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6구간] 덕항산 - 7 태백산 문헌고찰

고대부터 천제를 지내온 靈山(영산)
단군사화와 연관성 있는 유적은 구월산(북한)에 몰려 있어

백두대간 상의 선달산 동쪽 도래기재에서 매봉산(천의봉·1,303.1m) 동북쪽 피재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인 태백산(太白山·1,566.7m)은 고대부터 천제(天祭)를 지내온 민족의 영산이다. 이 산은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이루며 큰 덩치를 지니고 주변 지역 모든 산의 제일 큰 어른처럼 자리하고 있는 명산이다.


동국여지승람 봉화조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시대 최선(崔詵)은 예안(禮安) 용수사기(龍壽寺記)에서 그러한 모습의 태백산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하의 명산은 삼한(三韓)에 많고, 삼한의 명승은 동남쪽이 가장 뛰어나며, 동남쪽의 거산(巨山)으로는 태백을 으뜸으로 일컫는다.’

태백산이 얼마나 큰 산세를 이루고 있는 산인지는 정선 정암사(淨岩寺)와 봉화·영주에 자리한 각화사(覺華寺), 부석사(浮石寺) 등 신라 명찰들의 일주문 현판에 그 주산을 ‘太白山’으로 표기하고 있는 예에도 잘 드러나 있다.

‘太白山’이란 산이름에 대해서는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산마루에 하얀 자갈이 마치 눈이 쌓인 듯 깔려 있기 때문에 太白이란 이름을 지니게 됐다’고 했으며, 후대의 고산자 김정호도 ‘산이 다 하얀 자갈들이라 이를 바라보면 마치 흰 눈이 쌓여 있는 것 같다. 산 이름 太白은 이 때문이다(대동지지 안동조)’라고 하는 같은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太白山은 대체로 ‘크게 밝은 산’이란 의미의 ‘한밝뫼’ 또는 ‘한밝달’을 소리옮김과 뜻옮김하여 혼용표기한 것으로 본다. ‘한밝달’은 ‘한백달 →한배달’로 전음되어 한민족, 배달민족과 같이 우리 민족을 상징적으로 일컫는 민족 이름이 됐다.
옛부터 우리 민족은 태양을 숭배하는 ‘밝은 민족’으로, 하늘에 제사하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 제사 지내는 산을 ‘밝은 산[白山]’이라 했다. 밝은 산 중에서도 가장 크게 밝은 산이 바로 태백산인 것이다. 그리하여 태백산을 신성한 곳으로 여기고, 그 꼭대기에 제단을 쌓고 봄가을로 하늘에 제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일성왕 5년(138) 10월에 왕이 북방에 순행하여 태백산에 제사지낸 일이 있고, 기림왕 3년(300) 3월에는 우두주(牛頭州·춘천)에 이르러 태백산에 망제(望祭)를 지낸 일이 있다. 또 삼국사기 제사지(祭祀志)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인 북악으로 삼아 중사(中祀)를 지내왔다.

이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이미 2세기 초엽부터 태백산에 천제 또는 산신제를 지내왔음을 살필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 삼척부(三陟府) 태백산사(太白山祠)조에 의하면, 그러한 제의(祭儀)의 전통은 조선시대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살필 수 있다. 그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태백산사는 산꼭대기에 있는데, 세간에서 천왕당(天王堂)이라 한다. 본도(本道·강원도)와 경상도에서 이 산 곁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이곳에서 제사지내고, 신좌(神座) 앞에 소를 매어 두고는 갑자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난다. 만약에 이를 돌아볼 것 같으면 신이 불공하게 여겨 죄를 준다고 한다. 사흘이 지난 다음 부에서 그 소를 거두어 이용하는데, 이러한 풍속을 이름하여 퇴우(退牛)라고 한다.’

