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르포

대간 마루 위 허공에 찍힌 ‘바람의 지문’ 비
이화령~조령산~문경새재~하늘재~포암산~대미산

▲ 비 갠 후, 운무가 그치면서 태초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는 백두대간. 조령산 너머로 멀리 속리산 봉우리까지 구름을 헤치고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바람이 산을 만나면 구름이 된다. 산은 구름을 중매쟁이로 하늘과 통정(通情)한다. 그리하여, 비가, 온다.

이화령(548m) 마루에 서서 비를 맞는다. 산은 아직 짙푸른데, 대간 마루에 내리는 빗줄기는 벌써 마른 풀냄새를 머금고 있다.

▲ 조령산 오름길에서 만난 마타리.
이화령은 본디 한적한 산길이었다. 조선 시대 영남대로의 으뜸 고개였던 새재(650m)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개였다. 하지만 세월은 고개의 지위를 바꾸어놓았다. 세월은 더 낮고, 곧고, 빠르기를 원하는 길의 희망사항에 얼씨구나 맞장구를 쳤다. 그리하여 1925년 이화령으로 이른바 ‘신작로’가 뚫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화현(伊火峴)이었던 이름도 이화령(梨花嶺)으로 바뀌었다. 경북 내륙 문경 지방과 충북 충주 지역은 한층 가까워졌고, 새재는 길의 구실을 잃어버렸다. 더 세월이 흘러 1981년 새재는 경북 도립공원이 되었고 길은 폐쇄되었다. 국도 3호선이 통과하는 이화령은 더 시끌벅적해졌다. 그랬던 이 고개도 1990년대 말 터널이 뚫림으로써 새재가 그랬듯 길의 구실을 거의 잃어버렸다.

지금 우리는 문명의 등잔 밑 그 어두운 부분에 서 있다. 그런데 그 어두운 등잔 밑이 왜 이리 밝고 좋은가. 세상에 완전히 나쁜 것이나 좋은 것은 없다. 지금 우리는 그 사이에 서 있다. 문명의 이기에 편승해 고갯마루에 올라, 첨단 장비를 갖추고, 가장 원시적으로 걷는다. 고급 등산화를 신고 짚신 신고 간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이것이 대간 종주의 문화적 의미다. 대간 종주는 문명과 자연 사이에 놓인 징검다리를 걷는 일이다.

볼 것 다 보며 게으른 산행

비에 젖고 있는 조령산(1,017m)을 오른다. 비교적 시계는 좋은 편이다. 비 올 확률 40%에 걸었던 기대는 무너졌지만, 강우량 5~40mm에서 5mm쪽으로 결론이 날 것 같은 조짐이다. 대간은 우리를 위해 꽃다발을 준비해 두고 있다. 초입은 물봉선 진보라빛 꽃으로 수놓여 있다. 헬기장이 연이어진다. 삼국시대부터 그랬겠지만 지금도 전략적 요충지임을 일깨워주는 모습이다.

▲ 여름과 가을을 잇는 물봉선. 여름의 강렬함과 가을을 소슬함이 적당히 섞여 있다.

물봉선 군락지를 벗어나자마자 길은 된비알로 바뀐다. 빗방울이 더 굵어지기 시작한다. 강우량 5~40mm에서 40mm쪽으로 굳어지는 것 같다. 영락없는 ‘머피의 법칙’이다. 제발 40mm가 넘지만은 않기를…, 하는 쪽으로 기대 수준을 대폭 낮춘다. 마음 속으로 급히 엽서 한 장을 적는다.

“기상청 예보관님께. 가능하면 5~10mm, 혹은 35~40mm 식으로 예보를 낼 수는 없는지요. 5~40mm는 편차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40mm쪽으로 예상하고 집으로 돌아가 벌렁 드러누울 형편이 못되는 저로서는 예보를 들을 때마다 무척 심란해집니다. 설사 그럴 형편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올 때도 그래요. 그럴 때면 대부분 쨍 하고 해가 뜨더라고요. 그 때 그 기분 잘 아시죠. 그럼 이만…. 환절깁니다. 비 맞지 마시고요. 늘 건강하십시오.

