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4구간] 선달산 르포

‘겨울 참나무숲의 침묵에서 어떻게 봄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배우라’
고치~마구령~선달산~박달령~옥돌봉~도래기재 답사

▲ 마구령을 지나 각곳산을 향하는 취재팀. 거의 눈이 없다시피하지만 등성마루에는 바람이 옮겨놓은 눈이 제법 쌓여 있어 발바닥의 감촉을 부드럽게 한다.

소백과 태백 사이. 이른바 양백지간(兩白之間)의 남쪽 들머리인 고치(古峙)에 선다. 우리말로 ‘옛 고개’인 이곳은 아주 오랜 옛날에도 옛 고개로 불린 모양이다.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밝혀 놓은 지명 유래를 보면, 신라 때 이 고개 아래에 대궐터를 잡을 때 이 고개를 일러 ‘옛 고개’라 했다 한다. 이 말대로라면 고대부터 백두대간의 이 쪽과 저 쪽을 연결해 주는 통로였던 셈이다.

▲ 각곳산을 내려 서서 선달산을 향하고 있다.

▲ 늦은목이에서 선달산으로 나아가는 취재팀.
이 고개 위 대간 등선에 있는 산신각이 최초로 세워진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소백’과 ‘태백’ 두 산신을 함께 모시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옛날부터 이 고개를 넘던 사람들은 허리를 낮추어 인정(人情)을 통하게 해준 두 ‘백산(白山)’에 대한 경배를 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대간 종주자들의 산마루길과 산허리를 타고 넘는 고갯길은 만나는 순간 이별을 해야 하는 관계다. 산마루길은 이 산과 저 산을 이어가는 길이고, 고갯길은 가장 빨리 산을 벗어나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마루길이 자연의 길이라면 고갯길은 인간의 길이다. 이 두 길의 교차점이 바로 고갯마루인데, 인간의 길과 자연의 길이 한 몸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성황이나 산신각이 세워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따라서 산신에 대한 경배는 신앙적 의례이기 전에 인간의 본성에 내재한 본연의 자연에 대한 공명이기도 한 것이다.

‘걸음이 나를 데리고 간다’

▲ 박달령을 향하는 길. 바람이 부려놓은 눈이 심설의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산신각을 뒤로 하고 대간 마루에 두 다리를 세운다. 이 순간부터 우리의 모든 행위는 오로지 한 가지밖에 없다. 걷기! 산에서 ‘걷기’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다. 종종 산길을 걸으면서 ‘내가 걷는 것이 아니라’ ‘걸음이 나를 데리고 간다’고 느낄 때가 있다. 산길 걷기는, 일종의 제의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문명이 아니라 두 다리로 걷기다. 바로 이것이 아직도 인간을 인간이게 한다. 곰, 참새, 펭귄도 두 다리로 걷기는 하지만, 그들의 주종목은 기고, 날고, 헤엄치는 것이다. 두 다리로만 인간만큼 오래 잘 걷는 동물은 없다. 인류 최초로 허리를 곧추 세우고, 오직 두 다리로만 걷기 시작한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s·직립원인)를 위하여 건배를! 왜 호모 에렉투스와 건배를 해야 하는가. 대부분 술 잘 먹는 인간들이 걷기도 잘 하기 때문이다. 우리 백두대간 취재팀도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 걷는 행위의 자연 친화성에 대해 거의 신앙인 투로 말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또 다음과 같은 통찰 앞에서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 박달령으로 가는 길. 바람이 쌓아놓은 눈 덕분에 심설 산행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자연에 속하면서도 일종의 비정상적인 자연의 산물, 요컨대 이 쪽도 저 쪽도 아닌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에리히 프롬 <인간의 마음>, 세상사람들의 책에서 발간한 <자유를 생각한다>에서 재인용).

그렇다. 인간은 자연에 동화될 수는 있어도, 풀이나 나무나 개미나 사자처럼 살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앞으로 ‘공동체’의 범위 속에 인간계와 자연계를 아우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앞으로 전개될 과학 문명이 인간 복제까지 완벽히 실현시킨다 하더라도 자연이라는 토대를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 밀착해서 살았던 시대보다 더 자연을 가까이 하며 닮아가야 한다. 맹수라 할지라도 인간처럼 쾌락을 위한 사냥은 하지 않는다. 다람쥐가 필요 이상 도토리를 모으기는 해도 그 도토리가 산을 벗어나는 일은 없다.

늦은목이 서쪽 계곡서 산중 일박

▲ 옥돌봉 오름길.

고치 산신각 위 헬기장부터 남동쪽 950m봉으로 향하는 대간길은 아주 가파르다. 바람은, 막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팽팽한 탄력을 볼떼기에 그대로 전해온다. 여름 같았으면 기진맥진했을 텐데 오히려 걸음이 빨라진다. 텅 빈 참나무숲의 의연한 침묵이 묘한 행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가 마치 참나무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950m봉에서 북서쪽으로 몸을 비트는 대간길은 미내치까지 부드럽게 허리를 낮춘다. 미내치(美乃峙·820m,)는 희미한 기억처럼 옛 고개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미내치에서부터는 잔잔한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제법 큰 파랑을 일으키며 헬기장이 닦여져 있는 1097m봉에 닿는다.

이곳에서부터 대간은 길게 허리를 낮춰 다시 고갯길 하나를 연다. 마구령(810m)이다. 고갯길의 남쪽은 경북 영주시 부석면과 봉화군 물야면으로 연결되고, 북쪽은 충북 단양군 영춘면과 영월군 하동면으로 이어진다. 남쪽에서 오르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지만, 대부분 시멘트로 포장이 돼 있다. 옛날에는 장사꾼들이 말을 몰고 다녔다 하는데 지금 고개를 넘는 건 바람과 대간꾼밖에 없다.

마구령에서 각곳산(966m)까지는 커다란 표고차 없이 거의 동쪽으로 순하게 오르내린다. 각곳산에서는 거의 정북으로 허리를 비튼다. 반대쪽으로 가지줄기에 봉황산(819m)이 맺혀 있는데, 이 산의 남서쪽 기슭에 앉은 절이 무량수전으로 널리 알려진 부석사다.

▲ 박달령. 산령각 옆에 정자가 있어 쉬어가기에 좋다.

각곳산 북쪽 기슭의 분위기는 어둡고 깊다. 눈대중으로도 고개 하나쯤 열려 있을 것 같다. 지도를 보지 않고도 그곳이 늦은목이(800m)임을 알겠다. 길이 열렸다 할 정도의 고개는 아니지만 품새가 제법 넓다. 서쪽으로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와 동쪽으로 봉화군 오전리를 잇는 등산로가 나 있다. 서쪽 기슭에 샘까지 있어서 하룻밤 신세를 지기에 적당한 곳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내일을 맞기로 했다.

대충 텐트를 친 다음 저녁밥을 짓기 위해 생수병을 꺼내자 주둥이가 얼어 있다. 얼음을 꾹 누르자 가느다란 물줄기가 얼굴을 때린다. 예기치 않은 물총세례의 알싸한 통증이 오늘 밤의 추위를 예감케 한다.

