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식생

식물생태계도 대간처럼 아슬아슬 이어진다
벌개미취·백미꽃 자라고, 정금나무의 북방한계선 추정

백두대간은 한반도 산지의 중추로서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주변 산지에 비해 높은 고도를 유지하며 힘차게 뻗어 있다. 이렇게 자리 잡은 대간과 대간 자락들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식물 자생지로서의 역할도 함께 함으로써 높고 넓은 산세를 가진 산지는 그곳에서 키워내는 식물종도 산세만큼이나 풍부하다는 사실을 방증해 주고 있다.

▲ 골풀. 전국 습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백학산 자락의 묵논이나 도랑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남한 백두대간 가운데 추풍령~화방재 구간은 한반도 최고 산지로서의 백두대간 위상에 어울리지 않는 구간이다. 지리산, 덕유산 고산지대와 속리산 고산지대를 잇는 중간 위치에 놓여 있는 이 일대는 고도에 관한 한 부끄러운 형국이다. 백두산에서 출발해 남쪽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려온 백두대간이 마지막으로 남은 힘을 모아 지리산을 솟구치기 위해 잠시 숨고르기라도 하는 듯하다.

▲ 도깨비사초. 전국의 습지에 흔하게 자라는 사초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도깨비방망이 같은 열매를 달고 있었다.
북쪽으로 이웃한 속리산과 주흘산이나, 남으로 연결되는 황악산, 삼도봉, 덕유산 일대가 해발 1,000m가 넘는 산지를 형성하고 있는 데 비해 추풍령~화방재 구간은 가장 높은 봉우리라 해도 고도 700m 남짓일 뿐이다. 이 때문에 백두대간이 구획하는 행정구역도 다른 곳들에 비해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많은 곳에서 백두대간은 도를 가르는 경계가 되고, 적어도 군을 구분하는 울타리가 되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이곳 추풍령~화방재 구간에서는 추풍령 일대에서 잠깐 동안 경북과 충북의 경계를 이룰 따름이고, 이후에는 줄곧 경북 상주시에 속한다. 더욱이 경북과 충북의 경계선이 끝나는 국수봉부터는 면 단위의 경계 역할조차 못하는 곳이 대부분이다.

높은 산과 큰 강 등 자연 환경에 의해 구분되는 행정구역에 따라서 지역간의 문화도 달라지는 것과는 다르게, 이 일대의 백두대간은 고도가 낮음으로 해서 행정구역은 물론 문화의 차이도 가르지 않은 채 두루뭉수리 놓여 있다. 백두대간을 넘나드는 고개가 수없이 발달한 것은 물론이고, 대간 바로 위에 논이 있으며, 심지어 학교가 있는 곳까지 있다.

덕유산과 속리산 사이의 고도 낮은 산지

▲ 매화노루발. 전국의 산 숲속에 드물게 자라는 노루발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백두대간 능선과 효곡리쪽 숲속에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었다.
추풍령~화방재 구간에서 식물이 가장 풍부한 산은 어디일까? 어느 곳을 현장 취재해야 이 구간 식물의 전모를 생생하게 관찰할 수 있을까? 먼저 월간山이 발행한 <실전 백두대간 종주산행>을 펼쳐 놓고 산과 고개, 골짜기들을 살펴보는 것으로 이 구간 식물 취재를 시작했다.

추풍령에서 화방재쪽으로 가면서 놓여 있는 사기점고개, 작점고개, 큰재, 회룡재, 개터재, 개머리재, 지기재, 신의터재 등 여러 고개 사이에 금산, 용문산, 국수봉, 큰재, 백학산, 윤지미산 등을 찾을 수 있다. 최고봉은 경북 김천시 어모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에 걸쳐 놓여 있는 용문산으로 해발 710m다. 다음은 경북 상주시 공성면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에 있는 국수봉으로 지도상에 정확한 높이는 표기되어 있지 않지만 등고선으로 보아 700m 남짓한 산으로 가늠된다. 세번째 높은 산은 모동면, 공성면, 모서면의 경계에 있는 백학산으로 해발 615m다.

