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지형지질

중부 내륙 육산의 맹주
거대한 육산의 비밀은 편마암의 수평절리 영향

▲ 소백산 주능선 고위평탄면 전경. 신생대 제3기 중엽 한반도에 발달한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백두대간이 형성되면서 대간을 따라 소백산 주능선과 같은 고위평탄면들이 곳곳에 형성되었다.<사진=김영훈 차장. 헬기 조종=박동하 산림청 산림항공관리소 원주지소 기장>

한반도의 등뼈와 같은 태백산맥의 줄기가 태백산에서 분기하여 남서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산줄기인 소백산맥 첫머리에 힘차게 솟구쳐 올라 이 땅 한반도를 남북으로 크게 구분 짓는 산이 바로 소백산맥의 모산(母山) 소백산이다.

소백산은 백두대간이 거느린 명산 가운데 하나로 예로부터 백두산, 태백산과 더불어 신성시되어온 산이다. 죽령 남쪽의 도솔봉을 시작으로 연화봉~비로봉을 거쳐 국망봉 등 1,000m 이상의 고봉으로 이어지는 약 24km에 달하는 소백산의 산줄기는 장엄하고도 웅자한 산세를 드러낸다. 장쾌하고도 유려한 주능선을 따라 삼봉이라 일컫는 비로봉, 연화봉, 국망봉에서 지맥을 타고 사방으로 뻗어 내린 산굽이들이 앞뒤를 다투며 거대한 산해(山海)를 이루는 비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가져다준다.

면적 320.5㎢에 달하는 소백산은 웅장한 산세와 더불어 천동계곡, 죽계구곡 등 골짜기마다 깊은 계곡이 자리 잡고 있으며, 산자락 전체에 빽빽하게 들어선 삼림과 곳곳에 문화유적과 사찰 등이 산재해 있고, 사시사철 모습을 바꿔가며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소백산은 태백산과 연이어 있는 산으로 태백산보다 100m쯤 낮은 산이라 해서 소백(小白)이라 명명된 듯하다. 그러나 고봉들이 줄지어 있는 산세는 그 규모와 장대함에 있어 오히려 태백산을 뛰어넘는다. 곡의 깊음 또한 길고 그윽하여 수려한 맛이 태백산보다 훨씬 더 묻어나는 산이다.

소백산이 설악산과 함께 우리나라의 설경 제일의 명산으로 사람들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이유는 이 산이 위치한 지세와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는 겨울철 시베리아에서 발원한 북서계절풍이 불어온다. 이때 내륙 깊숙이 진입한 대기는 소백산맥의 높은 장벽에 부딪쳐 강제 상승하게 된다. 이때 수증기를 머금은 대기는 산사면을 타고 오르면서 단열팽창으로 냉각되면서 눈으로 변하여 내린다. 바로 동서로 길게 가로놓인 소백산 줄기가 바람을 가로 막으며 커다란 장벽과도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곳 소백산 일대는 눈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속리산~월악산의 암산에서 육산으로 모습 바꿔

한반도의 산들 가운데 육산(肉山)을 대표하는 백두대간의 남단 지리산을 출발해 덕유산까지 온유한 산세를 유지하며 달려온 백두대간이 속리산~조령산~월악산 자락을 거치며 격동적인 암산(巖山)으로 그 형태를 바꾸더니 소백산에 이르러 이내 다시 그 모습을 육산으로 바꾼다.

따라서 산이 크고 골짜기가 깊은 육산을 이루는 소백산의 가장 큰 특징은 역시 지리산의 세석평전과 덕유산의 덕유평전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산릉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는 사실이다. 소백산이 이와 같이 중부권을 대표하는 토산(土山)을 이루는 것은 이곳 일대의 대부분의 지질을 차지하고 있는 화강암질 편마암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소백산 일대를 형성하고 있는 화강암질 편마암은 영남지괴(소백산육괴)에 해당되는 것으로, 그 형성시기가 약 20억 년 전에 달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암석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소백산 일대에 분포하는 화강암질 편마암은 화강암과 거의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에 화강암으로 착각하기 쉽다.

소백산 일대의 화강암은 약 2억 년 전 중생대 쥐라기 중엽에 관입한 풍기분지 일대의 대보화강암과, 죽령과 도솔봉 서편으로 도락산, 황정산 등지 일대에 약 9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 말에 관입한 불국사화강암이 분포하고 있다.

소백산의 주를 이루는 화강암질 편마암은 지층과 암석에 발달한 절리면을 따라 오랜 기간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암석의 수평절리가 탁월하게 발달했기 때문에 지층의 수평절리면을 따라 침식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침식량 또한 수평적으로 거의 균일했다. 이로 인해 높낮이에 큰 차이가 없는 거의 비슷한 표고를 이루는 능선자락들이 연이어 나타나게 된 것이다.

또한 표층에서 오랜 세월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전 사면에 걸쳐 두꺼운 피복물이 쌓일 수 있었으며, 전체적으로 기반암의 노출이 적은 평탄한 구릉을 이루는 거대한 육산을 이루게 된 것이다. 소백산에서 북한산이나 월출산 등에서와 같은 걸출하고 육중한 암봉과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산악경관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소백산의 주를 이루는 편마암이 수평절리에 의한 침식을 오래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침식과정에서 견고하고도 치밀한 암질을 이루는 암석들의 일부가 덜 깎여나간 채 남게 되었는데, 바로 주능선을 따라 간간히 이어지는 암석 구릉지대가 바로 그것들이다. 신라 말 마지막 왕자였던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달래려고 자주 올랐다는 전설이 전하는 국망봉 산정에는 소백산 주능선에서 찾아보기 쉽지 않은 많은 암석들이 돌탑군을 이루고 있는데, 이것들이 바로 그 대표적인 예다.

이는 편마암의 차별적인 침식과 풍화에 따른 결과로, 소백산의 전체적인 모습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 특기할 만하다. 그리고 인근 태백산과 남단의 지리산이 소백산과 비슷한 완만하게 이어지는 능선 위주의 육산을 이루게 된 것 또한 소백산과 궤를 같이 하는 편마암이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 소백산에 발달한 계곡과 능선들은 이 일대의 지반 융기에 따른 단층과 습곡운동의 영향으로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을 따라 장기간 침식이 이루어진 결과로 북서~남동 방향의 방향성을 띠고 있다.<사진=김영훈 차장. 헬기 조종=박동하 산림청 산림항공관리소 원주지소 기장>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서서히 솟아올라

소백산 제1연화봉에서 서쪽의 비로봉, 혹은 정상 비로봉에서 동쪽의 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을 바라보면 양쪽 모두 마치 여인네의 몸매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평탄한 고원지대를 이루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000m 이상의 고지대에 구릉으로 이어지는 평탄지형을 두고 지형학 용어로는 고위평탄면(高位平坦面)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소백산 주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이와 같은 고위평탄면은 어떻게 해서 형성된 것일까.

