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구간] 봉화산 르포 ‘대간의 비백(飛白)’ 지나 백운산 중재까지 | |||||||||||||||||
“뭔가를 잃어버렸을 때는 녹초가 될 정도로 지치는 게 좋아.”
그는 통조림처럼 가공된 자연에 대한 묘사를 극도로 혐오한다. 그러나 사실 자연을 표현하는 데 상투적 표현에 기대지 않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판에 박힌 감탄사를 남발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다. 그래서 나는 백두대간 종주기를 쓰면서 독자와 공모자의 관계이기를 희망한다. 진정한 공모자라면, 영화에 나오는 은행 강도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눈빛만으로 액션의 타이밍을 찾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눈빛을 나눌 것인가? 산을 좋아하는 사람을 나는 이렇게 정의한다. ‘산행의 고통을 기꺼이 즐기는 사람’이라고. 단 한 번도 나는 20kg에 가까운 배낭을 지고 마냥 즐거워하는 대간 종주자를 본 적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난동이라도 부릴 그 고통을―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가면서―즐긴다. 왜? 적어도 내 경험으로는 ‘자신과의 싸움’이니 ‘성취감’이 하는 따위는 부차적인 것이다. 나는 그것을 모종의 ‘중독성’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것이든 중독자들끼리는 서로를 알아보는 법이다. 최소한, 엄살스런 느낌표나 낯간지러운 감탄사만 떼내도 우리의 공모는 성공적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없는 듯하나 분명히 그어지는 백두대간 능선 비백(飛白)이라는 것이 있다. 붓글씨의 획에 드러난 흰 자국을 말한다. 두번째 구간의 출발점인 고기리 삼거리에서 수정봉으로 오르는 초입인 노치 마을까지가 바로 대간 등성마루의 비백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솔직히 말하면 산줄기는 거의 지워져 있다. 하지만 대간 마루로서 분수령의 지위는 잃지 않는다. (진행방향을 기준으로) 길의 왼쪽으로 흐르는 물은 섬진강으로 흘러들고, 오른쪽으로 흐르는 물은 끝내는 낙동강에 몸을 섞을 것이다.
노치에서 수정봉(804m)까지는 1시간 남짓. 수정봉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달리 두루뭉술하다. 수정봉에서 여원재까지는 2시간 정도. 그런데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이 길의 운치가 보통이 아니다. 끝없이 소나무 숲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한국인의 소나무 사랑은 신앙에 가깝다. 소나무 얘기만 나오면 우리는 아직도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금줄), 소나무와 함께 살다가(소나무로 지은 집), 소나무의 품에 안겨(관) 사라진다는’, 이제는 거의 생활문화 밖으로 밀려난 얘기를 빠뜨리지 않는다. 그런데 이런 소나무가 또 시련을 맞았다. 솔잎혹파리를 거의 제압하고 나자 소나무재선충이라는 더 고약한 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1905년 일본에서 처음 발견됐다는 소나무재선충은 1988년 부산의 금정산으로 상륙했고, 현재는 포항 지역까지 북상했다는데, 아무튼 더 이상 피해가 없기만을 빌어본다. 초창기 종주자들 길 찾기에 고생했을 구간
이튿날 아침, 여원재 마루에 선 돌벅수 ‘운성대장군’에 눈인사를 건넨 후 다시 대간 길을 잇는다. 여원재에서 시작하는 대간 길은 솔숲에서 열린다. 60~70년대 산림녹화사업으로 인공 조림된 숲과는 격이 다르다. 캠프사이트로도 더 없이 좋을 숲이다. 길은 계속 소나무숲 사이로, 오른쪽으로 장교, 가동 마을을 끼고 나들이를 나선 듯 경쾌하다. 때론 농로와 겹쳐지고 무덤을 지나기도 하는 구간이므로 표식기를 유심히 살펴야 한다. 초창기 종주자들은 길을 이어가는 데 상당히 고심했을 것 같다.
