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역사문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은 그린벨트의 효시
‘황장산’은 보통명사인 황장봉산이 변한 것

▲ 황장산은 황장봉산의 약어다. 조정의 목재 수급을 위해 질좋은 소나무를 백성들이 벌목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곳이다.

백두대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산들은 자연생태적 경관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내력과 사회적인 의미로 구성된 문화경관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산지 보전 및 산림 정책과 관련한 금산(禁山)과 봉산(封山) 제도는 백두대간이 거느리고 있는 여러 산들의 문화사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개념이자 현재의 산지 보전 및 관리 정책을 조명할 수 있는 의의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러한 봉산 중의 하나가 경북 일대와 강원도에서 다수 나타나는 ‘황장산’이라는 이름의 산이다. 영남대로와 백두대간이 만나는 하늘재에 인접한 문경시 동로면에는 황장산(黃腸山·1,077m)이 있으며, 산 초입인 동로면 명전리 옥수동의 논 가운데에 ‘봉산(封山)’이라는 석표(지방문화재자료 제227호)가 있다.

황장이라는 글자의 뜻은 소나무 중에서 속이 황색을 띤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목재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조정에서는 주로 이 황장목으로 왕실에 필요한 관을 만들었고, 황장목의 확보를 위해 특정한 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엄격히 관리했으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려고 경계 표식을 세웠으니, 이것이 황장금표이다.

백두산~북악산 주맥에 풍수적 금산 도입

역사적으로 금산(禁山)제도의 기원은 조선 초기에서 비롯되는데, 한양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산(북 백악산, 남 남산, 서 인왕산, 동 낙산)의 지맥을 보전하기 위해 채석이나 벌목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집을 짓거나 무덤을 들이는 것을 금했다.

금산정책은 세종 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는데, 그 형태는 주맥(主脈)에 대한 보토(補土), 소나무 심기, 나무 베기나 돌 캐기 금지 등으로 실행됐다. 세조 9년(1463)에는 백두산에서부터 철령-강원도 회양부 남곡-금성현의 마현과 주파현-낭천의 항현-경기도 가평현 화악산-양주 오봉산-삼각산 보현봉-백악에 이르는 주맥 모두에 대해 돌 캐는 일을 금하도록 했으니, 이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백두대간 보전법의 효시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조선시대 금산제도는 궁성의 풍수적 지맥 보호 및 산지 보전에 주요한 목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오늘날 대도시 주변의 그린벨트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풍수적 목적의 금산 제도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지나면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목재 공급을 위한 봉산 제도로 시행되는데, 대략 조선조 ·영정조를 거치면서 봉산이라는 명칭이 금산을 대신해 쓰이다가 순조 때에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봉산이 금산을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조정에서는 궁실의 건축, 선박의 건조, 관곽과 신주의 조성을 위해 목재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는데, 따라서 산림의 관리 및 정책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봉산이 조선 후기에 중요하게 지정 관리됐을까? 봉산 등장의 배경에는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위로부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혼란으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의 지방 산림에 대한 관리 및 통제력이 약화되어 산림제도를 새로이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한편 아래의 민간에서는 건축, 조선, 관곽 제작 및 온돌의 보급과 화전의 개간으로 인해 목재의 수요가 증가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숙종 때부터 조정은 산림에 대한 관리 정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산은 선박 축조와 건축에 필요한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정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봉산을 봉송산(封松山), 의송산(宜松山), 송전(松田), 혹은 송산(松山)이라고 했으며, 봉산의 분포지가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를 이용하는 배를 만드는 것 외에도 봉산의 종류에는 율목봉산(栗木封山), 진목봉산(眞木封山), 황장봉산(黃腸封山), 삼산(蔘山), 향탄산(香炭山) 등이 있었다. 그 중에 율목봉산은 영조 21년(1745)에 처음 하동과 구례에 지정됐으며, 밤나무재를 주로 생산했는데, 그것으로 신주(神主)와 신주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진목봉산은 참나무류의 상수리나무로서 배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쓰였으며, 경남 고성에서만 지정됐다. 기타 특수한 형태로 주요 임산물의 산출지를 봉산한 것이 있는데,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은 산삼 확보를 위하여 봉산으로 지정됐고, 대구 팔공산은 제사에 쓰이는 향나무를 배양하기 위해 지정 관리되기도 했다.

특히 황장봉산은 주로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재궁용(梓宮用)의 황장목 소나무를 생산하는 곳으로 지정됐으며, 예조(禮曹)에서 봉산안(封山案)을 가지고 관장했다. 황장목은 우리나라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이 누런 색을 띤,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뿐 아니라 능실(陵室)을 축조하는 데도 쓰였고, 건축 용재로도 활용됐다.

영조실록의 영조 원년 8월22일 기사에 의하면, ‘태묘(太廟)가 좁아 다시 봉안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3칸을 더 지어야하는데, 기둥과 대들보의 재목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양남(兩南)의 섬 중외(中外)에 재궁으로 쓸 황장목을 가져와 써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는 사실로 보아 종묘를 증축하면서도 황장목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목재 운반 용이한 곳을 봉산으로 지정

황장봉산의 분포지를 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강원도에 가장 많이 지정됐고, 그 다음이 경상도임을 알 수 있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영덕, 봉화, 안동, 예천, 영양, 문경에 14곳이 황장봉산으로 지정됐고, 전라도에는 순천, 강진, 흥양 3곳이 지정됐으며, 강원도에는 금성, 양구, 인제 등 19개 고을에 43곳이 지정됐다고 했다.

이렇게 봉산의 지리적인 분포지가 대부분 도서나 해안가에 밀집하고 있는 것은, 봉산의 용도가 주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의 확보에 있었고, 당시는 험난한 산지를 통해 무거운 목재를 운반하기는 불가능했으므로 물길을 이용한 운반이 가장 일반적인 운재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황장봉산은 왕실의 필요에 의해 지정된 것인 것만큼 금양(禁養), 유지 관리, 벌채에 이르기까지 법전에 규정되고 있었다. 속대전(續大典, 1746)에 적기를, 전라도에서 산출되는 황장목은 바깥 재궁의 용도로 취하고,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생산되는 황장목은 안 재궁의 관재로 쓴다고 했으며, 또 황장봉산에서 나무를 채취할 경우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해 강원도의 경우는 5년에 한 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10년에 한 번 채취하여 재궁을 선택하도록 하며, 필요한 양은 때에 따라서 정하도록 했다.