▲ 옥돌봉을 지나 도래기재를 향하고 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간다. 취재팀으로 참가하고 있는 진주 진서산악회에서 새로운 얼굴들이 등장 했는데, 그중 아리따운 처녀가 한 사람 있었기 때문이다. 마침 사진기자가 총각이어서 우리는 먹기 싫은(?) 소주까지 억지로 마셔가며 오작교를 자처했다. 하지만 그 둘이 어떤 사이로 발전할 것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표정 관리를 하는 것인지, 이성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들인지 도통 모르겠다. 그래도 처녀와 총각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취재팀의 분위기는 추위를 아랑곳 않을 정도 부드러워진다.

흔히 처녀 총각들이 이맘때면 옆구리가 시리다고 엄살을 떠는데, 이번 경험으로 미루어 볼 때 순전히 거짓말인 게 분명해 보인다. 볼 장 다 본(?) 나 같은 유부남의 눈에 비친 그들은 우아하고도 화려한 싱글이다.

모두들 밤새 안녕하다. 그런데 문제는 물이다. 침낭 사이에 끼워둔 물 말고는 꽁꽁 얼어버렸다. 옆집에서는 떡국용 육수를 녹이느라고 법석이다. 만약 집에서 가족을 위해 이런 노력을 기울였다면 아내로부터 엄청난 사랑을 받았을 텐데. 이 대단한 의지의 한국인들에게 딱 2% 부족한 점이 바로 그거다. 어쨌든 우리는 제대로 격식을 갖춘 떡국으로 화려한 아침을 먹었다(대한민국의 아내들이여, 남편과 함께 산으로 가십시오. 그곳에서는 당신이 왕비입니다. 왜냐고요? 아웃도어 체질의 남자들은 산으로 가야 기쁜 마음으로 머슴 기질을 발휘하는 법이랍니다).

부보상(보부상)들이 넘던 고개 박달령

▲ 허허로운 참나무 숲길. 겨울 산의 적요. 도래기재로 내려서는 길이다.
늦은목이에서 선달산(1,236m) 오름길은 선달(先達)처럼 걸어야 한다. 비록 아직 벼슬길로 나가지 않은 신분이긴 하지만, 과거 급제는 한 몸인데 어찌 종종걸음을 칠 것인가. 초입은 거의 설원을 걷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완만하다. 서서히 키를 높이면 둥두렷한 자태의 봉우리가 눈에 걸린다. 딱 선달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다. 정승, 판서격인 태백산과 소백산에 견주어도 그렇다.

사실 선달산은 백두대간 종주가 아니라면 전국적으로 알려졌을 산이 아니다. 그런데 국토지리정보원에서 밝혀 놓은 지명 유래는 조금 뜻밖이다. 한자로 ‘先達山’이라고 표기해 놓고는(1:50,000 지도도 마찬가지) ‘산세가 너무 웅장하여 속인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장소로 신선들만 거처한다 하여 선달산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한자음의 어감으로 부회(附會)를 한 것 같은데, 심한 과장이다. 정상도 밋밋하다. 겨울이 아니라면 조망도 즐길 형편이 아니다. 그나마 조금 떨어져서 보면 이름값을 한다.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의 풍모는 지니고 있다.

선달산에서 박달령(970m)까지는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정상을 내려서면서부터는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멀리 태백산과 함백산의 웅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말 그대로 크게 밝은 형국이다.

박달령에서 우리는 또 대간종주의 행복감을 만끽한다. 산령각(山靈閣) 옆에 아담한 정자가 세워져 있어 편안하게 쉬면서 점심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이러한 이유만으로도 산의 정령에 최대한 정중한 자세로 경배를 올릴 만하지 않은가. 박달령 마루에 선 안내판에 따르면,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고개로, 마루에는 옛날부터 산령각이 있었는데, 매년 사월 초파일에 고사를 지낸다고 한다.

선달산에서 바라본 옥돌봉은 박달령 산령각 지붕 바로 뒤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는 시각적 느낌과 판이하다. 그 사이에 첩첩 주름을 숨겨 두고 있다. 만만히 봤다가는 상당한 허탈감을 맛보게 된다. 작은 한 봉우리를 넘으면 그만큼 옥돌봉은 뒤로 물러나고 또 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옥돌봉은 이름과 달리 육산

이렇게 1시간쯤 씨름하다보면 북동쪽으로 옥돌봉, 남쪽으로 주실령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른다. 쉬어가기에 딱 좋은 곳이다. 산림청에서 벤치까지 마련해 놓았다. 군데군데 숲 해설도 해 놓아서 일석이조다. 이곳은 80년대까지 방화선으로 벌목을 해놓은 곳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신갈나무와 물푸레나무가 군집을 이루고 있다. 아이들 허벅지 굵기 만한 나무들이 제법 근사한 숲을 이루고 있다. 벌목한 나무의 밑동에서 올라온 싹이 자란 것이라고 한다. 사람도 한 25년쯤 자라면 푸릇하면서도 늠름한데, 지금 이 숲의 분위기도 딱 그렇다.

▲ 선달산 오름길.

옥돌봉(1,242m) 정상은 이름과 달리 육산이다. 이름 치레를 할 양으로 바위 몇 개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느긋이 쉬어갈 만한 곳이다. 시계만 좋으면 남서쪽으로 소백산에서 북동쪽으로 구룡산을 향해 달려오고 달려가는 대간의 꿈틀거림을 한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옥돌봉에서 도래기재를 향하는 1시간 남짓 내리막길은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진달래와 철쭉 같은 관목 옆으로 군데군데 특급의 금강송이 서 있다. 대간이 차츰 강원도 심산으로 접근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 옥돌봉 정상을 내려서자 말자 왼쪽으로 조금만 트레일을 벗어나면 나이 500살 먹은 철쭉을 만날 수 있다. 이 정도 나이의 철쭉은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고 한다.

몇 년 전까지도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던 도래기재(780m)의 절개면에는 나무계단이 놓아져 있다. 고갯마루 위로는 생태이동통로가 산허리를 잇고 있다. 생태에 대한 배려가 과거에 비할 정도가 아니어서 미더운 모습이지만, 문제의 심각성은 도로에 의한 생태 단절보다 이동해야 할 동물들의 개체가 절대적으로 줄어들었다는 데 있음을 우리 모두가 자각해야 할 것 같다.

이번 산행의 기점인 고치에서 종점인 도래기재까지는 도상거리 약 18km, 실거리 약 26km다. 예년처럼 눈이 많이 쌓였다면 상당히 힘들었을 구간이다. 하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단 한 순간도 스패츠가 필요 없었다. 심지어 남쪽 기슭은 대부분 먼지가 날릴 정도로 눈 가뭄이 심한 상황이었다. 갈수록 예측 불가능성이 짙어지는 기상이변은 세계적이면서도 국지적인 양상을 띤다. 하늘을 원망하기에 앞서 어머니 지구에 대한 인류의 패륜을 통절히 성찰해야 할 때인 것 같다.

