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역사지리

이속한 절경 곳곳에 큰 인물들 족적 남겨
퇴계는 아홉 달이나 머물며 구곡의 이름 짓기도

속리산은 말만 들어도 내 생명의 심연이 그 언저리에 있을 것 같은, 아련한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산이다. 속리산을 기점으로 한남금북정맥과 그 연결맥인 한남정맥과 금북정맥이 비롯하고, 속리산이 낙동강과 한강 및 금강의 발원지가 되는 분수계로서 삼태극(三太極)의 정점이다. 이러한 한반도의 산경과 수경 체계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위상은 굳이 거론하지 않더라도, 옛 선현 누군가가 붙인 ‘속리(俗離)’라는 이름은 세속의 좁은 방에 갇힌 심혼(心魂)의 창을 활짝 열게 하는 장소의 힘을 가지고 있다.

▲ 퇴계 이황이 경치에 반해 아홉 달이나 머문 선유동계곡.

전하는 말에 의하면, 784년(신라 선덕여왕 5)에 진표(眞表)가 이곳에 이르자 밭 갈던 소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는데, 이를 본 농부들이 짐승도 저러한데 하물며 사람들이야 오죽하겠느냐며 속세를 버리고 진표를 따라 입산수도하였고, 여기에서 '속리'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속리산의 이름에 대한 최치원(崔致遠·857-?) 선생의 풀이도 각별한데, ‘산이 속세를 떠난 것이 아니라 속세가 산을 떠났다(山不離俗, 俗離山)’고 하여 자기의 심회를 속리산의 이름에 투영시키고 있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산 능선이 아름다운 나라라고. 천태만상의 산천의 몸짓들이 빚어내는 오묘한 곡선의 어울림은 그 미학적이고 지리적이며 심리적인 의미를 짐작할 수 있기보다는 그저 그러한 대로 바라보고 느낄 뿐인 것을. 분명 이 산천의 무늬가 한국 선(線) 미학의 원형이요 모태임은 분명한데, 도대체 우리 산천의 곡선은 우리에게 무엇이란 말인가?

에밀레종의 비천상에서 너울거리는 그 유장한 선이 우리 마음을 나도 모르게 싣고 저 너머 피안으로 이르게 하는 것처럼, 우리 산천의 선율은 신비롭게도 음률로 우리에게 슬며시 다가와 마음 깊은 곳에 내장된 생명의 파동을 일깨우고 울림을 일으킨다. 그래서 서양에서의 산맥(mountain range)과 지리(geography)는 물리로서의 지질구조와 지형이었지만, 우리에게 있어 산경(山經)과 지리(地理)는 바로 심경(心經)이요 심리(心理)였던 것이다.

광명산, 미지산, 소금강산, 구봉산 등으로도 불려

▲ 선유동계곡 입구 선유동문(仙遊洞門) 각자.
속리산(1,057m)은 광명산(光明山), 미지산(彌智山), 소금강산(小金剛山), 구봉산(九峰山) 등의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행정구역 상으로 충북 보은군, 괴산군, 경북 상주시의 경계에 있다. 산체의 지질적 구성은 화강암을 기반암으로 변성퇴적암이 섞여 있어, 화강암 부분은 융기되어 솟아오르고 변성퇴적암 부분은 깊게 패여 높은 봉우리와 깊은 골짜기의 대비가 가히 절경을 이룬다. 최고봉인 천황봉(天皇峰)을 중심으로 비로봉(毘盧峰), 길상봉(吉祥峰), 문수봉(文殊峰)등 8봉과 문장대(文藏臺), 입석대(立石臺), 신선대(神仙臺) 등 8대 등이 있으되, 이 모두 유불선의 사상이 깃든 신령한 봉우리 이름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특히 속리산은 아름다운 수석을 갖춘 깊고 그윽한 계곡으로도 유명한데, 학소대 주변의 은폭동(隱瀑洞)계곡, 만수계곡, 화양동지구 화양동계곡, 선유동계곡, 쌍곡계곡과, 장각폭포, 오송폭포(五松瀑布) 등의 명소가 있다.

이중환도 택리지에서 선유동계곡을 일러 ‘어떤 사람은 금강산 만폭동(萬瀑洞)과 비교하여 웅장한 점은 조금 모자라지만 기이하고 묘한 것은 오히려 낫다 한다. 대개 금강산 다음으로는 이만한 수석(水石)이 없을 것이니, 당연히 삼남(三南) 제일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하였을 정도다.

퇴계도 이 계곡의 아름다움에 반하여 아홉 달 동안이나 머물면서 9곡의 이름을 지었으니 선유동문(仙遊洞門), 경천벽(擎天壁), 학소암(鶴巢岩), 연단로(鍊丹爐), 와룡폭(臥龍爆), 난가대(爛柯臺), 기국암(碁局岩), 구암(龜岩), 은선암(隱仙岩) 등의 이름이 그것이다.

속리산의 계곡 중에 우암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암서재(巖棲齋)를 짓고 머물렀던 화양동계곡이 우암의 성품처럼 활달하고 밝은 남성적인 느낌이라면, 선유동계곡은 퇴계의 성정처럼 그윽하고 깊이 함장(含藏)된 여성적인 느낌의 계곡이라고 하겠다.

뭐니 뭐니 해도 속리산의 대표적인 역사경관으로는 법주사가 있다.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이래 토착화 과정을 거치면서 가람지의 입지 선정에는 역사적인 변천과정이 있었고, 그것은 몇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속리산 법주사의 경우에도 시계열적인 적용이 가능하기에 살펴보기로 하자.

▲ 속리산 서북사면(화평동)에서 바라본 속리산 군봉.

‘법주사 가람지는 길상초가 나는 신령한 땅’

전통적인 교종계 사찰은 불교적인 신령한 땅(靈地)에 건립되었다. 경주의 가섭불 7개 가람터를 비롯하여 오대산, 낙산 등에 모두 사찰이 건립되고, 그 뒤 전국의 산천이 삼산(三山), 오악(五岳), 사진(四鎭), 사독(四瀆)으로 개편되면서 이 설에 따라 사원이 건립되어 갔음은 물론이다.

법주사 역시 최초의 가람지는 길상초가 나는 신령한 땅이 선택되었다. 법주사의 전신을 길상사(吉祥寺)로 본다면, 진표율사는 속리산에 길상초가 나 있는 신령한 땅에 사찰 창건을 점찍었고, 이후 제자들이 그 자리에 절을 새로 짓고 이름을 길상사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 법주사 선원 뒤로 펼쳐진 속리산 주봉의 군상들.
8~9세기에는 밀교의 점찰경에 소의한 것으로 간자(簡子)를 던져 길흉 판단을 하고 절터를 선택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러한 사례는 낙산사, 동화사 등지의 경우에서 드러나고 있다. 간자의 용례는 소의 경전인 점찰경(占察經)에 나온다. 점찰경은 점찰선악업보경의 약칭으로 지장보살이 설하였으며, 대나무 쪽을 던져 길흉과 선악을 점치는 법, 그리고 참회하는 법을 설한 불경이다.

