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7구간] 백학산 - 르포

건성으로 대하기 쉬운 비산비야에 대한 '헌사'
추풍령~용문산~백학산~화령재 55km

‘결국 자연이란 쪽마다 중요한 얘기를 담아서 건네주는 유일한 책이라 하겠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1749-1832).

우연히 <“한마디” 책 사랑>이란 책을 보다가 얻게 된 한 구절이다. 자연을, 산을, 그리고 ‘백두대간’을, 들고 다닐 수 없는 한 권의 ‘경전’이라고 쓴 적이 있는 터여서 반가움의 강도는 아주 진했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반가움은 등 가려운 홀아비 효자손 만났을 때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긁을 것도 없이, 가려움 자체를 없던 일로 만들어 버리니까.

▲ 순한 능선. 편안한 산길. 이번 구간의 대부분 트레일은 산책로처럼 호젓하다.

산과 책은 닮은 데가 많다. 다가오지 않는 자에게는 절대 자신을 열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첫째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현기증을 일으키거나, 몇 년을 두고 만지작거리다가 끝내는 독파를 포기하게 하는 경우도 많다는 점은 그 둘째다. 그러나 산이든 책이든 지극한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에게는 자신을 감추는 법이 없다. 이것이 셋째다. 아무리 어려운 책이라도 ‘백 번을 읽으면 저절로 통한다(讀書百遍義自通)’고 했다. 엄홍길·박영석·한왕용 같은 사람들이 그렇게 산이라는 책을 읽어낸 사람들이다.

물론 산과 책은 판이한 데도 많다. 우선 책은 들고 다닐 수 있지만, 산은 그럴 수 없다. 그리고 책은 설렁설렁―적당히 건너뛰면서―읽을 수 있지만, 산은 그럴 수 없다. 동네 뒷산이든 에베레스트든 ‘한 걸음의 진실’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것이 산과 책의 근본적인 차이다. 그래서 나는 앞서 인용한 ‘자연이란 쪽마다 중요한 얘기를 담아서 건네주는 유일한 책’이라는 괴테의 말 중 ‘쪽마다’라는 부분에 특별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다.

백두대간 종주를 한 권의 책읽기에 비유해 보자. 대부분의 독서 행위가 그렇듯이 쉽거나 어렵거나, 재미있거나 지루하다. 그렇다면 이번 구간 추풍령에서 화령까지는 어떤가. 통념대로 표현하자면 쉽고 지루하다. 높은 산도, 조망이 좋은 봉우리도, 깊은 계곡도 없다. 구간 전체의 실거리가 약 55Km에 이르지만, 용문산(710m)과 백학산(615m)을 제외한 나머지 산은 모두 600m 미만이다. 동네 뒷산 같은, 흔한 말로 야산에 가까운 산들이다. 책읽기로 치자면 건성건성 건너뛰며 읽게 만드는 구간인 것이다.

'살기에 알맞으나 산이라고 하기 어렵다‘

▲ 반토막난 백두대간. 추풍령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금산은 과도한 석재 채취로 등성마루의 북쪽 절반이 헐렸다. 자병산과 함께 대표적 훼손지 중 하나다.
실제로 백두대간 종주자들에게 이 구간은 야산으로 인식돼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괴테와는 다른 종류의 ‘산 읽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백두대간이라는 책의 야산편에 해당할 이번 구간의 ‘쪽마다’ 담긴 중요한 얘기란 과연 무엇일까?

야산의 사전적 의미는 ‘들 근처에 있는 나지막한 산’이다. 일반적으로 이 말은 비산비야(非山非野)의 의미 맥락에 놓인다. 쉽게 말하자면 산 같지 않은 산을 일컬을 때 끌려나오는 말이다. 보통 이런 산들은 일삼아 오를 대상에서 제외된다. 늘 가까이에 있어서 오히려 희미해진 존재감에 경외의 감정이 깃들 여지도 거의 없다.