소백과 태백의 위엄과 달리 은둔자의 매력을 지난 양백지간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겨울 참나무숲의 침묵에서 어떻게 봄을 기다려야 하는지를 배우라.’

글 윤제학 / 사진 허재성 기자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봉황산 부석사

고건축의 최고 걸작 무량수전

부석사를 품에 안은 봉황산은 백두대간의 주능선에서 조금 벗어나 있긴 하지만 등성마루가 아닌 줄기 전체로 보면 분명 대간의 일부다. 안양루에는 ‘봉황산 부석사’라는 편액을 걸고 있지만, 일주문에는 ‘태백산 부석사’란 편액을 달고 있다.

이번 구간은 한국 고건축의 최고 걸작이라 할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마구령에서 하산하든 도래기재에서 하산하든 중앙고속도로를 타려면 부석면을 지나야 하기 때문이다.

부석사는 건물의 아름다움도 최고지만, 건물들이 산과 이룬 최고 경지의 조화를 보여주는 절이다. 그것은 자연과 사람이 어떻게 한 몸을 이루어야 하는지를 가르쳐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자연은 인간이 없을수록 좋지만, 인간은 단 한순간도 자연에 빚지지 않고 살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부석사는 최고의 생태교육 현장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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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4구간] 선달산 식생

조림지가 대간의 낙락장송 밀어낸다
자연성 앗아간 일본이깔나무와 잣나무 조림의 생채기들


▲ 고려엉겅퀴. 한국 특산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가을에 피고, 어린잎을 나물로 먹는다. 백두대간 능선의 신갈나무숲 속에 키가 1m 이상 자라는 것들이 있었다.

백두대간을 따라 형성된 소백산과 태백산의 두 산괴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지역에 선달산(1,236m)이 있다. 소백산을 벗어나며 잠시 낮아진 고도가 태백산을 향해 가면서 서서히 높아지기 시작하는 지점, 바로 그곳에 선달산이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백두대간은 선달산에서 동쪽으로 꺾여 박달령, 옥돌봉(1,242m)을 거쳐 도래기재에 이르는데, 위도가 거의 높아지지 않고 변함이 없다.

한편, 선달산에서 정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은 백두대간의 늦은목이, 갈곶산을 거친 후 대간을 벗어나서 2km쯤 계속 남진해 봉황산(819m)을 세우는데, 그 산자락 한 귀퉁이를 고찰 부석사에게 내주고 있다.

선달산 남쪽 수계의 중심에 앉은 생달 마을

[가시여뀌]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습한 응달에 자라는 한해살이풀로 전체에 가시 같은 털과 붉은 샘털이 많다.
선달산의 식물을 둘러보기 위해 경북 봉화군 물야면 오전리 생달 마을로 들어선다. 지척에 우리나라 최고의 약수라 일컬어지는 오전약수가 자리 잡고 있기도 하다.

생달 마을은 선달산에서 발원한 큰터골, 왕바우골의 물을 받아 흐르는 하천을 끼고 형성되어 있다. 개쑥부쟁이 꽃을 보며 마을로 들어서면 포도, 오갈피 등을 재배하는 밭이 눈길을 끈다. 큰터골을 거슬러 늦은목이에 오른 다음 선달산을 거쳐 왕바우골로 하산하며 식물을 관찰하려면 마을길을 따라서 계속 올라가야 한다.

골짜기 위쪽으로 민가가 띄엄띄엄 보인다. 까실쑥부쟁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고, 계곡가 덤불을 타고 오른 개머루는 까만 열매를 익히고 있다. 산쪽 사면은 여느 산과 다름없이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다. 조림한 숲 가장자리에 도둑놈의갈고리, 파리풀이 자라고 있다.

[개시호] 전국의 깊은 산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여름에 피며, 줄기에 난 잎의 아래쪽이 줄기를 감싼다.
조림한 이후 식생이 단순해진 산쪽 사면과는 달리 계곡 주변에는 물푸레나무, 단단풍나무 등의 큰키나무 몇 그루뿐만 아니라 생강나무, 쪽동백나무 같은 떨기나무도 남아서 예전에 좋았던 식생을 대변하는 듯하다. 계곡쪽에는 눈괴불주머니, 물봉선, 궁궁이, 미역취, 참취 같은 가을꽃들이 한창이다.

콘크리트로 포장은 되었지만 길이 더욱 좁아져서 이제 마을을 완전히 벗어난 듯하다. 길가에는 사람의 간섭이 있는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가시여뀌, 나도송이풀, 산국이 피어 있다. 일본이깔나무 조림지 대신에 졸참나무, 소나무, 쪽동백나무, 신나무, 고추나무, 박달나무 등이 섞여 있는 2차림이 나타나고, 그 밑에서 눈빛승마나 투구꽃처럼 깊은 산에서 자라는 식물이 있어서, 사람 사는 마을은 이제 끝인가 보다 생각된다.

[궁궁이] 깊은 산골짜기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피며, 높이 1m쯤이고,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길이 끝없이 계속 이어지는 게 수상쩍더니 현대식으로 지은 번듯한 집이 앞을 막아선다. 집과 정원을 꾸민 모습으로 보아 원래 이곳 주민은 아닌 것 같고, 산속에 사는 게 좋아서 들어와 사는 사람인 듯하다. 집 뒤에 서있는 상수리나무 노거수가 인상적이다.

이 집을 지나서도 길은 비포장으로 계속 이어진다. 조림지가 끝났다고 여기고 나서 잠깐, 다시 조림지가 나타난다. 이번에는 잣나무 조림지다. 일본이깔나무숲이나 소나무숲에 비해서 더욱 짙푸른 빛깔을 띠므로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조림지 가장자리에 원래 자라던 나무들이 몇 그루 남아 있는데, 층층나무, 소태나무 등이 그것이다.

대간 남쪽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귀화식물들

[노루삼] 숲 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5~6월에 흰 색으로 피며, 열매는 가을에 검게 익는다.
길가에는 고마리, 향유, 신감채 같은 토종 가을꽃들이 다소곳하게 피어 있는가 하면 이에 비해 꽃이 크고 색깔도 진해서 사람의 시선을 붙잡는 달맞이꽃, 원추천인국, 망초, 미국쑥부쟁이 같은 귀화식물들도 피어 있다. 미국쑥부쟁이는 근래 들어 전국에 빠른 속도로 퍼지고 있는 귀화식물로 이곳까지 침투해 세력을 넓히고 있다.

