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르포

덕유능선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 예술의 경지를 넘어서다
육십령~합미봉~남덕유~백암봉~빼재

봄앓이가 유난스러웠다. 늦된 성장통 같은 삼월 큰 눈 탓인지 남녘의 꽃타령도 예년보다 늦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봄은 왔다. 양지바른 산기슭엔 생강나무가, 사람의 눈길 가까운 곳엔 산수유가 노란 꽃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발길은 봄기운과는 아득히 멀어지고 있다. 퇴장하는 겨울을 배웅하는 길이다. 얼음꽃 만발한 덕유산에서 우리는 장엄한 모습으로 사라져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향적봉에서 맞는 덕유산의 아침. 빛. 그리고 첩첩 산. 우리네 삶의 자궁.

어둠살이 스멀거리기 시작할 무렵, 육십령(734m)에 선다. 서쪽으로 전라북도 장수, 동쪽으로 경상남도 함양을 잇는 고갯마루다. 여기서 우리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내려설 일만 남은 고갯길의 운명을 배반한다. 인간의 길을 따를 때는 늘 올려다볼 수밖에 없던 고갯마루가 금방 눈 아래로 멀어진다. 기분 좋은 단절감. 이제 온전히 자연의 길에 들어섰다는 모종의 우쭐함. 먼 옛날, 수렵시대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냥터를 떠날 때의 기분도 이렇지 않았을까.

참나무 사이로 적당히 소나무가 섞인 느긋한 오름길은 참나무 일색으로 바뀌면서부터 조금씩 키를 올리기 시작한다. 어둠살이 촘촘해진다. 나무도 먼 산도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되살아난다. 헤드램프를 켠다. 불빛을 스치는 입김이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기차 화통의 연기처럼 짧고 급하다. 이렇게 40분 정도를 오르자 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헬기장이다. 한참 숨을 고르고 나자 고집스럽게 곧추선 봉우리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요즘 대간 종주자들 사이에 할미봉(1,026.4m)이라 불리는 암봉이다.

할미봉은 합미봉으로 고쳐져야

▲ 남덕유산 기슭에서 만난 얼음꽃의 햇빛춤.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고도만 표기돼 있을 뿐 이름이 없다. 그러나 최근 월간山에서 발간한 <신상경표>에는 ‘합미봉’으로 적혀 있다. 편자인 박성태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사연을 물었다. 앞선 어느 지도에도 할미봉이라는 표기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일람표에는 합미봉이라고 고시(1961년)돼 있다고 했다. 확인해 본즉, 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격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까지 붙여져 있었다.

예언성 지명이었을까? 아니면 훗날 만들어진 것일까? 어쨌든 도승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합미봉(할미봉) 아래엔 수연, 즉 몰리브덴 광산이 생겼고, 전국 곳곳에서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굴병’(규폐증)에 걸려 동네를 과부촌으로 만들고 말았다. 광산은 곧 폐광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쯤부터 다시 차돌광산으로 개발되어 마을 형편이 좀 나아졌다 한다. 이 마을이 바로 육십령 초입 합미봉 아래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반송 마을이다(<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전북편의 장수군 기사 참조).

한편 반송 마을 맞은편에, 역시 육십령 초입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군장동(軍藏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군사를 숨겨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합미봉’이라는 이름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감춰둔 군사가 있으면 당연히 군량미가 있어야 할 테니까.

갈 길이 먼데 샛길이 너무 길었다.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두대간 전 구간, 아니 우리나라 전역에 이런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허술한 기록 문화의 폐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주관적인 견해나 문학적 감성의 표현이 아니라면 최대한 엄정을 기해야 한다. 특히 명명의 오류는 개념의 오류를 낳고, 같은 사물에 대한 세대간 교감의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 10분쯤 가볍게 출렁거리듯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자 동쪽 산마루 위로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습기 머금은 대기를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다. 비록 아침 조망이 좋은 캠프사이트를 찾기 위한 야간산행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즐거움은 다리의 수고에 비해 과분하다.

헤드램프를 끄고 달빛에만 의지하여 20분쯤 나아가자 합미봉 정상이다. 상당히 까탈스런 암봉이다. 이런 봉우리를 어찌 할미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성미 괴팍한 노파라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합미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맑은 날 환한 대낮이라도 팽팽한 긴장을 요구한다. 필요한 곳마다 줄을 걸어 놓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두 다리가 딴 생각을 하면 잠시 후의 안녕을 보장 받기 힘들다. 거벽등반가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마치 기도를 하듯 바위에 속삭인다. 제발 나를 한 몸으로 여겨달라고. 기도발이 먹힌 건지, 무사히 암릉을 벗어난다. 돌아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다. 얼치기 자연주의자의 가소로운 기도를 들어준 산신에 영광 있기를.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 남덕유산 정상 언저리에서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합미봉을 내려서서 서봉(장수덕유산) 오름길 전까지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1시간 가량 나아가자 서쪽으로 크게 휘는 지점이 나타난다. 캠프사이트로도 맞춤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봉을 1시간쯤 남겨둔 지점까지 가서야 배낭을 내린다. 산뜻한 출발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바람 소리가 심상찮다. 내일 아침 멋진 상고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너무 추워서 한숨도 자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뒤섞기는 순간 혼곤히 잠속으로 빠진다. 적당한 피로와 긴장보다 좋은 수면제는 없다.

