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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룡산 정상에서 바라본 백두대간. 동북쪽으로 첩첩이 휘어돈다. 화면 상단 좌측이 태백산 일대다. |
술 욕심도 오그라들게 하는 추위
두 번째 임도에서 다시 계단을 밟고 절개면 위에 트레일로 오른다. 상당히 가파른 1256m봉을 우회하자 구룡산이 지척이다. 구룡산 정상(헬기장)은 사방 거칠 것 없는 조망을 선물한다. 태백산의 군더더기 없는 우람한 능선과, 뒤로 함백산 정상의 방송 중계시설이 한눈에 들어온다. 눈 아래로 펼쳐진 한미합동 공군훈련장 시설만 지나면 한달음에 태백산에 닿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동쪽으로 신선봉을 거쳐 깃대배기봉으로 길게 돌아 올라야 한다. 족히 하루를 삼키는 거리다.
구룡산에서 바라보는 태백산은 꽉 찬 달 같다. 깃대배기봉에서 부소봉(1,546.5m), 장군봉(1,566.7m)으로 이어지는 등성마루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봉우리다. 눈 덮인 등성마루 위의 나무들은 빛살 같다. 태백산은 분명 ‘크게 밝은 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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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천제단. |
구룡산을 내려서자 트레일이 한층 선명해진다. 방화선으로 벌목을 한 구간이기 때문이다. 방화선은 신선봉 아래까지 이어진다. 1시간 반 정도 길고 지루한 내리막길 끝에서 고개를 만난다. 곰넘이재다. 이 고개 남쪽 마을이 경북 봉화군 춘양면 애당리다. 강원도와 경북 내륙 산간 마을을 잇는 고개인 셈이지만 일상적 이동통로는 아니었다. 태백문화원에서 발행한 <태백의 지명 유래>라는 책을 보면, 곰은 검에서 온 말로, 검은 곧 신(神)이니, 신이 있는 곳으로 넘어가는 고개여서 곰넘이재라는 이름이 유래됐다고 한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낼 때 경북 내륙 산간 마을 사람들이 넘나들던 고개였다는 얘기다.
곰넘이재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건 어둠과 추위다. 눈 때문에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탓이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내일을 기다리기로 했다. 저녁을 먹으면서 지난 달 히말라야를 다녀온 김종현 형이 21살이나 먹은 발렌타인을 꺼내 놓는다. 모두들 환호한다. 투표권을 가지는 나이를 훌쩍 넘긴 발렌타인은 자주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병을 다 비우지 못한다. 추위는 술 욕심도 오그라들게 하는 모양이다.
얼어붙은 대기 위로 별빛이 쨍쨍하다. 한 동안 내 넋은 밤하늘의 것이 되고 만다. 좁은 텐트 안에서 온갖 궁상을 다 떨면서, ‘무엇이 우리를 이곳으로 데려 왔는가’ 하고 자문해본 의심덩어리가 일순간에 사라진다.
갓 밝은 세상을 걸어서 신선봉을 오른다. 아주 가파른 직전의 분위기와 달리 무덤이 한 켠을 차지한 정상은 두루뭉실하다. 사방은 10~20년 정도 자란 참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이곳에서 트레일은 동남쪽으로 급하게 허리를 튼다. 실제로 1141m봉까지는 태백산과 멀어지는 길이다. 하지만 태백의 오지랖 속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키를 넘기는 조릿대 사이로 드문드문 눈에 띄는 주목이 그것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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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백산 천제단으로 오르는 취재팀. 모난 구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
염치마저 내팽개치는 집단문화
깃대배기봉에 도착하자 해는 정수리를 벗어나기 시작한다. 조릿대밭 사이로 참나무를 세워둔 깃대배기봉은 봉우리라고 할 만한 분위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사실 이곳에서부터 천제단 직전까지는 기복이 거의 없는 구릉 지대 같다. 일설에 의하면 측량용 깃대 때문에 이름이 유래됐다 하는데, 독립된 봉우리라기보다는 길고 둥두렷한 태백산 정상부의 남쪽 들머리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또한 깃대배기봉부터 백두대간은 남한 구간이 끝날 때까지 강원도 땅을 지나게 된다.
깃대배기봉에서 장군봉(1,566.7m)까지 약 4Km의 대간 길은 산책로라 불러도 좋을 호젓한 분위기다. 하지만 동네 뒷산의 산책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이다. 부소봉까지 끊임없이 펼쳐지는 조릿대밭 사이로 참나무들은 자연의 손만이 빚을 수 있는 눈꽃을 피워 올려놓고 있다. 해발 1,500m를 넘나드는 하늘길은 특별하다.
