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문화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났던 고개
조령은 관리, 계립령(현 하늘재)은 보부상과 우마 통행 잦았던 고개

▲ 새재 고갯길에 세워진 3개의 관문 중 제1관문인 주흘관.

백두대간은 기후, 지형, 식생 및 생태 등의 자연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군사, 경제, 지역, 종교 및 사상 등의 문화사적 측면이 축적되어 있는 거대한 자연·문화복합체계로서, 그 중요한 구성요소 중 하나가 백두대간과 도로의 관계다.

전근대시기의 도로는 사람과 정보의 이동 및 물자수송과 통신 등의 경제, 군사, 행정적인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로 이용자를 위한 시설과 이와 관련된 문화경관과 취락의 발달을 이끌었다. 특히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새재의 고갯마루를 지나는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옛 도로로서, 여기에는 주흘관 등의 군사적 방어시설과 취락, 역원(驛院), 그리고 사찰 등의 문화경관이 발달했다.

▲ 하늘재. 백두대간의 하늘재와 새재의 고갯마루를 지나는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옛 도로였다.
산맥은 산과 산을 이은 길이지만, 도로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길이며, 문화가 확산 전파되는 통로이기도 하다. 산맥과 도로는 그 속성이 각각 자연과 문화로서 서로 다르지만, 문화의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도로가 산맥을 통과하기도 한다. 한반도에서 백두대간이 가장 큰 줄기로서 자연의 길이라면, 영남대로는 가장 중요한 도로로서 문화와 교통의 길이었으니 그 둘은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서 백두대간의 문화사를 형성했던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 겨레는 자연의 길인 산맥도 길(山經)이라고 했고, 문화의 통로가 되는 도로도 길로 일컬었으며, 궁극적인 마음 상태 역시 길(道)이라는 같은 말을 쓴 사실이다. 그래서 자연과 문화와 마음은 서로 만나고 합치될 수 있는 통합적인 코드로 이해했음을 알 수 있다.

한강과 낙동강 권역, 조령·계립령 통해 결속

일반적으로 산맥을 도로와 상관지어서 그 기능적 측면을 살펴보자면, 산맥은 유역권 범위, 혹은 능선 기준으로 해당 지역의 문화와 기후를 나누는 경계가 되지만, 도로와 고갯길은 산맥을 경계선으로 구분된 지역을 문화적으로 통합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경관요소가 된다.

▲ 미륵사지에 인접한 역원지.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지형적인 장벽으로서 지역을 구분 짓는 경계일 뿐만 아니라 기후적으로도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러한 지역 구분에서도 주요 도로의 고개는 한반도의 지역을 구분하는 기점으로 인식될 만큼 중요했다.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지역을 크게 횡적으로는 동서, 종적으로는 남북으로 구분하는 자연적인 경계이자 기준이 되었는데, 알다시피 영동(嶺東), 혹은 관동(關東)과 영서(嶺西), 혹은 관서(關西)라는 지역 명칭도 대관령을 기준으로 한 강원도의 동쪽과 서쪽 지역을 일컫는 것이다. 영남(嶺南)이라는 말도 계립령 또는 조령 이남의 경상도 전역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통용된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한편으로 도로는 마치 인체의 핏줄처럼 산맥으로 나뉜 지역을 통합하는 통로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백두대간으로 인해 자연적으로 구분되던 지역은 수많은 고갯길과 도로로 인해 문명과 정보가 전파되고 취락이 발달해 문화적인 통합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백두대간을 가름하는 유역권으로서의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은 자연환경이 다르고 역사·문화적으로도 뚜렷한 차이를 지니고 있으나 두 지역은 영남대로를 통해 결속됐다.

