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문헌고찰

남사고가 절을 한 活人山
금계촌,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국망봉과 배점, 구봉팔문 등의 유래

▲ 초암사. 의상이 부석사를 창건하기 전, 일대를 돌아보던 시기에 간이수도처로 초암을 짓고 수행하던 터라고 전한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의 도계· 시군계를 이루고 있는 죽령 이북 백두대간 상에는 1987년에 산악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명산 소백산이 자리하고 있다.

소백산은 나말여초의 문신 최언위(崔彦僞·868~944)가 지은 비로사의 진공대사 보법탑비문(眞空大師普法塔碑文)에 의하면 ‘小伯山’으로 표기되어 있고, 세종실록지리지 순흥부 조와 동국여지승람 풍기 조에 의하면 이후로는 ‘小白山’으로 표기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산은 적어도 나말여초 이래로 小伯山과 小白山으로 표기되고 불린 산 이름이라 하겠다.

조선 중기의 방사(方士) 남사고(南師古)의 남격암산수십승보길지지(南格庵山水十勝保吉之地)에 의하면, 우리나라 십승지지의 하나인 금계촌(金鷄村)을 품에 간직하고 있는 명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금계촌은 곧 소백산 남쪽 기슭에 자리한 지금의 영주시 풍기읍 금계리와 욱금리 · 삼가리 일원을 이르던 마을 이름으로 추측된다.

조선시대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저기(箸記)를 인용하여 ‘병란을 피하는 데에는 태백산과 소백산이 제일 좋은 지역(복거총론 산수조)’이라고 하였다. 남사고는 일찍이 이 일대를 지나가다가 소백산을 보고서는 갑자기 말에서 내려 넓죽 절을 하면서 “이 산은 활인산(活人山·사람을 살리는 산)이다”라고 하였다 한다. 이중환은 이 산의 산수와 그 활인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말하였다.

‘소백산에 욱금동(郁錦洞)이 있는데 물과 돌의 훌륭한 경치가 수십 리다. 그 위에 있는 비로전(비로사)은 신라시대 고찰이다. 골 입구에는 퇴계 이황의 서원이 있다. 대개 태백산과 소백산의 물과 돌은 모두 낮고 평평한 골 안에 있다. 산허리 이상에는 돌이 없는 까닭에 산이 비록 웅장하여도 살기(殺氣)가 적다. 먼 데에서 바라보면 봉우리와 묏부리가 솟아나지 않아서 엉기어 있는 듯하다. 구름이 가듯, 물이 흐르듯 하며 하늘에 닿아 북쪽이 막혔다. 때때로 자색(紫色) 구름과 흰 구름이 그 위에 떠있기도 한다.’(복거총론 산수조)

소백산은 겨울철이면 북서풍이 심하게 몰아치는 지세를 이루고 있어 겨울의 설화 풍경이 뛰어나다. 또 5월 말 6월 초의 늦봄 시기에 이르면 대간 상의 연화봉~비로봉~국망봉 일대의 광대한 초원지대는 연분홍 철쭉꽃이 만발하면서 천상화원으로 변한다. 다음과 같은 퇴계 선생의 유소백산론(遊小白山錄)에 의하면, 이 일대 철쭉꽃 화원은 일찍이 조선시대부터 이미 그 절경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석름봉(石凜峯)과 자개봉(紫蓋峯)·국망봉(國望峯) 세 봉우리가 서로 떨어져 있는 8~9리 사이에는 철쭉꽃이 숲을 이루고 있다. 이 때 막 한창 피어 흐드러져 곱고 화려하여 마치 비단병풍 속을 지나가는 듯하고 축융(祝融)의 잔치에서 취한 듯하니, 참으로 즐거웠다.’

죽계구곡과 죽계별곡

▲ 최초의 사액서원인 수서서원. 퇴계 이황이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백운동서원을 격상시켰다.
소백산의 비로봉~국망봉을 잇는 주능선 동쪽 골짜기에는 명승 죽계구곡(竹溪九曲)이 자리하고 있다. 비로봉에서 발원하는 월전계곡의 물과 국망봉에서 발원하는 석륜암골의 물이 중봉 아래쪽 초암사 일대에서 합류하여 맑은 물이 골짜기를 굽이굽이 돌아가며 9곳의 절승 경관을 형성하면서 내죽리 소수서원 일대까지 흘러가고 있는 계곡을 죽계구곡이라 이른다.

