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3구간] 삼원불패의 영원한 명당 논개 묘터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풍취나대(風吹羅帶)라는 천하 명당

도대체 풍수지리라는 것이 무엇인가? 일단 문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바람과 물이란 요소로 땅의 이치를 밝히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풍수라는 용어는 장풍득수(藏風得水)의 준말로 잘 알려져 있는데, 장풍과 득수라는 풍수용어는 장서(葬書)라는 중국의 유명한 풍수고전에 나오는 말이다.

장서(葬書)는 중국 진(晉)나라의 곽박(郭璞·276-324)의 저서로, 가장 오래된 풍수 서적 중에 하나다. 풍수지리를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읽어보는 책으로 일명 장경(葬經), 금낭경(錦囊經)이라고도 부른다. 이 책은 주로 형기풍수에 관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데, 바로 이 책에 풍수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 천하의 명당에 안장된 논개묘 원경.

‘風水之法 得水爲上 藏風次之(풍수지법 득수위상 장풍차지=풍수의 법은 물을 얻는 것이 먼저이고 바람을 갈무리 하는 것이 다음이다)’

그런데 장풍득수라는 말은 인간의 눈을 통하여 땅의 형세를 보고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방법이다. 즉, 유형의 형기풍수(形氣風水)와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이기풍수(理氣風水)로, 말하자면 영생피살(迎生避殺)을 한다는 의미로, 적당한 시기를 선택하여 묘나 집을 지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영생피살이란 건택조장(建宅造葬·집을 짓거나 묘를 씀)하는 시기에 따라 적합한 시기를 왕(旺), 생(生)이라 하고, 부적합한 시기는 퇴(退), 쇠(衰), 사(死), 살(殺)이라고 나누어 길흉화복을 판단하는 방법으로, 이 이론은 우리나라 왕조사에 등장하는 소위 지기쇠왕설(地氣衰旺說)과 같은 이론이다.

형기풍수의 장풍득수와 이기풍수의 영생피살

장풍득수가 주된 내용인 형기풍수는 역학(易學)에서 말하는 ‘체(體)’가 되고, 학문에 비유를 하자면 미술 과목에 해당되는 한편, 이기풍수는 활용한다는 의미에서 ‘용(用)’이 되며 수학 과목에 비유된다.

체와 용은 우열을 비교하는 대립의 관계가 아니라 조화의 관계이므로 풍수지리학은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를 모두 알아야 비로소 완벽한 학문이 된다. 일부 풍수사는 형기풍수만 강조한 나머지, ‘이기풍수 무용론’을 주장하기도 하지만, 동양학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인 체와 용의 관계는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대원칙에 따르면 형기풍수와 이기풍수는 모두 필수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기존의 형기풍수 이론은 대동소이하여 누구나 대체적으로 인정하지만, 이기풍수에 있어서는 학파가 다양하고 자신의 이론만 옳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 풍수계의 현실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풍수계에서는 아예 이기풍수를 부정하기에 이른 것으로 추측된다.

다양한 이기풍수 이론 중에 현공풍수이론이 있다. 이 이론은 우리나라 풍수계에서는 비교적 생소한 편인데, 여기에 간단히 소개하며 아울러 지기의 쇠왕에 대해서도 소개한다.

풍수지리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동양철학의 근간이 되는 주역에 대해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서 보통 주역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중국 주(周) 시대에 만들었다는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이다. 한편 주역을 영어로는 ‘The Book of Change(변화의 책)’이라고도 하는데, 변화의 의미에 초점을 두고 영역한 말을 감안하면 주역은 한 마디로 변화의 이치를 설명한 책이다.

▲ 풍수의 개념을 밝힌 장서(사고전서). 장경 또는 금남경이라고도 부른다.
주역의 주된 이론은 크게 변역(變易)과 불역(不易) 두 가지로 대분된다. 변역(變易)이란 천지간의 모든 상황과 사물은 항상 변하고 바뀜으로써 음과 양의 두 기운이 교섭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춘하추동이라는 계절이 생긴다는 것이다.
불역(不易)은 변하는 가운데에도 결코 변하지 않는 줄기가 있으니 예를 들면 하늘은 높고 땅은 낮아 그 위치가 바뀌지 않는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동안 기존의 이기풍수 이론은 시간성이 배제된, 즉 고정된 불역의 이치만 적용하였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얻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풍수지리가 미신이라는 말조차 들어왔던 것이다. 이에 반해 현공풍수는 불역과 변역의 이치를 같이 사용하기 때문에 신묘한 결과가 나온다.

20년을 주기로 운이 바뀐다

형기풍수지리는 공간 개념을 위주를 하는 분야이고, 이기풍수지리는 시간개념을 위주로 하는 분야다. 따라서 현공풍수법의 기본원리는 공간(空間)과 시간(時間)을 배합한 풍수학문이다.

공간에 시간이란 개념이 더하면 변화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은 기본적인 상식이며 만고의 진리다. 현공풍수는 시기에 따라 운이 변화되는데 20년을 주기로 운이 바뀐다. 운은 1운에서 9운까지 있으며, 9운이 지나면 다시 1운부터 연속적으로 되풀이된다.

1운에서 3운까지 60년간을 상원(上元)이라 하고, 4운에서 6운까지 60년간을 중원(中元)이라 하고, 7운에서 9운까지 60년간을 하원(下元)이라고 하며, 이들을 총칭하여 삼원구운(三元九運)이라고 한다. 올해 2005년은 8운 두번째에 해당된다(삼원구운 연표 참조).

