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삼도봉 르포

‘실종된 봄’ 찾아 삼봉산 싸리숲 허위허위
빼재~삼봉산~대덕산~삼도봉~화주봉~우두령 답사

봄!

산은 온 만신이 간지러운 것이다.
간질간질 가려운 것이다.
옆구리가, 뒷덜미가,
엉덩이가―
아지랑이에 눈도 매운 것이다.
그래 헛치고
그만 웃음이 하마나 터틀려지것다.
―유치환, ‘단장 72’

▲ 삼도봉 정상에서 대덕산을 바라본 모습. 모난데라고는 없는 부드러운 능선이지만 그 사이로 깊은 골짜기를 안고 있다.

어느 계절이 ‘봄’만큼 오관을 골고루 어루만질 수 있을까?

봄의 눈부심은 벚꽃의 흐벅진 육덕에만 있는 게 아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도심 천변에서도 천연스레 고운 양지꽃, 두엄자리 곁에서도 용케 밟히지 않고 피어난 꽃다지, 콘크리트 담장 아래서도 아무렇지도 않게 꽃망울을 터트리는 민들레로 하여 봄은 정녕 눈부시다.

청각, 후각, 미각, 그리고 촉각은 또 어떤가. 종다리는 하늘 높이서 사랑 노래를 부르고, 라일락은 주인집 마당보다 골목에 더 푸짐한 향기를 내어 놓는다. 밥상 위에는 냉이와 쑥향이 싱그럽고, 옷깃으로 스미는 바람은 모공을 열고 폐부로 다가온다. 그래서 시인은 “그만 웃음이 하마나 터틀려지것다” 하고 노래한 것일 게다.

이번 대간 종주 구간은 빼재(신풍령)에서 질매재(우두령)까지. 도상 거리 약 38km로 겨울 같았으면 엄두도 나지 않을 거리다. 하지만 지금은 봄, 나들이라도 나선 듯 콧노래 흥얼거리며 동부간선도로를 달린다. 중랑천이 청계천을 품에 안고 한강으로 흘러드는 어름에 놓인 ‘살곶이다리(사적 제160호)’ 옆 산기슭은 개나리 천지다. 우리가 가고 있는 백두대간의 산허리에는 진달래가 그렇게 만발이겠지, 하는 행복 예감을 하며 한강을 건너 경부고속도로에 몸을 싣는다.

산 아래는 봄이 가득한데 여기 대간 능선은 아직 겨울

▲ 소사 마을에서 대덕산을 오르는 초입의 호밀밭을 지나는 취재팀.
무주에서 대전-진주 간 고속도로를 벗어나는 순간부터 하늘이 무거워지기 시작한다. 그래도 큰 걱정은 되지 않는다. 일부러라도 맞고 싶을 봄비가 아닌가.

빼재(930m)에서 산행 채비를 마치는 순간 예상대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봄비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아리다. 해발 1,000m에 가까운 고도는 완강하게 봄의 접근을 거부하고 있는 듯하다. 일단 우리는 빼재휴게소 마당에서 야영하기로 했다. 하지만 휴게소 주인의 호의로 주유소 건물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예약한다.

경남 거창과 전북 무주를 잇는 726번 지방도가 지나는 고갯마루인 빼재는 이름이 여럿이다. 빼재라는 이름은 옛날 이곳에 사냥꾼과 도적들이 많아 그들이 잡아먹은 동물의 뼈가 가득하였다 해서 붙은 것이라 한다. 뼈의 경상도 사투리가 ‘빼’인 때문이겠다. 무주쪽에서는 고개 아래 동네인 상오정 마을 이름을 따서 상오정고개라 불렀다 한다. 그러다가 다시 신풍령(新風嶺)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농촌 개발이 한창인 시절의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제는 ‘수령(秀嶺)’이라는 표지석까지 세워져 있다. ‘뼈’ 가득한 재가 ‘빼어난 재’로 바뀐 것이다. 괜한 시비를 하자면 상징 조작인 셈인데, 이름과 형상에 집착하지 말라는 가르침의 한 본보기로 삼을 만하다.

새벽 같이 밥을 지어 먹고 신발 끈을 조인다. 비 개인 아침 숲의 표정이 해맑다. 포르르 산새라도 날아오르면 생동감이 더할 텐데, 아무 기척도 없다. 그들도 시끄러운 고갯마루는 싫은 모양이다.

도로에 헐린 산허리를 밟고 대간 마루에 선다. 아직 이곳 대간의 등마루는 겨울잠에서 다 깨어나지 않고 있다. 봄의 북상 속도가 고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우리 산의 대부분이 나지막해서 만만해 보여도 1,000m 이상의 고도는 결코 가벼운 높이가 아니다. 한 자료에 의하면 우리 산의 평균고도는 482m로 아시아의 평균 고도인 960m에 비해 아주 낮은 편이다(한국인의 산악관 고찰―오악과 진산을 중심으로―, 이형석). 하지만 아시아의 평균을 히말라야의 산군들이 높여 놓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1,000란 높이는 그리 녹록치 않다. 참고로 미국인들이 우리의 백두대간처럼 여기는 애팔래치아 산맥의 평균고도도 1,000m 정도다.

▲ 삼봉산 기슭 소사 마을 위 낙엽송숲 앞에서 잠시 들꽃에 넋을 놓고 있다.
잠시 이번 구간 주요 산들의 높이를 미리 살펴보자. 삼봉산 1,264m, 대덕산 1,290m, 민주지산 1,241.7m, 삼도봉 1,177m인데 그 사이사이에도 1,000m가 넘는 봉우리들이 예닐곱은 된다. 이번 취재에 동행, 처음으로 백두대간 트레일을 걸어본다는 한 사람은 첫날 산행 후 "이 정도 강도면 지리산 종주를 서너 번 하겠다"고 털어 놓기도 했다. 절대 단순 비교 대상은 아니지만, 지리산만큼 트레일이 말끔하지 않고, 대피소를 이용할 수도 없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계속 져야 할 뿐만 아니라, 커다란 기복으로 오르내림을 반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산 아래는 봄이 충만한데 겨울에 가까운 등성마루를 걷는 심정은 상당히 곤혹스럽다. 특히 독자들에게 뭔가를 전해야 하는 의무를 진 사람의 입장으로서는 죄스럽기조차 하다. ‘집 나간 봄을 찾습니다’ 하고 실종 신고라도 내고 싶은 마음이다.

소사고개 향하면서 낭떠러지처럼 급전직하

▲ 삼도봉 오름길. 키작은 참나무와 억새숲 사이로 편안한 길이지만 숨이 턱까지 차오르게 하는 가풀막이다.
앙상한 참나무 사이로 살결 고운 철쭉이 무더기로 서 있다. 하나 같이 싹을 내밀지 않고 있다. 30분쯤 걷자 조록싸리와 억새 군락이 나타난다. 무표정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억새 군락을 지나자마자 드문드문 낙엽송이 연초록 잎을 내밀고 있는 게 아닌가. 망설일 것도 없이 나는 그 여리고 고운 싹을 ‘꽃’이라 불러 본다. 다가가 눈 맞추는 것도 모자라 냉큼 배낭을 벗고 디지털 카메라에 담는다. 역시 봄은 봄이다.

해가 산마루 위로 고개를 들자 오히려 시야는 흐려진다. 우리네 봄의 불청객, 황사 때문이다. 1시간쯤 더 진행하자 또 조록싸리와 억새군락이 나타난다. 끝없이 배낭을 잡아당기는 싸리숲을 지나 서서히 키를 높이자 삼봉산이다. 출근을 한 직장인들이 아침 커피를 마실 시간이다. 나는 폐부 가득 바람을 들이킨다.
삼봉산(1,264m)의 정상 표지석에는 ‘덕유삼봉산’이라고 새겨져 있다. 이 봉우리까지를 덕유산군에 포함시킨 발상인 것 같다. 산경표에도 덕유산 옆에 삼봉이라 병기돼 있다. 향적봉에서 바라봤을 때 이 산의 세 봉우리가 가장 선명한 메 ‘山’ 자 형상으로 보일 것도 같다.

삼봉산을 지나면서 조금씩 키를 낮추는 대간의 등성마루는 동쪽으로 크게 돌아 소사고개를 향하면서부터는 낭떠러지에 가까울 정도로 급전직하한다. 등성마루 가까이는 아직 채 눈이 녹지 않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신경을 곤두세운다. 눈을 벗어나자 더 미끄러운 진창이다. 이른 봄산행의 통과의례다.