우리나라에서 점찰경은 일찍이 진표율사의 스승인 순(숭)제 법사가 진표에게 주었다는 기록이 있고, 진표는 명산을 순례하다가 변산의 부사의방에서 참회 정진하여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에게 직접 목간자 두 개를 받았다 한다. 법주사는 진표율사의 법상종 계열의 사찰이었기 때문에 역시 가람지 선정에 간자를 활용한 점찰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나말려초 이후에는 풍수와 사탑비보설이 사찰입지론으로 강력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도선(道詵·827-898)을 필두로 한국적인 풍수지리설이 정립되기 시작하면서부터 신령한 땅에 사찰을 짓거나, 혹은 간자로 택지하는 관념 외에, 풍수지리설에 기초하여 지세를 살펴 택지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된다.

한편으로는 예전처럼 ‘신령한 땅’에 절이 들어서기보다는 결함이 있는 땅에도 사찰을 지음으로써 터를 보완할 수 있다는 논리가 성립하는데, 이를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이라고 한다. 이에 법주사의 인근 경역 역시 풍수설의 조명을 새로이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중창 과정의 건축, 조경 등에 풍수원리가 개입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아래에서 인용하겠지만, 속리산 수정봉의 거북바위 단맥(斷脈) 설화와 염승탑(厭勝塔)에 관한 전설 역시 풍수사상의 영향이 미친 흔적이라고 하겠다. 아울러 고려조에는 전국의 주요 사찰이 비보사찰로 지점되었는데, 법주사 역시 고려조의 대찰이었으므로 위계가 높은 비보사찰의 하나였다고 추정되나 자세한 역사적 자료가 없어서 상세한 내용은 알기 어렵다. 속리산 수정봉에는 거북바위의 풍수비보 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래되고 있다.

‘당 태종이 세수를 하려는 순간 큼직한 거북바위가 눈을 부라리고 있는 모습이 비쳤는데, 이 거북이 동국에서 중국을 향해 노리고 있기 때문에 중국에 재물과 인물이 모이지 않는다고 믿었다. 이에 태종은 사람을 시켜 그 거북을 찾아 없애도록 명했다. 속리산 수정봉에서 그 거북을 발견한 당 태종의 신하는 거북의 목을 잘라 골짜기에 버렸으며, 거북의 남은 기운을 누르기 위해 등에 10층석탑까지 세웠다.

▲ 법주사 팔상전과 미륵 대불(大佛).

또 다른 이야기는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이여송이 거북바위의 목을 베어 버렸다는 것이다. 효종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옥천군수 이두양은 각성이라는 스님을 시켜 거북의 머리를 찾아 붙이도록 했다. 그 뒤 이 사실을 안 충청병사 민진익이 충청관찰사 임의백과 상의하여 거북 등에 서 있던 석탑을 허물어 버렸다. 지금도 수정봉의 거북바위 아래에는 허물어 버린 석탑의 돌덩이가 두 개 남아 있다.’

위의 풍수설화는 외세에 의한 단맥 설화 유형으로 분류될 수 있으며, 이러한 외세, 특히 중국과 일제에 의한 명산의 단맥 내용에 관한 설화는 전국적으로 산재하여 있다.

속리산은 속(俗)인가 아니면 비속(非俗)인가

▲ 양사언 선생의 글 "洞天"(동천)
속리산 동편으로는 화북면이 있고 거기에는 용유동(龍遊洞)이라는 골짜기가 있는데, 이곳은 도가의 이상향인 우복동(牛腹洞)으로도 알려진 곳이다. 용유동 계곡가의 너럭바위에는 봉래 양사언(楊士彦·1517-1584)이 썼다는 ‘동천(洞天)’이라고 쓴 희한한 서체의 글씨가 있어 나그네의 발길을 머물게 한다.

동천이란 신선이 살만한 명산 계곡의 승경(勝景)을 일컫는 말인데, 양 봉래의 이 휘돌이 하는 글씨체에서 느껴지는 필선의 힘과 형상미는 이곳 용유동 계곡의 몸놀림과 꼭 빼 닮았다. 그가 우리 산천의 태중에서 나고 그 품에서 오롯이 자라나서, 그의 심지(心地)에 우리 산천의 용틀임하는 파동이 골짜기같이 패여지지 않았다면 어찌 이와 같은 글씨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나는 이 백두대간의 한 길목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또 어디론가 떠나갈 것이다. 뭇 생명이 한평생 깃들여 사는 지구라는 이 공간은 다만 정거장(停去場)이니 우리는 우주의 시간으로 보자면 찰나의 사이에 잠깐 머물렀다가 떠나야 하는 길손일 뿐인 것이다.

속리산은 속(俗)인가, 아니면 비속(非俗)인가. 산이 세속을 떠난 것인가, 세속이 산을 떠난 것인가. 속리산은 모든 산의 본질적 속성이 그렇듯이, 오직 그 머무름(停)과 떠남(去)의 경계에 움터 있는 장소일 뿐, 이미 슬기로운 우리 조상들은 그 산 기슭 자락 도처에 생명의 둥지인 삶터와 죽음의 고향인 산소(山所)를 마련하지 않았던가.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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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식생

“등대시호! 다시 만나 반갑구나”
정이품송 닮은 낙락장송 숲에 땅개나무 솔나리 자라

멸종위기를 맞고 있는 식물이 살고 있는 곳을 다시 찾아가는 일이 두려울 때가 있다. 혹시라도 그 식물이 사라진 것을 확인하는 순간을 내가 맞이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속리산도 그런 심정으로 찾아갔다.

▲ 정이품송. 조선 세조가 정2품 벼슬을 하사한 소나무로, 수령 600년으로 추정된다. 법주사 소유이며 천연기념물 제 103호로 지정되어 있다.

속리산 국립공원에서 백두대간을 이루는 천황봉(1,058m)에서 문장대(1,054m)까지는 3.5km쯤 되는 거리다. 문장대에서 밤머리재를 지나서 눌재까지, 또 천황봉에서 형제봉(803m)까지도 국립공원 지역 안쪽이기는 하지만, 속리산 국립공원 탐방객들이 즐겨 찾는 지역은 아니다. 따라서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가 백두대간으로서의 속리산이라 할 수 있다.

천황봉에 서면 전망이 좋다. 속리산 국립공원은 물론이고, 황악산 이후 상주를 거쳐 문경 이화령에 이르는 백두대간 구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라는 이름값을 한다. 남쪽으로 형제봉쪽 대간 능선은 물론이고, 북쪽 문장대까지 이어지는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문경땅으로 이어져 올라가는 대간의 산군이 켜켜이 겹쳐지면서 가히 백두대간다운 면모를 느끼게 해준다. 정남쪽 대목골 아래에 위치한 보은군 외속리면 삼가저수지도 가늠된다.