순흥지(順興誌)와 흥주지(興州誌)에 언급되어 있는 죽계구곡의 구체적 이름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제1곡 백운동 취한대(白雲洞 翠寒臺) △제2곡 금성반석(金城盤石) △제3곡 백자담(栢子潭) △제4곡 이화동(梨花洞) △제5곡 목욕담(沐浴潭) △제6곡 청련동애(靑蓮東崖) △제7곡 용추비폭(龍湫飛瀑) △제8곡 금당반석(金堂盤石) △제9곡 중봉합류(中峯合流)

죽계구곡의 명칭들은 일반적으로 퇴계 이황이 명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퇴계의 유소백산록에 의하면,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소백산 주능선 동쪽 기슭의 명승 경관에 대하여 이름 붙인 것들이 많이 언급되고 있고, 특히 석륜사 벽에 주세붕의 유산록(遊山錄)을 판자에 써서 벽에 걸어둔 것을 보았다는 내용, 또 주세붕이 이름 붙여놓은 백운대를 퇴계가 청운대(靑雲臺)로 개명하였다는 내용 등에 의하면 죽계구곡의 이름은 모두 주세붕이 붙인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풍기조에 의하면, 이색(李穡)의 송안시어시서(送安侍御詩序)에 ‘순흥 안씨는 대대로 죽계 주변에 살았다’고 하였으며, 풍기 인물조에는 순흥 안씨 중 근재(謹齋) 안축(安軸·1287-1348) 등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안축은 고려 충숙왕 11년(1324)에 중국 원의 제과에 급제한 후 요양로(遼陽路) 개주판관(蓋州判官)에 제수되었다. 뒤에 상주목사로 나가 있을 때 어머니는 흥녕(興寧·순흥)에 있었는데, 왕래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고 한다. 벼슬은 첨의찬성사 흥녕군에까지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고향의 소수서원에 봉향되었다.

그는 고향 죽계의 지역적 위치와 경관 및 누·대·정자 위에서 유흥하는 모습 등을 읊은 경기체가인 죽계별곡(竹溪別曲) 5장(근재집 권2 참조)을 남겼다. 그 중 소백산 동쪽 기슭 일원의 일부 땅이름이 언급되고 있는 1장과 2장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죽령 남쪽과 영가(永嘉·안동) 북쪽 소백산 앞에,

천년 흥망 중에도 한결같이 풍류를 지닌 순정성 안에,

다른 데 없는 우뚝 솟은 취화봉은 왕의 안태가 되므로,

아! 이 고을을 중흥하게끔 만들어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청백지풍을 지닌 두연(杜衍)처럼 높은 집에 고려와 원나라의 관함을 지니매,

아! 산 높고 물 맑은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숙수사의 누각과 복전사(福田寺)의 누대, 그리고 승림사(僧林寺)의 정자,

초암동 초암사와 욱금계(郁錦溪) 비로전, 그리고 부석사의 취원루들에서,

반쯤 취하고 반쯤 깨었는데, 붉고 흰 꽃이 산 비 내리는 속에 피었네.

아! 절에서 노니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고양(高陽)의 술꾼 역이기처럼, 춘신군의 구슬 신발을 신은 삼천객처럼,

아! 손잡고 서로 의좋게 지내는 광경, 그것이야말로 어떻습니까?

위에서 살펴본 죽계구곡 하류 내죽리에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건립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그 자리는 본래 신라고찰 숙수사(宿水寺)의 자리였으나, 배불사상이 팽배하였던 조선왕조 중종 36년(1541)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이듬해 이곳 출신의 유학자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절을 파하고 사묘(祠廟)를 설립하였다가, 1543년에 유생 교육을 겸하기 위해 백운동서원을 창건하였다.

이후 1548년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서원을 공인화하고 나라에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지원을 요청함에 따라 1550년에 ‘紹修書院(소수서원)’이란 편액을 내려 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크게 자리잡았다.