황장봉산에는 금표를 세워서 일반인들의 산림 훼손 및 소나무 채취를 국가적으로 금하고 엄격히 관리했는데, 이를 어기면 엄중한 형벌에 처했다. 수교집록(受敎輯錄, 1698) 형전(刑典) 금제(禁制)조에는, ‘황장목, 선재소(船材所)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와 집 짓는 자는 곤장 1백에 3천리 밖으로 유배시킨다’고 엄격한 규정을 내리고 있으며, 황장목의 관리에 있어서도 ‘황장목은 경차관이 친히 산에 올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봉하고 숫자를 헤아린다. 혹 사사로이 벌채한 곳이 있거나, 관에서 지시사항을 다하지 않거나, 목수로부터 뇌물을 받고 숨기려했다가 탄로 나면 수령을 파직하고 감관(監官) 이하는 변방 멀리 유배시킨다’고 했다.
이러한 형벌은 더욱 강화되어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는 ‘봉산의 큰 소나무를 10주 이상 벤 자는 효시(梟示)하고, 10주 이하인 경우에는 감사(減死) 정배(定配)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황장봉산의 소나무 1주를 벤 자에 대해 곤장 일 백에 3년 복역에 처했다’고 할 정도였다.

기록에는 대미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

▲ 조선조 봉산과 황장봉산의 위치(<문화역사지리>. 2002,이기봉).
황장봉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황장금표는 이곳 옥수동 외에도 몇 개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황정골과 법흥리, 인제군 북면 한계리 등지에 있으며, 그 중 원주시 학곡리의 금표는 구룡사 입구에 소재하며, 자연석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면 문경의 황장산은 언제 봉산으로 지정됐으며, 봉산의 범위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문헌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문경현지(聞慶縣誌, 1871)에 의하면 ‘황장봉산-강희 경신 6년(1680년)에 봉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경의 황장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18세기 중엽)에 나오는데, 여기서 ‘황장봉산은 대미산(黛眉山) 아래에 있으며 주위로 둘레 10리’라고 했다. 여기서 대미산(1,145m)은 현 문경의 황장산 서쪽으로 인접해 충북 제천시와 경북 문경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역시 백두대간의 능선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대미산(大美山)이라는 다른 한자 이름으로 바뀌었다.

문경의 황장산에서 벌채된 황장목은 육로로는 영남대로에 해당하는 하늘재를 통과했고, 수로로는 인근의 남한강 지류인 동달천을 통해 조정으로 운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황장산의 지정은 목재의 운반에 용이한 교통로와의 접근성도 중요한 인자로 고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황장산과 황장목에 얽힌 조선시대의 문화사와 그 지리적 분포를 살펴보았지만, 이러한 조선시대의 금산 및 봉산 제도는 산지 보전 및 산림 관리 정책의 기원적인 형태로서 오늘날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지도> 출처: 이기봉, 2002, 문화역사지리, 14권 3호.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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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식생

그 많던 황장목 다 어디 갔나?
희귀식물 한라부추·좀고채목·회목나무 자라…미국쑥부쟁이·미국자리공도 침투

▲ 안산다리 마을에서 작은차갓재를 향해 올라가다 만난 억새 군락. 뒤쪽의 뾰족한 봉우리는 황장산 정상 북서쪽에 있는 백두대간의 묏등바위다.

우리나라 산들 가운데 이름이 식물과 관련 있는 산은 거의 없다. 동네뒷산이라면 그곳에 어떤 식물이 많이 날 경우에 그 식물이름을 붙여서 ‘엄나무산’, ‘느티나무산’, ‘피나무산’, ‘뽕나무산’ 등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규모가 있는 큰 산 이름이 식물이름에서 유래하는 경우는 찾아보기 어렵다.

황장산이라는 산 이름은 식물과 관련이 있다. 황장목(黃腸木)이 많이 나는 산이라는 데서 유래한 것인데, 황장목이란 속이 노란 소나무를 말한다. 소나무나 소나무의 변종인 금강소나무는 300년 이상 되면 속, 즉 심재(心材)가 노랗게 변하는데, 이것을 창자에 비유해 황장목이라 일컫는다.

왕실에서만 사용하는 ‘황장목’ 자라던 산

꼬리 진달래 충북, 경북, 강원 및 평북에 자라는 떨기 나무로, 참꽃나무겨우살이라고도 부르며, 꽃은 6~7월에 핀다.
세종실록(1440년)에는 ‘천자의 곽은 황장으로 하는데, 황장은 소나무의 속이다. 흰 재목은 습한 것을 견디지 못해 속히 썩는다’라고 적혀 있다. 이처럼 황장목은 임금님의 관이나 궁궐의 목재로서 사용되었는데, 결이 곧고 단단하여 뒤틀리지 않으며 잘 썩지 않는 최고의 목재이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왕실에서 쓰는 목재였기 때문에 이 나무가 많이 나는 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일반인의 벌채를 금지했다. 조선 후기의 법전인 속대전(1746년)에 의하면 당시에는 경상도에 7곳, 전라도에 3곳, 강원도에 22곳의 황장봉산이 있었다고 한다. 황장산은 숙종 6년(1680)에 봉산으로 지정되었다.

황장목 보호를 위해 지정된 이런 산들에서는 벌채를 금지한다는 표지가 세워졌는데, 치악산 구룡사 입구의 자연석에 새겨진 ‘황장금표(黃腸禁標)’ 등이 그것이다. 이런 금표와 관련하여서도 황장산은 아주 특별하다. ‘봉산(封山)’ 표석이 현존하는 유일한 산이기 때문이다. 이 봉산 표석은 화강암을 다듬어 비석을 만들고 ‘封山’이라 음각하였는데, 황장산 자락인 동로면 명전리의 논 속에 묻혀 있다가 1976년에 발견되어 다시 세워졌다.