다양하고도 복잡한 지질대로 구성되어 있는 이 땅 한반도는 커다란 지각변동 없이 안정된 가운데 고생대(약 5억3천만~2억7천만 년 전)라는 긴 지질시대를 거쳤다. 그러나 중생대(약 2억7천만~6천5백만 년 전)에 이르러 몇 차례 전국적인 규모의 화산과 지진활동을 수반한 가운데 습곡과 단층운동 등의 복잡한 지각변동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서 국토의 모습이 이전 고생대 당시 보다 더 굴곡이 심한 파동적인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이후 이러한 틀을 유지한 가운데 또다시 신생대(약 6천5백만 년 전~현세)를 거치며 오랜 세월 동안 침식과 풍화가 이루어져 지표가 심하게 깎여나갔다.

그런데 신생대 제3기 중엽 약 2천3백만 년 전 일본지각판이 한국지각판을 밀어붙이는 지구조적 변동에 의해 한반도 땅덩어리가 크게 융기했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 동쪽이 서쪽에 비해 크게 융기하는 경동성 요곡운동에 의해 한반도와 같은 방향을 이루는 낭림산맥, 마천령산맥, 태백산맥, 그리고 태백산맥에서 분기하여 남으로 내달리는 백두대간인 소백산맥이 형성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그동안 오랜 지질시대를 거치며 침식을 받아 저평화된 구릉성 평지들의 일부가 커다란 지각변동 없이 지반 융기와 함께 그대로 솟아올라 지금의 높은 고도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소백산 주능선 상의 구릉성 고원지대, 즉 고위평탄면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다.

그리고 이곳 소백산의 고원성 평탄지형은 한반도가 융기하기 이전 다시 말해 소백산맥이 형성되기 이전의 지형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화석지형으로 간주된다. 강원도 대관령~선자령을 비롯해 오대산, 태백산, 매봉산, 소백산, 덕유산, 지리산 등 백두대간을 타고 나타나는 고원성 평탄지형들은 모두 한반도가 신생대 약 2천3백만 년 전 융기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지형들인 것이다.

한편 소백산의 경우 주능선을 경계로 북서쪽 단양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반면, 남동쪽 풍기쪽은 급경사를 이루는데, 이는 소백산맥을 따라 전 구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지반이 융기하는 과정에서 동쪽에서 밀어붙이는 힘이 크게 작용한 습곡운동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태백산맥 또한 동쪽 사면이 서쪽 사면보다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 백두대간 전 구간에 걸쳐 같은 방향의 지질적인 압력과 힘이 작용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산자락으로 지질을 달리하며 발달한 석회동굴

비로봉에서 북쪽 단양의 다리안 국민관광단지로 이어지는 천동계곡의 끝자락 천동리에는 석회동(石灰洞)인 천동동굴이 발달해 있어 소백산의 또 다른 모습을 엿보게 한다. 천동동굴은 470m 길이밖에 안 되는 작은 동굴이지만 섬세하고 정교한 석순과 종유석 등의 동굴 생성물이 넘쳐나 밋밋하게만 이어지던 소백산의 부족함(?)을 메워 주려는 듯 마치 지하 세계에 궁전과도 같은 별천지의 볼거리를 선사하고 있다.

더 아래로 고수리에는 우리나라 석회동굴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는 고수동굴(천연기념물 제256호), 그 옆 노동리에는 노동동굴(천연기념물 제262호)이 있으며, 구인사 쪽 영춘면에는 온달동굴(천연기념물 제261호)이 있어 소백산 북쪽 산자락에는 석회동굴이 밀집 분포하고 있다.

그런데 석회동굴은 왜 소백산 남쪽이 아닌 북쪽 단양쪽에만 분포하고 있는 것일까. 이는 석회동굴을 배태할 수 있는 기반암인 석회암이 남한강을 끼고 있는 북쪽 단양쪽에만 분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분포하는 석회암층은 고생대 약 5억년 전~4억 년 전 사이 우리나라가 적도 이남에 위치할 당시 얕은 바다에 살던 산호, 조류, 패류들의 껍질이나 골격 등이 퇴적되어 만들어진 암석이다.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CaCO3)은 빗물이나 물에 잘 녹는다. 지하의 석회암층에 발달한 절리면이나 암석의 틈을 따라 지하수가 침투해 점차 석회암층을 녹여가면서 깎아낸다. 석회암의 용식과 더불어 지하수의 물길은 점차 아래로 이동하게 되는데, 이때 그 이전에 흐르던 상부의 물길은 빗물이나 지하수의 유입과 흐름이 차단되어 속이 텅빈 공동(空洞, cave)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흑운모 화강암질 편마암이 주를 이루는 소백산산체의 말단부가 석회암과 접하는 곳에 발달한 천동동굴을 비롯한 석회동굴들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들이다. 그리고 석회동굴들은 그 형성시기가 대략 30만~10만 년 전 사이일 것이라는 것이 동굴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 천동동굴. 소백산 북쪽 자락에 분포하는 석회동굴들은 소백산 일대 말단부의 편마암과 석회암이 접하는 곳에서 석회암이 지하수의 용식작용을 받아 형성된 것이다.<사진=최용근 동굴생태환경연구소 소장>

단층선 방향을 따라 소백산 계곡과 죽령 들어서

북동 방향의 종주능선을 따라 비로봉, 국망봉, 연화봉의 삼봉에서 갈라진 여러 지맥들이 북으로는 북서 방향, 남으로는 남동 방향으로 뻗어 내리며 그 사이에 주봉인 비로봉에서 천동동굴로 이어지는 천동계곡, 국망봉에서 어의곡리로 이어지는 어의계곡, 제1연화봉에서 희방사로 이어지는 희방계곡, 비로봉에서 비로사로 이어지는 비로계곡, 국망봉에서 초암사로 이어지는 죽계구곡 등의 여러 계곡들을 앉혀 놓았다.

그런데 그 계곡들이 하나같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일정한 방향성을 갖는 것은 우리나라의 지각변동사에 있어 가장 격동이 심했던 중생대 쥐라기 대보조산운동과 신생대 제3기 한반도 지반이 융기하는 과정, 즉 소백산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과 구조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결과로 해석된다.

