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2구간] 도솔봉 - 르포

아껴 걷지 않을 수 없는 능선길
저수령~시루봉~묘적령~도솔봉~죽령 구간

▲ 비워서 아름다운 숲. 초겨울 햇살이 이파리마냥 나뭇가지 매달려 있다. 저수령에서 죽령까지의 대간 길은 아기자기하다. 1천 미터가 넘는 능선이 크지 않은 파랑을 일으키며 도솔봉 같은 아름다운 바위 봉우리를 빚어놓고 있다.

초겨울 산을 넘는 바람은 파도 소리를 싣고 온다. 시베리아가 고향인 북서 계절풍이 중국 대륙을 지나 서해를 건넌다는 사실 따위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산을 넘는 그 소리는 대양처럼 웅웅거리고, 포효하듯 대지를 흔들고, 포말처럼 대기로 사라지기도 한다.

산에서 듣는 바람 소리는 계절마다 다르다. 바람과 나무의 대화 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무성한 여름과 그 반대인 겨울의 바람 소리가 다른 건 당연하다. 같은 계절이라 할지라도 소나무숲을 지나는 바람과 참나무숲을 지나는 바람소리는 다르다. 지금은 겨울의 입구. 앙상한 나무와 아직 잎을 다 내려놓지 않은 나무들이 어우러져 빚어내는 그 바람 소리들로 하여, 우리네 귀는 소리의 만화경이 된다.

비 내려 묘적령에서 끊고 느긋하게 1박2일 산행

▲ 저수령에서 촛대봉으로 향하는 취재팀. 비가 막 그친 숲으로 흐르는 안개는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은밀하게 만든다.
땅거미가 질 무렵 저수령 마루에 선다. 안개가 우리보다 먼저 와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하늘이 무겁다. 첫날은 산행을 하지 않고 야영만 하기로 했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도 그리 나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다. 비록 하루 이틀이지만 편안한 잠자리를 마다하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 때문이 아니던가.

비 올 확률 80%, 예상 강우량 5~10mm 정도라는 기상예보도 큰 걱정거리는 못된다. 예상량의 비가 밤새 내리고, 내일 아침은 말끔하게 갤 것이라는 근거 없는 낙관이, 기상청의 슈퍼컴퓨터를 간단히 제압해 버린다.

저수령 표석 옆 공터에 텐트를 친다. 저녁밥의 뜸이 다 들기도 전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공터 옆의 정자로 자리를 옮긴다. 비! 밤새도록 내리고 싶을 만큼 마음껏 내려라.

예기치 못했던 복병이 나타난다. 취재팀 이원영씨의 가족이 함께했는데, 아들 상우(3살)녀석이 자꾸 손을 잡아끈다. 우산 펴는 데 재미를 붙이고는 한시도 그냥 있질 못하는 것이다. 이 무구한 독재자한테 무슨 방법으로 항거를 할 것인가. 더욱이 이 친구를 최연소(?) 구간 종주자로 참가시키고픈 속셈이 있는 터라 최대한 비위를 맞추어 주는 수밖에 없다.

밤 10시쯤 우리들의 임시 빌라로 스스럼없이 한 줄기 불빛이 달려든다. 취재팀의 진주 일행들이다. 북쪽으로 나아갈수록 이들의 걸음은 멀어진다. 반가움과 미안함과 고마움은 거리에 비례 상승한다. 만약, 남녀의 관계도 이럴 수 있다면 연애와 결혼은 거의 등식 관계를 이룰 것이다. 모든 인간관계가 암컷과 수컷의 관계와 같지 않다는 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 저수령 북쪽 운수봉 자락의 소백산 관광 목장. 소나무와 낙엽송의 대비가 계절의 순환과 조화를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대가족을 이룬 우리들은 결코 내일 산행에 도움이 되지 않을 건배를 거듭한 후에야 텐트 속으로 들어간다. 텐트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침낭 속의 온도를 높여준다.

▲ 뱀재 위 헬기장에서 솔봉을 향하는 취재팀.
심란한 아침이다. 어젯밤보다 빗방울이 훨씬 굵다. 어젯밤의 낙관은 꼬리를 내린 지 오래다. 사실 이 정도 비는 산행에 큰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취재 산행’이라는 데 있다. ‘취재’라는 짐은, 오관을 100% 이상 가동시켜 준다는 점에서는 고마운 무게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간에게만 해당된다. 카메라에 기준을 두면 그것의 광학적 기능이 곧 우리의 한계다.

승합차에서 내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저수령휴게소 위를 서성이고 있다. 행색으로 보아선 대간 종주자임이 분명한데 선뜻 결정을 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한참 뒤 재킷 위로 비닐 우의까지 입은 이들이 우리 앞을 지난다. 하나 같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비옷 자락을 허리춤에 묶은 모습이다. 약간의 비장감마저 도는 그들 눈에는 우리가 마마보이쯤으로 비칠는지도 모르겠다. 속절없이 하늘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계획을 수정하기로 했다. 애초에는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저수령에서 죽령까지 하루에 끝내기로 계획을 세웠었다. 도상 거리 20km 정도로 운행 속도에 따라서 8~11시간 정도면 주파가 가능하다. 그렇지만 낮 시간이 짧은 동절기에는 무리인 것이 사실이다. 더욱이 이번 구간의 클라이맥스인 도솔봉에서 일몰을 맞을 경우 그 이후는 야간 산행을 해야 한다. 우리들의 산행 스타일과 배치되기도 한다. 오전 산행을 접기로 하고 이번 구간의 60%쯤 되는 묘적령에서 끊기로 했다.

적절한 포기는 정신 건강에 좋다. 더 이상 갈등은 없다. 일기 예보도 그렇지만 경험칙상 오후에는 갤 것이 확실해 보인다. 남는 시간 동안 중간 탈출로인 묘적령 아래 옥녀봉 자연 휴양림까지 자동차를 옮겨 놓기로 했다.

‘낙엽송을 위한 변명’

차를 옮겨 놓기 위해 저수령에서 예천쪽으로 내려서는 길가 산기슭에는 가을의 마지막 선물인 양 절정의 낙엽송 단풍이 물들어 있다. 예천읍에서 풍기쪽으로 방향을 틀어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를 지나면서 세금 내는 소나무로 널리 알려진 석송령(천연기념물 제294호)을 만난다. 산행을 포기하게 만든 비가 뜻밖의 선물을 안겨준다. 당장 먹을 수 없다 하여 ‘신포도’로 단정 짓는 일은 여우나 할 일이지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 묘적령에서 트레일 정비와 벤치 설치 작업을 하는 분을 만났다. 호기심에 한 번 져 봤지만 균형 잡기도 만만치 않다.

정확히 12시에 저수령에서 촛대봉을 향한다. 비는 완전히 멎었다. 우리의 어린 친구 상우가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간 게 조금 아쉽긴 하지만, 오전에 비를 맞으며 걷지 않은 건 잘 한 일 같다.