국립공원의 백두대간까지 올라온 귀화식물

▲ 개다래나무. 전국의 산에 자라는 덩굴나무이며, 다래나무와는 달리 열매를 먹을 수 없다. 속리산에서는 백두대간 능선에서도 자라고 있다.
천황봉 정상은 그리 넓지 않은 바위지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식물은 전망에 비해 신통치가 않다. 신갈나무가 정상 주변 숲을 이루고 있고, 조릿대, 산철쭉, 철쭉나무, 함박꽃나무, 미역줄나무, 물푸레나무, 쇠물푸레나무, 산수국 등이 자라고 있다. 산딸기나무, 질경이 같은 저지대에 사는 식물도 섞여 있는데, 사람들에 의해서 이곳까지 올라온 것으로서 천황봉 일대에 인위적인 간섭이 많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바위 한 쪽에 남아 있는 바위채송화가 과거의 좋았던 이곳 자연성을 대변하고 있다.
사람에 의해 저지대 식물이 속리산의 백두대간 능선까지 올라온 사실은 천황봉 조금 아래에 있는 헬기장에 가면 더 분명해진다. 이 헬기장에서 상오리쪽 장각동으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이어지는데, 이 등산로는 10년 이상 자연휴식년제가 실시되어 등산객의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헬기장 주변에는 짚신나물, 산딸기나무, 질경이 등 양지를 좋아하는 저지대 식물들이 올라와 자라고 있다.

일대에서 높은 산지를 이루고 있는 속리산이지만, 인간 간섭에 의한 식물상의 변화는 오래 전부터 이루어져 온 듯하다.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는 물론이고, 법주사가 자리 잡은 백두대간 서쪽 사면 일대에서 그런 증거들이 쉽게 발견된다. 예로부터 사찰과 암자가 발달한 탓에 이곳을 중심으로 외래식물들이 속리산 산중으로 유입되었던 것이다.

▲ 돌양지꽃. 전국의 산 바위 겉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바위가 발달한 속리산에서는 여러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이번 취재에서 둘러본 상환암 부근만 하더라도 텃밭 주변에 강아지풀, 줄딸기, 개망초, 질경이, 환삼덩굴 등이 퍼져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망초, 환삼덩굴 같은 식물은 이곳 생태계의 입장에서 외래식물일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로 보더라도 귀화식물로서 악명을 날리고 있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다.

상고암, 관음암 일대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들 암자들이 백두대간에서 직선거리로 5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음을 감안하면, 속리산 전체에 외래식물들이 유입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자 주변뿐만 아니라 등산객이 많이 다니는 천황봉에서 문장대까지의 백두대간 능선 여러 곳에서도 외래식물이 눈에 띄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두대간 속리산 구간은 식물 생태계 면에서 특별히 다른 점이 있다. 김천 황악산부터 고도가 급격히 낮아져서 야산 같은 분위기로 흐르던 대간이 서서히 고도를 높임과 동시에 그곳에 살고 있는 식물의 종조성에 있어서도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상주 백학산 등 저지대 백두대간에서는 능선 위까지 소나무며 심지어 조림한 리기다소나무까지 생육하고 있지만, 적어도 속리산 구간에서는 이런 모습이 사라진 것이다.

정이품송 같은 낙락장송이 해발 600m 이하에 무리 지어 자라고 있지만, 고도가 높아진 대간 위로는 올라오지 않고 대신에 신갈나무 같은 활엽수들이 대간 높은 곳에 숲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법주사쪽 사면에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자라고 있는 소나무는 물론이고, 계곡 주변의 활엽수들도 울창하여 숲으로서의 가치가 높다. 이처럼 나무들이 보전될 수 있었던 것은, 가야산 등 고찰을 품은 다른 산에서처럼, 이곳 숲이 사찰림으로서 가꾸어져온 덕분이다. 이런 점에서 사찰은 일대의 숲을 보전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 딱총나무. 전국의 산에 자라는 떨기나무로, 꽃은 봄철에 일찍 피고, 여름에 열매가 붉게 익는다.
하지만, 사찰이 자리 잡음으로써 자연에 대한 인간 간섭도 피할 수 없이 이루어져 온 게 사실이다. 사찰이 없었다면 개망초, 환삼덩굴 같은 강잡초 귀화식물이 속리산 중심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찰이 생태계에 미치는 양면성, 즉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극명하게 드러내 보여주는 곳이 바로 속리산이 아닌가 싶다.

법주사쪽 사면의 소나무는 일품이다. 벌건 줄기를 자랑하며 죽죽 뻗은 소나무들이 해발 400m에서 600m, 높게는 1,000m 가까이에 이르기까지 능선에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양수로서 계곡쪽에 잘 자라지 않는 습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것들은 계곡 옆에까지 내려와서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어찌나 잘 자랐는지, 세한도의 구불구불한 소나무가 속리산에는 한 그루도 없는 듯하다. 이렇게 많은 소나무들 가운데 한 그루가 정2품 벼슬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속리산 국립공원의 간판격인 정이품송이 태어날 수 있었던 토대가 충분히 마련되어 있는 셈이다. 환경 조건이 소나무 자라기에 좋기 때문이라는 것과 함께, 이것을 적극 보호해준 사찰의 역할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속리산 소나무 군락이 명성을 더하는 것이리라. 사찰이 생태계에 미치는 긍정적인 단면 가운데 하나다.

10년만에 다시 만난 등대시호

▲ 등대시호. 덕유산까지 내려와 자라는 북방계 고산식물로, 속리산에서는 능선의 바위지대에 극소수 개체만이 자라고 있어 특별히 보호해야 할 식물이다.
천황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문장대를 향해 출발하면 길은 곧 숲속으로 들어간다. 아주 크지는 않지만 신갈나무 같은 큰키나무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백두대간 등산로가 계속해서 숲속으로 이어지는 것도 속리산 구간의 특징이다. 특히 바위가 발달한 산세를 자랑하는 산에서 백두대간 등산로가 숲속으로 이어지는 것은 특별한 일이다. 실제로 백두대간 마루금의 정점은 바위 봉우리들을 지나가고 있지만, 그곳에다 길을 내기 어려운 사정 때문일 것이다.

