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역사지리

스스로 주인 되는 푸른 정신 일깨운 산
유학자들은 ‘숨어 닦고 쉬며 노닌다’는 뜻 실천

그 이름조차도 덕스럽고 넉넉한 산 덕유산(德裕山)은 우리 겨레의 산 중에서도 언제나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아련한 고향과도 같은 산이다. 세상살이를 모두 겪고 소소한 마음으로 돌아온 이는 누구든 맑은 개울가 햇살 드는 양지녘의 따뜻한 산자락에 에워싸여 둥지를 틀고 싶은 그러한 곳이다.

옛 선현들은 ‘덕이 만물을 기르고 윤택하게 한다(德潤身)’고 하였는데, 덕이란 바로 산의 속성(體)을 일컬은 말인 것 같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서도 ‘산은 베푼다. 기를 베풀고 퍼지게 할 수 있어 만물을 살린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덕유산이란 이름은 산의 본성을 오롯이 담고 있는 산이름이 아니고 무엇인가.

덕유산의 지명 유래에 관하여 전하는 말로 ‘임진왜란 당시 수많은 사람이 전화를 피해 이곳에 들어왔는데, 신기하게도 왜병들이 이곳을 지날 때마다 짙은 안개가 드리어 산속에 숨었던 사람들을 보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다’는 전설이 있으니 얼마나 덕유산을 겨레를 살리는 신령스런 산으로 존숭하였는지 알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덕유산에는 예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은거하였고, 덕유산 지역은 전란이 미치지 않는 십승지(十勝地)의 하나로 꼽히고 있었다.

‘남쪽 지방 명산 중 덕유산이 가장 기이’

덕유산은 백두대간의 산줄기 계통에서 위로는 삼도봉과 아래로는 백운산을 거쳐 지리산과 연결해주는 중요한 위치에 있다. 남한에서는 한라, 지리, 설악에 이어서 네 번째로 높은 해발 1,614m의 향적봉을 주봉으로 삼고 있다. 일찍이 미수 허목 (許穆·1595-1682)은 덕유산기(德裕山記)에 적기를 ‘남쪽 지방의 명산은 절정을 이루는데 덕유산이 가장 기이하다(南方名山絶頂, 德裕最奇)’고 찬탄하기도 하였다.

덕유산은 무풍의 삼봉산에서 시작하여 수령봉, 대봉, 지봉, 거봉, 덕유평전, 중봉을 넘어 향적봉에 올랐다가 다시 중봉, 덕유평전을 거쳐 무룡산, 삿갓봉, 남덕유산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달리는 100리의 큰 줄기를 형성하였다. 수계(水系)로 보자면 덕유산은 낙동강의 지류가 되는 황강과 남강의 발원지가 될 뿐만 아니라 금강의 상류를 이루는 하천이 발원함으로써 낙동강 수계와 금강 수계의 분수령을 이룬다.

오늘날 덕유산은 그 산세와 위치로 흔히 북덕유와 남덕유로 구분되기도 한다. 미학적인 시각으로 보아 북덕유는 이름처럼 넉넉하고 웅장한 육산(肉山)이고, 남덕유는 장쾌하고 힘찬 골산(骨山)이다. 그런데 대동여지도에 의해 역사지리적인 사실을 고증하여 보면, 원래 덕유산은 현재 무주의 북덕유를 일컫는 것이었고, 남덕유산에 해당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봉황봉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성해응(成海應·1760-1839)이 쓴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도 조선 후기의 덕유산을 알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에 인용하여 본다.

‘덕유산은 무주에 있다. 가장 높은 봉우리를 황봉, 불영봉, 향적봉이라 일컫는데, 향적봉이 더욱 높다. 산으로 들어가서 계곡을 건너는 것이 세 개인데 향적암(香積菴)이 있고, 남쪽에는 석정징벽(石井澄碧)이 있으며, 서쪽에는 향림(香林)이 있다. 즐비하게 서 있는 봉우리의 이름으로써 이 암자의 배경을 삼았으니 곧 상봉(上峯)이다. 봉우리 정상의 바위에는 단(壇)의 모양이 있고, 또 철마(鐵馬)와 철우(鐵牛)가 있으며, 동쪽에는 지봉(池峯)이 있고, 남쪽에는 계조굴이 있으며, 북쪽에는 칠불봉이 있는데, 모두 조령의 지맥이다. 서쪽으로 가면 대봉(臺峯)이 되고, 지봉, 백암봉, 불영봉, 황봉이 되는데, 백암에서 북쪽으로 돌면 향적봉이 된다. 그 서북쪽 산록의 골짜기가 매우 기이하다.’

충청, 전라, 경상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

덕유산은 한반도에서 삼도(충청, 전라, 경상)의 중점이 되는 전략적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행정적 경계를 결정짓는 유역권의 분수령을 이룬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시대 이중환의 택리지에도 ‘덕유산은 충청, 전라, 경상 3도가 마주친 곳에 있다’고 주목되고 있다.

덕유산의 권역은 전북 무주군 및 장수군과 경남 거창군 및 함양군, 그리고 충북 영동군 등 3개도 5개 군에 걸쳐 있으니 이러한 덕유산이 차지하고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가야, 그리고 백제의 접경지가 되었다. 그 대표적인 역사경관이 덕유산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백제와 신라의 관문인 나제통문(羅濟通門)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 권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시기는 선사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덕유 남사면 지맥의 자락에 해당하는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도 발견된 바 있으니, 아무리 늦어도 청동기에는 집단적인 주거가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윽고 역사시대에 와서는 삼한시대와 가야를 거쳐 통일신라시대에 여러 불교 사찰이 덕유산에 입지하기 시작하는데, 북상면의 송계사, 영각사 등이 이미 통일신라기에 건립된 사찰이고, 이러한 불교유적은 북상면 농산리의 석조여래입상, 갈계리의 삼층석탑 등에서 현존한다.