백두대간 등성마루에서 또 하루를 연다. 텐트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춥다. 인간이 광합성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침낭에 파묻혀 한참 더 꼼지락댄다. 맛난 것 몰래 꺼내 먹듯이 최대한 게으름을 즐긴다. 아침형 인간? 이 달콤한 기분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일이다. 확신하건대, 아담도 이브도 이런 시간에는 선악과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무박으로 구간 종주하는 대간꾼들의 걸음이 빈번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재팀의 일원이 돼 버린 진주 산악인 김종현씨의 부지런한 아침 준비도 더 이상 게으름 필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우리도 선악과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그래야 사람 구실할 수 있을 테니까.

▲ 무룡산 정상에서 아침을 맞은 취재팀.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도 이처럼 장엄한 아침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밥 당번인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물과 불을 조절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만 잘 하면 코펠 뚜껑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맛있게 밥을 지을 수 있다. 나는 열 번에 일곱 번 정도의 성공률로 취재팀의 입을 즐겁게 한다. 산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여기서 잠깐 독자의 이해를 구할 것이 있다. 취사 야영 문제인데, 취재 특성상 불가피하여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사전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독자라는 ‘빽’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한 시도 잊지 않는다).

햇살이 목덜미쯤을 파고들 쯤 서봉(1,500m)을 향한다. 20분쯤 나아가자 헬기장이 나타나면서 덕유교육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르막이다. 20분쯤 지나자 암릉이다. 서봉과 남덕유산이 사이좋은 이웃처럼 손 맞잡고 다가서는 조망처다. 바위 봉우리인 서봉과 남덕유산(1,507.4m)의 둥두렷한 서쪽 기슭이 자못 대조적이다.

▲ 서봉 정상에서 남덕유로 향하는 대간꾼들.

서봉 정상 직전에서 한바탕 흩뿌리는 눈을 만난다. 파란 하늘에 눈이라니. 산기슭을 오르던 바람의 장난이다. 바람의 장난?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서봉 정상에 이르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암벽에 붙은 상고대는 섬세한 바람의 올을 정교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보다 더 빼어난 조각이 있을까. 역광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의 상고대는 또 어떤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이 있을까. 하지만 아직 최고의 감탄사는 남겨둬야 한다. 서봉에서 남덕유산을 향하는, 연줄처럼 휘어진 능선의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다.

봄기운 머금은 햇살과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투명한 사슴의 뿔인 것도 같고, 하늘에서부터 드리운 고드름 같기도 한 얼음꽃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절정은 바람결에 부딪치는 얼음꽃의 합창으로 완성된다. 편종 소리 같다 싶으면 풍경소리 같고, 실로폰 소리 같다 싶으면 마림바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 지상의 어떤 악기로도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응원 산행 나온 진주팀 김밥,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자연현상 가운데 바람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 것 같다. 이름부터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봄에 부는 바람은 당연히 ‘봄바람’일 텐데, 느낌에 따라 꽃바람도 되고 꽃샘바람도 된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는 갈바람(서남풍), 높바람(북북동풍), 높새바람(북동풍), 높하늬바람(서북풍), 늦하늬바람(서남풍), 마파람(남풍), 된마파람(동남풍), 된바람(북풍),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으로 불린다.

▲ 삿갓봉에서 남덕유와 서봉(장수덕유산)을 향하는 덕유산의 장쾌한 능선.

바람의 세기나 느낌 혹은 꼴에 따라서는 건들바람, 고추바람, 남실바람, 노대바람, 돌개바람, 명주바람, 산들바람, 살바람, 서늘바람, 서릿바람, 선들바람, 소소리바람, 소슬바람, 손돌바람, 솔바람, 실바람, 싹쓸바람, 왜바람, 용숫바람, 피죽바람, 황소바람, 회오리바람, 흔들바람 등으로 불린다. 이밖에도 장소나 때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이름을 거의 잊(잃)어 버리고 산다. 우리와 거리가 먼 대서양의 허리케인이나 북아메리카의 토네이도, 히말라야와 인도양을 오가는 몬순은 알면서도.

오늘날 우리 고유의 바람 이름이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이름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천하태평은 ‘비바람이 조화로운 것(雨順風調)’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농부는 바람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뱃사람들은 바람에 더 예민하다. 뒤집히면 저승이다. 그들은 세 치(배의 판자 두께) 아래에 저승을 두고 삶을 경영했다. ‘바람은 대기의 숨결’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농부와 어부들에겐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이었던 것이다. 근대는 신화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감각도 가져가 버렸다.