화단에 심기 위해 들여온 원예식물인 원추천인국도 야생 상태로 자라고 있는데, 루드베키아라고도 부르는 북미 원산의 한해살이풀로서, 토착화하여 세대를 이어가기도 하므로 귀화식물 범주에 넣는다. 조금 더 올라가서 만나는 용운사라는 절집 앞에서부터 줄을 맞춰 심겨진 것을 보면 절에서 조경용으로 길가에 심었다가 번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누린내풀] 중부 이남의 산과 들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7~8월에 피며, 전체에서 누린내가 강하게 난다.
용운사 앞에서 왼쪽 계곡쪽으로 들어서야 늦은목이로 갈 수 있다. 생달 마을 길을 따라 이어지는 이 골짜기가 큰터골이다. 콘크리트 포장길을 버리고 왼쪽의 숲길로 들어서면 바로 큰터골 상부계곡이다. 수량은 그리 많지 않지만, 계곡 주변의 습기가 많은 곳에는 개면마, 촛대승마, 진교, 애기괭이눈, 흰털괭이눈, 선괭이눈, 노루오줌, 벌깨덩굴 등이 자라고 있다. 하지만 이 일대도 조림된 일본이깔나무숲과 잣나무숲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계곡 부근에 고광나무, 노랑물봉선, 물봉선이 자라고 있다.

계곡을 한 번 건너면 잣나무 조림지가 넓게 펼쳐진다. 잣나무숲 속에는 투구꽃, 잔털제비꽃, 졸방제비꽃, 남산제비꽃, 멸가치, 둥굴레 등이 자라고 있다. 잣나무를 조림하면서 냈던 산판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어린 신갈나무 몇 그루가 보이는가 싶지만, 이들 사이에 조림된 어린 잣나무가 더 확연히 보인다. 아래쪽의 큰 잣나무들은 오래 전에 심은 것 같지만, 이곳의 것은 그리 오래된 것들이 아니어서 최근까지 조림이 계속되었음을 보여준다.

[둥근바위솔] 전국의 산과 바닷가 바위 겉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피며, 꽃이 핀 후 죽는다.
동자꽃, 나비나물, 은대난초를 보며 올라가면 곧 계곡이 시작되는 곳에 이른다. 물이 졸졸 흐르는 샘이 있는 이곳 주변은 습기가 많아 풀들이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개면마, 관중, 가시여뀌, 짚신나물, 바디나물, 파리풀, 물봉선, 곰취, 서덜취, 멸가치 등이 발견된다. 일대에는 잣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이곳에서 20여m 위는 잘록한 고개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이 바로 백두대간 늦은목이다. 늦은목이에 올라서면 소백산 국립공원 경계를 알리는 표지판이 서 있다. 해발 800m로서 높이 1,200m가 넘는 선달산 정상까지는 1.9km의 거리를 올라가야 한다.

고개 너머 영주시 부석면 남대리쪽으로도 백두대간까지 일본이깔나무가 조림되어 있다. 남쪽은 잣나무 조림지, 북쪽은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로 백두대간이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다. 일본이깔나무숲 속에는 줄딸기 등 백두대간 능선에 자생적으로는 결코 생육하지 않는 식물들이 조림 과정에서 따라 올라와서 살고 있다. 조림지 속에 자리 잡은 나리난초 군락이 예전의 좋았던 생태를 짐작케 할 뿐이다.

1,000m대까지 일본이깔나무 조림

[만주우드풀] 산속 바위틈에 자라는 여러해살이 양치식물로, 선달산 구간의 백두대간 능선 바위에 자라고 있었다.
백두대간 능선을 따라 선달산을 향하면 오른쪽은 잣나무 조림지가 이어진다. 하지만 왼쪽으로는 어린 신갈나무와 굴참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고, 박달나무도 몇 그루 보인다. 간간이 섞여 자라고 있는 소나무들은 한 아름이 넘는 노송들이어서, 백두대간이 춘양목의 고장에 들어서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노송들은 후세대를 잇지 못하고 있다. 어린 소나무나 발아 중인 소나무 씨앗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대간 남쪽에 조림한 잣나무들이 환경에 적응하여 어린 개체들을 재생산하고 있는 모습을 오히려 쉽게 볼 수 있어서, 앞으로 이곳에서는 소나무나 신갈나무 같은 원래 식생은 사라지고 새로 침입한 잣나무가 주종을 이룰 것으로 예상된다. 가끔씩 아주 오래 된 일본이깔나무가 능선에 올라와 자라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서덜취] 깊은 산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여름부터 가을까지 피며, 어린잎을 나물로 먹는다.
숲 바닥에는 애기나리가 군락을 이루기도 하고, 산거울이 대군락을 이루어 펼쳐지기도 한다. 큰 소나무들이 숫자가 많아지는 듯하다 다시 어린 신갈나무들이 우점하는 숲으로 바뀌고, 철쭉나무가 터널을 이룰 정도로 무리지어 자라는 곳도 있다.

고도를 더욱 높이면 신갈나무숲이 나타난다. 수령 20~30년쯤 되어 보이는 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숲을 이루고 있다. 가끔씩 한 아름이 넘는 신갈나무들도 자라고 있어서 세대를 바꿔가며 신갈나무가 이곳의 우점종이 되고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숲 바닥에는 조록싸리, 나비나물, 고령엉겅퀴, 수리취, 일월비비추, 은대난초 등이 자라고 있다.

선달산 정상 부근에 이르면 어른 손목 굵기 정도의 줄기를 가진 신갈나무가 순군락에 가깝게 무리를 짓는다. 가끔 물푸레나무와 거제수나무가 섞이기는 했지만, 나이가 비슷한 어린 신갈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다. 숲 바닥에서는 애기나리, 수리취 등이 보인다.

[수리취] 산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연한 잎을 떡에 섞어 먹으므로 '떡취'라고 부르며, 잎을 말려서 부싯깃으로 쓴다.
더욱 정상 가까이 다가가면 어린 물푸레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덩굴지어 자라는 미역줄나무가 보이고, 투구꽃, 개시호, 산꼬리풀, 고려엉겅퀴, 미역취 등이 꽃을 피우고 있다.

선달산 정상은 표지석이 있을 뿐 나무들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에 전망은 그리 훌륭하지 않다. 어린 물푸레나무와 신갈나무가 자라고 있고, 질경이, 짚신나무, 개시호, 오이풀, 쉽싸리, 싱아, 바디나물, 고려엉겅퀴 등이 관찰된다.

정상을 지나 습기가 많은 안부에는 희귀식물 냉초가 자라고 있다. 황악산 구간에서만큼 많지는 않지만, 소백산 정상 부근에 이어 이곳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일대에는 당분취와 흰진교도 자라고 있다.

정상을 지난 이후 커다란 신갈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어느 정도 자연성을 회복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동자꽃, 어수리, 참이질풀, 속단, 개시호, 여로 등 깊은 산에서 자라는 풀꽃들이 나타난다. 떨기나무인 노린재나무가 숲의 중간층을 이루고 있다.

능선 바위에 만주우드풀, 둥근바위솔 자라

이곳 백두대간 능선에는 부드러운 흙길만이 있는 것은 아니어서 몇몇 곳에서는 크고 작은 바위들을 드러내 보인다. 이들 습한 바위에는 산일엽초, 바위떡풀, 새끼꿩의비름 등 바위를 좋아하는 식물들이 자라고 있어 눈여겨 관찰할 만하다. 이뿐만 아니라 갈라진 바위틈을 비집고 뿌리를 박고 사는 만주우드풀, 바위 겉에 살짝 뿌리를 얹고 사는 둥근바위솔도 볼 수 있다. 숲 바닥에서는 큰산장대, 산꼬리풀, 쥐털이슬, 단풍취 등이 보인다. 초여름에 꽃을 피우는 풀솜대는 빨간 열매를 익히고 있다.

