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역사문화

금산(禁山)과 봉산(封山)은 그린벨트의 효시
‘황장산’은 보통명사인 황장봉산이 변한 것

▲ 황장산은 황장봉산의 약어다. 조정의 목재 수급을 위해 질좋은 소나무를 백성들이 벌목하지 못하도록 통제한 곳이다.

백두대간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산들은 자연생태적 경관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내력과 사회적인 의미로 구성된 문화경관의 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산지 보전 및 산림 정책과 관련한 금산(禁山)과 봉산(封山) 제도는 백두대간이 거느리고 있는 여러 산들의 문화사적인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역사적 개념이자 현재의 산지 보전 및 관리 정책을 조명할 수 있는 의의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이러한 봉산 중의 하나가 경북 일대와 강원도에서 다수 나타나는 ‘황장산’이라는 이름의 산이다. 영남대로와 백두대간이 만나는 하늘재에 인접한 문경시 동로면에는 황장산(黃腸山·1,077m)이 있으며, 산 초입인 동로면 명전리 옥수동의 논 가운데에 ‘봉산(封山)’이라는 석표(지방문화재자료 제227호)가 있다.

황장이라는 글자의 뜻은 소나무 중에서 속이 황색을 띤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목재를 일컫는 말이다. 특히 조정에서는 주로 이 황장목으로 왕실에 필요한 관을 만들었고, 황장목의 확보를 위해 특정한 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해 엄격히 관리했으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려고 경계 표식을 세웠으니, 이것이 황장금표이다.

백두산~북악산 주맥에 풍수적 금산 도입

역사적으로 금산(禁山)제도의 기원은 조선 초기에서 비롯되는데, 한양의 궁궐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의 산(북 백악산, 남 남산, 서 인왕산, 동 낙산)의 지맥을 보전하기 위해 채석이나 벌목을 못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함부로 집을 짓거나 무덤을 들이는 것을 금했다.

금산정책은 세종 조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됐는데, 그 형태는 주맥(主脈)에 대한 보토(補土), 소나무 심기, 나무 베기나 돌 캐기 금지 등으로 실행됐다. 세조 9년(1463)에는 백두산에서부터 철령-강원도 회양부 남곡-금성현의 마현과 주파현-낭천의 항현-경기도 가평현 화악산-양주 오봉산-삼각산 보현봉-백악에 이르는 주맥 모두에 대해 돌 캐는 일을 금하도록 했으니, 이를 오늘날의 관점으로 해석하자면 백두대간 보전법의 효시라고 할 만하다. 요컨대 조선시대 금산제도는 궁성의 풍수적 지맥 보호 및 산지 보전에 주요한 목적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으니, 오늘날 대도시 주변의 그린벨트와도 같은 것이었다.
이러한 풍수적 목적의 금산 제도는 조선 중기와 후기를 지나면서 경제적이고 실용적인 목재 공급을 위한 봉산 제도로 시행되는데, 대략 조선조 ·영정조를 거치면서 봉산이라는 명칭이 금산을 대신해 쓰이다가 순조 때에는 공식적으로 완전히 봉산이 금산을 대치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의 조정에서는 궁실의 건축, 선박의 건조, 관곽과 신주의 조성을 위해 목재의 쓰임새가 매우 다양했는데, 따라서 산림의 관리 및 정책도 매우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면 왜 봉산이 조선 후기에 중요하게 지정 관리됐을까? 봉산 등장의 배경에는 사회적인 배경이 있다. 위로부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큰 혼란으로 말미암아 중앙정부의 지방 산림에 대한 관리 및 통제력이 약화되어 산림제도를 새로이 정비할 필요를 느꼈다.

한편 아래의 민간에서는 건축, 조선, 관곽 제작 및 온돌의 보급과 화전의 개간으로 인해 목재의 수요가 증가했다. 따라서 17세기 후반 숙종 때부터 조정은 산림에 대한 관리 정책을 강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봉산은 선박 축조와 건축에 필요한 소나무를 공급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정된 것이 많았다. 이러한 봉산을 봉송산(封松山), 의송산(宜松山), 송전(松田), 혹은 송산(松山)이라고 했으며, 봉산의 분포지가 경상도를 제외하고는 모두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다.

소나무를 이용하는 배를 만드는 것 외에도 봉산의 종류에는 율목봉산(栗木封山), 진목봉산(眞木封山), 황장봉산(黃腸封山), 삼산(蔘山), 향탄산(香炭山) 등이 있었다. 그 중에 율목봉산은 영조 21년(1745)에 처음 하동과 구례에 지정됐으며, 밤나무재를 주로 생산했는데, 그것으로 신주(神主)와 신주를 담는 그릇을 만드는 데 사용했다.

진목봉산은 참나무류의 상수리나무로서 배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로 쓰였으며, 경남 고성에서만 지정됐다. 기타 특수한 형태로 주요 임산물의 산출지를 봉산한 것이 있는데, 강원도 평창군 가리왕산은 산삼 확보를 위하여 봉산으로 지정됐고, 대구 팔공산은 제사에 쓰이는 향나무를 배양하기 위해 지정 관리되기도 했다.

특히 황장봉산은 주로 왕실의 관곽을 만드는 재궁용(梓宮用)의 황장목 소나무를 생산하는 곳으로 지정됐으며, 예조(禮曹)에서 봉산안(封山案)을 가지고 관장했다. 황장목은 우리나라 소나무 중에서도 몸통 속이 누런 색을 띤, 재질이 단단하고 좋은 나무로서 왕실에서 사용하는 관을 만드는 데 사용됐을 뿐 아니라 능실(陵室)을 축조하는 데도 쓰였고, 건축 용재로도 활용됐다.

