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풍수

신의터재에 쓴 묘는 흉상 운 가진 묘
대명당은 주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에서 단 한 곳뿐

▲ 신의터재(해발 280m).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곳으로 작은 쉼터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산이 모양을 변화하는 과정에서 산줄기의 폭이 좁아지고 낮아진 곳을 고개라고 부른다. 백두대간 중 추풍령과 화령재 사이의 구간을 살펴보면 추풍령~묘함산~작점고개~용문산~회룡재~백학산~소정재~금은봉~신의터재~장자봉~화령재로 이어지는데, 산(또는 봉)과 영(또는 고개, 재)이 계속 반복되면서 백두대간은 대장정을 하다가 ‘계수즉지(界水則止)’한다. 계수즉지는 풍수지리 고전인 장경(葬經)에 나오는 구절로 ‘(地氣가)용맥을 따라 가다가 물을 만나면 그치면서 혈이 생긴다’는 의미다.

고개나 재를 한자말로 령(嶺), 현(峴), 치(峙) 등으로 부르지만 의미는 거의 비슷해 혼용되고 있다. 고개에 해당되는 말을 풍수지리에서는 과협(過峽)이라는 전문용어를 사용한다. 이 과협은 위치와 모양에 따라 세분한다. 낮은 지대의 과협은 ‘초사(草蛇)’와 ‘회선(灰線)’이 있고, 산룡(山龍) 지대의 과협은 ‘봉요(蜂腰)’와 ‘학슬(鶴膝)’이 있다.

초사는 용맥이 마치 풀속에 있는 뱀처럼 찾으려해도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뜻이고, 회선이란 용어도 잿속에 실처럼 눈에 쉽게 띄지 않는다는 의미를 강조한 풍수지리 용어다. 봉요는 산줄기가 벌의 허리처럼 잘록한 모양으로 고개에 해당되는 용어이고, 학슬은 봉요와 반대개념으로서 학의 무릎처럼 뭉툭한 모양이 반복되며 산줄기가 이어져간다는 의미다.

결인을 이룬 다음에 혈이 생긴다

산줄기에는 곳곳에 여러 개의 과협이 있는데, 여러 개의 과협 중에서도 마지막의 과협은 특별히 ‘결인(結咽)‘이라고 한다. 결인을 이룬 다음에는 풍수지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혈이 생기게 때문에 풍수지리에서는 과협이나 결인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혈을 찾기 전에 과협의 유무를 살피는데, 과협이 있으면 자연적으로 혈이 있기 때문이다.

결인이란 사람의 목처럼 잘록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또한 결인은 일명 속기(束氣)라고도 부르는데, 지기(地氣)의 기운을 묶어준다는 의미다.

또한 두 용어를 합쳐 결인속기라고도 하는데, 결인속기를 중요하게 보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예를 들면, 현악기는 줄이 굵을수록 낮은 소리가 나고 가는 줄일수록 고음이 나며, 관악기는 취구(吹口)가 작을수록 강한 소리를 내는 원리와 마찬가지로 결인은 혈의 유무에 관련해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과일의 경우에도 결인에 해당되는 작은 꼬투리에 매달려 있는 큰 과일의 모습을 보면 신기하지 않는가!

풍수지리에서 혈이 생성하는 단계를 사람이 출생하는 과정에 비유해 나누어 설명하기도 한다. 처음에 조산(祖山)에서 시작해 산줄기가 내려오다가 혈을 만들기 위해 태식잉육(胎息孕育)의 4단계 과정을 거치면서 하나의 혈이 탄생된다.

처음에 발맥(發脈)을 하는 부모산(父母山)은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태(胎)가 되고, 결인속기하는 곳은 혈을 만들기 위해 잠시 운기조식(運氣調息)한다는 의미에서 식(息)이 되고, 그리고 입수(入首·혈 바로 뒤에 도도록한 부분) 지점을 지기를 품고 있다는 의미의 잉(孕)이라고 하고, 다음에 가장 중요한 혈처(穴處)는 낳는다는 의미의 육(育)이라고 한다. 즉 혈이 생기는 단계 중 결인은 잉육의 전 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풍수지리에서 혈이 형성되는 과정을 얼굴에 비유해 설명하기도 하는데, 용맥이 머리에서 내려오다가 산근(山根·눈과 눈 사이)은 과협이 되고, 다음에 코는 혈이 되고, 입은 물이 되고, 턱은 안산이 되고, 광대뼈는 좌청룡과 우백호가 된다. 풍수지리에서는 아무렇게나 혈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태식잉육의 과정 속에 생성되는 법이다.

그런데 고개는 과협 중에서도 봉요(蜂腰)에 해당되어 쉽게 이해가 가지만, 산줄기 도중에 학의 무릎처럼 생긴 소위 학슬(鶴膝) 모양은 지세가 흔하지 않기 때문이 이해가 쉽게 되지 않는다. 이 학슬은 대나무의 마디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대나무가 휘지 않고 높이 치솟으며 자라는 이유가 바로 마디에 있다. 대나무에 마디가 없다면 곧게 높이 자랄 수가 있을까.

