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5구간] 태백산 - 문화

장중함과 온후함 겸비해 地德이 충만
겨레얼의 본향, 국토의 중요지점, 민족의 시원지로 표상화

▲ 태백산 주변의 백두대간 산군.

태백산이 겨레의 정신사와 문화사적 지도(地圖)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참 크다. 민족의 영산이라는 자리매김에 걸맞게 태백산은 정신적으로 겨레 얼의 본향이자, 장소적으로 국토의 중요한 지점이며, 역사적으로 민족의 시원지로 인식됐다.

태백산 정상의 천제단은 이미 고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유적이고, 당골이라는 지명과 석장승의 옛 유적이 말해주듯 무속과 민속문화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태백산 자락의 정암사(淨岩寺)는 자장율사가 조성한 수마노탑이 있는 곳으로, 신라 호국사찰 중 하나이기도 하며, 태백산 황지와 검룡소는 각각 낙동강과 한강의 발원지로 중요시된다.

더구나 태백산은 한국의 여느 산보다도 장중함과 온후함을 겸비해 지덕(地德)이 충만한 엄뫼(母山)의 성정과 자태를 지니고 있는 산이기도 하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르기를, “금강, 설악, 두타, 태백산이 있는데, 산과 바다 사이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가 많다. 골짜기가 그윽하고 깊숙하며 물과 돌이 맑고 조촐하다. 간혹 선인의 이상한 유적이 전해 온다”고도 했다.

영동과 영서의 문화적 차이

▲ 천제단.

백두대간에서도 태백산은 허리일 뿐만 아니라 낙동정맥이 분기하는 결절점 지역이라는 중요한 지점에 위치한다. 여암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산수고라는 글에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열두 개의 산을 삼각산, 백두산, 원산, 낭림산, 두류산, 분수령, 금강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 육십치, 지리산으로 꼽았는데, 그 중 대부분의 산들은 우리나라 산줄기의 결절점이 되는 산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백두산은 백두대간의 시작이고, 낭림산은 청북정맥과 청남정맥의 가지가 비롯하는 곳이며, 두류산은 해서정맥과 임진북예성남정맥이 출발하는 곳이고, 분수령은 한북정맥의 가지가 뻗는 곳이며, 태백산은 낙동정맥의 출발점이고, 속리산은 한남금북정맥과 한남정맥 및 금북정맥이 시작되는 곳이며, 육십치는 금남호남정맥, 금남정맥, 호남정맥이 비롯되고, 지리산은 백두대간이 끝맺는 곳인 동시에 낙남정맥의 줄기가 뻗어나가는 지점이다.

알다시피 산맥은 전근대시대에서 문화권역을 구분 짓는 지형적 기준선이 되고, 그 산맥 줄기가 나뉘는 결절지(結節地)는 문화와 역사가 비롯하고 접촉, 접변하며 융합되는 곳이 된다. 따라서 한국의 문화권 중에서 백두대간과 낙동정맥이 갈라지는 결절지인 태백산 권역을 기점으로 하여 영동과 영서, 그리고 영남의 권역과 문화권이 나눠지고 수렴되게 되는 것이다. 강의 유역권이라는 관점으로 보자면 낙동강 유역권과 한강 유역권으로 크게 나뉘고, 그밖에 영동의 동해안 지역으로 생활공간이 크게 나뉜다.

백두대간을 기준선으로 영동과 영서 문화가 나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언어(방언)만 보더라도 영서지방은 경기도와 인접하기 때문에 표준어에 가깝지만, 영동지방은 전혀 다른 말을 쓰는 경우도 많다. 예를 들면 누룽지를 영서에서는 누룽지, 누렁지, 누룽기라고 쓰는 데 비해 영동지방에서는 소쩽이, 소꼴기, 소디끼, 소데끼라고 한다. 우물이나 상추 역시 표준말과 영서지방은 같은 데 반해 영동지방은 각각 우물을 용굴로, 상추를 불기라는 다른 말을 썼다.

