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월악산 지명

‘월악산’은 ‘달앗뫼’의 차음
‘월(月)’ 관련 지명들은 산악 지역에 많아

▲ ‘월(月)’은 달(山)에서 나온 것이므로 산, ‘악(岳)’도 산, ‘산’도 산이니 결국 월악산은 ‘산산산(山山山)’의 뜻이다.(남쪽 상공에서 본 월악산. 뒤로 정상인 영봉이 우뚝하다).

아 이 고개 험준하기 짝없음이여 / 嗟嶺之峻極兮

웅장한 경치 동방의 으뜸이로다 / 擅雄勝於東域

광대한 지역 덮으면서 가로 걸쳐 있음이여 / 勢磅而橫亘兮

바람 기운 남북으로 서로 떼어 놓았도다 / 隔風氣於南北

월악산 멀리서 형세를 도움이여 / 月岳助其遠勢兮

주흘산 두각을 나타내도다 / 主屹爲其頭角 ---(중략)

새도 넘기 어려운 길 인적 따라 오름이여 / 緣人跡於鳥道兮

산허리에 아슬아슬 잔도(棧道) 걸려 있도다 / 架危棧於山脊

참으로 천하의 험지(險地) 상대가 없음이여 / 信天險之無敵兮

어떻게 백이가 뻐길 수 있겠는가 / 奚百二之足誇

(주 : 백이(百二)=진(秦)나라 땅. 지세가 험준하여 2만 병력으로 백만 군대를 당해낼 수 있다는 뜻에서 유래된 것) <계곡집(谿谷集)> (제1권)

백두대간이 남으로 계속 흘러내리다가 태백산 부근에서 크게 서로 용틀임을 치더니 소백산, 대미산, 월악산, 주흘산 등의 연봉을 불쑥불쑥 하늘로 추켜 올려놓고는 계속 속리산 방향으로 기세를 이어 간다. 그래서, 이 일대는 가히 산들의 전시장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대동여지도 등의 고지도를 보면 그 여러 명산들 중 월악산은 유독 이 일대에서 조금 옆으로 빗겨나 있다. 그래도, 명산 중 명산이라 그랬던가, 백두대간의 산세를 이야기할 때 이 산을 빼놓는 경우는 드물다.

너무나 좋은 산이기에 진작부터 20여 년 전에 국립공원이 된 월악산은 스무남은 개의 봉우리를 안고 있는데, 그 대부분의 봉우리들은 주봉의 남쪽 자락에 모여 있다. 험준한 산세와 맹호처럼 치솟은 기암단애. 예로부터 신령스런 산으로 여겨져 그 주봉은 영봉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래서, 옛 문헌에서도 이 산이 영기(靈氣)를 내뿜어 지역민을 보호했다는 기록을 내보이고 있다.

‘몽고병이 충주성을 도륙하고 또 산성을 치니, 관리와 노약자들이 막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월악신사(月嶽神祠)로 올라갔다. 홀연히 운무가 자욱하며 바람, 비, 우뢰, 우박이 함께 몰아치니, 몽고 군사가 신령의 도움이 있다 하여 치지 않고 물러갔다.’ <고려사절요>(제17권)

‘달’ 지명들이 널려 있는 월악산 일대

월악산은 우리말로는 ‘달앗뫼’로 유추된다. 우리나라 산 이름을 보면 유별나게도 월(月) 자가 많이 들어간 것을 볼 수 있다. 산 외에 산악 지역의 마을, 골짜기, 내, 바위 등에도 달(月) 관련 지명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이 달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 많이 생각하는 듯하다.

이런 말을 한번 생각해 보자. ‘달이 달 위에 떠서 달골의 달바위를 비추고 있다.’ 달이 달 위에 뜨다니? 그러나, 여기서 달을 떠올린 그 달은 바로 산(山)을 말한다. 달골(山谷)은 산골이고, 달바위는 산바위(山岩)이다.

전국에는 달 음절이 들어간 지명이 엄청나게 많은데, 주로 산악지역에 많이 분포되어 있다. 우선, 월악산 일대인 충주, 제천, 단양, 괴산, 문경 일대에서만 달 관련 토박이 땅이름들부터 모아 보자.

달?바위(다락바위, 樓岩) : 충주 목행동, 가금면 누암리

달?재(다락재, 다락고개) : 제천 덕산면 도기리, 봉양면 연박리, 충주 산척면 송강리.

달?산(다랑산, 多郞山, 多靈山), 달앙골(다랑골) : 제천 덕산면, 충주 앙성면 마련리

달?고개(다랑고개, 月嶺) : 제천 청풍면 부산리, 장선리, 충주 산척면 송강리

달?양지(다랫양지) : 제천 송학면 송한리

달갯들, 달개비알(산) : 괴산 불정면 목도리, 충주 앙성면 용포리, 상모면 온천리

달고개(月峴) : 문경 산북면 이곡리, 호계면 지천리

달기봉(산) : 단양 매포면 어의곡리, 단양 영춘면 사이곡리의 달기미(산-고개)

달내(달천강, 달천동) : 보은-청원-괴산-충주

달밭(月林, 月村), 달박골 : 문경 산북면 석봉리, 제천 금성면 월림리, 단양 대강면 천동리, 문경 산북면 석봉리

달봉(月峰), 달봉재(고개) : 문경 영순면 달지리, 제천 고암동

달여울(月灘) : 충주 소태면 양촌리, 금가면 월상리

달?티(다른티, 月銀峙), 달?터(다른터, 月隱) : 충주 가주동, 이류면 문주리

그밖 : 달롱실(月弄谷)-제천 덕산면 도전리, 달마실(月村)-충주 가금면 장천리, 달모기(月項)-문경 문경읍 평천리, 달못골(月潭)-괴산 청천면 삼송리, 달미(達尾)-충주 동량면 용교리

달도 높고 산도 높고

어원 연구가인 최승렬은 그의 저서 <한국어의 어원>에서 달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은 ?(해)와 쌍을 이루어 하늘에 있는 음양이다. 땅에는 남녀가 있어 음양을 대표하고,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어 음양을 대표한다. 따라서, 해가 숭앙의 대상이었듯이 달도 또한 숭앙의 대상이었다.”

달은 높은 곳에 있으니 그 개념은 높은 것(高)이었음이 분명하다. 한낱 태양이 큰 것이고 달이 높은 것이라는 생각은 짝을 이루는 존경심의 나타냄이라 할 수 있다. 정읍사의 첫머리 ‘?하’의 ‘하’가 그것을 증언한다.

‘?하 노피곰 도?샤 / 어긔야 머리곰 비치오시라 / …즌 ?? 드?욜셰라’(해석 : 달이여 높이 돋아 / 어긔야 머얼리 비추소서 / …(너무 어두우니) 진 곳을 디디시리다) <정읍사(백제 가요)>의 일부.

▲ 월출산은 백제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월나악(月奈嶽)이라 불렸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월출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월’은 같은데, ‘나’가 ‘출(出)’로만 바뀌었다. ‘나’를 ‘나다(出, 生)’의 뜻으로 보면 두 이름이 얼마나 근접한지 알 수 있다.

이 노래의 제일 앞에 나오는 ‘?’은 ‘달(月)’로, 호소의 대상이 되었다. ‘?하’에서 ‘하’는 존칭호격조사. 그리고, ‘?’에서 돌다(廻), 덜다(減), 두르다(周), 돌(周年) 등의 말이 파생했다고 생각하는 학자들이 많다.

달은 옛 훈민정음으로 대개 ‘?’로 표기되었다. 산이름들 중에 달(達)이나 월(月)자가 많이 들어간 것은 ‘산’의 옛말이 ‘?’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산(小山, 子山)의 뜻인 아사달은 ‘앗달’, ‘압달’로도 불리어 아홉달의 뜻인 구월(九月)이 되니 구월산이 아사달과 같은 이름인 셈이라 하는 주장들도 상당한 설득력을 갖는다.

