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역사지리

‘낮고 평평하여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
전통 산맥이란 외형적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 의미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구간은 국수봉(680m)과 백학산(615m)을 제외하고는 완만한 구릉성 산지가 낙동강과 금강의 분수계를 이루면서 구불구불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날줄이자 산경(山經)이다. 이 구간의 지형적 특성은 비산비야(非山非野), 혹은 야산(野山)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나지막한 등성이의 연속이다.

▲ 봉황산 아래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로 서 있다.
이와 관련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도 택리지(擇里誌)에서,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시골 살기에는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 이 맥은 화령에 이르러 몸을 추스르다가 급기야 봉황산(740m)으로 일단 한 번 솟구치고는 속리산(1,057m)이라는 백두대간의 큰 허리를 일으키게 된다.

이 구간의 산줄기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산경(山經)이라는 개념을 역사지리적으로 고찰해볼 필요를 느낀다. 산경이라는 용어의 의미는 흔히 산맥(mountain range)이라고 번역되는 학술적인 개념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며, 한국 사회에서 한반도의 산맥체계를 둘러싼 학계와 일반인들의 혼란은 서로 다른 개념이 산맥이라는 같은 용어로 혼용된 데에도 한 원인이 있다.

알다시피 산경이라는 말은 산경표(山經表)라는 조선 후기 신경준(1712-1781)의 저서로 이미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로서 말 뜻 그대로 산의 날줄, 다시 말해 산줄기의 종적인 계열, 혹은 경로를 말한다. 신경준은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로, 그는 이미 산수경(山水經)이라는 책을 편찬한 바 있다.

산경은 곧 분수계를 의미

산경(山經)이 있으면 마땅히 수경(水經)도 있을 터인즉, 다산 정약용의 대동수경(大東水經)이 바로 그것이다. 이 책은 한강 이북 지방의 주요 하천의 계통과 이에 관련된 자연지리·역사·군사·정치·지역 등의 사실들을 기록한 책이다. 따라서 산경이라는 개념은 형태적으로는 산과 산을 이어주는 능선의 날줄적인 계열이고, 이것에 대한 보다 과학적인 인식으로는 분수계(分水界)를 뜻한다.

그러면 산맥이라는 용어의 개념은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사용해 왔던 ‘산맥’이라는 용어의 뜻과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이라는 번역어의 개념을 비교해 고찰해 보자. 전통적인 산맥이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고증하여 보면 두 가지 의미가 함축되어 나타난다. 그 첫째는 산경과 같이 산줄기라는 뜻으로 사용됐으며, 또 하나는 산의 기맥이라는 뜻으로 풍수적인 인식체계에서 표현된 말이다.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 제1권의 천지문 편에는 ‘선비산맥(鮮卑山脈)’이라는 소제목이 등장하는데, 그는 여기서 백두산에 이르는 ‘산의 줄기와 가지(枝幹)’를 설명하면서 산맥의 경로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18세기 중엽)의 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에서도 각 지방에 이르는 산줄기의 경로를 기술하는 대목에서 ‘산맥’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 대동여지도의 추풍령~화령 구간. 실제 산줄기 보다 굵게 강조되어 표현되었다.
이 두 가지 문헌에서 보자면 조선 후기에 산맥이라는 말은 산줄기의 경로, 혹은 지간(枝幹)이라는 뜻으로서, 산경이라는 용어와 유사하게 쓰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의 효종 2년 조의 기사를 보면 ‘파주에 은혈(銀穴)이 있다고 하니 관상감 제조가 지관을 데리고 가서 살피게 하여 산맥을 범하지 않으면 채취할 것을 청하는 내용’이 등장하고 있다. 여기서 나온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의 기맥(氣脈)이라는 다분히 풍수적인 의미다. 따라서 전통적인 산맥 개념은 외형적인 산줄기 경로, 혹은 산의 풍수적 기맥이라는 뜻으로 사용되어 왔다고 요약할 수 있겠다.

산줄기 개념을 산경, 산맥, 산계로 구분하자

그런데 문제는 현대에 들어와서 근대 서구 지형학의 ‘mountain range’ 개념이 산맥이라는 말로 번역되면서부터 생겨나게 된다. 왜냐 하면 여기서 말하는 산맥이라는 말은 ‘지반운동 또는 지질구조와 관련해 직선상으로 길게 형성된 산지’ 로서 그 개념적 기초가 전통적인 산맥 개념인 외형적 산줄기, 혹은 분수계와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지질구조에 기초하고 있으며, 형태적으로는 다발 혹은 계열(系列)의 체계이고, 거시적이고 구조적인 관점의 학술적 용어다. 이는 산경표와 같은 형태적이고 미시적이며 선적인 경로의 산줄기와는 차이가 난다.

금년 초 국토연구원이 전통적인 산줄기 개념의 산맥체계를 과학적으로 재정립한 연구 결과를 놓고 대한지리학회가 반박한 내용은 정확히 용어와 개념의 혼동이라는 문제에서 비롯되고 있다. 지리학회의 주장에 의하면, 산맥과 분수계(分水界)의 개념은 다르며, 분수계는 유역 분지를 구분하는 능선을 따라 선으로 표현되지만, 산맥은 여러 개의 산줄기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넓은 폭을 가진 연맥(連脈)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산맥은 한반도만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고, 중국, 연해주, 시베리아에 이르는 동북아시아의 장기간에 걸친 지반구조운동에 따른 광범위한 산맥체계의 일부라고 말했다.