신갈나무, 함박꽃나무 등이 숲을 이루고 있고, 등산로 가에는 원추리, 물레나물, 숙은노루오줌, 큰개현삼 등이 자라고 있다. 장각계곡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시작되는 헬기장을 지나서 능선의 경사가 누그러들면 바위지대가 나온다. 일대에는 자주꿩의다리, 바위채송화가 꽃을 피우고 있고, 산오이풀은 꽃봉오리를 달고 있다. 자주꿩의다리는 이곳부터 문장대에 이를 때까지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데,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이다. 이 식물은 양지에 자랄 때는 자주색 꽃이 피지만, 음지에 자라는 것은 흰 꽃이 핀다. 이곳에서는 구실사리가 바위에 넓게 퍼져서 자라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곧 상환암을 거쳐서 법주사로 내려가는 등산로가 왼쪽을 갈려 나간다. 꽃은 이미 지고 잎을 커다랗게 키우고 있는 금강제비꽃이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 바위채송화. 바위 겉에서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 10cm 이하로서 작으며, 꽃은 지름 1cm 쯤이다.
이곳부터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발달해 있다. 전망 좋은 한 바위. 잠시 장마가 힘을 잃은 사이 솟아오른 태양이 발산하는 뜨거운 햇볕 때문에 바위로 나서기가 망설여진다. 굵은 땀방울 흘리며 바위 위를 둘러본다. 산철쭉, 진달래, 쇠물푸레나무, 산앵도나무가 자라고 있다. 바위 아래에는 자생하는 잣나무가 여러 그루 보인다. 꽃은 피지 않았지만 산오이풀, 참산부추, 구절초, 죽대 등이 자라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돌양지꽃과 자주꿩의다리는 꽃이 한창이고, 막 피어나기 시작한 원추리도 시선을 붙잡는다.

잠시 그늘로 물러났다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는 바위채송화 사진을 찍기 위해 쪼그리고 앉은 내 발 옆에서 살며시 모습을 드러낸 작은 식물. 등대시호였다. 속리산 취재를 나설 때 나를 망설이게도 하고, 설레게도 했던 바로 그 식물이다. 혹시 멸종되어버린 현장을 내가 확인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했던 그 식물이다. 북방계 고산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설악산 고지대, 소백산, 남덕유산에서만 자라고 있는 멸종위기식물이다.

과거에는 지리산에서도 자란다고 알려져 왔으나 지금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속리산에서는 10년 전 내가 바로 이 장소에서 처음 발견하여 보고하였으며, 소백산 국립공원의 한 봉우리에서도 환경부 조사에서 발견된 바 있다. 속리산이나 소백산 국립공원은 이 식물의 분포에 있어서 설악산과 남덕유산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의미가 크다.

이곳의 등대시호는 10여 개체만이 자라고 있었다. 예전에도 그리 많지는 않았는데, 그나마 멸종해 버리지 않고 살아남은 게 고마울 따름이다. 10년 전에는 9월에 조사를 하여 꽃이 핀 개체를 볼 수 있었는데, 이번 취재 때 만난 것들은 꽃대조차 발달하지 않은 상태였다. 백두산, 설악산에서는 이맘때 꽃봉오리를 달거나 일부 개체들은 꽃이 피기도 하는 것에 비하면 훨씬 늦게 꽃을 피우는 듯하다.

망개나무, 솔나리, 백부자는 환경부 보호종

▲ 산꿩의다리. 전국의 산 숲 속에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키 20~90cm이며, 수술은 많고 꽃잎은 없다.
등대시호는 멸종위기식물이기는 하지만 현재 법으로 보호하고 있는 식물은 아니다. 예전에 126종이 법정보호식물이던 때는 보호식물이었지만, 법정보호식물 숫자가 줄어들면서 제외되었기 때문이다. 속리산 식물 가운데 현재의 법정보호식물 64종에 포함되는 것으로는 망개나무, 솔나리, 백부자 등이 있다. 망개나무는 내속리면 사내리의 수령 350년 된 고목이 천연기념물 제207호 지정되어 있고, 괴산군 청천면 사담리의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2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해부터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된 백부자도 속리산에서 자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솔나리는 10년 전 이곳을 둘러볼 때 꽃이 진 개체를 여러 포기 발견할 수 있었는데, 이번 취재에서는 확인하지 못하였다. 아직 남아있다 하더라도 개체수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과거에는 등산로를 따라가면서도 쉽게 눈에 띄었지만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이 안타깝다. 이밖에도 속리산에 자라는 식물로 알려져 있는 872종류의 식물 가운데 땃두릅나무, 노각나무, 등칡, 끈끈이주걱 등도 보호할 가치가 높은 범주에 속한다.

등대시호 재발견의 기쁨을 뒤로하고 문장대쪽으로 능선을 타고 가면서 유난히 많이 자라고 있는 산뽕나무를 만난다. 고도가 높은 곳보다는 산중턱 아래의 계곡 주변 등지에 많은 것이 보통인데, 이곳에서는 백두대간 능선의 숲을 이루는 주요 나무로서 나타난다. 개다래나무가 이제야 꽃을 피운 것을 보면 해발 1,000m 가까이 되는 높은 고도인데, 산뽕나무가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산속 깊이 들어와 있는 암자들과는 무슨 연관이 없을까?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증명할 방법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숲속에서는 산꿩의다리가 하얀 꽃을 활짝 피우고 있다.

▲ 원추리. 전국의 산에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속리산의 백두대간 능선 여러 곳에 작은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비로봉 직전의 석문 부근은 커다란 바위들이 너덜을 이루면서도 층층나무, 시닥나무, 함박꽃나무 같은 큰키나무들이 많아서 숲을 이루고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회나무, 산수국 같은 떨기나무들도 자라고 있으며, 바위 겉에는 바위떡풀이 붙어서 자라고 있다. 이 부근에 속리기린초도 자라고 있는데, 속리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름 붙여진 여러해살이풀이다. 꽃잎과 수술이 각각 4장씩이어서 기린초와 다른 것으로 구분하기도 하지만, 지금은 기린초와 같은 식물로 보는 학자가 많다.

입석대 직전에서 만나는 떨기나무숲은 예전에는 초원지대였다고 한다. 노린재나무, 조릿대, 미역줄나무 등의 떨기나무와 덩굴나무가 얽혀 자라고 있는데, 노린재나무가 순군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이 자라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경업대 갈림길을 지나 30여 분이면 신선봉을 거쳐 문장대에 이른다. 바위가 발달한 곳곳에서 산오이풀, 구절초, 자주꿩의다리가 보이고, 숲속에서는 산짚신나물, 병조희풀, 오리방풀 등이 자라고 있다.

문장대에서 백두대간은 외래식물, 귀화식물 많은 속리산 능선을 벗어나서 월악산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간다. 탐방객 많은 법주사 코스, 화북 코스와도 이별이다. 속세와 이별한다는 속리산에서 생태적으로 속세를 벗어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며 백두대간은 산세를 더욱 키워나간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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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지형지질

산 전체가 하나의 화강암체로 이뤄진 ‘바위 천국’
중생대 백악기 말 9천만~8천만 년 전 지각변동의 산물

백두대간이 남서진하며 태백산과 소백산, 그리고 죽령과 이화령 사이에 월악산군을 품어내고 이내 방향을 남으로 돌리는 지점, 한반도 남쪽 땅덩어리 한가운데에 또 하나의 명산을 일구어냈다. 바로 충북 보은과 괴산, 그리고 경북 상주와 문경 사이에 위치한 속리산(1,058m)이다.

