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17구간] 두타산 문헌고찰

산에 드는 것 자체가 두타행인 청정 명산
두타산과 청옥산의 관계·삼화사의 이승휴

강원도 삼척시의 미로면과 하장면, 동해시와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댓재[竹峙·810m]와 백복령(百福嶺·780m) 구간의 주산 두타산(頭陀山·1,352.7m)은 이 산에 드는 것 자체가 두타행인 청정 도량의 명산이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범어(梵語) dhuta의 음역으로서,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아니하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이른다. 후세에는 산야와 세상을 순력하면서 온갖 신고를 인내하는 행각의 수행, 또는 그러한 수행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타산은 서울에서 원거리에 있는 동해가의 영산으로서 고도 1,300~1,400여m의 큰 산세를 이루고, 그 동북쪽 두타동천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선경을 이룬 무릉계곡을 품에 안고 있는 심산유곡의 명산이니, 이 산에 드는 것, 이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바로 두타행이라 여겨진다. 두타 12행 중 그 첫 번째 행이 바로 인가를 멀리 떠나 산숲·광야의 한적한 곳에 있는 것, 곧 아란야처(阿蘭若處)에 머무는 것이다.

조선 중기에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1532-1590)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명산으로서 두타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 무릉계곡 안쪽의 용추폭포
‘천하에 산수로서 이름난 나라는 우리나라만한 데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산수로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다. 영동의 산수 중에서도 기이한 형승으로 이름난 것은 금강산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 산의 근원이 백두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달려와 철령이 되고, 금강산이 되고, 대관령이 되었으며, 구덩이처럼 움푹 파인 곳은 계곡이 되고, 우뚝 솟은 것은 산봉우리가 되었다. 우뚝 선 것, 급하게 기울어진 것, 높고 험한 것, 탄탄하게 뻗은 것 거의가 한두 가지 형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두타산은 실로 삼척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골짜기의 깊음과 수석의 기이함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되었다’(성암선생유고 권2).

두타산의 산수와 산령 이름

두타산은 남쪽 424번 지방도 상에 큰 고개를 이룬 댓재가 위치하고, 북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따라 올라가면서 박달령(朴達嶺)과 최고봉인 청옥산(靑玉山·1,403,7m) 및 연칠성령(連七星嶺·1,180m)·망군대(1,247m)·고적대(高積臺·1,353.9m)가 위치하고, 고적대에서 정북쪽으로 뻗어가고 있는 산줄기 상에는 갈미봉(1,260m)과 이기령(耳基嶺·810m)·상월산(上月山·970.3m) 등의 산봉과 고개가 자리하고 있다.

또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가지산 줄기 상에는 예전에 오십정산(五十井山)으로 불리던 쉰움산(688m)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상봉인 청옥산 근처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학등 산줄기 좌측 바른골 우측에는 박달골의 물이 흘러내려가 용추폭포·쌍폭포 등의 비경을 연출하면서 선경인 무릉계곡을 형성하고, 하류로 흘러가면서 전천이 되어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두타산은 현재 최고봉인 1,404m봉이 청옥산, 그 동쪽 1,353m봉이 두타산이라 불리고 있으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본래는 최고봉인 청옥산이 두타산, 현 1353m봉인 두타산이 청옥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곧 산경표에서는 태백산을 향하여 남하하는 백두대간 상의 산 이름 순서를 백봉령→두타산→청옥산→죽현(竹峴·댓재)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백봉령 남쪽에 두타산이 있고, 그 동남쪽에 청옥산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두타산과 청옥산의 산줄기 사이에 무릉계가 위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 조선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의 삼척군 산천조에 관내의 대표적 명산으로서 두타산은 언급하고 있으나, 청옥산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동해시 일원에서 삼화동 방면으로 들어가다가 멀리 보이는 두타산의 모습을 보면 현재의 청옥산이 푸른 색을 띤 둥그런 육산의 모습으로 조망된다.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 본래 두타산이란 이름이 현대로 오면서 청옥산으로 바뀌어 불리어지고, 두타산이란 산 이름은 자연스럽게 바위산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 1353m봉쪽으로 이동되어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타산 정상부에 올라보아도 청옥산은 곧 원만한 형상을 한 육산 모습이고, 두타산은 첨봉(尖峯)을 이룬 골산(骨山) 모습이다.

또 조선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삼척 두타산조에 의하면, 현재 쉰움산(688m)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오십정산(五十井山)과 그 옆에 있던 두타산 신사(頭陀山神祠)를 두타산 산허리[山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위치개념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현 1353m봉이 두타산의 중심 산봉으로 자리 잡혀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 쉰움산. 정상에 돌웅덩이가 많아 옛부터 신성시 돼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신사를 두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청옥산이란 이름은 19세기 후엽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삼척조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두타산 최고봉과 제2봉에 대한 보편적 산 이름 정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남아 삼척의 대표적 명산하면 두타산을 언급할 뿐 청옥산이라고 언급하는 예는 드물다.

다만 18세기 후엽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 산천조에 수록한 삼척부지도에 현재의 두타산·청옥산의 이름과 같은 위치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일례도 있으나, 여지도서 삼척부 산천조에 청옥산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대 지도가 아닌, 후대 지도를 삽입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잇는 7.5km 능선은 해발 1,300여m의 백두대간 능선길로서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고 하여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옥산과 고적대 사이의 연칠성령(連七星嶺)은 글자 그대로 새기면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로 이어지는 고개라는 의미로 풀이해 볼 수 있겠으나, 이 고장 땅이름 유래에 의하면, 동쪽 사원터 방면에서 서쪽 하장면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7개 등성이가 있다고 하여 일컬어진 고개 이름으로 보인다.