20분쯤 낙엽송과 참나무가 적절히 섞긴 오르막을 오르자 촛대봉(1,080.6m)이다. 다리의 근육과 호흡이 산길에 적응하기에 적당한 시간이다. 몸을 돌려 세우자 저수령으로 허리를 낮춘 운수봉 기슭의 소백산 농장이 수채화처럼 눈앞에 걸린다. 갈색의 화폭 위로 소나무와 황토빛 단풍이 든 낙엽송의 대조가 돋보인다. 가을과 겨울의 경계다. 정(正)과 반(反)이, 배제가 아니라 합일에 이르는 아름다움의 정점이다.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말은 옳다.

‘낙엽송을 위한 변명’을 좀 할까 한다. 이 나무는 백두산이 고향인 우리 고유의 잎갈나무와는 다른 ‘일본잎갈나무’다. 침엽수이면서도 가을이면 잎이 지고 봄에 새로 돋는, 다시 말해 잎을 가는 나무다. 그래서 잎갈나무이고, 달리 낙엽송이라고 불린다. 한때 이 나무는 ‘산림녹화’라는 구호의 상징이기도 했고 전봇대로도 요긴하게 쓰였다.

▲ 도솔봉 직전의 암릉. 위험 구간은 모두 계단이 놓아져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인건비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목재 값이 싸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 버렸다. 더욱이 ‘일본’이 원산지이다. 어떤 동네에서는 ‘박정희 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군사독재, 산업화, 그리고 민족주의가 뒤엉킨 이 나무의 이미지는 부정적이다. 그렇다고 지금 이 나무에 드리운 이데올로기의 그림자를 변명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나무가 마지막 가을을 장엄하는 절정의 순간이 주는 심미적 아름다움에 한번쯤 눈길을 주자는 것이다.

고속도로를 박찬호의 투구 속도로 달리는 중에도 나는, 없는 듯 있다가도 이맘때면 처절하게 아름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낙엽송을 자연의 이름으로 찬탄한다. 그 황토빛 단풍을 볼 때마다 나는, 어릴 적 새들어 살던 주인집 마당의 고운 황토와 그 위에서 햇볕을 쬐던 벼가 생각난다. 장작불이 최고 온도가 되어 흰 불꽃을 보이기 직전의 노란 불꽃을 떠올리기도 한다. 봄이면 새싹은 또 얼마나 고운가. 나는 이 나무를 미워할 수 없다.

▲ 묘적봉과 도솔봉 사이의 참나무 숲길.
자연 앞에서 보이는 사람들의 심미적 반응은 비슷하다. 사진기자는 낙엽송 단풍을 찍느라 필름 바꾸기에 바쁘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자 꽃잎처럼 떨어지는 잎들이 어깨 위에 앉는다.

촛대봉에서 한 10분쯤 나아가서 어른 키보다 큰 싸리밭을 지나자 투구봉(1,076.5m)이다. 앞서 도착한 정인숙씨가 “야~, 멋있다” 하고 큰 소리로 감탄사를 내지른다. 순전히 ‘뻥’이다. 시야를 가로막는 안개에 대한 반항이다. 모두들 그녀의 반항에 동참한다. “야~, 멋있다.”

바람을 따라서 안개가 오락가락한다. 안개만 아니라면 촛대봉부터서는 북쪽으로 시야가 열리는 봉우리에 올라서기만 하면 소백산이 조망된다. 그렇지만 오늘은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런데 지금 우리를 휘감는 안개도 산 아래서 보면 구름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관측지점에 따라서, 즉 인간을 기준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구름을 밟고’ 간다. 동양화 속 구름을 타고 가는 신선은 절대 상상의 인물이 아니다.

투구봉에서 헬기장을 지나 30~40분 정도 오르자 시루봉(1,110m)이다. 다시 20분쯤 진행하자 배재다. 햇살이 언뜻 고개를 내민다. 고도 차이가 얼마 되지 않아서 크게 힘들지는 않지만, 간간히 재킷의 후드를 뒤집어써야 할 정도로 바람살이 맵다.

기슭으로는 안개가 자욱했다가 어느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다. 배재에서 1시간 못미처서 흙목에서 올라오는 임도가 옆을 지나는 봉우리(1,033.5m)가 나타난다. 반 시간쯤 후 송전탑을 지나 뱀재로 내려선 다음 조금 키를 높이자 널따란 헬기장이다. 바람이 자는 귀퉁이에서 컵라면에 빵을 곁들여 점심을 해결한다.

▲ 도솔봉 기슭 암릉에서 조망을 즐기는 취재팀.
뱀재 위 헬기장에서 오늘 산행을 마치기로 한 묘적령까지는 1시간 남짓으로 솔봉(1,102.8m)만 넘으면 편안한 길이다. 묘적령에서 탈출로로 선택한 고항치로 내려서는 길은 옥녀봉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이기도 하다. 묘적령에서 고항치까지는 40분 정도. 고항치에서 미리 차를 옮겨둔 옥녀봉 자연휴양림(영주시에서 운영)까지는 임도가 잘 닦여 있다. 임도로 가지 않고 1km 정도 샛길을 이용하면 더 빨리 휴양림으로 갈 수 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이곳으로 탈출한 경우는 풍기 택시(054-636-2828)를 부르거나 고항치 남쪽에 있는 원골산장(054-653-5828)을 이용하면 된다.

예상치 못했던 포상 휴가를 받은 군인처럼 희희덕거리며 풍기로 나와서 인삼 튀김을 곁들인 만찬을 즐긴다. 진주팀과 작별을 고하고 우리는 다시 대간 기슭으로 돌아온다. 소백산 자락, 죽령의 풍기쪽 들목인 희방사 입구에서 호사스런 잠자리(모텔)를 얻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내일 전국적으로 황사가 낄 것이라는 우울한 뉴스가 들려온다.


다시 고항치에 선 시간은 아침 9시. 산기슭이어선지 황사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고항치에서 대간 등성이인 묘적령까지는 에누리 없이 1시간이 걸린다. 묘적령에서부터는 오른쪽(동쪽)은 경북 예천에서 영주로 행정구역이 바뀌고, 오른쪽은 단양이다. 소백산 국립공원의 경내로 들어서는 지점이기도 하다.
죽령 때문에 독립성이 도드라진 도솔봉

▲ 죽령으로 내려서는 길. 1280m봉 정상을 우회하여 조릿대 밭을 지나면 산책로 같은 길이 죽령까지 이어진다.
묘적령에서 지게에 벤치를 지고 가는 두 노인을 만났다. 공원에서나 어울릴 벤치가 너무 이질적으로 보여 절로 웃음이 나온다. 길이도 상당히 길어서 게걸음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사연을 물으니 단양군 대강면 사동 유원지에서 백두대간으로 연결되는 등산로를 정비하고 벤치를 놓는 작업을 하는 중이라고 한다. 중부지방산림청과 단양 국유림관리소에서 발주하고, 산림조합중앙회 충청북도지회에서 시행하는 사업이다. 백두대간에 대한 정부 차원의 애정이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벤치는 좀 어색해 보인다. 전시행정이라고 폄훼할 생각은 없지만, 자연 풍광에 어울리게 통나무만 잘라 세워놓아도 좋은 의자가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든다.