위의 태백산제에 관한 내용을 보면, 상고시대 이후 고대시절에는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온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으나, 이후 통일신라시대로 내려오면서 태백산을 사전(祀典)에 올리고 오악의 하나로 삼아 중사를 지내게 된 이후로는 산신제로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후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음사(淫祠)에 관한 제의 풍속으로까지 변질되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천제→산신제→음사로 변질

허목(許穆·1595-1682)의 기언(記言) 권37 척주기사(陟州記事) 퇴우(退牛)조에 의하면, 그러한 미신의 폐단을 보다 못한 당시의 산승(山僧) 충학(沖學)이 태백산사를 불태워 버렸으며, 이후로는 이곳 산신에게 소를 바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하였다.

다산의 목민심서 예전육조(禮典六條) 제사(祭祀)조에 의하면, 이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도 영남관찰사로 있던 김치(金緻·1577-1625)에 의해 태백산신사(太白山神祠)가 미신적 폐단으로 인해 헐린 일이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여지승람의 태백산사 이야기는 성현(成俔·1439-1504)의 허백당집(虛白堂集) 권12 신당퇴우설(神堂退牛設)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다. 여지승람의 내용은 아마도 이를 참조했을 것으로 보인다.

태백산에서 천제를 지내던 풍속이 민간풍속으로나마 겨우 명맥을 유지하며 전래되어 왔을지는 모르나, 그 제의의 풍속이 현대까지 이어왔다는 정사(正史) 상의 분명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단군을 숭상하는 대종교와 같은 종교적 신앙 차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현대에 이르러 다시 부활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태백산 정상부 영봉(靈峯·1,560.6m) 위에는 자연석 녹니편마암으로 쌓은, 둘레 27.5m, 높이 2.4m, 좌우 폭 7.36m, 전후 폭 8.26m로 약간 타원형으로 된 20평 가량의 천제단(天祭壇)인 천왕단(天王壇)이 자리하고 있다.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네모꼴인데,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사상을 나타낸 구도다.
그리고 앞쪽에 ‘天祭壇(천제단)’이라 쓴 석축 제단 위 중앙에 잘 다듬어지지 않은 투박한 한글 필체로 ‘한배검’이라 써서 새기고 하얗게 칠한 자연석 위패가 세워져 있다. 아마도 대종교 신도들이 ‘한배달의 임검’ 또는 ‘한배달의 신(神)’이란 의미로 쓴 국조 단군의 위패일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곳 영봉 북쪽 상봉인 장군봉에도 사각형으로 된 장군단이란 천제단이 있고, 영봉 남쪽 아래쪽에도 하단이라 일컫는 천제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태백산 천제단, 특히 영봉의 천왕단이 현대에 와서는 마치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처럼 인식되기도 하나, 고대 이래의 정사(正史) 상의 기록이나 역대 지리지 상에 이곳 천제단을 명확히 언급한 예는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신라 박제상(朴堤上·363-419)의 저술이 영해박씨 문중에 비전되어 오다가 실전(失傳)된 것을 1953년에 박금(朴錦·1895-?)씨가 예전에 본 기억을 되살려 재생하였다는 부도지(符都誌) 따위에 다음과 같은, 유사한 제단의 모습을 언급한 내용이 보인다.

‘혁거세씨(赫居世氏)는 천성은 신과 같고 지혜는 성인과 같았다…능히 여러 부족을 통솔하여 선세(先世)의 도를 행하며 제시(祭市)의 법을 부흥하고, 남태백산(南太白山)에 천부소도(天符小都)를 건설하였다. 중대(中臺)에 천부단(天符壇)을 축조하고 동서남북의 4대에 보단(堡壇)을 설치하여 계불(??)의 의식을 행하였다.’

태백산 동북쪽 기슭 태백시 소도동 당골에는 또 단군의 화상을 봉안하고 해마다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는 단군성전(檀君聖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 또한 1975년에 태백읍장 전대연의 후원으로 유지들이 창립한 현대 건축물일 뿐이다.

이와 같이 현재 백두대간의 등뼈 부위에 자리하고 있는 태백산 일원에서는 상고시대 단군의 발자취와 관련한 명확한 유적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불리고 있는 ‘太白山’이란 산 이름만 상고시대 단군사화 중에 등장하는 태백산이란 산 이름과 같아 산 이름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의 고찰이 있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단군 사적과 태백산

백두대간 상의 등줄기를 이루고 있는 태백산은 고대부터 현금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그 주이름을 ‘태백산’이라 불러왔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군의 사적과 관련한, 상고시대 이래의 명확한 유적지는 남아 있는 것이 없다.