영조실록의 영조 원년 8월22일 기사에 의하면, ‘태묘(太廟)가 좁아 다시 봉안할 곳이 없으니 마땅히 다시 3칸을 더 지어야하는데, 기둥과 대들보의 재목을 마련하기가 어렵습니다. 마땅히 양남(兩南)의 섬 중외(中外)에 재궁으로 쓸 황장목을 가져와 써야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는 사실로 보아 종묘를 증축하면서도 황장목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목재 운반 용이한 곳을 봉산으로 지정

황장봉산의 분포지를 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강원도에 가장 많이 지정됐고, 그 다음이 경상도임을 알 수 있다. 1808년에 편찬된 만기요람(萬機要覽)에 의하면 경상도에는 영덕, 봉화, 안동, 예천, 영양, 문경에 14곳이 황장봉산으로 지정됐고, 전라도에는 순천, 강진, 흥양 3곳이 지정됐으며, 강원도에는 금성, 양구, 인제 등 19개 고을에 43곳이 지정됐다고 했다.

이렇게 봉산의 지리적인 분포지가 대부분 도서나 해안가에 밀집하고 있는 것은, 봉산의 용도가 주로 배를 만드는 데 필요한 소나무의 확보에 있었고, 당시는 험난한 산지를 통해 무거운 목재를 운반하기는 불가능했으므로 물길을 이용한 운반이 가장 일반적인 운재수단이었기 때문이다.

황장봉산은 왕실의 필요에 의해 지정된 것인 것만큼 금양(禁養), 유지 관리, 벌채에 이르기까지 법전에 규정되고 있었다. 속대전(續大典, 1746)에 적기를, 전라도에서 산출되는 황장목은 바깥 재궁의 용도로 취하고, 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생산되는 황장목은 안 재궁의 관재로 쓴다고 했으며, 또 황장봉산에서 나무를 채취할 경우 경차관(敬差官)을 파견해 강원도의 경우는 5년에 한 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10년에 한 번 채취하여 재궁을 선택하도록 하며, 필요한 양은 때에 따라서 정하도록 했다.

황장봉산에는 금표를 세워서 일반인들의 산림 훼손 및 소나무 채취를 국가적으로 금하고 엄격히 관리했는데, 이를 어기면 엄중한 형벌에 처했다. 수교집록(受敎輯錄, 1698) 형전(刑典) 금제(禁制)조에는, ‘황장목, 선재소(船材所)가 있는 곳에 함부로 들어와 집 짓는 자는 곤장 1백에 3천리 밖으로 유배시킨다’고 엄격한 규정을 내리고 있으며, 황장목의 관리에 있어서도 ‘황장목은 경차관이 친히 산에 올라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마다 봉하고 숫자를 헤아린다. 혹 사사로이 벌채한 곳이 있거나, 관에서 지시사항을 다하지 않거나, 목수로부터 뇌물을 받고 숨기려했다가 탄로 나면 수령을 파직하고 감관(監官) 이하는 변방 멀리 유배시킨다’고 했다.
이러한 형벌은 더욱 강화되어 신보수교집록(新補受敎輯錄)에는 ‘봉산의 큰 소나무를 10주 이상 벤 자는 효시(梟示)하고, 10주 이하인 경우에는 감사(減死) 정배(定配)한다’고 했을 뿐만 아니라 ‘황장봉산의 소나무 1주를 벤 자에 대해 곤장 일 백에 3년 복역에 처했다’고 할 정도였다.

기록에는 대미산을 황장봉산으로 지정

▲ 조선조 봉산과 황장봉산의 위치(<문화역사지리>. 2002,이기봉).
황장봉산의 경계를 표시하는 황장금표는 이곳 옥수동 외에도 몇 개가 현존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강원도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 영월군 수주면 두산리 황정골과 법흥리, 인제군 북면 한계리 등지에 있으며, 그 중 원주시 학곡리의 금표는 구룡사 입구에 소재하며, 자연석에 ‘황장금표(黃腸禁標)’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면 문경의 황장산은 언제 봉산으로 지정됐으며, 봉산의 범위 등에 관한 역사적 사실은 문헌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

문경현지(聞慶縣誌, 1871)에 의하면 ‘황장봉산-강희 경신 6년(1680년)에 봉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문경의 황장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관찬지리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 18세기 중엽)에 나오는데, 여기서 ‘황장봉산은 대미산(黛眉山) 아래에 있으며 주위로 둘레 10리’라고 했다. 여기서 대미산(1,145m)은 현 문경의 황장산 서쪽으로 인접해 충북 제천시와 경북 문경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으로, 역시 백두대간의 능선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는 대미산(大美山)이라는 다른 한자 이름으로 바뀌었다.

문경의 황장산에서 벌채된 황장목은 육로로는 영남대로에 해당하는 하늘재를 통과했고, 수로로는 인근의 남한강 지류인 동달천을 통해 조정으로 운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사정으로 보아 황장산의 지정은 목재의 운반에 용이한 교통로와의 접근성도 중요한 인자로 고려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황장산과 황장목에 얽힌 조선시대의 문화사와 그 지리적 분포를 살펴보았지만, 이러한 조선시대의 금산 및 봉산 제도는 산지 보전 및 산림 관리 정책의 기원적인 형태로서 오늘날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지도> 출처: 이기봉, 2002, 문화역사지리, 14권 3호.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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