?아사달 > 앗달 > 압달(아읍달) > 아홉달(九月) > 九月山

일부 학자들은 아사달(앗달)은 차산(次山)(나중의 산)의 뜻이 된다고도 하면서 ‘한?달(太白山)’의 상대적 의미로 씌었다고 하고 있다. 즉, 태백은 환웅이 내린 곳이라 클 태(太) 자를 붙였는데, 태(太)나 대(大)는 머리(宗)를 나타내고, 단군이 옮긴 곳을 백악(白岳)이라 한 것은 차(次)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한박달(太白山) = 종단(宗壇)

?아사달(阿斯達) = 차단(次壇.弟壇.小壇)

고대의 제단은 산꼭대기에 있어 달(達)은 단(壇)과 통한다고도 하였다. 어떻든 하늘의 ‘달’과 땅이나 산(山)이란 뜻의 ‘달’과는 음이 같은데, 어원적으로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달’은 일본으로 건너가 ‘타케’라는 말을 낳고

‘달’은 오랜 옛날부터 써온 말이었기 때문에 많은 관련 지명들이 퍼지게 하였다. 산의 뜻을 갖는 이 말은 오늘날의 양달, 음달 같은 말을 이루게 했고, 빗긴(경사진) 땅이라 하여 ‘빗달’이라 불리던 말이 ‘비탈’이라는 말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 ‘달’은 ‘들’, ‘둘’ 등으로 모음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가 ‘드리’, ‘두리’ 로 연철되면서 두류(頭流), 두리(斗里, 頭理), 지리(智異) 같은, ‘달’과는 상당히 멀어진 또 다른 지명을 파생시키기도 했다.

지금의 땅이나 터라는 말도 ‘달’이 다음과 같은 과정에 의해 변한 말이라는 의견도 있다.

달(山) > 다 > 따 > 땅(地) (경음화)

달(山) > 다 > 타 > 터(基) (격음화)

우리말의 ‘따’, ‘터’는 일본으로도 건너가 논이나 땅의 뜻이 되어 田(전), 地(지)의 그곳 발음이 ‘다(夕)’가 되기도 했다는 것이 정설이다. 일본어는 악(岳), 고(高)를 ‘타케’, ‘타카’라고 하는데, 이 때문에 다음과 같은 지명들이 남아 있다.

韓國岳: 가라쿠니타케(カラクニタケ) 가고시마현

態ケ岳: 쿠마가타케(クマガタケ) 가고시마현

高座岳: 타카쿠라야마(タカクラヤマ) 아이치현

高崎岳: 타카사키야마(タカサキヤマ) 오이타현

지금 우리가 쓰는 말들에 ‘달’이 산의 뜻으로 들어간 것이 별로 없으나 여기서 새끼 친 말들은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달래꽃 : 달(山)+외(오이)+곶(꽃) = 달외꽂 > 달래꽃 (진달래꽃)

달래 : 달(山) > 野+혜 = 달혜 > 다뢰 > 달뢰 > 달래(野生菲)

달구질 : 닭(땅)+?+질 = 달?질 > 달구질(石杵) (땅을 단단히 다지는 일)

옛 지명에서는 ‘달’이 ‘산’의 뜻

‘달’은 원래 고구려어로서 삼국이 통일되기 전에 ‘~달(達)’식으로 불리던 고을 이름들이 통일 후인 신라 경덕왕 때 거의 ‘~산(山)’식으로 바뀌었다. 이를 보아도 달이 산의 뜻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식달현(息達縣, 평남 중화) - 토산현(土山縣)

석달현(昔達縣, 함남 안변) - 난산현(蘭山縣)

가지달현(加支達縣, 안변 부근) - 청산현(菁山縣)

그런가 하면, 달은 높다는 뜻으로도 씌어 달홀(達忽)(강원 고성)이 고성군(高城郡)으로, 달을성현(達乙省縣)(경기 고양)이 고봉현(高烽縣)으로, 달을참현(達乙斬縣)(경기 강화 교동면)이 고목근현(高木根縣)으로 바뀌기도 했다.

백제의 관명 중에 달솔(達率)이 있는데, 여기서의 ‘달’도 높음으로 보아 달솔은 고관(高官)의 뜻이 된다고 하고 있다. <수서(隋書)>에서는 달솔을 대솔(大率)이라고 적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달(達) 자가 들어간 산이름들이 많이 나온다. 경기 수원의 팔달산(八達山), 충북 영동의 박달산(朴達山), 충남 아산의 서달산(西達山), 충남 금산의 달왕산(達往山), 전북 전주의 고달산(高達山), 전남 목포의 유달산(鍮達山), 무안의 승달산(僧達山), 황해 수안의 아달산(阿達山), 곡산의 고달산(高達山), 신계의 기달산(箕達山), 송화의 달마산(達摩山), 평북 창성의 달각산(達覺山) 등이 그 예인데, 이들 산이름 중에는 지금까지도 그대로 불리는 것이 많다. 달이 산이니 이러한 이름의 산들은 결국 산이란 뜻이 겹쳐 들어간 셈이 된다.

‘달’이 고구려 지명에 많은 반면, 백제 지명에는 ‘돌’ 지명이 많은데, 통일신라 이후 이들 지명은 대개 월(月) 자로 대역되었다. 백제어의 ‘돌’은 고구려어의 ‘?’에 해당하는데, 지명에서 돌은 한자로 돌(突), 진(珍)으로 표기되다가 뒤에 월(月) 자로 바꾸기도 했다.

‘難珍阿 一云 月良阿(난진하 일운 월량하) =난진하는 월량하라 하기도 한다.

‘曰突(월왈돌)=‘달’을 ‘돌’이라 부른다<계림유사>

‘영(靈)’을 백제에서도 ‘돌’이라 했던지, 마돌(馬突, 馬珍, 전북 진안 마령면)이라 불리던 지명이 마령(馬靈)으로 바뀌어 나가기도 했다. 백제 때 월나군(月奈郡)으로 불리던 곳이 영암군(靈巖郡)으로 된 것을 보면 월(月)과 영(靈)이 같은 음에서 나왔음을 짐작하게 된다. 학자들은 월나를 ‘달내’로 유추, 지금의 영암군은 옛날에 ‘달냇골’, ‘달낫골’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달’은 하늘의 달이 아닌 산(山)의 뜻으로 보아 ‘달냇골’은 단순히 ‘달?골’(산골)의 뜻일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월악산과 월출산의 어원은 거의 비슷

월출(月出)은 ‘달돋이’의 뜻이기에 ‘달 뜨는 산’이어서 월출산 이름이 붙었다고 말하고들 있다. 그러나, 앞에서도 말했듯이 월(月) 자가 들어갔다 해서 이름 유래를 달과 관련 지음은 큰 잘못이다.

월출산은 백제와 신라시대에는 월나산(月奈山), 월나악(月奈嶽)이라 불리었고,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월출산이란 이름이 붙었다. ‘월나-월출’에서 ‘월’은 같은데, ‘나’가 ‘출(出)’로만 바뀌었다. ‘나’를 ‘나다(出.生)’의 뜻으로 보면 두 이름이 얼마나 근접한지를 느낄 것이다.

문제는 ‘월나’가 어떤 뜻으로 붙여졌나 하는 것인데, 이에 대해선 앞에 적은 영암의 옛이름 월나(月奈)의 유추를 참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 산이 있는 영암의 옛이름이 월나, 월생(月生)이기도 했으니, 결국 월나, 월생, 월출, 영암은 비슷한 뜻의 이름이 되는 것이다.