추신: 제가 보낸 엽서 내용이 불쾌하셨다면 용서하십시오. 99% 웃자고 한 얘기였습니다.”

사실 나는 기상청 공무원의 고충을 잘 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해수면 온도 상승 등의 이유로 세계적 기상이변이 속출하고, 반도에 산지가 많은 지형상 예측이 불가능한 국지적 기상현상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의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런데도 기상 관련 예산은 OECD 가입 국가 중 꼴찌 수준이라는 것도 안다.

한편 나는 슈퍼컴퓨터의 예측이 빗나갈 때마다 안도한다. 하늘의 일은 인간이 다 알 수도, 알아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문명이 첨단화 될수록 인간은 자연 앞에서 더 몸을 낮추어야 한다. 태풍 해일 쓰나미가,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태풍 매미와 나비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않은가.

1시간 반 쯤 빗길을 뚫고 나가자 조령산 정상이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 대간 종주 한다는 사람들이 한나절이 되서 시작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요.”

▲ 신선봉 직전 암릉에서 몸을 돌려 세우자(남쪽으로) 조령산 기슭에서부터 멀리 속리산까지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구름을 어루만지고 있다.

월간山에 GPS 단독종주 산행기를 연재하고 있는 맹헌영 선배다. 이번 산행의 첫날을 함께하기로 했는데 우리가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 먼저 조령산 정상에 올라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맹 선배의 타박이 이어진다.

“윤제학씨가 비를 몰고 다니는구먼.”

순간 나는 사진기자를 째려보지 않을 수 없다. 이틀 전 금강산에 암벽등반 취재를 갔다 왔는데 거기서도 이틀이나 비를 맞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비를 몰고 다니는 사람은 바로…. 그렇다. 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비를 몰고 다닌다. 산행 일수가 강우 일수에 근접하는 한 비를 피할 길은 없다.

맹 선배의 말 대로 우리는 ‘불량한 종주팀’이다. 취재 산행의 특성상 운행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우리는 가능하면 볼 것 다 보며 최대한 게으른 산행을 하기로 작정을 했다. 이런 산행을 즐거운 산행이라고 우길 생각은 조금도 없다. 하지만 우리는 위험 부담이 없다면 무시로 아이들처럼 해찰을 부리며 즐거워지기 위해 노력한다.

신선봉에서 또 한 번 조망의 성찬을…

조령산 정상에서 새재(조령관, 3관문)를 향한다. 이 구간은 대부분이 암릉으로 조금만 다리에 긴장을 풀어도 엉덩이에 피멍이 들 각오를 해야 한다. 하지만 경쾌하고 조망이 빼어나다. 그러나 지금 그 조망의 즐거움은 구름이 독차지하고 있다.

▲ 신선봉에서 새재로 향하는 대간 길은 줄에 의지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아름으로 이어진다.

30분쯤 줄을 잡고 조심조심 오르내리기를 반복하고나자 신선봉(889m?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무명봉. 새재 위 마패봉에서 가지 친 신선봉과는 다른 봉우리임) 직전의 암릉에 닿는다. 바람이 세차다. 배낭을 내리고 한숨을 돌리려니 눈앞에 장관이 펼쳐진다. 수평으로 비가 내리고 있다. 대간 마루 위 허공에 찍힌 바람의 지문이다. 순간, 거짓말처럼 비가 그친다. 구름은 안개처럼 스멀거리다가 군데군데 무리를 짓더니 총총히 바람을 따라 나선다. 순식간에 구름이 사라지고 대간은 갓 태어난 얼굴을 하고 있다.

“야, 진짜 비 맞은 보람 있네.”

맹 선배의 충청도 억양은 노랫가락을 닮아 있다. 두어 시간 비 맞은 대가 치고 대간의 선물은 너무 크다. 오른쪽으로 문경의 진산인 주흘산, 왼쪽으로 괴산의 군자산, 그리고 뒤로는 멀리 속리산의 연봉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선봉에서 또 한번 조망의 성찬을 즐긴다. 불끈 뿔끈 힘차게 솟아오른 부봉의 연봉들이 눈앞으로 다가선다. 몇 걸음 더 나아가 동쪽으로 눈길을 돌리자 월악산의 영봉과 연이은 줄기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다. 백두대간을 통틀어서 오밀조밀한 암릉의 실루엣과 대간의 장쾌한 스케일을 한꺼번에 담은 최고의 조망처다. 지리산의 장중함과 설악산의 화려함을 적절히 섞은 분위기다. 지나치게 대간 중심적인 발상이겠지만, 신선봉 같은 작은 봉우리가 월악산 같은 명산을 거느리고(?) 있는 듯한 분위기도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다.