소백산이 융기한 이후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과 구조선을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하천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곡을 깊게 깎아냈기 때문에 지금의 깊은 계곡들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찍이 소백산 언저리에 움을 트고 살았던 북쪽의 단양 사람들과 남쪽의 영주 사람들은 서로간에 큰 장벽과도 같았던 소백산의 가장 낮은 산마루에 고갯길을 뚫어 서로를 오갔다. 소백산 줄기 가운데 가장 낮은 구간을 이루는 도솔봉과 제2연화봉 사이의 가장 낮은 산마루를 통과하는 고갯길 죽령(竹嶺·689m)이 바로 그 길이다.

문경새재(조령), 추풍령과 함께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3대 관문의 하나였던 죽령 또한 소백산을 반으로 가르며 북서~남동 방향으로 발달한 단층선을 따라 남북 양쪽 방향으로 침식이 크게 이루어진 결과로 낮은 저지대를 이루게 된 것이다. 죽령은 이곳 양쪽의 저지대인 곡을 따라 나란하게 길을 낸 고개다.

신라시대 이래로 무려 1,900여 년의 오랜 세월을 거치며 충청도와 경상도 땅덩어리를 이어주던 고갯길 죽령, 그러나 선조들의 애환이 굽이굽이 배어있는 죽령은 이제 더 이상 옛날의 죽령이 아니다. 바로 2001년 소백산 밑으로 4.6km의 죽령터널을 뚫는 중앙고속도로(춘천~대구)가 완공 개통되면서부터 고개로서의 생명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됐다. 지금은 과거 고갯길의 운치를 즐기려는 관광객들과 죽령에서부터 소백산을 타기 위한 일부 등산객들에 의해 간간히 고갯길로서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따름이다.

십승지의 제1지 풍기분지는 화강암의 차별침식 결과

소백산 정상 비로봉에서 남쪽을 바라보면 사방이 산지로 둘러싸여 움푹 파인 영주시의 풍기분지가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온다. 풍기(豊基)는 말뜻 그대로 ‘풍요로운 터전’이란 의미로 첩첩산중으로 둘러싸인 깊은 산골 소백산맥 자락에 평지를 이루고 있어 능히 이곳이 ‘사람이 살 만한 땅’임을 말해준다.

소백산이 품어낸 풍기땅은 일찍이 토양이 비옥하고 물이 잘 빠져 황해도 개성, 충남 금산과 더불어 인삼의 대표적 산지로 이름이 난 곳이기도 하다. 또한 조선시대 이래 민간에 널리 유포되어 온 우리나라의 대표적 예언서인 정감록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땅은 ‘난세에 재앙을 피해 몸을 보전할 만한 명당’에 속하는 열 곳, 즉 십승지 가운데 제1지로 알려질 만큼 아늑하고 깊은 산세를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풍기땅이 이처럼 주목받는 것은 이 땅을 이루고 있는 지질대와 어떤 관련이 있는 걸까. 이는 소백산과 풍기땅의 지질대가 근본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소백산 자락에 둘러싸여 움푹 파인 분지를 이루고 있는 풍기땅은 중생대 쥐라기 약 1억6천만 년 전에 관입한 대보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반면, 풍기분지를 둘러싼 산지는 변성작용을 받은 약 20억 년 전의 소백산 복합 편마암체로서 이루어져 있다.

화강암은 변성작용을 받은 편마암에 비해 침식과 풍화에 약한 특성이 있다. 따라서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풍기분지 일대가 주변 편마암으로 이루어진 소백산지에 비해 보다 빠르게 깎여나감으로써 오늘날 깊게 파인 분지를 이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풍기분지의 형성은 화강암과 편마암의 차별침식에 의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한편 풍기분지 가운데 소백산 언저리에 위치한 금계리는 뒤로 보이는 북쪽의 소백산을 진산으로 하여 마치 금닭이 웅크리고 알을 품는 형상을 이룬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풍수적 길지를 이룬다고 한다. 원적봉~비로봉~연화봉으로 이어지는 산세 한가운데로 금선정 계곡수가 흐르며 깊은 계곡을 파놓았다. 그 말단부에 금계저수지(금계호)가 위치해 있으며, 이곳에서 보면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싸인 협곡이 과히 제1의 십승지라고 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곳임을 직감할 수 있다.

이는 소백산지 말단부의 편마암과 풍기읍 화강암이 만나는 접촉부에서 침식에 약한 화강암이 보다 크게 깎여나감으로써 급경사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정상 비로봉과 이웃한 산사면에서 모여들어 흘러내리는 금선정계곡의 풍부한 물이 오랜 세월 곡을 깊이 깎아냈기 때문에 가운데가 움푹 파인 깊은 협곡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금계리의 깊은 협곡 안으로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계곡 물길 하나밖에 없는, 그야말로 요새와도 같은 곳으로 세상과 단절된 느낌을 갖게 하는 산세를 이룬다.

주능선을 경계로 남북간 뚜렷한 지역차

사방이 시원하게 트인 정상 비로봉에 올라서면, 이곳이 소백산 정상임을 알리는 ‘비로봉’이라 적힌 커다란 돌비석이 나타난다. 돌비석 뒤로는 ‘태백산에 이어진 소백산, 백리에 구불구불 구름 사이 솟았네, 뚜렷이 동남의 경계를 그어, 하늘 땅이 만든 형국 억척일세’라고 적힌 조선 초기 문신이자 학자였던 서거정(徐居正·1420-1488)이 지은 시 한 수가 나타난다.

시에서 알 수 있듯이 예로부터 소백산이 이 지역 일대를 경계 짓는 장애물로서의 기능을 해왔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 국망봉에서 도솔봉까지 동서로 길게 이어진 약 60리의 소백산줄기는 자연적으로 북쪽의 중부 지방과 남쪽의 영남 지방의 경계를 이루게 되면서 두 지역 간에는 많은 차이가 나타났다.

주능선을 경계로 북으로 충청도쪽의 골짜기 물은 남한강으로 흘러들고, 남으로 경상도쪽의 골짜기 물은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물길의 운명이 서로 갈렸다. 겨울철 1월 평균기온을 보면 북쪽의 단양이 -5.3℃(제천기상관측소, 2004년)인 반면, 남쪽의 영주는 -3.4℃(풍기기상관측소, 2004년)로서 남쪽의 영주가 더 기온이 높다.