그리고 강원도의 민요와 농악 역시 백두대간을 기준선으로 영동권과 영서권으로 분화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동 농악은 강원, 함경, 경북의 동해안 권역이고, 영서 농악은 웃다리농악이라고 불러 강원도 영서와 경기도, 충청 혹은 충북 권역으로 구분된다.

이렇듯 지리적으로 영서지방은 경기 서울과의 접근성이 좋아 문화 전파와 교류가 용이한 반면 영동지방은 백두대간의 장벽으로 말미암아 고유한 지역적 문화특성이 형성됐던 것이다.

중부 이북에 백(白) 자 계열 산 많아

태백산의 산이름에 관해 살펴보면 백두산, 소백산과 함께 백(白) 자 계열의 산에 속하며 옛 우리말로는 ??뫼라고 일컬을 수 있다.

백산의 우두머리인 백두산에 대해 고산자 김정호는 대동여지전도에서, ‘조선은 땅이 동방의 끝에 있어 해가 남달리 밝기 때문이라고 하거니와 산경(山經)에 말하기를 곤륜의 한 가닥이 백두산이 되니 이 산은 조선 산맥의 할아비다’고 했다.

▲ 천제단 가는 길.

백두산은 불함산이라고도 불렀는데, 불함이라는 말은 ‘밝은’의 역음으로 광명 또는 신명이라고 볼 수 있고, ‘불(不-火-빛)’, ‘함(간-임금)’이라고 풀이해 빛의 천산(天山)이라고 볼 수도 있다. 최남선은 ‘백(白) 자는 신명(神明)을 의미하는 고어 ? 의 사음자(寫音字)로서 무릇 이 명칭을 가진 산은 고신도(古神道) 시대에 신앙 대상이 되던 산악(백운, 백화, 백악, 백마, 백록)이며, ?은 박, 발, 부루, 비로, 부노, 배래, 풍류 등으로 차자(借字)한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우리나라에는 태백산, 장백산, 함백산, 백운산 등과 같이 백 자 돌림의 산이 수없이 많이 있는데, 그 분포 상태를 보면 중부 이남보다 이북의 백두대간으로 갈수록 많은 분포를 보이고 있다.

한편으로 태백이라는 이름에 관해 미수(眉 ) 허목(許穆·1595-1682)은 <미수기언>에서 말하기를, ‘태백산은 문수봉이 가장 높고 큰데, 문수봉의 봉우리 끝이 모두 흰 자갈이어서 바라보면 마치 눈이 쌓여 있는 것 같아서 태백이라는 산이름이 있다고 한다(太白 文殊最高大 文殊絶頂 皆白礫 望之如積雪 山有太白之名 以此云)’고도 했다.

▲ 정암사 수마노탑.
태백산과 황지는 예부터 겨레의 섬김을 받았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태백산(太伯山)은 부(府)의 서남쪽에 있다. 신라에서 오악(五嶽)을 정할 때 북악(北岳)으로 하였다. 사당이 있는데, 이름을 태백대왕당(太伯大王堂)이라 하였다. 여러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낸다’고 했다. 황지(黃池)에 관해서도, ‘부의 서쪽에 있는데, 제전(祭田)을 두고, 소재관(所在官)이 제사를 지낸다. 하류로 30여 리쯤 되는 부의 서쪽에 이르러 작은 산을 뚫고 북쪽에서 산 남쪽으로 흘러 나가므로, 천천(穿川)이라 하니, 곧 경상도 낙동강의 근원’이라고 했다.

태백산에 대한 제의와 신앙은 오늘날에도 전승되어 수많은 사람들이 산제를 지낼 뿐만 아니라, 민중들은 태백산에 대해 바람을 기원하기도 했으니 다음과 같은 자손 기원 기도문이 전해진다. ‘태백산 산신님요 명을 주고 복을 주고, 자손이 나거들랑 수명장수 부귀공명하고, 백대천손 가득하고 창성하며, 금동자 옥동자 귀출같이 길러내어, 백수를 흩날리고 좋도록 점지하여 주옵소서.’