그런데 이런 구간을 여럿이 지나고 보면 산행 경력과 체력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바짓가랑이 아래에 묻은 흙의 정도가 그 증표다. 이런 사실을 일찍이 간파한 나는 최대한 속도를 줄여 바지의 청결 상태 유지에 온힘을 기울인다(독자 여러분, 부디 ‘잔머리’라고 오해 마시길. 나는 그저 백두대간 종주자로서 최소한의 품위를 유지하고 싶을 뿐입니다).

가파른 기울기가 거의 누그러지자 사람의 흔적이 진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대간의 정상적인 트레일은 철조망으로 둘러쳐져 있고, ‘사유지이므로 출입을 금함’이라는 야박한 문구가 적혀 있다. 그 옆에는 ‘백두대간 보존법 결사반대’라고 적은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자연과 인간의 상생’이라는 말을 떠올려 본다. 정직하게 표현하자면 구호에 지나지 않는 말이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는, 느슨한 잣대로 보면 ‘편리공생(片利共生)’이고, 엄격히 보면 기생의 관계다.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인간은 아무도 없다.

그래도 착잡한 심정은 거둘 길 없다. 우리 사회의 성숙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결코 이 법의 취지가 농촌 사람들의 삶을 옭죄는 데 있는 건 아닐 텐데, 입법과 시행의 과정에서 정부는 왜 세련된 설득의 기술을 발휘하지 못했을까.

우리는 트레일을 가로지른 철조망 곁의 묵정밭에 앉아 점심을 먹기로 했다. 모닝빵에 햄, 치즈, 피망을 곁들인 즉석 햄버거와 커피. 그런데 일행 중 덩치가 크고 뱃구레가 큰 상우 아빠(절대 실명은 밝힐 수 없음)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 취재에 동행한 이연수씨가 생강나무 꽃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말도 안 돼. 한 입도 안 되는 빵조각으로 대간 종주를 하라고? 난 못해, 절대!”

그는 식단을 짠 나에게 농 반 진 반의 분노(?)를 숨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나 또한 어쩔 수 없다. ‘무게와의 싸움’에서 패하고 싶지 않은 나의 선택은 ‘덜 먹기’밖에 없으니까. 아마 다음 산행에서 그의 배낭은 갖가지 화려한 먹을거리로 가득 찰 것이다. 그렇다면 이 순간 립서비스를 아낄 이유가 없다.

“상우 아빠, 내려가면 짜장면 곱빼기 사 줄게.”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

점심을 마치고 청보리밭을 가로질러 소사 마을로 내려선다. 보리 수확 후는 여름 배추로 가득할 밭이다. 고랭지 채소농사로 이름 난 곳이다. 보리 밭 옆에 호식총(虎食塚)으로 보이는 돌무더기가 보인다. 시루가 얹혀 있는 것으로 보아 호환을 당한 사람의 무덤인 것 같다. 민속학에서는 호식총 위의 시루를 하늘의 상징으로 본다. 그리고 시루의 구멍에 물레에서 쓰는 쇠고챙이를 끼워 창귀(호랑이에게 죽은 사람의 귀신)를 누른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달리 이해하고 싶다. 떡시루로 포식을 시켜주는 것이라고. 만약 이 돌무덤이 호식총이 아니라면 ‘산멕이’일 것이다. ‘산을 먹인다’는 뜻의 산멕이는 산악신앙의 하나로 산제의 한 형태다. 실제로 강원도 양양의 산골마을에서는 호랑이에게 떡을 해서 먹이는 산제를 행한다고 한다.

소사고개를 지나는 대간 종주자들이라면 반드시 들르게 되는 구멍가게에서 소줏잔을 기울이는 동네 사람에게 귀동냥을 한다. 경남 거창군 고제면 탑선 마을과 전북 무주군 무풍면 덕지리가 이웃하고 사는 이 동네는 말씨도 한 가지란다. 전북의 무풍면 사람들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는 것이다.

▲ 초점산(삼도봉)과 대덕산 사이 억새능선을 지나는 취재팀.
그러다가 나제통문을 넘어서면서 확연히 전라도 말로 바뀐다고 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신라 땅이었던 무풍은 본디 무산현이었는데, 경덕왕 때 무풍현으로 고쳐져서 지금의 김천인 개령군에 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 뒤 1414년(조선 태종 14)에 무주현으로 편입됐고, 1914년부터 무주군 무풍면이 됐다. 그런데 그들은 지금까지도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 인위적인 행정 구역이야 얼마든지 바뀔 수 있지만, 산줄기로 갈라지지 않은 한에는 한 마을 정서가 끊이지 않는 것이다. 왕조의 절대 권위보다 더 큰 산의 영향력이다. 이것이 백두대간의 진실이다.

소사고개에서 대덕산(1,290m)을 오르기 위해서는 초점산(1,210m)을 거쳐야 한다. 초점산은 삼도봉으로도 불리는데, 경북 김천, 경남 거창, 전북 무주의 경계를 이룬다. 느긋한 걸음이라면 초점산(삼도봉)까지 2시간, 초점산에서 대덕산까지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초점산에서 대덕산까지의 능선은 부드럽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올라서는 길인데, 키 작은 참나무와 조록싸리, 조릿대,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의 참나무도 고산의 그것처럼 키가 작은데, 마치 관목처럼 뿌리에서부터 가지가 갈라지는 것이 이채롭다. 세찬 바람에 맞선 생존 전략인 것 같다.

대덕산은 말 그대로 대덕의 풍모를 지니고 있는 산이다. 산의 덕스러움은 모양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물 좋기로 이름난 김천의 대표적 물줄기인 감천의 발원지가 바로 이 산이다. 정상부에는 헬기장도 두 개나 있다. 그만큼 너름새가 크다는 얘기가 되겠다.

대덕산 정상에서 15분쯤 내려서면 얼음골 약수터가 나타난다. 더 내려가서 덕산재에서 식수를 구할 수 있지만, 맛있는 물을 원한다면 이곳에서 수통을 채우는 것이 좋다. 얼음골 약수터에서 천천히 걸어도 50분쯤이면 덕산재에 닿을 수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는 필히 가끔씩 뒤를 돌아다보아야 한다. 그 때가 마침 석양 무렵이라면 이우는 해에 실루엣을 드러내는 대덕산의 진경을 만나게 될 것이다.

삼도봉 화합탑은 외려 지역감정 일깨우는 듯

대덕산이 허리를 낮추어 고개를 하나 여니, 그곳이 바로 덕산재(640m)다. 김천시 대덕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고갯마루로 30번 국도가 지나는 날씬한 포장도로다. 하지만 교통량은 극히 드물어 주유소도 휴게소도 문을 닫은 지 오래다. 휴게소에는 산삼 판매소라는 안내문을 달고 있는데 인기척이 없다. 그래도 화장실은 개방돼 있어서 식수를 구할 수 있다. 대간 종주자를 위한 집 주인의 배려인 것 같다.

덕산재에서 30분쯤 진행하면 폐광터가 나온다. 캠프사이트로 더없이 좋긴 한데 광산 폐쇄 후 식생 복원을 제대로 하지 않아 상당히 을씨년스럽다. 계속 방치하면 산사태가 가속화될 것 같다.

▲ 삼봉산에서 내려와 소사 마을로 가는 길. 겨울을 온몸으로 받아낸 청보리밭의 푸르름. 바라보는 이를 숙연하게 하는 초록.

폐광터에서 편안한 하룻밤을 보내고 부항령(690m)을 향한다. 김천시 부항면과 무주군 무풍면을 잇는 고갯마루였던 부항령. 백두대간의 오래된 고갯마루인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부항현’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이제는 고개의 구실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아래로 삼도봉터널이 뚫렸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일대에는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다.

부항령에서 삼도봉을 향하는 발길이 무겁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두 개나 거푸 넘어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제와 달리 기온이 높기 때문이다. 눈은 겨울, 몸은 봄, 발은 여름이다. 그러고 보니 하루 사이에 산색이 바뀐 것도 같다. 산허리 곳곳엔 생강나무가 꽃망울을 다 내놓고 있고, 찔레도 손을 내밀어 햇빛을 모으기에 바쁘다. 부항령에서 삼도봉까지는 3시간 남짓 거리다. 느긋한 걸음에 중간에 한 끼 해결해도 4시간이면 충분하다.

