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운산 르포

황소걸음으로, 기나긴 오르막인 백운산정으로
중재~백운산~영취산~깃대봉~육십령 구간 답사

개 짓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문을 열자 왈칵 겨울 아침이다. 눈이다. 천하는 순백이다. 때때로 하늘과 땅은 소리 없는 수작으로도 이렇게 세상을 바꾸어 놓는다.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이 풍경소리 같다. 누굴까. 이렇게 우아한 소리의 발자국을 남길 줄 아는 새에게 ‘까, 마, 귀’라는 흉측한 이름을 달아준 사람은.

‘싸르락, 싸르락―.’ 눈 쓰는 소리에 산마을의 적막은 더욱 단단해진다. 얼마만인가. 이런 풍정 속에 서본 지가. 구름으로 몸을 바꿔 낮게 내려앉은 하늘. 거리감이 좁혀지면서 가까이 다가선 산. 성긴 눈발 사이로 퍼져 가는 굴뚝 연기. 중기 마을에서 민박을 하면서 받은 백두대간의 깜짝 선물이다.

▲ 하늘에서 본 백운산(1,278.6m) 정상 일대. 지리산과 덕유산 사이에서는 가장 우람한 산으로 전북 장수군과 경남 함양군에 걸쳐 있다. 중재에서 시작되는 백운산 오름길은 구름 위로 솟구치는 듯한 된비알이다.<헬기 조종=심현보 산림청 산림보호국 기장>

백두대간의 산마을, 경상남도 함양군 백전면 운산리 중기 마을의 아침이 내게 묻는다. 사람이 한 세상 사는 동안 도대체 얼마만큼의 땀과 눈물, 사랑과 배신이 필요하냐고. 두고 온 서울을 생각한다. 내가 사는 그곳. 넘치는 잉여로 하여 가난한 곳. 소나기 같은 욕망의 사막. 그리하여 우리는 ‘한 모금 물’을 위해 산으로 가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본능 같은 것이다. 산에 목숨을 의탁하지 않는 도회의 사람들에게도 산은 목숨줄이다. 그래서 산은 신성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대간 종주가 힘든 이유들

민박집을 나설 때까지도 눈은 그치지 않는다. 올 겨울 산행에서 처음으로 스패츠까지 갖추고 중재로 향한다. 중기 마을에서 중재로 향하는 농로 초입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왁자지껄하다. 한눈에 봐도 대간꾼들임을 알겠다. ‘산꾼’이란 말처럼 ‘대간꾼’이란 말도 이제는 하나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그들이 타고 온 승합차의 한 귀퉁이가 찌그러져 있다. 눈길에 미끄러진 게 분명해 보였다. 대간 종주의 어려움을 보여 주는 한 단면이다. 사실 대간 종주는 그 자체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성가시기로 치면 대간 등성마루까지의 접근이 더하다. 여기에 시간을 내는 어려움까지 고려하면 걷는 일이 오히려 단순하다. 이래서 대간 종주가 힘들다는 거다.

▲ 민령에서 깃대봉(1,014.8m)으로 오르는 길의 억새 숲.

중기 마을에서 중재까지는 30분 남짓. 눈길에 적응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중재에서 배낭을 벗고 잠시 숨을 고른다. 고갯마루에서 백운산으로 향하는 대간 등성마루의 초입에는 수십 개의 표지기들이 걸려 있다. 구간 종주자들이 입산과 하산의 기점으로 삼는 고개마다 이런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그 때마다 나는 서낭당을 떠올린다. 처음에는 눈살을 찌푸리기도 했다. 도깨비한테 홀리지 않은 다음에야 길 잃을 염려가 없는데 굳이 저렇게 흔적을 남겨야 할까 하고.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그것을 건 사람들이 의식을 했건 하지 않았건,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유전자처럼 남아있는 산신에 대한 경배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민족은 땅과 마을의 수호자인 서낭신을 모시는 제단을 특별히 꾸미지 않았다. 당집을 짓는 경우도 있었지만, 마을 앞의 큰 나무나 고갯마루의 돌무더기로 제단을 삼았다. 고갯마루를 지나는 사람들은 돌을 주워 돌무더기 위에 던졌다. 길가를 배회하는 잡귀로부터 나그네 길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간의 표지기에서 나는 서낭신을 모시던 우리네 옛 전통의 희미한 핏줄을 본다. 저 티베트 고원의 기도깃발이 티베탄들의 자연신에 대한 경배라면, 대간의 표지기는 백두대간에 대한 대간꾼들의 우러름이다.

