 눈인사를 건네게 하는 생기와 여유를 준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1) 지도와 친해지자

백두대간 종주는 이제 붐업 단계를 지나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백두대간에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트레일이 선명하다. 길 찾기를 위한 독도는 거의 필요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지도는 성가신 짐일 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즐거운 종주를 위해서 자주 지도를 봐야 한다.
자주 지도를 봐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 파악이 안 되면, 맑은 날씨에도 오리무중인 느낌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산 아래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지, 봉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걷기만 하면 즐거움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샘이 없는 경우 어느 계곡으로 내려서야 물이 있을지를 파악하는 데도 지도는 필수다. 육안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예측하고 행동하면 고통이 적다.
합리적 운행 계획과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서도 지도는 꼭 지니고 다녀야 한다. 수시로 운행 거리를 확인하며 시간 사용 계획을 세우면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체력 안배로 괜한 육체적 피로도 줄이는 길도 지도에 있다.
만에 하나, 길을 잃었거나 부상을 당해 탈출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면? 지도가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심리적 안정은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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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삼원불패의 영원한 명당 논개 묘터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풍취나대(風吹羅帶)라는 천하 명당

도대체 풍수지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단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바람과 물이란 요소로 땅의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라는 용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준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장풍과 득수라는 풍수용어는 장서(葬書)라는 중국의 유명한 풍수고전에 나오는 말이다.

장서(葬書)는 중국 진(晉)나라의 곽박(郭璞·276-324)의 저서로, 가장 오래된 풍수 서적 중에 하나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읽어보는 책으로 일명 장경(葬經), 금낭경(錦囊經)이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주로 형기풍수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책에 풍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 천하의 명당에 안장된 논개묘 원경.

‘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풍수지법 득수위상 장풍차지=풍수의 법은 물을 얻는 것이 먼저이고 바람을 갈무리 하는 것이 다음이다)’

그런데 장풍득수라는 말은 인간의 눈을 통하여 땅의 형세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즉, 유형의 형기풍수(形氣風水)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이기풍수(理氣風水)로, 말하자면 영생피살(迎生避殺)을 한다는 의미로,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여 묘나 집을 지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영생피살이란 건택조장(建宅造葬·집을 짓거나 묘를 씀)하는 시기에 따라 적합한 시기를 왕(旺), 생(生)이라 하고, 부적합한 시기는 퇴(退), 쇠(衰), 사(死), 살(殺)이라고 나누어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이 이론은 우리나라 왕조사에 등장하는 소위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같은 이론이다.

형기풍수의 장풍득수와 이기풍수의 영생피살

장풍득수가 주된 내용인 형기풍수는 역학(易學)에서 말하는 ‘체(體)’가 되고, 학문에 비유를 하자면 미술 과목에 해당되는 한편, 이기풍수는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용(用)’이 되며 수학 과목에 비유된다.

체와 용은 우열을 비교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이므로 풍수지리학은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를 모두 알아야 비로소 완벽한 학문이 된다. 일부 풍수사는 형기풍수만 강조한 나머지, ‘이기풍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양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체와 용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대원칙에 따르면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는 모두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기존의 형기풍수 이론은 대동소이하여 누구나 대체적으로 인정하지만, 이기풍수에 있어서는 학파가 다양하고 자신의 이론만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풍수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풍수계에서는 아예 이기풍수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다양한 이기풍수 이론 중에 현공풍수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우리나라 풍수계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편인데, 여기에 간단히 소개하며 아울러 지기의 쇠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풍수지리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동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주역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주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국 주(周) 시대에 만들었다는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한편 주역을 영어로는 ‘The Book of Change(변화의 책)’이라고도 하는데, 변화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영역한 말을 감안하면 주역은 한 마디로 변화의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 풍수의 개념을 밝힌 장서(사고전서). 장경 또는 금남경이라고도 부른다.
주역의 주된 이론은 크게 변역(變易)과 불역(不易) 두 가지로 대분된다. 변역(變易)이란 천지간의 모든 상황과 사물은 항상 변하고 바뀜으로써 음과 양의 두 기운이 교섭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춘하추동이라는 계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불역(不易)은 변하는 가운데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를 들면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그 위치가 바뀌지 않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기존의 이기풍수 이론은 시간성이 배제된, 즉 고정된 불역의 이치만 적용하였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풍수지리가 미신이라는 말조차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반해 현공풍수는 불역과 변역의 이치를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신묘한 결과가 나온다.