서원 동쪽 죽계천 건너 바위면에는 ‘敬(경)’ 자가 각자된 세칭 경자암(敬字岩)이 있는데, 이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건립할 때 절을 헐고 숙수사의 불상들을 죽계천 깊은 못에 던져버렸다. 그때 이후로 밤이면 밤마다 물속에 가라앉은 불상들이 물 위로 뛰어올라 그 소리가 시끄러워 유생들이 도저히 정신을 집중하여 수학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주세붕이 못에 면한 바위에 ‘敬(경)’ 자를 써서 자신의 경솔했던 행동을 뉘우치고 부처를 공경한다는 뜻을 표하자 이후로 다시는 그 불상들이 물 위로 떠오르지 않았다.'

소백산 기슭의 명찰과 대찰

소백산 북쪽 기슭의 단양군 가곡면·영춘면 지역에는 9개의 비슷한 산봉우리가 연이어 솟아 있고, 그 사이 사이에는 8개 골짜기가 있어 이를 구봉팔문(九峰八門)이라 일컫는다. 이 구봉팔문의 4봉 북쪽 기슭 연꽃 모양 지형에 자리 잡은 대찰이 바로 구인사(救仁寺)이다. 우리나라 천태종의 총본산으로서, 1백만 명 이상의 신도수를 거느리고 있는, 단일 사찰로서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신도수를 거느린 대찰이다.

▲ 천태종 본산인 구인사. 구봉팔문의 4봉 기슭에 들어 앉았다.

남쪽으로 이 대가람을 두르고 있는 구봉팔문의 이름을 남서쪽에서 북동쪽 방면으로 가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구봉은 곧 새밭문봉, 귀기문봉, 배골문봉, 곰절문봉, 덕평문봉, 뒤시랭이문봉, 여의생문봉, 밤실문봉, 아곡문봉이고, 팔문은 곧 새밭문안, 귀기문안, 배골문안, 곰절문안, 덕평문안, 여의생문안, 밤실문안, 아곡문안을 이른다.

구인사는 1945년에 상월조사(上月祖師) 원각(圓覺)이 창건하였고, 1966년 8월에 대찰로 중창하였다. 상월조사는 일심상청 처처연화개(一心常淸 處處蓮華開·마음이 늘 맑으면, 곳곳에 연꽃이 피는도다)라는 법어를 남겼다.

소백산 상봉인 비로봉 남동쪽 달밭골 아래에 위치한 비로사는 신라 신문왕 3년(683)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고찰이라 전한다. 절 경내에는 고려 태조 22년(939)에 건립한 진공대사보법탑비가 있다. 비문은 최언위가 왕명을 받들어 찬한 것이다.

비문에 의하면, 진공대사(855-937)는 나말여초의 고승으로, 고려 태조가 남방으로 원정 가던 길에 이곳 비로사 진공대사의 명성을 듣고 도를 듣고자 찾아온 적이 있으며,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에는 대사가 수도로 가서 하례한 바 있다.

비로봉 북동쪽에 위치한 국망봉은 소백산의 제2봉이다. 이 봉우리 남동쪽 순흥면 배점리는 국망봉의 이름 유래와 관련한 전설이 전하는 조선 중기의 인물 속칭 배충신으로 불리는 배순(裵純)이 살던 곳으로, 현재 그를 기리는 충신각과, 그를 안장한 배충신묘소가 있다.

전설에 의하면, 조선 선조가 승하하자 배점리에 살던 배순은 3년간 초하루 보름에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했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배순이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한 사실은 있을지 모르나, 선조 이전인 1549년에 소백산에 올라 기록을 남긴 퇴계의 유소백산록에 이미 국망봉이란 이름이 보이므로 그 유래담은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속전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신라 말 경순왕이 왕건에게 나라를 물려준 뒤 천년사직과 백성에게 속죄하는 마음으로 명산대찰을 찾아다니다가 소백산 북쪽 현 제천시 백운면 방학리의 궁뜰에 동경저(東京邸)란 이궁을 짓고 살 때 장자 마의태자가 엄동설한에도 한 벌의 베옷만을 입고서 자주 이곳 국망봉에 올라 멀리 국도 경주를 바라보면서 통한의 눈물을 흘리곤 하여 그러한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전설이 더 근리하다고 여겨진다.