덕유산 자락에 취락이 본격적으로 형성된 것은 조선시대부터다. 특히 덕유산은 유학자들의 은거지요 은사(隱士)의 산으로 자리매김 될 만하다. 유환, 임훈, 정온, 신권, 송준길, 임수준, 임여남, 조상식, 신재서 등 수많은 선비들이 덕유산에서 은거하며 덕을 수양하였는데, 그들은 예기(禮記)에 ‘군자는 숨어 닦고 쉬며 노닌다(君子 藏焉, 修焉, 息焉, 遊焉)’는 뜻을 덕유산에서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유환(劉·1337-1409)은 고려조가 망하자 덕유산 남쪽의 거창군 장기리 창마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은거하였으며, 그밖에도 조선시대에 은거한 덕유산의 선비로서 정온(鄭蘊·1569-1641)과 신권, 송준길 등이 있다.

덕유산의 은자 정온 선생은 안음현에서 태어나서 과거에 급제한 후 경상도 관찰사와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68살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 들어가 끝까지 싸우기를 주장하다가 화의로 결정되자 할복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월에 가마에 실려 내려와서도 집에 들지 않고 덕유산 모리에 숨어서 은거하다가 73세로 별세하였다. 선생이 은거하였던 곳은 현재 북상면 농산리 673번지에 모리재라는 장소로 중수되었다. 인근의 위천면 강천리에는 선생의 종택이 있으며, 거기에는 선생의 신위를 모신 사당을 짓고 후손들이 살고 있다.

신권 선생은 중종 때의 학자로서 학문에 부지런하여 성리학에 밝았고, 산천에 은거하면서 안빈낙도하며 수신(修身)하였다. 그는 1540년에 구연재를 짓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현지에는 그의 사후에 세워진 구연서원과 그 문루인 관수루(觀水樓)가 있다.‘관수(觀水)’라는 뜻은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 연유한 것으로, ‘흐르는 물의 성질은 웅덩이가 차지 않으면 흘러가지 않는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고 하여 학문을 수양함에 있어서의 올바른 지표와 자세를 가리킨 것이다.

관수루 곁의 계곡에는 수승대로 잘 알려진 거북 모양의 거북바위 혹은 구연대가 있어 아름다운 계곡미와 수석미를 드러낸다. 이곳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성천, 산수천, 분계천과 갈천이 합류하여 위천으로 모여서 빚어 놓은 덕유산 계곡의 절경 중의 하나다. 신권 선생은 이곳의 아름다운 산천미와 자신의 심경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정자가 산수 간에 있으니(亭於山水間)
물을 사랑하고 산을 잃은 것은 아니네(愛水非遺山).
물은 산의 가에서 흘러나오고(水自山邊出)
산은 물을 따라 둘러 있는데(山從水上還)
신령한 구역이 여기에서 열리니(靈區由是闢)
즐거운 뜻이 더불어 관련된다네(樂意與相關)
그러나 인(仁)과 지(智)의 일을 생각하면(然爲仁智事)
모든 것이 오히려 부끄럽네(擧一猶唯顔)

병화와 전란 피하는 은신지

동춘당 송준길(宋浚吉·1606-1672)은 율곡과 사계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나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병자호란 뒤에 북상면의 월성에 와서 초당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후인들이 성천서원을 세워서 중수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사선대(四仙臺)로, 이곳은 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송기(宋基) 혹은 송대(宋臺)라고도 불렸다. 이곳은 덕유산에 있는 신비스럽고 빼어난 신선경의 한 곳이다.

덕유산은 유학자들에게는 은거의 산이었지만, 민중들에게 있어서는 병화와 전란을 피하는 피난 보신지이며, 또한 새로운 세상을 일으키는 혁명의 산실이기도 했다. 민중사에서 덕유산은 정감록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기도 하였고, 농민항쟁이나 동학혁명, 그리고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십승지란 정감록에 소개된 열 곳 가량의 피난 보신의 땅으로서, 남격암산수십승 보길지지에 의하면,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茂朱舞豊北洞傍陰 德裕山 則無不避危)’고 하였으며, 피장처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는데 숨어 살 만한 곳이다’라고 적고 있다. 무풍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으로 현존하고, 원학동은 현재 북상면 월성 계곡, 혹은 거창읍 학리라는 설이 있다. 월성 계곡은 덕유산에서 산수미가 빼어난 곳의 하나이며, 학동에는 4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세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입지로 알려져 있다.

덕유산의 민중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자주권을 되찾기 위한 농민항쟁과 항일독립운동이다. 농민항쟁으로는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1671년 11월 금산의 이광성(李光星) 등이 덕유산에 진을 치고 웅거하였다고 한다.

덕유산 지역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의 하나는 1906년부터 북상면 월성에서 시작한 것으로 북상면 출신 40여 명이 월성서당에 모여서 항일 의거를 결의하고 산중에 막사를 마련하고 활동하여 전과를 올렸다. 특히 박화기 형제들은 덕유산의 의병 200명에게 자금과 군수물자를 조달하였다. 또한 1908년 7월11일 일본 헌병대의 보고서 내용에도 덕유산에 약 40명의 독립군이 있었다는 사실을 증언한다.

이렇듯 덕유산은 겨레의 산의 역사에서 그 이름처럼 넉넉한 덕스러움으로 은자들과 민중들을 가슴에 품고 스스로 주인 되는 푸른 정신을 일깨운 산이었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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