[참이질풀] 중부 및 북부 지방의 산과 들에 자라는 한국 특산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핀다.
정상과 높이가 비슷한 펑퍼짐한 봉우리를 넘으면 곧 남쪽으로 내려서는 길과 마주친다. 이 길이 왕바우골을 거쳐 생달 마을로 다시 내려서는 길이다. 하산을 시작해서 능선으로 난 길을 1시간쯤 따라가면 큰 계곡에 이른다. 능선길 사면에는 참나물, 서덜취, 퉁둥굴레 등이 자라고 있다. 계곡이 제법 커지면 궁궁이가 하얀 꽃을 피우고 있다. 계곡 부근에서 참나물, 서덜취, 투구꽃 등도 꽃을 피우고 있다.

큰개현삼, 눈빛승마, 병조희풀, 물참대 등을 보며 고도를 계속 낮추다보면 어느새 계곡부의 활엽수 종류가 달라진 것을 알 수 있다. 백두대간 능선에서 주종을 이루던 신갈나무 대신에 당단풍나무가 우점하고 있다. 당단풍나무숲에 층층나무, 산뽕나무, 쪽동백나무 등이 섞여 자라고 있고, 중간층을 고추나무, 다래나무 등이 담당하고 있다. 가을철에 볼 수 있는 하층식생은 별로 뚜렷하지 않은데, 눈괴불주머니, 눈빛승마, 투구꽃 정도가 눈에 띌 뿐이다. 조릿대도 가끔 보이지만 이곳에서는 세력이 그다지 크지 않다.

화전터가 나타나면서 참반디, 개쑥부쟁이, 물봉선, 노랑물봉선, 파리풀, 짚신나물, 가시여뀌, 까실쑥부쟁이, 신감채, 두릅나무 등이 보인다. 오른쪽 계곡이 합쳐지는 지점에서는 뫼제비꽃, 민눈양지꽃, 서덜취 등의 풀과 함박꽃나무, 박쥐나무 등이 보인다. 숲의 상층을 이루는 활엽수로 까치박달이 추가되는 것도 이 부근이다.

[풀솜대] 숲속에 자라는 여러해살이풀로, 5~6월에 흰 꽃이 피며, 열매는 가을에 익고, 어린순을 나물로 먹는다.
화전과 산판 흔적이 더욱 뚜렷해지는가 싶으면 이내 잣나무 조림지에 닿는다. 간간이 노루삼, 홀아비꽃대, 누린내풀, 솜나물 등이 보인다. 더 내려가면 일본이깔나무 조림지도 나온다. 심어 놓은 밤나무들도 보이기 시작하고, 길가에는 개미취, 나도송이풀이 자란다. 무덤, 빈 농가를 차례로 지나면 으아리, 고마리와 등과 함께 귀화식물인 털별꽃아재비가 나타나서 사람 사는 동네에 가까워진 것을 알린다. 이내 생달 마을 윗동네다.

백두대간 고치~도래기재 구간은 강원도 영월군 하동면, 경북 영주시 부석면, 봉화군 물야면과 함께 춘양목으로 유명한 봉화군 춘양면을 지난다. 춘양목은 바로 이 춘양에서 나는 질이 좋은 소나무를 일컫는다. 춘양목의 고장을 지나는 백두대간에서 본 현실은 조림한 잣나무와 일본이깔나무가 소나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2005년 9월24일 취재).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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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4구간] 선달산 풍수

안양루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문은 기(氣)의 출입구…부석사 무량수전의 풍수지리

▲ 부석사 전경과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은 눈맛의 즐거움을 넘어 가슴까지 후련할 정도다.

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이며, 특히 대웅전격인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유명하다. 무량수전 안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했는데,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전을 측면에 모시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긴 바위가 지금도 남아있다.

남한의 5대 명찰은 충남 서산의 개심사, 전남 강진의 무위사, 전북 부안의 내소사, 경북 청도의 운문사, 경북 영주의 부석사라고 한다. 부석사가 왜 유명한 사찰이 되었는가. 이에 대해 이중환 선생은 그 이유를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에 이렇게 적고 있다.

부석사가 유명하게 된 사연의 허실

▲ 무량수전에 바라본 안양루. 안양루가 안산을 가로막고 있다.
‘기이한 흔적과 이상한 경치가 있는 것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부석사(浮石寺)가 있는데, 신라 때의 절이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실을 건너 넘기는데 걸림이 없으니 비로소 떠 있는 돌인 줄 알다. 절이 이것으로써 이름을 얻었으나 이 이치는 자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또한 의상대사가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에 생겼다는 기록이 있고, 이 나무는 비선화수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그런데 부석(浮石)이란 말은 비과학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지금은 한낱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연경관에 대한 완상(玩賞)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고, 특히 기둥의 배흘림이 아름다운 곡선은 학창시절에 책으로 배운 지식을 확인하는 정도의 시선을 끌지만, 이것도 잠깐동안 눈여겨볼 뿐이다.

유흥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에서 부석사의 인상을 ‘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이라고 표현했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안양루에서 바라보면 백두대간 연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은 눈맛의 즐거움을 넘어 가슴까지 후련할 정도다. 이렇게 좋은 곳에 시가 빠질 수 없지 않는가.

김삿갓과 두보의 자연관

▲ 무량수전에 바라본 안양루. 안양루가 안산을 가로막고 있다.
일찍이 김삿갓 시인이 이곳에서 지은 시 한 편이 무량수전에 앞에 있는 안양루에 걸려 있다. 팔도강산을 유람하며 기발한 착상으로 풍자시를 지어 유명한 김삿갓 시인이 이곳에서 지은 시 ‘부석사(浮石寺)’한 편만은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자신이 처한 슬픈 처지를 표현했다.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風塵萬事悤悤馬(풍진만사총총마)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은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었네

▲ 안양루에 있는 김삿갓의 부석사 시(詩).
한편 중국 시인 두보의 ‘등악양루(登岳陽樓)’라는 잘 알려진 명시가 있다. 중국 호남성 악양시에 동정호가 바라보이는 악양루에서 지은 시다. 악양루는 호남성의 황학루(黃鶴樓), 등왕각(騰王閣)과 더불어 3대 명루로 꼽히는 누각이고, 동정호는 중국에서 두번째로 큰 담수호로, 악양루에서 보면 바다처럼 보이는 호수다.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옛날에 동정호를 들었더니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에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 있다.?

가까운 친구의 편지도 없으니

늙어감에 외로운 배 뿐이로다.?

싸움터의 말이 관산 북쪽에 있으니(고향은 전쟁 중이므로 갈 수 없다는 의미)

난간에 의지해 눈물콧물 흘리노라.

두 시인은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천하 절경에서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김삿갓은 장괘한 백두대간을 바라보았고, 두보는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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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석사 정면 일직선 상에 안산이 마주하고 있다.