▲ 삼도봉 정상에 선 취재팀. 왼쪽부터 이연수, 이원영, 구인모, 윤제학(필자), 김성우 제씨.

드디어 삼도봉(1,177m). 민주지산의 봉우리로 백두대간의 줄기를 이루는 삼도봉은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에 걸쳐 있다. 지리산의 삼도봉(날나리봉)이 전남?북과 경남, 대덕산 전의 삼도봉(초점산)이 경남·북과 전북으로 불완전한 삼도인 것에 비해 온전한 삼도봉이다. 정상에 삼도봉 화합탑이 서 있는데, 오히려 지역감정을 일깨우는 것 같아 영 보기에 거북하다.

삼도봉에서 양껏 해바라기를 하며 충분하게 휴식을 취한 다음 걸음을 옮긴다. 10분쯤 내려서면 물한계곡으로 내려서는 갈림길이다. 이곳에서 계곡을 따라 5분쯤 내려가서 샘물 같은 계곡물을 가득 채워 다시 대간 위에 선다. 40분 가량 진행하자 지도에 1,123.9m라고 표기된 봉우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돌아 내려서자 밀목재를 알려주는 팻말이 보인다. 밀목재를 지나쳐 1,089.3m봉 아래서 배낭을 부린다. 허기진 배가 더 이상 다리를 움직여 주지 않는다.

▲ 경북(김천), 전북(무주), 충북(영동) 삼도에 걸친 삼도봉 정상에 선 삼도봉 화합탑.

잔뜩 구름 낀 하늘이 아침을 재촉한다. 또 비가 올 것 같다. 날씨도 초겨울로 돌변한다. 미역국으로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서둘러 짐을 꾸린다. 조끼를 입고도 모자라 재킷까지 꺼낸다. 모자까지 단단히 썼는데도 오한이 들 정도다. 마지막 산행 날이 늘 그렇듯이 바닥난 체력과 무관하게 발걸음이 가볍다. 거기다가 트레일도 좋고 오르내림도 가볍다. 이번 종주 중 가장 편안한 구간이다.

2시간쯤 걸었을까. 성긴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농사에도 산불 방지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다 왔다’는 안도감이 주는 여유다.

▲ 꽃 같은 신록이든, 한여름 거칠 것 없는 녹음이든, 그 시작은 작디작은 새싹이다. 이슬을 매달고 있는 소나무 새순, 노란 꽃을 달고 있는 생강나무, 버들꽃.

드디어 질매재(730m).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을 이어주는 고갯마루다. ‘질매’라는 이름은 이 고개의 생김새가 마치 소 등에 짐을 싣거나 수레를 끌 때 안장처럼 얹는 ‘길마’ 같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질매는 길마의 이 고장 사투리다. 이 말이 한자화하여 우두령(牛頭嶺)이라고도 불리는 것인데,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두 이름이 별개인 양 둘 다 표기돼 있다.

고갯마루 아래의 산허리엔 진달래 꽃불이 환하다. 나는 그 꽃불 하나 가득 담아서 길마 위에 올라앉는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3)

-현지 서비스를 최대한 활용하라

백두대간이 우리나라의 으뜸 산줄기라는 말은, 대부분의 명산이 그 안에 포함돼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비산비야의 형국이 있는가 하면 이름만 들으면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산도 많다. 특히 이번 구간처럼 경상, 충청 내륙의 산들은 어쩌면 섬보다 더 접근이 어렵다. 그래서 대부분 종주자들은 대중교통수단이 닿는 곳까지 와서 택시를 이용하거나 자가용 승용차를 이용하게 되는데, 더 번거로운 것은 하산 후 차를 둔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데 있다. 여관이나 민박 시설을 이용할 수 없는 것도 상당히 불편하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대간 종주가 대중화되면서 이런 어려움은 상당히 해소되었다. 대간 종주자만을 위한 민박집이 생겨났는가 하면 출발점까지 차량 제공을 하거나 하산 지점까지 승용차를 옮겨 주기도 한다. 말만 잘하면 마을 경로당도 잠자리로 이용할 수 있다. 다만, 다음 사람을 생각하여 최소한의 예의는 갖출 것.
이번 산행의 기점인 빼재의 경우 휴게소(055-942-5244, 011-8388-5244)에서 차량 이동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 요금은 기름값+α. 전문적인 영업행위가 아니므로 말본새에 따라서 실비로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 앞으로는 휴업 중인 주유소 건물을 전문 민박시설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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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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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5구간] 역사지리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
십승지(十勝地)의 무풍은 현 무풍면, 피장처 원학동은 금원산과 남덕유 사이

새벽 별빛처럼 짧은 인생살이에서 누구라도 가슴 깊은 곳에 꿈꾸는 장소가 있다. 그곳은 어린 시절의 아련한 고향일 수도 있고, 산모롱이 어느 양지바른 토담집일 수도 있고, 어딘지는 모르지만 마음속에 그리는 그 어떤 곳일 수도 있다. 그 어느 곳일지라도 내 생명이 온전히 보전되고 가족들과 길이길이 오순도순 정 나누며 살고픈 곳일 게다. 박목월 시인은 그 오롯한 순심(順心)을 다음과 같이 절창하였다.

▲ 대덕산.

산이 날 에워싸고,
씨나 뿌리며 살아라 한다.
밭이나 갈며 살아라 한다.
어느 짧은 산자락에 집을 모아,
아들 낳고 딸을 낳고,
흙담 안팎에 호박 심고,
들찔레처럼 살아라 한다.
쑥대밭처럼 살아라 한다.
산이 날 에워싸고,
그믐달처럼 사위어지는 목숨,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그믐달처럼 살아라 한다.



예부터 지구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희구하였던 곳, 이상향에 대한 관념은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이 다르고, 시간적으로는 시대에 따라 달랐으며, 문화적으로 문화 속성에 따라 차이가 났다. 우리가 아는 이상향의 뜻과 유사한 용어 중 불교의 극락과 정토, 기독교의 에덴동산 혹은 천국, 도교와 신선사상의 무릉도원, 삼신산, 청학동 등은 사후 아니면 관념적인 이상 세계를 일컫는 말이라고 치더라도 현실의 이상향을 표현한 말로서도 길지(吉地), 낙토(樂土), 혹은 낙원(樂園), 복지(福地), 명당(明堂), 가거지(可居地) 등의 용어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승지(勝地)라는 말이다.

덕유산과 삼도봉에 에워싸인 무풍

▲ 백두대간 삼도봉 연맥.

승지라는 말은 뜻 그대로 자연 경관과 거주 환경이 뛰어난 장소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조선시대에 정감록이라는 기서(奇書)에서 국토의 열 곳을 구체적으로 지점하여 십승지(十勝地)라고 일컬었으며, 이것은 민중들에게 강력한 공간적 영향력을 끼쳤던 역사적 사실이다. 당시 민중들은 정감록의 십승지론을 신봉하여 실제 거주지를 그곳으로 옮긴 경우가 비일비재하였고, 현지를 답사해 보면 그 후손이 살고 있는 사례도 있었다. 그 열 곳의 십승지 중에는 백두대간을 끼고 있는 골도 여럿 있는데, 덕유산과 삼도봉에 에워싸인 무풍 역시 십승지의 한 장소로 꼽혔던 곳이다.

그러면 공간적으로 동양과 서양에서는 각각 이상향을 어떻게 생각하였으며, 그 이상향이 되기 위한 구비 조건은 무엇이었을까? 서양의 이상향에 해당하는 용어인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어원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장소(Topia)가 아닌(U) 땅이었다. 토마스 무어의 유토피아라는 책에서 제시된 이상향은 구체적인 장소가 아니라 사회적이며 인위적으로 건설된 이상국가로서, 이것은 서양인의 이상향을 대변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 월성계곡의 하류와 모암정.

반면 동양의 이상향에는 무릉도원이라는 아이콘이 대변하듯이 반드시 자연경관이 심미적으로 뛰어나고 주거환경이 풍요로운 곳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곳은 산으로 에워싸인 지역이라는 지리적 영역성을 벗어날 수 없었으며, 동아시아 이상향의 지도에서 산이라는 영역은 심리적인 집단무의식(集團無意識)의 핵심이자 축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앞서 말한 조선조의 십승지 역시 모두 산과 하천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의 장소였음은 물론이다.

▲ 거창읍 학리.