묘적봉을 오르기 전 산허리에서 나무계단용 자재를 운반하는 분들로부터 막걸리를 한 잔 얻어 마신다. 우리는 간식을 나누어 드린다. 기분 좋은 물물교환이다.

묘적봉(1,148m)에서 하늘을 우러른다. 눈이 시리다. 하지만 먼 산은 부옇다. 대기 중에 떠 있는 고비 사막이다. 기묘한 동시성. 자연의 호흡은 국경 따위를 아랑곳 않는다.

묘적봉에서 바라본 도솔봉(1,315.6m)은 미륵불이 머무르고 있다는 도솔천을 연상시킬 정도로 수직성이 돋보인다. 소백산을 비롯한 이 일대의 산들이 대부분 부드러운 형상이어서 더 그럴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 품에 안겨 보면 성큼 다가선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접근은 어렵지 않다. 묘적봉에서 1시간 정도면 충분하다. 정상 일대는 까다로운 암릉이지만 철재 계단이 놓여 있어 위험 요소는 거의 없다.

도솔봉에는 두 개의 정상표석이 있다. 하나는 헬기장 옆에 있고, 다른 하나는 헬기장보다 조금 높은 지점에 서 있다. 헬기장은 정상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붐비는 곳이어서 상징적으로 표석을 하나 더 세운 것 같다. 실제로 헬기장에서 바라본 소백산이 더 근사하다. 도솔봉에서 바라본 소백산은 전체와 부분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눈으로 바라본 웅장한 자태는 그야말로 군자의 풍모고, 산 주름은 손금처럼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읽혀진다.

도솔봉은 죽령 때문에 독립성이 도드라진다. 이 봉우리를 목표로 하루 산행을 하는 사람들도 많다. 단양군 대강면 사동리에서 올라 죽령으로 떨어질 수도 있고, 죽령에서 시작하여 옥녀봉 자연휴양림쪽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하지만 묘적봉을 포함하여 도솔봉 일대 전체를 소백산의 봉우리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름만 봐도 소백산과 연관성이 짙다. 촛대봉, 묘적봉, 도솔봉 등 이름부터가 불교적인데, 소백산 정상인 비로봉 즉 비로자나부처의 품 안임을 일러준다.

도솔봉 기슭 바람이 자는 곳에서 컵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죽령을 향한다. 도솔봉에서 삼형제봉을 지나 1280m봉까지는 조금 지루하다. 하지만 1280m봉 정상을 우회하면서부터는 순하고도 긴 내리막길이 죽령까지 계속된다. 마치 공원을 산책하는 듯한 이 길은 샘터(석간수)를 지나면서 아주 예쁜 풍광을 선물해 준다. 낙엽송숲 사이로 난 오솔길에는 마침 낙엽송 잎들이 소복이 쌓여 있다. 마치 그곳으로만 햇살이 내려앉아 있는 것 같다. 지나온 길과 앞으로 열린 길을 번갈아보게 만든다. 아껴 걷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죽령(697m) 마루에 선다. 신라 제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에 열린 길이다. 하늘재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고갯길이다. 경북 내륙과 충주 일대를 잇는 고개로 상당히 바쁜 고개였으나, 지금은 그 아래로 터널이 뚫려 중앙고속도로가 달리고 있다.

쇠락한 고개의 운명을 상징하듯 낙엽들이 뒹구는 고갯마루에서 소백산을 바라본다. 장쾌한 능선과 한여름에도 얼굴을 얼얼하게 하는 바람이 벌써 다음 산행을 설레게 한다.

즐거운 백두대간을 위한 제언 (10)

석송령

조금만 여유 가지면 들여다볼 수 있는 국토의 고샅

석송령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소나무 중 하나다. 세금을 내는 나무라 하여 사람들의 주목을 한껏 받고 있기도 하다. 그 사연인즉, 지금으로부터 80여 년 전 이수목이라는 분이 세상을 뜨면서 자신의 땅을 이 나무에 물려주자, 마을 사람들이 그의 뜻을 기려 등기를 함으로써 재산가가 된 것이다.

높이 10m, 줄기둘레 4.2m, 펼쳐진 가지 넓이가 동서 32m, 남북 22m로 그늘 면적만 300평이 넘는 이 나무는, 600여 년 동안 경북 예천군 감천면 석평 마을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이 나무가 있는 석평 마을은 이번 구간의 기점인 저수령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예천온천쪽으로 가다 보면 길가에 있다. 일삼아 가보고 싶은 나무이긴 해도 그것만을 위해 일부러 시간을 내기란 쉽지 않다. 조금만 여유를 가지면 대간 종주는 우리 국토의 고샅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천연기념물 제294호).

윤제학 / 허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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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2구간] 도솔봉 - 역사문화

神山 관념이 탄생시킨 죽령 다자구할머니
조선조에는 죽령사 세워 산신의 힘 빌어 기복 기원

▲ 죽령을 넘어서 본 소백산. 죽령은 신라 아달라이사금 때 길을 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지녀온 산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관념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을 지적하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신산(神山) 관념이다. 신산이란 말 그대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이름붙인 산이고, 신산에 머물고 있는 신이 바로 산신이다.

산을 그저 대지에 솟아 풀과 나무가 자라는 물질 덩어리로 보지 않고, 정신적 존재의 위상으로서 신이 깃든 장소로 보았다는 사실은 우리 겨레의 산악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신성했는지, 다시 말해 옛 선조들의 삶과 산 사이의 성스러운 문화적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신산 중에서 민중들의 마음속에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깊숙이 자리 잡은 일반명사는 삼신산(三神山)이다. 그 삼신산에 머물고 계시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려 늘 돌보고 계신 이가 바로 삼신할머니다.

삼신할머니가 누구인지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우리 겨레의 여성 신화 중에 가장 기원적이고 대표적인 존재가 되는 마고할미의 계통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흥미롭게도 죽령 고갯마루로 들어서는 중턱쯤의 충북 단양군 용부원리에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현장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죽령의 다자구할머니라는 산신이다.

한라산 설문대할망과 지리산 천왕봉 마고할미

▲ 단양쪽 죽령 아래 용무원리에 있는 죽령산신당.
삼신산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중국 문헌에서 가리키는 삼신산은 발해만 중에 있다고 하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을 가리킨다.

기원전 5∼3세기의 전국시대에 연·제나라의 방사(方士)가 주장했는데, 그곳에는 신선이 살며, 불로장생하는 신약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국시대 말 여러 임금과 진시황제, 또는 한무제 등이 사자(使者)를 보내 바다에서 그 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백두산 혹은 태백산이라는 설도 있고, 조선 후기의 몇몇 실학자들은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우리의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한라산과 지리산에는 삼신산의 삼신할머니에 해당하는 설문대할망(한라산)과 노고 혹은 마고할미(지리산) 신화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지리산의 남사면 봉우리 중에 하동과 산청의 경계에 있는 삼신봉 역시 삼신산 관념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기록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의 <탐라지>에 있는데, 제주도 설화에 의하면, 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으며,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옮기던 중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됐다는 것이다. 제주도민들에게 설문대할망은 제주도의 지형을 만든 신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산신당 현판.
한편 지리산에는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천신(天神)의 딸이라고 한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佛道)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다 딸만 8명을 낳았는데, 딸들을 한 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었으며,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전래신앙과 불교의 문화복합과 아울러 지리산이 전래신앙의 진원지라는 사실이 표현됐다.