하지만 이런 산들이 없다면 우리는 설사 시골에 산다 해도 여름밤 소쩍새 울음소리를 창문 안으로 들여놓을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우리네 삶 속에서 쉽게 곁을 주고 기댈 언덕이 되어 주는 산은 높고 험한 산이 아니라 야산이다.

평소에도 나는 야산이라는 말에 섞인 콧방귀 냄새가 싫었다. 그러던 차에 55km(남한 백두대간의 약 7.5%에 해당하는 거리)에 달하는 야산(?)을 걷고 나자 약간의 오기와 또 그만큼의 의무감 같은 것이 생겼다. 그러던 차에 나는 괴테의 ‘한 말씀’을 만났다. 나는 주저없이 이번 종주 르포를 ‘야산에 대한 헌사’로 삼으려고 마음먹었다.

헌사의 첫 구절은 취재팀의 한 사람으로부터 그저 얻었다.

“정말 평화로워요. 우리 산이 아니고서는 이런 평화로움을 느낄 수 없어요.”

취재팀 김석우씨의 말이다. 그는 산길을 걷다가도, 산행을 끝내고 야영을 하면서도 노래 부르듯 이 말을 읊조렸다. 20여 일간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로 트레킹을 다녀온 직후여서 우리 산에 대한 느낌이 각별했던 모양이다. 그는 또 히말라야의 척박함에 대해 말했다. 내가 듣기에 그가 말하는 척박함의 의미는, 산 자체의 척박함보다는 그곳에서 삶을 꾸려나가야 하는 사람들에 대한 연민으로 읽혔다.

산악 영화를 준비해 온 영화감독인 그는 지금 ‘문경산악영화제’ 프로그래머로 또 다른 형태의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있다. 우리 산의 평화로움에 대한 그의 예찬이, 그가 고른 영화 사이사이에 잠복해 있다가 인플루엔자처럼 관객들에게 전해지기를 기대해 본다.

결론삼아 말해서 추풍령에서 화령까지 백두대간의 산들은 사람과 산이 함께 살고, 늙고, 죽어가는 공간이다. 아주 평화롭게.

▲ 백두대간이 준 간식, 오디. 산자락 곳곳에 마을이 있어서 자주 이런 횡재(?)를 만날 수 있다.
간단히 이번 구간의 지리적 특징을 개관해 본다. 우선 고속도로, 국도, 지방도를 포함하여 7개 포장도로와 1개 철도가 지난다. 그만큼 산들이 낮다는 얘기다. 기슭에는 과수원과 논밭들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능선 위에는 무덤이 또 끊임없다. 삶과 죽음이 더불어 한가롭다. 이런 산의 형국을 옛사람들은 어떻게 인식했을까.

'속리산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산줄기가 화령과 추풍령이 되었는데, 시내와 산의 경치가 그윽하다. 모두 낮고 평평하여 살기에 알맞으나 산이라고는 할 수 없다.'

택리지의 기록이다. 산의 의미를 ‘높이’에서 찾은 인식의 결과다. 현대 지리학의 개념으로 말하면 노년기의 산들이다. 당연히 이런 산들은 사람들에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는다. 백두대간의 고갯마루에서 드물지 않게 보게 되는 성황이나 산신각이 없는 것도 그것 때문일 것이다. 어찌 이런 산을 즐겁게 걷지 않을 수 있을까.

묘(卯)함산이 아닌 난(卵)함산

사뿐히 추풍령 마루에 선다. 남상규의 노랫말처럼, 자고 가는 구름이나 쉬어 넘는 바람 같은 건 없다. 해발 210m에 불과한 4번 국도 상의 희미한 고개일 뿐이니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왜 그런 노랫말이 생겨났고, 별다른 저항감 없이 받아들여졌을까.