그러면 정감록에서는 승지 열 곳을 어디라고 하였을까? 정감록이라는 책은 여러 문서들을 편집하여 구성한 것인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편명인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동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이어서 위에서 열거한 열 곳 승지의 지리적 위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부연하여 말하였다.

‘첫째는 풍기 차암 금계촌으로 소백산 물골 사이에 있다. 둘째는 화산 소령 고기로 청양현에 있는데, 봉화 동쪽 마을로 넘어 들어갔다. 셋째는 보은 속리산 사증항 근처로, 난리를 만나 몸을 숨기면 만에 하나도 다치지 않을 것이다. 넷째는 운봉 행촌이다. 다섯째는 예천 금당실로 이 땅에는 난의 해가 미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곳에 임금의 수레가 닥치면 그렇지 않다. 여섯째는 공주 계룡산으로 유구 마곡의 두 물골의 둘레가 2백리나 되므로 난을 피할 수 있다. 일곱째는 영월 정동쪽 상류로 난을 피해 종적을 감출 만하다. 여덟째는 무주 무봉산 동쪽 동방 상동으로 피난 못할 곳이 없다. 아홉째는 부안 호암 아래가 가장 기이하다. 열째는 합천 가야산 만수봉으로 그 둘레가 2백리나 되어 영원히 몸을 보전할 수 있다. 정선현 상원산 계룡봉 역시 난을 피할 만하다.’

이 글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십승지는 우선 전란이 미치지 않아서 몸을 보전할 수 있는 지리적 조건을 갖추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정감록에서 지점된 십승지가 모두 오지에 위치한 것도 그러한 까닭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아울러 조선시대에 십승지라는 이상향의 담론이 형성된 사회적 배경은 조선 중기 이후 특히 임란 및 호란 등의 전란과 정치적 혼란이었다는 사실도 추정할 수 있다.

택리지에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기록

한편, 정감록의 본문에는 표현되지 않았지만, 십승지는 또 오랫동안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적 환경조건도 요구되었으며, 아래에 나오는‘십승보길지지(十勝保吉之地)’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풍수적인 명당길지 조건 역시 필수적인 요건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십승지가 대체로 경작이 양호하고 풍수가 좋은 배산임수의 자연 조건을 지니고 있는 데서 짐작할 수 있다.

▲ 무주 나제통문.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이며 행정구역은 전라도이나 경상도 문화권이다.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삼도봉 자락에 둘러싸인 무풍 역시 조선시대의 도로교통 조건에서 대로(大路)와의 접근성이 떨어져서 지리적 오지에 위치하고 있으나 상대적으로 큰 하천을 끼고 있고 산으로 둘러싸인 비교적 넓은 분지 지형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말하기를 ‘남사고는 무풍을 복지(福地)라 하였다. 골 바깥쪽은 온 산에 밭이 기름져서 넉넉하게 사는 마을이 많으니, 이 점은 속리산 이북의 산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고 하였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전란과 정치적 환란의 굴곡에서 피폐하였던 민중들은 정감록이라는 책을 믿고 무풍 지역의 골짜기에 찾아들어 피난, 보신(保身)의 삶을 일구어 나갔던 것이다.

정감록에 지점된 열 개의 승지 중에 백두대간의 덕유산과 대덕산 지역으로 거론된 십승지에 관련된 내용은 위에서 말한 정감록의 감결 외에도 몇 가지가 더 있다. 우선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에 기록하기를, ‘무주 무풍 북쪽 동굴 옆의 음지이니 덕유산은 난리를 피하지 못할 곳이 없다’고 구체적인 장소를 기록하면서도 덕유산 전체를 난리를 피하여 몸을 보전하는 승지로서 공간적 영역이 확대되어 표현되어 있다.

역시 정감록의 한 편명인 ‘피장처(避藏處)’에는 ‘전라도 무주 덕유산 남쪽에 원학동(猿鶴洞)이 있는데 숨어 살 만한 곳이다’는 내용도 있다. 정감록의 감결이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서 말한 무풍은 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의 영역임은 분명하고, 다만 피장처에 소개된 원학동은 현재 금원산(金猿山)의 북쪽 골짜기에 해당하는 북상면 월성계곡 주변, 혹은 거창읍 학리(鶴里)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월성계곡은 남덕유산에 둘러 싸여 산수미가 장쾌하도고 빼어난 곳으로, 이 계곡 인근에는 많은 산간 마을이 입지하여 있는데, 위에서 인용한 피장처에서 ‘덕유산 남쪽’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원학동은 금원산과 남덕유산 사이의 골짜기일 가능성이 크다. 한편 거창읍 학리는 400년 전에 청주 한씨가 세운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아늑하게 둘러싸인 산자락을 등지고 넉넉한 하천을 끼고 있어서 삼산이수(三山二水)의 입지로 알려져 있는데, 정감록에 나오는 승지적 개념의 가능성 보다는 후대에 의미가 덧붙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 덕산재에서 바라본 대덕산과 백두대간의 덕유산 연맥.

그러면 십승지 무풍의 역사지리적 입지조건은 어떤지 살펴보기로 하자. 지리적으로 무풍은 서쪽으로 백두대간의 덕유산에서 삼도봉 구간, 남쪽에서 동쪽에 걸쳐서는 덕유산 연맥, 북쪽으로는 민주지산이 둥글게 에워싸고 있는 곳에 위치하여 있다. 수계(水系) 조건으로는 남대천의 지류가 주위의 산복에서 발원하여 구불거리면서 흐르다가 무풍에 이르러서는 합류하여 면소재지를 에워싸면서 서쪽으로 흘러나가는 형국을 하고 있어 풍수적인 좋은 조건도 구비하고 있다.

선조들이 추구했던 승지의 의미는?

역사적으로 무풍은 원래 현이 있었던 곳으로서 행정구역명은 무풍현(茂豊縣)이었다. 현재의 무주(茂朱)라는 지명은 조선 태종 14년에 무풍(茂豊)과 주계(朱溪)를 합쳐 생겨난 이름인데, 무풍현은 본래 신라의 무산현이었고, 주계현은 원래 백제의 적천현이었다. 따라서 행정구역상으로 무풍은 전라도에 속하지만 언어와 풍속권으로 보자면 경상도에 가깝다는 사실이다. 곧 무풍 지역은 백두대간의 마치와 주치(덕산재)를 넘어 경상북도의 지례, 김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여 왔던 것이다.

무풍이 지리적인 오지라는 사실은 반대편 덕유산 서사면 자락의 적상산에 사고(史庫)가 있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다. 16세기에 국가에서 편찬된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옛날 거란병과 왜구가 침략하였을 때 근방의 수십 군(群)의 백성이 모두 이곳에 의지하여 보전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 무풍면 소재지 전경.

정감록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에는 위에서 언급한 열 곳 외에도 다음과 같은 장소가 추가되고 있다. 그 지역은 모두 태백산과 소백산의 남쪽으로서, 풍기와 영주, 서쪽으로 단양과 영춘, 동쪽으로 봉화와 안동이 보신처라고 하였고, 내포의 비인과 남포, 금오산, 덕유산, 두류산, 조계산, 가야산, 조령, 변산, 월출산, 내장산, 계룡산, 수산, 보미산, 오대산, 상원산, 팔령산, 유량산 온산 등도 들었다.

한편 정감록의 서계이선생가장결에는 ‘황간 영동 사이에는 가히 만 가호가 살아나고, 청주 남쪽과 문의 북쪽 역시 모습을 숨길 수 있다. 이런 세상을 맞아 남편은 밭을 갈고 아내는 베를 짜되 벼슬자리에 오르지 말고 농사짓는 데 부지런히 힘씀으로써 스스로 살 길을 버리지 않도록 하라’고 다시 몇 군데가 추가되었다.

이상적인 주거지의 위치와 모형은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사회적으로 재구성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생명이 처한 총체적인 위기 상황의 사회 현실에서 생태환경적 가치에 대한 각성과 본연적인 삶의 질에 대한 지향은 옛 선조들이 추구하였던 승지의 가치와 의미를 다시금 돌이키게 한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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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르포

덕유능선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 예술의 경지를 넘어서다
육십령~합미봉~남덕유~백암봉~빼재

봄앓이가 유난스러웠다. 늦된 성장통 같은 삼월 큰 눈 탓인지 남녘의 꽃타령도 예년보다 늦다. 그렇지만 또 이렇게 봄은 왔다. 양지바른 산기슭엔 생강나무가, 사람의 눈길 가까운 곳엔 산수유가 노란 꽃불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지금 우리의 발길은 봄기운과는 아득히 멀어지고 있다. 퇴장하는 겨울을 배웅하는 길이다. 얼음꽃 만발한 덕유산에서 우리는 장엄한 모습으로 사라져가는 겨울의 뒷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 향적봉에서 맞는 덕유산의 아침. 빛. 그리고 첩첩 산. 우리네 삶의 자궁.