예전에는 신당(神堂)의 일종으로서 노고당 혹은 할미당이라는 것도 있었다(노고라는 말은 할미의 한자말이다). 제주도에서는 마을 수호신당인 본향당(本鄕堂)에 가는 것을 흔히 할망당에 간다고 하는데, 노고할미는 부와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표상된다.

이렇게 지리산이나 기타 여러 지방에서 산재하는 할머니산신의 기원적인 신화는 아마도 신라의 박제상이 쓴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할미일 것이다. 물론 마고에 대한 신화는 중국에도 있지만 우리의 신화와 차이가 난다.

중국의 절강성 천태현의 천태산에는 마고선녀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중국의 마고는 처녀신이고 장수를 담당하는 도교의 신이다. 중국 문헌인 <신선전(神仙傳)>에 마고가 한나라 환제 시대 신선인 왕원과 함께 채경의 집에 강림해 연회를 베풀고 신선세계의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 있다.

전국에 퍼져 있는 마고할미 전설

▲ 죽령 인근 마을. 지금도 다자구할머니 전설을 간직하며 매년 3월과 9월에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마고선녀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동해가 3번씩이나 뽕나무밭이 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고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麻姑城)의 여신으로서 할머니신이고 중앙아시아의 영역을 아우르는 창세신이자 인간의 시조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이상과 같은 원형적인 마고할미 설화는 후대에 와서 전국 각 지역에 전파되어 마고할미에 관한 설화를 낳았다. 예컨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에도 다음과 같은 마고할미 이야기가 있다.

▲ 풍기쪽 죽령 옛길의 풍광.
‘인근 산에 마고할미가 살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여서 앞치마에다가 돌을 싸다가 이곳에 포개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충주 일대를 돌아다니던 마고할미들이 이곳에서 마주쳤다고 한다. 평소 사이가 나쁜 두 마고할미는 서로 힘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한 마고할미가 옆에 있던 큰 돌을 던졌다. 그 돌은 논 가운데로 날아가더니 땅 속에 박혀 우뚝 섰다. 이를 본 다른 마고할미가 역시 커다란 돌을 그곳에다 던졌는데, 먼저 던진 돌 위에 떨어져 두 개의 돌이 겹쳐져 하나의 돌처럼 되어 버렸다. 이때 마고할미들이 던진 돌이 입석리의 선돌이 되었다.’

그밖에도 전남 지리산, 해남, 강화도, 그리고 경기도 양주, 충북 보은 등지에서도 마고할미와 관련된 설화가 노고단 혹은 노고산, 노고산성이라는 산이름과 기타 자연물들과 관련되어 전승되고 있다.

그밖에 삼국유사에는 여성 산신으로서 지리산성모, 가야산신 정견모주, 하백녀 유화 등이 있다. 한편 중국에는 대모신(大母神)으로 인류를 창조한 여와(女)가 있고, 산해경에는 해와 달의 어머니로서 해와 달을 출산하고 돌보는 숭고한 역할을 담당했던 희화(羲和), 그리고 서왕모(西王母)와 무라(武羅) 등이 대표적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가이아와 헤라가 잘 알려져 있는 지모신이기도 하다. 이렇게 초기에는 여성이 산신의 원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남성 산신으로 주류가 바뀐 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로 변천된 사회적 배경과 맞물리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산에 신이 머물고 있어서 경외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제사로 받들게 된 시기는 이미 고대에서부터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은 살아서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고 했으니 우리 겨레에 있어 산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풍기쪽 죽령 옛길의 풍광.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삼산(三山), 오악(五岳)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서 대, 중, 소사(小祀)로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신라는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주요 산에 대해 국가적인 제의를 벌였으며, 그 중 삼산은 왕도인 경주에 인접한 세 산으로, 삼산의 산신은 직접 처녀의 모습으로 김유신에게 현신했다.
오악은 외곽의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으로서 그중 지리산과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계통에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도 마찬가지였고, 역사적으로 고려는 사악(四岳)에, 조선은 오악(五岳)에 제사하고, 전국의 명산들을 호국신으로 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령 산신의 제의에 대한 역사적인 서술은 언제부터 나타날까? 죽령산신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에 보인다. 태종 14년에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삼아 의례를 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죽령산(竹嶺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죽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의 경계에 있는 높이 689m의 고개로, 신라 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년)에 길을 연 이후 삼국시대 동안 지리적인 요충지가 됐다.

죽령산신치제문(竹嶺山神致祭文)에는 ‘죽령산신은 우리나라의 남악으로 남도를 지킨다(竹嶺山神 卽我國家之南嶽 乃南道所鎭也)’라고 했으니 죽령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잘 일러준다. 죽령 말고도 이렇게 고갯길에 산신제를 행하는 사례로는 대관령이 있으며, 지금도 대관령 고갯마루의 성황사에는 강릉 단오제를 맞추어 대관령 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를 모시고 있다.

산적 토벌에 큰 공 세운 죽령 다자구할머니

죽령 아래에 있는 용부원리의 산신당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서 죽령산신제를 지낸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마을에 전승되어 내려온다.

▲ 죽령 고갯마루의 석표.
옛날 이곳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는데, 산이 험준해 관군도 산적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소굴에 들어가 “다자구야”하면 산적이 자고 있는 것이고, “덜자구야” 하면 도둑이 안자고 있는 것으로 관군과 계획을 짰다. 두목의 생일날 밤술에 취해 산적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산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죽령사라는 사당을 지어 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제사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마을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마을의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죽령고갯길에서 만난 용부원리의 할머니는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다자구할머니에 대한 믿음이 깊다고 증언했다. 설화에 등장하는 ‘다자구’, ‘덜자구’라는 말도 참 재미있는데, ‘다 잔다’ 혹은 ‘덜 잔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고, 또 다른 해석은 예부터 대나무가 많아서 대재라고 했던 죽령(竹嶺)의 우리말 이름에다 할미를 뜻하는 노고(老姑)의 옛말인 구, 곧 ‘대재구’가 ‘다자구’로 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분명 다자구할머니는 우리 겨레의 삼신할머니인 마고의 딸일 것이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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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2구간] 도솔봉 - 식생

고도에 맞추어 식물도 변하기 시작한다
바위지대에 등대시호·솔나리 자라고 왜솜다리는 최대 군락으로 추정

▲ 개옻나무. 숲속에 자라는 작은키나무로, 높이 7m에 이르며, 꽃은 6~7월에 암수딴그루에 핀다. 단풍이 아름답다.

문봉재~저수재를 거쳐서 죽령에 이르는 백두대간 구간은 백두대간의 고도가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하며, 지금까지와는 다른 산세를 느낄 수 있는 구간이다. 이 구간에는 최고봉인 도솔봉이 해발 1,314m의 높이를 자랑하며 우뚝 솟아 있다. 이렇게 해발 1,300m대를 넘어선 이후 백두대간은 소백산 산군으로 들어서서 1,300~1,400m대를 유지함으로써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른 위세를 보인다.