땅에도 생왕휴수의 변화가 있다

▲ 경남 진주시 남강의 의암. 의암은 논개가 왜장을 껴안고 투신했다는 바위의 이름이다.
사람에게 생노병사가 있고 계절에도 춘하추동이 있듯이 마찬가지로 풍수지리에도 생왕휴수(生旺休囚)가 있어 일정한 시기가 되면 땅의 기운도 끝나기 마련이며, 그리고 또다시 지기가 생성된다. 기존의 이기풍수이론에서는 지운 기간에 대한 명쾌한 이론이 없지만 현공풍수이론은 언제 지기가 소멸되는지, 그 시기를 간단한 계산을 통하여 쉽게 알 수 있다.

지운이 끝나는 시기를 현공풍수에서는 입수(入囚)되었다고 하는데, 입수가 되면 지기가 휴식상태가 되기 때문에 재정양패(財丁兩敗)가 되며, 그 피해의 정도는 아주 심하다. 다만 지운을 계산하는 방법은 전문적인 이론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락하고 지운기간표를 참고하기 바란다.

풍수지리를 실생활에 잘 활용하여 우리의 인생을 행복한 삶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하여 명당을 찾으려는 수고를 아끼지 않지만, 지운이 언제 끝나고 지운이 끝나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무조건 조상의 묘를 오랫동안 보존한다는 것은 현공법으로 보면 언젠가는 오히려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므로 지운이 끝나는 시기에는 화장을 하여 국토를 이용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화장할 경우 길흉화복의 유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화장하는 동시에 인체에 유전인자의 근본이 되는 DNA도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화장하면 모든 것이 소멸되어 무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길흉화복도 자연히 소멸되므로 어떠한 풍수지리 이론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지운은 형기풍수로 판단하여 일반적인 땅과 특별히 좋은 명당에 따라 기간이 다르다. 지기의 쇠기운(衰期運)은 평범한 땅일 경우의 지운기간이고, 특별히 좋은 땅일 경우에는 삼원이 거듭되기도 한다. 이렇게 좋은 땅을 삼원불패지지(三元不敗之地)라고 한다.

석류 속 같은 입술로 죽음에 입맞춘 논개

인걸은 지령이라고 했던가. 백두대간 덕유산 자락에도 수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지만 논개를 빼놓을 수 없다. 역사적으로 위기의 시기에 진주성 촉석루에서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뛰어들어 장렬히 순국한 의기 논개가 있다. 논개의 우국충절을 변영로 시인(1898-1961)은 이렇게 노래하였다.

‘거룩한 분노는 / 종교보다도 깊고 / 불붙는 정열은 / 사랑보다도 강하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아리땁던 그 아미 / 높게 흔들리우며 / 그 석류 속 같은 입술 / 죽음을 입맞추었네!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 흐르는 강물은 / 길이길이 푸르리니 / 그대의 꽃다운 혼 / 어이 아니 붉으랴. / 아! 강낭콩 꽃보다도 더 푸른 / 그 물결 위에 /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 그 마음 흘러라.’

논개(論介·1574-1593)는 임진왜란 중 2차 진주성싸움에서 이긴 왜군이 촉석루에서 자축연을 벌일 때 왜장을 남강가로 유인하여 끌어안고 강물에 빠져 순절한 의기다. 논개는 18세 되던 해인 1591년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최경회가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여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진주로 길을 떠났는데, 진주성 함락과 함께 순절하였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의병들이 최경회 장군과 논개의 시신을 낙동강에서 건져 비밀리에 운구하였지만, 당시에 시신매장을 거부당하여 한밤중에 몰래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어야만 했던 비극적인 사연은 당시의 상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논개를 천장지비(天藏地秘)의 풍취나대(風吹羅帶)라는 천하의 명당에 안장했다. 19살 꽃 다운 나이에 의롭게 순절하고도 역사의 뒤안길에 묻힐 뻔했지만, 이른바 삼원불패지지의 명당은 논개의 이름을 땅속에서 만천하에 내놓고야 말게 된다.

땅이 알아본 논개의 붉은 혼

▲ 전북 장수군 의암사당에 있는 논개 영정.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 사실이 문자화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이 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하면서부터이며, 논개가 순국한 바위에 ‘義岩(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논개의 충성심은 이미 의심할 바 없었는데도 일부 보수적인 사대부들은 편견을 내세워 임진왜란 중의 충신·효자·열녀를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를 올리지 않았다. 그러나 진주 사람들은 성이 함락된 날이면 강변에 제단을 차려 그의 의혼을 위로하는 한편 국가적인 추모제전이 거행될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결국 경종 1년(1721)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이 논개에 대한 국가의 포상을 비변사에 건의하여 그의 순국 사실을 국가가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고, 이후 영조 16년(1740)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논개의 혼을 기리는 의기사(義妓祠)가 의암 부근에 처음 세워지게 되었다.

논개의 고향은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 주촌(朱村) 마을이다. 최근에 이곳에는 논개의 생가가 복원되었으며, 전북 장수읍 두산리에는 의암사(義巖祠)라는 논개사당을 만들었다. 논개의 묘는 1998년 묘역이 대대적으로 정화되고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를 세웠다.

물론 이는 살신성인한 논개의 충절에 비추어 당연한 일이지만, 풍수지리적 시각에서 보면 풍취나대의 명당에 안장된 논개묘의 명당 덕분이다. 마치 바람에 나부끼는 비단 옷고름처럼 논개의 기상은 삼원불패로 영원히 휘날릴 것이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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