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2구간] 도솔봉 - 역사문화

神山 관념이 탄생시킨 죽령 다자구할머니
조선조에는 죽령사 세워 산신의 힘 빌어 기복 기원

▲ 죽령을 넘어서 본 소백산. 죽령은 신라 아달라이사금 때 길을 열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이름의 유래에는 여러 설이 있다.

우리 겨레가 오랫동안 지녀온 산에 대한 역사와 문화적 관념 중에 가장 핵심적인 것을 지적하라면 그것은 무엇일까? 바로 신산(神山) 관념이다. 신산이란 말 그대로 신이 깃들어 있다고 여겨 이름붙인 산이고, 신산에 머물고 있는 신이 바로 산신이다.

산을 그저 대지에 솟아 풀과 나무가 자라는 물질 덩어리로 보지 않고, 정신적 존재의 위상으로서 신이 깃든 장소로 보았다는 사실은 우리 겨레의 산악에 대한 시선이 얼마나 신성했는지, 다시 말해 옛 선조들의 삶과 산 사이의 성스러운 문화적 관계를 잘 드러내준다.

신산 중에서 민중들의 마음속에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깊숙이 자리 잡은 일반명사는 삼신산(三神山)이다. 그 삼신산에 머물고 계시면서 우리의 삶의 현장에 나려 늘 돌보고 계신 이가 바로 삼신할머니다.

삼신할머니가 누구인지는 여러 가지 다른 견해가 있지만, 우리 겨레의 여성 신화 중에 가장 기원적이고 대표적인 존재가 되는 마고할미의 계통으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흥미롭게도 죽령 고갯마루로 들어서는 중턱쯤의 충북 단양군 용부원리에는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라와 마을을 지켜주는 신으로 숭배하고 있는 현장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죽령의 다자구할머니라는 산신이다.

한라산 설문대할망과 지리산 천왕봉 마고할미

▲ 단양쪽 죽령 아래 용무원리에 있는 죽령산신당.
삼신산이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었다. 중국 문헌에서 가리키는 삼신산은 발해만 중에 있다고 하는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의 세 산을 가리킨다.

기원전 5∼3세기의 전국시대에 연·제나라의 방사(方士)가 주장했는데, 그곳에는 신선이 살며, 불로장생하는 신약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전국시대 말 여러 임금과 진시황제, 또는 한무제 등이 사자(使者)를 보내 바다에서 그 신산을 찾아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한 이야기는 유명하다.

우리나라에서도 백두산 혹은 태백산이라는 설도 있고, 조선 후기의 몇몇 실학자들은 봉래산, 영주산, 방장산을 우리의 금강산, 한라산, 지리산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우연치 않게 한라산과 지리산에는 삼신산의 삼신할머니에 해당하는 설문대할망(한라산)과 노고 혹은 마고할미(지리산) 신화가 전승되어 내려온다. 지리산의 남사면 봉우리 중에 하동과 산청의 경계에 있는 삼신봉 역시 삼신산 관념과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 보인다.

한라산의 설문대할망에 관한 가장 오랜 문헌기록은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였던 이원조의 <탐라지>에 있는데, 제주도 설화에 의하면, 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으며,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옮기던 중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새어나온 흙이 360여 개의 오름이 됐다는 것이다. 제주도민들에게 설문대할망은 제주도의 지형을 만든 신화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산신당 현판.
한편 지리산에는 천왕봉의 마고할미와 관련된 설화가 전해내려 온다. 그 여신은 선도성모(仙桃聖母) 또는 마고(麻古)할미, 노고(老姑)라 불리는데, 천신(天神)의 딸이라고 한다. 마고할미는 지리산에서 불도(佛道)를 닦고 있던 도사 반야(般若)를 만나 결혼해 천왕봉에서 살다 딸만 8명을 낳았는데, 딸들을 한 명씩 전국 팔도에 내려 보내었으며, 딸들은 8도 무당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여기에서는 전래신앙과 불교의 문화복합과 아울러 지리산이 전래신앙의 진원지라는 사실이 표현됐다.