태백산에서도 정상의 천제단은 기원과 유래는 알 수 없으되 고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낸 제단으로, 신라에서는 삼산오악 중에 북악(北岳)으로 지정하여 제사를 올리던 유적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옛 기록에 이르기를 환인의 아들 환웅이 있었는데, 항상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거늘 아버지가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태백(三位太伯)을 내려다보니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 세 개를 주어서 내려가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삼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 아래에 내려왔는데, 이를 신시라고 부르니 그가 곧 환웅천왕이었다’고 한 대목에서 태백이라는 이름이 나오며, 일연은 태백이 황해도 묘향산이라는 주를 단 바 있다.

그렇지만 현재 천제단의 중심 위패석에는 한배검이라는 이름이 있으니, 이미 민간에서는 이 돌이 서 있는 자리는 겨레의 시조인 단군의 장소임을 상징한다. 태백산 정상부의 천제단은 3개가 있는데, 가운데의 천왕단을 중심으로 북쪽 300m 지점에는 장군단이 있고, 남쪽 300m 지점에는 하단(下壇)이 있다. 천왕단은 자연석으로 타원형의 제단을 아홉 단으로 쌓아 9단탑이라고도 부른다. 모두 겨레의 숫자인 3의 비례 질서를 가지고 배치되고 조경된 의미 구조가 흥미롭다.

‘사면의 뭇 산들은 눈앞에 떨어지네’

▲ 태백산 석장승.
태백산의 황지는 영롱한 광채를 발하는 옥석 마냥 맑고 투명한 거울로 하늘을 비추고 있다. 황지 물가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가 태백산의 입김처럼 향연처럼 신비스럽다. 황지라는 지명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에 황씨 성을 가진 부자가 많은 재산으로 풍족하게 살았으나 돈에 인색하기 짝이 없는 수전노의 표본이요 노랭이였다. 하루는 황씨가 마굿간을 청소하는데 태백산의 한 노승이 시주하기를 청했다. 주인이 꾸짖으며 백미 대신 소똥을 가래에 퍼 던져 주며 “이거나 받아 가라”고 하였다. 노승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받아 가는 것을 보고 있던 그 집 며느리가 민망스럽게 여겨 백미 한 되를 떠서 시부모 모르게 뒤쫓아 가서 노승에게 주며 미안하다고 대신 사과했다.

노승이 며느리 보고 말하기를 “이미 이 집의 운이 다하였으니 아기를 업고 속히 소승의 뒤를 따르시오. 어떠한 일이 일어나더라도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하더니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며느리는 곧 집을 나서서 구사리 산마루까지 갔을 때 천지가 진동하고 큰 우뢰 소리 같은 것이 나기 때문에 깜짝 놀라 집쪽을 돌아다보니 자기 시가는 둘러빠지고 큰 못이 되었다. 며느리는 시부모와 가족을 생각하고 울며 되돌아가려고 하다가 즉석에서 석불이 되고 말았다. 이 못이 황지의 세 못이며, 미륵불은 지금의 구사리 산마루에 있는데, 높이 9자에 아기를 업고 뒤를 돌아다보는 모양을 하고 길가 숲속에 우뚝 서 있다.

태백산 천제단을 오르던 날, 태백산은 그 이름처럼 고결한 흰 옷을 입고 거룩한 성자처럼 거기에 그렇게 있었다. 그 날 산길을 오르던 모든 사람들은 흰 산(白山)이 방광하는 빛의 미학에 감싸인 축복받은 순례자들이었다.



긴 허공을 바로 지나 자연에 들어서 | 直過長空入紫煙

그제야 알고 보니 절정에 올랐구나 | 始知登了最高

한 덩이 흰 해는 머리 위에 나직하고 | 一丸白日低頭上

사면의 뭇 산들은 눈앞에 떨어지네 | 四面群山落眼前

몸이 구름 쫓아가니 내가 학을 탄 것인가 | 身逐飛雲疑駕鶴

-‘태백산을 오르다(登太白山)’, 안축(安軸·1282-1348)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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