개쑥부쟁이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수십 개의 꽃이 모여서 한 송이처럼 보이는 머리모양꽃이 된다.
황장봉산으로 지정된 이후에 황장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지만, 이전부터 이 산에는 다른 이름이 있었다. 대동여지도와 산경표에는 모두 작성산(鵲城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황장산보다 먼저 불리던 이름이다. 산 동쪽의 골짜기인 문안골 초입에 있는 ‘작성’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작성(鵲城)은 고구려 변방의 성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고 있는데, 문안골 초입에 있는 성문 부분은 문만 없을 뿐이지 문을 달았던 돌기둥 등이 원형에 가깝게 보존되어 있다. 이 성문 안쪽 골짜기라는 뜻으로 ‘문안골’이라는 이름도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황장목으로 이름 높은 산, 황장산 식물탐사는 황장목이 지금 얼마나 많이 남아 있을까 하는 궁금증을 안고 시작된다. 울진의 소광리 숲에서와 같은 큰 소나무들을 만날 수 있을까? 문경시 동로면 생달리의 안산다리(안생달) 마을. ‘안쪽에 있는 산다리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마을은 바깥산다리(바깥생달) 마을의 안쪽 깊숙한 곳, 백두대간 차갓재 남쪽 바로 아래에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서 황장산 식물탐사를 시작했다.

미국가막사리 북미 원산의 귀화식물로, 작은차갓재 부근의 헬기장과 정상 등에 올라와서 자라고 있다.
안산다리 마을을 벗어나서 백두대간의 작은차갓재를 향해 나서자마자 가을들녘을 대표하는 토종꽃인 산국이 노란 꽃망울을 터트리며 반긴다. 계곡 주변에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잎과 꽃에서 나는 향기가 일품인데, 국화향기 바로 그것이다. 곧 까실쑥부쟁이, 개쑥부쟁이, 구절초 등이 눈에 띈다. 화려한 자주색 꽃을 피운 꽃향유와는 달리 작고 희미한 색깔의 꽃을 피워 주목을 끌지 못하는 향유가 꽃향유와 함께 자라고 있다.

토종 쑥부쟁이들을 밀어내며 전국으로 퍼지고 있는 미국쑥부쟁이도 등산로 가에서 세를 과시하고 있다. 마을 부근이어서 밭을 일구는 등 자연성을 찾아볼 수 없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는 지역이지만, 간간이 아름드리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 게 이채롭다. 예전에 탄광이 있던 곳까지는 꽤 넓은 우마차로가 나 있다. 탄광 자리에는 빈터가 있고, 이곳에서 무리 지어 자라고 있는 억새 너머로 황장산 정상 부근의 한 봉우리가 올려다보인다.

배초향 전국의 산과 들에 자라는 꿀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집에서 `방이풀`이라 부르며 재배하여 향신료로 사용하기도 한다.
인위적인 간섭이 많았던 곳이라는 것은 칡이나 미국자리공이 자라는 것을 보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산국 옆에서 늦은 꽃을 피운 배초향이 남아 있다. 잎에서 강한 향기가 나므로 이것을 추어탕 등의 음식에 넣어 먹는데, 여러 지역에서 방아풀이라 부른다. 분류학적으로 방아풀이라는 다른 식물이 있기 때문에 가끔 둘을 혼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인진쑥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유명한 더위지기가 꽃을 피우고 있지만, 쑥 종류여서 꽃은 그리 예쁘지 않다. 잎에서 누린내가 나는 누리장나무가 열매를 익히고 있는데, 열매와 꽃 모두 곱다. 흰 꽃이 핀 정령엉겅퀴도 몇 포기 자라고 있다.

억새, 까실쑥부쟁이, 개쑥부쟁이, 산국 등 꽃이 크고 화려하거나 키가 커서 눈에 잘 띄는 식물들을 한참 관찰하고나서 발 아래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귀한 식물 하나가 발견되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기는 하지만 석회암 지역 외에서는 그리 흔하지 않은 자주쓴풀이다. 오직 한 포기만이 자라고 있었는데, 키가 40cm에 이를 정도로 크고 많은 꽃을 단 채 건강하게 자라고 있었다.

탄광 자리를 벗어나자 길은 곧 등산로답게 작아진다. 오른쪽에는 작은 계곡이 흐르고 있는데, 계곡 주변에는 산뽕나무, 당단풍나무, 함박꽃나무, 물푸레나무, 졸참나무, 신갈나무, 고로쇠나무 같은 큰키나무와 그 아래에 생강나무, 고추나무, 노린재나무 등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들 나무를 감고 올라간 오미자는 붉은 열매를 익히고 있다. 숲 바닥에는 홀아비꽃대, 투구꽃, 노랑갈퀴, 병조희풀 등이 자라고 있다. 홀아비꽃대가 많이 보이는데, 이 지역에서는 봄철에 어린잎을 나물로 먹는다고 한다.

산국 전국의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풀이다. `들국화`라고 부를 만한 식물 가운데 하나다.
계곡의 나무들과는 달리 사면쪽으로는 일본이깔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이 조림지는 백두대간의 작은차갓재에 이를 때까지 계속된다. 조림할 때 함께 들어온 줄딸기 등이 조림지 바닥에 자라고 있을 뿐 다른 큰키나무나 떨기나무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어떤 곳에서는 조림지 바닥을 주름조개풀이 완전히 덮고 있는 모습이 관찰되기도 했다. 주름조개풀의 열매가 한창 익을 때여서 그 밑을 지난 후에는 바지에 온통 끈적끈적한 열매가 달라붙기 일쑤다.

안산다리에서 1시간여만에 올라선 백두대간 작은차갓재에서는 해발 866m의 높이를 느낄 수 없었다. 잣나무가 간간이 섞인 일본이깔나무 조림지이고, 키 작은 나무들이 자라고 있을 뿐이며, 바위가 없이 흙으로만 이루어져 경관으로도 특이한 점이 없기 때문이다.