무량수전에서의 전경

부석사 어느 곳에서도 전망이 좋은데도 왜 유독 안양루에서 보는 전망을 최고로 치는가. 풍수지리적 입장에서 보면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조망하는 장소에 따라 다르다. 장소가 좋아 편안한 마음으로 완상하게 되면 보는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풍수지리의 논리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저 편하게 쉴 만한 장소에 주변 환경도 유정하게 보이는 곳을 찾는 심미안이 있으면 된다.

부석사 대웅전에 해당되는 무량수전의 좌향은 계좌정향(癸坐丁向·남남동향)이며 절마당에 있는 석등과 안양루는 정확히 일직선에 있다. 그리고 일직선상으로 계속 정면으로 향하면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안산(案山)에 해당되는 금산(金山· 둥근 모양의 산)이 정확하게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다. 명당은 이렇게 용맥의 방향을 따라 일직선 상에 안산이 자동적으로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무량수전 중앙에서 정면으로 바라보면 안양루가 안산을 가리고 있어 볼 수 없다. 즉 없어도 될 인공의 안양루를 건축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가리고 있어 오히려 경관을 헤치고 있어 아쉽다. 풍수지리에서는 좋은 주변의 산천은 더욱 잘 보이도록 만들어 주어야 하고, 흉한 것이 보이면 막아주는, 즉 차형통기(遮形通氣)를 해야 한다.

안양루는 잠시 쉬는 곳이고 무량수전은 불전을 모신 곳이므로, 무량수전은 주인공이 되고 주변의 건축물은 손님이나 보조자가 된다. 그러므로 무량수전을 중심으로 보고 주변 건축물은 무량수전에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데, 불필요한 안양루가 전망을 가리고 있다. 만약 정면에 보이는 안산이 보이도록 안양루를 조금 낮게 건축했더라면 무량수전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며 안양루는 용도를 다했을 것이다.

대문은 기(氣)의 출입구

▲ 무량수전의 대문 역할을 하고 안양루.
안양루는 누각이면서 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안양루 입구에는 ‘안양문(安養門)’이라는 현판이 있다. 안양루 아래에서 살펴보면 축대를 상당히 높게 쌓은 것을 볼 수 있다. 즉 무량수전에서 안양루까지 거리도 비교적 가까워 본래 절마당이 협소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무량수전의 불전은 특별하게 서쪽 측면에 모시고 동향을 하고 있는 이유도 건물의 전면은 길지만 측면이 좁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양택 풍수에서는 양택삼요(陽宅三要)라 하여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즉 문(門), 주(主), 조( )라고 하여 대문과 안방과 부엌인데, 이중에서도 대문은 기(氣)의 출입구라는 의미에서 ‘기구(氣口)’라 하며, 납기(納氣)와 출살(出殺)의 작용이 대문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주택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된다.

문루는 근대 건축에서는 거의 보기 드물지만, 절이나 서원 등의 건축에는 문루가 있고, 일부 주택에서도 문루 형식을 만들기 때문에 풍수지리에서 고건축물의 출입문에 대한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1. 앞에 있는 문은 양에 속하고, 뒤에 있는 문은 호(戶)라고 하며 음에 속한다. 이는 천문(天門)과 지호(地戶)의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2. 문은 두 개의 문짝을 사용하고, 호는 하나의 문짝을 사용한다. 이는 음양교제(陰陽交濟)의 의미다.

3.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호는 항상 닫혀있어야 한다. 이는 양벽음흡(陽闢陰翕)의 의미다.

4. 앞문과 뒷문은 반드시 서로 비례가 맞아야 되는데, 뒤의 호가 앞의 문보다 더 높고 커서는 안 된다. 이는 천존지비(天尊地卑)의 의미다.

5. 한 채의 주택에서 출입문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되며, 문이 벽보다 더 높아도 안 되며 더욱이 어지럽게 문을 내면 기가 흩어지므로 삼가야 한다.

6. 문을 열었을 때 정면으로 기둥이 마주하고 있거나, 두 개의 문짝이 가운데 기둥 중심으로 있거나, 집은 큰데 문이 작거나, 또는 집은 작은데 문이 크거나, 또는 문 앞에 곧은 길, 곧은 물, 큰 나무, 큰 바위, 절, 묘지 등이 있어 문을 가로 막거나 마주치는 것이 주택의 앞에 있거나 뒤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꺼린다.

7. 문이 너무 높고 크면 딸이 많다. 앞에 담장 모퉁이가 보이면 여자가 손해를 보고, 문루 정면에 뾰쪽한 물체가 쏘는 모양을 하면 사람을 폭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폭행당한다.

8. 대문은 마치 사람의 입과 같아서 오장육부를 주관한다. 옛말에 ‘千斤門樓四兩屋(천근문루사양옥·대문은 천 근만큼 중요하고 집은 비중이 적다)’라는 말이 있다.

문루가 너무 좁으면 사람과 재물을 모두 잃고, 누각이 너무 높으면 과부가 되거나 낙태를 한다. 문루 규모가 너무 크면 주로 구설이나 소송이 생기거나 죽는 수도 있다. 문루 아래에 두 개의 출입구를 이용하면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지키기 어렵다(한 쪽으로 다니면 무방하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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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르포

피해갈 수 없는 바람이라면 차라리 즐기자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맥이~고치령

소백산은 바람의 나라다. 그 바람이 전제군주를 닮았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소백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다음 요소들, 춤을 추는 듯한 주목, 6월에야 피는 철쭉, 여름 운무, 겨울 설화 같은 것들과 바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소백산의 바람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나 지리산의 노고단처럼, 일종의 붙박이 상징물이다. 여름철의 남동풍이든 겨울철의 북서풍이든, 일단 그것이 소백산으로 들어서면 절대강자로 바뀐다. 여름 소백산에서 비를 동반한 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누구나 어금니가 부딪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등성마루에서 비를 뿌리며 기온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겨울철은 또 어떤가. 거의 빈도 80%를 보이는 북서풍은 수직으로 소백산릉에 안긴다. 올올이 탄성 좋은 금속 줄 같은 그 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통의 임계점을 넘으면 화끈거릴 정도가 된다는 것을.

소백산 북서쪽에 있는 제천과 남동쪽 영주는 겨울철 온도차가 무려 3℃(북서풍 기준)에 가깝다. 소백산이 바람막이 구실을 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시민들은 난방비 절약분을 소백산에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왕 바람 얘기가 나온 만큼 안전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2001년의 경우 지리산은 239건의 안전사고 중 사망 2건, 설악산은 82건 중 2건, 소백산은 6건 중 2건이었다. 사고건수 대비 사망률을 백분율로 환산하면 지리산 1%, 설악산 2%, 소백산 33%다. 다른 해를 봐도 사고건수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이지만 사망사고 건수는 비슷하다.

