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6구간] 덕항산…명산과 다른 호젓함이 좋다

피재~건의령~푯대봉~구부시령~덕항산~큰재~황장산~댓재 구간

나무들이 물을 뿜어 올리기에 바쁜 계절이다. 대지도 나무들의 모세혈관이 일으키는 파동을 따라 어깨를 들썩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 눈으로 감지되는 세상은 겨울이다. 더욱이 우리는 물러나는 겨울의 뒤를 좇아 강원도 심산으로 들어가고 있다.

겨울도, 그렇다고 확실히 봄도 아닌, 이쪽과 저쪽의 경계가 으스레한 계절에는 눈이 머쓱해진다. 이런 경우 오관의 총아는 눈이 아니라 살갗이다. 낙타의 코가 사막에서 물을 감지하듯이 피부는 모공을 열고 바람을 안는다. 봄이다.

우리는 지금 하늘이 3평밖에 되지 않아 산봉우리와 산봉우리를 바지랑대 삼아 빨랫줄을 연결할 수 있다는 정선 지역을 벗어나서 태백과 삼척 경계로 들어섰다. 이번 구간의 출발점인 피재(920m)는 삼수령이라고도 불린다. 피재라는 이름은 삼척쪽 사람들이 난리를 피하여 넘어오던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 한다. 달리 삼수령이라고도 불리는 이유는 한강과 낙동강, 그리고 오십천의 분수령을 이루기 때문이다.

▲ 광동댐 이주민들이 고랭지 채소 밭 텅 빈 들녘을 지나는 바람이 한가롭다. 땅을 들썩이는 풀싹들의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풍경이다.

고개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모두 한강으로 흘러들고, 남쪽으로 흐르는 물은 낙동강, 그리고 동쪽으로 흐르는 물은 오십천으로 흘러든다. 여기서 우리는 삼척시로 흘러들어 동해로 빠지는 작은 하천인 오십천을, 한반도의 중심부와 영남지역의 젓줄인 한강과 낙동강과 같은 지위로 언급하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백두대간이 이곳에서부터 거의 동해로 치우쳐 줄곧 북쪽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부터 향로봉까지 남한 지역 백두대간의 동쪽으로 흐르는 물길 중 강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하나도 없다. 삼척의 오십천과 강릉 남대천, 양양 남대천이 큰 물길에 든다. 특히 이번 구간은 동쪽으로 높은 우리나라 지형이 또한 동쪽으로 가파른 기울기를 보인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한다.

관모와 관복 걸어 놓고 벼슬길 나서지 않기로

▲ 푯대봉 오름길. 질척거리는 봄의 흔적이 신발에 묻어 있다. 나른하다.
피재~댓재(810m)까지인 이번 구간 전체를 대략 살펴보면, 실거리 약 26km로 봉우리를 오르내리는 표고차도 크지 않다. 봉우리들이 끝없이 출렁이기는 하지만, 구부시령과 덕항산을 오르기 전 크게 허리를 세우는 것 말고는 대부분 산책을 즐기듯 걸을 수 있다. 물론 깊은 눈이나 심한 비바람과 같은 기후 조건은 이런 트레일 조건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지만. 또한 이번 구간에는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산도 거의 없다. 근래에 들어 환선굴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그것을 품고 있는 덕항산이 알려지기 시작한 정도다. 하지만 세상사 모든 게 그렇듯이 한 곳이 비면 다른 곳이 차는 법. 주말 산행객들로 시끌벅적한 유명 산의 분위기와 다른 호젓함이 좋다.

아직 숲이 무성하지 않은데다 구간의 대부분이 참나무가 우점한 상태에서 사이사이로 철쭉이 자라는 정도다. 트레일도 말끔한 편이다. 그래도 숲이 무성해지는 여름철에는 사정이 다를 것이다. 특히 피재에서 건의령까지가 그렇다.

피재에서 건의령(840m)까지는 2시간~2시간30분 정도로 워밍업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우람한 등마루의 느낌도,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조망도 없다. 강원도 산이라고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올망졸망하다. 며칠 전 눈이 와서 조금 걱정했는데, 북서쪽 기슭을 제외하고 눈은 거의 땅 속으로 숨어 버린 상태다.

