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백두대간 남류설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남류하여 종기한 웅산
여지승람, ‘백두산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여기 이른 것’

지리산은 우리나라 모든 산의 조종인 백두산의 큰 줄기가 남류(南流)하여 남해가에 종기한 남녘땅 최고의 웅산(雄山)이다. 그 때문에 지리산은 옛부터 일명 두류산(頭流山), 또는 두류산(頭留山)으로 애칭되어 왔다.

‘두류산’은 고금을 통하여 가장 많은 이들에게 가장 많이 사랑을 받아온 지리산의 별칭으로서, 그 의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고려조 이인로(李仁老·1152-1220)의 ‘지리산 청학동기(智異山靑鶴洞記)’ 와 동국여지승람 남원조 지리산기에 잘 나타나 있다.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꽃봉오리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면면히 이어져 대방군(帶方郡·남원)에 이르러서 수천 리에 서리어 맺혔다. 그 테두리는 무려 10여 고을에 뻗치어 있다’ (파한집).
‘산세가 높고 웅대하여 수백 리에 웅거하니, 여진(女眞) 백두산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여기에 이른 것이다. 혹은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流 자는 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여지승람).

▲ 운해가 들어찬 지리산 천왕봉. 여지승람에 ‘백두산의 맥은 바다에 이르러 그치는데 이곳에서 잠시 정류(停留)하였다 하여 流 자는 留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한다’는 언급이 있다.

위의 두 기록에 보이는 백두대간 남류설은 고려시대 이래의 우리 선인들의 전통적 산악관이 잘 드러나 있는 우리 민족 고유의 산사상(山思想)으로서, 그 연원이 상당히 오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곧 삼국유사 권3의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조 및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字傳記)에 전하는,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神文王)의 태자 보천(寶川)이 오대산 등지에서 수행하여 성승(聖僧)이 된 후 입적시에 남긴 유기(留記)에 의하면, ‘오대산(五臺山)은 곧 백두산의 대맥(大脈), 또는 백두산의 대근맥(大根脈)으로, 각 대(오대)에는 진신(眞身)이 상주하고 있다’고 하여 오대산을 백두대간 상에 있는 영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공민왕 6년(1357)조 기사에 인용된 도선국사(道詵國師·827-898)의 옥룡기(玉龍記)에도 ‘우리나라는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데, 그 지세는 수(水)를 뿌리로 하고 목(木)을 줄기로 하는 땅으로, 흑(黑)을 부모로 삼고 청(靑)을 몸으로 삼았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 상에 형성된 여러 명산들이 모두 북쪽 백두산을 조산(祖山)으로 하여 그 대맥이 남으로 흘러와 형성되었다고 하는, 백두대간 남류설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부터 전래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도 있다.

곧 이규경(李圭景·1788-?)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의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에 의하면, ‘신라시대 의상(義相)의 청구비기(靑丘秘記)에 두류산(頭流山)은 일만의 문수보살(진신)이 머무는 세간으로, 산 아래 지역은 해마다 풍년이 들고 백성들이 성실하다고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고, 또 의상의 청구비결(靑丘秘訣·곧 청구비기)에 ‘두류산[頭流之山]에는 은거하는 이들이 많이 귀의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위에 보이는 청구비기가 진실로 신라 의상조사가 저술한 진서(眞書)인지는 단언하기 어려우나, 8세기 후엽 신라 고승 견등(見登)의 화엄일승성불묘의(華嚴一乘成佛妙義)에도 청구기(靑丘記)가 언급되고 있으며,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청학동변증설에도 청구비기를 청구기로도 언급하고 있다.

이로써 볼 때 지리산의 백두대간 남류설은 통일신라 때부터 전래된 것으로, 또 이로 인해 생겨난 지리산의 별칭 두류산(頭流山 또는 頭留山)이란 산이름도 일찍이 고려시대 이전부터 지리산(智異山)과 함께 그 일명으로 별칭되어 왔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렇듯 지리산과 두류산은 우리 선인들의 전통적 산사상의 의미가 담겨져 1,000년 이상 불려지고 쓰여온 지리산의 대표적 산이름이다.

실학자들에 의해 백두대간 사상 확고해져

우리 민족의 오랜 전통적 산악관에 의거한 백두대간 사상은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 이르러 좀 더 확고하고 분명하게 정립된 것으로 보인다. 곧 성호 이익(李瀷·1681-1763)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백두산 천지.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이라는 언급이 성호사설에도 있다.

‘백두산은 우리나라 산맥의 조종(祖宗)이다…철령(鐵嶺)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에 이르러 하늘에 닿도록 높이 솟았는데, 이것이 정간(正幹·본줄기)이고, 그 중간에 있는 여러 갈래는 모두 서쪽으로 갈려갔다…왼쪽으로는 동해를 옆으로 끼고 있어 큰 호수와 같이 되어 백두대간과 더불어 그 시종을 같이 하였다…오른쪽 산맥은 지리에 이르러 끝났는데, 그 상태가 바다를 가로질러 나온 듯이 웅장하고 기운차서 어마어마하게 내려왔다…대체로 그 일직선의 대간이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중간에 태백산이 되었고, 지리산에서 끝났으니, 당초에 이름을 붙인 것도 의미가 있었던 듯하다’(성호사설, 천지문, 백두정간).

이러한 백두대간 남류설에 기초한 성호의 산악관은 이후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저술로 운위되고 있는 산경표(山經表)와, 김정호(金正浩·1804-1866)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에 극명하게 잘 반영되어 있다.

또 숭양(崇陽) 김선신(金善臣)의 두류전지(頭流全志) 편목에도 1 두류조종보(頭流祖宗譜) 2 두류신기(頭流身記) 3 두류자손록(頭流子孫錄) 4 두류족당고(頭流族黨攷) 등으로 분류하고 두류조종보에 백두산으로부터 시작하여 지리산까지 기술하고 있는 내용 속에도 잘 드러나 있다고 본다.

근래에 이르러서는 진심으로 우리 국토를 아끼고 사랑하는 수많은 산악인들이 단지 책상머리에 앉아 이론상으로만 백두대간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지리산 천왕봉에서 시작하여 강원도 진부령 종착지에 이르는 남한 지역의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통하여 직접 발로 밟아 가면서 체험적으로 이해해 가고 있는 추세다. 그러한 의미에서 두류산(頭流山·頭留山)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적 산사상이 담겨있는 결코 소홀시할 수 없는 지리산의 주요 일명이라 본다.

/글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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