작은차갓재 바로 위쪽에는 헬기장이 있다. 그리 크지 않은 졸참나무가 헬기장을 둘러싸고 있고, 억새도 자라고 있다. 고사리, 달맞이꽃, 망초 등 저지대에서 올라온 식물들과 함께 미역취, 참산부추, 용담 등도 몇 포기 자라고 있다. 참산부추는 산부추와 비슷하지만 잎의 단면이 삼각형이 아니라 납작하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산부추에 비해 더욱 흔하게 볼 수 있다. 용담은 이곳 헬기장의 다른 식물들에 비해서 귀한 자생식물이라 할 수 있는데, 헬기장을 만들며 훼손된 곳에서 살아남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부 바위지대에 한라부추 등 희귀식물 자라

산수유 황장산 자락의 동로에서 재배하고 있으며, 11월 초순 잎이 지고 난 후까지 열매가 나무에 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헬기장을 지나자 바로 잣나무 조림지다. 수령 10년쯤 되어 보이는 잣나무들이 빽빽하게 심겨져 있는데, 이 때문에 대낮에도 컴컴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숲 바닥에서 자라는 풀은 찾아볼 수 없다. 침엽수인 잣나무가 떨어뜨린 낙엽에서 내뿜는 물질이 다른 식물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데다가 해까지 들지 못하니 숲 바닥에서 풀이 자랄 수 없는 것이다.

이 잣나무 조림지를 벗어난 지역부터 정상쪽으로는 낙엽활엽수로 이루어진 자연림이다. 수령은 그리 오래되지 않아 보이지만 인공조림이 아니라 벌채 이후 자연적인 상태에서 새로운 나무들이 자라 숲을 이룬 곳이다.

헬기장을 지난 후부터 백두대간 능선은 곳곳에 바위들을 드러낸다. 이런 곳에는 어김없이 꼬리진달래가 자라고 있다. 꽃은 이미 지고 열매는 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참꽃나무겨우살이라고도 부르는 이 떨기나무는 높이 2m에 이르며, 몇몇 잎은 겨울에도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다. 경북, 충북, 강원도 및 평북에 분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외국에는 만주, 중국, 몽골 등지에 분포한다.

오미자 전국의 산에 자라는 덩굴나무로, 꽃은 5~6월에 암수딴그루에 피며, 10월에 열매가 붉게 익는다.
정상쪽으로 가는 백두대간 능선에서 만난 나무들 가운데 회목나무도 특기할 만한 식물이다.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분포하기는 하지만, 높은 산 능선에서 드물게 자라므로 좀처럼 만나기 어렵다. 여름에 피는 꽃이 특이한데, 꽃대가 잎 앞면의 중앙에 있는 잎줄과 나란하게 달리고 색깔도 흔치 않은 적갈색이다.

고도를 높여 정상부 능선에 다다르자 전망이 트이는 바위가 나타난다. 바위 겉에는 석이버섯이 많이 붙어 있다. 묏등바위라고 부르는 이 바위 위에 올라서자 지척에 정상의 암봉들이 보이고, 서쪽 멀리로는 대미산을 비롯한 백두대간 연봉들이 아스라하다. 대간에서 살짝 비켜 앉은 월악산은 바위로 이루어진 특이한 정상 모습 때문에 쉽게 가늠된다.

이 묏등바위 부근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자라고 있고, 구절초가 꽃을 피우고 있다. 키가 작고 잎도 매우 작아서 사스래나무의 변종으로 취급되는 좀고채목이 열매를 달고 있었다. 10여 년 전에 황장산을 찾았을 때는 이곳에 자라는 것을 모두 사스래나무라고 보았는데, 이번 취재에서 좀고채목도 섞여 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작살나무 전국의 산에 자라는 마편초과의 떨기나무로, 키 2~3cm이며, 꽃은 7~8월에 피고, 열매는 10월에 익는다.
이곳부터 정상까지는 아슬아슬한 바위지대를 올라가야 한다. 로프가 설치되지 않았다면 통과하기 아주 까다로운 구간도 여러 곳이다. 이들 바위지대에는 구실사리가 바위에 붙어 자라고 있다. 작은 양치식물인데, 바위 전체를 덮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 특산식물 가운데 하나인 산앵도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다. 간간이 빨간 열매가 달려 있어서 갈증을 달래기에 좋았다. 자생하는 잣나무 몇 그루가 눈에 띄었는데, 고도가 낮은 곳의 조림한 것들과 구분하여 특별히 기록해 둘 필요가 있는 듯하였다.

이 바위지대에서 특별한 식물이 하나 발견되었다. 한라부추라는 백합과의 식물인데, 막 꽃을 피우고 있었다. 한라산에 많이 자라고 있어서 한라부추라는 우리말 이름을 얻기는 했지만, 지리산, 덕유산 및 북부 지방에도 분포한다. 필자는 이곳 황장산과 지척에 있는 월악산에서도 발견한 적이 있다. 이곳 황장산에서 분포를 확인한 것은 이번 취재의 수확 가운데 하나다.

정상부 바위지대에는 소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하지만 속리산부터 보아온 소나무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큰 군락을 이루었거나 큰 개체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특징이 없다. 전망이 트이는 바위에서 바라본 황장산 자락의 소나무 현황도 비슷하였다. 과거 ‘황장목의 산’이라는 영예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오히려 이웃한 조령산이나 속리산 일대의 소나무숲에도 비하지 못할 정도로 빈약하다는 느낌만 들 뿐이다.

회목나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떨기나무로, 꽃은 6~7월에 핀다. 황장산 능선에서 몇 그루 발견되었다.
바위지대를 통과하여 올라선 정상은 주변의 험한 바위들과는 달리 흙으로 된 펑퍼짐하고 넓었다. 정상표지석이 있고, 주변에는 용담, 미국가막사리 등이 꽃을 피우고 있었다. 벌재쪽으로 방향을 잡아 백두대간 능선을 타자 급한 경사길이 이어지고, 곳곳에 바위도 많다. 꼬리진달래, 산앵도나무가 계속해서 나타나고, 죽대, 개쑥부쟁이, 바위채송화, 돌양지꽃 등이 자라고 있다.