소백산 일대는 대관령~선자령 일대와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겨울철 바람이 강한 곳으로 이름 난 곳이다. 차가운 삭풍이 불 경우 얼굴을 들 수 없을 만큼의 차갑고 강한 바람이 불어온다. 바로 소백산맥이 차가운 북서계절풍을 막아주고 푄(fo¨hn) 현상에 의해 남쪽의 영주 지방이 더 기온이 높게 나타나는 것이다. 반면 여름철(8월)의 경우는 양쪽 모두 22.5~23.0℃로서 큰 차이가 나타나지 않는다.

강수량의 경우는 여름철 8월 강수량은 양쪽 지역 모두 약 345mm로 비슷하다. 연평균강수량을 보면 단양이 1,876mm, 영주가 2,018mm로 양쪽 모두 많은 양의 비가 내리는 것으로 보아 산이 깊고 높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두 지역 간에는 자연환경뿐만 아니라 사용하는 말의 어투에서부터 음식 문화, 생활 습관, 농업 경작 양식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차이가 나타나고 있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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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지명

백산과 밝산은 같은 이름
소백산·태백산·장백산·함박산 등의 백과 박도 한 뿌리

▲ 소백산 주능선. 우리 조상은 소백산을 태백산과 함께 이백(二百)으로 묶어 하나의 커다란 산무리로 보았다.

태백산 소백산이 산세도 장하구나

달리던 용의 머리 여기에서 수그려

북쪽으로 통한 시내 황간으로 달려가고

서쪽으로 뻗은 산은 적상산을 에워쌌네

봉마다 우뚝우뚝 성벽은 쌓았다만

이 재가 요새란 걸 어느 누가 안단 말고

청주 고을 큰 들판 천리에 트였으니

추풍령 빼앗기면 멱살을 잡히리라

二白飛騰脊勢强

神龍於此地中藏

溪通北地趨黃澗

山出西枝繞赤裳

每向高峯增塹壘

誰知平陸是關防

淸州大野開千里

一據秋風便·

-<다산시문집>

소백산과 태백산을 이백(二白)으로 풀어

옛 사람들은 소백산과 태백산을 한 형제 산으로 본 듯하다. 아니, 두 덩어리를 묶어 ‘이백(二白)’이라 하여 하나의 커다란 산무리로 본 것도 같다.

이백은 동남방으로 달려가 있어

형세가 자루 연한 쇠뇌 같으며

二白馳巽維

勢若連臂弩

-<다산시문집> 귀전시초(歸田詩草) 일부

이백의 산세가 강하다는 뜻의, 다산의 이 싯구는 소백과 태백을 별개의 산무리로 보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1월.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경여(李敬輿)가 상소하기를, ‘문경 북쪽 새재 동편에 이름이 어류(御留)라는 산성이 하나 있는데 혹자의 말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합니다. 규모는 남한산성의 10분의 9 정도이나 험준하기로는 남한산성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그 속에는 인구 4~5만 또는 가구수 1·2만 호가 들어설 수 있고, 동으로는 태백산과 소백산과 연결되고, 북으로는 월악산, 서쪽으로는 화산(華山),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과 연접해 있어 성을 쌓고 관방(關防)으로 이용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도신(道臣)과 비국(備局)에 명하여 승군을 모집해 절을 짓게 하고 서서히 성 쌓을 대책을 논의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다.”(국조보감 제36권 인조조)

옛 문헌들을 보면 이처럼 태백산이 나오는 곳에 소백산이 따라 나오고, 반대로 소백산이 나오는 곳에 태백산이 따라 나오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동문선 제69권 백문보(白文寶)에도 태백산과 소백산을 묶어서 서술한 부분이 보인다.

‘신축년(공민왕 10년) 11월에 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복주(福州)에 이르렀다. 처음 충광(忠廣)에서 고개를 넘었는데, 관리와 백성들이 난리를 당해 갈팡질팡하여 놀란 노루와 엎드린 토끼처럼 어찌할 줄 몰라 명령하여도 정돈되지 않으니, 임금이 마음속으로 걱정하였다. 고개 위에 올라서 내려다보니 푸르고 아득하여 하늘과 땅 사이를 가로지른 것 같은 것이 경상도 일대이며, 고개에서 북쪽으로 태백산과 소백산이 높이 솟고, 그 남쪽으로 둘러 있는 것이 10여 주가 있는데, 복주가 큰 진영이었다.’

특히, 정약용은 자신의 글에서 태백산과 소백산을 따로 떼어 이야기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영남성-황서성이란 지금의 경상도다. 이 도에 황수(潢水·낙동강)가 있어 남쪽으로 흐르는데, 물의 근원 가운데 하나는 태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소백산에서 나온다. 소백산을 따라 내려오면서 황수 동쪽에 있는 것을 영남성으로 하고, 황수 서편에 있는 것을 황서성이라 했다.’(경세유표 제3권)

‘영남은 여러 갈래의 물이 한 데로 모이고 구역은 딴 판국으로 생겼다. 대소백(大小白)으로부터 남쪽 두류산에 이르기까지 하늘이 한계를 이루어 놓았으니, 하늘 뜻이 우리나라 보장(保障)을 이렇게 정해 준 것이 아닌 줄 어찌 알겠는가.’(성호사설 경사문)
즉, 소백산과 태백산은 함께 백산(백산)으로 묶어 말할 수 있으며, 앞음절 태(太)와 소(小)는 단순히 크기에 따라 구분해 붙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소백산이 겨울이면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 그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백(白)을 무조건 희다는 뜻으로 보는 경향이 있는데, 땅이름(특히 산이름)에서는 그런 뜻으로 붙여진 것이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白이라는 글자의 상형문자 형태로 보게 되면, 이 글자는 엄지손가락에 도달하게 된다. 엄지는 바로 으뜸을 말하며, 이것은 바로 높음과 맥을 같이 한다. 따라서, 백은 지명에서 으뜸(주산)이나 높음의 뜻을 갖춘 것이 많고, 백산(白山)이란 의미도 그런 면으로 주로 이해하게 된다. 많은 학자들은 白이 밝음의 ‘밝(?)’의 음차로 많은 이용되었음을 설명하고 있다.


▲ 태백산 천제단. 소백이나 태백은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어 그런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하지만, 그것은 한자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백(白) 자가 들어간 산은 대개 `?`의 음차로 이용된 것이다.

동명(東明)은 ‘새밝’의 뜻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10월이면 마을 남녀들이 밤에 모여 노래와 놀이를 즐기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국중행사(國中行事)를 벌였는데, 그 이름을 동맹(東盟)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 후한서 동이전에도 ‘10월에 제천의식을 갖는데, 밤에 남녀가 모여 창악(唱樂)을 하였고, 귀신, 영성, 사직에 제사하기를 즐겼는데, 그 이름을 동맹이라 하더라’고 하였다.