건의령부터는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숲도 산세도 이곳에서부터 대간의 위엄을 되찾는다. 이곳에서부터 덕항산 너머까지 대간 동쪽은 삼척군, 서쪽 일부가 삼척군이다. 삼척군이었던 황지읍과 장성읍이 합쳐 1981년에 태백시로 독립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현재 건의령은 도로확장공사를 하느라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지만, 마루의 품새가 넓은 편이어서 쉬어가기에도, 야영을 하기에도 좋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와 달리 고개에 얽힌 사연은 비장하다. 태백시문화원에서 정리해 놓은 전설에 따르면 이렇다. 고려 말 삼척으로 유배온 공양왕이 근덕 궁촌에서 살해되자 고려의 망국 유신들이 이 고개를 넘으면서 관모와 관복을 걸어 놓고 다시는 벼슬길로 나가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고 한다. 그래서 고개 이름이 관모를 뜻하는 건(巾)과 관복을 뜻하는 의(衣)를 합쳐 건의령이 됐다는 것이다. 대동여지도에도 분명히 건의령이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도 국토지리정보원의 5만분의 1 지도에는 한의령(寒衣嶺)이라고 표기돼 있다. 도로표지판도 마찬가지다. 두 이름 다 내포 의미가 비슷하기는 하지만, 한 가지로 통일이 돼야 할 것 같다.

건의령에서 푯대봉(1,009.2m)으로 오르는 초입은 소나무 숲길이다. 잘 생긴 적송인데, 태백국유림관리사무소에서 ‘태백송’으로 육림 중인 소나무다. 이 소나무 종자를 번식시켜 광산재해 산림복구용으로 보급할 것이라고 한다. 척박한 조건에서도 잘 자라는 이 소나무의 후세들이 폐광 후의 상처를 빨리 아물게 하기를 기대해 본다.

소나무숲을 벗어나면 대부분의 등성이는 참나무가 차지하고 있다. 물론 드문드문 아름드리 금강송이 웅자를 드러내며 자신들의 존재를 확인시킨다. 푯대봉을 지나서는 참나무숲과 관목 지대를 번갈아가며 구부시령을 향한다. 구부시령 직전에서 크게 솟구치는 것 말고는 편안한 길이다.

황사가 차지해 버린 하늘은 부옇지만 날씨는 비교적 온화한 편이다. 볕이 잘 드는 트레일은 상당히 질척거린다. 그러나 북쪽으로 내려서는 길 곳곳엔 빙판이 낙엽을 덮고 짓궂게 누워 있다. 자칫 방심을 했다가는 엉덩이로부터 원망을 듣게 된다.

밭은 숨을 토하며 1055m봉을 넘자 구부시령으로 내려서는 길은 순하다. 트레일 옆의 평지 같은 자락이 두 다리에 모종의 메시지를 전한다. 구부시령에서 야영하려던 계획을 접고 배낭을 부린다. 산에서는 다리가 뇌를 우선한다. 온전히 산에 들었다는 느낌을 주는 피로감은 언제나 나른한 행복감을 동반한다. 바로 이런 기분 때문에 산길을 걷고 야영을 하는 게 아닐까. 일상에서는 한 순간도 문명의 이기 없이 살 수 없는 목숨들이지만, 하루 이틀만이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즐거움은 현대의 신(神)인 문명에 대한 가냘픈 저항이다. 이런 의미 맥락에서 되뇌어 보는 랄프 월도 에머슨(1083-1882)의 다음과 같은 통찰은 얼마나 통쾌한가.

“문명인은 마차를 만들었지만, 발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렸다. 그는 지팡이로 몸을 떠받치지만, 근육의 지탱력은 잃어 버렸다. 그는 훌륭한 제네바산 시계를 갖고 있지만, 태양으로 시간을 알아보는 재간은 없다.”

“마지막 1온스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

해가 종적을 감추면서 산바람은 금방 표정을 바꾼다. 낮의 봄기운을 언제 그랬냐는 듯 냉큼 거두어 가버린다. 한 순간의 여유도 주지 않고 대출금 이자를 빼내 가는 은행처럼. 저녁 숟가락을 놓기 무섭게 침낭으로 들어간다.
▲ 덕항산 정상에서 환선굴 쪽을 바라본 풍광. 능선 왼쪽으로 광동댐 이주단지 채소밭이 보인다.

오랜 만에 꿈 없는 긴 잠을 잤다. 냉랭한 아침이다.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일기예보대로다. 간절히 원할 때는 잘도 틀리더니, 빗나갔으면 싶을 때는 귀신 같이 정확하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린다. 기분이 좋아질 만큼 배낭 무게가 줄어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무게에 대한 부담은 뿌리가 깊다. 대간 종주 초창기에는 ‘숟가락도 반 토막’이라는 말이 유행이었다. 서양 속담엔 이런 게 있다. “마지막 1온스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

구부시령을 넘는 바람은 맨 얼굴로는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맵다. 어제나 그제쯤 시베리아에서 태어났을 바람이다. 아직 계절은 북서계절풍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취재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한겨울 복장을 하고 있다.