도솔봉 구간은 높이에 있어서 덕유산 산군 이후 처음으로 백두대간이 1,300m를 넘어서는 곳이다. 1,500~1,600m대를 자랑하는 덕유산 산군의 지봉(1,302m) 이후에 전북과 충북, 경북을 다 지나오는 동안 백두대간은 높이 면에서는 이렇다 할 높은 산을 세우지 못한다. 200km에 이르는 이 구간에서 800~1,000m대의 고만고만한 산들만을 거느리면서 겨우 대간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할 뿐이고, 삼도봉(1,172m), 황학산(1,111m) 같은 곳에서 높아보았자 1,100m급이 고작이며, 이 구간의 유일한 국립공원이자 명산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속리산조차 1,057m로서 1,100m에도 이르지 못한다.

솔나리 높은 산에 드물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솔잎처럼 가는 잎을 가져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법정보호식물이다.
높은 산들이 없으니 그 기운은 속리산, 희양산(998m), 조령산(1,026m), 황장산(1,077m) 등에서 바위로서 표출된 듯하다. 높지 않은 산들에서 넘치는 열기를 바위로 형상화해낸 이곳 백두대간의 특이한 경관에는 땅의 기운만이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땅을 모태로 살아가는 식물들도 이처럼 열기 넘치는 곳들에서는 특별한 모습을 보이기 마련이다. 평범한 곳에서 살 수 없는 그런 식물들이 높지는 않되 색다른 바위지대에서 터를 잡은 것인데, 이런 식물들 가운데는 고산식물이 많다.

고산식물들이 위도가 낮고 고도도 낮은 이곳 산들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이곳 백두대간 능선의 바위지대가 식물 생육에 있어서 고위도 지방의 환경과 비슷하기 때문이 것으로 여겨진다. 숲이 있는 능선보다 바위가 있는 능선은 낮에는 덥고 밤에는 추우며, 직사광선을 더욱 많이 받을 수 있는 등 고위도 지방의 환경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200km만에 식물 모습도 달라져

등대시호 덕유산 이북의 높은 산 능선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남한에서는 백두대간의 몇몇 산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식물이다.
백두대간에 터를 잡아 살아가고 있는 이들 고산식물은 과거 빙하기 때 한반도가 추워지자 아래쪽으로 내려와 살던 북방계 식물들이다. 북방계 식물들은 빙하기가 지나서 차츰 지구 온도가 따뜻해지기 시작하자 더 이상 남쪽에서 살 수 없게 됐고, 일부만이 백두대간 산꼭대기로 쫓겨 올라가서 겨우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북방계 식물들이 피신처를 찾아 이동할 때, 한라산, 지리산, 가야산, 덕유산, 설악산 등 높은 산에서는 그나마 덜 가혹한 조건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덕유산~소백산 구간의 저산지대에서는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어려움을 바위지대가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저산지대의 바위지대에 살아남은 북방계 식물로 대표적인 것이 솔나리, 등대시호, 왜솜다리 등이고, 이밖에 바위떡풀이나 잣나무 같은 것들도 이런 식물로 볼 수 있다. 백두대간 도솔봉 구간에서도 이런 식물들이 없을 리 없다. 바위지대라는 것을 만들어 겨우 북방계 식물들을 키워내는 덕유산 이후 지금까지의 구간보다 높이 면에서 월등히 높은 산이기 때문이다.

꽃향유 산과 들에 흔하게 자라는 꿀풀과의 한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한쪽을 향해서 피며, 꿀이 많아 곤충이 많이 찾아온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그리 높은 것은 아니어서 아무 숲이나 아무 능선에서 이들 식물들을 키워내지는 못한다. 여전히 귀하디귀한 식물로서 특별한 곳에서만 이들을 품어 보듬고 있다. 덕유산~소백산 구간의 저산지대 산들과 같은 방식으로 바위지대를 발달시키고 그곳에서 이들을 키우고 있다.

도솔봉 정상은 단지 고도만이 1,300m를 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온통 바위의 성으로 만들고 있다. 이곳에 북방계 식물인 솔나리와 등대시호가 자라고 있다. 솔나리는 만주와 우수리에서부터 한반도까지 분포하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야산, 남덕유산, 구미 금오산 등을 남쪽 경계로 하여 경북, 충북, 경기도, 강원도 지역의 높은 산에서 드물게 발견된다. 꽃은 6~8월에 줄기 끝에서 밑을 향해 피며 밝은 홍자색이고 지름 6~10cm이다.

달맞이꽃 남미 원산의 두해살이 귀화식물로, 전국에 퍼져 자라고 있으며, 꽃은 7~10월에 피는데, 저녁에 피었다 아침에 시든다.
잎이 소나무 잎처럼 가늘어서 ‘솔나리’라는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으며, 이 특징으로 우리나라의 다른 나리 종류들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세계적으로 보아도 좁은 지역에서 자라고 있는 희귀식물이며, 꽃이 아름다워 함부로 캐기 때문에 절멸 위기에 놓여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경부가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서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백두대간을 따라 지리산을 출발한 이후, 덕유산, 속리산, 조령산 등지에서 자라고 있었고, 앞으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바위지대가 발달한 여러 산에서 만날 수 있는 식물이다.

등대시호는 세계적인 분포가 솔나리와 비슷한 산형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만주와 우수리, 그리고 한반도에만 자라므로 세계적으로 볼 때 분포지역이 매우 좁다. 백두산에서는 해발 2,000~2,500m 지역에 분포하는데, 수목한계선 부근의 고산초원에서는 무리 지어 자라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뿌리줄기가 발달해 굵게 자라며, 가지가 갈라진다. 줄기는 높이 20~70cm인데, 남한에서는 70cm까지 크게 자라는 경우를 잘 볼 수 없다. 꽃은 8~9월에 노란 색으로 피고, 열매는 9~10월에 익는다.

도솔봉의 등대시호는 백두대간을 따라 설악산에 이를 때까지 더 이상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요성을 더한다. 남한에서 분포지가 매우 한정된 희귀식물로서 지금까지 발견된 곳은 설악산, 도솔봉, 속리산, 남덕유산뿐이다.

바위지대 정상 부근은 북방계 식물 보금자리

물레나물 산속의 양지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6~8월에 피며 지름 4~6cm이고, 낫처럼 생긴 꽃잎이 물레 모양으로 늘어선다.
그런데 이곳의 솔나리와 등대시호는 지리산에서 대간을 따라오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자생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다른 장소에 비해서 개체수가 많은 것이다. 등대시호의 경우 속리산에서 십여 개체가 생육상태도 안 좋은 채로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처해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백여 개체가 백두산의 자생지에서처럼 잘 자라고 있다. 솔나리도 최근 개체수가 감소 추세에 있기는 하지만, 지리산부터 지금까지 나타났던 개체들에 비하면 숫자가 풍부해졌음을 알 수 있다.