상고시대 부족들의 종교와 예술을 종합한 제정일치의 한 본보기인 이 제천의식은 고려시대에 계승되어 팔관회의 의식이 되었다. 동맹은 동명(東明)이라고도 하는데, 모든 부족이 한 자리에 모여 나라 일을 의논하고, 그들의 시조인 주몽신, 즉 동명신과 그의 생모인 하백녀를 제사지내는 큰 제천행사였다. 또, 이 의식은 풍년을 기원하고, 풍성한 수확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농제(農祭)의 성격을 지니기도 했다. 제사를 행하는 날에는 남녀노소가 한 곳에 모여 술을 마시고 춤추는 것으로 날 새는 줄도 모를 정도였다니, 얼마나 큰 잔치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맹이라는 행사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서 나온 말로 보이는데, ?(새)는 동쪽을 뜻하여 동(東), ?은 밝음을 뜻하여 맹(盟)을 취한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제천행사의 지향인 동명성왕의 동명도 그 이름과 관계가 있지 않을까?

학자들은 동맹에서 이어져내린 팔관회란 이름도 이에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팔관회는 불교의 팔관과 일치되었지만, 그 원뜻은 ??으로, 밝다의 뿌리말인 ?(?)에서 나온 말이며, ??과 그 연원을 같이 하고 있다고 양주동 학자도 말했다. 즉, 팔관은 발간(??)에서 음을 따온 이름이라는 것이다.

‘??기예 나귀 타 나아’ (새벽에 나귀타고 나가)-두시언해(8:32)

여기서 ‘??기’는 ‘갓 밝이’로, 바로 갓(新) 밝은 때임을 가리킨다. 새벽이란 말도 원래는 새로 밝음의 뜻인 ??에서 나온 말이고 보면 결국은 같은 뜻에서 출발한 말인 것이다.

<삼국유사> 제4권 원효(元曉)조에 보면, 원효가 새밝이라는, 순수한 우리말임을 알게 된다. ‘원효가 태어난 곳의 이름이 불지(佛地)이며, 절을 초개(初開)라 하고 자칭 원효라 한 것도 모두 불일(佛日)을 처음으로 빛나게 하였다는 뜻이다. 원효라는 뜻이 또한 우리말이니, 당시 사람이 해가 돋는다는 것으로 말한 것이다.’(삼국유사(제4권 원효조).

원(元)은 시작, 처음임을 나타내고, 효(曉)는 밝음을 나타내니, 원효는 새밝의 뜻이다. 이 새밝은 그가 태어난 불지와 무관하지 않음을 <삼국유사>에는 잘 나타내고 있다.

‘잉피공(仍皮公)의 아들 담내내말(談·乃末)은 압량군 남쪽 불지촌 북쪽의 율곡 사라수 밑에서 아기(원효)를 낳았다. 그 마을 이름이 불지인데, 혹은 발지촌(發智村. 弗等乙村)이라 한다.’(삼국유사 제4권 원효조) 양주동은 불지나 발지가 밝이의 뜻인 ?기인 원음 ?디의 한자 표기로 보았다.

삼국유사에는 원효 외에도 해밝이에 해당하는 희명(希明), 달밝이에 해당하는 월명(月明) 등 밝이와 관련된 이름이 나온다. 또, 삼국사기에도 밝이를 한자로 취음한 발기(拔奇)라는 이름이 있다.

??? ?긔 ?래 밤 드리 노니다가(서울의 밝은 달 아래 밤 늦도록 놀며 다니다가)<처용가(處容歌)>

여기서 ?긔?(明期月)은 바로 밝은 달을 뜻하며, 밝이가 옛노래에서도 볼 수 있음을 알게 된다.

박과 백은 밝의 음차인 경우 많아

밝이의 뿌리말인 ?은 광명이나 나라땅의 의미로 씌여 곳곳에 많은 지명을 낳았다. 부리, 부루, 비로, 비, 복, 발, 바라, 보름 등의 음이 들어간 지명 중에는 이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 무척 많다. ?고개(赤峴)에서 변한 배오개(梨峴), ?내(列水)에서 변한 배내[뱃내·浿水] 한?에서 나온 한배(長背·長非) 등도 모두 같은 계열의 지명이다.

?은 밝다는 의미로 주로 씌었지만, 붉다(옛날에는 밝다와 붉다의 구분이 없었음)의 어원이기도 하다. 불(火)도 원래말이 ?이며, 발가벗다의 발가, 불알(睾丸)의 불, 박쥐(옛말은 ?쥐, 한자로는 伏翼)의 박 등이 모두 여기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고 있다. 바르게(正)도 옛말이 ?리이니 이것도 ?다(밝다)는 말의 친족어임을 알 수 있다.

이 ?이 지명이나 인명으로 이용될 때는 어쩔 수 없이 한자의 음을 빌어야 했는데, 발(發), 벌(伐), 불(弗, 佛, 不), 부리(夫里), 부여(夫餘), 부루(夫婁), 비류(沸流) 등 그 음에 가까운 것을 주로 이용하였다. 인명에서 많이 쓰인 박(朴, 泊), 복(卜), 지명에서 많이 쓰인 백(白, 百), 맥(貊) 등도 이 계통이다.

밝다의 훈을 갖는 한자를 이용하기도 했는데, 혁(赫), 소(昭), 명(明) 등이 그 예이다. 또, ?은 불과 음이 비슷하여 이 뜻을 갖는 화(火) 자가 쓰이는가 하면, 벌과도 음이 닮아 원(原), 평(平, 坪) 등의 한자를 빌어 지명과 인명 등에 나타내기도 했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朴赫居世)도 이 ?에 뿌리를 둔 이름이라 하여 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었다. 대체로 박(朴)은 ?의 음차(音借), 혁(赫)은 그의 훈차(訓借)로 보고, 거세는 거서간(居西干)과 같은 ?한(?은 새로, 처음, 그리고 한은 우두머리의 뜻으로 시조왕의 뜻)으로 보아, ‘밝은 누리의 첫 임금’으로 새기고 있다. 또, 삼국유사에 그를 불거내왕(弗矩內王)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바로 ??뉘의 음차로, 밝은 누리나 혁거세(赫居世)와 그 뜻을 같이하는 것이다.

박혁거세뿐 아니라, 박제상(朴堤上)의 박, 복지겸(卜智謙), 복길(福吉, 卜吉), 복규(卜奎) 등의 복도 ?의 뜻으로 보고 있다. 이들이 있었을 당시는 성(姓)이 정립되기 이전이어서, 박, 복을 성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옛 백제땅 나주 근처의 복룡(伏龍)은 밝은 산의 뜻인 밝모리로 유추되고 있다. 복은 밝의 음차, 용은 옛말이 미르(미리)이므로 모리(山)의 뜻으로 붙여졌으리라는 짐작 때문이다.