30여 분만에 해발 985m의 황장재에 도착했다. ‘문안골 2시간20분, 벌재 2시간40분’이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이곳에서 백두대간 능선을 버리고 동북쪽 계곡인 문안골을 따라 내려가기로 했다.

문안골로 내려서자 골짜기에 말채나무, 가침박달, 서어나무, 졸참나무, 물박달나무, 쪽동백나무, 산뽕나무 등의 큰키나무가 자라고 있다. 떨기나무로는 참회나무, 노린재나무, 말발도리, 붉은병꽃나무, 작살나무 등이 눈에 띄고, 숲 아래에는 단충취, 십자고사리, 관중, 참나물, 파리풀, 눈빛승마, 대사초 등이 자라고 있다.

축성 당시 식물은 사라진 채 성벽만 남아

문안골은 고개에서 2시간 이상이 걸리는 긴 계곡이지만 군데군데 인간 흔적이 남아 있다. 나무를 베고 실어 나르던 산판길 흔적이 뚜렷하고, 당시인지 아니면 이후인지 화전민들이 살던 흔적도 발견된다. 식물로도 여실히 증명되었는데, 깊은 골짜기 안에 찔레꽃, 곰딸기 등 마을 근처에서 사는 식물들이 들어와 있다.

문안골을 빠져나오기 30여 분 전에 만나는 작성은 고구려 때 만들었다고 추정되는 성이다. 계곡 옆에 성벽이 뚜렷이 남아 있고, 성벽 가운데에 문을 단 흔적도 그대로다. 등산로는 성문을 통과하게 되어 있는데 협곡에 막은 성이어서 성문을 통과하지 않고는 드나들 수 없다. 이 성을 쌓았을 때 황장산에 살고 있었던 식물들과 숲은 이제 다시 볼 수 없게 변화되었는데, 성벽만이 그대로인 것이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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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풍수

왕릉보다 태실에 명당이 많은 이유
문종 태실이 있는 명봉사를 돌아본다…왕릉은 성형미인격

▲ 명봉사. 문종의 태실비가 명봉사 대웅전 왼편에 남아있다.

백두대간 자락 경북 예천군과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촛대봉(1,081m) 산자락,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있다.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절 오른편 숲속에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유형문화재 제3호)가 현존하고 있어 명실공히 천년고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절에는 불교유적뿐만 아니라 조선조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97호)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상당한 좋은 명당자리다. 왕가의 태실이란 왕자와 공주의 태를 담은 태함(胎函) 항아리를 무덤 형식으로 매장하는 시설을 말하며, 왕위에 오르면 본래의 태실에 여러 가지 석물을 설치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태를 명당에 묻으면 무병장수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특히 풍수지리가 성행하던 조선시대에는 명당을 찾아 태를 묻고 태실을 만들었다.

명봉사 바로 뒷산에 있던 태실은 일제시대에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길 때 같이 이전됐고, 태실비는 절 경내로 이전되어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조선의 왕릉에는 명당이 없다

조선시대 왕릉의 대부분은 서울시와 경기도에 밀집되어 있으며, 이중에서도 동구릉(경기도 남양주시),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대부분의 왕릉을 조성했다. 조선조의 왕은 당대의 최고 통치자로서 선왕(先王)의 능을 최고의 명당자리에 모실 여건은 되었지만, 지정된 왕릉 내에서 왕릉을 조성해야 되는 지리적 한계성 때문에 명당에 왕릉을 쓴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복원된 중종의 태실비(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소재)
조선의 왕릉에 대해 당대 최고의 풍수실력자들이 동원되어 잡은 자리인 만큼 분명히 길지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겠지만, 전문가적 입장에서 조선시대의 왕릉을 감정해보면 유골을 보존할 정도의 보백지지(保魄之地)는 될지언정 길지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비해 왕가의 태실은 팔도를 대상으로 명당을 찾았고, 또한 태실이 차지하는 면적이 비교적 적으므로 당시의 지관들이 풍수지리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터를 구했기 때문에 왕릉보다 오히려 명당인 경우가 아주 많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분포된 수백 개의 태실터를 찾아 풍수공부를 하면 형기풍수는 물론이고 풍수이론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왕릉은 문화재 차원에서 가치는 높지만 풍수 공부를 하기로는 태실지가 더욱 좋은 현장 교과서가 된다. 왜냐면 골동품도 진품을 보아야 진품을 알아볼 수 있듯이 기존의 명당을 보아야 명당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즉 가짜만 보면 가짜라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진품을 보고도 진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의 왕릉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일부 묘를 제외하면 외견상으로는 아주 그럴듯해 명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릉은 혈장(穴場·묘를 쓰는 장소)을 인위적으로 보기 좋게 만든 소위 성형미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성형미인인 만큼 겉보기로는 좋겠지만, 그 자손이 미남미녀로 태어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형기풍수지리에서는 용(龍), 혈(穴), 사(砂·주변의 산세), 수(水)라고 하여 이 4가지 조건을 모두 잘 갖추어야 명당이 된다. 이중에서도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용과 혈은 사와 수에 비해 더욱 중요하고, 또한 사와 수는 인위적으로 길상(吉象)으로 변화가 가능하지만, 용과 혈은 인위적으로 길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풍수지리에서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대개의 경우는 용이 좋아야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용은 부모에 비교되고 혈은 자식에게 비교되어 부모님이 훌륭하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그 자식도 역시 훌륭하게 되듯이 대개는 용이 좋으면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용은 기복하고 굴곡하고 내려오는 모습이 살아있는 용처럼 내려오면 진룡(眞龍)이 되는데, 대부분의 왕릉은 진룡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혈만 좋게 보인다. 그 이유는 능을 조성할 당시에 막대한 인원과 시간을 동원해 혈을 보기 좋게 조성했기 때문이다.