?달? > 달아 > 달나 = 달 月+나 生 = 月出山

결국, 월출산은 ‘달나뫼’이며, 이 이름은 그저 단순히 ‘산’의 뜻인 달에서 나온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월출산의 ‘월’이 산이듯 월악산(月岳山)의 ‘월’도 산의 뜻임은 말할 것이 없다. 누군가는 말했다. 월악산(1,093m)은 ‘산’이 세 번 겹쳐 들어간 셈이 된다. ‘월(月)’도 산, ‘악(岳)’도 산, ‘산’도 산이니 결국 월악산은 ‘산산산(山山山)’의 뜻이라고.

이 산은 신라시대에 월형산(月兄山)이라 하며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이 산 아래 제천군 덕산면에는 월악리(月岳里)가 있다. 월악리는 전남 함평 월야면과 영암군 시종면에도 있다.

산지 지명들 중에 달 관련 지명 수두룩

달(山)의 고을이란 ‘다릿골’, ‘다라실’ 같은 이름은 산속 마을들에 많다. 다라실(月谷, 당진, 화순), 다리실(月谷, 연기, 순창), 다릿골(月谷, 장성, 김천, 산청) 등이 월곡리(月谷里)라는 행정지명으로 남아 있다. 논산과 청주의 월오동(月午洞)도 다리실로 불리던 곳이다.

홍천의 달천리(達川里), 영주 문수면 월호리(月呼里)에는 다랏골(達川, 月谷) 마을이 있다. 예산 광시면의 월송리(月松里), 음성 감곡면의 월정리(月亭里)도 아직까지 다릿골로도 불린다.

예천 지보면의 상월리(上月里), 장수 산서면의 하월리(下月里), 완주 비봉면의 내월리(內月里)는 각각 웃다리골, 아랫다리실, 안다리실로 불리기도 하며, 서울 성북구의 상월곡동(上月谷洞), 하월곡동(下月谷洞)은 각각 웃다리실, 아랫다리실로 불리던 곳이다.

대구의 옛이름 달구벌(達句火)은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의 뜻으로 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닭 山+?+벌 = 달?벌 > 달구벌

산고개(月嶺)란 뜻의 달고개(月山里, 서천), 달재(月嶺里, 창녕), 달앗태(月峴里, 장수 계북면)가 있고, 산의 울타리란 뜻인 듯한 다리울(달울)이 보령 남포면에 달산리(達山里)란 지명으로 남아 있다. 장수의 월현리(月峴里)는 군지에 ‘달을 산에서 본다’고 해서 ‘月+山+峴’으로 월현(月峴)이 되었다고 매우 그럴 듯한 유래를 붙여 놓고 있다.

달목, 다르막으로 불리던 곳은 월항(月項), 월리(月里), 월막(月幕)으로 되어 완도, 서천, 고령 군내에 행정지명으로 남아 있다. 산 아래 있다고 해서 달아래(月下村), 달아실(月下)이라 불리던 마을이 영암과 해남에서 각각 다른 마을과 합쳐 상월리(上月里), 월호리(月湖里)란 지명을 이루고 있고, 산 안쪽이란 뜻의 달안(月內) 마을이 예천에서 역시 다른 마을과 합쳐 월오리(月梧里)란 행정 지명을 만들고 있다.

‘산 山의 곶’이란 뜻의 달고지가 시흥의 월곶동(月串洞)을 비롯해 월곶리(月串里, 강화), 월송리(月松里, 보은), 달산리(達山里, 서산) 등의 한자 지명이 되었다. 달들, 다랏곳, 달안바웃들은 월평(月坪)이란 지명이 되어 각각 울산, 제주, 합천에 있다.

전남 광양에도 ‘달머리’를 한자화한 월평이 있는데, 다른 마을과 합쳐 도월리(道月里)라는 지명을 이루고 있다. 영암의 월암리(月岩里)에는 드르멀(月坪)이란 마을이 있다.

영광의 하낙월(落月里, 상낙월리-하낙월리)은 들이 길다 해서 긴들, 진들로 불리던 곳인데, ‘진’을 떨어질 낙(落)으로, ‘들’을 달(月)로 취해 낙월(落月)이란 지명으로 된 것이다. 사들(沙月, 안동), 새다리(沙月, 산청)도 이명(里名)에선 월(月)이 취해졌다. 문경의 월천리(月川里)도 새벌개(沙月)란 마을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월포리(月浦里)가 화순, 영일, 예천에 각각 있는데, 달개, 다래두들(月牙), 다래끝(月村) 마을이 있어 붙은 것으로, 이들 지명들도 들과 관련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들’이 ‘달’로 되었다가 ‘월(月)’로 취해진 지명들도 많음을 알 수 있다.

산밭이란 뜻의 달밭(달밭골)이 달전리(達田里)가 되어 연기, 영동, 승주, 안동, 청송 등에 있다. 성주의 월곡리(月谷里)도 달밭(月田)이란. 마을이 있어 붙은 이름이다.

‘달’은 ‘들’의 뜻으로 쓰이기도

충주에 달천동(達川洞)이 있고, 이 앞을 달내(達川, 達川江)가 흐르고 있다. 두 오뉘가 아래옷을 걷고 이 내를 건너다가, 주착없이(?) 커진 가운뎃다리를 자르고 죽은 남동생 시체 곁에서 ‘달래나 보지’하며 누이가 울부짖어 ‘달래(달내)’가 되었다는 이름 전설을 가진 내이다. 그러나, 달내는 들 가운데의 내 아니면, 산에서 흘러내린 내란 뜻의 ‘?내’의 변한 음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와 똑같은 마을 이름이 울주, 서산, 승주에 있는데, 서산과 승주의 달내는 월계리(月溪里)란 이명(里名)을 달고 있다. 서울 양천구의 신월동(新月洞)은 큰 들의 내란 뜻에서 불린 듯한 곰달내란 마을이었다.

한글학회의 <지명총람>에는 ‘예부터 달빛이 맑게 비치는 곳이라 하여…’라고 유래를 적고 있으나, 지명은 그런 식으로 정착되는 일이 별로 없다. 한자로도 고음월(古音月), 신월(新月)로 표기하여 달과 관련한 이름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서울시에서 몇 년 전 이곳을 지나는 길을 ‘곰달래길’이라 하여 사라질 뻔한 이름을 되살려 놓았으나, 엄연히 내(川)의 이름이어서 ‘곰달내’인 것을 ‘곰달래’로 해놓은 것에 아쉬움이 있다. ‘곰달내’는 원래 ‘큰 들판의 내’란 뜻의 ‘검달내’인 듯하다.

달바우는 산의 바위란 뜻으로 붙여진 듯한데, 마을 이름에선 한자로 월암(月岩)이 되어, 의왕, 무안 일로면, 공주 등에 있다.

무안 해제면 옥월리의 월암(月岩)은 지형이 반달과 같이 생겼다 해서 나온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고, 완주 상관면 신리의 월암 마을은 앞에 달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 붙은 이름이라고 전하고 있다. 시흥의 월암동, 무안 일로면의 월암리 등도 같은 뜻으로 이름이 붙여졌다고 전하고 있다. 성주 월항면 옥월리의 월암 마을은 뒷산에 달바위에서 달맞이를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달바위(月岩) 중에는 달처럼 생긴 바위, 또는 달맞이하던 바위의 뜻으로 붙은 이름보다는 ‘산의 바위’의 뜻으로 붙은 것이 더 많을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월악산은 달앗뫼(다락뫼)이다.