▲ 하늘재 고갯길 아래의 석불입상.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을 가름하는 백두대간의 도처에 죽령, 벌재, 계립령, 조령, 이화령, 화령, 추풍령 등의 고갯길이 발달해 남북간의 교통로로 이용됐는데, 18세기의 실학자 이중환은 그 중에서 조령과 죽령을 큰 고개라고 하고 나머지를 작은 고개라고 했다. 고대에는 한강 유역과 영남지방 간의 주요 도로가 죽령과 계립령을 통했으나 조선 초에 조령을 개발함에 따라 주요 교통로의 대부분이 충주에 모였다가 조령을 넘어 유곡에 이르고, 이곳에서 다시 상주를 경유해 각지로 분기했다.

조선시대의 도로 중에 가장 중요한 도로는 한양에서 동래를 잇는 간선로인 영남대로인데, 이 영남대로는 백두대간에서 새재(조령), 혹은 하늘재(계립령)를 통과했다. 그래서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나는 지점에는 여러 역사문화적인 경관이 형성됐다. 조령에는 조선시대 이후로 주흘관을 비롯한 여러 군사적 방어시설이 축조됐으며, 새재와 하늘재 주변 지역인 미륵리, 관음리 등에는 고갯길과 관련한 관음, 사점, 황정, 안말 등의 영하취락(嶺下聚落)이 발달했다. 그리고 하늘재 아래에는 도로와 관련된 교통시설의 유적지가 현재의 미륵사지 부근에 현존하고 있다. 이러한 역원시설과 종교시설의 결합은 고려시대 이후 주요 고갯길에 입지하는 사찰이 역원의 역할도 겸해 담당했던 양상을 표현해준다.

조선조까지 한반도에서 가장 중요한 통로 역할

백두대간의 고개를 넘는 영남대로의 경로는 역사적으로 발달과정을 겪었다. 고대의 교통로로서 일찍이 계립령은 156년에, 죽령은 158년에 길이 뚫렸으며, 조령은 조선 초기에 와서야 개척됐다. 삼국시대에 계립령은 고구려와 신라, 화령은 백제와 신라 사이의 전략적 요충이었으니 인근에 있는 보은의 삼년산성은 한강, 낙동강, 금강의 상류지역으로서 삼국의 군사력이 충돌한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우역제(郵驛制)를 근간으로 하는 간선도로망이 체계화됐는데, 개성을 중심으로 서북-동남 방향과 동북-서남 방향으로 X자형을 이루었으며, 그 중에서 개성에서 동남쪽의 영남지방으로 향하는 길이 가장 중요했다.

▲ 조령 아래의 교구정지. 신ㆍ구임 경상도 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했다는 곳이다.

고려시대의 간선교통로 중에서 제1로는 죽령을 통과해 안동을 경유하고 경주에 이르렀으며, 제2로는 계립령을 통과하여 예천에 이르고 안동에서 제1로와 합류했다. 제3로는 역시 계립령을 넘어 문경과 상주를 경유했고, 제4로는 추풍령을 지나 김해로 통했다. 죽령과 계립령을 통과하는 제1로와 제2로는 고려시대에 중요한 도로로 기능했으며, 고려 후기(1361년)에 수십만의 홍건적이 침입했을 때 공민왕이 선택한 피신길이기도 했고, 조선 초에는 왜의 사신이 상경하는 길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간선도로망의 체계가 완비됐고, 한양을 중심으로 전국에 걸쳐서 아홉 개의 간선도로가 확정됐다. 제1로는 파주ㆍ평양ㆍ정주를 거쳐 의주로 가는 길이며, 제2로는 철령을 넘어 함흥ㆍ길주ㆍ경흥을 지나 서수라에 이르는 길이고, 제3로는 원주를 지나 대관령을 넘고 삼척ㆍ평해에 이르는 길이며, 제4로는 충주에서 문경새재를 넘어 대구ㆍ부산에 이르는 길이고, 제5로는 제4로의 문경 유곡역에서 갈라져 상주ㆍ진해로 통영에 이르는 길이며, 제6로는 공주ㆍ전주ㆍ남원ㆍ진주로 통영에 닿는 길이며, 제7로는 제6로의 삼례에서 갈려 정읍ㆍ나주ㆍ해남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길이고, 제8로는 제6로의 소사에서 갈라져 평택을 지나 보령에 이르는 길이며, 제9로는 김포를 지나 강화로 가는 길이었다.