용문산이나 국수봉은 지난 구간의 황악산 가까운 곳에 놓여 있어, 식물에 관한 한 특별히 새롭게 나타나는 것이 없을 것으로 생각됐다. 반면 백학산은 이번 구간에서 높이로는 세번째지만 공성면 효곡리와 모서면 덕곡리쪽으로 비교적 큰 계곡이 발달했고, 추풍령~화방재 구간의 중앙부에 해당해 취재 대상지로 꼽을 만했다. 특히 백학산 남쪽의 효곡리쪽에는 2개의 큰 골짜기가 정상에서부터 형성되어 있는데, 아래쪽에 상판저수지가 있는 만큼 수량도 풍부할 것으로 여겨졌다.

▲ 백미꽃. 전국의 산에 드물게 자라는 박주가리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백학산 정상 부근의 백두대간 능선에서 몇몇 개체가 발견됐다.
예전 같으면 으레 경부고속도로 영동이나 추풍령 인터체인지를 통해 찾아갈 효곡리였지만, 근래 개통되어 한결 한적한 중부내륙고속도로 상주 인터체인지를 빠져나와 찾아가 보았다. 상주에서 3번 국도를 타고 공성면 소재지인 옥산에서 68번 지방도를 따랐다. 곧이어 나타난 야트막한 고개가 큰재였다.

포장도로가 지나가는 백두대간 고개 가운데 하나인데, 고개 직전에 논이 있고 고개 정상부에는 폐교된 옥산초교 인성분교와 논들이 있다. 도로를 따라 상판저수지쪽으로 내려가는 백두대간 자락에는 논과 마을이 연이어 나타났다. 백두대간 큰재를 중심으로 서쪽은 동쪽에 비해서 수계가 발달해 마을이 대간 마루금까지 형성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상판저수지를 지나고, 길가 약수터를 지나 ‘범죄 없는 마을’ 효곡리에 들어섰다. 효곡리에서 백학산 정상을 바라보고 서서 왼쪽의 큰 골짜기를 따라 정상에 오른 후 오른쪽 골짜기를 따라 내려오며 식물을 관찰하기로 했다. 지도상에서 큰 계곡으로 표기되었던 그곳에는 논과 사과과수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논두렁에는 수염가래꽃, 골풀 같은 습지식물들이 꽃을 피우고 있다. 산자락에는 아까시나무, 졸참나무, 굴피나무, 상수리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에 생강나무, 쥐똥나무, 진달래, 철쭉나무, 조록싸리, 산딸기 같은 떨기나무와 엉겅퀴, 가는기린초, 큰까치수영, 물봉선 등의 풀이 자라고 있다.

계곡 부근에 자라고 있는 호랑버들, 인동덩굴도 눈에 들어온다. 피어날 때는 흰 색이지만, 꽃가루받이와 정받이가 끝나면 노란 빛으로 변하는 꽃을 가진 인동덩굴은 흰 꽃과 노란 꽃을 모두 달고 한창 꽃을 피우고 있다. 개망초, 족제비싸리처럼 외국에서 들어온 후 토착화한 귀화식물들도 보인다.

특산종 벌개미취의 자생여부는 관심거리

▲ 인동덩굴. 전국의 들에 흔하게 자라는 인동과의 덩굴나무로, 꽃은 처음에 흰 색이지만 나중에 노랗게 변한다.
농경지가 거의 끝나갈 무렵의 논두렁에 자라고 있는 식물이 눈길을 끌었다. 꽃은 없고, 뿌리에서 난 잎만이 달린 상태였는데 벌개미취로 생각됐다. 흔하게 심는 식물이므로 어릴 때부터 관찰한 적이 있어서 꽃이 없는 상태에서도 구분이 가능한데, 강원도 등지에서 볼 수 있는 개미취에 비해서 뿌리잎이 가늘고 작다는 특징도 알고 있는 터여서 벌개미취로 여겨졌다. 이 식물은 취재 때 하산했던 백학산의 이웃한 골짜기에서도 발견됐다.