달앗뫼 > 달악뫼 > 달(月)+악(岳)+뫼(山) > 월악산(月岳山)

그러나, 월악산은 이름 그대로 여느 산들과 한가지로 달맞이를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그래서, 월악산은 늘 달(月)의 친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달 위에 달을 떠올리며 사람들로 하여금 늘 달을 생각하게 할 것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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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르포

대간 마루 위 허공에 찍힌 ‘바람의 지문’ 비
이화령~조령산~문경새재~하늘재~포암산~대미산

▲ 비 갠 후, 운무가 그치면서 태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백두대간. 조령산 너머로 멀리 속리산 봉우리까지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이 산을 만나면 구름이 된다. 산은 구름을 중매쟁이로 하늘과 통정(通情)한다. 그리하여, 비가, 온다.

이화령(548m) 마루에 서서 비를 맞는다. 산은 아직 짙푸른데, 대간 마루에 내리는 빗줄기는 벌써 마른 풀냄새를 머금고 있다.

▲ 조령산 오름길에서 만난 마타리.
이화령은 본디 한적한 산길이었다.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으뜸 고개였던 새재(650m)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개였다. 하지만 세월은 고개의 지위를 바꾸어놓았다. 세월은 더 낮고, 곧고, 빠르기를 원하는 길의 희망사항에 얼씨구나 맞장구를 쳤다. 그리하여 1925년 이화령으로 이른바 ‘신작로’가 뚫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화현(伊火峴)이었던 이름도 이화령(梨花嶺)으로 바뀌었다. 경북 내륙 문경 지방과 충북 충주 지역은 한층 가까워졌고, 새재는 길의 구실을 잃어버렸다. 더 세월이 흘러 1981년 새재는 경북 도립공원이 되었고 길은 폐쇄되었다. 국도 3호선이 통과하는 이화령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그랬던 이 고개도 1990년대 말 터널이 뚫림으로써 새재가 그랬듯 길의 구실을 거의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등잔 밑 그 어두운 부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어두운 등잔 밑이 왜 이리 밝고 좋은가. 세상에 완전히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은 없다. 지금 우리는 그 사이에 서 있다. 문명의 이기에 편승해 고갯마루에 올라, 첨단 장비를 갖추고, 가장 원시적으로 걷는다. 고급 등산화를 신고 짚신 신고 간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대간 종주의 문화적 의미다. 대간 종주는 문명과 자연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를 걷는 일이다.

볼 것 다 보며 게으른 산행

비에 젖고 있는 조령산(1,017m)을 오른다. 비교적 시계는 좋은 편이다. 비 올 확률 40%에 걸었던 기대는 무너졌지만, 강우량 5~40mm에서 5mm쪽으로 결론이 날 것 같은 조짐이다. 대간은 우리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 두고 있다. 초입은 물봉선 진보라빛 꽃으로 수놓여 있다. 헬기장이 연이어진다. 삼국시대부터 그랬겠지만 지금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주는 모습이다.

▲ 여름과 가을을 잇는 물봉선. 여름의 강렬함과 가을을 소슬함이 적당히 섞여 있다.

물봉선 군락지를 벗어나자마자 길은 된비알로 바뀐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시작한다. 강우량 5~40mm에서 40mm쪽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영락없는 ‘머피의 법칙’이다. 제발 40mm가 넘지만은 않기를…, 하는 쪽으로 기대 수준을 대폭 낮춘다. 마음 속으로 급히 엽서 한 장을 적는다.

“기상청 예보관님께. 가능하면 5~10mm, 혹은 35~40mm 식으로 예보를 낼 수는 없는지요. 5~40mm는 편차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40mm쪽으로 예상하고 집으로 돌아가 벌렁 드러누울 형편이 못되는 저로서는 예보를 들을 때마다 무척 심란해집니다. 설사 그럴 형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래요. 그럴 때면 대부분 쨍 하고 해가 뜨더라고요. 그 때 그 기분 잘 아시죠. 그럼 이만…. 환절깁니다. 비 맞지 마시고요. 늘 건강하십시오.

추신: 제가 보낸 엽서 내용이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99% 웃자고 한 얘기였습니다.”

사실 나는 기상청 공무원의 고충을 잘 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온도 상승 등의 이유로 세계적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반도에 산지가 많은 지형상 예측이 불가능한 국지적 기상현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기상 관련 예산은 OECD 가입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는 것도 안다.

한편 나는 슈퍼컴퓨터의 예측이 빗나갈 때마다 안도한다. 하늘의 일은 인간이 다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문명이 첨단화 될수록 인간은 자연 앞에서 더 몸을 낮추어야 한다. 태풍 해일 쓰나미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태풍 매미와 나비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1시간 반 쯤 빗길을 뚫고 나가자 조령산 정상이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대간 종주 한다는 사람들이 한나절이 되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 신선봉 직전 암릉에서 몸을 돌려 세우자(남쪽으로) 조령산 기슭에서부터 멀리 속리산까지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구름을 어루만지고 있다.

월간山에 GPS 단독종주 산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맹헌영 선배다. 이번 산행의 첫날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먼저 조령산 정상에 올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맹 선배의 타박이 이어진다.

“윤제학씨가 비를 몰고 다니는구먼.”

순간 나는 사진기자를 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틀 전 금강산에 암벽등반 취재를 갔다 왔는데 거기서도 이틀이나 비를 맞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바로…. 그렇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를 몰고 다닌다. 산행 일수가 강우 일수에 근접하는 한 비를 피할 길은 없다.

맹 선배의 말 대로 우리는 ‘불량한 종주팀’이다. 취재 산행의 특성상 운행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가능하면 볼 것 다 보며 최대한 게으른 산행을 하기로 작정을 했다. 이런 산행을 즐거운 산행이라고 우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위험 부담이 없다면 무시로 아이들처럼 해찰을 부리며 즐거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신선봉에서 또 한 번 조망의 성찬을…

조령산 정상에서 새재(조령관, 3관문)를 향한다. 이 구간은 대부분이 암릉으로 조금만 다리에 긴장을 풀어도 엉덩이에 피멍이 들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경쾌하고 조망이 빼어나다. 그러나 지금 그 조망의 즐거움은 구름이 독차지하고 있다.

▲ 신선봉에서 새재로 향하는 대간 길은 줄에 의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아름으로 이어진다.

30분쯤 줄을 잡고 조심조심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나자 신선봉(889m?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 새재 위 마패봉에서 가지 친 신선봉과는 다른 봉우리임) 직전의 암릉에 닿는다. 바람이 세차다. 배낭을 내리고 한숨을 돌리려니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수평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대간 마루 위 허공에 찍힌 바람의 지문이다.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구름은 안개처럼 스멀거리다가 군데군데 무리를 짓더니 총총히 바람을 따라 나선다. 순식간에 구름이 사라지고 대간은 갓 태어난 얼굴을 하고 있다.

“야, 진짜 비 맞은 보람 있네.”

맹 선배의 충청도 억양은 노랫가락을 닮아 있다. 두어 시간 비 맞은 대가 치고 대간의 선물은 너무 크다. 오른쪽으로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 왼쪽으로 괴산의 군자산, 그리고 뒤로는 멀리 속리산의 연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선봉에서 또 한번 조망의 성찬을 즐긴다. 불끈 뿔끈 힘차게 솟아오른 부봉의 연봉들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몇 걸음 더 나아가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월악산의 영봉과 연이은 줄기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백두대간을 통틀어서 오밀조밀한 암릉의 실루엣과 대간의 장쾌한 스케일을 한꺼번에 담은 최고의 조망처다. 지리산의 장중함과 설악산의 화려함을 적절히 섞은 분위기다. 지나치게 대간 중심적인 발상이겠지만, 신선봉 같은 작은 봉우리가 월악산 같은 명산을 거느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깃대봉(821.5m?지도상에는 무명봉)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이슥한 숲길로 바뀐다. 군데군데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이른 가을을 꽃 피워 놓고 있다. 어둠이 산 위로 다 내려앉을 즈음 조령3관문에 닿는다.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쉽게 그칠 비 같지 않다. 맹 선배가 유혹적인 제안을 한다. 수안보 온천장이 지척이라는 것이다. 응원차 동행한 김에 따뜻한 온천물에 목욕을 시켜 주고픈 마음 씀씀이가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빨이 부딪칠 정도로 오한이 드는 터였는데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다. 만장일치로 하산을 결정한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 경우 비는 또 얼마나 고마운 핑계거리인가.