어둠살이 스멀거리기 시작할 무렵, 육십령(734m)에 선다. 서쪽으로 전라북도 장수, 동쪽으로 경상남도 함양을 잇는 고갯마루다. 여기서 우리는, 이쪽으로든 저쪽으로든 내려설 일만 남은 고갯길의 운명을 배반한다. 인간의 길을 따를 때는 늘 올려다볼 수밖에 없던 고갯마루가 금방 눈 아래로 멀어진다. 기분 좋은 단절감. 이제 온전히 자연의 길에 들어섰다는 모종의 우쭐함. 먼 옛날, 수렵시대의 남자들이 여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사냥터를 떠날 때의 기분도 이렇지 않았을까.

참나무 사이로 적당히 소나무가 섞인 느긋한 오름길은 참나무 일색으로 바뀌면서부터 조금씩 키를 올리기 시작한다. 어둠살이 촘촘해진다. 나무도 먼 산도 어둠 속에서 실루엣으로 되살아난다. 헤드램프를 켠다. 불빛을 스치는 입김이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르는 기차 화통의 연기처럼 짧고 급하다. 이렇게 40분 정도를 오르자 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헬기장이다. 한참 숨을 고르고 나자 고집스럽게 곧추선 봉우리가 시야를 가로막는다. 요즘 대간 종주자들 사이에 할미봉(1,026.4m)이라 불리는 암봉이다.

할미봉은 합미봉으로 고쳐져야

▲ 남덕유산 기슭에서 만난 얼음꽃의 햇빛춤.
그런데 언제부터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일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고도만 표기돼 있을 뿐 이름이 없다. 그러나 최근 월간山에서 발간한 <신상경표>에는 ‘합미봉’으로 적혀 있다. 편자인 박성태 선생에게 전화를 걸어 사연을 물었다. 앞선 어느 지도에도 할미봉이라는 표기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만 국토지리정보원의 지명일람표에는 합미봉이라고 고시(1961년)돼 있다고 했다. 확인해 본즉, 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격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지명 유래까지 붙여져 있었다.

예언성 지명이었을까? 아니면 훗날 만들어진 것일까? 어쨌든 도승의 말은 크게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일제시대에 합미봉(할미봉) 아래엔 수연, 즉 몰리브덴 광산이 생겼고, 전국 곳곳에서 광부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 중 다수는 ‘굴병’(규폐증)에 걸려 동네를 과부촌으로 만들고 말았다. 광산은 곧 폐광이 되었다. 그러나 80년대 초쯤부터 다시 차돌광산으로 개발되어 마을 형편이 좀 나아졌다 한다. 이 마을이 바로 육십령 초입 합미봉 아래의 장수군 장계면 명덕리 반송 마을이다(<뿌리깊은나무>에서 펴낸 ‘한국의 발견’ 전북편의 장수군 기사 참조).

한편 반송 마을 맞은편에, 역시 육십령 초입인 함양군 서상면 상남리에 군장동(軍藏洞)이라는 마을이 있다. 군사를 숨겨둔 곳이라는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렇게 본다면 ‘합미봉’이라는 이름은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감춰둔 군사가 있으면 당연히 군량미가 있어야 할 테니까.

갈 길이 먼데 샛길이 너무 길었다. 알면서도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백두대간 전 구간, 아니 우리나라 전역에 이런 사례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허술한 기록 문화의 폐해는 결코 가볍지 않다. 주관적인 견해나 문학적 감성의 표현이 아니라면 최대한 엄정을 기해야 한다. 특히 명명의 오류는 개념의 오류를 낳고, 같은 사물에 대한 세대간 교감의 다리를 무너뜨릴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 10분쯤 가볍게 출렁거리듯 내리막과 오르막을 반복하자 동쪽 산마루 위로 달빛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보름을 갓 지난 달빛은 습기 머금은 대기를 노을처럼 붉게 물들인다. 비록 아침 조망이 좋은 캠프사이트를 찾기 위한 야간산행이지만, 이것만으로도 산을 오르는 즐거움은 다리의 수고에 비해 과분하다.

헤드램프를 끄고 달빛에만 의지하여 20분쯤 나아가자 합미봉 정상이다. 상당히 까탈스런 암봉이다. 이런 봉우리를 어찌 할미라는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까. 성미 괴팍한 노파라 한다면 또 모르겠지만.

합미봉에서 내려서는 길은 맑은 날 환한 대낮이라도 팽팽한 긴장을 요구한다. 필요한 곳마다 줄을 걸어 놓긴 했지만, 잠깐이라도 두 다리가 딴 생각을 하면 잠시 후의 안녕을 보장 받기 힘들다. 거벽등반가들이 들으면 웃을 얘기지만, 이럴 때마다 나는 마치 기도를 하듯 바위에 속삭인다. 제발 나를 한 몸으로 여겨달라고. 기도발이 먹힌 건지, 무사히 암릉을 벗어난다. 돌아보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하지만 그 마음은 잠깐이다. 얼치기 자연주의자의 가소로운 기도를 들어준 산신에 영광 있기를.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 남덕유산 정상 언저리에서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합미봉을 내려서서 서봉(장수덕유산) 오름길 전까지는 평탄한 능선길이다. 1시간 가량 나아가자 서쪽으로 크게 휘는 지점이 나타난다. 캠프사이트로도 맞춤한 곳이다. 그러나 우리는 서봉을 1시간쯤 남겨둔 지점까지 가서야 배낭을 내린다. 산뜻한 출발이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서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바람 소리가 심상찮다. 내일 아침 멋진 상고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너무 추워서 한숨도 자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뒤섞기는 순간 혼곤히 잠속으로 빠진다. 적당한 피로와 긴장보다 좋은 수면제는 없다.

백두대간 등성마루에서 또 하루를 연다. 텐트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춥다. 인간이 광합성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잠에서 깨어나서도 침낭에 파묻혀 한참 더 꼼지락댄다. 맛난 것 몰래 꺼내 먹듯이 최대한 게으름을 즐긴다. 아침형 인간? 이 달콤한 기분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할 일이다. 확신하건대, 아담도 이브도 이런 시간에는 선악과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의 즐거움은 오래 가지 못한다. 무박으로 구간 종주하는 대간꾼들의 걸음이 빈번해지기 때문이다. 이제는 취재팀의 일원이 돼 버린 진주 산악인 김종현씨의 부지런한 아침 준비도 더 이상 게으름 필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한다. 우리도 선악과를 먹어야 할 시간이다. 그래야 사람 구실할 수 있을 테니까.

▲ 무룡산 정상에서 아침을 맞은 취재팀. 최고급 호텔의 스위트룸도 이처럼 장엄한 아침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밥 당번인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일은 물과 불을 조절하는 일이다. 이 두 가지만 잘 하면 코펠 뚜껑을 한 번도 열어보지 않고 맛있게 밥을 지을 수 있다. 나는 열 번에 일곱 번 정도의 성공률로 취재팀의 입을 즐겁게 한다. 산에서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다(여기서 잠깐 독자의 이해를 구할 것이 있다. 취사 야영 문제인데, 취재 특성상 불가피하여 산림청과 국립공원관리공단의 사전 허락을 받았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독자라는 ‘빽’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걸 한 시도 잊지 않는다).

햇살이 목덜미쯤을 파고들 쯤 서봉(1,500m)을 향한다. 20분쯤 나아가자 헬기장이 나타나면서 덕유교육원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난다. 여기서부터는 계속 오르막이다. 20분쯤 지나자 암릉이다. 서봉과 남덕유산이 사이좋은 이웃처럼 손 맞잡고 다가서는 조망처다. 바위 봉우리인 서봉과 남덕유산(1,507.4m)의 둥두렷한 서쪽 기슭이 자못 대조적이다.

▲ 서봉 정상에서 남덕유로 향하는 대간꾼들.