지금 보성땅의 옛 지명 복홀(伏忽)도 밝골로 보고 있고, 공주땅의 옛 지명 소비포(所比浦. 所北浦)나 적오(赤烏)도 새밝골(새붉골)로 유추되고 있다. 부여의 옛이름 소부리(所夫里)나 사비(泗?)도 새밝으로 보기도 한다. 사비근을(沙非斤乙)은 강원도 회양 근처의 삼국시대 지명인데, 이곳의 다른 이름인 적목(赤木), 단송(丹松) 등의 적(赤), 단(丹)으로 보아 새밝은골 또는 밝으너미로 유추된다.

▲ 백두산, 일명 태백산으로도 불리는 한반도 최고봉도 ?에서 비롯됐다.

밝 계통의 산이름들

그렇다면, 이 인명과 지명 등에서 많이 쓰인 ?은 산이름에 어떻게 나타나 있을까? 우리나라의 산들 중 대개 명산이거나 큰 산들에 백(白) 자나 박(朴) 자가 들어간 것이 많은데, 이들의 대부분이 ?에서 연유했음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우선 민족의 영산인 백두산(百頭山·일명 태백산)을 비롯하여, 장백산, 소백산, 함백산, 박달산, 백산, 북수백산, 간백산, 동백산, 백사봉, 백운산, 박산 등 이 계통의 이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은 한자로 취음될 때 주로 백(白)이 되었지만, 박(朴, 博)이나 벌(伐. 罰)로도 된다. 밝은 땅(陽地)이라는 뜻의 ?달(??, ???)은 배달(倍達)로도 되고, 박달로도 되었다. 지금의 새재(鳥嶺)가 박달재(朴達峙)로도 불린 것이라든가, 충주와 제천 사이의 고개에도 박달치라는 지명이 붙은 것은 그 예다.

백(白)은 밝의 음차이고, 또 희다는 뜻을 가지고도 있어 밝다와 통하므로, 많은 산에 이 이름들이 붙어 있다. 실제, 이 이름을 가진 산들 중에는 현지 토박이들이 아직도 백보다 박으로 많이 발음하고 있는 것으로 보면, 백산이 박산이며, 그 원뜻이 밝뫼임을 짐작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백산(白山)은 강원도 삼척군 도계읍, 화천군 화천읍, 전북 부안군, 평남 양덕군과 고원군 사이, 평북 강계군과 회천군 사이, 함남 문천군과 평남 영원군 사이, 함남 신흥군과 풍산군 사이, 풍산군 웅이면 등에 있다.

산이 높아 늘 구름이 머물러 있어 ‘흰구름산’이라는 뜻에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보통 말해 오는 백운산(白雲山)도 같은 계열의 산으로 보아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발은봉(發銀峰·강원도 남부), 발은치(發銀峙·강원도 북서쪽), 발온치(發溫峙·충남 서부), 발이악(發伊岳·제주도), 발리봉(發梨峰·경기도 중남부), 발봉(發峰·낭림산맥 남부) 등도 밝은, 밝이, 밝 등의 음차로 보고 있다.

대관령 남서쪽 평창군에는 높이 1,458m의 발왕산(發旺山)는 바랑뫼일 것인데, 이 이름은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앗(곳의 옛말)+뫼 > ?앗뫼 > 바랏뫼 > 바랑뫼(바랑산)

즉, 양지쪽 산 ‘밝은 산’의 뜻인 발앗뫼가 바랑뫼가 되고 바랑산이 되어 한자로 발왕산이 되었을 가능성이 짙다. 이 산 기슭에 바랑고개(바랑재)와 바랑골이라는 마을도 있다.

수호신 산을 밝으로

?은 산이름에 백(白)이나 박(朴)으로 주로 들어가 있음을 보았다. 위에 든 산이름 외에도 백운대(白雲臺·서울 북한산), 백양산(白楊山·부산), 백석봉(白石峰·충북 진천), 백모덕(白茅德·함남 개마고원), 백마산(白馬山·충북 음성), 백사봉(白沙峰·함북 회령), 박골령(朴骨嶺·낭림산맥 남부), 박달봉(朴達峰·경기 포천 이동면), 박리산(朴李山·평북 국경 근처), 배산(盃山·경남 남동부), 백봉(白峰·경기 미금시 동쪽), 백설산(白雪山·함흥시 북서쪽), 백암산(白庵山·금강산 서쪽), 백우산(白羽山·강원도 홍천 내촌면), 백적산(白積山·강원도 평창 진부면), 백하산(白霞山·전북 무주 최북단), 백화산(白華山·소백산맥 추풍령 북쪽), 발교산(髮校山·강원도 횡성 최북단) 등도 거의 밝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백산(박산. 밝산)이 그 원뿌리인 태백산(太白山), 소백산(小白山), 장백산(長白山), 함백산(咸白山), 대박산(大朴山) 등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산 이름에 왜 밝이 이토록 취해졌을까?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선 옛 사람들이 산을 인간 세계에 광명을 주는 신성한 곳으로 생각하여 그 이름까지에도 상당한 조심성을 기해 붙인 것으로 보여진다. 고을마다 주산(主山)을 정한 것이라든가, 산 위에 제단을 만들어 수시로 제천의식을 행한다든가 하는 것을 보면 산 자체를 고을의 수호신으로 여겨온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또, 고장마다 있는 산신령의 전설도 이러한 조상들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고을에 빛(안녕과 평화)을 주는 터전이라 해서 밝에 연유하는 이름들이 많이 붙여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한자로 표기될 때, 그 음에 가깝고 뜻에도 잘 통하는 백(白)이 많이 씌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즉, 백(白)은 밝을 소리대로 표기하는데 무리도 없거니와 밝다와도 통하는 희다의 뜻을 갖는 글자여서 이 계통의 산이름들에 많이 취해졌을 것이다. 희다는 것은 상징적으로 깨끗하다, 정결하다, 숨김이 없다, 환하다(밝다)의 뜻을 가지므로, 위에 열거한 산이름들과 같이 백(白) 자가 많이 씌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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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문헌고찰

남사고가 절을 한 活人山
금계촌,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국망봉과 배점, 구봉팔문 등의 유래

▲ 초암사.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일대를 돌아보던 시기에 간이수도처로 초암을 짓고 수행하던 터라고 전한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의 도계· 시군계를 이루고 있는 죽령 이북 백두대간 상에는 1987년에 산악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 소백산이 자리하고 있다.