성형한 명당(?)인지, 아니면 천연적인 명당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내룡을 보고 판단하고 다음에는 혈장 주위를 돌아보면 비록 수백 년 전에 조성된 능이라도 유심히 살펴보면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왕릉은 풍수지리 공부를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당시의 왕릉을 감정하므로써 왕과 왕손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아내는 데에는 조선실록 등의 좋은 사료가 많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대군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 풍수적 사연

▲ 명봉사 뒤편에 있는 문종 태실의 본래 위치. 태실은 일제가 강제로 옮겼고, 태실비는 명봉사 경내로 옮겨 남아 있다.
선대의 왕릉 감정사례를 통해 조선조 10대 왕인 중중의 운명에 대해 알아보자. 중종은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연산군에 이어 11대 임금에 오르게 된 좀 특이한 임금이다. 중중(1488-1544. 재위 1506-1544년)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인 정현왕후의 소생이며, 9대 왕인 연산군(1476-1494. 재위 1496-1506)의 이복동생이다.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1462∼1530년)는 1530년(중종 25년)에 69세로 죽었기 때문에 중종의 왕위등극과는 상관이 없고, 유독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세종 19-연산군 10)의 왕릉이 인수대비의 손자인 중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조상의 묘로 인한 풍수지리적 길흉화복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이론을 분방법(分房法)이라 하여 같은 조상에 같은 자손이라도 길흉화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방법 이론은 풍수학파별로 다양하지만 현공풍수이론의 분방법은 적중률이 아주 높지만 부작용의 소지가 많은 점이 있어 이곳에서 공개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하기 바란다.

인수대비는 조선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의 아내로 1455년(세조 1)에 세자빈에 간택됐으나 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20세에 병사한 관계로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못했다. 하지만 성종 때 왕후에 추봉되고, 이어 인수대비에 책봉됐다.

인수대비의 손자인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사사(賜死)됐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된 신하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꾸짖으니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는 사건이 있은 얼마 후 승하하니 춘추 68세로, 서오릉의 경릉에 안장했다. 인수대비가 안장된 경릉은 중종과 동기감응이 되는 능이기 때문에 인수대비의 경릉을 현공풍수법으로 감정해 중종의 운명을 추론할 수 있다.

인수대비는 1504년(8운 1년차)에 계좌정향(癸坐丁向·195도 내외)으로 안장했다. 인수대비를 안장한 경릉의 좌향과 조성시기를 근거로 현공풍수이론을 적용해 택명반을 작성하면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다만 택명반 작성하는 방법은 복잡하므로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홈페이지(www.koreafengshui.net)를 이용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이미 작성된 택명반으로 길흉을 감정한다.

낙서(洛書)에서 ‘5’는 절대권력 의미

이 택명반은 1운(1504∼1523년) 중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능을 조성한 경우의 택명반으로, 향궁(向宮)에 ??①이 배치되어 쌍성이 향궁에 모였다고 하여 쌍성회향(雙星會向)의 국이 되어 배산임수의 지형에는 적합한 능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오릉에 있는 인수대비 능의 풍수지리적 영향으로 중종반정에 성공하고 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택명반을 보고 추론하는 방법은 1운 20년동안은 주로 향궁의 ??①五, 중궁의 65一, 좌궁 29六의 3개의 궁에 배치된 숫자를 위주로 감정한다.

먼저 향궁의 ??①五의 5자는 낙서(洛書)에서 중궁(中宮)이 되기 때문에 왕을 의미하는데, 향궁에 숫자 五가 있다. 그리고 1운에는 1자가 가장 왕성한 왕기가 되는데 ??①이 되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왕이 될 수 있는 운을 중종이 받게 된다.

중궁 65에도 왕을 의미하는 5자가 있고, 6자는 후천팔괘에서 건괘(乾卦)이므로 임금의 의미가 있으며, 6一은 고관대작으로 출세하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 왕릉이기 때문에 왕을 의미하고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으로 풀이한다. 좌궁에는 6자에도 또 군[君]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중종은 할머니인 인수대비(1437-1504)가 승하하고 2년 뒤에 발복을 받아 1506년(연산군 12년) 9월에 이른바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종중은 11대 임금에 오르게 된다. 더욱 자세한 감정을 하려면 연산군의 폐위된 사실과 관련하여 보면 더욱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 연산군의 생부인 성종의 묘를 감정하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중종반정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폭정을 거듭 일삼는 연산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지자, 연산군을 축출하려는 구체적 움직임이 정치일선에서 소외당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등 훈구세력이 중심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풍수지리학 측면에서 보면 선대(先代)의 왕릉을 통해 후손의 운명을 추론할 수도 있다.

글 최명우 (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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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월악산 지형지질

넘쳐나는 저 바위들의 정체는?
9천만 년 전 백악기에 관입한 불국사화강암으로 조령산과 동시대

▲ 신라 마의태자와 덕주공주의 망국의 한이 서려있어 애잔함을 느끼게 하는 월악산은 속리산, 조령산과 더불어 국토 중앙에 대표적인 암산을 이룬다.

백두대간의 줄기가 태백산과 소백산을 거쳐 남쪽의 조령산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하늘재에서 방향을 북으로 틀어 내달리는 지맥 끝자락에 이 땅에 또 하나의 명산이 한반도 중심부인 중원땅을 가르며 힘차게 솟아올랐다. 월악산이 바로 그것이다.

월악산은 주봉인 영봉(1,097m)을 비롯해 중봉, 하봉 등 3개의 거대한 바위봉우리가 맹호처럼 솟아올라 성채를 이루는 정상부를 위시해 깎아지른 육중한 암봉들이 산줄기를 타고 줄기차게 이어지고, 그 암봉들 사이로 움튼 청송들이 함께 어우러져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그리고 정상에 올라서면 북쪽으로 충주호의 잔잔한 물결과 그 수면에 드리운 산야의 풍광은 속세의 때를 모조리 씻어내기에 부족함이 없다.