추풍령의 무게감은 대관령이나 죽령 같이 압도적 높이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추풍령은 낮아서 높이 이름난 고개다. 20세기 이전까지의 추풍령은 조령(문경 새재)처럼 영남과 서울을 오가는 인마(人馬)가 붐비던 고개가 아니었다. 근세에 들어 철마(鐵馬)가 넘나들면서부터 비로소 분주해진 고개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놓이면서부터다. 가파르지도 않고, 굴을 뚫을 필요도 없으니 이보다 기차가 지나기 좋은 조건은 없을 것이다.

이후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추풍령은 우리나라 고개를 통틀어 가장 바쁜 고개가 되었다. 이때부터 통일신라 때 9주의 하나로 큰 고을이었던 상주는 추풍령을 낀 김천보다 한갓진 도시가 되었다. 조선 성종 때 전국을 8도로 정리하면서 오늘의 경상남?북도를 경상도라 칭했을 때 그 이름은 경주와 상주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었다. 도로 하나가 고을과 고개의 지위를 크게 바꾸어 놓은 것이다.

▲ 산 속에서의 '평화'. 이번 구간은 아기자기한 우리 산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런데 4번 국도 상에 있는 본디 추풍령도 이제는 역사적 흔적으로나 남게 됐다. 영동-김천 구간이 확장과 함께 선형이 변경되면서 고가화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사가 진행 중인 현재 고갯마루에 있던 노래비는 딴 곳으로 치워져 있다. 만약 처음으로 종주를 하는 사람이 노래비를 표지로 트레일을 찾으려 하면 불필요한 시간 낭비만 하게 된다. 경북 김천과 충북 영동의 경계표지를 기점으로 힐튼모텔을 왼쪽에 두고 큰 길을 따라 곧장 가면 길이 끝나는 곳에서 금산으로 오르는 트레일을 찾을 수 있다.

금산으로 오르는 초입은 전형적인 동네 뒷산이다. 트레일 양쪽으로 산딸기가 무릎을 간질인다. 그 몸짓을 따라 기슭으로 눈길을 주자 은사시나무 잎사귀들이 아직 붉은 기운이 가시지 않은 햇살을 은빛으로 바꾸어 놓는다. 20분 쯤 지나자 금산(370m) 정상이다.

그런데 지도에 그려진 이 산 북쪽 기슭의 등고선은 허공에 그려진 가상의 선일 뿐이다. 능선의 북쪽 절반이 몽땅 헐려나갔기 때문이다. 일제 때부터 석재를 파먹기 시작하다 해방 후 중단되었으나 1962년부터 철도 레일에 까는 자갈로 쓰기 위해 계속 헐어낸 탓이다. 현재는 채석을 중단하고 사태 방지 등의 정리 공사를 하고 있다. 백두대간 종주 붐이 더 이상의 훼손을 막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금산을 내려서자 트레일은 아늑한 숲길로 표정을 바꾸고 있다. 여름으로 다가서는 숲의 얼굴은 사춘기를 막 지난 소년 같다. 보송보송한 코밑수염이 거뭇해지듯이, 연록색 잎들은 어느새 검푸르게 이글거린다. 다투어 피어나던 꽃잎들도 우월적 지위를 잎사귀로 넘겼다. 씨앗을 여물게 하는 일로 본분사가 바뀐 것이다. 앞으로 이들은 몇 달 동안 햇빛과 비와 바람과 격렬한 사랑을 나눌 것이다.

조망거리라고는 없는 숲길을 잠행하듯이 2시간쯤 걷자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남쪽의 김천시 봉산면 사기점리는 옛날 사기를 구워 팔던 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사기점고개다. 이 고개 북쪽 너머는 영동군 추풍령면의 작점리다.

사기점고개에서 20~30분쯤 나아가면 난함산(733.4m)으로 오르는 시멘트 포장길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다수의 백두대간 종주 자료에는 난함산(卵含山)이 묘함산(卯含山)으로 표기돼 있다.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 '卯含山'이라 표기돼 있기 때문이 빚어진 일이다. 취재 결과 현지명은 분명 난함산이었다.

