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1구간] 황장산 - 르포

‘골기(骨氣)를 감춘 육산(肉山)’ 줄기에 서서
차갓재~황장산~벌재~문복대~저수령

▲ 황장목(黃腸木)을 보호하기 위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의 하나였던 황장산 정상 직전의 암릉. 황장산에는 지금 황장목이 없다. 그나마 정상 전후의 암릉 주위에 품격 높은 황장목들이 이름값을 하고 있다.

산 그림자 위로 쑥부쟁이가 하얀 웃음을 흩뿌리는 이른 오후. 경북 문경시 동로면 안생달 마을. 더 이상 자동차는 이동수단으로 무의미한 곳이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두 다리만으로 백두대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수없이 경험하지만 늘 처음인양 설레는 순간이다.

▲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가운데 지점인 차갓재. `백두대장군`과 `지리여장군`이라 쓴 장승 사이로 문경 `산들모임`에서 세운 기념 표석이 서 있다.
오전 내내 비가 올 듯 말 듯하던 하늘도 얼굴을 펴고 있다. 비끼는 햇살이 아직 푸른 나뭇잎 위에서 춤을 춘다. 언제나 숲은 새로운 얼굴로 우리를 유혹한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진주의 취재팀과 악수를 나눈다. 우리의 반가움은 과장되지도 모자라지도 않다. 언제나 우리의 이런 만남이 좋다.

“확신하거니와, 내가 만약 산책의 동반자를 찾는다면 나는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 된다. 그 결과 나의 산책은 분명 진부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고자 하는 취미는 자연을 멀리함을 뜻한다. 그렇게 되면 산책함으로써 얻게 되는 저 심오하고 신비한 무엇과는 작별인 것이다.”(헨리 데이비드 소로, <걷기예찬> 51쪽에서 재인용, 현대문학)

적어도 백두대간에서만큼은 나는 소로의 이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새겨들을 만한 말이다. ‘걷기’라는 점에서 산책과 대간 종주는 속성을 공유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대간 종주는 산책과 다르다. 그것보다는 훨씬 거칠고, 때론 지루하고, 고상하지도 못하다. 그래서 대간 종주는 좋은 동반자가 필요하다.

황장산의 원래 이름은 작성산

▲ 황장산 정상 전 암릉(묏등바위)를 오르는 취재팀.

안생달에서 차갓재로 향한다. 지난밤 내린 비로 아직 숲은 축축하다. 서늘한 바람이 옷깃 속으로 스민다. 숲은 투명한 가을 하늘을 닮아간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 등성마루로 오른다. 20분쯤 지나자 차갓재다. ‘백두대장군’, 그리고 ‘지리여장군’이라고 쓴 두 장성이 울퉁불퉁 웃으며 서 있다. 장성 사이로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간지점’이라고 쓴 자그마한 표석이 보인다. 문경 ‘산들모임’ 사람들이 대간 종주자들을 위해 세운 표석이다. 돌에 새긴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백두대간이 용틀임하며 힘차게 뻗어가는 이곳은 일천육백여리 대간 길 중간에 자리한 지점이다. 넉넉하고 온후한 마음의 산사람들이여! 이곳 산 정기 얻어 즐거운 산행하시길….’

문경 산악인들의 따뜻한 마음씨가 가을 햇살처럼 따스하게 전해온다.

차갓재(740m)에서 황장산으로 향하는 오름길은 제법 가파르다. 가팔라지던 숨결이 편안해질 즈음, 길은 완만한 내리막을 이루며 호젓해진다. 내리막이 끝나자 또 한 고개가 나타난다. 대간꾼들이 작은차갓재라고 이름 붙인 곳이다.