서봉과 남덕유산 사이의 안부에서 약간의 갈등을 한다. 대간 트레일은 이곳에서 월성치와 남덕유산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월성치로 곧장 가는 것이 편하다.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든 대간종주임은 분명하다. 시간과 체력에 따라 종주자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능선과 기슭 전체를 일컫는 것이지 등성마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상당 부분 대간 종주 트레일은 능선을 벗어나 있다. 글자 그대로의 능선을 밟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발상 자체가 기계적이다. 앞으로는 사태 지역이나 심하게 훼손된 능선은 우회하는 방식으로 트레일을 보호하는 것이 누구나 대간 종주를 즐기면서 보호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남덕유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독자에 대한 직무유기가 될 것 같아서. 얼굴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한데, 입속에서는 단내가 풀풀 난다. 얼음꽃을 따서 입속에 넣는다. 달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참나무 수액이 섞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남덕유산 아래에서 빵과 과자로 점심을 해결하고 월성치로 향한다. 월성치에서 물을 보충하려던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 월성치에서 삿갓골 사이의 얼음꽃 터널.
갈증과 허기가 겹쳐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울 무렵,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다. 지난 산행에 동행했던 왕현수씨가 응원 산행을 나온 것이다. 함께한 이정한(진주 KBS여성산악회 회장), 이순자씨(진서산악회)가 건네주는 김밥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쌀로 만든 음식을 먹어본 지가 한참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한국인은 밥 앞에서 너무 정직하고 또한 무력하다.

삿갓골재대피소에서 물과 가스를 보충한 다음 진주팀과 작별한다. 그리고 2시간쯤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무룡산(1,492m) 정상. 덕유산 주능선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또 하루를 접는다. 멀리 산 아래로 넘어가는 태양을 아끼며 바라본다.

햇살이 고개를 들기도 전부터 무룡산 정상은 일출을 기다리는 주말산행객으로 왁자지껄하다. 세찬 바람은 촌각을 다투어 구름을 흩날리며, 깨어나는 아침 산의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무룡산에서 순한 내리막을 이루는 트레일은 동엽령 직전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곧추서듯 백암봉(1,480m)에 닿는다. 남쪽으로 지리산 연봉, 동쪽으로 가야산 정상이 첩첩 산 그림자 위로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봉을 향하는 덕유평전. 가장 덕유산다운 풍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부터 대간 트레일은 덕유산과 작별을 고한다. 동쪽으로 크게 휘돌아 차츰 고도를 낮추며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귀봉을 지나면 송계사 갈림길에 닿는다. 동남쪽으로는 송계사, 그 반대쪽은 백련사다.

▲ 삿갓재 대피소 전 조망처에서 진주 산악인들과 함께한 취재팀.

송계사 갈림길에서 지봉(池峯?못봉?1,302.2m)까지는 허기지고 지친 자에게는 야속할 정도의 가팔막이다. 정상 직전은 헬기장. 지봉에서 바라보는 대봉(약 1,190m)은 또 한 번 지친 다리의 맥을 풀어 놓는다. 까마득히 떨어졌다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단처럼 경사각을 접어가며 오르기 때문에 오히려 지봉 오름길보다 쉽다.

대봉에서 40분쯤 진행하면 갈미봉(1,039.3m). 이 봉우리에 서면 빼재가 눈 아래 걸린다.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허기진 배를 속여 본다. 하지만 손에 닿을 듯한 그 거리가 보통이 아니다. 컨디션이 좋다면야 1시간 정도로 족하겠지만 기진한 걸음으로는 1시간 반이나 걸린다.

빼재에 도착하자 사위는 깊은 어둠 속이다. 무룡산에서 꼬박 10시간, 백암봉에서는 6시간이 걸렸다. 산을 두고 가는 아쉬움, 뼈만 남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산 그리움 다시 차오르는 데는 한 순간으로 충분할 것임을 나는 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2) 산행기를 쓰자

산행 후 글을 쓰는 버릇을 들이면 최소한 세 번은 산을 오르게 된다. 오르기 전 도상으로 한 번, 실제로 한 번, 그리고 돌아와서 기억을 더듬으며 한 번.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고역이기도 하지만, 일기나 지인에게 편지를 쓰듯 하면 산행의 감동은 배가된다. 산행의 즐거움이 이익 추구의 결과가 아니듯, 편안하게 쓴 글은 훨씬 더 감동적이다. 등산 전문지에서 독자투고를 읽어 봐도 솔직하고 소박한 글에서 오히려 더 감동을 받는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글이 저절로 써질 때가 있다. 적절하고도 긴요한 표현은 다른 표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사고 또한 입체적이 된다. 표현 대상과의 교감이 내밀해지고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금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기조차도 그 누군가를 독자로 가정하게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형식이나 표현 방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자칫하면 상투적이 되고 독창성을 잃게 된다.

즐거운 산행의 연장으로써 산행기를 써 보자. 혹시 아는가. 그런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추어졌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될지.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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