▲ 문장대에서 바라본 속리산 능선. 지리산에서 덕유산을 거치며 북상한 대간 줄기는 육산의 모습으로 줄기차게 이어오다가 속리산에 이르러 모습을 암산으로 바꾼다. <사진=허재성 기자>

속리산은 일반인들에게 산 자체보다는 오히려 우리나라 대사찰 가운데 하나로 잘 알려진 법주사와 조선조 임금 태종에게 벼슬을 하사받았다는 정이품송이 산자락 내에 자리 잡고 있어 더 잘 알려진 산이다. 그러나 구병산(876m)에서 형제봉(803m)을 거쳐 속리산에 이르는 산군(山群)은 산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충북 알프스’로 통할 만큼 빼어난 경관을 지니고 있어 많은 산사람들이 찾는 곳이다.

속리산은 주봉인 천황봉을 중심으로 비로봉, 길상봉, 수정봉, 문수봉, 관음봉 등 1,000m 내외의 봉우리가 연이어져 있고, 그 사이로 문장대, 신선대, 입석대, 경업대, 학소대, 배석대, 산호대, 봉황대 등의 기암괴석과 암릉이 울창한 산림과 어우러져 뛰어난 풍치를 자아내고 있다. 이로 인하여 속리산은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과 함께 남한을 대표하는 암산(巖山)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봄철 산벚꽃, 여름에는 청송, 가을의 단풍, 겨울철 설경으로 바꿔가며 사시사철 장관을 이루는 속리산은 우리에게 산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속리산의 진수는 역시 설악산, 월출산, 북한산, 도봉산 등과 더불어 산 전체가 바위로 넘쳐난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지리산, 백운산, 덕유산 등 완만한 산릉으로 육산(肉山) 혹은 토산(土山)의 형태를 이루며 북상하던 백두대간은 이곳 속리산에 이르러 그 형상을 골산(骨山)과 암산(巖山)으로 바꾸며 크게 솟구쳐 올랐다. 이 속리산의 능선과 골짜기마다 형상을 달리하며 넘쳐나는 많은 바위덩어리들은 과연 다 어디서 왔으며, 또 어떤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일까?

속리산은 처음에는 주봉인 천황봉을 비롯하여 비로봉, 길상봉, 관음봉, 수정봉, 보현봉, 문수봉, 묘봉 등 아홉 개의 연봉으로 활처럼 휜 형상을 이루었다고 하여 구봉산(九峯山)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리나라 8경의 하나로 그 절경이 금강산에 맘먹을 만큼 뛰어나 소금강(小金剛), 혹은 제2금강(第二金剛)이라고도 하며, 또 광명산(光明山)이라 불렸다고도 전해진다.

신라 말 대문호이자 학자였던 최치원이 이곳 속리산을 찾았다가 읊었다는 시(詩), ‘바르고 참된 도는 인간을 멀리하지 않는데, 인간은 그 도를 멀리하려 든다. 그렇듯 이 산은 매양 세속을 떠나려 하지 않는데 세속은 산을 떠나려 한다(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에서 지금의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사시사철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며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속리산이 만들어낸 깊은 계곡에 들거나 능선 자락에 오르면 어느덧 속세의 시름과 고뇌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능선과 계곡에 발달한 수많은 기암들이 불을 뿜어내듯 하는, 기품과 위용이 넘쳐나는 속리산의 절경은 마치 속세를 떠난 선경과도 흡사하여 말과 글로 표현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중생대에 한반도 엄청난 지각변동 겪어

▲ 속리산 입석대. 수많은 기암들로 기품과 위용이 넘쳐나는 속리산의 절경은 마치 속세를 떠난 선경이다. <사진=허재성 기자>
속리산은 풍수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화산(火山)으로 통한다. 이는 바위들이 마치 타오르는 불꽃 같은 형국으로 산 전체를 덮고 있는 광경을 두고 일컫는 것으로 여겨진다. 속리산 이곳저곳의 능선을 타고 넘쳐나는 기암들, 그리고 속리산에 속하는 산군으로 큰군자산(948.2m)과 칠보산(778m)을 끼고 발달한 쌍곡계곡, 도명산(643m)과 낙영산(684m) 아래로 발달한 화양구곡에 가득 들어선 기암들은 속리산의 진면목이 바위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 속리산은 산 전체가 바로 하나의 암반 덩어리로 이루어져 있을 만큼 산 전체에 다양한 형태의 암괴들이 넘쳐나고 있다. 속리산은 그야말로 ‘바위들의 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연 이렇게 많은 바위덩어리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이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지질사에서 가장 지각변동이 심했던 중생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중생대 당시 한반도는 여러 차례에 걸쳐 거대한 화산이 폭발하며 땅이 갈라지고, 이로 인해 지각의 일부가 내려앉고 올라가며, 또 지층이 휘어지는 등 단층과 습곡운동이 전국적인 규모로 일어났다. 그야말로 한반도는 ‘불의 시대’를 맞아 땅덩어리 전역이 요동쳤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오늘날 한반도를 차지하는 암석 가운데 약 30% 가량의 화강암이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관입되어 형성되었다. 화강암은 대규모 지각변동에 따라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고온의 불덩어리인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뚫고 올라오다가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지하의 화강암 암반을 덮고 있던 지표 물질들이 오랜 세월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깎여 나가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속리산을 포함하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설악산, 월출산, 계룡산, 북한산, 월악산 등의 화강암 산지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중생대 지각변동의 산물이다.

다만 화강암 산지별로 그 화강암의 형성 시기가 각기 다르다. 화강암 관입과 관련하여 한반도 중생대에 일어났던 화성활동은 크게 3차례로 구분하여 살펴볼 수 있다. 먼저 트라이아스기 중기(약 2억2천만~2억1천만 년 전)에 송림 운동으로 인하여 평안북도와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한반도 북부에 ‘송림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이후 쥐라기 중기에서 말기(1억8천만~1억6천만 년 전)에 걸쳐 대보 운동으로 인하여 원산~서울을 잇는 추가령구조곡 이남에 북동~남서 방향으로 뻗은 ‘대보화강암’이 관입되었다. 북한산, 도봉산, 관악산, 설악산, 계룡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당시에 생겨난 것들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백악기 중기 이후(1억~7천만 년 전)에 일어난 불국사 변동에 의하여 경상퇴적분지와 옥천습곡대 주변 지역에 소규모의 ‘불국사 화강암’이 관입되었다. 월출산, 월악산, 속리산 등을 이루는 화강암들은 이 때 만들어진 것들이다.