오래 전부터 고남산은 인간의 역사에 깊숙이 관여했다. 한때는 태조봉, 혹은 제왕봉이라고도 불리었다 한다. 고려 말 우왕 6년(1380) 황산대첩 당시 이성계 장군이 이 산에 천제단을 세우고 전승을 기원했는데, 동행한 정도전이 이 산의 기운으로 권세를 널리 펴라 했다는 데서 산 아랫마을 이름이 ‘권포(權布)’가 됐다고 한다. 추측컨대 이성계는 이 산 정상에서 전장의 지형지물을 샅샅이 살핀 결과 전쟁을 승리로 이끈 것이 아닌가 싶다. 고남산에서 매요리까지는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편안한 길이다. 백두대간의 등마루에 걸터앉은 매요리는 대간 종주자들에게는 매력적인 쉼터다. 마을 인심도 좋아서 경로당은 곧잘 종주자들의 잠자리로 변한다. 매점 할머니는 백두대간 전문가 수준
“여원재에서 출발했어? 그럼 오늘 복성이재까지 가겠구만.” 거의 전문가 수준이다. 수없이 거쳐 갔을 종주자들은 이 할머니의 눈에 어떻게 비쳤을까? “별별 사람 다 보지. 산에서 내려온 사람이 맞나 싶게 잘 차려 입은 신사도 있지만, 거지꼴도 숱하지.” 최고급 호텔과 선술집을 합쳐 놓아야 볼 수 있을 인간 군상이다. 사람을 대함에 층하를 두지 않는 산의 미덕이다. 매요리에서 또 지워져 버린 대간의 멧등은 운성초등학교(폐교 상태) 옆을 기준으로 가산리 뒷산으로 이어지지만 도로를 따라 우회할 수도 있다. 버들재(유치) 삼거리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뒤 가산리 뒷산의 정상(618m)에 서면 모래재(사치)가 눈 아래에 걸린다. 모래재는 지리산에서 출발한 대간이 처음으로 고속도로(88올림픽 고속국도)를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대간 종주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 도로를 가로질러야 한다(앞으로 대간 종주자의 수를 파악하려면 이 도로에서 무단횡단 범칙 스티커를 발부하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지리산 휴게소쪽으로 갓길을 가다가 지하 통로를 이용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는 종주자들의 거의 없지 싶다. 여원재에서부터 끝없이 이어지던 소나무 숲길은 모래재를 지나면서부터 자취를 감춘다. 모래재 오름길을 지나서 억새 능선을 만나면서는 적이 아쉽다. 활엽수림 지대를 걷는 것과 달리 마른 솔잎을 밟는 느낌은 융단을 지나는 것보다 더 푹신하다. 지나온 솔숲에 대해서 나는 ‘벼슬길을 마다하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모습으로 기억해 둔다. 흔하고 흔한 게 소나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지금 우리 산림의 대부분은 참나무림으로 천이(遷移)가 완성돼 가고 있다. 자연스런 현상이긴 하지만 다양성 차원에서 보면 우려할 만한 일이기도 하다. 모래재에서 새맥이재를 지나 복성이재를 향하는 대간 길은 참으로 순하다. 오른쪽으로는 산동네 치고는 꽤나 너른 들판에 안긴 마을이 옹기종기 이어진다. 남원시 운봉읍 일대다. 그런데 이 한가로운 마을이 한때는 혁명의 싹을 틔우기도 했고 좌절시키기도 했다. 40km 전구간, 동네 뒷산 산책하는 기분 들 정도로 순해
고려의 장수 이성계는 운봉의 황산에서 치른 왜구와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조선의 태조가 될 전기를 마련한다. 고려 말 우왕 3년(1380) 8월, 500여 척의 대선단으로 침입한 왜구는 충청?전라?경상 3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여 9월에 운봉에까지 북상한다. 이 때 아지발도를 우두머리로 한 왜구는 이성계에게 섬멸되는데, 이 전투를 역사는 황산대첩이라고 적고 있다.
복성이재를 지나 장수군 번암면과 남원시 아영면을 넘나드는 고개인 짓재(지도에 치재라고 표기돼 있지만 나는 짓재라고 쓴다. ‘치’와 ‘재’ 모두 고개라는 뜻인데 동어를 반복할리 없지 않은가. 고개가 가팔라 갈 ‘之’자로 오른 데서 연유한 이름이 아닐까)에서 운행을 마치고 막영 준비를 끝내자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기대 반 걱정 반으로 잠자리에 든다. 옆 텐트에서는 금방 코고는 소리가 들린다. 코고는 소리의 주인은 이번 취재에 동행한 진주 산악인 왕현수씨. 만약 잠든 사이에 멧돼지 떼가 짓밟고 지나간다 해도 우리는 그의 코고는 소리 때문에 그들의 침입을 눈치 채지 못했을 것이다.
<즐거운 하산길을 위한 정보 쪽지> 일찍 산행을 끝냈거나 하루쯤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이리저리 기웃거리며 어슬렁거리기 좋은 동네가 운봉읍 일대다. 아직도 옛 풍정이 그윽하다. 동구마다 정자가 있어 여름철 잠자리로 삼을 만하고, 요즘 같은 때는 동네 경로당에서 신세를 질 수도 있다. /글 윤제학·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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