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0구간] 조령산 - 지형지질

암석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지며 조령산 첨봉 탄생했다
수옥폭포는 화강암과 석회암층간 차별침식으로 형성

▲ 이화령에서 조령으로 이어지는 조령산릉은 한강과 낙동강의 분수령을 이룬다. 산릉의 서사면으로 유입되는 물들은 달천을 타고 남한강으로 이어지고, 동사면으로 유입되는 물은 조령천을 따라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충북 괴산군과 경북 문경시 사이에 우뚝 솟은 조령산(1,017m)은 백두대간의 허리쯤에 마루 능선을 이루는 산으로 주변에 위치한 희양산, 백화산, 신선봉, 마패봉, 부봉, 주흘산, 월악산 등 1,000m에 가까운 고산들과 함께 어울려 험준한 첩첩산중을 이룬다.

조령산은 나는 새도 쉬어 넘는다는 새재(조령·642m)를 품고 있어 조령산이라 이름했으며, 또 그로 인해 더 잘 알려진 산이기도 하다. 정상 북쪽의 새재와 남쪽의 이화령 사이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위치에 있으며, 능선 상에 각기 높이를 달리하며 하늘로 치솟아 오른 크고 작은 칼날 같은 암봉과 암릉이 연이어져, 단연코 그 산세의 멋은 바위에서 찾을 수 있다.

조령산의 정상 북쪽으로 이어지는 아기자기한 암릉 지대는 바위벼랑으로 이어지는 능선길을 따라 고만고만한 여러 개의 암봉들이 푸른 소나무와 어울리며 연달아 피어올라 있어 마치 설악산의 용아장성과 같은 아름다운 산세를 느끼게 한다. 그 규모와 형세가 설악산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골짜기 곳곳에는 넓은 암반과 암석 사이로 맑은 소와 폭포들이 넘쳐나 조령산에 발을 들이면 암산(巖山)으로서 지닌 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령산은 동편으로 마주하고 있는 주흘산과 사이에 긴 회랑을 따라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새재길이 놓여 있다. 옛 선조들이 숱하게 넘나들며 삶의 애환과 숨결이 묻어 있는 고갯길 새재를 품고 있어 조령산은 더욱 정감이 가는 산이다.

백악기 말에 관입한 월악산 화강암체의 일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조령산의 멋은 정상 너머로 북쪽 능선을 따라 신선암봉과 깃대봉을 비롯해 무명의 아기자기한 바위덩어리들이 낙타등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다양하면서도 험준한 암릉 지대를 이룬다는 점이다. 칼날 같이 매우 가파른 산세를 이루기 때문에 매년 조난사고가 발생하고 있기도 하다.

▲ 백두대간 가운데 가장 험준한 구간으로 알려진 곳이 바로 이곳 조령산 일대다. 매년 조난사고가 발생하고 있으며, 경북 지역 사고의 90%가 이곳에 집중되고 있다.
조령산 정상에서 북쪽의 백두대간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산이 불타는 형국임을 목격할 수 있다. 소나무 군락 사이로 하얗고도 분홍색을 띤 육중한 바위덩어리들이 곳곳에서 얼굴을 내민다. 조령산 또한 남쪽의 속리산, 북쪽의 월악산과 함께 소백산맥을 대표하는 화산(火山)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볼 때 조령산은 커다란 하나의 바위덩어리로 이루어진 암체를 형성하고 있다. 조령산에 이렇게 넘쳐나는 바위덩어리들은 다 어디서 온 것들이며, 또 어떤 과정을 거쳐 지금의 형상을 갖게 된 것일까?