서봉 정상 직전에서 한바탕 흩뿌리는 눈을 만난다. 파란 하늘에 눈이라니. 산기슭을 오르던 바람의 장난이다. 바람의 장난?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렇다. 그러나 서봉 정상에 이르면 예술의 경지에 이른다. 암벽에 붙은 상고대는 섬세한 바람의 올을 정교하게 재현하고 있다. 이보다 더 빼어난 조각이 있을까. 역광으로 보이는 나뭇가지의 상고대는 또 어떤가. 이보다 더 아름다운 보석이 있을까. 하지만 아직 최고의 감탄사는 남겨둬야 한다. 서봉에서 남덕유산을 향하는, 연줄처럼 휘어진 능선의 얼음꽃 터널에서 바람은 예술의 경지를 넘어선다.

봄기운 머금은 햇살과 나뭇가지에 얼어붙은 눈으로 빚은 바람의 연금술. 투명한 사슴의 뿔인 것도 같고, 하늘에서부터 드리운 고드름 같기도 한 얼음꽃의 아름다움은 시각적인 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 절정은 바람결에 부딪치는 얼음꽃의 합창으로 완성된다. 편종 소리 같다 싶으면 풍경소리 같고, 실로폰 소리 같다 싶으면 마림바 소리 같기도 한 그 소리. 지상의 어떤 악기로도 흉내낼 수 없을 것이다.

응원 산행 나온 진주팀 김밥,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자연현상 가운데 바람만큼 변화무쌍한 것도 드물 것 같다. 이름부터가 다채롭기 그지없다. 봄에 부는 바람은 당연히 ‘봄바람’일 텐데, 느낌에 따라 꽃바람도 되고 꽃샘바람도 된다. 불어오는 방향에 따라서는 갈바람(서남풍), 높바람(북북동풍), 높새바람(북동풍), 높하늬바람(서북풍), 늦하늬바람(서남풍), 마파람(남풍), 된마파람(동남풍), 된바람(북풍), 샛바람(동풍), 하늬바람(서풍)으로 불린다.

▲ 삿갓봉에서 남덕유와 서봉(장수덕유산)을 향하는 덕유산의 장쾌한 능선.

바람의 세기나 느낌 혹은 꼴에 따라서는 건들바람, 고추바람, 남실바람, 노대바람, 돌개바람, 명주바람, 산들바람, 살바람, 서늘바람, 서릿바람, 선들바람, 소소리바람, 소슬바람, 손돌바람, 솔바람, 실바람, 싹쓸바람, 왜바람, 용숫바람, 피죽바람, 황소바람, 회오리바람, 흔들바람 등으로 불린다. 이밖에도 장소나 때에 따라 부르는 이름이 많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런 이름을 거의 잊(잃)어 버리고 산다. 우리와 거리가 먼 대서양의 허리케인이나 북아메리카의 토네이도, 히말라야와 인도양을 오가는 몬순은 알면서도.

오늘날 우리 고유의 바람 이름이 사라진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런 이름들은 대부분 농업과 어업의 산물이었기 때문이다. 농경 사회에서 천하태평은 ‘비바람이 조화로운 것(雨順風調)’에서 시작된다. 당연히 농부는 바람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뱃사람들은 바람에 더 예민하다. 뒤집히면 저승이다. 그들은 세 치(배의 판자 두께) 아래에 저승을 두고 삶을 경영했다. ‘바람은 대기의 숨결’이라는 신화적 상상력이 농부와 어부들에겐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이었던 것이다. 근대는 신화만 앗아간 것이 아니라 자연과 교감하는 인간의 감각도 가져가 버렸다.

서봉과 남덕유산 사이의 안부에서 약간의 갈등을 한다. 대간 트레일은 이곳에서 월성치와 남덕유산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당연히 월성치로 곧장 가는 것이 편하다. 남덕유산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하지만 어느 쪽으로 가든 대간종주임은 분명하다. 시간과 체력에 따라 종주자 스스로 결정할 일이다. 백두대간이란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능선과 기슭 전체를 일컫는 것이지 등성마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상당 부분 대간 종주 트레일은 능선을 벗어나 있다. 글자 그대로의 능선을 밟는 일은 불가능에 가까울 뿐더러 발상 자체가 기계적이다. 앞으로는 사태 지역이나 심하게 훼손된 능선은 우회하는 방식으로 트레일을 보호하는 것이 누구나 대간 종주를 즐기면서 보호하는 길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남덕유산을 오르지 않을 수 없다. 독자에 대한 직무유기가 될 것 같아서. 얼굴은 감각이 없을 정도로 얼얼한데, 입속에서는 단내가 풀풀 난다. 얼음꽃을 따서 입속에 넣는다. 달다. 어느 정도인지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참나무 수액이 섞였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남덕유산 아래에서 빵과 과자로 점심을 해결하고 월성치로 향한다. 월성치에서 물을 보충하려던 계획은 미수에 그치고 만다. 꽁꽁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 월성치에서 삿갓골 사이의 얼음꽃 터널.
갈증과 허기가 겹쳐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울 무렵, 반가운 얼굴이 나타난다. 지난 산행에 동행했던 왕현수씨가 응원 산행을 나온 것이다. 함께한 이정한(진주 KBS여성산악회 회장), 이순자씨(진서산악회)가 건네주는 김밥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다. 쌀로 만든 음식을 먹어본 지가 한참만으로 느껴질 정도다. 한국인은 밥 앞에서 너무 정직하고 또한 무력하다.

삿갓골재대피소에서 물과 가스를 보충한 다음 진주팀과 작별한다. 그리고 2시간쯤 더 걸어서 도착한 곳은 무룡산(1,492m) 정상. 덕유산 주능선의 중간쯤 되는 지점이다. 이곳에서 또 하루를 접는다. 멀리 산 아래로 넘어가는 태양을 아끼며 바라본다.

햇살이 고개를 들기도 전부터 무룡산 정상은 일출을 기다리는 주말산행객으로 왁자지껄하다. 세찬 바람은 촌각을 다투어 구름을 흩날리며, 깨어나는 아침 산의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낸다.

무룡산에서 순한 내리막을 이루는 트레일은 동엽령 직전에서 가파르게 내려섰다가 곧추서듯 백암봉(1,480m)에 닿는다. 남쪽으로 지리산 연봉, 동쪽으로 가야산 정상이 첩첩 산 그림자 위로 하늘에 머리를 담그고 있다. 북쪽으로는 중봉을 향하는 덕유평전. 가장 덕유산다운 풍광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부터 대간 트레일은 덕유산과 작별을 고한다. 동쪽으로 크게 휘돌아 차츰 고도를 낮추며 잦은 오르내림을 반복하다 귀봉을 지나면 송계사 갈림길에 닿는다. 동남쪽으로는 송계사, 그 반대쪽은 백련사다.

▲ 삿갓재 대피소 전 조망처에서 진주 산악인들과 함께한 취재팀.

송계사 갈림길에서 지봉(池峯?못봉?1,302.2m)까지는 허기지고 지친 자에게는 야속할 정도의 가팔막이다. 정상 직전은 헬기장. 지봉에서 바라보는 대봉(약 1,190m)은 또 한 번 지친 다리의 맥을 풀어 놓는다. 까마득히 떨어졌다가 솟구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계단처럼 경사각을 접어가며 오르기 때문에 오히려 지봉 오름길보다 쉽다.

대봉에서 40분쯤 진행하면 갈미봉(1,039.3m). 이 봉우리에 서면 빼재가 눈 아래 걸린다. ‘다 왔다’는 안도감으로 허기진 배를 속여 본다. 하지만 손에 닿을 듯한 그 거리가 보통이 아니다. 컨디션이 좋다면야 1시간 정도로 족하겠지만 기진한 걸음으로는 1시간 반이나 걸린다.

