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풍수

왕릉보다 태실에 명당이 많은 이유
문종 태실이 있는 명봉사를 돌아본다…왕릉은 성형미인격

▲ 명봉사. 문종의 태실비가 명봉사 대웅전 왼편에 남아있다.

백두대간 자락 경북 예천군과 단양군 대강면 사이에 있는 촛대봉(1,081m) 산자락,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에 신라 헌강왕 원년(875)에 두운선사(杜雲禪師)가 창건했다는 천년고찰 명봉사(鳴鳳寺)가 있다. 당시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절 오른편 숲속에 고려 태조 24년(941)에 세운 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유형문화재 제3호)가 현존하고 있어 명실공히 천년고찰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이 절에는 불교유적뿐만 아니라 조선조 문종대왕태실비(유형문화재 제197호)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상당한 좋은 명당자리다. 왕가의 태실이란 왕자와 공주의 태를 담은 태함(胎函) 항아리를 무덤 형식으로 매장하는 시설을 말하며, 왕위에 오르면 본래의 태실에 여러 가지 석물을 설치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태를 명당에 묻으면 무병장수한다는 풍수설에 따라 특히 풍수지리가 성행하던 조선시대에는 명당을 찾아 태를 묻고 태실을 만들었다.

명봉사 바로 뒷산에 있던 태실은 일제시대에 전국의 태실을 서삼릉으로 옮길 때 같이 이전됐고, 태실비는 절 경내로 이전되어 현재도 보존되고 있다.

조선의 왕릉에는 명당이 없다

조선시대 왕릉의 대부분은 서울시와 경기도에 밀집되어 있으며, 이중에서도 동구릉(경기도 남양주시), 서오릉(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서삼릉(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대부분의 왕릉을 조성했다. 조선조의 왕은 당대의 최고 통치자로서 선왕(先王)의 능을 최고의 명당자리에 모실 여건은 되었지만, 지정된 왕릉 내에서 왕릉을 조성해야 되는 지리적 한계성 때문에 명당에 왕릉을 쓴다는 일은 쉽지 않았다.

▲ 복원된 중종의 태실비(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상색리 소재)
조선의 왕릉에 대해 당대 최고의 풍수실력자들이 동원되어 잡은 자리인 만큼 분명히 길지에 자리를 잡았을 것이라고 추측하겠지만, 전문가적 입장에서 조선시대의 왕릉을 감정해보면 유골을 보존할 정도의 보백지지(保魄之地)는 될지언정 길지의 경우는 거의 없다고 판단한다.

이에 비해 왕가의 태실은 팔도를 대상으로 명당을 찾았고, 또한 태실이 차지하는 면적이 비교적 적으므로 당시의 지관들이 풍수지리 실력을 제대로 발휘해 터를 구했기 때문에 왕릉보다 오히려 명당인 경우가 아주 많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분포된 수백 개의 태실터를 찾아 풍수공부를 하면 형기풍수는 물론이고 풍수이론의 흐름도 파악할 수 있다.

조선의 왕릉은 문화재 차원에서 가치는 높지만 풍수 공부를 하기로는 태실지가 더욱 좋은 현장 교과서가 된다. 왜냐면 골동품도 진품을 보아야 진품을 알아볼 수 있듯이 기존의 명당을 보아야 명당을 찾을 수 있는 법이다. 즉 가짜만 보면 가짜라는 것은 알 수 있겠지만, 진품을 보고도 진품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의 왕릉은 연산군이나 광해군의 일부 묘를 제외하면 외견상으로는 아주 그럴듯해 명당처럼 보인다. 그러나 왕릉은 혈장(穴場·묘를 쓰는 장소)을 인위적으로 보기 좋게 만든 소위 성형미인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성형미인인 만큼 겉보기로는 좋겠지만, 그 자손이 미남미녀로 태어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형기풍수지리에서는 용(龍), 혈(穴), 사(砂·주변의 산세), 수(水)라고 하여 이 4가지 조건을 모두 잘 갖추어야 명당이 된다. 이중에서도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용과 혈은 사와 수에 비해 더욱 중요하고, 또한 사와 수는 인위적으로 길상(吉象)으로 변화가 가능하지만, 용과 혈은 인위적으로 길한 모양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명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풍수지리에서 용진혈적(龍眞穴的)이라고 하여 대개의 경우는 용이 좋아야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비유하자면 용은 부모에 비교되고 혈은 자식에게 비교되어 부모님이 훌륭하면 부모의 영향을 받은 그 자식도 역시 훌륭하게 되듯이 대개는 용이 좋으면 역시 혈도 좋기 마련이다.

용은 기복하고 굴곡하고 내려오는 모습이 살아있는 용처럼 내려오면 진룡(眞龍)이 되는데, 대부분의 왕릉은 진룡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혈만 좋게 보인다. 그 이유는 능을 조성할 당시에 막대한 인원과 시간을 동원해 혈을 보기 좋게 조성했기 때문이다.

성형한 명당(?)인지, 아니면 천연적인 명당인지를 구분하는 방법은, 일차적으로 내룡을 보고 판단하고 다음에는 혈장 주위를 돌아보면 비록 수백 년 전에 조성된 능이라도 유심히 살펴보면 인공적으로 만든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이렇게 왕릉은 풍수지리 공부를 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당시의 왕릉을 감정하므로써 왕과 왕손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아내는 데에는 조선실록 등의 좋은 사료가 많기 때문에 풍수지리학적으로 검증하는 데에는 더없이 좋은 자료가 될 수 있다.