조령산 일대에 넘쳐나는 바위덩어리들은 모두 화강암이다. 화강암은 지하 깊은 곳에 있던 뜨거운 마그마가 지각의 약한 틈을 따라 솟아오르다가 지하에서 굳어 형성된 암석으로, 우리나라 전 국토의 약 30%를 차지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화강암은 거의 모두가 한반도 땅덩어리가 화산과 지진으로 요동치는 불의 시대를 맞고 있었을 중생대에 지하에서 관입한 마그마가 냉각·고화되어 형성된 것이다. 중생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화성활동이 있었는데, 이곳 조령산에 분포하는 화강암은 백악기 말 약 9천만~8천만 년 전 관입해 형성된 담홍색의 불국사 화강암에 속한다.

희양산에서 조령산을 거쳐 신선봉~마패봉~부봉~주흘산~포암산~만수봉~월악산 등으로 이어지는 곳에 분포하는 화강암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관입한 화강암으로 이들을 함께 묶어 월악산 화강암체라고 한다. 그리고 조령산이 위치한 월악산 화강암체 남쪽으로 백화산~희양산~대야산~조항산~청화산~속리산 등에 분포하는 화강암(이를 묶어 속리산 화강암체라고 함) 또한 월악산 화강암체와 거의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화강암에 속한다.

절리작용에 의해 독특한 암산 형태 갖춰

조령산과 속리산에서 만나게 되는 화강암들은 비교적 얕은 지하 3~4km 부근에 관입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런 화강암이 관입 이후 화강암을 덮고 있던 3~4km의 피복물질들이 모두 깎여나가며 지표로 드러났다.

▲ 조령산릉의 헬기장. 이화령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구간은 매우 완만한 능선으로 육산의 형태를 취한다. 그러나 정상을 지나면서 조령산은 그 얼굴을 바꿔 바위들이 천국을 이루는 전형적인 암산의 형태를 드러낸다.
화강암을 덮고 있던 피복층이 빗물, 지하수, 바람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깎여나가고, 지반의 융기에 의해 화강암이 지표 가까이에 올라오게 되면 압력의 하중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부피가 팽창하게 된다. 이때 팽창에 의하여 암석에는 금과 균열, 즉 절리가 발생한다. 이때 절리는 수직 또는 수평 등 다양한 형태로 발달한다.

이후 이러한 절리면을 따라 수분이 침투하여 얼고 녹기를 반복하며 팽창과 압축을 가함으로써 암석은 점차 분리, 분해된다. 이후 오랜 시간을 두고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나중에는 빗물과 바람 등에 의해 지표물질들이 모두 침식·제거되면 풍화를 받지 않은 나머지 암석들이 지표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다양한 모습의 암산 형태를 갖춘 지금의 조령산 모습은 모두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것으로, 기암괴석과 거대한 암봉들은 모두 화강암에 작용한 절리의 형태가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산세로 보아 이화령에서 조령산 정상까지는 아기자기한 여성적인 형세인 반면, 정상 북쪽으로는 거칠고 험한 남성적인 형세를 이룬다. 이는 정상 남쪽으로 위치한 화강암들에서는 절리의 발달과 조직이 치밀할 뿐만 아니라 침식과 풍화가 보다 빠르게 진전되어 거석이 별로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정상에 서면 산릉을 따라 우뚝 솟아오른 신선암봉과 깃대봉, 제3관문 너머로 멀리 마폐봉과 신선봉, 그리고 그 뒤로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이들 암봉 모두는 북한산의 인수봉과 같은 돔(dome) 모양의 거대한 단일 암체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화강암에 발달한 절리가 암석면과 평행한 수평 방향으로 탁월하게 나타나 침식과 풍화가 수평 방향으로 집중해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마치 암석이 양파 껍질처럼 층상으로 벗겨져 나가면서 끝이 뾰족한 형태의 첨봉으로 된 것이다.

조령산과 동으로 마주한 주흘산이 위치한 곳은 화강암 관입에 앞서 이곳이 바다였을 고생대에 퇴적된 석회암층이 기반암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이 층을 뚫고 화강암의 관입이 이루어졌다. 조령산 서사면 충주와 문경을 잇는 3번 국도 변에 위치한 수옥폭포는 바로 화강암과 석회암층의 경계면에서 암질 간의 차별침식으로 형성된 폭포다.