월악산은 일찍이 산세가 깊고 험준하여 천연의 요새와도 같은 곳으로 알려졌다. 비결잡록(秘結雜錄)에 적힌 '충주월악산하송계 불입병화보신산수(忠州月岳山下送溪 不入兵火保身山水)'라는 기록이 말해 주듯이, 산세가 깊고 험하여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큼 숨어 살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깊은 산중을 이루는 월악산의 멋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산릉을 비롯하여 계곡에 이르기까지 산 전체가 바위로 이루어진 암산(巖山)이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포암산~만수봉~월악산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비롯하여 거대한 암봉들이 이웃하며 머리를 맞대고 끊임없이 이어져 남성적인 힘찬 맥동을 느끼게 한다.

또한 월악산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송계팔경과 용하구곡이 쌍벽을 이루며, 상·중·하선암으로 이어지는 선암계곡을 품고 있는 도락산, 남한강을 끼고 호반의 푸른 물과 조화를 이룬 구담·옥순·제비봉, 그리고 충주호를 건너 ‘비단에 수를 놓은 듯 아름다운 산’이라 해서 이름한 금수산에 이르기까지 월악산과 맥을 같이 하는 산줄기는 온통 바위가 만들어내는 수려하고도 장대한 산악 경관을 이룬다.

한편 월악산 동편으로 하설산~매두막~문수봉~대미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는 완만한 산세를 이루고 있어 인근 소백산과 같은 포근한 육산(肉山)의 모습도 함께 지니고 있다.

산사람들이 월악산을 두고 설악산의 동적인 화려한 아름다움과 지리산의 정적인 장엄함을 고루 지닌 산이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월악산이 이와 같이 암산과 육산의 산세를 두루 갖춘 데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바위들의 정체는 9천만 년 전 관입한 화강암

▲ 월악산 일대의 화강암들은 9천만 년 전 관입한 화강암으로 남쪽의 조령산, 속리산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월악산 산세를 이해하려면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우리나라의 모든 산들이 그러하듯이 한반도 땅덩어리가 불의 시대를 맞고 있었던 중생대로 거슬러 올라가야한다. 중생대는 대규모 지각변동과 더불어 여러 차례에 걸쳐 지하 깊은 곳으로부터 마그마가 분출하는 화산활동이 있었다. 이때 마그마가 지상으로 분출하지 못하고 지하 깊은 곳에서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암석이 바로 화강암이다. 월악산 일대를 이루는 화강암은 백악기 약 9천만 년 전에 관입한 불국사화강암으로, 남쪽의 속리산과 조령산을 이루는 화강암과 동시대에 형성된 것이다.

월악산 일대에 관입한 화강암은 포암산~만수봉~월악산, 조령산~마패봉~신선봉~부봉~주흘산, 금수산~옥순·구담봉~제비봉~도락산~황정산에 이르기까지 제천~단양~문경에 걸친 면적 486㎢에 달하는 광범위한 저반상의 화강암체를 이루는데, 이를 묶어 월악산화강암체라 말한다.

화강암의 관입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지표의 표토들이 깎여나가게 되자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체가 압력의 하중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지표로 올라오게 됐다. 이때 화강암은 체적 팽창으로 암체에 금이 갈라지는 균열, 즉 절리가 발생했다.

이후 갈라진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면서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져 점차 화강암체는 다양한 형태의 암괴로 분리됐다. 이후 빗물과 바람에 의해 계속적인 침식과 삭박이 진행되어 암괴를 덮고 있던 피복물질들이 모두 씻겨나가게 되자 지하에 있던 다양한 형태의 화강암체들이 지상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월악산의 산릉과 계곡에 발달한 다양한 화강암 지형은 모두 이런 과정을 통해 생성된 것들이다.

돔 모양 암봉들은 수평절리가 탁월하게 발달

지질학자들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관입한 백악기 불국사의 화강암은 대략 지하 3~4km의 깊이에서 관입한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 월악산 일대에서 볼 수 있는 화강암들은 약 9천만 년 전 관입 이후 3~4km의 표토가 깎여나가 지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렇게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인간의 시간관념으로는 도저히 헤아리기 어려울 따름이다.

월악산 정상에서 눈에 들어오는 만수봉~포암산으로 연결되는 주능선 상의 고봉들의 모습은 대부분 기복이 심한 돔(dome)형으로 옹립되어 있다. 설악산의 천불동 계곡과 금강산의 만물상 코스에서 볼 수 있는 칼날 같이 뾰쪽하게 솟아오른 암괴들이 적은 반면, 북한산의 인수봉과 같은 커다란 하나의 암체로 이루어진 육중한 암봉들이 주능선 자락을 타고 낙타등처럼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암체에 발달한 절리 가운데 지표와 평행하게 발달한 수평절리를 따라 침식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암체에 발달한 수평절리가 탁월하게 발달하면 수분이 수직으로 침투하기 어려워 수평면을 따라 침식력이 집중되어 암석이 마치 양파 껍질이 벗겨지는 것처럼 침식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히 송계계곡과 용하구곡에 폭포, 소(沼), 담(潭), 그리고 넓은 하상암반인 대(臺)의 발달이 두드러진 이유 또한 하천이 흘러가면서 수평으로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침식이 집중되어 암괴가 한 겹 한 겹 떨어져나갔기 때문이다.

월악산화강암체와 지질이 다른 영봉

▲ 월악산의 정상 영봉은 중생대 월악산화강암체와 달리 고생대에 바다에서 퇴적된 석회암이 변성된 석회규산염암이다.
월악산 정상은 150m에 달하는 수직 단애를 이루는 영봉을 비롯해 중봉, 하봉 등 둘레 4km에 달하는 크기의 웅장한 3개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영봉은 높은 수직절벽으로 병풍처럼 위용을 드러내며 마치 성곽과도 같은 요새를 이루고 있어 ‘한국의 마터호른’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영봉을 포함한 정상부 일대는 산 전체가 거의 매끈한 담홍색의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월악산과는 달리 회색빛을 띠며 바위의 결을 따라 조각이 많이 나 있어 독특한 느낌을 받게 한다.