작은차갓재부터 대간길은 황장산을 향해 긴 호흡으로 키를 높인다. 30분쯤 오르자 암릉이 나타난다. 황장산이라는 넉넉한 이름에 비하면 꽤나 험한 인상을 한 암릉(묏등바위)이다. 겨울 같으면 조금 긴장을 해야 할 곳이다. 줄을 잡고 올라서자 시원한 눈맛의 성찬이 펼쳐진다. 북동쪽으로 도락산(964.4m)과 황정산(959.4m)이 가까이 다가선다. 도락산에서 북서쪽으로 흘러내리는 상선암계곡은 산주름 사이에 숨어있다. 지나온 길로 몸을 돌려세우자 대미산(1,115m)이 우뚝하다. 위압적이지 않은 그 우뚝함이 보기에 좋다. 대미산은 멀리서 바라보면 더 좋은 산이다.

▲ 묏등바위를 내려서서 느긋이 조망을 즐기고 있다.

묏등바위에서 다시 30분쯤 기분 좋은 암릉을 지나자 황장산(1,077m) 정상이다. 이름에 걸맞게 펑퍼짐한 너럭바위 위에 새재산악회가 세운 정상표석이 서 있다. 사방으로 조망의 즐거움은 아직 잎이 무성한 참나무숲의 몫이다. 감히 황장산의 풍모를 ‘골기(骨氣)를 감춘 육산(肉山)’이라고 말해 본다.

여기서 잠시 우리는 황장산의 이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필요가 있다. 황장산의 이름은 본디 작성산(鵲城山)이었다. 산경표에도 대동여지도에도 작성산으로 적혀 있다. 그리고 황장산 북동쪽의 문안골에는 지금도 작성산성의 암문이 남아있다. 또한 이 산은 황장봉산이라고도 불리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黃腸山(황장산)’이라고 한자로 표기돼 있다.

그렇다면 이 산이 언제부터 황장산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조선 숙종 조에 이르러 금산(禁山) 제도 대신 봉산(封山) 제도를 도입하면서부터라는 것이 문헌 고찰의 결과다. 왕실에서 일체의 벌목과 개간을 금하는 봉산(封山)으로 정하면서부터 작성산이라는 이름이 황장산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왕실의 관곽(棺槨)재와 궁궐 건축에 쓰일 황장목(黃腸木)을 확보하기 위해 지정한 황장봉산(黃腸封山)이라는 보통명사가 ‘황장산’으로 고유명사화한 것이다. 지금도 명전리 옥수동에 봉산표석이 남아 있다.

그런데 문경시에서 펴낸 <문경의 명산>이라는 책을 보면 ‘봉산으로 정한 곳은 이곳 외에도 32곳이나 되지만 다른 곳에서는 표석을 발견할 수 없고 유독 이곳에서만 발견되었다(124쪽)’고 하는데, 문헌 고찰이 약간 부족했던 것 같다. 전영우 교수(국민대 산림자원학과)가 쓴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소나무>(현암사, 2004)를 보면 경북 울진군 소광리에서도 황장봉표가 발견됐으며, 강진, 순천, 고흥에 하나씩 외에 강원도와 경상도에 걸쳐 총 60곳에 황장봉산이 지정됐다고 한다.

▲ 황장산 정상 전 암릉. 대미산이 구름 속에 잠겨 있다.

조금 장황한 감이 있지만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황장목(黃腸木)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황장목이라는 이름은 줄기의 고갱이 부분에 송진이 적절히 베어들어 속살이 누런 소나무를 말한다. 그 모양이 마치 누런 창자와 같다는 말이겠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지금 황장산에는 황장목이 없다. 대부분 활엽수림으로 천이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상 앞뒤 암릉 주위에 몇 그루가 우람한 자태로 이름값을 하고 있다.

우리의 소나무는 오랜 세월 동안 선박의 재료로, 건축재로, 관곽재로 베어진 것도 모자라 솔잎혹파리로부터 혹사를 당하더니, 최근에는 재선충 때문에 전국의 소나무가 떨고 있다. 아직은 우리 숲의 약 25%가 소나무라는데 이 정도라도 유지하기 위해서는 특히 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 같다.