깃대봉(821.5m?지도상에는 무명봉)을 지나면서부터 길은 이슥한 숲길로 바뀐다. 군데군데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이른 가을을 꽃 피워 놓고 있다. 어둠이 산 위로 다 내려앉을 즈음 조령3관문에 닿는다. 다시 빗방울이 굵어지기 시작한다. 쉽게 그칠 비 같지 않다. 맹 선배가 유혹적인 제안을 한다. 수안보 온천장이 지척이라는 것이다. 응원차 동행한 김에 따뜻한 온천물에 목욕을 시켜 주고픈 마음 씀씀이가 더 따뜻하게 다가온다. 이빨이 부딪칠 정도로 오한이 드는 터였는데 길게 고민할 이유가 없다. 만장일치로 하산을 결정한다.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럴 경우 비는 또 얼마나 고마운 핑계거리인가.

▲ 신선봉 초입의 슬랩 지대를 통과하는 취재팀.

아침까지 비가 그치지 않는다. 다시 3관문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비는 완전히 멎었다. 조짐이 좋다.

문경새재. 하도 높고 힘들어서 새들조차 넘기 힘들었다 하여, 혹은 억새가 많아서, 또는 새로이 낸 길이라 하여 ‘새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고개다. 한 때 우리나라 고개의 대명사였다. 새재와는 털끝만큼도 관련이 없는 진도아리랑에서도 “구부야구부야 눈물이 나는” 고개는 새재였던 것이다. 추풍령을 넘으면 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미끄러지지만, 이 고개를 넘게 되면 장원 급제라는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聞慶)’ 하여, 벼슬에 뜻을 둔 영남의 선비라 하면 으레 넘었을 고개다.

▲ 마패봉에서 북암문 쪽으로 내려서는 길에서 만난 구절초.

부산의 동래에서 한양으로 이어지는 영남대로가 이 고개를 넘었던 것이다. 오늘날까지 경상도가 영남으로 일컬어지는 것도 이 고개의 남쪽이기 때문이다.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떨어지면 조곡관(조령 제2관문), 주흘관(조령 제1관문)을 거쳐 문경읍에 닿게 된다.

또한 이 고개는 천연의 요새임에도 불구하고 외적과의 싸움에서 승전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 조선 선조 25년(1592) 4월14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병은 그 달 26일에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새재를 넘는다. 당시 삼도순변사로 충주로 급파된 신립은 부하들과 함께 새재로 가서 지형을 살폈다. 전력의 열세인 아군이 천연의 요새인 이곳에 잠복해 있다가 왜군을 덮치자는 것이 중론이었다.

그러나 그는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친다. 결과는 대패. 신립은 탄금대에 몸을 던지고 조선은 아수라장이 된다. 후세의 사가들은 신립의 주력군이 기마병이었기 때문에 산악전을 피했다고 하지만, 다수의 의견(그것이 다 옳은 건 아니지만)과 상식을 무시한 리더의 오판이 얼마나 큰 불행을 초래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역사의 교훈이다.

▲ 신선봉 일대의 암릉은 다릿품으로는 과분한 조망을 선사한다.
고품격 소나무 어루만지며 포함산 바라보다

새재에서 대간은 조령관을 지키던 군사들이 머물던 곳이라는 군막터를 지나 마패봉(927m?지도에는 마역봉으로 되어 있으나 현지에서는 마패봉으로 불린다. 일제 때 지도를 만들 때 오식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으로 이어진다. 길은 성벽을 따라 오르다 참나무숲 사이에서부터 가팔라지기 시작한다. 숲길은 안개 속에 침묵하고 있다. 아침 산의 적요는 언제나 신비롭다.

