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17구간] 두타산 문화

두타산의 은사(隱士)들
신라 삼공·범일국사·이승휴·이상여의 행적

백두대간은 한반도의 등줄기를 지탱하는 큰 산줄기일 뿐만 아니라 겨레 정신의 큰 줄기이기도 하다. 백두대간의 장소성은 겨레의 정신사를 지탱하는 벼리(綱)로도 자리매김될 수 있으니, 백두대간의 은사(隱士)라는 주제는 백두대간의 문화사를 정리하는 데 중요한 요소가 된다. 역사와 구전(口傳)에는 백두대간의 자락에 깃들어 위대한 정신을 밝힌 수많은 사람들의 자취가 전승되고 있으니, 두타산(頭陀山) 역시 그 현장의 한 곳이다.
두타라는 산이름은 그 이름마저 은사의 자취를 풍긴다. 원래 두타란 Dhuta라는 범어를 번역한 말로서,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않으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 혹은 두타행을 실천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 두타산 설경. 신라 범일국사, 고려 이승휴, 조선 이상여 등 여러 은사들이 머물렀던 산이다.

두타에는 총 열두 가지의 먹고, 입고, 거주하는 행법이 있어서 12두타 혹은 12두타행이라고 한다. 먼저 주거에 있어서 인가를 멀리 떠나 산·숲·광야의 한적한 곳에 있거나, 무덤 곁에 머물면서 무상관(無常觀)을 하며, 나무 밑에 머물고, 한 데에 앉을 뿐만 아니라, 앉기만 하고 눕지 않는다.

먹는 것에 있어서는 늘 밥을 빌어서 먹고,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걸식하며, 한 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는다. 그리고 발우 안에 든 것만으로 만족하며, 정오가 지나면 과실즙, 꿀 따위도 마시지 않는다. 입는 것에도, 옷은 헌옷을 빨아 기워 입고. 겹옷·상의·내의 밖에는 쌓아 두지 않는다. 요즘처럼 식도락으로 혀를 자극하는 음식을 찾아다니며 먹고, 값비싼 명품 의류를 자랑하고, 호화주택에 집착하는 눈먼 세태와는 달리, 열두 가지의 두타행은 인간세상에서 추구하는 의식주의 번거로움과 욕망을 최소화하고, 생명의 본원을 성찰하는 데 온 힘을 집중하려는 불교적인 실천행법인 것이다.

미수 허목의 ‘두타산기’

두타산은 산세가 웅장하고 계곡이 아름다워 가히 선경이라 할 만하며, 따라서 예부터 여러 선인, 은사, 승려들이 숨어들어 소박하고 청정한 삶을 영위하며 자신의 본래 성품을 맑히고 겨레의 역사를 위한 참살이를 하였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은 1661년에 두타산에 유람하고 ‘두타산기’를 지었는데, 그의 <미수기언>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무릉계곡. 허목은 삼화사를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 이라고 했다.


‘6월에 두타산에 갔다. 삼화사(三花寺)는 두타산의 오래된 사찰이었으나 지금은 폐사되어 연대를 알 수 없고, 우거진 가시덩굴 속에 무너진 옛날 탑과 철불만이 남아 있다. 삼화사는 제일 아래에 있고 중대사는 산 중턱에 있는데, 그곳은 계곡과 암석이 엇갈리는 길로서 가장 아름다운 절이다. 그 앞의 계곡을 무릉계(武陵溪)라 한다. 북쪽 폭포는 중대사 뒤에 있는데, 바위너덜로 된 골짜기가 몹시 험하게 가파르고, 그 아래는 바위가 평탄하여 차츰 내려갈수록 험한 바위는 없어져 올라가 놀 만하며, 계곡에는 물도 흐르고 있다.

바위너덜 위로 1백 보쯤 가서 중대사를 지나가면 바위벼랑을 더위잡고 기어오르게 되는데, 두 발을 함께 디디고 갈 수가 없다. 학소대(鶴巢臺)에 와서 쉬었는데, 이곳에 이르니 산세가 더욱 가파르고 쭈뼛하여, 해가 높이 솟아올랐는데도 아침 안개가 걷히지 않았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산(指祖山)에서 구경하였다. 이 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에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석굴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으로는 옛 성이 보인다. 물줄기를 타고 끝까지 올라가면 옛날 상원암(上院庵)의 황폐한 터가 있다. 어떤 이는 이를 고려 때 이승휴(李承休)의 산장이었다고 한다.’

허목이 말한 삼화사는 현재 위치로 자리를 옮겼고, 경내에는 철불과 탑도 보전되어 있다. 무릉계는 삼화사 앞에 펼쳐진 골짜기로서, 두타산의 맑은 계곡물에 씻겨 오랜 세월을 다듬은 넓고 흰 반석이 일품인데, 거기에 새겨진 무릉동천(武陵洞天)이라는 달필의 초서가 무릉계의 현장을 일러준다.

무릉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두타산의 선경은 이미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선교(仙敎) 계통의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을 가졌던 것 같다. 그 예증이 두타산에 전해지는 세 명의 선인에 대한 설화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신라 말에 세 사람의 선인이 있었는데 각자가 거느린 무리가 매우 많았다. 여기에 모여서 더불어 의논하였는데 옛날 제후가 회맹하던 것과 같았다. 오랜 뒤에 헤어져 갔으므로 지방 사람들은 그 봉우리를 삼공(三公)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 삼화사 원경. 이승휴가 책을 빌려 읽던 절이다.