▲ 참나무 아래 눈 덮인 조릿대 숲을 지나 중고개재를 향하는 취재팀. 산죽의 청신한 기운이 백운산의 군더더기 없는 이미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중재에서 이어가는 대간 길은 시작부터 된비알이다. 코방아를 찧을 듯 10여 분 다복솔과 관목 숲을 헤쳐 나아가자 작은 봉우리다. 이곳에서부터 중고개재(755.3m)까지는 약간의 표고차로 리드미컬하게 오르내림을 반복한다. 중고개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왼쪽으로 장수군 번암면 지지리로 내려서는 낙엽송 숲길의 밀밀한 허허로움이 꽤나 유혹적이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을 향하는 길은 내리막으로 시작된다. 높은 산을 앞에 두고 고도를 깎아먹는 이런 내리막길은 별로 유쾌하지 않다. 짐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끄는 당나귀에게 던져주는 당근이 이런 것일까. 중고개재에서 백운산까지 도상 거리 약 3.2km 중 3km 정도는 계속되는 급한 오르막이다. 소요시간은 약 2시간 정도. 백두대간을 통틀어 봐도 이처럼 내리막이라고는 없이 줄창 오르는 경우는 드물다.

누구나 경험으로 알고 있듯이 높은 봉우리와 낮은 봉우리 사이에는 많은 봉우리들이 숨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백운산의 경우는 오로지 오르막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정상은 그만큼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 정도다. 이런 경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말은 틀렸다. 사전 정보는 유용하다. 이러한 사정을 미리 알고 느긋하게 황소걸음으로 나아가는 것이 현명하다.

백운산이란 이름에 값하는 풍광

백운산 정상을 1.2km 남겨둔 지점에서 조망 바위를 만난다. 눈은 그쳤고 발 아래는 구름바다다. 백운산(白雲山)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풍광이다. 복기를 하듯이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본다. 눈 아래로 봉화산과 멀리 지리산이 섬처럼 구름 위로 솟아 있다.

다시 몸을 돌려 세워 백운산을 향한다. 언뜻언뜻 하늘이 열리면서 갓 내린 눈 위로 은빛 빛살이 퍼떡인다. 자잘한 나뭇가지엔 솜털 같은 상고대가 열려 있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참나무 우듬지 위로 설화가 만발이다. 2기의 무덤 곁에 억새 사이로 꽤 너른 헬기장 나온다. 헬기장 옆 올망졸망한 바위에 정상(1,278.6m) 표지석이 서 있다. 백운산 정상에서 지리산을 바라본다. 구름 사이로 천왕봉에서 반야봉에 이르는 지리의 연봉들이 희미한 실루엣을 드러낸다.