묘적봉(,1148m)에서 대간을 따라 도솔봉쪽으로 오노라면 그 전주곡쯤에 해당하는 식물을 만날 수 있는데, 대규모 군락을 이루고 있는 왜솜다리가 그것이다. 대야산 정상부와 조령산 구간에서 몇몇 개체를 만났던 그 왜솜다리가 큰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설악산 등 강원도의 높은 산에도 자라고 있지만, 이곳처럼 많은 개체가 자라는 곳은 매우 드물다.

산앵도나무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높은 산 능선에 자라는 한국특산의 떨기나무로, 가을에 익는 열매는 갈증을 달래기에 좋다.
고도가 높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금까지와는 달라진 식물상이나 식생의 모습이 또 있다. 속리산부터 황장산에 이르는 긴 구간의 주요 식물 가운데 하나였던 꼬리진달래가 이 구간부터는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구간에서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태백산에 이를 때까지 오래도록 백두대간을 따라 나타난다.

하지만, 생육지는 백두대간 능선이 아니라 계곡이나 마을쪽으로 뻗은 가지능선으로서, 이런 곳의 고도는 도솔봉의 경우 800~1,000m 정도이고, 백두대간이 북쪽으로 가며 위도가 높아질수록 그 고도는 더욱 낮아진다.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소나무가 많이 보이지 않는 것도 달라진 모습이다. 능선에서 소나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니어서 간간이 보이기는 하지만, 황학산 이후 저지대 산지의 백두대간 주능선에서 주를 이루던 모습과는 완전히 달라졌다. 하지만 마을 근처에서부터 대간 가까이에 이를 때까지 여전히 많은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대간 주능선에서 소나무를 대신해 숲을 이루는 식물은 대부분의 경우 신갈나무다.

야광나무 속리산 이북의 산속 물가에 자라는 장미과의 작은키나무로, 높이 3~6m이며, 꽃은 5~6월에 피고 꽃잎이 5장이다.
백두대간은 도솔봉에 비해서 고도도 더욱 높고 덩치도 큰 소백산에 이르면 틀림없이 북방계 고산식물들을 위한 더욱 훌륭한 보금자리를 마련해 두었을 것이다. 소백산의 문턱격인 도솔봉을 지나면서 조금 보여주었던 북방계 식물들을 더욱 많이,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보여줄 것이다. 고산식물의 종류 자체도 많아질 것이며, 각 식물의 개체수도 많아질 것을 기대할 수 있다. 백두대간의 높이가 달라지면 북방계 고산식물처럼 특별한 종류의 식물들은 그 종류와 사는 모습이 당연히 바뀌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백두대간 도솔봉 구간은 주능선의 높이에 걸맞게 동쪽과 서쪽으로 여러 골짜기와 능선들을 빚어 놓고 있는 품이 큰 산이다.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뻗어가며 솔봉(1,103m), 묘적봉, 도솔봉, 삼형제봉을 세워 놓고, 이 산줄기를 경계로 동쪽의 경북 예천시 상리면, 영주시 봉현면과 풍기읍, 서쪽의 충북 단양군 대강면을 가르고 있다.

좀담배풀 숲속에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아래를 향해 피며, 열매는 점성이 있어서 잘 달라붙는다.
동쪽 경북 지역으로는 깊숙한 곳까지 마을들이 발달해 있는 반면에 서쪽 충북 지역으로는 발달한 마을은 작고 유역은 더욱 커서 자연성이 높은 편이다. 특히 도솔봉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죽령쪽으로 2km쯤 가다 만나는 삼형제봉에서 서쪽을 향해 뻗은 가지 능선은 해발고도 1,000m를 유지한 채로 10여km를 뻗어나간다. 이곳에서 발달한 수계는 대강면의 남조천을 거쳐서 충주호로 유입된다. 도솔봉 정상 일대에서 남서쪽 대강면쪽으로 4~5km나 흘러내리는 길내골은 산자락 사동리에 사동유원지를 발달하게 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고 골이 깊다.

이처럼 너른 산세와 수계를 가진 도솔봉 일대는 묘적봉 아래의 묘적령을 경계로 하여 소백산 국립공원의 남쪽 끝을 이루고 있기도 하다. 죽령을 경계로 소백산과는 다른 산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생태계 보전 차원에서 국립공원에 포함시켜 관리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좀바위솔 높은 산의 바위 겉에 드물게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줄기는 높이 8~10cm이며, 만주와 한반도에만 분포한다.
도솔봉 서쪽의 사동리 일대에는 굴참나무, 졸참나무, 느릅나무, 야광나무, 물푸레나무 같은 활엽수들과 침엽수인 소나무가 숲을 이룬 가운데 고추나무, 붉나무, 산초나무, 조팝나무, 소태나무, 광대싸리, 조록싸리 등의 떨기나무가 중간층을 이루고 있다. 숲 바닥과 가장자리에는 남산제비꽃, 나도송이풀, 꽃향유 등이 자라고 있다.

또한 마을 근처에는 일본이깔나무 조림지가 넓게 자리 잡고 있기도 하며, 인위적인 간섭에 의해 침투한 산딸기나무, 곰딸기, 칡 등이 자라고 있다. 마을을 벗어나 산 속으로 들어서도 백두대간 능선까지 여전히 일본이깔나무의 조림지를 만날 수 있다. 사동리쪽에서 백두대간쪽으로는 임도도 8km 이상이나 놓여 있는데, 곳곳에서 산사태를 일으키고 있으며, 1,000m가 넘는 곳의 임도 주변까지 산 아래에나 자라는 산딸기나무, 질경이, 꿀풀, 큰뱀무 등의 자생식물과 달맞이꽃, 미국쑥부쟁이, 개망초 같은 귀화식물들이 유입되고 있다.

참산부추 산 능선과 사면에 자라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피며, 잎이 납작하므로 산부추와 구분할 수 있다.
마을과 백두대간 사이 중간 지역 중에서 일본이깔나무나 잣나무 조림지 이외의 곳에는 굴참나무를 비롯한 활엽수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물박달나무, 물오리나무, 졸참나무, 산벚나무, 팥배나무, 당단풍나무 등이 큰키나무로서 숲을 이루고 있고, 생강나무, 오미자, 산수국, 고광나무, 병꽃나무, 국수나무, 노린재나무, 진달래, 철쭉나무, 고추나무, 쇠물푸레 등이 중간층을 이루고 있다. 중간 지역 능선의 굴참나무나 졸참나무 숲에서는 중간층을 이루는 떨기나무인 꼬리진달래가 큰 군락을 지어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백두대간 마루금이 가까워지면 자연성이 높은 곳에서는 신갈나무 군락이 발달한다. 특히 도솔봉 정상에서 사동리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 일대는 수령이 오래된 신갈나무가 천연림에 가까운 모습으로 숲을 이루고 있다. 아름드리 신갈나무숲 속에 투구꽃, 노루오줌, 개시호, 오리방풀, 속단, 수리취, 단풍취 같은 깊은 산에서 볼 수 있는 여러해살이풀들이 자라고 있다. 도솔봉 일대의 자연성이 회복되면 어떤 숲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이라 할 수 있다.