▲ 수옥폭포는 조령산 일대의 화강암과 석회암층의 경계면에서 암질간의 차별침식에 의해 형성된 폭포다.
조령산 지역엔 고개 유난히 많아

파도치듯 넘실거리는 산줄기의 두 꼭지점 사이, 이 고을 저 고을을 넘나드는 산길의 정수리, 바로 곳과 곳을 연결해주는 고개다. 그래서 산을 넘는 고개에는 늘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그에 따른 기쁨과 슬픔이 공존한다. 산을 넘는 고개 이름들이 우리에게 친숙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은 아닐까?

우리나라의 어느 산들을 막론하고 고개가 없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산과 고개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가운데 조령산이 위치한 이곳은 우리나라에 산이 많은 곳임을 증명이라고 하듯 유난히 고개가 많다. 충북 충주시 상모면 미륵리~경북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사이의 계립령(鷄立嶺·하늘재, 지릅재), 괴산군 연풍면 주진리~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사이의 은티재, 괴산군 연풍면 행촌리~문경군 문경면 상리 사이의 이화령(梨花嶺·이우릿재),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문경군 농암읍 농암리로 사이의 고모령, 그리고 누구라도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고개이름으로 괴산군 연풍면 원풍리~문경군 문경읍 상초리로 넘어가는 길목에 놓인 문경새재, 즉 조령이 있다.

새재 협곡은 단층선 사이로 차별침식 이뤄져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온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은 새재를 둘러보고 천연의 요새를 이룰 만큼 뛰어난 지세를 지니고 있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러나 신립(申砬) 장군은 조령의 지세를 이용하지 못하고 쳐들어오는 적군에게 어이없이 길을 내주고 충주 달내(달천)를 뒤로 한 채 탄금대에다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가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만약 신립 장군이 조령 협곡에서 일본군을 맞아 싸웠더라면 임진년 조선의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뒤따른다. 그 만큼 조령이 깊고 험한 산세를 이루고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 정상 바로 아래로 조령 제1관문이 위치한 곳에 고려 태조 왕건 촬영장이 바라다 보인다. 새재의 깊은 곳은 단층선을 따라 발달한 차별침식으로 골이 깊게 패여 나감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문경읍에서 서북쪽으로 깊은 협곡을 따라 3.5km 정도 들어가면 조선 숙종 34년(1708)에 쌓은 영남 제1관문인 주흘관이, 그리고 여기서 3km 더 올라가면 제2관문인 조곡관이, 이곳에서 3.5km 더 올라가면 제3관문인 조령관이 세워져 있다. 협곡의 양안은 층암절벽을 이룬 암석들이 연이어 나타나고 계곡 곳곳에는 크고 작은 암석들과 넓고 큼직한 암반들이 이어진다. 이와 같이 깊은 협곡을 이루게 된 이유는 바로 이곳의 땅덩어리에 발달한 단층선과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생대 백악기 말 약 9천만 년 전 월악산과 조령산 일대에 화강암이 관입되는 과정에서 여러 단층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신생대 3기 약 2300만 년 전 한반도 땅덩어리가 경동성 요곡운동을 거치며 지반이 솟아올라 지질구조선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형성되었는데, 바로 이때 이곳 땅덩어리들이 서로 밀고 밀리며 일부는 내려앉고 또 일부는 올라가는 등 복잡한 지각운동 과정에서 많은 단층선들이 생겨났다.