20년을 주기로 운이 바뀐다

형기풍수지리는 공간 개념을 위주를 하는 분야이고, 이기풍수지리는 시간개념을 위주로 하는 분야다. 따라서 현공풍수법의 기본원리는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을 배합한 풍수학문이다.

공간에 시간이란 개념이 더하면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기본적인 상식이며 만고의 진리다. 현공풍수는 시기에 따라 운이 변화되는데 20년을 주기로 운이 바뀐다. 운은 1운에서 9운까지 있으며, 9운이 지나면 다시 1운부터 연속적으로 되풀이된다.

1운에서 3운까지 60년간을 상원(上元)이라 하고, 4운에서 6운까지 60년간을 중원(中元)이라 하고, 7운에서 9운까지 60년간을 하원(下元)이라고 하며, 이들을 총칭하여 삼원구운(三元九運)이라고 한다. 올해 2005년은 8운 두번째에 해당된다(삼원구운 연표 참조).

땅에도 생왕휴수의 변화가 있다

▲ 경남 진주시 남강의 의암.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바위의 이름이다.
사람에게 생노병사가 있고 계절에도 춘하추동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에도 생왕휴수(生旺休囚)가 있어 일정한 시기가 되면 땅의 기운도 끝나기 마련이며, 그리고 또다시 지기가 생성된다. 기존의 이기풍수이론에서는 지운 기간에 대한 명쾌한 이론이 없지만 현공풍수이론은 언제 지기가 소멸되는지, 그 시기를 간단한 계산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지운이 끝나는 시기를 현공풍수에서는 입수(入囚)되었다고 하는데, 입수가 되면 지기가 휴식상태가 되기 때문에 재정양패(財丁兩敗)가 되며, 그 피해의 정도는 아주 심하다. 다만 지운을 계산하는 방법은 전문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락하고 지운기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풍수지리를 실생활에 잘 활용하여 우리의 인생을 행복한 삶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여 명당을 찾으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지만, 지운이 언제 끝나고 지운이 끝나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무조건 조상의 묘를 오랫동안 보존한다는 것은 현공법으로 보면 언젠가는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지운이 끝나는 시기에는 화장을 하여 국토를 이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화장할 경우 길흉화복의 유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화장하는 동시에 인체에 유전인자의 근본이 되는 DNA도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화장하면 모든 것이 소멸되어 무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길흉화복도 자연히 소멸되므로 어떠한 풍수지리 이론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지운은 형기풍수로 판단하여 일반적인 땅과 특별히 좋은 명당에 따라 기간이 다르다. 지기의 쇠기운(衰期運)은 평범한 땅일 경우의 지운기간이고, 특별히 좋은 땅일 경우에는 삼원이 거듭되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땅을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라고 한다.

석류 속 같은 입술로 죽음에 입맞춘 논개

인걸은 지령이라고 했던가. 백두대간 덕유산 자락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지만 논개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위기의 시기에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국한 의기 논개가 있다. 논개의 우국충절을 변영로 시인(1898-1961)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논개(論介·1574-1593)는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다. 논개는 18세 되던 해인 1591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로 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낙동강에서 건져 비밀리에 운구하였지만, 당시에 시신매장을 거부당하여 한밤중에 몰래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사연은 당시의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논개를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풍취나대(風吹羅帶)라는 천하의 명당에 안장했다. 19살 꽃 다운 나이에 의롭게 순절하고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했지만, 이른바 삼원불패지지의 명당은 논개의 이름을 땅속에서 만천하에 내놓고야 말게 된다.

땅이 알아본 논개의 붉은 혼

▲ 전북 장수군 의암사당에 있는 논개 영정.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岩(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朱村) 마을이다. 최근에 이곳에는 논개의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전북 장수읍 두산리에는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을 만들었다. 논개의 묘는 1998년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고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를 세웠다.

물론 이는 살신성인한 논개의 충절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지만, 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보면 풍취나대의 명당에 안장된 논개묘의 명당 덕분이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비단 옷고름처럼 논개의 기상은 삼원불패로 영원히 휘날릴 것이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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