소백산의 경우 사고건수는 산악 국립공원 중 가장 낮다. 산세가 워낙 너그럽고 계곡이 발달하지 않아서 부상 사고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해마다 사망자가 발생한다. 겨울철 바람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책을 통해 저체온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보면, 죽음을 맞는 순간에는 거의 무감각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소백산은 바람의 나라다. 어떤 방법으로든 소백산에서는 바람을 피해갈 수 없다. 가장 현명한 선택은 바람과 연인으로 지내는 것밖에 없다. 그 사랑의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겹겹이 껴입고 꽁꽁 여며서 스킨십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 제1연화봉을 지나며 바람과 상견례(?)를 나누고 있다.

‘등산은 맹목적이어야 한다’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죽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늘 저잣거리처럼 붐비던 죽령 마루는 인기척이 없다. 그나마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떨지 않을 수 있는 건 옛 휴게소 건물을 일부분씩 임대해 지역 특산품과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들 덕분이다.

소백산 산행은 사실상 천체관측소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2연화봉 전 송신소 입구까지 1시간 반 정도의 포장길, 이후 천체관측소까지 1시간 정도의 비포장도로를 걷는 일은 사실 좀 지루하다. 그렇다고 투덜댈 일은 아니다. 제2연화봉(1357m)에서부터 북동쪽으로 휘돌면서 소백산 연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겨울 산행 전 굳은 몸을 풀기 위한 스트레칭으로 딱 좋은 거리다.

취재팀이 천체관측소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 무렵. 첨성대를 흉내 낸 옛 건물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연화봉을 오르기 전 관측소를 기웃거려 본다. 낮 시간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은 한밤중이다. 오후 시간에 견학이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밤낮을 바꿔 사는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준다. 밤마다 별을 보며 사는 그 분들의 눈동자가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도 글렀다.

▲ 6월이면 철쭉꽃 만발할 제1연화봉 오름길.

천체관측소에서 연화봉(1,383m)까지는 5분 남짓. 이곳에서부터 트레일은 북쪽으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제1연화봉을 향한다. 나무계단으로 된 오르막이다. 봄철 철쭉 산행 시즌에 20만~30만 명이 몰리는 소백산의 특성상 불가피한 시설로 보인다. 자연과 인간의 타협이다(산이 동의한 바는 없지만,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에 입각하면 못 할 말도 아닐 것이다).

듣자 하니, 최근 ‘국립공원 정책포럼’에서 등산을 반자연적?반문명적 행위로 간주하여 등산 자체를 억제하자는 얘기들을 하는 모양이다. 자동차도 안 타고 이슬만 먹고 사는 분들의 얘기 같아서 가타부타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분들에게 세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먼저, 국회의원회관 같은 데서 얘기만 하지 말고 휴일 날 아무 때고 우이동이나 도봉동으로 한번 나와 보시라. 골프 칠 형편이 못되는, 그렇다고 돈 안 들이고 마땅히 취미생활을 할 게 없는 사람들이 하루 산행을 마치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것이 나와 당신들의 나라 ‘대~한민국’을 살리는 에너지다. 등산이 반자연 행위라면 산지가 70% 이상인 나라에서, 농약을 쏟아 붓지 않고는 기를 수 없는 자연 조건에서 가꾼 잔디밭에서 즐기는 골프는 얼마나 친자연적이라고 믿으시는지?

다음으로, 등산로 훼손은 ‘정상 정복’ 등산 패턴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초점이 틀렸다. 이 말은 ‘모든 음식은 또한 독이다’는 진술과 같은 맥락에서 쓰일 말이다. 그 말이 제대로 쓰일 번지수는 에베레스트에 대한 경도처럼 높이에만 집착하는 ‘등정주의’다. 1,000m도 안 되는 동네 뒷산 오르기에 갖다 붙일 말이 아니다.

이는 용어에 대한 약간의 오해 때문인 듯한데, 영미권의 ‘마운틴’과 우리의 ‘산’이라는 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마운틴은 우리 개념의 산과 대응하는 말이 아니라 산맥에 대응한다. 우리의 대부분 산은 영어의 피크나 돔에 해당한다. 우리는 영어의 피크에 해당하는 지리공간에 대부분 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산이 많은 나라여서 생긴 자연관의 소산이다. 그래서 우리의 등산 행위는 필연적으로 정상을 밟고 또 밟아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걸 두고 ‘정상 정복’ 패턴이라고 말하는 건 좀 민망하다. 차라리,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 망친다’고 얘기하라. 말인 즉 옳다. 하지만 이런 식의 어법은, 모든 인간 행위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테러 행위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댐을 막고, 지하수를 뽑아 올리고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문제 제기의 초점은 그게 아니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 이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민주적 생태주의에 대한 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과격한 논의도 수용돼야 한다. 등산=반자연주의로 단순화할 문제가 아니다.

▲ 제1연화봉을 오르기 직전. 바람보다는 지루한 계단이 더 편하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맹목적으로 오르는 등산이 등산로를 훼손한다”고 하는데, 듣기 참 그렇다. 등산에 있어 ‘맹목’이란 본질 아닌가. 그럼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물론 도토리 줍고, 산나물 캐고, 고로쇠 물 빼먹는 행위를 합목적적 행위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따라서 당연히 등산은 ‘맹목’이어야 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행위가 그런 것처럼.

맹목적으로 오른다는 말은, 무턱대고 등산로 아닌 곳으로 올라 가로 세로로 길을 내고, 봄 산행 때 질척거리는 트레일을 피해 옆으로 다니면서 등산로를 넓히는 행위에 해당하는 말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인공적인 보강 시설과 트레일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 따뜻한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OK
국립공원의 정책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최소화시키는 데 맞춰져야 한다. 어떤 방식의 시설물이 산에 가장 부담을 줄이는 길인가에 대한 기술적 연구와, 가장 자연스런 등산 문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형성하는 일이 포럼의 의제가 돼야 한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듯한 태도는 경찰국가에서나 할 일이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다.

덧붙여 우리말 ‘등산’은 행위자인 인간이 아닌 대상인 ‘산’을 주체로 하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이미 산에 대한 외경이 내포돼 있다. 반대로 ‘등반’이란 말은 ‘오르는 행위’ 자체 즉 인간을 주체로 한 말이다. ‘입산’이라는 말은 다른 차원에서 얘기돼야 할 성질일 것이고.