“서울 사는 인간들은 아예 별이 뜨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황장산에서 벌재(620m)까지는 도상거리 약 5.5km를 서너 번 크게 솟구쳤다 내려서기를 반복하며 약 460m 정도 허리를 낮추어 벌재에 닿는다. 소요 시간은 상황에 따라서 2시간30분에서 3시간 정도. 황장재를 지나서는 약간의 암릉을 지나지만 발바닥의 감촉이 오히려 경쾌할 정도다.

▲ 황장산 정상 앞 암릉을 내러서는 취재팀.
폐백이재를 지나면서부터 날이 저물기 시작한다. 완만한 오르내림이어서 랜턴을 켜지 않고도 걸을 만하다. 7명의 취재팀은 나름의 속도로 벌재를 향한다. 뒤쳐져 천천히 걷다보니 헬기장부터서는 랜턴을 켜지 않을 수 없다. 헬기장을 지나서 벌재 직전은 도로 절개면이 급전직하의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트레일의 훼손도 심한 편이다.

어둑한 도로 위로 취재팀의 야행성 동물 같은 모습이 보인다. 한숨 돌리고 하늘을 보노라니 눈썹달이 곱게 걸려 있다. 이내와 눈썹달의 여린 빛이 어우러진 대간의 저녁은, 혼사를 앞둔 처녀의 표정처럼 조금은 수줍고 그만큼 은밀하다. 벌재에서 동로면 쪽으로 100m 남짓 내려서자 맞춤한 캠프사이트가 나온다. 도로 선형을 변경하면서 버려진 아스팔트 포장도로로, 월악농장 초입이다.

▲ 황장산에서 내려선 취재팀이 벼랑 옆 헬기장을 지나고 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벌재의 표기가 ‘벌재재’로 표기돼 있다. 인터넷 검색을 해 보니 지명정보에도 1961년에 벌재재로 고시돼 있다. 당시 현지 조사원이 벌재의 재가 고개를 뜻하는지를 모르고 ‘재’ 자를 하나 더 붙인 듯하다. <소백산맥 지역의 교통로와 유적>(박상일, 국사관논총 16, 국사편찬위원회 1990)이라는 논문에 '적성은 바로 벌재의 한역으로 보인다'는 언급이 있다. 벌재의 남쪽 마을이 바로 문경시 동로면의 적성리인데, 한자 표기가 붉을 ‘赤’인 것으로 보아 ‘붉은 재’를 이 고장 말로 벌재라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저녁을 지어 먹고나자 하늘에 별들이 총총하다. 별들이 초롱한 눈망울을 깜박이는 것만큼 우리들도 수다를 늘어놓는다. 그 수다의 몇 조각을 옮겨 본다.

“서울에도 별은 떠는데, 왜 서울 사람들은 이런 별만 보면 호들갑을 떨까. 물론 서울 하늘의 별이 이처럼 초롱하지는 않지만.”

“대기 오염과 도심의 불빛 때문이 아닐까?”

“어쨌든 서울 하늘에도 별은 뜬다. 그런데 대부분 서울 사는 인간들은 아예 별이 뜨지 않는 것처럼 말한다. 차 속에, 혹은 지하철에서 갇혀서 허둥지둥 살다보니 하루에 한 번쯤도 밤하늘을 우러러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밤늦도록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다 보니 12시를 훌쩍 넘긴다. 별빛에 취한 탓일까. 눈동자가 초점을 잃기 시작한다. 사실은 약간 도를 넘은 소주 탓이다.

텐트를 꼭꼭 잠그고 오리털 침낭 속으로 들어갔는데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한다. 일교차가 극심한 이런 때가 더 추운 줄 알면서도 장비를 부실하게 챙긴 탓이다. 더군다나 도무지 추위를 모르는 이원영씨가 하늘의 별을 보며 자는 바람에 그의 체온을 나눠 가지지 못한 탓도 크다. 그의 대책 없는(?) 낙천과 무쇠 체력은 늘 내 기를 죽인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아예 침낭을 챙겨 오지 않은 김종현 형이 있는 옷 다 껴입은 것도 모자라 반바지까지 덧입은 모습으로 텐트 밖으로 나올 때였다.