현재 난함산 정상에는 한국통신의 무선통신 중계소가 있는데, 그 이름도 난함산 중계소였다. 지도를 만들 때 난(卵)자가 묘(卯)로 오식된 게 확실해 보인다. 산의 형국이 알을 품고 있다 해서 명명된 것일 텐데, 십이지(十二支)의 넷째이자 동쪽을 가리키는 말인 묘(卯) 자가 쓰였을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 백학산 내려서서 만난 호밀밭. 산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파란 지문'.

난함산인지 묘함산인지 알쏭달쏭해 하는 동안 길도 헷갈린다. 시멘트 포장길이 마치 뱀이 구불거리듯이 대간의 등성마루를 지나기 때문이다. 길을 따라 곧장 내려가든 곧이곧대로 끊어진 대간 등성을 따라가든 작점고개로 가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 우리는 편한 길을 택했다. 덕분에 길가에서 오디를 따먹는 즐거움도 누렸다. 시멘트 포장길이 아스콘 포장길을 만나는 지점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능치리고, 고갯마루로 올라서면 작점고개다. 당연히 고개로 올라야 한다.

고갯마루 약간 아래 김천시쪽으로 ‘능치쉼터’라는 현판을 단 정자가 하나 세워져 있다. 그런데 대간 종주 자료에는 대부분 작점고개라 적혀 있다. 초창기 대간 종주 취재팀들이 고개 너머 서쪽(영동군) 마을인 작점리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영동쪽의 작점 마을이 김천쪽의 능치 마을보다 가깝긴 하나 이 고개를 살뜰히 보살피는 곳은 영동이 아니라 김천 사람인 것 같다. 만약 이 고개가 시끌벅적한 저자의 고개였다면 당연히 동네마다 연고권을 주장할 텐데, 워낙 외진 곳이어선지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것 같다.

초여름 대간의 밤은 진양조로 온다

능치쉼터(정자)에서 냉면을 만들어 먹고 낮잠까지 한소끔 잔 다음 무좌골산(470m)을 향한다. 2시간쯤 걷자 용문산(710m)이다. 트레일도 좋은 데다 적당한 간격으로 시원한 바람이 불어주어선지 길이 줄어드는 속도가 무척 빠르게 느껴진다. 용문산 오른쪽 기슭의 용문산기도원은 우거진 숲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다. 5년 전 이 길을 지날 때는 훤히 내려다보였었는데, 몇 년 사이에 눈으로 느낄 정도로 숲이 무성해져 있다.

용문산에서 국수봉(763m)까지는 1시간 남짓 시원하고 편안한 길이다. 국수봉 정상의 조망도 우거진 숲이 독점하고 있다. 정상을 벗어나 북쪽으로 10m쯤 나아가면 시야가 툭 터지면서 경북 상주시 공성면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이곳부터는 대간의 좌우가 모두 상주땅이다.

국수봉에서 큰재까지는 줄곧 경쾌한 내리막이다. 그렇다고 막무가내로 내달릴 수는 없다. 10분쯤 지나자 아기자기한 바위가 어우러진 조망처가 나타난다. 눈앞으로 큰재 위 초등학교 건물의 머리부분이 보인다. 대간의 기슭이 쫙 편 손가락처럼 흘러내린 사이사이로 조그마한 산골마을과 논밭들이 한가롭게 누워있다. 산이 우리를 어떻게 보듬어 안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산의 품에 기대 있는지를 한 폭의 고운 수채화처럼 펼쳐 보인다.

큰재까지 내리막길은 초가지붕의 곡선처럼 순하다. 한결 가벼운 발길은 눈길을 바쁘게 한다. 은방울꽃 둥글레꽃잎은 모두 땅속으로 스며들어가 버렸다. 심심찮을 정도로 껑충한 엉겅퀴가 쑥스러운 듯 눈인사를 건넨다. 보일 듯 말 듯 꽃을 피운 은대난초도 가끔씩 눈에 띈다.