마패봉에서 북암문(北巖門)을 거쳐 동암문에 이르는 길은 호젓하다. 동암문에서 대간은 부봉을 서쪽에 두고 평천재에 이르기까지 360도로 휘돈다. 평천재에서부터 허리를 곧추세워 한 봉우리를 세우니 탄항산(856.7m)이다. 언제부턴가 이 봉우리는 월항삼봉으로도 불리는 데 정확한 유래는 알 길이 없다. 이 산 동쪽에 달목(月項)이라는 동네가 있는데, 그곳에서 바라본 형상에서 비롯된 이름이 아닌가 싶다.

탄항산 정상을 지나 조망바위 근처 고품격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포함산을 바라본다. 이름 그대로 베를 걸쳐놓은 듯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이다. 그 아래가 바로 하늘재. 탄항산에서 하늘재까지는 쉬엄쉬엄 가도 1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다. 편안한 숲길이다.

하늘재에서 또 반가운 얼굴을 만난다. 진주의 취재팀 김종현 형과 신동국, 강형복씨가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5년 전 이곳을 지날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농기구 창고로 쓰던 창고가 산장으로 개조돼 있다. 이름 하여 하늘재산장. 이제 대간 종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됐다. 하늘재산장은 그 아이콘이다.

▲ 베를 깔아놓은 듯한 바위로 덮인 포암산 오름길.
하늘재(520m). 백두대간에 열린 고개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이름을 단 곳이다. 언제부터, 어떤 연유로 이 고개가 하늘재로 불리게 된지는 모르겠으되 옛 기록상의 이름은 계립령(鷄立嶺)이다. 삼국사기 권2 신라본기에 아달라 이사금 3년(154) 여름 4월에 계립령 길이 열렸다고 기록돼 있다. 기록상으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개로 죽령보다 2년 앞선다.

하늘재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다툼을 벌이던 곳이다. 신라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 이곳으로 길을 열었다. 고구려의 장군 온달은 “계립령, 죽령 서쪽이 우리에게로 돌아오지 않으면 나도 죽어서 돌아오지 않겠다”며 싸움터에 나갔다가 아차산성에서 최후를 맞았다. 삼국사기에 전하는 내용이다.

한편 하늘재는 불교문화가 전해진 길목이기도 했다. 지금도 하늘재 서쪽 괴산의 미륵리나 동쪽 문경의 관음리에는 수많은 불적이 남아있다. 그러고 보니 현세의 관음과 내세의 미륵을 연결하는 고개여서 하늘재라 불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스라하기는커녕 약간의 고도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납작 엎드려 있는 고개를 하늘재라 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언제나 현세가 고달팠던 민중들의 염원이 그 이름에 투영된 것인지도 모른다.

하늘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대미산(1,115m)까지는 5~6시간이면 되는 거리다. 실거리 약 13km로 까다로운 구간도 없다. 일반적으로 대간 종주자들이 반나절에 끝내는 코스다. 야영 계획을 취소하고 그 쪽을 따르기로 했다. 배낭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포암산을 오른다.

김종현형, 정상석 앞에 제물을 갖춰 놓고 기다려

포암산은 달리 베(布)바우산이라고도 불린다. 정상에서 산허리까지의 암릉이 흡사 베로 덮어 놓은 듯한 모습이어서 비롯된 이름이다. 희고 우뚝한 모습이 껍질을 벗겨 놓은 삼대 같다 하여 마골산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고, 계립산이라는 옛 기록도 있다.

초입의 샘에서부터 트레일은 곧추서기 시작한다. 암릉 전까지 트레일은 심하게 망가져 있다. 이런 경우는 계단이나 다른 보조수단을 설치하는 것이 산을 보호하는 일이 될 것 같다.