▲ 중재에서 백운산으로 오르는 취재팀. 성황나무 같은 들머리의 거목에서는 신령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캠프사이트로도 좋을(바람이 도와준다면) 헬기장 곳곳엔 하루 산행객들의 질펀한 점심 잔치가 한창이다. 전라도 사투리와 경상도 사투리가 뒤섞인다. 우리가 선 대간 등성이의 왼쪽이 전북 장수군이고 오른쪽이 경남 함양임을 실감한다. 삼겹살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사람들도 있고, 궁중 요리처럼 보이는 화려한 도시락도 있다. 대간 종주를 하면서 하루 산행객들이 가장 부러운 순간이다. 지나가는 말이라도 ‘한 잔 하세요’ 하면 절대 사양하지 않을 텐데, 끝내 그런 일은 없다. 그놈의 ‘무게’ 때문에 먹는 즐거움의 상당부분을 버려야 한다는 것은, 단무지 없는 짜장면(절대로 자장면은 아니다) 같은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우리라 하여 식도락을 마냥 포기할 수는 없다. 일단 ‘기갈(飢渴)이 감식(甘食)’이다. 차갑고 딱딱한 빵 조각도 달다. 아귀(餓鬼)에게도 축복이 있을진저. 다음으로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호사는 커피. 일회용 커피는 사절이다. 취재팀의 구인모 선생이 개발한 휴대용 드립에 필터를 걸고 원두커피를 내린다. 그런데 언제 보아도 이 휴대용 드립이 걸작이다. 60~70년대에 대중목욕탕에서 보았던, 때 건지는 그물을 축소시킨 것이라고 보면 된다. 또한 이 드립은 눈 녹인 물의 각종 건더기(?)를 거를 때도 유용하게 쓰인다. 만약 등산 장비메이커에서 이와 유사한 물건을 대량 생산한다면 분명 베스트셀러가 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한 마디 더 하자면, 구인모 선생의 장비 튜닝 솜씨는 신의 경지다. 한 예로, 군용 숟가락(여럿이 코펠 밥을 먹을 때 재빨리 많은 양을 확보하기 위한 필수품)도 그의 손을 거치면 딴 물건이 된다. 일단 가운데를 잘라 무게(?)를 줄이고, 리벳으로 두 개를 이었는데 그냥 이은 게 아니고 길이를 줄일 수 있는 접철식이다. 이쯤이면 가히 신의 경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백운산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육십령까지는 완만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는 편안한 길이다. 중재에서 백운산까지의 종주자가 트레커였다면, 백운산에서 육십령까지의 종주자는 하이커로 보면 된다.

이 구간에서 나는 재미있는 실험을 한 가지 했다. 중고개재에서 백운산 정상까지 도상 거리 약 2km와 백운산에서 영취산 아래 3km 지점까지 만보계로 걸음 수를 재봤다. 각각 7,200걸음과 7,150걸음. 쉬는 동안 헛걸음까지 들어간 숫자이므로 약 7,000걸음으로 보면 될 것 같다. 경사도에 의해 2km와 3km가 같은 결과를 낳은 것이다. 시간도 2시간 정도로 같았다. 여기서 평균값을 얻을 수 있겠다. 5km에 14,000걸음. 그렇다면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을 걷는 데 몇 걸음이 필요하고, 걷는 데만 드는 시간이 얼마일지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을 걷는 데만 182만 걸음 필요

▲ (上) 백운산 정상 1.2km 전의 전망 바위에서 지리산 쪽으로 바라본 모습. 지리산은 구름바다에 빠져버렸다 (中) 영취산을 지나 대간 주릉에서 살짝 비껴나 솟은 덕운봉(956) 동쪽 기슭 (下) 덕운봉 근처 전망대 바위에 선 취재팀. 눈 위로는 백운산 정상, 눈 아래로는 함양군 서상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우선 백두대간의 총길이를 보자. 미리 결론부터 말하자면, 글자 그대로의 정확한 길이는 신만이 알 것 같다. 자료에 따라서 도상거리 1,400km, 1,625km, 1,800km로 들쑥날쑥이다. 남한 구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640km, 680km, 690km로 자료마다 다르다. 그렇다면 실거리는 얼마일까. 포항 셀파산악회에서 50m 단위로 끊어서 실측한 결과는 735.6km. 이들의 실측을 신뢰했을 때 도상거리 690km는 상당한 의문의 여지를 남긴다. 참고로 GPS로 측정한 거리는 680km라 한다. 이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어림잡아 도상거리 650km 정도로 추정하고, 5km에 14,000걸음이라는 평균값으로 총걸음 수를 계산해 보자. 1,820,000걸음이다.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등성마루를 걷는 데만 182만 걸음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실감을 위해 서울~부산 간 걸음 수와 비교해 보자. 서울 강남고속터미널에서 부산 고속터미널까지는 약 430km. 이 경우는 평지이므로 군인들의 제식 동작의 바른 걸음, 즉 보폭 77cm 1분 120보로 환산해 보자. 약 55만8천 걸음이다. 시간으로는 약 77시간. 하루에 10시간씩 걸으면 8일 정도.