태백산 이외에 고대시절에 ‘太白山’으로 불리던 명산으로는 곧 우리 민족의 성산으로 여겨지는 백두산과 우리나라 제일의 명승과 큰 산세를 갖추고 있는 명산으로 운위되고 있는 묘향산(妙香山)이 있다.

이들 두 명산은 모두 상고시대 단군사화와 관련되는 성산으로 많이 언급되고 있는 산이다. 먼저 상고시대의 태백산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삼국유사 고조선(古朝鮮)조에서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고기(古記·단군고기)에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에 환인(桓因)의 서자(庶子) 환웅(桓雄)이란 이가 있었다. 환웅은 자주 천하에 뜻을 두고 인간 세상을 탐내어 구하였다. 아버지가 그 아들의 뜻을 알고 삼위산과 태백산[三危太伯山]을 내려다보니, 그곳은 과연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 곳이었다. 이에 천부인(天符印) 3개를 주어서 환웅으로 하여금 인간세상에 내려가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환웅은 무리 3천 명을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에 있는 신단수(神壇樹) 밑에 내려왔는데, 이곳을 일러 신시(神市)라고 한다.’

위 일연(一然·1206-1289)의 삼국유사와 비슷한 시기의 저술인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전조선기(前朝鮮紀)에서 또 위의 내용과 관련한 단군사화의 내용을 조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에 어느 누가 나라를 열었던고.
석제(釋帝)의 손자 이름은 단군(檀君)일세.
요제(堯帝)와 같은 해 무진년(戊辰年)에 나라 세워
순(舜)을 지나 하국(夏國)까지 왕위(王位)에 계셨도다.
은(殷)나라 무정(武丁) 8년 을미년(乙未年)에,
아사달(阿斯達)에 입산(入山)하여 산신이 되었으니,
나라를 누리기를 1천 하고 28년.‘
일연의 삼국유사 태백산주(太伯山註)에 의하면, ‘즉 태백산은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였고, 또 이승휴의 제왕운기 아사달주(阿斯達註)에서는 ‘(아사달은) 지금의 구월산(九月山). 딴 이름은 궁홀(弓忽) 또는 삼위(三危). 사당(祠堂)이 지금도 있다’라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단군고기에 보이는 환인이 내려다본 인간세상의 ‘삼위 · 태백산(三危太伯山)’은 바로 지금의 구월산인 삼위산과, 지금의 묘향산인 태백산이었다.

그리고 인간세상을 크게 이롭게 할 만한 이 두 곳 중 환웅이 내려가 자리잡은 부산(父山)·종산(宗山)이 바로 태백산인 묘향산이요, 그 아들 단군이 도읍을 옮겨가 자리 잡은 자산(子山)·지산(支山)이 바로 아사달인 구월산이었던 것이다.

이들 단군사화의 삼위산과 태백산 두 산에 대해서는 그 당시 현재의 어느 산인지를 일찍이 고려시대에 일연과 이승휴 등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으나, 후대의 많은 이들이 대부분 이를 자신의 주관적 관점에 집착하여 신화적, 언어학적, 종교적, 민족주의적, 국수적 관점에 의거하여 보려고만 하므로 그 사화 속에 내재된 진실성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 때문에 어떤이는 이들 삼위산을 중국 감숙성(甘肅省) 돈황시(敦煌市)에 있는 삼위산으로 보기도 하고, 태백산을 중국 섬서성(陝西省) 미현(眉縣) 남쪽에 위치한 태백산(3,767m)으로 보기까지도 한다.

고대에 태백산으로도 불리던 묘향산과 아사달산으로도 불리던 구월산에는 모두 상고시대 단군의 유적지가 남아 있다. 곧 묘향산 향로봉 중복에는 단군이 태어나신 곳이라는 너비16m, 길이 14m, 높이 4m 가량의 단군굴(檀君窟)이 있고, 단군굴 근방에 청정한 천수(泉水)가 있는데, 단군이 잡수며 생장하였던 샘물이라 하며, 그 근방에 있는 단군대(檀君臺)라는 석대는 단군이 활을 쏘던 사대(射臺)라고 한다.