▲ 백두대간 남한 구간의 절반 쯤에 자리한 포암산 정상에서. 그동안 탈 없는 종주를 허락해준 대간의 정령에 감사의 인사를 올리는 취재팀.
쉬엄쉬엄 뒤쳐져 올라 정상에 이르자 깜짝 이벤트가 벌어져 있다. 김종현 형이 정상석 앞에 제물을 갖춰 놓고 기다리고 있다. 거리상으로 대간의 거의 반(실제는 차갓재)에 해당하는 봉우리에서 그 동안 탈 없이 종주를 허락해 준 산신에 대한 감사의 인사를 드리자는 것이다. 우리는 최대한의 존경을 담아 산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올렸다. 혹자는 미신이라 웃을지 모르겠지만 설사 그렇다 할지라도 나는 그것을 미신(美信)이라 믿는다. 어차피 먹을 음식, 이런 식으로 먹는 것도 색다르고 맛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은 결코 교회나 성당 혹은 사찰에서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포함산 정상을 내려서서 관음재까지는 돌계단 같은 암릉이다. 하지만 관음재에서 제천시계(북쪽)로 들어서면서부터 대미산까지는 길이 순하다. 무성한 참나무 숲길로 시야는 조금 답답하다.

대미산(1,115m)은 ‘크게 아름다운 산(大美山)이라는 이름과 달리 둘레에 억새만 무성한 밋밋한 산이다. 그러나 이 산은 문경현지에 ‘문경 여러 산의 할아버지(本縣諸山之祖)’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록의 한자 표기는 ‘검푸른 눈썹 산(黛眉山)’이다. 정상 북쪽 기슭에 있는 눈물샘에서 갈증을 달래며 정상을 바라보면 그럴 듯한 이름 같다는 생각도 든다. 눈 위에 눈썹이 있는 건 당연한 일일 테니까. 그런데 대미산(大美山)이라는 이름은 어떤 연유일까. 문경시에서 발간한 자료집에 따르면 1936년에 발간된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에 퇴계 이황 선생께서 명명한 것이라고 적혀 있다고 한다.

날이 다 저문 시간에 다시 하늘재로 돌아온다. 늦은 저녁을 먹고 하늘재산장 평상을 빌려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하늘재에서 하늘을 보며 내일로 간다.

대간 종주, 이제는 문화현상이 됐다

1980년대가 백두대간에 대한 발견기였다면 90년대는 발전기였다. 90년대 이후 수많은 사람들과 산악회에서 여러 가지 형태로 종주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제 대간 종주는 하나의 문화현상이 됐다. 두 번 이상 종주한 사람들도 많다. 이제 백두대간 종주는 전혀 뉴스거리가 못된다. 그래서 대간 종주는 다시 뉴스거리가 됐다. 전혀 산과 거리가 먼 듯한 문화 예술인이 종주에 나서는가 하면, 뜻밖의 단체나 기관에서 종주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아직도 심심찮게 신문 지면에 대간 종주 기사가 오르는 것이다.

하늘재에 생긴 산장은 문화현상이 된 대간 종주의 상징으로 읽히기에 충분하다. 오로지 대간 종주자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대간 능선 위 마을이나 고갯마루에 매점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것들은 그 전부터 있었다. 대간 종주자만을 상대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하늘재산장은 오로지 대간 종주자만을 위한 것이다. 산장을 열게 된 동기를 보면 대간 종주가 얼마나 보편화돼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늘재산장의 주인은 1년 반 전 이곳으로 귀농한 젊은 부부(윤성영-이미수)다. 주변의 임야 35,000평을 빌려 고추와 밤 농사를 짓고 있다. 그런데 이들에게 뜻밖에 사람들이 끊임없이 도움을 청해왔다. 물 좀 달라, 밥 좀 달라, 하룻밤 재워 달라, 차 좀 태워 달라. 사람이 그리웠던 이들 부부는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알고 보니 하나 같이 대간 종주자들이었다. 부부는 차라리 이들을 위한 휴식공간을 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생각했다. 농기구 창고를 개조했다. 수세식 죄변기도 갖추어 놓고 누구나 물을 떠 갈 수 있게 마당에 수도꼭지도 달았다.

“대간 종주자들을 위해서는 어떤 서비스도 다 합니다. 실비에 조금만 더 받고.”

마음씨 좋게 생긴 젊은 부부의 말이다. 앞으로 적어도 새재에서 하늘재까지는 물과 먹을 것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그것만으로도 종주자들에게는 엄청나게 반가운 일이다(하늘재산장 전화 054-571-8789, 011-9391-8030).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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