중모리 정도로 시작하여 자진모리를 거쳐 휘모리에 가까운 속도로 끝낸 20km. 그런데도 큰재에 몸을 세운 시간은 오후 6시30분밖에 되지 않는다. 해가 지려면 1시간이나 남았다. 느긋하게 걷는 편인 평소 취재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빠른 속도다. 그런데도 허급지급 걸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편안한 길 덕분이다.

▲ 백두대간 위의 유일한 초등학교인 상주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운동장에서 야영을 하는 취재팀. 급속한 도시화에 따라 속출된 폐교 중 하나로 1997년에 문을 닫았다.

초여름 백두대간의 밤은 진양조로 온다. 느리게, 아주 느리게. 우리는 최대한 게으르게 저녁을 먹는다.

아이들이 모두 떠나 폐교가 된 옥산초등학교 인성분교 운동장. 백두대간 위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던 곳이다. 도시의 탐욕이 토해낸 이 역설적 평화의 공간에서 우리는 민망스럽게 행복하다. 개구리 소리에 소쩍새 울음이 섞여든다. 소리와 음악의 경계가 지워진다.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한다.

‘카치카치, 깍깍.’ 낮게 내려앉은 구름 아래로 까치 울음소리가 아침햇살을 대신한다. 아침밥을 짓는 동안 취재에 동행한 강문호씨(서울문리대 산악회 OB)가 학교 뒤편에서 산딸기를 잔뜩 따온다. 먹는 일에 관한한 언제나 독창성을 발휘하는 취재팀의 이원영씨가 냉큼 소주에 집어넣는다. 오늘 만찬은 화려할 것이다.

무성한 덤불을 이루고 있는 산딸기밭을 헤치고 다시 대간 마루에 선다. 오늘도 대간은 성난 파도가 아니라 미풍에 살랑대는 잔잔한 바다처럼 흐를 것이다.

능선길에서 30~40분쯤 나아가자 시멘트로 포장된 농로가 나타난다. 잠시 머뭇거린다. 길 너머로 대간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여서다. 지도를 확인하고 나서 과수원쪽으로 길을 따라가자 오른쪽으로 트레일이 보인다. 이곳에서부터 회룡재, 개터재를 지나 백학산 전 생태이동통로가 놓인 임도까지도 큰 기복이 없다. 이곳에서 이번 종주의 클라이맥스라 할 백학산(615m) 정상 길도 여느 험산처럼 가파르지는 않다. 부드럽게 1시간 정도 키를 높이면 된다.

칠순 종주객의 ‘대단함’, 또는 ‘무모함’

백학산에서 1시간30분쯤 내려서자 들풀이 무성한 농로가 나타난다. 대간 트레일은 왼쪽으로 몇 걸음 농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 기슭으로 방향을 바꾼다. 느긋이 봉우리를 하나 넘자 우리와 앞서거니 뒷서거니 했던 중년을 갓 넘긴 듯한 대간 종주자가 쉬고 있다. 또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우리도 한숨을 돌리려는데, 조그만 카메라 가방을 내보인다. 칠순 기념으로 일시 단독 종주에 나선 한 할아버지의 카메라를 주운 것이라 했다.

가방 안 메모지에는 비장함마저 묻어나는 종주의 변이 적혀 있다. 내일도 계속 걸을 우리가 그 할아버지를 만날 것 같으니 카메라를 좀 전해 달라고 한다. 흔쾌히 그러겠노라고 하는 순간 헐레벌떡 한 할아버지가 나타난다. 배낭을 벗어두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현직에서 은퇴한 후 부지런히 안내산행팀을 따라다니며 체력을 다진 다음 종주에 나섰다고 한다. 취재팀 모두는 우리보다 압도적인 열정의 이용찬 할아버지께 유보 없는 찬사와 격려를 보낸다. ‘참,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다.