▲ 신선봉 초입의 슬랩 지대를 통과하는 취재팀.

아침까지 비가 그치지 않는다. 다시 3관문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비는 완전히 멎었다. 조짐이 좋다.

문경새재. 하도 높고 힘들어서 새들조차 넘기 힘들었다 하여, 혹은 억새가 많아서, 또는 새로이 낸 길이라 하여 ‘새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고개다. 한 때 우리나라 고개의 대명사였다. 새재와는 털끝만큼도 관련이 없는 진도아리랑에서도 “구부야구부야 눈물이 나는” 고개는 새재였던 것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지지만, 이 고개를 넘게 되면 장원 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聞慶)’ 하여, 벼슬에 뜻을 둔 영남의 선비라 하면 으레 넘었을 고개다.

▲ 마패봉에서 북암문 쪽으로 내려서는 길에서 만난 구절초.

부산의 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가 이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경상도가 영남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이 고개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떨어지면 조곡관(조령 제2관문), 주흘관(조령 제1관문)을 거쳐 문경읍에 닿게 된다.

또한 이 고개는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외적과의 싸움에서 승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은 그 달 26일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는다. 당시 삼도순변사로 충주로 급파된 신립은 부하들과 함께 새재로 가서 지형을 살폈다. 전력의 열세인 아군이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잠복해 있다가 왜군을 덮치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다. 결과는 대패. 신립은 탄금대에 몸을 던지고 조선은 아수라장이 된다. 후세의 사가들은 신립의 주력군이 기마병이었기 때문에 산악전을 피했다고 하지만, 다수의 의견(그것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과 상식을 무시한 리더의 오판이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 신선봉 일대의 암릉은 다릿품으로는 과분한 조망을 선사한다.
고품격 소나무 어루만지며 포함산 바라보다

새재에서 대간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군막터를 지나 마패봉(927m?지도에는 마역봉으로 되어 있으나 현지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린다. 일제 때 지도를 만들 때 오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으로 이어진다. 길은 성벽을 따라 오르다 참나무숲 사이에서부터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숲길은 안개 속에 침묵하고 있다. 아침 산의 적요는 언제나 신비롭다.

마패봉에서 북암문(北巖門)을 거쳐 동암문에 이르는 길은 호젓하다. 동암문에서 대간은 부봉을 서쪽에 두고 평천재에 이르기까지 360도로 휘돈다. 평천재에서부터 허리를 곧추세워 한 봉우리를 세우니 탄항산(856.7m)이다. 언제부턴가 이 봉우리는 월항삼봉으로도 불리는 데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이 산 동쪽에 달목(月項)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형상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싶다.

탄항산 정상을 지나 조망바위 근처 고품격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포함산을 바라본다. 이름 그대로 베를 걸쳐놓은 듯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 아래가 바로 하늘재. 탄항산에서 하늘재까지는 쉬엄쉬엄 가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편안한 숲길이다.

하늘재에서 또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진주의 취재팀 김종현 형과 신동국, 강형복씨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5년 전 이곳을 지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농기구 창고로 쓰던 창고가 산장으로 개조돼 있다. 이름 하여 하늘재산장. 이제 대간 종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됐다. 하늘재산장은 그 아이콘이다.

▲ 베를 깔아놓은 듯한 바위로 덮인 포암산 오름길.
하늘재(520m). 백두대간에 열린 고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름을 단 곳이다.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 고개가 하늘재로 불리게 된지는 모르겠으되 옛 기록상의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이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4)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이 열렸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죽령보다 2년 앞선다.

하늘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툼을 벌이던 곳이다.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길을 열었다. 고구려의 장군 온달은 “계립령,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죽어서 돌아오지 않겠다”며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한편 하늘재는 불교문화가 전해진 길목이기도 했다. 지금도 하늘재 서쪽 괴산의 미륵리나 동쪽 문경의 관음리에는 수많은 불적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현세의 관음과 내세의 미륵을 연결하는 고개여서 하늘재라 불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스라하기는커녕 약간의 고도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납작 엎드려 있는 고개를 하늘재라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언제나 현세가 고달팠던 민중들의 염원이 그 이름에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대미산(1,115m)까지는 5~6시간이면 되는 거리다. 실거리 약 13km로 까다로운 구간도 없다. 일반적으로 대간 종주자들이 반나절에 끝내는 코스다. 야영 계획을 취소하고 그 쪽을 따르기로 했다.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포암산을 오른다.

김종현형, 정상석 앞에 제물을 갖춰 놓고 기다려

포암산은 달리 베(布)바우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상에서 산허리까지의 암릉이 흡사 베로 덮어 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비롯된 이름이다. 희고 우뚝한 모습이 껍질을 벗겨 놓은 삼대 같다 하여 마골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계립산이라는 옛 기록도 있다.

초입의 샘에서부터 트레일은 곧추서기 시작한다. 암릉 전까지 트레일은 심하게 망가져 있다. 이런 경우는 계단이나 다른 보조수단을 설치하는 것이 산을 보호하는 일이 될 것 같다.

▲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절반 쯤에 자리한 포암산 정상에서. 그동안 탈 없는 종주를 허락해준 대간의 정령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취재팀.
쉬엄쉬엄 뒤쳐져 올라 정상에 이르자 깜짝 이벤트가 벌어져 있다. 김종현 형이 정상석 앞에 제물을 갖춰 놓고 기다리고 있다. 거리상으로 대간의 거의 반(실제는 차갓재)에 해당하는 봉우리에서 그 동안 탈 없이 종주를 허락해 준 산신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산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혹자는 미신이라 웃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미신(美信)이라 믿는다. 어차피 먹을 음식, 이런 식으로 먹는 것도 색다르고 맛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결코 교회나 성당 혹은 사찰에서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포함산 정상을 내려서서 관음재까지는 돌계단 같은 암릉이다. 하지만 관음재에서 제천시계(북쪽)로 들어서면서부터 대미산까지는 길이 순하다. 무성한 참나무 숲길로 시야는 조금 답답하다.

대미산(1,115m)은 ‘크게 아름다운 산(大美山)이라는 이름과 달리 둘레에 억새만 무성한 밋밋한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은 문경현지에 ‘문경 여러 산의 할아버지(本縣諸山之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한자 표기는 ‘검푸른 눈썹 산(黛眉山)’이다. 정상 북쪽 기슭에 있는 눈물샘에서 갈증을 달래며 정상을 바라보면 그럴 듯한 이름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눈 위에 눈썹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그런데 대미산(大美山)이라는 이름은 어떤 연유일까. 문경시에서 발간한 자료집에 따르면 1936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에 퇴계 이황 선생께서 명명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날이 다 저문 시간에 다시 하늘재로 돌아온다. 늦은 저녁을 먹고 하늘재산장 평상을 빌려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재에서 하늘을 보며 내일로 간다.

대간 종주, 이제는 문화현상이 됐다

1980년대가 백두대간에 대한 발견기였다면 90년대는 발전기였다. 90년대 이후 수많은 사람들과 산악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종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제 대간 종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됐다. 두 번 이상 종주한 사람들도 많다. 이제 백두대간 종주는 전혀 뉴스거리가 못된다. 그래서 대간 종주는 다시 뉴스거리가 됐다. 전혀 산과 거리가 먼 듯한 문화 예술인이 종주에 나서는가 하면, 뜻밖의 단체나 기관에서 종주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심심찮게 신문 지면에 대간 종주 기사가 오르는 것이다.