소백산맥 형성되며 속리산 화강암체가 지표 노출돼

▲ 속리산 문장대. 속리산의 기암들은 모두 수직 및 수평절리 작용으로 인해 형성된 것이다.
속리산이 위치한 이 지역 일대의 기반암은 고생대 당시 이곳이 바다였을 때 쌓여 형성된 옥천누층군에 속하는 변성퇴적암이 주를 이룬다. 속리산을 이루는 화강암은 백악기 말 9천만~8천만 년 전 바로 한반도에 공룡들이 넘쳐나고 있을 당시 붉은 마그마가 변성퇴적암의 기반암을 뚫고 관입한 후 지하 약 3~4km 부근(대보 화강암은 약 10~12km)에서 식으면서 굳어져 형성된 것이다.

속리산에서 북으로 뻗어나간 지산(枝山)에 속하는 도명산, 낙영산, 군자산, 백화산, 칠보산, 대야산 등에 분포하는 화강암들 또한 모두 속리산의 화강암과 동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이를 총칭하여 ‘속리산 화강암’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북동쪽으로 더 멀리 주흘산, 조령산, 신선봉, 만수봉, 포암산, 월악산, 구담·옥순봉, 제비봉, 금수산으로 이루어진 월악산군(월악산 화강암이라고 말함) 또한 속리산과 거의 같은 시기에 형성된 화강암체로, 백두대간을 타고 속리산군과 연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하 약 3~4km 부근 깊은 곳에 있던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가 어떻게 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일까. 화강암 관입 이후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지반이 융기함과 함께 피복 물질들이 침식과 풍화를 받아 차츰 깎여나가면서 지표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신생대 제3기 중신세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에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된 지질구조선인 소백산맥은 속리산의 화강암체를 지표로 드러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소백산맥의 형성으로 지반이 높게 융기하게 되자 하천의 침식력이 증가하여 피복 물질들은 보다 빠르게 깎여나갈 수 있었다. 소백산맥의 형성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체의 육상 출현을 앞당기는 데 크게 기여했던 것이다. 약 3~4km에 달하는 두꺼운 피복층이 중생대 백악기와 신생대의 지질 시대를 거치며 모두 깎여 나갔다. 속리산의 화강암이 아름다운 얼굴을 내밀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는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쉽게 가늠하기가 어렵다.

다양한 암괴는 ‘화강암 재단의 마술사’ 절리(節理)가 만든 작품

속리산 능선과 계곡 곳곳에는 특이하고도 기묘한 형태의 암석 지형들이 널려 있다. 마치 돌을 일부러 조각하여 쌓아 놓은 성곽 같기도 하고 혹은 비석, 돌탑 같기도 한 다양한 암괴 지형들이 산지 전역에 넘쳐난다. 마치 칼로 무를 자른 듯 정교하게 재단되어 있는 암석 무더기들이 저마다 모양새를 갖추며 산능과 계곡 곳곳에 들어서 있다. 자연이 만들어낸 암석 예술을 거석 체험을 통해 만끽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속리산이다.

단단한 화강암 덩어리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암괴 지형을 만들어낼 수 있었던 것은 ‘화강암 재단의 마술사’인 절리(節理, joint) 작용 덕분이다. 화강암은 지표 가까이로 올라오면서 점차 압력의 하중이 제거됨에 따라 팽창한다. 이때 암체에는 팽창에 의해 금이 가면서 갈라지는 절리가 발생한다. 이때 절리는 보통 수직 및 수평 방향으로 발달한다. 이후 암체에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여 암석을 구성하는 광물질들과 반응해 화학적 풍화를 이끌고, 또한 얼고 녹기를 반복하는 한편 나무와 이끼 등의 뿌리가 안착하면서 그 틈새를 더욱 벌리는 등의 기계적 풍화가 암석의 붕괴를 촉진시킨다. 그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지표를 덮고 있는 피복 물질들이 빗물, 바람, 하천수 등에 의해 씻겨 내려간 후 지표에 다양한 형태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절리에 따른 화강암 지형 형성 과정

▲ 문장대 정상의 웅덩이. 차별침식과 풍화에 의해 생긴 것이다.
화강암은 매우 단단한 암석에 속한다. 그렇지만 화강암이 일단 지하 심층부에서나 표층에서 물과 접촉하면 쉽게 풍화되어 부서지는 특성이 있다. 실제로 북한산이나 도봉산 등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산을 오를 경우 등산로를 따라 화강암이 풍화되어 쉽게 부서져 내리는 모습을 흔히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화강암의 푸석푸석한 풍화토를 가리켜 ‘썩은 바위’ 혹은 ‘석비레’라고 말하며, 지형학 용어로는 새프롤라이트(saprolite)라고 한다.

한편, 화강암에 가해진 절리의 방향과 발달 정도에 따라 그 암괴의 형상은 다양하게 나타난다. 수직 방향의 절리가 탁월할 경우 암주(巖柱) 모양의 기둥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입석대를 중심으로 문장대에 이르는 종주 능선을 따라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판상의 수평절리와 수직절리가 서로 동일한 간격으로 형성된 격자상 절리가 발달할 경우는 모서리 풍화가 진행되어 핵석(核石·tor)이라고 하는 돌알(돌탑)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문장대에서 청법대, 그리고 칠형제봉으로 이어지는 곳에 주로 분포한다. 그리고 수직보다는 판상의 수평절리가 탁월할 경우는 평탄한 너럭 형태와 돔 모양의 바위들이 발달하는데, 경업대를 비롯하여 배석대, 학소대, 봉황대, 산호대 등이 이에 속한다.

그런데 속리산의 주봉을 이루는 천황봉만큼은 유독 그 형상이 다른 봉우리들과 달리 펑퍼짐한 육산의 형태를 띠고 있어 특이하다. 이는 어떤 이유에서일까? 천황봉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은 주변 암석에 비하여 절리의 규모가 미세하게 발달했을 뿐만 아니라 화학적인 풍화작용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기 때문에 다른 능선과 봉우리에 비하여 침식과 삭박이 빠르게 진행되어 암석 파괴가 손쉽게 이루어졌다. 이로 인하여 두꺼운 토양층의 피복이 형성되어 여러 다른 암봉들과 같은 걸출한 암석의 돌출을 찾아보기가 어렵게 된 것이다.

삼파수 분기점은 문장대가 아닌 천황봉

▲ 속리산을 이루는 담홍색 화강암은 한반도가 중생대 '불의 시대'를 맞고 있을 당시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관입된 용암이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으로,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KBSI)정창식 박사에 의하면 그 형성 시기가 약 9천만~8천만년 전 경이라고 한다.
한편, 남한만을 두고 이야기할 때 백두대간의 산줄기가 중심에 위치하고 있는 속리산에서 한남, 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까닭에 속리산은 국토의 종갓집 산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이를 반대로 표현하면 남한땅의 산줄기들이 이곳을 정점으로 몰려드는 형세라고도 볼 수 있다. 속리산 최고봉인 천황봉을 꼭짓점으로 하여 남한 땅의 모든 산들이 뻗어나가고 또 이곳으로 모여드는 것이다.