구부시령(九夫侍嶺·960m). 한자 이름 그대로, 만나면 죽고 만나면 죽고 해서 아홉 남편을 모셨다는 여인이 이 고개의 동쪽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에 살았다는 데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실제로 그런 여인이 있었건 없었건, 따비밭에 목숨을 의탁해야 했던 강원도 산골 마을의 신산한 삶이 투영된 이름으로 들린다. 지금은 통행로로서 구실을 잃은 고개지만, 옛날에는 태백시 하사미동 외나무골과 삼척시 도계읍 한내리를 이어주던 고개였다 한다(국토지리정보원의 지도에는 고개 이름이 구부대령(九夫待嶺)으로 되어 있다. 오식으로 보인다. 지리정보원이 지도제작과정에서 잘못한 것도 지명위원회의 심의를 거쳐야하나).

고개가 높으면 고개 저쪽 산은 더 높은 것이 당연할 터. 고개 북쪽으로 오르는 산이 바로 덕항산(1,072.5m)이다. 서서히 허리를 세우다 정상부에서 불끈 솟는다. 정상에서 오른쪽으로 살짝 벗어나자 멋진 조망처가 나타난다. 눈 아래로 삼척시 신기면 대이리가 활짝 열려 있다. 요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는 환선굴(지리정보원 지도에는 ‘한선굴’로 표기)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너머로는 동해 바다가 안개와 몸을 섞고 있다.

북쪽으로는 광동댐 이주단지의 고랭지 채소밭의 앙가슴이 보인다. 덕항산 남동쪽 기슭은 벼랑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르다. 동쪽이 가파른 산세의 전형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데도 등성마루와 서쪽 기슭은 전체적으로 황소 등처럼 둔중하다. 산의 이름도 이런 산세에서 비롯됐다. 옛날 삼척 사람들이 이 산만 넘으면 화전(火田)을 할 수 있는 땅이 많아 ‘덕메기산’이라 하였으나 한자로 표기하면서 ‘덕항산(德項山)’이 되었다 한다.

덕항산 정상부에는 광동댐 이주단지까지의 동쪽은 아슬한 벼랑이 가깝다. 하지만 위험성은 거의 없다. 동쪽으로 나무와 줄로 보호장치를 해놨다. 이번 구간 대부분은 트레일 관리가 잘 돼 있다. 훼손 가능성이 있는 곳 대부분은 나무와 돌로 자연스런 계단을 만들어 놓았다.

사람의 손길이 최소화된 모습이어서 보기에도 좋고 걷기에도 좋다. 덕항산에서 1시간쯤 가자 환선봉(지각산·1,079m)이 나타난다. 과거에도 지금도 지도상에는 무명봉이다. 요즘 들어 그렇게 부르는지 옛날부터 동네 사람들이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으나 환선굴이 관광지로 개발되고 등산로가 정비되면서 최근에 정상석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우뚝 선 두타산

환선굴에서 다시 1시간쯤 더 나아가자 환선굴로 연결되는 자암재가 나타난다. 이어서 채소밭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간 동쪽의 삼척시 하장면 광동리에 댐이 만들어지면서 수몰 주민들이 옮겨와 농사를 짓는 곳이다. 상당히 규모가 크다. 바람이 비껴가는 산기슭에 알록달록한 이주민들의 주택이 보인다. 봄부터 가을까지 땀 흘려 일한 다음, 곳간에 먹을 것 가득 채워 놓고 겨울 내내 쉬는 저들의 삶이야말로 이상적이 아닐까, 하는 속내를 취재팀 중 한 명에게 털어 놓아 본다. 그런 한편 또 다른 생각이 든다. 겨우내 갇혀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들으면 버럭 화를 낼지도 모르겠다는.

그런데 참 재미있는 건 예나 지금이나 방법만 다를 뿐 산에 삶을 의탁하는 사람들이 산을 보는 안목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옛날부터 덕항산 일대는 화전을 하기에 좋은 곳이었다고 하지 않은가. 고랭지 채소밭 일대를 지나는 길은 어떤 길을 택해도 좋다. 농사를 지을 때는 당연히 밭고랑을 피해야 하겠지만, 요즘 같은 때는 어디로 가던 대간의 등성마루를 벗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임도와 밭을 가로질러 큰재를 향한다.