하늘재에 생긴 산장은 문화현상이 된 대간 종주의 상징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오로지 대간 종주자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간 능선 위 마을이나 고갯마루에 매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그 전부터 있었다. 대간 종주자만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늘재산장은 오로지 대간 종주자만을 위한 것이다. 산장을 열게 된 동기를 보면 대간 종주가 얼마나 보편화돼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늘재산장의 주인은 1년 반 전 이곳으로 귀농한 젊은 부부(윤성영-이미수)다. 주변의 임야 35,000평을 빌려 고추와 밤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뜻밖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움을 청해왔다. 물 좀 달라, 밥 좀 달라, 하룻밤 재워 달라, 차 좀 태워 달라. 사람이 그리웠던 이들 부부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알고 보니 하나 같이 대간 종주자들이었다. 부부는 차라리 이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농기구 창고를 개조했다. 수세식 죄변기도 갖추어 놓고 누구나 물을 떠 갈 수 있게 마당에 수도꼭지도 달았다.

“대간 종주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서비스도 다 합니다. 실비에 조금만 더 받고.”

마음씨 좋게 생긴 젊은 부부의 말이다. 앞으로 적어도 새재에서 하늘재까지는 물과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종주자들에게는 엄청나게 반가운 일이다(하늘재산장 전화 054-571-8789, 011-9391-8030).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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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문화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났던 고개
조령은 관리, 계립령(현 하늘재)은 보부상과 우마 통행 잦았던 고개

▲ 새재 고갯길에 세워진 3개의 관문 중 제1관문인 주흘관.

백두대간은 기후, 지형, 식생 및 생태 등의 자연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지역, 종교 및 사상 등의 문화사적 측면이 축적되어 있는 거대한 자연·문화복합체계로서, 그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가 백두대간과 도로의 관계다.

전근대시기의 도로는 사람과 정보의 이동 및 물자수송과 통신 등의 경제, 군사, 행정적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로 이용자를 위한 시설과 이와 관련된 문화경관과 취락의 발달을 이끌었다. 특히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새재의 고갯마루를 지나는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옛 도로로서, 여기에는 주흘관 등의 군사적 방어시설과 취락, 역원(驛院), 그리고 사찰 등의 문화경관이 발달했다.

▲ 하늘재.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새재의 고갯마루를 지나는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옛 도로였다.
산맥은 산과 산을 이은 길이지만, 도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며, 문화가 확산 전파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산맥과 도로는 그 속성이 각각 자연과 문화로서 서로 다르지만, 문화의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도로가 산맥을 통과하기도 한다. 한반도에서 백두대간이 가장 큰 줄기로서 자연의 길이라면,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도로로서 문화와 교통의 길이었으니 그 둘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백두대간의 문화사를 형성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겨레는 자연의 길인 산맥도 길(山經)이라고 했고, 문화의 통로가 되는 도로도 길로 일컬었으며, 궁극적인 마음 상태 역시 길(道)이라는 같은 말을 쓴 사실이다. 그래서 자연과 문화와 마음은 서로 만나고 합치될 수 있는 통합적인 코드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한강과 낙동강 권역, 조령·계립령 통해 결속

일반적으로 산맥을 도로와 상관지어서 그 기능적 측면을 살펴보자면, 산맥은 유역권 범위, 혹은 능선 기준으로 해당 지역의 문화와 기후를 나누는 경계가 되지만, 도로와 고갯길은 산맥을 경계선으로 구분된 지역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경관요소가 된다.

▲ 미륵사지에 인접한 역원지.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지형적인 장벽으로서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일 뿐만 아니라 기후적으로도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지역 구분에서도 주요 도로의 고개는 한반도의 지역을 구분하는 기점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지역을 크게 횡적으로는 동서, 종적으로는 남북으로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이자 기준이 되었는데, 알다시피 영동(嶺東), 혹은 관동(關東)과 영서(嶺西), 혹은 관서(關西)라는 지역 명칭도 대관령을 기준으로 한 강원도의 동쪽과 서쪽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영남(嶺南)이라는 말도 계립령 또는 조령 이남의 경상도 전역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통용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편으로 도로는 마치 인체의 핏줄처럼 산맥으로 나뉜 지역을 통합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두대간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구분되던 지역은 수많은 고갯길과 도로로 인해 문명과 정보가 전파되고 취락이 발달해 문화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백두대간을 가름하는 유역권으로서의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은 자연환경이 다르고 역사·문화적으로도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나 두 지역은 영남대로를 통해 결속됐다.

▲ 하늘재 고갯길 아래의 석불입상.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가름하는 백두대간의 도처에 죽령, 벌재, 계립령, 조령, 이화령, 화령, 추풍령 등의 고갯길이 발달해 남북간의 교통로로 이용됐는데, 18세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 중에서 조령과 죽령을 큰 고개라고 하고 나머지를 작은 고개라고 했다. 고대에는 한강 유역과 영남지방 간의 주요 도로가 죽령과 계립령을 통했으나 조선 초에 조령을 개발함에 따라 주요 교통로의 대부분이 충주에 모였다가 조령을 넘어 유곡에 이르고, 이곳에서 다시 상주를 경유해 각지로 분기했다.

조선시대의 도로 중에 가장 중요한 도로는 한양에서 동래를 잇는 간선로인 영남대로인데, 이 영남대로는 백두대간에서 새재(조령), 혹은 하늘재(계립령)를 통과했다. 그래서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여러 역사문화적인 경관이 형성됐다. 조령에는 조선시대 이후로 주흘관을 비롯한 여러 군사적 방어시설이 축조됐으며, 새재와 하늘재 주변 지역인 미륵리, 관음리 등에는 고갯길과 관련한 관음, 사점, 황정, 안말 등의 영하취락(嶺下聚落)이 발달했다. 그리고 하늘재 아래에는 도로와 관련된 교통시설의 유적지가 현재의 미륵사지 부근에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역원시설과 종교시설의 결합은 고려시대 이후 주요 고갯길에 입지하는 사찰이 역원의 역할도 겸해 담당했던 양상을 표현해준다.

조선조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역할

백두대간의 고개를 넘는 영남대로의 경로는 역사적으로 발달과정을 겪었다. 고대의 교통로로서 일찍이 계립령은 156년에, 죽령은 158년에 길이 뚫렸으며, 조령은 조선 초기에 와서야 개척됐다. 삼국시대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 화령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이었으니 인근에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은 한강, 낙동강, 금강의 상류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력이 충돌한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우역제(郵驛制)를 근간으로 하는 간선도로망이 체계화됐는데, 개성을 중심으로 서북-동남 방향과 동북-서남 방향으로 X자형을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 개성에서 동남쪽의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중요했다.

▲ 조령 아래의 교구정지. 신ㆍ구임 경상도 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했다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간선교통로 중에서 제1로는 죽령을 통과해 안동을 경유하고 경주에 이르렀으며, 제2로는 계립령을 통과하여 예천에 이르고 안동에서 제1로와 합류했다. 제3로는 역시 계립령을 넘어 문경과 상주를 경유했고, 제4로는 추풍령을 지나 김해로 통했다. 죽령과 계립령을 통과하는 제1로와 제2로는 고려시대에 중요한 도로로 기능했으며, 고려 후기(1361년)에 수십만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선택한 피신길이기도 했고, 조선 초에는 왜의 사신이 상경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간선도로망의 체계가 완비됐고,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서 아홉 개의 간선도로가 확정됐다. 제1로는 파주ㆍ평양ㆍ정주를 거쳐 의주로 가는 길이며, 제2로는 철령을 넘어 함흥ㆍ길주ㆍ경흥을 지나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고, 제3로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고 삼척ㆍ평해에 이르는 길이며, 제4로는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ㆍ부산에 이르는 길이고, 제5로는 제4로의 문경 유곡역에서 갈라져 상주ㆍ진해로 통영에 이르는 길이며, 제6로는 공주ㆍ전주ㆍ남원ㆍ진주로 통영에 닿는 길이며, 제7로는 제6로의 삼례에서 갈려 정읍ㆍ나주ㆍ해남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길이고, 제8로는 제6로의 소사에서 갈라져 평택을 지나 보령에 이르는 길이며, 제9로는 김포를 지나 강화로 가는 길이었다.