대군에서 왕위에 오르게 되는 풍수적 사연

▲ 명봉사 뒤편에 있는 문종 태실의 본래 위치. 태실은 일제가 강제로 옮겼고, 태실비는 명봉사 경내로 옮겨 남아 있다.
선대의 왕릉 감정사례를 통해 조선조 10대 왕인 중중의 운명에 대해 알아보자. 중종은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연산군에 이어 11대 임금에 오르게 된 좀 특이한 임금이다. 중중(1488-1544. 재위 1506-1544년)은 성종의 세번째 부인인 정현왕후의 소생이며, 9대 왕인 연산군(1476-1494. 재위 1496-1506)의 이복동생이다.

중종의 생모인 정현왕후(1462∼1530년)는 1530년(중종 25년)에 69세로 죽었기 때문에 중종의 왕위등극과는 상관이 없고, 유독 인수대비(仁粹大妃)로 잘 알려진 소혜왕후(昭惠王后·세종 19-연산군 10)의 왕릉이 인수대비의 손자인 중종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준다.

조상의 묘로 인한 풍수지리적 길흉화복이 누구에게 가느냐에 대한 이론을 분방법(分房法)이라 하여 같은 조상에 같은 자손이라도 길흉화복이 서로 다르게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분방법 이론은 풍수학파별로 다양하지만 현공풍수이론의 분방법은 적중률이 아주 높지만 부작용의 소지가 많은 점이 있어 이곳에서 공개하지 못하게 됨을 양해하기 바란다.

인수대비는 조선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의 아내로 1455년(세조 1)에 세자빈에 간택됐으나 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20세에 병사한 관계로 실질적인 왕비 역할을 못했다. 하지만 성종 때 왕후에 추봉되고, 이어 인수대비에 책봉됐다.

인수대비의 손자인 연산군이 생모 윤비(尹妃)가 사사(賜死)됐다는 사실을 알고 관련된 신하에게 박해를 가하려 하자 인수대비가 연산군을 꾸짖으니 연산군이 인수대비를 머리로 들이받는 사건이 있은 얼마 후 승하하니 춘추 68세로, 서오릉의 경릉에 안장했다. 인수대비가 안장된 경릉은 중종과 동기감응이 되는 능이기 때문에 인수대비의 경릉을 현공풍수법으로 감정해 중종의 운명을 추론할 수 있다.

인수대비는 1504년(8운 1년차)에 계좌정향(癸坐丁向·195도 내외)으로 안장했다. 인수대비를 안장한 경릉의 좌향과 조성시기를 근거로 현공풍수이론을 적용해 택명반을 작성하면 자손에게 미치는 영향을 알 수 있다. 다만 택명반 작성하는 방법은 복잡하므로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홈페이지(www.koreafengshui.net)를 이용하기 바라며 여기에서는 이미 작성된 택명반으로 길흉을 감정한다.

낙서(洛書)에서 ‘5’는 절대권력 의미

이 택명반은 1운(1504∼1523년) 중에 계좌정향(癸坐丁向)으로 능을 조성한 경우의 택명반으로, 향궁(向宮)에 ??①이 배치되어 쌍성이 향궁에 모였다고 하여 쌍성회향(雙星會向)의 국이 되어 배산임수의 지형에는 적합한 능이라고 할 수 있다.

▲ 서오릉에 있는 인수대비 능의 풍수지리적 영향으로 중종반정에 성공하고 종종이 왕위에 오르게 된다.

택명반을 보고 추론하는 방법은 1운 20년동안은 주로 향궁의 ??①五, 중궁의 65一, 좌궁 29六의 3개의 궁에 배치된 숫자를 위주로 감정한다.

먼저 향궁의 ??①五의 5자는 낙서(洛書)에서 중궁(中宮)이 되기 때문에 왕을 의미하는데, 향궁에 숫자 五가 있다. 그리고 1운에는 1자가 가장 왕성한 왕기가 되는데 ??①이 되므로 강력한 힘을 발휘해 왕이 될 수 있는 운을 중종이 받게 된다.

중궁 65에도 왕을 의미하는 5자가 있고, 6자는 후천팔괘에서 건괘(乾卦)이므로 임금의 의미가 있으며, 6一은 고관대작으로 출세하는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는 왕릉이기 때문에 왕을 의미하고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으로 풀이한다. 좌궁에는 6자에도 또 군[君]의 의미가 있다.

따라서 중종은 할머니인 인수대비(1437-1504)가 승하하고 2년 뒤에 발복을 받아 1506년(연산군 12년) 9월에 이른바 중종반정을 일으키고 종중은 11대 임금에 오르게 된다. 더욱 자세한 감정을 하려면 연산군의 폐위된 사실과 관련하여 보면 더욱 확실한 추론이 가능하다. 연산군의 생부인 성종의 묘를 감정하면 알 수 있는데, 여기에서는 지면상 생략한다.

중종반정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으로 무오사화(戊午史禍)와 갑자사화(甲子士禍)를 일으켜 많은 선비들을 죽이고 폭정을 거듭 일삼는 연산군에 대한 백성들의 원성이 날로 높아지자, 연산군을 축출하려는 구체적 움직임이 정치일선에서 소외당한 성희안(成希顔), 박원종(朴元宗)등 훈구세력이 중심으로 연산군을 몰아내고 진성대군(晉城大君;中宗)을 왕으로 추대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풍수지리학 측면에서 보면 선대(先代)의 왕릉을 통해 후손의 운명을 추론할 수도 있다.

글 최명우 (사)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연구소 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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