빼재에 도착하자 사위는 깊은 어둠 속이다. 무룡산에서 꼬박 10시간, 백암봉에서는 6시간이 걸렸다. 산을 두고 가는 아쉬움, 뼈만 남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지만, 산 그리움 다시 차오르는 데는 한 순간으로 충분할 것임을 나는 안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손재식 사진작가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2) 산행기를 쓰자

산행 후 글을 쓰는 버릇을 들이면 최소한 세 번은 산을 오르게 된다. 오르기 전 도상으로 한 번, 실제로 한 번, 그리고 돌아와서 기억을 더듬으며 한 번.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는 고역이기도 하지만, 일기나 지인에게 편지를 쓰듯 하면 산행의 감동은 배가된다. 산행의 즐거움이 이익 추구의 결과가 아니듯, 편안하게 쓴 글은 훨씬 더 감동적이다. 등산 전문지에서 독자투고를 읽어 봐도 솔직하고 소박한 글에서 오히려 더 감동을 받는다.
누구나 느끼겠지만 글이 저절로 써질 때가 있다. 적절하고도 긴요한 표현은 다른 표현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반복되면 사고 또한 입체적이 된다. 표현 대상과의 교감이 내밀해지고 풍성해질 수밖에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조금도 남을 의식하지 않고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일기조차도 그 누군가를 독자로 가정하게 마련이다. 그렇더라도 직업적으로 글을 쓰는 경우가 아니라면 형식이나 표현 방법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자칫하면 상투적이 되고 독창성을 잃게 된다.

즐거운 산행의 연장으로써 산행기를 써 보자. 혹시 아는가. 그런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감추어졌던 천재성을 발견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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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4구간] 덕유산 지형지질

2300만 년 전 지리산과 함께 융기, 외양 비슷해져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 구조여서 펑퍼짐한 육산 형성

백두대간이 남으로 힘차게 달리다가 추풍령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에 다시 한 번 힘차게 솟구치며 영호남을 가르는 높은 산줄기를 빚어놓았다. 바로 덕유산이다.

▲ 철쭉이 만발한 덕유산 능선. 덕유산 능선의 지질은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수평적으로 단단한 구조인 편마암이어서 평평하고 완만한 외형을 이루게 되었다.

덕유산은 주봉인 향적봉(1,614m)에서 시작하여 남으로 중봉(1,594m), 덕유평전(1,480m)을 지나 무룡산(1,491m), 삿갓봉(1410m)을 거쳐 남덕유산(1,507m)에 이르는 장장 100리 길이로 백두대간 상의 한 줄기를 이룬다.

덕유산은 면적 229㎢로 전북 무주군과 장수군, 그리고 경남 거창군과 함양군 등 4개 군에 걸쳐 있다. 지리산, 소백산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육산(肉山)을 이루며 한라산(1,950m), 지리산(1,915m), 설악산(1,708m) 다음으로 남한에서 네 번째 높은 산이다.

덕유산은 봄이면 드넓은 덕유평전에 빨갛게 만개한 철쭉이 넘쳐나고, 여름이면 짙푸른 녹음으로 뒤덮이며, 가을이면 천산만홍의 단풍으로 얼룩지고, 겨울이면 장쾌한 능선을 따라 피어난 설화로 넘쳐나 그야말로 사계절 모두 신비경을 이룬다. 특히 신선들이 살만큼 아름답다는 33경의 무주구천동으로 유명하다. 또한 무주리조트가 입지하고 있어 사시사철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20~18억 년 전 형성된 편마암층

덕유산 정상 향적봉에서부터 남덕유산까지 약 30km에 달하는 능선을 걸어보면 지리산에 뒤지지 않을 만큼 육중하고도 장쾌함을 알 수 있다. 덕유산(德裕山)이라는 이름은 바로 이처럼 산세가 ‘덕이 넘쳐나리 만큼 넉넉하며 여유로워 보이는 모산(母山)’과 같은 모습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덕유산은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은 유려하고도 장대한 산세를 이루게 된 것일까? 그 해답은 덕유산의 고산부를 이루는 지질인 선캄브리아기 변성암류인 편마암에서 찾을 수 있다. 덕유산의 편마암은 지리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마암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것으로 원생대 중기 약 20~18억 년 전의 것들이다.

우리나라의 약 30%를 이루고 있는 화강암은 보통 암석의 수평 또는 수직으로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침식과 풍화가 활발히 진행되어 복잡하고도 기괴한 암석 경관을 이루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주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북한산, 설악산, 월출산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면에 편마암은 화강암과 달리 수평적으로 단단한 암석 구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절리 발달이 저조하다. 따라서 암석의 침식과 풍화를 이끄는 주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는 수분 침투가 어렵기 때문에 특이하고도 다양한 암석 지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편마암이 주를 이루는 덕유산 고산부 전 사면에서는 오랜 세월을 두고 수평적으로 표층에서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져 두터운 피복물로 덮여 있다. 따라서 덕유산은 바위가 많은 골산(骨山)이기보다는 펑퍼짐한 육산(肉山)의 형태를 이루게 된 것이다.

2300만 년 전의 습곡 및 요곡운동으로 융기

▲ 과거 한반도가 융기했음을 시사하는 고위 평탄지형을 이룬 덕유평전. 덕유산은 지리산과 함께 한국을 대표하는 육산(肉山)으로서, 장쾌한 백두대간 능선과 더불어 사방팔방 막힘없이 펼쳐지는 산세는 한반도 이 땅이 얼마나 힘과 위용을 지닌 땅인가를 잘 말해준다.
봄철 덕유산은 ‘철쭉 꽃밭에서 해가 떠 철쭉 꽃밭에서 해가 진다’고 할 만큼 철쭉 군락지로 유명하다. 남덕유에서 정상인 향적봉에 이르기까지 구릉으로 이어지는 모든 능선 상에 철쭉이 만발하지만, 특히 동엽령(1,320m)에서 덕유산 정상인 향적봉 아래의 중봉(1,594m)으로 이어지는 드넓은 구릉 지대인 덕유평전(1,480m) 구간에서 가장 화려한 장관을 연출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1,000m 이상의 높은 고도 상에 그렇게 드넓은 구릉성의 평탄지가 생겨날 수 있었을까.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는 동해의 해저 지각이 확장하면서 대륙 지각을 밀어붙이자 횡압력을 받으며 대대적인 습곡 및 요곡운동이 일어났다. 이로 인하여 한반도 땅덩어리는 대대적으로 융기하게 되었는데, 이때 서쪽에 비해 동쪽의 지반이 더 높이 융기하여 동고서저의 경동(傾動) 지형을 이루며 한국 방향의 낭림산맥과 태백산맥, 그리고 태백산맥에서 분기된 소백산맥이 형성됐다.

과거에 오랜 동안 침식과 풍화에 의해 평탄화된 구릉지대를 유지하고 있던 덕유산 일대는 소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지리산과 함께 높이 솟아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봄철 화사하게 피어난 철쭉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덕유평전을 포함한 덕유산 능선을 따라 곳곳에 펼쳐진 평탄면들은 모두 이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구천동계곡은 정상부와는 다른 화강암계 지질

▲ 덕유산은 산 자체보다 오히려 무주구천동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계곡 풍경이 빼어나기로 소문난 구천동 계곡은 정상부의 편마암과는 다른 화강암 계열의 암질을 이루고 있어 다양한 하상 경관을 형성했다.
덕유산은 정상의 향적봉을 기점으로 무주구천동, 칠연계곡 등 8개의 길고 큰 계곡들이 발달해 있다. 그 가운데 백련사에서 발원해 북쪽의 무주로 흘러 금강의 지류인 남대천에 합류하는 설천까지 약 28km에 달하는 계곡이 바로 무주구천동이다. 신선이 살만큼 신비로우면서 빼어난 절경을 이루는 무주구천동은 13개의 대와 10개의 소, 그리고 여러 개의 폭포들이 자리 잡고 있어 33 신비경을 이루고 있다.