이렇듯 문경의 계립령은 고려 말까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나 조선 초에 조령을 공식적인 길로 개발함에 따라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계립령의 위치에 관해서는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는데, 현재 수안보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초입의 고개를 지도상에서는 지릅재, 또는 계립령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미륵리와 문경시 갈평리 사이의 고개를 하늘재로 기입했는데, 하늘재로 불리는 이 고개를 사실상의 계립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 미륵사지. 하늘재 아래 미륵사지에는 옛 도로와 관련된 교통시설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방위상의 문제를 고려해 조령 외의 모든 고갯길을 폐쇄하고자 했으나 계립령은 역사가 길고 통행자가 많아 남겨두기로 했는데, 조령이 관리 및 일반 여행자의 통행이 잦았던 것과 달리 계립령은 보부상과 우마(牛馬)의 통행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의 조정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외교사절인 통신사 역시 총인원 300~500명에 이르는 인원이 한양에서 출발해 영남대로를 거쳐 부산에 도착해 일본으로 향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역로 주변의 민폐를 줄이기 위해 정사(正使)는 조령로, 부사(副使)는 죽령로, 종사관(從事官)은 추풍령로로 나누어 귀환하기도 했다.

일제 때 철도 건설 이후 고개 기능 급속 쇠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령은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시됐으며, 많은 관방이 설치됐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령의 관문들이다. 조령 일대는 주흘산ㆍ부봉ㆍ기산ㆍ조령산 등이 이루는 천험의 요충지로서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문경관문을 구축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6월에 설치할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경제사정과 조정 내에서의 논란으로 설치가 지연되다가 그 이듬해에 비로소 조곡관에 중성(中城)을 개설했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중성을 크게 중창하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초곡성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조령산성을 축조했다.

▲ 미륵사지에서 하늘재 가는 길의 석불두상.

조령 일대에는 조령원(鳥嶺院), 동화원(東華院) 등의 원터와 진터, 군창(軍倉) 터, 신ㆍ구임 경상도 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했다는 교구정지(交龜亭地), 고려 말 공민왕이 거란의 난을 피하기 위한 행궁이 있었다는 어류동(御留洞) 등 사적지가 있다. 그 중에서,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서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했고,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그리고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한 제2관문은 중성, 혹은 조곡관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훼손되어 1978년에 복원했다.

백두대간의 허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강유역권과 낙동강유역권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영남대로는 19세기 말까지 한양과 경상도 지방을 연결하는 공로(公路)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일제의 철도 건설로 말미암아 기능이 약화됐으며, 이윽고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그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난 고갯길을 넘으면서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진 유적과 경관에 젖노라면,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은 서로 접속해 통합됐음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의 문화생태적 경관에서 산맥이 뼈대라면 도로는 신경이자 핏줄이었던 것이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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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지형지질

암석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며 조령산 첨봉 탄생했다
수옥폭포는 화강암과 석회암층간 차별침식으로 형성

▲ 이화령에서 조령으로 이어지는 조령산릉은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산릉의 서사면으로 유입되는 물들은 달천을 타고 남한강으로 이어지고, 동사면으로 유입되는 물은 조령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 사이에 우뚝 솟은 조령산(1,017m)은 백두대간의 허리쯤에 마루 능선을 이루는 산으로 주변에 위치한 희양산, 백화산, 신선봉, 마패봉, 부봉, 주흘산, 월악산 등 1,000m에 가까운 고산들과 함께 어울려 험준한 첩첩산중을 이룬다.

조령산은 나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새재(조령·642m)를 품고 있어 조령산이라 이름했으며, 또 그로 인해 더 잘 알려진 산이기도 하다. 정상 북쪽의 새재와 남쪽의 이화령 사이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위치에 있으며, 능선 상에 각기 높이를 달리하며 하늘로 치솟아 오른 크고 작은 칼날 같은 암봉과 암릉이 연이어져, 단연코 그 산세의 멋은 바위에서 찾을 수 있다.

조령산의 정상 북쪽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암릉 지대는 바위벼랑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고만고만한 여러 개의 암봉들이 푸른 소나무와 어울리며 연달아 피어올라 있어 마치 설악산의 용아장성과 같은 아름다운 산세를 느끼게 한다. 그 규모와 형세가 설악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골짜기 곳곳에는 넓은 암반과 암석 사이로 맑은 소와 폭포들이 넘쳐나 조령산에 발을 들이면 암산(巖山)으로서 지닌 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령산은 동편으로 마주하고 있는 주흘산과 사이에 긴 회랑을 따라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새재길이 놓여 있다. 옛 선조들이 숱하게 넘나들며 삶의 애환과 숨결이 묻어 있는 고갯길 새재를 품고 있어 조령산은 더욱 정감이 가는 산이다.

백악기 말에 관입한 월악산 화강암체의 일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조령산의 멋은 정상 너머로 북쪽 능선을 따라 신선암봉과 깃대봉을 비롯해 무명의 아기자기한 바위덩어리들이 낙타등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다양하면서도 험준한 암릉 지대를 이룬다는 점이다. 칼날 같이 매우 가파른 산세를 이루기 때문에 매년 조난사고가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곳 조령산 일대다. 매년 조난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경북 지역 사고의 90%가 이곳에 집중되고 있다.
조령산 정상에서 북쪽의 백두대간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산이 불타는 형국임을 목격할 수 있다. 소나무 군락 사이로 하얗고도 분홍색을 띤 육중한 바위덩어리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조령산 또한 남쪽의 속리산, 북쪽의 월악산과 함께 소백산맥을 대표하는 화산(火山)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령산은 커다란 하나의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진 암체를 형성하고 있다. 조령산에 이렇게 넘쳐나는 바위덩어리들은 다 어디서 온 것들이며,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일까?

조령산 일대에 넘쳐나는 바위덩어리들은 모두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뜨거운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따라 솟아오르다가 지하에서 굳어 형성된 암석으로, 우리나라 전 국토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화강암은 거의 모두가 한반도 땅덩어리가 화산과 지진으로 요동치는 불의 시대를 맞고 있었을 중생대에 지하에서 관입한 마그마가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중생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화성활동이 있었는데, 이곳 조령산에 분포하는 화강암은 백악기 말 약 9천만~8천만 년 전 관입해 형성된 담홍색의 불국사 화강암에 속한다.

희양산에서 조령산을 거쳐 신선봉~마패봉~부봉~주흘산~포암산~만수봉~월악산 등으로 이어지는 곳에 분포하는 화강암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이들을 함께 묶어 월악산 화강암체라고 한다. 그리고 조령산이 위치한 월악산 화강암체 남쪽으로 백화산~희양산~대야산~조항산~청화산~속리산 등에 분포하는 화강암(이를 묶어 속리산 화강암체라고 함) 또한 월악산 화강암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화강암에 속한다.

절리작용에 의해 독특한 암산 형태 갖춰

조령산과 속리산에서 만나게 되는 화강암들은 비교적 얕은 지하 3~4km 부근에 관입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런 화강암이 관입 이후 화강암을 덮고 있던 3~4km의 피복물질들이 모두 깎여나가며 지표로 드러났다.