▲ 배점리 일대. 선조가 승하하자 국망봉에 올라 서울을 향해 곡을 했다는 배순이 살던 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됐다.

국망봉 동남쪽 기슭, 죽계구곡이 시작되는 초입에는 고찰 초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이 절은 신라시대 의상조사가 우리나라의 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하기에 앞서 명당의 절터를 찾아 소백산 일대를 두루 돌아보던 시기에 간이 수도처로서 초암을 짓고 수행하던 곳이라 전한다.

비로봉 남쪽 금선계곡 유역에 자리한 금계리 일원은 본고 서두에서도 이미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 십승지의 하나로 일컬어지는 금계촌 일대다. 이곳 일대에는 소와 관련 있어 보이는 쇠바리란 마을과, 용천사(龍天寺)라는 절 이름과 관련 있어 보이는 용천동이란 마을이 있다.

용천동은 일명 법왕사(法王寺), 또는 천왕사(天王寺), 또는 천룡사(天龍寺)로도 불리던 신라 고찰 용천사가 있었던 곳이다. 용천사는 삼국유사 욱면비염불서승(郁面婢念佛西昇)조에 전하는 욱면비의 비사(秘事)에 등장하는, 신라 후기 아간 귀진(阿干貴珍)이 살던 집이다. 욱면은 바로 귀진의 집 계집종의 이름인데, 그녀에 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 경덕왕 14년(775) 강주(剛州·현 영주)에서의 일이다. 동량(棟粱) 팔진(八珍)은 관음보살의 현신이었다. 무리들을 모으니 1천 명이나 되어 이를 두 패로 나누었다. 한 패는 노력을 다했고, 한 패는 정성껏 도를 닦았다. 그 노력하는 무리 중에 일을 맡아보던 이가 계를 얻지 못해서 축생도에 떨어져서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일찍이 불경을 싣고 가다가 불경의 신령한 힘을 얻어 아간 귀진의 집 계집종으로 태어났는데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욱면은 일이 있어 하가산(下柯山)에 갔다가 꿈에 감응하여 마침내 바른 도를 닦을 마음이 생겼다. 고을 경계에 위치한 미타사(彌陀寺)는 일찍이 혜숙법사(惠宿法師)가 세운 절로, 아간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아간은 언제나 그 절에 가서 염불하였으므로 계집종 욱면도 따라가서 뜰에서 염불하였다. 이와 같이 하기를 9년, 경덕왕 을미년 정월 21일에 욱면은 부처에게 예배하다가 집의 들보를 뚫고 날아갔다.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렸으므로 그곳에 보리사(菩提寺)를 지었다. 산 밑에 이르러 그 육신을 버렸으므로 그곳에 제2 보리사를 지었다. 그 전당에 방을 써 붙여 욱면등천지전이라 하였다…중략…욱면이 간 뒤에 귀진도 그 집이 신이한 사람이 의탁해 살던 곳이라 하여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법왕사(法王寺)라 하고 전답과 사람을 바쳤다.’

손봉원(孫鳳源)이 쓴 희방사유지(喜方寺遺誌)에 의하면, 위의 전설에 욱면비가 떨어뜨린 신 한 짝은 곧 죽령 남쪽 월산(月山)에, 또 한 짝은 상주 갑장산에 떨어뜨렸다고 하였고, 그의 육신은 양산 통도사에 떨어진 것을 다비(茶毘)하여 뼈를 거두어 탑을 만들었다고 하였으며, 귀진의 집은 희사하여 절을 짓고 천왕사라 이름하였는데, 후대에 천룡사, 또는 용천사가 되었다고 하였다.

한국사찰전서 미타사조에 의하면, 권상로 박사는 해운(海雲) 보선선사(寶璿禪師)에게 전하여 듣기를 “삼국유사의 강주(康州)는 강주(剛州)의 잘못으로, 진주(晋州)가 아닌 영주(榮州)이고, 하가산, 소백산, 부석사는 모두 영주에 가깝고 진주와는 심히 떨어져 있으며, 또한 1보리사는 풍기 매촌(每村)에, 2보리사는 단양군 월산리(月山里)에 있다고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 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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