지구상에서 오직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인 벌개미취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때문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 가로변 화단 등에 대량으로 심고 있는 친숙한 식물이다. 도시의 화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는 식물이지만, 정작 자생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식물이 바로 벌개미취다. 이런 면에서 백학산 두 골짜기의 이 식물이 벌개미취로 판명된다면 학술적 의의도 클 것이다.

골짜기 왼쪽으로는 임도가 이어졌다. 임도 주변에는 소나무, 밤나무, 신갈나무, 물오리나무, 산벚나무 같은 큰 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고, 숲 가장자리에는 땅비싸리, 찔레꽃, 개옻나무, 광대싸리, 산초나무, 칡, 할미밀망 등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덩굴식물인 으아리는 흰 꽃을 피우고 있고, 조록싸리도 이제 막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여름철이면 물레를 닮은 커다란 노란 꽃을 피울 물레나물도 여러 포기 보인다.

▲ 정금나무. 남부 지방의 산에 자라는 진달래과의 떨기나무로, 내륙쪽으로는 이 부근이 분포의 북방한계선으로 추정된다.
골짜기 위쪽의 논은 농사를 그만둔 지 오래되어 묵논이 되어 있었다. 묵논 가장자리에는 좁쌀풀이 큰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고, 논 안에는 골풀과 도깨비사초가 벼를 대신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정상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을 계속 따라가기 위해 임도에서 벗어나 오른쪽 숲속으로 난 작은 길로 들어섰다. 이 길은 정상 500여m 전에서 골짜기가 끝날 때가지 희미하게 이어지다 없어진다. 숲속에 들어서자 희고 작은 꽃을 앙증맞게 피운 매화노루발이 반긴다. 키가 작아서 처음에는 몇 포기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일대에 큰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같은 속(屬)에 속하는 노루발이 함께 자라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꽃이 이미 지고 없는 은대난초도 여러 포기가 보이고, 꽃봉오리를 달고 있는 나리난초도 발견된다. 매화노루발과 난초들은 기대하지 못했던 귀한 식물들이었다.

이곳 숲은 신갈나무가 우점종으로서 가장 많았고, 소나무, 물오리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등이 간간이 섞여 자라고 있다. 숲의 중간을 이루는 나무로는 철쭉나무가 가장 많고, 이밖에 생강나무, 국수나무, 개암나무, 병꽃나무, 싸리나무, 쇠물푸레 등도 자라고 있다. 숲 바닥의 풀들은 빈약한 상태였는데, 고비, 고깔제비꽃, 고사리, 세잎양지꽃, 산박하, 참취, 산거울, 투구꽃, 은분취, 고삼 등이 보였다.

▲ 조록싸리. 전국의 산에 흔하게 자라는 콩과의 떨기나무로, 잎 끝이 뾰족하며, 꽃에 벌과 나비가 몰려든다.
계곡 끝부분에 이르자 희미하던 길이 아예 없어진다. 이곳에는 산초나무, 원추리, 개옻나무, 큰까치수영, 단풍취, 속단, 노루오줌, 터리풀, 조록싸리, 땅비싸리, 진달래, 남산제비꽃, 노간주나무, 작살나무, 큰골무꽃, 대사초, 초롱꽃, 꿩의다리, 속단, 줄딸기, 누리장나무, 다래나무, 광대싸리, 산딸기, 억새, 명감나무, 주름조개풀, 왕머루, 덩굴꽃마리, 넓은잎외잎쑥, 둥굴레 등이 자라고 있다.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 속단과 터리풀이 눈길을 끌었는데, 터리풀은 흰 꽃이 한창이다.