이러한 지형에 의해 한반도 남반부의 대동맥을 이루는 한강, 금강, 낙동강 등의 삼대강은 이곳 속리산을 기점으로 서로 물길을 달리하며 나누어져 흐른다. 바로 그 삼파수(三波水)의 중심에 있는 것이 이 속리산의 정상 천황봉이다.

1481년 우리나라의 지리, 풍속을 기록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보면 한강, 금강, 낙동강의 물이 나누어지는 삼파수의 기점이 속리산의 문장대라고 다음과 같이 상세하게 적혀 있다.

‘속리산은 보은현 동쪽 44리 되는 곳에 있다. 아홉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산꼭대기에 문장루대가 있다. 문장루대는 천연적으로 돌이 포개져 힘차게 공중에 솟아 있는데, 그 높이는 몇 길이나 되는지 알 수 없으며 그 넓이는 삼천 명이 앉을만하다. 이 누대 위에 가마솥 같은 구덩이가 있는데 물이 철철 넘쳐서 가뭄에 줄지 않고 장마철에도 불지 않는다.

이 물은 세 갈래로 나누어져(삼파수) 흘러내려 가는데, 동쪽으로 흐르는 것은 낙동강이 되고, 남쪽으로 흐르는 것은 금강이 되며, 서쪽으로 흘러 북쪽으로 꺾어진 것은 달천(한강)이 된다.’

그러나 필자의 답사와 지형도 판독에 의하면 이는 지극히 잘못된 사실이기에 바로잡는다. 문장대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경북 상주시 하북면 용유리를 지나 농암천을 따라 문경시 가은면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든다. 낙동강의 발원지에 대한 설명은 옳다. 그러나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에 이른다고 했는데, 이는 금강이 아니라 한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장대 남쪽으로 파인 용바위골을 타고 법주사를 돌아나온 물이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르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물은 금강으로 흘러가지 않고 내속리면 상판리를 지나면서 물길을 갑자기 북쪽으로 돌려 보은군 산외면 백석리~청원군 미원면 운암리~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거쳐 남한강 지류인 달천으로 흘러든다. 따라서 문장대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금강이 아닌 한강으로 흘러든다고 함이 옳다.

문장대를 기준으로 서쪽으로 흘러드는 물 또한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리고 문장대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정낭골과 합산골을 타고 흘러내려 상주시 화북면 중벌리~운흥리를 거쳐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를 타고 달천(한강)으로 흘러든다. 그러므로 문장대가 삼파수의 분기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속리산에서 금강의 물길을 가르는 분수령은 문장대가 아닌 속리산의 주봉인 천황봉이다. 천황봉에서 남쪽으로 파인 대목골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삼가 저수지를 거쳐 삼가천을 타고 보은군 외속리면 장내리~탄부면 하장리~마로면 관기리~옥천군 대청호로 흘러들어 금강에 이른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동국여지승람에서 속리산의 문장대를 우리나라 남한땅의 삼파수로 단정 지은 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형적으로 볼 때 한강, 금강, 낙동강의 삼파수 기점을 문장대에서 천황봉으로 옮겨 놓고 보면 삼파수의 물길이 정확히 들어맞는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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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8구간] 속리산 풍수

앞으로 20년간 국토 개발은 속리산을 중심점 삼아야
화북면 7개 마을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

▲ 이상향 우복동이 있다고 전하는 화북면의 우복동 기념비.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은현 편을 보면 ‘속리산 문장대 위에 구덩이가 가마솥 만한 것이 있어 그 속에서 물이 흘러나와 가물어도 줄지 않고 비가 와도 더 많아지지 않는다. 이것이 세 줄기로 나누어서 반공(半空)으로 쏟아져 내리는데, 그중 한줄기는 동쪽으로 흘러 낙동강(洛東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남쪽으로 흘러 금강(錦江)이 되고, 또 한 줄기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북으로가서 달천(達川)이 되어 금천(金遷)으로 들어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달천은 충주시 서편에 흐르는 하천으로,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한 물줄기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에서는 용대천(龍大川)이라고 부르고, 다시 박대천(博大川)과 합류하여 달천에 이르고, 다시 충주호에 내려오는 남한강과 합류한다. 용대천이나 박대천은 큰 물줄기가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름만은 대천(大川)이라고 하는 이유는 한강의 지류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그리고 금천(金遷)은 지금의 충주에서 서쪽으로 10리 되는 지역이다.

속리산은 낙동강, 금강, 한강 세 강의 발원지가 되는, 즉 삼수지원(三水之源)이 되는 곳이다. 우리나라 삼대강의 발원지가 된 만큼 속리산은 남한의 중심이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사실상 우리나라의 중심이 되는 산이다. ‘우리나라의 수도인 서울이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 등의 중심지’라고 하는 것은 사람 단위의 중심이며, 국토 상의 중심은 속리산이 된다.

사물마다 태극이 있다

풍수지리에서는 물물일태극(物物一太極)이라고 하여 어떤 물건이든지 각기 중심이 되는 곳이 있으며, 이 지점을 두고 태극(太極) 또는 입극(入極)이라고 한다. 풍수지리에서 이 태극점을 찾는 것은 중요한 사항이다. 왜냐 하면 태극점을 찾아야 다음에 주변을 사방팔방으로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속리산은 현재 우리나라 남한을 국토로 하였을 때 면적상의 태극점이 되는 곳이다. 이 태극점이 기준이 되어 방위가 생기게 되기 때문에 중요한 지점이 되는 것이지, 속리산 자체가 반드시 핵심이 되는 장소가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따라서 태극점은 단순히 기하학적인 중심인 물태극(物太極)과 사람 중심의 인태극(人太極)으로 나누어 보는 두 가지의 방법이 있다.

▲ 복원 전의 장각사지 7층석탑.

속리산은 물태극의 중심이므로 국토개발이나 이용은 속리산을 중심점으로 8방을 나누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현재 8운 기간(2004-2023년) 동안에는 낙서(洛書)의 8자는 북동방인 간방(艮方)이 되는데, 간방에서도 정확히는 축(丑·30도)방과 미(未·210도)방이 해당된다.

속리산을 기점으로 축방인 강원도 양양군과 미방인 전남 해남군 사이의 일직선 상의 지역이 주개발지역이 되거나 우선적으로 개발이 된다고 예견하는 방법이 대(大)현공풍수법이다. 인태극점인 서울을 중심으로는 축방인 경기도 철원군과 미방인 경기도 화성시 사이의 일직선 상의 지역이 활성화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개인의 집이나 묘에 관한 사항은 소(小)현공풍수법으로 예측하는데, 이때에도 상황에 따라 단순히 기하학적인 중심과 사람 중심인 인태극 두 가지 방법을 통하여 판단한다.