산맥을 일반인들이나 산악계에서는 산줄기의 경로라는 의미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지형학계와 현행 교과서에는 지질구조적 개념으로 달리 쓰이고 있는 현실상의 괴리를 푸는 방법은 무엇일까? 문제의 실마리가 산맥이라는 용어의 혼용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차라리 근대 지형학적인 산맥 개념은 ‘산계(山系)’라는 용어로 표현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 성봉산과 재학산 사이의 골짜기인 공성면 효곡리에는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다.이곳은 우곡 송량(宋亮)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것이다.
이렇게 산지체계를 산경·산맥·산계의 세 측면으로 접근할 때 서로를 비교해 보면 산경이라는 용어는 외형적인 산줄기의 경로라는 뜻이 강하고, 산맥이라는 용어는 가시적인 산줄기와 풍수적인 산의 기맥이라는 양면이 내포되어 있으며, 산계라는 말은 지형학적으로 지질구조에 기초한 구조적인 산지체계라는 뜻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렇게 다면적이고 다층적인 관점을 가질 때 우리는 한반도의 산을 훨씬 다양하고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민들의 생활과 인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산줄기에 대한 인식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적인 독특한 풍수사상의 기맥이라는 통찰로 산을 이해할 수도 있고, 거기에다 근대과학의 합리적인 체계로 산지의 구조적인 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산맥 논의는 어느 하나가 맞고 틀리다는 양자택일적이고 절대우위적인 논리가 아니라 다양성 있고 상호보완적으로 발전되어야 할 담론일 수 있다고 생각된다. 각 측면의 의의를 살펴보자면, 산경이라는 개념은 지역적인 생활권이나 가시적인 산줄기의 체계를 파악하는 데 유리한 반면, 산맥이라는 개념은 산경이라는 개념에 풍수적인 기의 관점을 복합해 산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고, 학술용어로서의 mountain range(산맥)라는 개념은 한반도 전체의 거시적인 산줄기 구조와 체계를 이해하는 데 장점이 있다.

대동여지도에 실제 굵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표기

▲ 신봉리 석조보살상.
이러한 논리로 추풍령에서 화령재에 이르는 산지를 적용시켜 보면 이 구간은 구릉성 산지의 연속이기 때문에 지형학적인 산맥(산계) 개념보다는 전통적인 산경 개념으로 설명하는 편이 효과적이다.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이 구간은 실제적인 산줄기에 비해 굵은 선으로 강조되어 그려지고 있으니 대간 줄기라는 인문적 가치가 개입되어 표현된 것으로 해독할 수 있다.

역사지리적으로 이 지역은 추풍령에서 오도치 구간을 제외하고는 상주의 권역에 속할 뿐만 아니라 상주 서쪽을 종단하는 산지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신라에서 조선에 걸쳐 군사적 요충이자 영남의 대읍이었던 상주의 영향력과 문화적 파급력이 크게 미친 영역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간을 형성하는 줄기를 기준으로 동쪽 사면은 상주읍과 인접할 뿐만 아니라 전면으로 비교적 넓은 평야를 확보하고 있어서 수많은 촌락이 형성되어 발달했고, 상주시 청리면의 체화당(華堂)이나 존애원(存愛院) 등 조선조 지배층의 역사유적이 많이 들어섰다. 특히 존애원은 상주의 위상을 잘 드러내주는 현장으로, 상주의 선비들이 존심애물(存心愛物)의 성리학적 가르침을 실천하는 뜻에서 1559년에 설립한 질병퇴치를 위한 사설 의료원이다.

상대적으로 대간 줄기의 서사면 권역은 산지로 에워싸인 좁은 분지와 골짜기로 이루어져 있어서 동사면 권역에 비해 마을의 숫자도 적을 뿐더러 촌락의 발달은 더딘 편이었다. 성봉산과 재학산 사이의 골짜기인 공성면 효곡리에는 효곡재사(孝谷齋舍)가 있는데, 이곳은 우곡 송량(宋亮·1534-1618)의 높은 덕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건물이다.

▲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맥이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그윽한 경치가 있다.'<택리지>
추풍령에서 뻗어 올라가던 대간 줄기가 속리산으로 이어지기 전의 고개인 화령은 상주에 이르는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소재 노수신(盧守愼·1515-1590)의 고향이라고 택리지에는 적고 있다. 소재는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으며 성리학뿐만 아니라 양명학, 불학, 시, 문장과 서도에도 일가를 이룬 분으로 알려져 있다.

화령이 속하는 화서면 면소재지에는 화령장이 지금도 3일과 8일에 선다. 또한 화령장 북쪽으로는 태봉산이라고 있는데, 여기는 연산군 왕자의 태실을 봉안한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도 태실금표비(胎室禁標碑)가 있다.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살입상이 현재 면소재지 입구의 국도변에 있는데, 이로 보아 고려시대에는 여기가 상주로 이르는 주요 고갯마루였음을 추정할 수 있다.

화령에서 속리산쪽으로 바라보면 봉황산이 수려한 자태로 산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다. 그 아래 신봉리 창안 마을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이 형언할 수 없는 숭고하고 청정한 자태를 드러낸다. ‘사람은 나이가 더할수록 근심이 쌓이고, 백발만 늘어나는데 저 노송은 의연히 푸른 산빛을 더하고 있구나.’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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