큰재는 그 이름에 어울리게 억새 무성한 둔덕이다. 동쪽으로 동해를 볼 수 있는 곳이지만, 흐린 날씨가 우리에게서 그것을 앗아갔다. 큰재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나자 발걸음이 느긋해진다. 두어 시간만 걸으면 이번 산행의 종점인 댓재이기 때문이다. 길도 편안하다. 파랑이 크지 않은 산 너울 몇 개만 넘으면 황장산이다. 황장산 정상은 이름이 풍기는 분위기만큼 오지랖이 넓지 않다. 황장목은 간간히 명목만을 보여 줄 뿐이다. 그런데도 이 산은 발길을 오래 묶어 둔다. 이 산에서 보는 두타산과 청옥산의 모습이 근사하기 때문이다. 오른쪽으로 두타산(1352.7m)이 동쪽으로 잔뜩 어깨에 힘을 준 듯한 암릉 위로 솟아 있고, 왼쪽으로 청옥산(1403.7m)의 둥두렷한 정상이 우람하다.

그런데 청옥산이 더 가까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청옥산이 더 높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두타산에서 청옥산이 거의 직각에 가깝게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기 때문에 두 산이 동일선 상의 직선에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까닭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동여지도에 표현된 두 산의 모습(산 이름은 오늘 날과 바뀌어 있지만)이 황장산에서 바라본 두 산의 모습과 거의 흡사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더 재미있는 것은 대동여지도 상의 두타산은 주맥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댓재는 두 산 사이에 竹峙(죽치)와 竹嶺(죽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백두대간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오늘날 우리가 두타와 청옥이라고 부르는 산은 산경표와 대동여지도 상의 순서와 뒤바뀌어 있다. 그 까닭을 누구도 확언할 수 없겠지만, 위에서 살펴본 사실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첫째, 대동여지도로 도상 등산을 하면 댓재에서 북쪽으로 오르면 처음으로 나타나는 산이 두타산이다(현재는 청옥산). 그런데 실제로 댓재에서 주맥을 따라 오르면 현재의 두타산에 닿게 된다. 만약 당시 사람들이 대동여지도를 그대로 신뢰하고 산을 올랐다면 댓재에서 올라 처음 나타나는 산을 두타산이라 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 확인하게 된 진짜 두타산은 어쩔 수 없이 청옥산으로 불릴 수밖에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두타산과 무릉계의 이름이 가진 친족 유사성이다. 일체의 속박을 벗어난 운수승(雲水僧)을 일컫는 두타와, 신선들이 사는 무릉도원이 짝을 해야 더 어울린다고 여긴 데서 이름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현재의 청옥산이 더 높은데도 불구하고 정상성(頂上性)이 도드라져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정상의 분위기로 본다면 현재의 두타산이 당연히 더 도드라져 보인다. 과거 측량기술이 부족했던 시절에는 당연히 산경표 상의 청옥 즉 오늘의 두타산에 더 인상 깊은 이름을 부여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까. 아무튼 대동여지도의 표현 오류와 두 산의 자태는 후대인들이 이름을 바꿔놓을 소지를 안고 있다. 소설적 상상력에 기댄 유추이지만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차원에서 무익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누군가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해 주기를 기대한다.

황장산은 급하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서서히 자세를 누그러뜨리며 조릿대 밭을 펼쳐 놓고 있다. 댓재로 내려서는 발길을 편안하다. 댓재에서 우리를 반기는 건 큰 바람뿐이다. 다음 구간 우리는 이 바람에 실려 두타산으로 오를 것이다. 바람에 몸을 맡긴 구름처럼.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환선굴 남한 최대 노년기 동굴

이번 구간을 대표하는 덕항산은 산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져 있어 그 안에 환선굴을 비롯하여 관음굴, 바람굴 같은 많은 동굴을 품고 있다. 그 동굴들을 묶어서 천연기념물 제178호로 지정하고 있다. 그 중 환선굴은 총 길이가 약 6.5Km로 남한에서 가장 큰 노년기 동굴이다.

환선굴에서 덕항산까지는 등산로가 잘 정비돼 있다. 덕항산으로 올랐다 자암재로 내려가든 그 반대로 하든 3시간 안팎이면 원점회귀산행이 가능하다. 하루 산행을 하려면 댓재에서 출발하여 황장산~덕항산을 거쳐 환선굴로 내려갈 수 있다.

댓재민박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차량지원 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전화 033-554-1123, 011-9797-7960).

글=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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