이후 발달한 많은 단층선들 가운데 특히 북동~남서 방향으로 발달한 주 단층선을 중심으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하천이 흐르기 시작했으며, 오랜 세월을 거치며 침식이 진행되어 지금의 깊은 하곡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이우평 백령종합고교 교사

경부운하 건설 구상
백두대간 산자락을 뚫어 낙동강과 한강을 연결?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는 가장 짧은 길목에 자리 잡은 고갯길이었던 새재(조령)는 영남 지방에서 산출되는 세곡과 궁중 진상품 등 각종 영남의 산물이 지났던 길이다. 이 새재 길을 넘어 충주의 남한강 뱃길과 연결되어 서울 한강 나루터에 닿았다. 이와 같이 새재는 한강과 낙동강의 수운을 활발하게 연결시켰던 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의 새재는 고개 길로서의 생명을 완전히 상실한 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난 상태이다. 그런데 최근 이곳 새재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새재가 놓여 있는 백두대간을 뚫어 북쪽의 한강과 남쪽의 낙동강을 연결하는 운하 건설 계획이 몇 해 전부터 세종대학교 부설 세종연구소에 의해 간간이 제기되고 있다.

국가 경쟁력 강화를 위해 물류비용의 절감은 중요한 문제다. 보고에 의하면 우리나라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데 드는 물류 비용이 부산에서 LA까지 가는 비용보다 더 비싸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렇듯 물류 비용이 많이 드는 도로 운송 체계인 데다 경부 대동맥 도로가 과포화 상태이며, 도로 확장을 하려고 해도 그 보상비만 해도 천문학적인 액수이어서 감히 엄두를 못 내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물류난을 극복하고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바로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경부 운하를 건설하자는 안이다. 한강 수계의 남쪽 끝자락으로 충주호로 흘러드는 최상류 물길인 월악산의 송계계곡의 동달천과 낙동강 수계의 북쪽 끝자락으로 문경의 새재길과 나란히 흐르는 조령천을 연결하는 운하용 터널을 뚫어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자는 것이다.

운하 건설 계획 상의 후보지인 새재가 위치한 이곳은 조령산을 비롯해 월악산, 주흘산 등 1,000m가 넘는 고산들이 험준한 첩첩산중을 이루는 곳이다. 그런데 이런 곳에 산을 뚫어 배가 통과토록 하는 터널 운하의 건설이 과연 가능한 것일까?

경부운하 건설과 관련해 여러 차례 논문을 발표한 세종대학교 지구과학과 정태웅 교수(지구물리학)에 의하면 한강과 낙동강 최상류를 연결하려면 해발 고도 125m에서 20.5km의 터널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험준하고 경사가 급한 지형을 통과하기 위해 한강과 낙동강 양쪽 산사면의 비탈에 여러 개의 갑문식 댐을 계단식으로 건설해 고도차를 극복함으로써 배가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배가 엘리베이터를 타는 방식으로 험준한 고산들로 밀집한 소백산맥의 허리를 넘어간다는 것이다.

만약 경부운하가 건설된다면 운임 비용을 현저히 낮출 수 있으므로 물류비용의 절감 효과가 클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문제점 또한 적지 않게 지적되고 있다. 우선 험준한 산악지형과 지질적으로 터널이 석회암 지대를 통과해야 한다는 고도의 난공사 문제, 그리고 식수원이 수로로 사용되는 환경 문제 등 여러 문제점이 있다. 그러나 국내 토목공학 기술진들은 해발 406m를 넘고 있는 네덜란드~독일~오스트리아를 연결하는 유럽의 RMD(라인~마인~도나우) 운하의 예를 들며, 국내의 축적된 토목공학 기술력으로 공사의 어려움은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견해를 내놓고 있다.

물 부족 국가군으로 분류되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운하의 건설은 많은 양의 물을 확보할 수 있어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양자강의 풍부한 물을 물 부족 지대인 북경쪽으로 돌리는 중국의 야심적인 대수로 공사인 ‘남수북조(南水北調)’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한반도의 5배가 넘는 5,000km에 달하는 대수로를 건설하는 것으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치산치수가 국가의 운명과 발전을 결정짓는 중대사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백두대간의 산자락을 뚫어 한강과 낙동강을 연결하려는 경부운하의 건설 계획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로만 여길 일도 아닌 듯싶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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