▲ 조령산릉의 헬기장. 이화령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구간은 매우 완만한 능선으로 육산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정상을 지나면서 조령산은 그 얼굴을 바꿔 바위들이 천국을 이루는 전형적인 암산의 형태를 드러낸다.
화강암을 덮고 있던 피복층이 빗물, 지하수, 바람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고, 지반의 융기에 의해 화강암이 지표 가까이에 올라오게 되면 압력의 하중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부피가 팽창하게 된다. 이때 팽창에 의하여 암석에는 금과 균열, 즉 절리가 발생한다. 이때 절리는 수직 또는 수평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한다.

이후 이러한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여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팽창과 압축을 가함으로써 암석은 점차 분리, 분해된다.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나중에는 빗물과 바람 등에 의해 지표물질들이 모두 침식·제거되면 풍화를 받지 않은 나머지 암석들이 지표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모습의 암산 형태를 갖춘 지금의 조령산 모습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기암괴석과 거대한 암봉들은 모두 화강암에 작용한 절리의 형태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산세로 보아 이화령에서 조령산 정상까지는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형세인 반면, 정상 북쪽으로는 거칠고 험한 남성적인 형세를 이룬다. 이는 정상 남쪽으로 위치한 화강암들에서는 절리의 발달과 조직이 치밀할 뿐만 아니라 침식과 풍화가 보다 빠르게 진전되어 거석이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정상에 서면 산릉을 따라 우뚝 솟아오른 신선암봉과 깃대봉, 제3관문 너머로 멀리 마폐봉과 신선봉, 그리고 그 뒤로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들 암봉 모두는 북한산의 인수봉과 같은 돔(dome) 모양의 거대한 단일 암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화강암에 발달한 절리가 암석면과 평행한 수평 방향으로 탁월하게 나타나 침식과 풍화가 수평 방향으로 집중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암석이 양파 껍질처럼 층상으로 벗겨져 나가면서 끝이 뾰족한 형태의 첨봉으로 된 것이다.

조령산과 동으로 마주한 주흘산이 위치한 곳은 화강암 관입에 앞서 이곳이 바다였을 고생대에 퇴적된 석회암층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 층을 뚫고 화강암의 관입이 이루어졌다. 조령산 서사면 충주와 문경을 잇는 3번 국도 변에 위치한 수옥폭포는 바로 화강암과 석회암층의 경계면에서 암질 간의 차별침식으로 형성된 폭포다.

▲ 수옥폭포는 조령산 일대의 화강암과 석회암층의 경계면에서 암질간의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된 폭포다.
조령산 지역엔 고개 유난히 많아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산줄기의 두 꼭지점 사이, 이 고을 저 고을을 넘나드는 산길의 정수리, 바로 곳과 곳을 연결해주는 고개다. 그래서 산을 넘는 고개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산을 넘는 고개 이름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어느 산들을 막론하고 고개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산과 고개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가운데 조령산이 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에 산이 많은 곳임을 증명이라고 하듯 유난히 고개가 많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이의 계립령(鷄立嶺·하늘재, 지릅재),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사이의 은티재,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문경군 문경면 상리 사이의 이화령(梨花嶺·이우릿재),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문경군 농암읍 농암리로 사이의 고모령, 그리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고개이름으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문경군 문경읍 상초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놓인 문경새재, 즉 조령이 있다.

새재 협곡은 단층선 사이로 차별침식 이뤄져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새재를 둘러보고 천연의 요새를 이룰 만큼 뛰어난 지세를 지니고 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립(申砬) 장군은 조령의 지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쳐들어오는 적군에게 어이없이 길을 내주고 충주 달내(달천)를 뒤로 한 채 탄금대에다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만약 신립 장군이 조령 협곡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더라면 임진년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뒤따른다. 그 만큼 조령이 깊고 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정상 바로 아래로 조령 제1관문이 위치한 곳에 고려 태조 왕건 촬영장이 바라다 보인다. 새재의 깊은 곳은 단층선을 따라 발달한 차별침식으로 골이 깊게 패여 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을 따라 3.5km 정도 들어가면 조선 숙종 34년(1708)에 쌓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이, 그리고 여기서 3km 더 올라가면 제2관문인 조곡관이, 이곳에서 3.5km 더 올라가면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세워져 있다. 협곡의 양안은 층암절벽을 이룬 암석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계곡 곳곳에는 크고 작은 암석들과 넓고 큼직한 암반들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깊은 협곡을 이루게 된 이유는 바로 이곳의 땅덩어리에 발달한 단층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 약 9천만 년 전 월악산과 조령산 일대에 화강암이 관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단층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신생대 3기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 땅덩어리가 경동성 요곡운동을 거치며 지반이 솟아올라 지질구조선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이때 이곳 땅덩어리들이 서로 밀고 밀리며 일부는 내려앉고 또 일부는 올라가는 등 복잡한 지각운동 과정에서 많은 단층선들이 생겨났다.

이후 발달한 많은 단층선들 가운데 특히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한 주 단층선을 중심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하천이 흐르기 시작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며 침식이 진행되어 지금의 깊은 하곡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경부운하 건설 구상
백두대간 산자락을 뚫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길목에 자리 잡은 고갯길이었던 새재(조령)는 영남 지방에서 산출되는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 각종 영남의 산물이 지났던 길이다. 이 새재 길을 넘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다. 이와 같이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새재는 고개 길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상태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 새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새재가 놓여 있는 백두대간을 뚫어 북쪽의 한강과 남쪽의 낙동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계획이 몇 해 전부터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연구소에 의해 간간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물류비용의 절감은 중요한 문제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드는 물류 비용이 부산에서 LA까지 가는 비용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렇듯 물류 비용이 많이 드는 도로 운송 체계인 데다 경부 대동맥 도로가 과포화 상태이며, 도로 확장을 하려고 해도 그 보상비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이어서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물류난을 극복하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 운하를 건설하자는 안이다. 한강 수계의 남쪽 끝자락으로 충주호로 흘러드는 최상류 물길인 월악산의 송계계곡의 동달천과 낙동강 수계의 북쪽 끝자락으로 문경의 새재길과 나란히 흐르는 조령천을 연결하는 운하용 터널을 뚫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자는 것이다.

운하 건설 계획 상의 후보지인 새재가 위치한 이곳은 조령산을 비롯해 월악산, 주흘산 등 1,000m가 넘는 고산들이 험준한 첩첩산중을 이루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산을 뚫어 배가 통과토록 하는 터널 운하의 건설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경부운하 건설과 관련해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한 세종대학교 지구과학과 정태웅 교수(지구물리학)에 의하면 한강과 낙동강 최상류를 연결하려면 해발 고도 125m에서 20.5km의 터널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험준하고 경사가 급한 지형을 통과하기 위해 한강과 낙동강 양쪽 산사면의 비탈에 여러 개의 갑문식 댐을 계단식으로 건설해 고도차를 극복함으로써 배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방식으로 험준한 고산들로 밀집한 소백산맥의 허리를 넘어간다는 것이다.

만약 경부운하가 건설된다면 운임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으므로 물류비용의 절감 효과가 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제점 또한 적지 않게 지적되고 있다. 우선 험준한 산악지형과 지질적으로 터널이 석회암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고도의 난공사 문제, 그리고 식수원이 수로로 사용되는 환경 문제 등 여러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국내 토목공학 기술진들은 해발 406m를 넘고 있는 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유럽의 RMD(라인~마인~도나우) 운하의 예를 들며, 국내의 축적된 토목공학 기술력으로 공사의 어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물 부족 국가군으로 분류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운하의 건설은 많은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어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자강의 풍부한 물을 물 부족 지대인 북경쪽으로 돌리는 중국의 야심적인 대수로 공사인 ‘남수북조(南水北調)’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5배가 넘는 5,000km에 달하는 대수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치산치수가 국가의 운명과 발전을 결정짓는 중대사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뚫어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려는 경부운하의 건설 계획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여길 일도 아닌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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