이제 문경시 구간을 벗어난다

▲ 벌재에서 문복대(운봉산)로 오르는 취재팀. 호젓한 오름길이다.
느긋하게 아침을 먹고 문복대를 향한다. 30분 가량 길게 솟구쳤다 살짝 내려선 산허리는 다시 부드러운 몸짓으로 1시간 정도 오름길을 만들어 놓는다. 어젯밤 과음을 한 그룹과 조신하게 밤을 보낸 그룹의 발걸음이 다르다. 오르막이 길어질수록 간격이 벌어진다. 휴식 시간에 다시 만난 다음, 함께 걷다가는 금방 점점이 흩어져 홀로 된다. 자연스럽게 따로 또 같이 가는 길이다.

실제로 대간 종주를 하다 보면 자주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 만약 데이비드 소로가 우리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아니 미국의 백두대간 격인 애팔레치아 트레일 종주를 했다면, 결코 함께 걷기를 “자연과 하나가 되어 교감하는 어떤 내밀함을 포기하는 것”이라거나 “저 심오하고 신비한 무엇과는 작별”이라고 혹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독자 여러분, 오해는 마십시오. 소로가 한 말의 진정한 의미를 곡해하려는 뜻은 전혀 없습니다).

문복대(1,077m, 정상표석에는 운봉산이라는 다른 이름과 함께 1074m로 표기) 정상에 선 시간은 정오를 한참 남겨 둔 시간이다. 우리는 최대한 게으르게 휴식을 취한다. 그런데 벌재 초입의 트레일에 적힌 안내판에는 북쪽에서부터 내려온 백두대간이 문경시 관내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솟구친 산이라고 적고 있다. 우리들의 입장에서는 백두대간 남한 구간 중 가장 긴(도상거리 110km 정도) 문경시 구역을 벗어나는 마지막 산인 셈이다.

또한 이어지는 설명은 문복대라고 많이 알려져 있으나 운봉산이라고도 하는데, 국토지리정보원의 1:50,000 지도에는 문봉재라고 표기돼 있다고 한다. 1,000m가 넘는 봉우리를 재라고 한 것은 분명한 오식인 것 같다. 그리고 이 봉우리에서 북으로 뻗은 산줄기가 도락산을 이루며 단양팔경의 하나인 상선암 일대의 경승을 이룬다는 설명이다. 지도로도 확인이 되는 사실이다.

문복대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저수령까지는 느긋하게 걸어도 2시간 정도면 족하다. 더욱이 문복대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왼쪽으로 30만 평 규모의 소백산 관광농장과 벌재 정상의 공터가 보이기 때문에 산행이 다 끝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길도 완만한 내리막이어서 거의 산책을 하는 기분이다.

▲ 문복대에서 저수령으로 내려서는 길. 인공조림한 낙엽송림이 저수령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일러 준다.
저수령(850m)은 경북 예천군 상리면과 충북 단양군 상리면을 잇는 고갯마루다. 그 이름은 큰 길이 나기 전 험난한 산길 속으로 난 오솔길이 워낙 가팔라 길손들의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底首]는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한편 이 고개에서 은풍곡(殷豊谷)까지는 피난길이었는데, 외적이 이 고개를 넘으면 모두 목이 잘렸다는 데서 유래됐다고도 하나 그리 믿고 싶지는 않다.

산행을 마치고 점심으로 먹는 라면은 언제나 최고의 음식이다. 휴게소 옆 공터에서 라면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넉넉한 시간을 대간이 우리에게 준 선물로 여기고 단양팔경 중 제1경인 사인암으로 향한다. 옥빛 계류와 바위절벽을 바라보며 우리 모두는 제멋에 겨운 한량이 된다. 이처럼 구간 종주를 하다보면 특별히 의도하지 않아도 이 땅의 절경과 고샅을 살피게 된다. 대간 종주는 단순히 산길을 걷는 일만이 아니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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