이는 월악산 정상부의 암질이 화강암이 아닌 석회규산염암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원래 월악산 일대는 고생대 당시 바다에서 퇴적된 석회암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다. 중생대 백악기에 이르러 화강암이 석회암층의 약대를 뚫고 관입하면서 접촉부에 있던 석회암은 열과 압에 의해 변성을 받아 석회규산염암으로 변했다.

▲ 예로부터 난리가 미치지 않을 만큼 곡이 깊은 곳으로 알려진 월악산의 송계계곡과 용하구곡은 월악산 절경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석회암이 변성을 받으면 보다 더욱 치밀하고 견고해져 풍화에 대한 저항력이 커지는 특성이 있다. 월악산 정상부는 바로 화강암의 관입되는 그 접촉부에 있었던 부분으로 화강암과는 전혀 다른 독특한 암질을 갖게 된 것이다. 따라서 침식과 풍화에 약한 화강암이 쉽게 깎여나가는 동안 보다 강한 변성암질을 가진 정상부는 우뚝 솟아남아 성채와도 같은 정상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정상부 3개 봉우리는 원래 하나의 돔형의 암체를 이루고 있었으나 암체에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침식과 풍화를 받아 셋으로 분리된 것이다. 수박을 반으로 잘라놓은 모양으로 150m의 높은 절벽을 이루는 영봉은 그 낭떠러지 아래로 암체에서 떨어져 나간 암설(巖屑)들이 쌓여 긴 너덜겅(애추, talus)이 형성되어 있다. 지금도 태양열과 빗물의 침투로 팽창과 압축을 반복하며 침식과 풍화가 진행되어 암벽면에서 암설들이 계속적으로 떨어져 나가고 있다.

한편 월악산 동쪽으로 골이 깊어 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는 하설산을 시작으로 매두막~문수봉~대미산 등으로 밋밋하게 이어지는 산세는 화강암으로 넘쳐나 암산을 이루는 월악산 일대와는 전혀 다른 육산(肉山)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이곳 일대의 지질이 화강암보다 침식과 풍화에 강한 변성퇴적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다른 곳에 비해 침식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단층선 따라 침식력 집중되어 비경 계곡 생성

포암산에서 월악산 정상인 영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분수령으로 하여 서쪽으로 동달천 물길을 따라 송계계곡이, 그리고 동쪽으로 광천 물길을 따라 용하구곡이 쌍벽을 이루며 심산유곡의 비경을 자아낸다. 이 두 물길은 모두 북쪽으로 흘러 남한강 충주호에 합류된다.

송계계곡은 월악산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계곡으로 노송이 우거진 장장 8km의 깊은 V자형의 협곡을 이룬다. 미륵사지에서 송계 방향으로 계곡부의 화강암을 깎아내어 팔랑소, 와룡대, 망폭대, 수경대, 학소대, 월광폭포 등 송계팔경 비경을 이루고 있다.

이 송계계곡을 따라 나란히 놓인 길은 과거 하늘재를 넘어 영남지방과 한양으로 가는 뱃길에 오르는 남한강 한수나루를 이어주는 교통로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송계계곡의 반대편에 위치한 16km의 깊은 계곡 용하구곡 또한 송계계곡 못지않은 비경이 숨겨져 있다. 대미산, 문수봉, 매두막에서 흘러든 물길이 흘러가며 활래담, 수용담 등과 같은 소와 담을, 선미대, 청벽대, 용하선대, 관폭대 등의 하상암반을, 그리고 수문동폭포, 병풍폭포 등의 비경을 만들어 놓았다.

이와 같이 월악산 주능선과 나란히 달리며 맑은 물과 울창한 산림이 어우러져 한 여름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깊은 계곡들은 어떻게 해서 만들어진 것일까. 약 9천만 년 전 북동~남서 방향으로 월악산화강암체가 관입하면서 지각이 승강과 침강을 반복하며 곳곳에 균열이 가면서 단층선이 생겨났다.

이때 단층선의 방향 또한 북동~남서 방향이 주를 이루었으며, 이 단층선을 따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향해 물이 흐르기 시작하며 지표는 서서히 깎여나갔다. 그런데 2천3백만 년 전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우리나라의 등줄산맥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생겨나면서 지반이 높게 융기했다. 이로 인해 하천의 물길이 보다 높아짐에 따라 침식력 또한 커져 이전 보다 곡을 깊게 깎아나가면서 지금의 깊은 곡을 만들게 된 것이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온달장군 공깃돌바위

마의태자의 전설이 서려 있는 미륵사지의 미륵입상과 오층석탑 바로 옆으로 나 있는 개울가에는 축구공 모양의 동그란 바위 하나가 턱하니 암반 위에 올려져 있어 눈길을 끈다. 고구려의 명장 온달 장군이 힘자랑을 했다는 전설이 서린 공깃돌바위다.

공깃돌바위는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마그마가 상승하면서 냉각·고화된 것이다. 이후 화강암반을 덮고 있던 표토 물질들이 모두 제거되어 지하 깊은 곳에 있던 화강암체가 지표로 상승하게 되면 압력으로부터 벗어나면서 체적의 팽창으로 암체에 균열, 즉 절리가 발생한다.

이후 이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면서 암석이 점차 침식과 풍화를 받게 되는데, 수평과 수직으로 발달한 절리가 만나는 모서리 부분에 침식과 풍화가 집중된다. 따라서 모서리 부분이 보다 빠르게 깎여 나가면서 점차 공 모양의 동그란 암석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침식과 풍화의 형태를 구상(球狀)풍화라고 한다. 이후 표토 물질들이 빗물과 바람에 의해 모두 씻겨 내려가면 지하에 있던 둥근 모양의 암괴인 핵석(核石)이 지표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공깃돌바위는 이와 같이 구상풍화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설악산 울산바위 아래 있는 흔들바위 또한 구상풍화의 산물이다. 이 공깃돌바위는 설악산 흔들바위보다 더 동그란 완벽한 공의 형태를 하고 있어 그 신기함이 한층 더한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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