대간엔 신갈나무숲, 중간층엔 굴참나무숲이 발달

새끼꿩의비름 산속의 바위 근처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피며, 꽃과 함께 살눈이 생겨서 번식한다.
백두대간 능선의 숲에는 신갈나무가 주종을 이루면서 물푸레나무, 당단풍나무, 소나무 등의 큰키나무가 섞여 자라고 있다. 떨기나무로는 산앵도나무, 철쭉나무, 개옻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철쭉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곳이 많다. 숲 바닥에는 산꿩의다리, 투구꽃, 새끼꿩의비름, 큰참나물, 고본, 수리취, 단풍취, 미역취, 가야산은분취, 죽대, 일월비비추 등의 풀이 자라고 있다. 또한 능선의 바위지대에는 구실사리, 만주우드풀, 물통이, 바위떡풀, 좀바위솔 등이 분포한다.

정상부의 바위지대에서는 신갈나무가 키가 작아져서 떨기나무처럼 자라고 있으며, 뽕잎피나무, 쇠물푸레 등도 섞여 있고, 풀로는 구실사리, 돌양지꽃, 등대시호, 개쑥부쟁이, 구절초, 왜솜다리, 솔나리, 대사초 등이 자라고 있다. 도솔봉 정상은 헬기장으로 되어 있고, 주변에서 질경이, 개쑥부쟁이, 구절초, 개솔새 등이 보인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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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르포

‘골기(骨氣)를 감춘 육산(肉山)’ 줄기에 서서
차갓재~황장산~벌재~문복대~저수령

▲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의 하나였던 황장산 정상 직전의 암릉. 황장산에는 지금 황장목이 없다. 그나마 정상 전후의 암릉 주위에 품격 높은 황장목들이 이름값을 하고 있다.

산 그림자 위로 쑥부쟁이가 하얀 웃음을 흩뿌리는 이른 오후. 경북 문경시 동로면 안생달 마을. 더 이상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 무의미한 곳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다리만으로 백두대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수없이 경험하지만 늘 처음인양 설레는 순간이다.

▲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가운데 지점인 차갓재.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라 쓴 장승 사이로 문경 `산들모임`에서 세운 기념 표석이 서 있다.
오전 내내 비가 올 듯 말 듯하던 하늘도 얼굴을 펴고 있다. 비끼는 햇살이 아직 푸른 나뭇잎 위에서 춤을 춘다. 언제나 숲은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유혹한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진주의 취재팀과 악수를 나눈다. 우리의 반가움은 과장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언제나 우리의 이런 만남이 좋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무엇과는 작별인 것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걷기예찬> 51쪽에서 재인용, 현대문학)

적어도 백두대간에서만큼은 나는 소로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걷기’라는 점에서 산책과 대간 종주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대간 종주는 산책과 다르다. 그것보다는 훨씬 거칠고, 때론 지루하고, 고상하지도 못하다. 그래서 대간 종주는 좋은 동반자가 필요하다.

황장산의 원래 이름은 작성산

▲ 황장산 정상 전 암릉(묏등바위)를 오르는 취재팀.

안생달에서 차갓재로 향한다. 지난밤 내린 비로 아직 숲은 축축하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민다. 숲은 투명한 가을 하늘을 닮아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등성마루로 오른다. 20분쯤 지나자 차갓재다. ‘백두대장군’, 그리고 ‘지리여장군’이라고 쓴 두 장성이 울퉁불퉁 웃으며 서 있다. 장성 사이로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간지점’이라고 쓴 자그마한 표석이 보인다. 문경 ‘산들모임’ 사람들이 대간 종주자들을 위해 세운 표석이다. 돌에 새긴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백두대간이 용틀임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여리 대간 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다. 넉넉하고 온후한 마음의 산사람들이여! 이곳 산 정기 얻어 즐거운 산행하시길….’

문경 산악인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게 전해온다.

차갓재(740m)에서 황장산으로 향하는 오름길은 제법 가파르다. 가팔라지던 숨결이 편안해질 즈음, 길은 완만한 내리막을 이루며 호젓해진다. 내리막이 끝나자 또 한 고개가 나타난다. 대간꾼들이 작은차갓재라고 이름 붙인 곳이다.

작은차갓재부터 대간길은 황장산을 향해 긴 호흡으로 키를 높인다. 30분쯤 오르자 암릉이 나타난다. 황장산이라는 넉넉한 이름에 비하면 꽤나 험한 인상을 한 암릉(묏등바위)이다. 겨울 같으면 조금 긴장을 해야 할 곳이다. 줄을 잡고 올라서자 시원한 눈맛의 성찬이 펼쳐진다. 북동쪽으로 도락산(964.4m)과 황정산(959.4m)이 가까이 다가선다. 도락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상선암계곡은 산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지나온 길로 몸을 돌려세우자 대미산(1,115m)이 우뚝하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 우뚝함이 보기에 좋다. 대미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더 좋은 산이다.

▲ 묏등바위를 내려서서 느긋이 조망을 즐기고 있다.

묏등바위에서 다시 30분쯤 기분 좋은 암릉을 지나자 황장산(1,077m) 정상이다. 이름에 걸맞게 펑퍼짐한 너럭바위 위에 새재산악회가 세운 정상표석이 서 있다. 사방으로 조망의 즐거움은 아직 잎이 무성한 참나무숲의 몫이다. 감히 황장산의 풍모를 ‘골기(骨氣)를 감춘 육산(肉山)’이라고 말해 본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황장산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황장산의 이름은 본디 작성산(鵲城山)이었다. 산경표에도 대동여지도에도 작성산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황장산 북동쪽의 문안골에는 지금도 작성산성의 암문이 남아있다. 또한 이 산은 황장봉산이라고도 불리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黃腸山(황장산)’이라고 한자로 표기돼 있다.

그렇다면 이 산이 언제부터 황장산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조선 숙종 조에 이르러 금산(禁山) 제도 대신 봉산(封山) 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라는 것이 문헌 고찰의 결과다. 왕실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면서부터 작성산이라는 이름이 황장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지정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보통명사가 ‘황장산’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지금도 명전리 옥수동에 봉산표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경시에서 펴낸 <문경의 명산>이라는 책을 보면 ‘봉산으로 정한 곳은 이곳 외에도 32곳이나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표석을 발견할 수 없고 유독 이곳에서만 발견되었다(124쪽)’고 하는데, 문헌 고찰이 약간 부족했던 것 같다. 전영우 교수(국민대 산림자원학과)가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현암사, 2004)를 보면 경북 울진군 소광리에서도 황장봉표가 발견됐으며, 강진, 순천, 고흥에 하나씩 외에 강원도와 경상도에 걸쳐 총 60곳에 황장봉산이 지정됐다고 한다.

▲ 황장산 정상 전 암릉. 대미산이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조금 장황한 감이 있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황장목(黃腸木)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황장목이라는 이름은 줄기의 고갱이 부분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한다.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금 황장산에는 황장목이 없다. 대부분 활엽수림으로 천이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상 앞뒤 암릉 주위에 몇 그루가 우람한 자태로 이름값을 하고 있다.