고난의 마디가 있어야 크게 자랄 수 있어

▲ 상석에 좌향은 손좌(巽坐)이고, 용사시기는 2001년이라고 적혀있다.
식물뿐만 아니라 인체에는 마디가 있다. 즉 뼈와 뼈 사이에는 관절(關節)이 있다. 관절이 없으면 인체는 움직일 수가 없다. 동식물과 산세뿐만 아니라 인생살이에도 마디가 있기 마련이다. 순탄한 인생역정에서 종종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데, 이 어려움이 바로 마디에 해당되며, 마디라는 과정에서 인간은 오히려 고난을 통해 성숙된다. 이 어려운 과정을 잘 극복해 나가면 나뭇가지가 다시 뻗어 가는데, 어쩌면 세상살이도 당시에는 고통스럽지만 오히려 고난의 마디가 있는 인생이 값지고 행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풍수지리에서는 산봉우리가 기복하면서 봉(峰)을 만드는데, 봉과 봉 사이를 절(節)이라고 표현한다.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전해오는 도선국사유산록 전남 영광 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건해삼절(乾亥三節) 결인(結咽)하고 해좌(亥坐)에 손파(巽破)로다. 대소과(大小科)도 많거니와 사대왕비(四代王女北) 이대상서(二代尙書)’

이 대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산줄기가 여러 번 기복하고 결인한 다음에 혈이 맺히게 되는 과정를 순서대로 표현했다.

풍수지리의 가장 핵심되는 원리는 내룡(來龍)이 행(行)하다가 지(止·멈춤)하면, 그곳이 바로 혈(穴)이다. 양균송의 제자인 증공안 선생이 지은 청낭서(靑囊序)라는 풍수고서에 ‘선간금룡동부동(先看金龍動不動)’이라 하여 ‘먼저 용맥의 움직임과 멈춤을 보아야 한다’고 형기풍수의 핵심을 한 마디로 설파했다. 어렵다는 풍수지리의 원리가 불과 한 마디의 말만 이해하면 끝나는데, 사실은 불과 간단한 한 마디의 말이기 때문에 실제에서는 더욱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는 것이다.

마디마디에 오이가 열리듯이 마디마다 혈이 생기는 경우도 있지만, 이런 경우는 비교적 소명당에 불과하다. 역시 대기만성이라고 하듯이 대명당은 주산에서 내려오는 산줄기에서 한 자리뿐이다. 천리행룡 일석지지(千里行龍 一席之地)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생긴 말이며 동시에 명당 찾기의 어려움과 명당의 희귀성을 표현한 말이다.

풍수지리 여전히 미신 취급 안타까운 일

▲ 재의 민묘.
신의터재는 해발 280m로 금은봉과 장자봉 사이에 있는 고개로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 된다. 고개는 산줄기가 일시적으로 가볍게 멈추는 곳으로 산사람도 잠시 쉬어가는 곳이기도 하지만, 죽은 사람도 재 주변에 유택(幽宅)을 마련하고 지하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단순히 묘지 관리의 편리성 때문이 아니라 용맥이 쉬어가는 곳이기 때문에 고개 근처에는 항상 묘가 있다.

이 신의터재 근처에도 역시 여러 기의 묘가 산재하고 있다. 이중에서 최근에 쓴 묘가 있는데, 마침 상석 옆면에는 용사(用事)시기인 신사년(辛巳年=2001년) 윤사월과 손좌(巽坐)라고 적혀 있어 현공풍수로 길흉 감정이 가능하다.

묘를 쓴 시기인 2001년은 7운(1984∼2004년)에서도 18년째 되는 해이고, 7운에 손좌건향(巽坐乾向=정북서향)은 현공풍수로 감정을 해보면 애석하게도 소위 상산하수(上山下水)에 걸려 8운 직전까지 3년간은 흉상(凶象)이 되는 운을 가진 묘가 된다. 당시에 지관을 초청해 길지를 찾아 안장했을 터이지만, 땅은 속성상 어머니처럼 잘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땅의 길흉법칙은 냉정하기만 하다.

그래서 일찍이 청낭서(靑囊序)에도 ‘청험일가구일분 십분매하구분빈(請驗一家舊日墳 十墳埋下九墳貧)한 집안의 옛 묘를 보자면 10개 중 9개는 가난하게 될 곳에 있다’라고 하여 개탄했는데, 천 년이 지난 지금도 풍수지리는 아직도 미신 취급을 받기도 하고 믿지 않으려고 하여 안타까운 일이다.

▲ 풍수지리를 관상에 비유해 용맥과 혈을 설명한 그림.
다음은 몇 년 전 조성모라는 가수가 ‘가시나무’라는 노래를 불러 인기를 모았는데, 유행가 가사치고는 제법 의미가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가사 중에‘내 속에 내가 너무 많아 당신이 쉴 곳이 없다’는 말은 내 마음속에는 욕심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당신이 쉴 자리가 없다는 말이다. 풍수지리로 명당을 찾기 전에 과연 내 마음속에 무엇이 자리 잡고 있는가를 봐야 한다.

상주시 화동면 이소리와 어산리 사이에 있으며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령이 되는 신의터재에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의병장으로 활약하고 젊은 나이에 오직 나라를 위해 장열하게 순국한 의사 김준신(金俊臣)의 유적비가 있다. 산줄기도 멈춰가는 과협처 신의터재에는 비록 작지만 휴식공간을 마련해 지나가는 길손들을 아낌없이 맞이하고 있다. 나는 나라나 남을 위해 ‘쉼터’를 만들어본 적이 있는가.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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