심산유곡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무주구천동은 그 이름의 유래에 대한 여러 설이 전해진다. <박문수전(朴文秀傳)>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구씨(具氏)와 천씨(千氏)가 함께 살면서 집안싸움을 하는 것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해 준 뒤부터 구천동(具千洞)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구천동(九千洞)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러나 조선조 선조 제위 시 이조판서를 지냈던 갈천(葛川) 임훈(林薰·1500-1584)이 명종 7년(1552년)에 덕유산을 직접 등반하고 기술한 등덕유산향적봉기(登德裕山香積峰記)에 보면 ‘이곳은 이른바 구천둔(九天屯) 골짜기라고 한다’, ‘옛날 이 골짜기에 성불공자(成佛功者) 구천인(九千人)이 있었던 까닭에 이름하였는데, 그 터가 있는 곳은 알지 못하며,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로는 산이 신비해서 보이지 않을 뿐이라고 전한다’는 등의 기록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곳 무주구천동 일대가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암석 지형을 이루게 된 것은 어떤 연유일까? 그 해답은 무주구천동 일대의 지질이 덕유산 정상의 능선부를 이루는 지질인 편마암과는 판이한 암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무주구천동 일대의 지질은 크게 구천동 33경 가운데 북부의 외천구동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석영안산암과 삼공리에서 백련사 부근에 이르는 내구천동 지역에 주로 분포하는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무주구천동 일대는 다양한 암석 경관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중생대 백악기 약 7천만~8천만 년 전 구천동 지역을 남북으로 양분하면서 관입한 석영 안산암은 지표면 근처에서 냉각되어서 형성된 분출암으로, 침식과 풍화에 강하여 주로 절벽 형태의 노출된 암상을 이룬다. 그리고 비교적 판상절리의 발달이 탁월하여 수평에 가까운 하상 암반이 대규모로 발달해 있다. 제2경 은구암에서 제 12경 수심대에 이르는 와룡담, 일사대, 학소대 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구천동 제13경 세심대에서 제30경 연화폭에 이르는 지역은 주로 화강편마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곳 일대는 불규칙적인 절리의 발달로 인하여 담(潭)이나 소(沼) 등 다양한 하상 경관이 나타나고 있다. 또한, 독특한 석영 암맥이 곳에 따라 습곡을 이루고 있어 특이하고도 기괴한 하상 경관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경대, 월하탄, 사자담, 호탄암, 구천폭포 등이 이에 속한다.

이와 같이 덕유산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는 70리에 이르는 무주구천동 계곡의 경관은 육산의 형태를 취하며 장엄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편마암 계열의 정상부와 다른 화강암 계열의 암질을 반영하는 지질 및 지형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덕유산이 빼어난 설국(雪國) 이루는 이유

▲ 덕유산 설경. 겨울철 황해를 지나며 수증기를 잔뜩 공급받은 대기는 내륙으로 진입한 뒤 덕유산맥의 산자락을 타고 강제 상승하면서 많은 눈을 만들며 덕유산을 설국으로 만든다.
덕유산은 사시사철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산이지만, 특히 덕유산의 겨울은 작은 히말라야를 연상케 할 만큼 시리도록 아름다운 설경을 자아낸다. 향적봉에서 중봉에 이르는 구간에 군락을 이루고 있는 구상나무와 주목에 피어난 설화는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낸다. 무주리조트 스키장이 말해주듯이 덕유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눈이 많은 곳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처럼 덕유산 일대에 눈이 많이 내리는 이유는 바로 백두대간의 일부로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동과 서로 가르며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겨울철 시베리아 고기압의 확장으로 황해를 건너며 수증기를 흠뻑 머금은 대기는 빠른 속도로 내륙으로 진입하게 된다. 이때 높은 장벽을 이루는 덕유산맥의 산사면을 타고 강제 상승한 대기는 단열·팽창(斷熱 膨脹)하여 냉각됨으로써 눈이 되어 내리는 것이다.

덕유산 능선을 중심으로 무주의 적상산(1,029m), 두문산(1,051m)과 거창의 투구봉(1,274m), 대봉(1,300m) 등은 겨울철 눈이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뿐만 아니라 이 지역은 여름철 강우량 또한 같은 이유로 인하여 많다. 무주군 통계에 의하면 1,347mm(2002년), 2,177mm(2003년), 그리고 거창군의 경우는 1,768mm(2002년), 1,949mm(2004년)로 덕유산 일대는 우리나라 연간 평균 강수량 1,200mm를 훨씬 뛰어넘는 많은 비가 내리는 다우지임을 알 수 있다.

영호남의 다양한 문화적 차이를 이끈 덕유산맥

한편, 덕유산맥은 남북으로 길게 뻗어 있어 서쪽의 무주를 중심으로 하는 호남과 동쪽의 거창을 중심으로 하는 영남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양분하고 있다. 덕유산맥이라는 자연적인 장벽으로 인하여 두 지역 간에는 교통에 큰 지장이 있어 왔으며, 언어와 생활 습관 및 풍토 등에 있어서도 상당한 차이가 나타났다.

역사적으로 볼 때, 덕유산 일대는 고대 신라와 백제가 국경을 맞대고 서로 각축을 벌였던 곳이다. 이를 말해주는 증거를 바로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 1경인 나제통문(羅濟通門)에서 엿볼 수 있다.

▲ 나제통문공원. 한반도 남부의 한복판을 남으로 내리달리며 이 땅을 동과 서, 영·호남으로 양분한 덕유산맥, 그 상징적인 장소가 무주구천동 33경 가운데 제1경인 나제통문이다. 이곳을 경계로 서쪽의 백제와 동쪽의 신라가 각축을 벌였다.

과거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로서 무주구천동 물줄기와 나란히 달리는 석견산(404m)에는 소천리 설천과 현내리 무풍을 잇는 나제통도(羅濟通道)라는 고갯길이 있었다. 이 고갯마루를 경계로 동쪽의 무풍은 신라 무산(茂山) 땅이었으며, 서쪽의 설천과 적상면은 백제 적천(赤川) 땅이었다. 따라서 삼국 시대부터 이를 경계로 두 지역 간에는 서로 다른 관습과 풍속을 지니게 됨으로써 한반도 남부의 문화가 동서로 큰 차이를 갖게 되었다. 그 한가운데 바로 덕유산이 위치한 덕유산맥이 있었던 것이다.

혹자들은 이 굴이 삼국 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기도 한데, 일제 당시 우마차의 통행을 위해 석견산 자락을 뚫어 지금의 굴이 생겨난 것이다. 처음에는 설천면에 있다 하여 설천굴로 불리다가 1963년부터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는 유래에 착안하여 나제통문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스키대회 이유로 더 이상 상처 주지 말아야

▲ 인간의 탐욕과 무지 앞에 제자리를 잃어버린 자연의 형상은 너무나 처참하다. 무주리조트의 주목이 끝내 고사하고 말았다.
덕유산은 생태·지리학적으로 남부권과 북부권을 연결, 그 중요성이 매우 높은 곳이다. 원시림에 가까울 만큼 풍성한 삼림을 형성하고 있는 덕유산에는 검독수리, 까막딱따구리, 사향노루 등 휘귀종을 비롯해 약 600여 종의 동식물이 서식하고 있다. 식물분포학적으로도 한반도의 북방계와 남방계의 식물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는 독특한 생태 구조를 가진 곳이다.

특히 정상인 향적봉에서 남쪽 중봉에 이르는 8부 능선에는 약 1,000그루가 넘는 300~500년 생 주목과 구상나무가 천연 군락을 이루고 있어 태고적 신비를 자아내고 있다. 이는 한국의 식생 경관 중 보존가치가 가장 높은 고령의 극상림 지구에 속한다.

그러나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개최를 위해 1988년부터 시작된 스키장, 골프장 등을 포함하는 무주리조트 개발은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이곳 덕유산의 자연 자원 및 생태계를 크게 훼손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1997년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를 비롯하여 크고 작은 개발이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해발 850~960m 부근에 골프장이, 그리고 향적봉 바로 아래인 설천봉 부근 1480m까지 스키 슬로프가 건설되었다. 산자락을 헐어내고 산정까지 파헤치며 관광곤돌라를 만들며 많은 동·식물들이 서식처를 빼앗기고 쫓겨 갔으며, 건설 현장 주변의 많은 주목과 구상나무들이 말라죽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덕유산의 미래를 더욱 암울하게 하고 있다. 2014년 동계 올림픽 개최 후보지 선정에 실패한 무주군은 다시금 동계 세계대회 유치를 위한 밑그림을 구상하고 있다고 한다. 만약 동계 올림픽이 이곳에 유치된다면 지금 시설을 몇 곱절 뛰어넘는 추가 개발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완만하고도 밋밋한 덕유산의 지형적 특성상 필요한 급경사지의 확보가 어렵기 때문에 산 정상부에 최소한 40~50m의 인공 구조물을 건축해야 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봅슬레이 및 루지와 같은 특수 경기장 건설을 위해서는 덕유산 국립공원 내의 또 다른 부지에 손을 대야만 한다. 그야말로 덕유산의 운명이 바람 앞에 등불인 셈이다.

지리산과 함께 한반도 남부 생태계의 보고를 이루는 덕유산의 운명이 개발과 보존이라는 극한 대립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지금부터 대안을 찾는 데 모두가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 80년대 경험했던 무원칙적이고 비효율적인 난개발로 인하여 다시금 덕유산이 상처받아서는 안 된다.

/글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지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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