(독자 여러분. 엉뚱한 얘기가 길어져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등산이 능선종주와 정상등산 위주로 이뤄지고 있어 등산로 훼손이 가중된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등산 자체를 범죄시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등산의 모든 것이니까요. 만약 그 주장이 산기슭을 산책하듯이 산을 찾자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등산로가 아니라 산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수없이 거미줄을 걷으며 ‘과연 나는 무슨 권리로 거미 가정을 파괴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놓고 심각히 고민했었다. 아직도 그 문제는 나의 화두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다른 분들에게도 꼭 해볼 것을,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 남의 자식도 사랑할 수 있듯이,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나면 국토관이 바뀐다. 정녕 자연과 지속적이고 민주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산 위에서 골프장을 보면 그곳의 농약이 우리 몸에 쌓이는 경로가 금방 그려진다. 반대로 울창한 숲을 걷다 보면 그 소중함이 가로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환경담론은 구름을 타는 것이어서도 안 되고,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자칫하면 도덕적 자기기만이나 지적 허영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 갓 내린 눈을 밟으며 국망봉에서 상월봉으로 나아가고 있다.
왼쪽 뺨 때리는 바람은 난폭한 점령군

늦은 봄이면 철쭉이 만발할 산허리는 설핏 눈을 덮고 있다. 발의 촉감이 나쁘지 않다. 약간 미끄러운 눈길에 거의 적응이 돼 가자 제1연화봉(1,394.4m)이다. 비로봉과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름을 탄 기분이다. 하지만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기에는 바람이 너무 맵다. 조금만 멈추어 서 있어도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제1연화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다. 왼쪽 뺨으로 때리는 바람은 난폭한 점령군 같지만 그래도 싫지 않다. 모자에 발라클라바를 착용하고 후드를 또 써도 덥지 않다. 하지만 살짝 동쪽 기슭으로 트레일이 기울면 기가 막히게 몸이 그것을 알아챈다. 따뜻하다. 바닥은 어김없이 눈이 녹아 있다.

거의 고원을 걷는 듯한 마른 풀밭 길 위로 거침없이 달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느낌이 아주 좋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라는 느낌. 우주와 합일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 테고, 어떤 심미적 충일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철쭉 군락지인 1382m봉을 지나면서부터 참나무 숲길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크게 솟구치지 않는 1394.4m봉을 지나자 다시 시야가 열린다. 좀 더 나가자 나무마루로 이루어진 트레일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곧장 가면 정상인 비로봉이고, 왼쪽으로 들면 주목군락 감시초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 감시초소는 사실상 대피소처럼 쓰인다. 고맙고 또 고마운 집이다.

감시초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비로봉을 오른다. 왼쪽 기슭의 주목들이 누런 풀밭 위에 시린 기운을 드리우고 있다. 이곳의 주목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100여 그루씩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수령 200~700여 년, 3,400여 그루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고지인데다 바람이 워낙 세어서 나이에 비해서 키가 작다. 평균 높이는 7m밖에 되지 않는데도 가슴둘레 높이가 2m 정도인 나무도 있다고 한다. 위로 자라지 못한 대신 옆으로 자란 것이다. 가지들은 하나 같이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 즉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모습을 나는 ‘바람의 화석’이라고 불러 본다.

드디어 비로봉(1,439.5m)이다. 사방 어디고 걸릴 것이 없다. 그래서 이름이 비로(毘盧)인 것이다. 비로란 비로자나불의 준말로,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바리로차나(Vairocana)’다. 우리말로 하면 ‘광명의 부처’라는 말이겠다. 진리의 빛으로 온 세상을 감싸는 부처의 세계를 일컫는 말인데, 이 세상 자체를 부처의 몸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해도 그리 허물이 아닐 것이다.

대간 으뜸줄기를 지리산쪽으로 틀도록 한 산

▲ 대간 마루에 선 고치 산신각. 소백과 태백. 이른바 양백의 산신을 모신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간 점검 차원에서 백두대간 전체에서 차지하는 소백산의 위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산줄기로서 대간을 이루는 모든 산의 지위는 동등하다. 구릉에 가까울지라도 그것이 없으면 ‘대간’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위치상 그 의미가 각별한 산을 설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꼭 거명해야 할 산을 개인적으로는 백두산, 매봉산, 소백산, 지리산을 들고 싶다.

그 가운데서도 소백산의 존재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이중환(1690-1752)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땅의 전체 형세를 말한다.

‘(백두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산까지 한 줄기 마루로 통한다…중략…태백산에서 줄기가 좌우로 갈라져서 왼편 지맥은 동해가를 따라 내려갔고, 오른편 지맥은 소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태백산쪽으로 내려간 것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위의 언급은 택리지가 편찬될 때까지도 백두대간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소백산에서 지리산으로 흐르는 줄기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동해가를 따라 내려간 줄기도 간과하지 않고 있다. 태백산에서 동해로 흐르는 줄기가 곧 낙동정맥인데(정확히는 매봉산 동쪽의 1145m봉에서 갈라짐), 등줄기의 개념으로 보자면 그것이 더 합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중환은 으뜸줄기 하나를 설정하지 못하고 두 줄기를 언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경표의 편찬 시점에 이르러서는 으뜸 줄기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소백산의 존재감이 그곳으로 대간의 줄기를 설정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상상에 가까운 생각이고, 그래야만 호서정맥에서 호남정맥에 이르는 정맥들이 대간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대간이 설정됐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백두산~매봉산, 매봉산~속리산, 속리산~지리산이 될 것이다. 이중 매봉산~속리산의 가운데에 소백산이 있다. 우리 국토의 허리 중에서도 허리가 소백산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동북방향으로 서서히 동해로 다가서는 소백산의 마루에 서 있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는 고치령 능선

비로봉에서 국망봉을 지나 상월봉에 이르는 대간의 등성마루는 장쾌함과 부드러운 곡선미에 있어 우리 산 가운데서도 으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구간은 봄에서 여름까지 다양한 들꽃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국망봉(1420.8m)에서 이우는 햇살을 바라본다. 춥고 긴 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영주 시내의 불빛들이 주는 따뜻함이 오히려 몸을 더 움츠리게 한다.

밤새 눈이 내렸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세상을 순백으로 바꿔 놓기에는 충분하다. 바쁘게 산을 넘는 구름이 아침 해를 삼켰다가 토해내기를 반복한다. 언뜻 하늘이 열릴 때, 그 빛기둥을 따라 일어서는 산허리의 풍광은 천지창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하다.

국망봉 앞에 선 우람한 자태의 상월봉(1394m)까지는 1Km 남짓.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고 가는 기분은 칼바람에 대한 보상으로는 과분할 정도다. 상월봉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치까지는 실거리 10Km 정도로 4~5시간 소요되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다. 늦은맥이재를 지나 신선봉 갈림길에서부터는 서서히 키를 낮추며 고치를 향한다. 특별한 조망은 없지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고치 고갯마루의 산신각이 반가운 얼굴로 서 있다. 대간 마루에 선 산신각으로는 처음이다. 몇 년 전 불이 나서 새로 세웠다는데, 그 과정에서 영주시 단산면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꾀나 신경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함부로 끼어들 얘기는 못되지만, 산을 신으로 아는 이 아름다운 믿음을 더 장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고치에서 단산면 좌석리까지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 돼 있다. 에누리 없는 10리 길이다.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은 잡아야 한다.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치에서 좌석리쪽으로 하산하게 되면 반드시 소수서원을 지나게 된다. 길가에 있기 때문에 일부러 많은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된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즉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본디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1542년(중종 37)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안향의 뜻을 기려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최초에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을 세웠을 때는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1550년(명종 5)에 사액을 받았다. 조선 말 서원이 당쟁과 민폐의 온상이 되자 대원군이 이의 철폐를 단행하여 600여 군데를 없애고 40여 군데를 남겼는데, 그때도 소수서원은 살아남았다.

서원을 둘러 산 명품 소나무숲만으로도 일부러 찾을 만한 곳이다.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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