부소봉 마루의 서쪽을 비껴가면서부터는 주목의 시린 기운이 고산 특유의 고적감을 안겨 준다. 주목 사이로는 철쭉이 무리지어 있다. 철쭉의 앙가슴에서 봄을 예감해 본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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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항재에서 함백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눈꽃 터널. |
그러나 부소봉을 내려서면서부터 나의 행복감은 산산이 부서지기 시작한다. 천제단에서 하단으로 내려서는 사람들의 무례하고도 난폭한 행태 때문이다. 대부분 관광객으로 보이는 그들에게서 내리막을 걷는 사람의 양보 같은 것은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등산로치고는 넓은 길의 가운데를 차지하고는 거의 폭력 수준으로 나를 밀쳐낸다.
그 가운데서 나는 어떤 규칙을 찾아냈다. 혼자서, 혹은 부부끼리 온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주로 단체로 온 사람들이 그랬다. 그런데도 옷들은 하나같이 전문 클라이머 뺨치는 수준이다. 제대로 갖춰 입은 외양과는 저 아득한 거리의 가난한 산행문화는 언제나 고쳐질까. 아니 이건 산행문화의 문제가 아니다. 떼거리만 지으면 예의는 두고라도 염치마저 내팽개치는 집단문화의 문제다.
천제단 일대는 장터보다 더 북적댄다. 천제단에서는 돼지머리를 놓고 ‘하늘을 팔고’ 있다. 돈을 놓고 절을 하게 하는 솜씨는 가히 하늘을 찌르는 수준이다. 차마 그곳으로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 로또 당첨이든 가족의 건강이든, 돼지 머리에라도 빌지 않을 수 없는 사람들의 뒷모습이 너무 애절해 보여서다. 그들을 비난하기도, 동정하기도, 따라하기도 다 힘들다.
신라 때부터 태백산(북악)은 토암산(동악)·계룡산(서악)·지리산(남악)·부악(중악, 팔공산)과 함께 오악의 하나로 기림을 받았고, 고래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곳이다. 이런 곳이 싸구려 장사의 수단이 되는 것은 곤란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고려 때의 사람인 최선(崔詵)의 예안 용수사기(龍壽寺記)를 인용하여 ‘천하의 명산은 삼한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에 가장 뛰어나다. 동남에서는 태백이 가장 뛰어나다’고 적고 있다.
태백산이 영산으로 기림을 받는 것은, 환인(桓因)의 서자이자 단군의 아버지인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세운 곳이라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의 기이편을 보면,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에 내려와서 이곳을 신시(神市)라 했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일연 스님은 분명히 태백산 옆에 ‘지금의 묘향산’이라 병기했고, 지리적·역사적 의미로 봤을 때는 ‘백두산’이 바로 그곳이라는 게 많은 학자들의 견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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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 덮인 매봉산 고랭지 채소밭. 겨울은, 푹 쉬어가는 계절이다. |
간단히 정리하여, 신성한 산이라는 의미로서의 태백산은 보통명사에 가깝고, 단군신화의 무대로서의 태백산은 백두산이며, 오늘의 태백산은 신시(神市)의 상징성을 간직하고 있는 산이라고 이해해도 별 무리가 없을 성싶다.
천제단을 지나서 간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화방재를 향한다. 두어 시간이 소요되는 긴 내리막이다. 화방재를 10여 분 남겨 놓은 곳에 산령각이 있는데, 태백산 산령의 신위를 모신 곳이다. 사후에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단종의 신위를 모신 곳이기도 하다.
화방재는 어평재라고도 불리는데, 고갯마루 서쪽 기슭의 어평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래됐다 한다. 태백산신이 된 단종의 혼령이 어평에 이르러 ‘이곳부터 내 땅(御坪)’이라 했다는 전설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한편 <태백의 지명유래>라는 책에는 고갯마루 기슭에 진달래와 철쭉이 많아서 화방재라 불렸다고 적고 있고, 혹자는 ‘꽃방석고개’라 하기도 한다. 그런데 많은 산행기를 남긴 고 김장오 선생의 글에는 일제 강점기 때 설치된 ‘방화선’의 한 부분이어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쓰고 있다. 나는 김장오 선생쪽에 더 신뢰가 간다.
화방재에 도착하자 어둑살이 돋기 시작한다. 계획보다 한나절쯤 지연이 된 것이다. 올 겨울 제대로 눈을 밟아보지 않아서 상황을 만만하게 본 결과다. 계획대로라면 함백산 아래 만항재에서 야영해야 한다. 계획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체력도 바닥에 가까운 상태다. 계속 밀어붙였다가는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목적도 이룰 수 없을 것 같았다. 우리는 미련 없이 계획을 수정했다. ‘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