이렇듯 문경의 계립령은 고려 말까지 중요한 교통로 역할을 했으나 조선 초에 조령을 공식적인 길로 개발함에 따라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계립령의 위치에 관해서는 학자들간의 논란이 있는데, 현재 수안보에서 미륵리로 넘어가는 초입의 고개를 지도상에서는 지릅재, 또는 계립령이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미륵리와 문경시 갈평리 사이의 고개를 하늘재로 기입했는데, 하늘재로 불리는 이 고개를 사실상의 계립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고 본다.

▲ 미륵사지. 하늘재 아래 미륵사지에는 옛 도로와 관련된 교통시설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후 조정에서는 방위상의 문제를 고려해 조령 외의 모든 고갯길을 폐쇄하고자 했으나 계립령은 역사가 길고 통행자가 많아 남겨두기로 했는데, 조령이 관리 및 일반 여행자의 통행이 잦았던 것과 달리 계립령은 보부상과 우마(牛馬)의 통행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조선의 조정에서 일본으로 파견한 외교사절인 통신사 역시 총인원 300~500명에 이르는 인원이 한양에서 출발해 영남대로를 거쳐 부산에 도착해 일본으로 향했는데, 돌아오는 길에는 역로 주변의 민폐를 줄이기 위해 정사(正使)는 조령로, 부사(副使)는 죽령로, 종사관(從事官)은 추풍령로로 나누어 귀환하기도 했다.

일제 때 철도 건설 이후 고개 기능 급속 쇠퇴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령은 군사 및 교통의 요충지로서 중시됐으며, 많은 관방이 설치됐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령의 관문들이다. 조령 일대는 주흘산ㆍ부봉ㆍ기산ㆍ조령산 등이 이루는 천험의 요충지로서 이러한 지형을 이용해 문경관문을 구축했다. 이 관문은 임진왜란이 일어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6월에 설치할 논의가 있었으나 전란 중의 경제사정과 조정 내에서의 논란으로 설치가 지연되다가 그 이듬해에 비로소 조곡관에 중성(中城)을 개설했다. 그 후 1708년(숙종 34)에 중성을 크게 중창하고, 이보다 남쪽에 있는 주흘관에 초곡성을, 또 북쪽에 위치한 조령관에 조령산성을 축조했다.

▲ 미륵사지에서 하늘재 가는 길의 석불두상.

조령 일대에는 조령원(鳥嶺院), 동화원(東華院) 등의 원터와 진터, 군창(軍倉) 터, 신ㆍ구임 경상도 감사가 교체할 때 교인했다는 교구정지(交龜亭地), 고려 말 공민왕이 거란의 난을 피하기 위한 행궁이 있었다는 어류동(御留洞) 등 사적지가 있다. 그 중에서,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은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으로서 숙종 34년(1708년)에 축조했고,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그리고 선조 27년(1594)에 신충원이 축성한 제2관문은 중성, 혹은 조곡관이라고도 하는데, 1907년 훼손되어 1978년에 복원했다.

백두대간의 허리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한강유역권과 낙동강유역권을 통합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영남대로는 19세기 말까지 한양과 경상도 지방을 연결하는 공로(公路)로서 명맥을 유지했으나 일제의 철도 건설로 말미암아 기능이 약화됐으며, 이윽고 자동차 교통의 발달로 그 기능을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백두대간과 영남대로가 만난 고갯길을 넘으면서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진 유적과 경관에 젖노라면, 자연의 길과 사람의 길은 서로 접속해 통합됐음을 깨달을 수 있다. 한국의 문화생태적 경관에서 산맥이 뼈대라면 도로는 신경이자 핏줄이었던 것이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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