그런데, 빈 몸으로 우리보다 앞서가시던 할아버지가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우리보다 뒤처지는 순간 ‘대단하시다’고 했던 생각은 한 순간에 ‘무모함’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진짜로 말리고 싶다. 아무리 건강하다손 치더라도 25kg의 무게는 무리로 보인다. 그 무게에 짓눌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겨운 뒷모습은 산행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가까워보인다.

과연 무엇이 이 할아버지로 하여금 이 길을 걷게 하는 것일까? 나로선 알 길이 없다. 따라서 내게는 그만두시라고 말릴 자격이 없다. 하지만 무게를 줄이라는 권유는 할 수 있지 않을까? 끝내 나는 그것도 건방진 행동일 수 있다는 것으로 결론을 낸다.

지기재를 지나 포도밭 한 귀퉁이에서 야영 준비를 하시는 할아버지와 헤어진 우리는 신의터재를 향한다. 이곳에서부터 대간은 한참 동안 옆구리에 논밭을 끼고 간다. 20~30분쯤 지나 슬랩에서 오른쪽 능선으로 내려서서 신의터재까지는 1시간 남짓. 오늘 운행 거리는 약 25km. 두 다리의 능력이 고무줄처럼 늘어나는 것일까?

땅거미가 짙어올 무렵 신의터재에 도착한 우리는 고개 왼쪽 2km 못 미친 화동 마을의 화동식당(054-533-9275)에서 탕수육을 시켜 깜짝 파티를 즐겼다. 산길을 걷다 녹초가 된 다음 맞이하는 이 유치한 행복감. 단순의 즐거움.

해발 280m 정도인 신의터재는 이번 구간의 모든 고개가 그렇듯 금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이다. 임진왜란 이전 이 고개는 신은현(新恩峴)으로 불리었다. 그러다가 임란 때 의병장 김준신이 이 고개에서 의병을 모아 큰 전공을 세우고 임진년 4월25일 순절한 후부터 ‘신의터재’로 불린다 한다. 일제 강점기 때는 어산재로 불리다가 광복 50주년을 맞던 해에 제 이름을 되찾았다 한다.

신의터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화령까지는 10.5km로 웬만한 하루산행 거리다. 하지만 쉬어 가도 4~5시간이면 족할 정도로 편하다. 큰 기복 없이 좌우로 휘돌다 윤지미산(538m) 정상에서 30여 분 정도 가파른 내리막이 오히려 힘들다. 그 길을 내려서자말자 무덤가에 누운 우리는 주검처럼 평화롭다.

한 걸음, 한 걸음! 산다는 것도 결국 이것이 아닐까. 걷든 뛰든 허공에 발을 딛을 수는 없는 법. 그런데 나는 왜 이 단순한 진리를 산에서 내려서는 잊어버리는 걸까.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즐거운 백두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5)
배낭 속에서 우려내는 차

뜨거운 여름, 배낭 속에서 후근 달아오른 뜨뜻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이럴 경우 물통이나 페트병에 녹차 티백을 넣으면(현미가 들지 않은 것으로 2리터에 1개면 적당함) 청량한 느낌의 물을 마실 수 있다. 녹차의 냉랭한 기운이 열기를 가셔주기 때문이다. 남은 티백은 음식 그릇을 닦을 때 유용하게 쓸 수 있다.
만약 원두커피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산에서라 해서 마다할 이유가 없다. 휴대 간편한 천으로 만든 드리퍼를 사용하면 된다. 퍼콜레이터를 사용하는 것도 괜찮다. 번거로움은 조금이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여유로운 느낌과 즐거움은 기대 이상이다. 피로감을 휘발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커피 찌꺼기는 기름기 있는 그릇을 닦는 탁월한 세재이기도 하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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