우리의 소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선박의 재료로, 건축재로, 관곽재로 베어진 것도 모자라 솔잎혹파리로부터 혹사를 당하더니, 최근에는 재선충 때문에 전국의 소나무가 떨고 있다. 아직은 우리 숲의 약 25%가 소나무라는데 이 정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서울 사는 인간들은 아예 별이 뜨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황장산에서 벌재(620m)까지는 도상거리 약 5.5km를 서너 번 크게 솟구쳤다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약 460m 정도 허리를 낮추어 벌재에 닿는다. 소요 시간은 상황에 따라서 2시간30분에서 3시간 정도. 황장재를 지나서는 약간의 암릉을 지나지만 발바닥의 감촉이 오히려 경쾌할 정도다.

▲ 황장산 정상 앞 암릉을 내러서는 취재팀.
폐백이재를 지나면서부터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완만한 오르내림이어서 랜턴을 켜지 않고도 걸을 만하다. 7명의 취재팀은 나름의 속도로 벌재를 향한다. 뒤쳐져 천천히 걷다보니 헬기장부터서는 랜턴을 켜지 않을 수 없다. 헬기장을 지나서 벌재 직전은 도로 절개면이 급전직하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트레일의 훼손도 심한 편이다.

어둑한 도로 위로 취재팀의 야행성 동물 같은 모습이 보인다. 한숨 돌리고 하늘을 보노라니 눈썹달이 곱게 걸려 있다. 이내와 눈썹달의 여린 빛이 어우러진 대간의 저녁은, 혼사를 앞둔 처녀의 표정처럼 조금은 수줍고 그만큼 은밀하다. 벌재에서 동로면 쪽으로 100m 남짓 내려서자 맞춤한 캠프사이트가 나온다. 도로 선형을 변경하면서 버려진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월악농장 초입이다.

▲ 황장산에서 내려선 취재팀이 벼랑 옆 헬기장을 지나고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벌재의 표기가 ‘벌재재’로 표기돼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지명정보에도 1961년에 벌재재로 고시돼 있다. 당시 현지 조사원이 벌재의 재가 고개를 뜻하는지를 모르고 ‘재’ 자를 하나 더 붙인 듯하다. <소백산맥 지역의 교통로와 유적>(박상일, 국사관논총 16, 국사편찬위원회 1990)이라는 논문에 '적성은 바로 벌재의 한역으로 보인다'는 언급이 있다. 벌재의 남쪽 마을이 바로 문경시 동로면의 적성리인데, 한자 표기가 붉을 ‘赤’인 것으로 보아 ‘붉은 재’를 이 고장 말로 벌재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지어 먹고나자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별들이 초롱한 눈망울을 깜박이는 것만큼 우리들도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 수다의 몇 조각을 옮겨 본다.

“서울에도 별은 떠는데, 왜 서울 사람들은 이런 별만 보면 호들갑을 떨까. 물론 서울 하늘의 별이 이처럼 초롱하지는 않지만.”

“대기 오염과 도심의 불빛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서울 하늘에도 별은 뜬다. 그런데 대부분 서울 사는 인간들은 아예 별이 뜨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차 속에, 혹은 지하철에서 갇혀서 허둥지둥 살다보니 하루에 한 번쯤도 밤하늘을 우러러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밤늦도록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12시를 훌쩍 넘긴다. 별빛에 취한 탓일까. 눈동자가 초점을 잃기 시작한다. 사실은 약간 도를 넘은 소주 탓이다.

텐트를 꼭꼭 잠그고 오리털 침낭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일교차가 극심한 이런 때가 더 추운 줄 알면서도 장비를 부실하게 챙긴 탓이다. 더군다나 도무지 추위를 모르는 이원영씨가 하늘의 별을 보며 자는 바람에 그의 체온을 나눠 가지지 못한 탓도 크다. 그의 대책 없는(?) 낙천과 무쇠 체력은 늘 내 기를 죽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아예 침낭을 챙겨 오지 않은 김종현 형이 있는 옷 다 껴입은 것도 모자라 반바지까지 덧입은 모습으로 텐트 밖으로 나올 때였다.

이제 문경시 구간을 벗어난다

▲ 벌재에서 문복대(운봉산)로 오르는 취재팀. 호젓한 오름길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문복대를 향한다. 30분 가량 길게 솟구쳤다 살짝 내려선 산허리는 다시 부드러운 몸짓으로 1시간 정도 오름길을 만들어 놓는다. 어젯밤 과음을 한 그룹과 조신하게 밤을 보낸 그룹의 발걸음이 다르다. 오르막이 길어질수록 간격이 벌어진다. 휴식 시간에 다시 만난 다음, 함께 걷다가는 금방 점점이 흩어져 홀로 된다. 자연스럽게 따로 또 같이 가는 길이다.

실제로 대간 종주를 하다 보면 자주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데이비드 소로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아니 미국의 백두대간 격인 애팔레치아 트레일 종주를 했다면, 결코 함께 걷기를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라거나 “저 심오하고 신비한 무엇과는 작별”이라고 혹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독자 여러분, 오해는 마십시오. 소로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문복대(1,077m, 정상표석에는 운봉산이라는 다른 이름과 함께 1074m로 표기) 정상에 선 시간은 정오를 한참 남겨 둔 시간이다. 우리는 최대한 게으르게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벌재 초입의 트레일에 적힌 안내판에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백두대간이 문경시 관내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솟구친 산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 가장 긴(도상거리 110km 정도) 문경시 구역을 벗어나는 마지막 산인 셈이다.

또한 이어지는 설명은 문복대라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운봉산이라고도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문봉재라고 표기돼 있다고 한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재라고 한 것은 분명한 오식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봉우리에서 북으로 뻗은 산줄기가 도락산을 이루며 단양팔경의 하나인 상선암 일대의 경승을 이룬다는 설명이다. 지도로도 확인이 되는 사실이다.

문복대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저수령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2시간 정도면 족하다. 더욱이 문복대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왼쪽으로 30만 평 규모의 소백산 관광농장과 벌재 정상의 공터가 보이기 때문에 산행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도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거의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 문복대에서 저수령으로 내려서는 길. 인공조림한 낙엽송림이 저수령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러 준다.
저수령(850m)은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 충북 단양군 상리면을 잇는 고갯마루다. 그 이름은 큰 길이 나기 전 험난한 산길 속으로 난 오솔길이 워낙 가팔라 길손들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底首]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이 고개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는 피난길이었는데, 외적이 이 고개를 넘으면 모두 목이 잘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도 하나 그리 믿고 싶지는 않다.

산행을 마치고 점심으로 먹는 라면은 언제나 최고의 음식이다. 휴게소 옆 공터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넉넉한 시간을 대간이 우리에게 준 선물로 여기고 단양팔경 중 제1경인 사인암으로 향한다. 옥빛 계류와 바위절벽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는 제멋에 겨운 한량이 된다. 이처럼 구간 종주를 하다보면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이 땅의 절경과 고샅을 살피게 된다. 대간 종주는 단순히 산길을 걷는 일만이 아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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