소백산은 나말여초의 문신 최언위(崔彦僞·868~944)가 지은 비로사의 진공대사 보법탑비문(眞空大師普法塔碑文)에 의하면 ‘小伯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 순흥부 조와 동국여지승람 풍기 조에 의하면 이후로는 ‘小白山’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은 적어도 나말여초 이래로 小伯山과 小白山으로 표기되고 불린 산 이름이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방사(方士) 남사고(南師古)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에 의하면,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인 금계촌(金鷄村)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명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금계촌은 곧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와 욱금리 · 삼가리 일원을 이르던 마을 이름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저기(箸記)를 인용하여 ‘병란을 피하는 데에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복거총론 산수조)’이라고 하였다. 남사고는 일찍이 이 일대를 지나가다가 소백산을 보고서는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넓죽 절을 하면서 “이 산은 활인산(活人山·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중환은 이 산의 산수와 그 활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하였다.

‘소백산에 욱금동(郁錦洞)이 있는데 물과 돌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 리다. 그 위에 있는 비로전(비로사)은 신라시대 고찰이다. 골 입구에는 퇴계 이황의 서원이 있다. 대개 태백산과 소백산의 물과 돌은 모두 낮고 평평한 골 안에 있다.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웅장하여도 살기(殺氣)가 적다. 먼 데에서 바라보면 봉우리와 묏부리가 솟아나지 않아서 엉기어 있는 듯하다. 구름이 가듯, 물이 흐르듯 하며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다. 때때로 자색(紫色)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에 떠있기도 한다.’(복거총론 산수조)

소백산은 겨울철이면 북서풍이 심하게 몰아치는 지세를 이루고 있어 겨울의 설화 풍경이 뛰어나다. 또 5월 말 6월 초의 늦봄 시기에 이르면 대간 상의 연화봉~비로봉~국망봉 일대의 광대한 초원지대는 연분홍 철쭉꽃이 만발하면서 천상화원으로 변한다. 다음과 같은 퇴계 선생의 유소백산론(遊小白山錄)에 의하면, 이 일대 철쭉꽃 화원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이미 그 절경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름봉(石凜峯)과 자개봉(紫蓋峯)·국망봉(國望峯)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9리 사이에는 철쭉꽃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때 막 한창 피어 흐드러져 곱고 화려하여 마치 비단병풍 속을 지나가는 듯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듯하니, 참으로 즐거웠다.’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 최초의 사액서원인 수서서원. 퇴계 이황이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격상시켰다.
소백산의 비로봉~국망봉을 잇는 주능선 동쪽 골짜기에는 명승 죽계구곡(竹溪九曲)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봉에서 발원하는 월전계곡의 물과 국망봉에서 발원하는 석륜암골의 물이 중봉 아래쪽 초암사 일대에서 합류하여 맑은 물이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가며 9곳의 절승 경관을 형성하면서 내죽리 소수서원 일대까지 흘러가고 있는 계곡을 죽계구곡이라 이른다.

순흥지(順興誌)와 흥주지(興州誌)에 언급되어 있는 죽계구곡의 구체적 이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 翠寒臺) △제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제3곡 백자담(栢子潭) △제4곡 이화동(梨花洞) △제5곡 목욕담(沐浴潭) △제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제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제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제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죽계구곡의 명칭들은 일반적으로 퇴계 이황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퇴계의 유소백산록에 의하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소백산 주능선 동쪽 기슭의 명승 경관에 대하여 이름 붙인 것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고, 특히 석륜사 벽에 주세붕의 유산록(遊山錄)을 판자에 써서 벽에 걸어둔 것을 보았다는 내용, 또 주세붕이 이름 붙여놓은 백운대를 퇴계가 청운대(靑雲臺)로 개명하였다는 내용 등에 의하면 죽계구곡의 이름은 모두 주세붕이 붙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풍기조에 의하면, 이색(李穡)의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에 ‘순흥 안씨는 대대로 죽계 주변에 살았다’고 하였으며, 풍기 인물조에는 순흥 안씨 중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 등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안축은 고려 충숙왕 11년(1324)에 중국 원의 제과에 급제한 후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제수되었다. 뒤에 상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순흥)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고 한다. 벼슬은 첨의찬성사 흥녕군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고향의 소수서원에 봉향되었다.

그는 고향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및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 등을 읊은 경기체가인 죽계별곡(竹溪別曲) 5장(근재집 권2 참조)을 남겼다. 그 중 소백산 동쪽 기슭 일원의 일부 땅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1장과 2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령 남쪽과 영가(永嘉·안동) 북쪽 소백산 앞에,

천년 흥망 중에도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우뚝 솟은 취화봉은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福田寺)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僧林寺)의 정자,

초암동 초암사와 욱금계(郁錦溪)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반쯤 취하고 반쯤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산 비 내리는 속에 피었네.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고양(高陽)의 술꾼 역이기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위에서 살펴본 죽계구곡 하류 내죽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립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자리는 본래 신라고찰 숙수사(宿水寺)의 자리였으나, 배불사상이 팽배하였던 조선왕조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듬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절을 파하고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에 유생 교육을 겸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이후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1550년에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편액을 내려 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크게 자리잡았다.

서원 동쪽 죽계천 건너 바위면에는 ‘敬(경)’ 자가 각자된 세칭 경자암(敬字岩)이 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할 때 절을 헐고 숙수사의 불상들을 죽계천 깊은 못에 던져버렸다. 그때 이후로 밤이면 밤마다 물속에 가라앉은 불상들이 물 위로 뛰어올라 그 소리가 시끄러워 유생들이 도저히 정신을 집중하여 수학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주세붕이 못에 면한 바위에 ‘敬(경)’ 자를 써서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뉘우치고 부처를 공경한다는 뜻을 표하자 이후로 다시는 그 불상들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소백산 기슭의 명찰과 대찰

소백산 북쪽 기슭의 단양군 가곡면·영춘면 지역에는 9개의 비슷한 산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8개 골짜기가 있어 이를 구봉팔문(九峰八門)이라 일컫는다. 이 구봉팔문의 4봉 북쪽 기슭 연꽃 모양 지형에 자리 잡은 대찰이 바로 구인사(救仁寺)이다. 우리나라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 1백만 명 이상의 신도수를 거느리고 있는, 단일 사찰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신도수를 거느린 대찰이다.

▲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 구봉팔문의 4봉 기슭에 들어 앉았다.