걸음 수만으로 백두대간의 남한 구간 종주에 필요한 걸음 수를 서울 부산에 대입하면, 왕복을 하고도 편도로 한 번 더 갔다가 서울서 대전까지 갈 수 있다. 시쳇말로 진짜 장난 아니다. 다시 백두대간으로 돌아가서, 5km 14,000걸음을 4시간으로 잡았을 때 총 소요시간은 약 520시간. 잠도 자지 않고 걸으면 21일, 하루 10시간씩 걸으면 52일쯤 걸린다(겨울철이 아닌 경우). 뛰듯이 걷는 종주가 아니라면 실제로 이 정도가 소요된다.

재미삼이 시작한 얘기였는데 너무 길어졌다. 개인적인 걸음을 기준으로 한 것이므로 일반화시킬 수는 없겠지만 약간의 참고는 될 것 같다.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내 신상 정보를 밝히자면, 키 168cm 몸무게 52kg으로 좀 왜소한 편이다.

햇살이 사선으로 비치며 산주름이 선명해질 무렵 영취산(1,076m)에 닿는다. 대간이 정맥 하나를 풀어 놓는 지점이다. 서쪽으로 무령고개를 넘어 남서쪽으로 장안산을 지나 주화산에 이르는 금남호남정맥은 그곳에서 다시 금남정맥과 호남정맥으로 갈라진다. 한남금북정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금남정맥은 대둔산과 계룡산을 올려 세우며 부여로 향하고, 호남정맥은 남서쪽으로 휘돌며 내장산과 추월산 무등산을 일으키고는 광양 백운산에서 발길을 멈춘다. 금강·섬진강·영산강·동진강·만경강·탐진강 등의 물줄기들이 모두 이 두 산줄기를 젖샘으로 몸집을 키워 대전·공주·부여·전주·광주·순천 등의 충청·호남 지역을 품에 안는다.

영취산에서 무령고개까지는 10분 정도의 내리막길. 고갯마루에서 북쪽으로 조금만 가면 샘과 캠프사이트가 있다.

영취산 정상에서 20분쯤 지나자 억새 숲이 나타난다. 소나무로 둘러싸인 아담한 캠프사이트다. 오른쪽 기슭으로 100m쯤 내려가면 물도 얻을 수 있지만 우리는 그냥 지나친다. 눈을 녹이기로 했다.

억새 숲에서 30분쯤 지나자 오른쪽으로 덕운봉이 보이고, 잠시 후에 영취산과 백운산이 한눈에 담기는 전망대 바위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전망을 즐기기 위해 좋은 캠프사이트를 지나친 우리는 등산로 위에 대충 집을 짓고 하루를 접는다. 옅은 구름에 어린 달무리가 곱다.

한 여인 논개의 이름을 떠올리다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에 바람도 잠잠했는데, 900m의 고도는 밤새 우리가 내뿜은 숨결을 얼음으로 바꾸어 놓았다. 텐트 안은 성애로 한 겹 덧씌워져 있다. 해독 불가능한 첨가물로 가득한 눈 녹인 물로 아침을 지어 먹고 나자 대기는 다시 태양의 온기로 충전된다. 산죽밭을 헤치며 깃대봉을 향한다. 민령을 지나도 과거 종주자들이 대간 줄기의 표지로 삼았던 송전철탑이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살펴보니 철거 후의 흔적만 보인다. 철탑 자리를 지나 오름길의 정점에 서자 시야가 환히 열린다. 왼쪽 기슭 아래에 저수지가 보인다.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의 오동제(梧桐堤)다.

▲ 백운산 정상에서 서래봉(동쪽 가지줄기 위의 봉우리) 방향 조망.