예전에는 신당(神堂)의 일종으로서 노고당 혹은 할미당이라는 것도 있었다(노고라는 말은 할미의 한자말이다). 제주도에서는 마을 수호신당인 본향당(本鄕堂)에 가는 것을 흔히 할망당에 간다고 하는데, 노고할미는 부와 복을 가져다주는 신으로 표상된다.

이렇게 지리산이나 기타 여러 지방에서 산재하는 할머니산신의 기원적인 신화는 아마도 신라의 박제상이 쓴 <부도지>에 나오는 마고할미일 것이다. 물론 마고에 대한 신화는 중국에도 있지만 우리의 신화와 차이가 난다.

중국의 절강성 천태현의 천태산에는 마고선녀 이야기가 전승되는데, 중국의 마고는 처녀신이고 장수를 담당하는 도교의 신이다. 중국 문헌인 <신선전(神仙傳)>에 마고가 한나라 환제 시대 신선인 왕원과 함께 채경의 집에 강림해 연회를 베풀고 신선세계의 이야기를 했다는 내용이 있다.

전국에 퍼져 있는 마고할미 전설

▲ 죽령 인근 마을. 지금도 다자구할머니 전설을 간직하며 매년 3월과 9월에 산신당에서 제사를 지낸다.
마고선녀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동해가 3번씩이나 뽕나무밭이 되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고는 지상에서 가장 높은 마고성(麻姑城)의 여신으로서 할머니신이고 중앙아시아의 영역을 아우르는 창세신이자 인간의 시조로서 상징성을 갖는다.

이상과 같은 원형적인 마고할미 설화는 후대에 와서 전국 각 지역에 전파되어 마고할미에 관한 설화를 낳았다. 예컨대 충북 제천시 송학면 입석리에도 다음과 같은 마고할미 이야기가 있다.

▲ 풍기쪽 죽령 옛길의 풍광.
‘인근 산에 마고할미가 살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여서 앞치마에다가 돌을 싸다가 이곳에 포개어 놓았다고 한다. 또한 충주 일대를 돌아다니던 마고할미들이 이곳에서 마주쳤다고 한다. 평소 사이가 나쁜 두 마고할미는 서로 힘자랑을 하게 되었는데, 한 마고할미가 옆에 있던 큰 돌을 던졌다. 그 돌은 논 가운데로 날아가더니 땅 속에 박혀 우뚝 섰다. 이를 본 다른 마고할미가 역시 커다란 돌을 그곳에다 던졌는데, 먼저 던진 돌 위에 떨어져 두 개의 돌이 겹쳐져 하나의 돌처럼 되어 버렸다. 이때 마고할미들이 던진 돌이 입석리의 선돌이 되었다.’

그밖에도 전남 지리산, 해남, 강화도, 그리고 경기도 양주, 충북 보은 등지에서도 마고할미와 관련된 설화가 노고단 혹은 노고산, 노고산성이라는 산이름과 기타 자연물들과 관련되어 전승되고 있다.

그밖에 삼국유사에는 여성 산신으로서 지리산성모, 가야산신 정견모주, 하백녀 유화 등이 있다. 한편 중국에는 대모신(大母神)으로 인류를 창조한 여와(女)가 있고, 산해경에는 해와 달의 어머니로서 해와 달을 출산하고 돌보는 숭고한 역할을 담당했던 희화(羲和), 그리고 서왕모(西王母)와 무라(武羅) 등이 대표적이다.