남쪽으로 이 대가람을 두르고 있는 구봉팔문의 이름을 남서쪽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봉은 곧 새밭문봉, 귀기문봉, 배골문봉, 곰절문봉, 덕평문봉, 뒤시랭이문봉, 여의생문봉, 밤실문봉, 아곡문봉이고, 팔문은 곧 새밭문안, 귀기문안, 배골문안, 곰절문안, 덕평문안, 여의생문안, 밤실문안, 아곡문안을 이른다.

구인사는 1945년에 상월조사(上月祖師) 원각(圓覺)이 창건하였고, 1966년 8월에 대찰로 중창하였다. 상월조사는 일심상청 처처연화개(一心常淸 處處蓮華開·마음이 늘 맑으면, 곳곳에 연꽃이 피는도다)라는 법어를 남겼다.

소백산 상봉인 비로봉 남동쪽 달밭골 아래에 위치한 비로사는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고찰이라 전한다. 절 경내에는 고려 태조 22년(939)에 건립한 진공대사보법탑비가 있다. 비문은 최언위가 왕명을 받들어 찬한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진공대사(855-937)는 나말여초의 고승으로, 고려 태조가 남방으로 원정 가던 길에 이곳 비로사 진공대사의 명성을 듣고 도를 듣고자 찾아온 적이 있으며,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대사가 수도로 가서 하례한 바 있다.

비로봉 북동쪽에 위치한 국망봉은 소백산의 제2봉이다. 이 봉우리 남동쪽 순흥면 배점리는 국망봉의 이름 유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조선 중기의 인물 속칭 배충신으로 불리는 배순(裵純)이 살던 곳으로, 현재 그를 기리는 충신각과, 그를 안장한 배충신묘소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선조가 승하하자 배점리에 살던 배순은 3년간 초하루 보름에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했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순이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한 사실은 있을지 모르나, 선조 이전인 1549년에 소백산에 올라 기록을 남긴 퇴계의 유소백산록에 이미 국망봉이란 이름이 보이므로 그 유래담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속전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 말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준 뒤 천년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가 소백산 북쪽 현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의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란 이궁을 짓고 살 때 장자 마의태자가 엄동설한에도 한 벌의 베옷만을 입고서 자주 이곳 국망봉에 올라 멀리 국도 경주를 바라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곤 하여 그러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더 근리하다고 여겨진다.

▲ 배점리 일대. 선조가 승하하자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했다는 배순이 살던 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국망봉 동남쪽 기슭, 죽계구곡이 시작되는 초입에는 고찰 초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우리나라의 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하기에 앞서 명당의 절터를 찾아 소백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던 시기에 간이 수도처로서 초암을 짓고 수행하던 곳이라 전한다.

비로봉 남쪽 금선계곡 유역에 자리한 금계리 일원은 본고 서두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금계촌 일대다. 이곳 일대에는 소와 관련 있어 보이는 쇠바리란 마을과, 용천사(龍天寺)라는 절 이름과 관련 있어 보이는 용천동이란 마을이 있다.

용천동은 일명 법왕사(法王寺), 또는 천왕사(天王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로도 불리던 신라 고찰 용천사가 있었던 곳이다. 용천사는 삼국유사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 전하는 욱면비의 비사(秘事)에 등장하는, 신라 후기 아간 귀진(阿干貴珍)이 살던 집이다. 욱면은 바로 귀진의 집 계집종의 이름인데, 그녀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경덕왕 14년(775) 강주(剛州·현 영주)에서의 일이다. 동량(棟粱) 팔진(八珍)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무리들을 모으니 1천 명이나 되어 이를 두 패로 나누었다.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일찍이 불경을 싣고 가다가 불경의 신령한 힘을 얻어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하여 마침내 바른 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고을 경계에 위치한 미타사(彌陀寺)는 일찍이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절로, 아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하였으므로 계집종 욱면도 따라가서 뜰에서 염불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9년, 경덕왕 을미년 정월 21일에 욱면은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들보를 뚫고 날아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다.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지었다. 그 전당에 방을 써 붙여 욱면등천지전이라 하였다…중략…욱면이 간 뒤에 귀진도 그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하여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전답과 사람을 바쳤다.’

손봉원(孫鳳源)이 쓴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 의하면, 위의 전설에 욱면비가 떨어뜨린 신 한 짝은 곧 죽령 남쪽 월산(月山)에, 또 한 짝은 상주 갑장산에 떨어뜨렸다고 하였고, 그의 육신은 양산 통도사에 떨어진 것을 다비(茶毘)하여 뼈를 거두어 탑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귀진의 집은 희사하여 절을 짓고 천왕사라 이름하였는데, 후대에 천룡사, 또는 용천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사찰전서 미타사조에 의하면, 권상로 박사는 해운(海雲) 보선선사(寶璿禪師)에게 전하여 듣기를 “삼국유사의 강주(康州)는 강주(剛州)의 잘못으로, 진주(晋州)가 아닌 영주(榮州)이고, 하가산, 소백산, 부석사는 모두 영주에 가깝고 진주와는 심히 떨어져 있으며, 또한 1보리사는 풍기 매촌(每村)에, 2보리사는 단양군 월산리(月山里)에 있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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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항공사진 화보

하늘에서 본 백두대간

▲ 연화봉 능선 상공에서 북동쪽으로 본 비로봉~국망봉 능선. 태백산에서 두타·청옥산을 거쳐 삽당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하늘금을 이루고 있다.

▲ 비로사계곡 상공에서 서쪽으로 본 연화봉~죽령 능선. 왼쪽 잘루목이 죽령이고, 화면 가운데 위쪽에 월악산 영봉이 봉긋 솟았다. 오른쪽에 큰 산괴를 이루고 있는 것은 금수산.

▲ 도솔봉 상공에서 본 죽령~연화봉~비로봉 능선. 화면 중간에서 조금 왼쪽으로 하늘금을 이루며 솟은 산은 가리왕산.

▲ 영춘 상공에서 남쪽으로 본 소백산 줄기. 화면 중앙에 일렬로 솟은 것처럼 보이는 검은 봉우리들과 그 사이 골짜기들을 구봉팔문안이라 부른다. 화면 중앙 아래 오른쪽의 좁은 골짜기에 구인사(천태종 본산)가 들어서 있고, 왼쪽 위로 학가산이 하늘금을 긋고 있다.

▲ 하늘에서 본 충주호 최상류의 신단양과 남한강. 화면 중앙 조금 위로 중앙고소도로의 다리가 충주호를 가로지르고 있다.


사진=김영훈 차장 / 헬기 조종=박동하 산림청 산림항공관리소 원주지소 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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