역사학자 장도빈(張道斌)은 단군고적고(檀君古蹟考)에서 단군사적과 관련한 묘향산을 답사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묘향산 최고봉에 다다르면 백토(白土)로 된 고봉이 하늘에 닿았는데, 그 봉우리는 온전히 단향(檀香)나무로 엄폐되어 있다. 이렇게 백설 같은 봉만(峯巒)에 푸른 단향나무가 가득 차서 산을 가린 것을 볼 때 과연 이것이 태백산 단목하(檀木下)인 것을 알았다. 따라서 이 산에 단향나무가 많은 고로 산의 고명(古名)이 향산(香山)이요, 이 산에서 탄생한 신인(神人) 왕검(王儉)을 후세에 존칭하여 단군이라고 한 것을 알았다.’

삼국사기의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조에 의하면, 동부여의 왕 금와(金蛙)가 하백(河伯)의 딸 유화(柳花)를 만난 곳이 바로 태백산 남쪽 우발수(優渤水)라 하였는데, 여기서의 우발수 또한 묘향산 남쪽 옛 영변군 남쪽 백령면의 은봉(銀峯) 밑 학암(鶴岩) 위에 있는 것으로 볼 때 이 기사의 태백산도 곧 묘향산을 가리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구월산에도 상봉 북동쪽 오봉 중복과 산기슭에 단군대와 단군굴이 있다. 단군대 부근에 궁궐이 있었으므로 궐산(闕山)이라 일컫던 산 이름이 연음(延音)되어 구월산이라 불리게 되었다(대동지지 문화조 참조). 이곳 단군대는 단군이 등선한 곳이라 전한다.

이 산 상봉 남동쪽에는 아사봉(阿斯峯·687m)이란 봉 이름도 전한다. 또 이 산 기슭 옛성당리에는 일찍이 고려 때부터 환인·환웅·환검(단군)을 모신 삼성당(三聖堂), 또는 삼성묘(三聖廟)라 일컫던 신묘(神廟)가 있었다.

태백산의 봉우리들과 문화유적

태백산 최고봉은 현재 장군봉(1,566.7m)이라 일컫고 있고, 천왕단이 있는 영봉(靈峯·1,560.6m), 그리고 남쪽의 부소봉(1,546.5m)과 부소봉 동쪽의 문수봉(1,517m)이 대표적인 봉우리들이다. 그런데 태백산 북쪽의 함백산(1,572.9m) 등 더 높은 봉우들이 태백산권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천제단이 있는 현재의 산봉이 태백산 주봉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면 옛날 선인들은 지금과 같이 정밀하게 산 높이를 잴 수 있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곧 이만부의 지행록에 의하면, 태백산의 산봉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문수(文殊)·대박(大朴)·삼태(三台)·우보(牛甫)·우검(虞檢)·마라읍(摩羅邑)의 봉우리들 이 6, 7백리를 울창하게 서리어 있다.’ 위의 대박봉 곧 대박산(大朴山)은 ‘한밝달’의 차용표기로, 전음되어 현재는 함백산으로 불리고 있다.

함백산 북서쪽 기슭에는 오대 적멸보궁의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 신라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정암사가 있다. 이 절로 인해 함백산은 동국여지승람 정선군조에 의하면, 정암산(淨岩山)으로도 불리었고,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조에 의하면, 묘범산(妙梵山)으로도 불리었으며,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조에 의하면 작약봉(芍葯峯)으로도 불리었다. 또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함박봉 곧 함박산(含朴山) 속칭 모란봉(牧丹峯)으로도 불리어졌다.

또 원효대사가 창건하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가 있었던 각화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각화산(覺華山·1,176.7m)이고, 의상조사(義湘祖師)가 창건한 부석사가 자리한 산봉우리는 봉황산(鳳凰山)으로 불리어졌다.

태백산은 고금을 통하여 일관되게 태백산으로 불리어 왔으나, 정암사사적기에 의하면 그 일명으로서 ‘대여산(黛輿山)’이라 일컬은 예도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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