서양에서는 그리스 로마신화에서 나오는 가이아와 헤라가 잘 알려져 있는 지모신이기도 하다. 이렇게 초기에는 여성이 산신의 원류를 이루고 있었으나 후대에 와서 남성 산신으로 주류가 바뀐 것은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인 사회구조로 변천된 사회적 배경과 맞물리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보아도 산에 신이 머물고 있어서 경외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나라의 제사로 받들게 된 시기는 이미 고대에서부터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단군은 살아서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숨어 산신이 됐다고 했으니 우리 겨레에 있어 산신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 풍기쪽 죽령 옛길의 풍광.
그리고 삼국사기에는 ‘삼산(三山), 오악(五岳) 이하 명산대천을 나누어서 대, 중, 소사(小祀)로 한다’는 구절이 등장한다. 신라는 왕도인 경주를 중심으로 주요 산에 대해 국가적인 제의를 벌였으며, 그 중 삼산은 왕도인 경주에 인접한 세 산으로, 삼산의 산신은 직접 처녀의 모습으로 김유신에게 현신했다.
오악은 외곽의 토함산, 지리산, 계룡산, 태백산, 팔공산으로서 그중 지리산과 태백산은 백두대간의 계통에 포함되고 있다. 이러한 관념은 신라뿐만 아니라 백제나 고구려도 마찬가지였고, 역사적으로 고려는 사악(四岳)에, 조선은 오악(五岳)에 제사하고, 전국의 명산들을 호국신으로 봉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죽령 산신의 제의에 대한 역사적인 서술은 언제부터 나타날까? 죽령산신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실록에 보인다. 태종 14년에 여러 산천을 소사(小祀)로 삼아 의례를 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죽령산(竹嶺山)이라는 대목이 나온다.

죽령은 충북 단양군 대강면과 경북 영주시 풍기읍과의 경계에 있는 높이 689m의 고개로, 신라 8대 아달라이사금 5년(158년)에 길을 연 이후 삼국시대 동안 지리적인 요충지가 됐다.

죽령산신치제문(竹嶺山神致祭文)에는 ‘죽령산신은 우리나라의 남악으로 남도를 지킨다(竹嶺山神 卽我國家之南嶽 乃南道所鎭也)’라고 했으니 죽령이 지정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를 잘 일러준다. 죽령 말고도 이렇게 고갯길에 산신제를 행하는 사례로는 대관령이 있으며, 지금도 대관령 고갯마루의 성황사에는 강릉 단오제를 맞추어 대관령 국사서낭신인 범일국사를 모시고 있다.

산적 토벌에 큰 공 세운 죽령 다자구할머니

죽령 아래에 있는 용부원리의 산신당에서는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서 죽령산신제를 지낸다. 다자구할머니를 죽령산신으로 모시게 된 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마을에 전승되어 내려온다.

▲ 죽령 고갯마루의 석표.
옛날 이곳에는 산적들이 밤낮으로 나타나 백성을 괴롭혔는데, 산이 험준해 관군도 산적을 토벌하기 힘들었다. 이 때 한 할머니가 나타나서 산적소굴에 들어가 “다자구야”하면 산적이 자고 있는 것이고, “덜자구야” 하면 도둑이 안자고 있는 것으로 관군과 계획을 짰다. 두목의 생일날 밤술에 취해 산적이 모두 잠들자 할머니가 “다자구야”라고 외쳐 이 소리를 들은 관군이 산적을 모두 소탕할 수 있었다. 나라에서는 이러한 할머니의 공적을 기리도록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게 했다. 처음에는 국가에서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고, 조선시대에는 죽령사라는 사당을 지어 관에서 직접 제사를 지냈으나, 현재는 제사 규모가 많이 축소되어 마을에서 매년 3월과 9월에 마을의 복을 비는 제사를 지낸다.

죽령고갯길에서 만난 용부원리의 할머니는 지금도 마을 주민들의 다자구할머니에 대한 믿음이 깊다고 증언했다. 설화에 등장하는 ‘다자구’, ‘덜자구’라는 말도 참 재미있는데, ‘다 잔다’ 혹은 ‘덜 잔다’라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겠고, 또 다른 해석은 예부터 대나무가 많아서 대재라고 했던 죽령(竹嶺)의 우리말 이름에다 할미를 뜻하는 노고(老姑)의 옛말인 구, 곧 ‘대재구’가 ‘다자구’로 됐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분명 다자구할머니는 우리 겨레의 삼신할머니인 마고의 딸일 것이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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