한 여인을 떠올린다. 백두대간의 서쪽 기슭에서 태어나 동쪽 기슭에 묻힌 그 여인의 이름은 논개. 오늘날 우리는 그녀에게 ‘충절’을 헌사하고 있지만, 현실 속의 그녀에게 주어진 건 가혹한 운명뿐이었다. 주촌 마을에서 주달문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일찍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와 함께 외삼촌 집에서 자랐는데, 빚더미에 치인 외삼촌이 부자의 첩으로 그녀를 팔려고 했다. 그녀는 어머니는 장수 현감 최경회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모녀는 현감 부인의 병수발을 들며 최경회의 가솔이 된다. 이후 현감 부인인 죽자 그녀는 최경회의 아내가 되었다.

▲ 깃대봉에서 백운산 방향으로 바라본 대간의 등성마루. 울끈불끈 하면서도 순한, 그러면서도 장쾌한 우리 산줄기의 한 전형을 본다.

하지만 이건 모진 운명의 전조에 지나지 않았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경상우병사가 된 최경회가 진주성 싸움에서 패하고 남강에 몸을 던진 것이다. 이에 그녀는 왜군들의 승전 연회에 기생으로 변장하고 들어가 왜장 게야우라 로쿠스케를 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당시 논개에게 바쳐진 헌사는 충절이 아니었다. 왜적의 보복이 두려운 주씨 문중에서는 장례마저도 거절했다. 그래서 그녀는 주촌 마을의 맞은편, 백두대간 동쪽 기슭 함양군 서상면 방지 마을에 묻히게 되었다.

깃대봉(1,014.8m)에 서자 해가 머리 위에 걸린다. 눈앞으로 육십령 너머 할미봉과 서봉 그리고 남덕유산의 웅좌가 모습을 드러낸다. 깃대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계곡으로 떨어지는 듯한 형국이다. 선명한 능선길은 아니어서 고개를 갸웃하게 하지만, 표지기만 따라가면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이슥한 계곡을 지나는 듯한 내리막길이 편평해질 쯤, 코끝 찡할 정도로 반가운 샘이 나타난다. 깃대봉샘으로 이름 붙여진 샘이다. 살뜰히 보살핀 무주 사람들의 고마운 손길이 느껴진다.

하산길의 성찬은 역시 라면이 제격이다. 샘물로 포만감을 한 번 더 누린 다음 육십령을 향한다. 30분쯤 지나자 육십령 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드문드문 자동차 소리가 정겹다. 여운처럼 이어지는 산행의 즐거움이다. 산은 우리에게, 권태와 혐오, 혹은 지긋지긋함마저 느끼게 한 사물에 대해서도 말간 눈인사를 건네게 하는 생기와 여유를 준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1) 지도와 친해지자

백두대간 종주는 이제 붐업 단계를 지나 대중화의 길로 접어들었다. ‘백두대간에 고속도로가 뚫렸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트레일이 선명하다. 길 찾기를 위한 독도는 거의 필요 없을 정도다. 그렇다면 지도는 성가신 짐일 뿐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즐거운 종주를 위해서 자주 지도를 봐야 한다.
자주 지도를 봐야 하는 이유는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해 주기 때문이다. 자신의 위치 파악이 안 되면, 맑은 날씨에도 오리무중인 느낌을 누구나 경험했을 것이다. 산 아래 마을의 이름이 무엇인지, 봉우리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걷기만 하면 즐거움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샘이 없는 경우 어느 계곡으로 내려서야 물이 있을지를 파악하는 데도 지도는 필수다. 육안으로도 알 수 있겠지만 예측하고 행동하면 고통이 적다.
합리적 운행 계획과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서도 지도는 꼭 지니고 다녀야 한다. 수시로 운행 거리를 확인하며 시간 사용 계획을 세우면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릴 이유가 없다. 체력 안배로 괜한 육체적 피로도 줄이는 길도 지도에 있다.
만에 하나, 길을 잃었거나 부상을 당해 탈출해야 할 상황에 직면했다면? 지도가 안전을 보장해 주지는 않겠지만, 최소한 심리적 안정은 줄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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