유토피아의 땅 우복동

▲ 석탑지에서 바라본 안산. 안산이 너무 높아 하극상의 인상을 준다.
속리산을 중간에 두고 남서쪽으로 유명한 호서제일가람(湖西第一伽藍) 법주사(法住寺)가 이미 터를 잡고 오랫동안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고 있다. 속리산에 속해 있는 산이름은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의 속리산(俗離山)이나 비로봉(毘盧峰), 관음봉(觀音峰) 등의 불교식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의 색채가 강한 지역이다. 그런데 속리산의 북동쪽은 신선사상의 이상향인 우복동(牛腹洞)이 있다고 각종 고문헌과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어 속리산을 중간에 두고 대비가 되고 있다.

속리산 천황봉과 비로봉 사이의 계곡을 따라 내려오면 경북 상주시 화북면 상오리 장각동 마을에 절은 없고 상오리 7층석탑이 남아 있다. 이곳은 장각사(長角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전하지만 확실한 기록은 없고, 일제시대에 일본 헌병이 무너뜨린 이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을 지난 1978년에 원형대로 복원하였고, 보물 제683호로 지정 관리해 왔는데, 최근에 다시 복원을 위하여 탑을 해체하고 있는 중이다.

상오리 7층석탑은 높이 9.2m이며 기단구성이 특이하고 각 부의 비례가 불균형한 점을 보아 건립연대가 고려 중엽으로 추정되며, 탑 서편 법당 자리였던 곳에 주초석이 여러 개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5칸 정도의 법당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각동이란 이 지역이 우복동의 명당터에서 쇠뿔에 해당한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우복동이란 소의 뱃속 모양의 명당터를 말하는 것인데, 화북면의 7개 동리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동네가 진짜 우복동이라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한국전쟁 당시에 이곳에 피난을 와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우복동은 지리산의 청학동(靑鶴洞)과 경기도 가평군의 조종천(朝宗川) 상류 지역 협곡에 있었다는 유교사회의 이상향인 판미동(板尾洞)과 함께 전설적인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 화북면 상오리 수침동(繡針洞) 마을은 도장산(道藏山·328m) 자락에 있는 마을인데,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자수를 놓는 형국이라는 풍수지리설에서 지명이 유래한 곳이다. 이곳에 있는 명당에 집을 지으면 여덟 명의 판서가 난다 하여 일명 팔판동(八判洞)이라고도 알려져 있다.

▲ 복원하기 위해 해체중인 정각사지 7층 석탑.
화북면에는 청화산(靑華山)이 있는데, 이 산 아래에는 원효대사가 창건했다는 원적사라는 절이 있다. 택리지의 저자 이중환(1692-1756)은 바로 이곳 청화산의 경치에 매료되어 자신의 호를 청담(淸潭)ㆍ청화산인(靑華山人)이라고 하였을 정도다.

이중환은 이 일대에 대하여 택리지에 ‘청화산을 뒤에, 내외의 선유동을 두고 앞에는 용유동에 임해 있다. 앞뒤편의 경치가 지극히 좋음은 속리산보다 낫다. 산의 높고 큼은 비록 속리산에 미치지 못하나 속리산 같이 험준한 곳은 없다. 흙봉우리에 돌린 돌이 모두 수려하고 살기가 적으며 모양이 단정하고 좋으며 빼어난 기운이 흩어지지 않아 거의 복지(福地)다’라고 기록하였다.

이중환 선생은 당대에 유명한 지관 목호룡(睦虎龍·1684-1724)과의 친분이 있어 명당을 찾기 위해서 수개월에 걸쳐 황해도의 금천, 평산, 연안을 비롯하여 경기도의 장단 등을 답산한 경험이 있었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면 택리지는 인문지리서와 달리 풍수지리적 이론과 실제에 근거하여 저술된 내용이며, 당시에 불우한 선비로서 유토피아를 찾아 팔도를 방랑한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장각사의 운명

▲ 7층석탑을 해체하기 위해 비계(飛階)를 설치해 놓았다.
우복동이라는 천하의 제일명당이 있다고 전해지는 이곳 장각사 절터도 과연 명당일까? 칠층석탑의 좌향은 자좌오향(子坐午向·정남향)이다. 장각사의 주춧돌을 근거로 보면 장각사의 좌향도 탑과 같은 자좌오향이다.

장각사와 칠층석탑을 언제 창건하였고, 그리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잡초만 무성한 폐사지로 남아 있을 뿐이다. 언제인가는 다시 절이 복원되고 스님들의 수행도량처로 변화될 수도 있다. 다만 풍수지리 입장에서 감정하자면 안산과 조산이 너무 높아 흠이 있다.

옛 풍수지리서 주작론(朱雀論)에 이르기를 ‘主客相適 高則際眉低則應心 秀麗開面爲貴 而遠不如近 故必取入懷之案耳(주객상적 고즉제미저칙응심 수려개면위귀 이원불여근 고필취입회지안이)’이라고 하였다. 즉, 주객이 서로 만나는데, (주작이) 높으면 눈썹 정도이고 낮으면 심장 정도인데, 수려하고 열려 있는 모습이면 귀하며, 멀리 있는 것은 가까운 것보다 못하니, 반드시 품안에 있을 정도면 좋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사신(四神) 중에서 주작(朱雀)은 앞에 있는 안산과 조산을 의미하는데, 음택이나 양택에서의 혈처는 주인이 되고, 안산과 조산은 손님이 되는데, 그 높이는 눈썹과 심장 사이의 높이가 가장 적당하다고 하였다.

만약에 혈처보다 너무 높으면 하극상을 하는 격이 되어 길상(吉象)이 되지 않는다. 장각사 절터에서 정면에 보이는 주작이 비교적 높은 편으로 주인을 도와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압박하고 있을 정도다. 그러나 이러한 땅에도 한 때를 잘 만나 이곳에 절과 탑을 짓게 되는 행운이 있었으며, 그리고 시운(時運)이 바뀜에 따라 언제인가는 폐사가 되는 불행한 운명이 되었다.

중국 북송시대에 명재상인 여몽정(呂蒙正)은 어린 시절을 불우하게 지냈는데 출세하여 재상이 되어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파요부(破窯賦)라는 문장을 보면 불우하였던 과거의 자신은 천하지도 않았고 지금의 높은 직위도 귀한 것도 아니라 말하며, 단지 시(時)가 그러했고, 운(運)이 그러했고, 명(命)이 그러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다음 명재상 여몽정이 지은 파요부 중에서 시기의 중요성에 대해 설파를 한 대목이다.
‘天不得時 日月無光, 地不得時 草木不長, 水不得時 風浪不平, 人不得時 利運不通(천불득시 일월무광, 지불득시 초목불장, 수불득시 풍랑불평, 인불득시 리운불통)’

‘하늘도 때를 얻지 못하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땅도 때를 얻지 못하면 초목이 자라지 못하고, 물도 때를 얻지 못하면 풍랑이 일고, 사람도 때를 얻지 못하면 유리한 시기에도 통하지 않는다.’

폐사된 장각사의 터에도 좋은 운이 언제나 돌아올 것인가.

글 최명우 (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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