이윽고 불교가 이곳까지 전파됐고, 현재의 두타산이라는 이름도 이 산에 불교적인 자취가 깃들면서 새로 지어진 이름임이 분명하다. 두타산이라는 불교적인 이름을 추정할 수 있는 역사적인 기원으로는, 우선 범일국사(810-899)가 삼화사를 창건했다는 864년 무렵을 잡을 수 있고, 또한 강원도지에 실린 설화에 의하면, 829년 되던 해에 두타산에는 3선(禪)이 들어와 청련대(동쪽), 백련대(서쪽), 흑련대(북쪽)라 했으며, 서역에서 약사여래가 와서 삼화사, 지장사, 궁방에 주석했다는 말이 있으니, 이로써 근거하여 볼 때 두타산이라는 이름은 9세기 무렵에 생긴 이름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동안거사 이승휴

두타산에서 참살이를 한 사람 중에는 역사에 유명한 인물로서 고려의 동안거사 이승휴(1224-1300)와, 조선의 알려지지 않은 선비인 삼화처사 이상여(1602-1665)가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는 정사를 말하다가 파직당한 후 두타산 밑에 터를 잡고 살면서 역사와 정신을 바로 세웠다. 이승휴의 자는 휴휴(休休)이고 두타산거사(頭陀山居士)라는 별호도 지니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타산과 각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70세 되던 해에 왕의 명을 받고 두타산에서 나와 서울에 왔는데, 이승휴는 ‘외로운 종적이 몇 해나 강산에 의지했더니, 다시 서울 땅 밟으니 한 꿈속이어라’라는 시를 남기고 곧 물러가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두타산에는 간장암(看藏庵)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절 이름 또한 이승휴와 관련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안축의 기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이승휴는 당초에는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대개는 연구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고 늙어서는 부처를 섬김이 더욱 근엄하였다. 이에 별장을 지어 거처하였다. 이 산에 있는 삼화사에 가서 불경을 빌려 날마다 열람하였고, 십년 만에 읽기를 마쳤다. 그 후에 그 별장을 절에 희사하고 현판을 간장암이라고 하였다.’

역사에서 이승휴는 고려시대 최씨 무인정권과 몽고 간섭하의 격동기를 살았던 문신이요 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정치적 굴곡과 은둔을 거듭하는 생을 살면서, 정치적 활동을 한 것은 50세 이후부터 16년간에 불과했다. 이승휴는 1280년에 국왕의 실정과 국왕 측근 인물들의 전횡을 들어 10개조로 간언했다가 파직당하였으며, 파면당한 후 다시 삼척현의 구동으로 돌아가 은거하여 당호를 도연명의 귀거래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용안당(容安堂)이라 하였다. 이곳에서 10여 년 동안 삼화사의 불경을 빌려 공부하였으며, 제왕운기(帝王韻記)와 내전록(內典綠)을 저술하였다.

제왕운기는 고려 충렬왕 13년(1287), 이승휴가 64세 되던 해에 두타산(현 삼척시 미로면 천은사)에 은거하며 저술한 서사시로서, 삼국유사와 함께 우리 역사의 시원을 단군으로부터 잡은 최초의 사서라는 점에서 주목되어 왔다.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되었는데, 상권은 반고로부터 금나라까지 중국의 역사를 칠언시로 읊었으며, 하권은 1·2부로 나누어 단군부터 충렬왕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특히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삼은 점은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다. 원래 부여·고구려·신라 등은 각각 자신의 시조설화를 갖고 있었지만, 그는 시례(尸禮)·고례(古禮)·남북옥저·동부여·예맥부터 삼한·신라까지 모두 단군의 후예라고 했다.
▲ 삼화사


이것은 민족사에 중요한 인식의 지평을 넓힌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단군신화를 소개하기를, 환인의 아들 환웅이 손녀에게 약을 먹여 사람으로 만든 후 단수신(檀樹神)과 혼인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환웅이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서 곰이 사람으로 변한 웅녀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였지만, 이승휴는 박달나무의 신과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함으로써 겨레 형성의 시원적 장소성에 있어서 숲(나무)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무언자 이상여

한편, 조선시대에 두타산에 은거하였던 숨은 선비로서는 이상여(1602-1665)가 있다. 이상여에 대한 사료는 삼화처사이상여묘갈명(三華處士李相如墓碣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이상여는 나이 60이 되도록 거리낄 처자식이 없었고, 벼슬할 생각도 없었으며, 불의로 이룬 부귀를 보면 마치 자신까지 더럽혀질 것처럼 여겼다고 한다.

그는 은자나 승려들과 교류하기를 좋아하였고, 평소에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명승지라면 발길이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천하의 명산ㆍ대천과 군읍(郡邑)ㆍ요새와 산하의 분계점과 육지와 바다의 배치에서부터 오지의 거리ㆍ풍토와 특이한 종적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음속에 묵묵히 기억해 두어서 마치 몸소 직접 두루 밟고 다녀본 것 같았다고 하였다.

또한 그는 도교와 불교의 문자를 잘 알아서 일찍이 무언자(無言子)라 자호하여 스스로 기록하였으며, 만년에는 영동의 두타산 아래 삼화동에 들어가 잡초를 베어내고 집을 짓고 살면서 굳은 절조의 계책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오직 천하 국가의 일을 가지고 걱정하거나 즐거워할 뿐이었고, 자기 한 몸의 영욕과 안락하고 배부른 일에 대해서는 전혀 꾀하지 않았다. 이런 사람을 천하의 선비가 아니라고 하면 안 될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렇듯 고려의 이승휴는 두타산에서 겨레의 역사를 올곧게 세웠고, 조선의 이상여는 꼿꼿한 선비의 절조를 굳게 실행하였다. 두타산의 푸른 정기는 그들의 정신을 길렀고, 그들은 두타산의 역사에 기록될 참사람이 되었다.

글=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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