정상쪽으로 경사가 조금 급한 사면을 올라가면서 봄꽃인 애기풀과 은방울꽃, 가을꽃인 시호와 구절초 등이 눈에 띈다. 노란 꽃을 피운 가는기린초 옆에서 털중나리가 한껏 부푼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졸참나무와 신갈나무가 섞여 숲을 이루고 있고, 그 아래에 철쭉나무가 많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길 없는 사면을 5분쯤 올라가니 백학산 정상이다. 커다란 상수리나무 밑에 상주시청산악회에서 세운 정상 표지석이 서 있다. 주변에는 떡갈나무, 굴참나무, 굴피나무, 붉나무, 산초나무, 진달래, 쇠물푸레, 산딸기, 소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이곳에는 수령이 10년 남짓해 보이는 일본이깔나무가 여러 그루 자라고 있어, 자연림이 아니라 인공적인 조림도 이루어진 2차림임을 알 수 있다. 정상부에 자라고 있는 풀 종류로는 구절초, 세잎양지꽃, 큰까치수영 등이 있었다.

정금나무는 백두대간 어디까지 자랄까?

▲ 큰골무꽃. 전국의 산 숲 속에 비교적 드물게 자라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효곡리쪽 계곡 상부에서 발견됐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백두대간을 따라 내려섰다. 효곡리쪽 큰 골짜기 2개 가운데 나머지 한 골짜기로 하산하기 위해서였다. 백두대간 능선에는 은방울꽃이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데, 이미 꽃이 져버린 상태여서 아쉽다. 정상 바로 아래쪽에는 늙은 떡갈나무들이 들어서 있어서 인상적인데, 예전의 이곳 숲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부근에는 굴참나무도 자라고 있어, 백학산에는 참나무속 식물이 여러 종류 자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는기린초가 꽃을 피우고 있는 숲속에서 귀한 식물을 하나 발견했다. 전국에 자라기는 하지만 드물게 발견되는 백미꽃이었는데, 보통 여러 송이 꽃이 줄기 끝부분에 피는데 이곳 백미꽃은 단 한 송이 꽃만이 달려 있어 특이했다. 능선에 자라고 있는 비목나무도 몇 그루 보였다.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내려가면서 소나무숲이 잠깐 동안 나타나고, 이어서 리기다소나무 조림지가 나타났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마을 뒷산, 뒷동산, 야산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처럼 자연성이 떨어지는 곳에서 정금나무를 만난 것은 참으로 뜻밖의 일이었다. 처음에 한 그루가 보여서 의아해 했는데, 수십 그루가 능선을 따라 자라고 있었다. 그늘에서 자라는 것은 아직 꽃이 한창이었고, 양지의 것은 이미 열매를 달고 있었다.

▲ 터리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장미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종이다.
정금나무는 서해안을 따라서는 태안반도 위쪽까지 올라오지만 내륙으로는 그리 높이 올라오지 않는 떨기나무다. 주로 제주도와 남쪽 지방에서 자라는데, 내가 내륙쪽의 가장 북쪽에서 본 것은 계룡산에서였다. 이곳 백학산은 위도 상으로 계룡산과 비슷한 위치지만, 백두대간이 지나는 한반도 중심 지역이므로, 서해안에 치우쳐 있는 계룡산 자생지에 비해 더욱 큰 의의를 지닐 것으로 생각된다.

백두대간을 따라 꽃을 취재하면서 즐거운 숙제가 또 하나 늘어난 셈인데, 과연 이 정금나무가 백두대간을 따라 어디까지 나타날 것인가 하는 것으로서, 정금나무의 내륙쪽 북방한계선을 찾아내는 일이다.

지도상에서는 효곡리쪽 골짜기가 백학산 정상과 남쪽 능선의 모든 물을 받으며 형성되어 있어서 오른쪽으로 금방 내려서는 길이 나서줄 것 같았다. 하지만 백두대간 능선을 1.5km 이상 타고 내려간 후에야 오른쪽으로 희미한 길이 나왔다. 이 길을 따라 효곡리쪽으로 내려서는 데는 2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골짜기 아래쪽에는 포도와 사과를 재배하는 과수원과 논이 자리 잡고 있었다. 꽃은 피지 않았지만 쉽사리 줄딸기, 보리수, 고마리, 신나무가 자라고 있음을 확인하고, 노박덩굴, 수염가래꽃, 인동덩굴의 꽃을 관찰하며 골짜기를 빠져나왔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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