두타산 구간의 최북단에 위치한 백복령(百福嶺)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복을 희망하는 고개, 다복하기를 희망하는 고개라는 의미로 희복현(希福峴) 이라 불린 이름으로 보이는데, 희다는 白 의 훈을 빌려 白福嶺으로, 많다는 百의 훈을 빌려 百福嶺으로 불렸고, 이를 소리나는 대로 적어 白鳳嶺으로 쓰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두타산 남쪽 댓재 에는 두타산 방면으로 오르는 등산길 입구쪽 북쪽 언저리에 두타영산지신(頭陀靈山之神)이란 신위를 모신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두타산 신사는 조선시대에는 쉰움산 정상 부근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 석축제단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그 일대 산을 오르다 보면 신에 의지하려는 무속인들이 지금도 치성을 드리고 있는 모습을 가끔 목격하기도 한다.

댓재라는 이름은 곧 큰 산줄기의 고개라는 의미로 일컬은 ‘대고개’ 라는 뜻의 말이라 생각된다. 대동여지도에는 이를 죽치(竹峙)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고개·댓재를 뜻옮김한 표기다. 여기서의 대는 곧 대들보·대보름 등과 같은 크다는 의미로서 竹의 훈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댓재 서쪽 기슭 죽현천(竹峴川) 부근에 고대 죽령현(竹嶺縣) 터가 있었던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권 35) 삼척군조에 의하면, 죽령현은 고구려 시기에는 죽현현(竹峴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죽령현으로 개칭되었다. 이에 의하면 댓재는 고대시절에는 竹峴→竹嶺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竹峙로도 불렸고, 우리말 땅이름으로 댓재 로도 속칭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삼척 고적조에서는 고죽령현(古竹嶺縣)터를 현 삼척시 원덕읍 옥원리에 있던 옛 옥원역(沃原驛)자리로 보기도 하였으나, 댓재의 위치와 비교할 때 신뢰할 만한 설이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두타산의 이름과 삼화사 사적

두타산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보광정기(?光亭記·동안거사집, 잡저)와 최해(崔瀣·1287-1340)의 두타산간장암중영기(頭陀山看藏庵重營記) 등에 의하면,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로 현재까지 두타산으로 불려오고 있다. 다만 최고봉과 제2봉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전체의 산 이름은 시종여일하게 두타산으로 불리고 있다.

▲ 삼화사. 신라 말 두타삼선 창건설과 범일국사 창건설, 자장국사 창건설 등이 있는 천년고찰이지만, 한 때 폐허됐다가 근래에 들어와 옛터는 쌍용시멘트에 내주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련했다.
최해의 간장암중영기는 동국여지승람 삼척부조에는 안축(安軸·1287-1348)의 기문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최해의 졸고천백(拙藁千百)· 이승휴의 동안거사집·동문선 등에 모두 최해의 기문으로 전문이 수록되어 있고, 안축의 근재집(謹齋集)과 여지승람에는 일부만 게재하고, 끝을 ‘~云’으로 끝맺음하고 있어 곧 남의 글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안축 기문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또 고려시대 석식영암(釋息影菴)의 삼화사 사적에 관한 기문에, 신라 말에 세 신인(神人)이 이곳 두타산 기슭, 삼화사 맞은편 삼공암(三公巖)으로 보이는 삼공봉 근처에 자리 잡고 오랫동안 일을 의논하며 머물다 간 일이 있고, 뒤에 사굴산문(??山門)의 개조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 일명 품일(品日)이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삼공암(三公庵)이라 현판을 달았다는 내용과,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頭陀山三和寺古今事蹟)에 고적(古蹟)을 인용하여 자장조사가 본국 오대산에 들어가 성적(聖蹟)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두타산을 유력(遊歷)하고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비로소 이곳에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하니, 지금의 삼화사였다는 기록 내용에 의하면, 두타산이란 산 이름은 더 거슬러 올라가 신라 때부터 불려온 이름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라 말에 두타산 삼화사 일대에 들어와 있었다는 세 신인은 후대에 두타 삼선(頭陀三仙)으로도 지칭되고 있는데, 이들이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에 많은 행적을 남기고 있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산수를 즐겨 찾아다니며 수행하던 통일신라시대의 사선랑(四仙郞)과 같은 대표적 화랑의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과 진주지(鎭珠誌) 등에 보이는 삼화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삼화사 숲속 삼층보탑에 이르기를,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를 유력(遊歷)하면서 한 척의 돌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와서 정박한 후 맏형은 흑련(黑蓮) 한 송이를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 한 송이를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 한 송이를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흑련대가 지금의 삼화사이고, 청련대가 지금의 지상사(池上寺), 금련대가 지금의 영은사(靈隱寺)였다고 전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약사삼불이 타고 온 용의 몸이 변하여 바위가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보이는 약사삼불은 1657년 천재지변으로 흩어지고, 맏형인 백의 불상만 하나 남은 것이 바로 현 삼화사 적광전에 안치되어 있는 보물 제 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이라 전한다. 또 석식영암의 기문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고, 그 옛날 왕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국을 화합하여 통일하였다는 의미로 삼화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두타산의 명승과 고적

두타산 무릉계곡 일원에 자리한 여러 명승에 대한 이름은 김효원의 두타산일기와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두타산기에 의하면, 김효원이 삼척부사 재임시 이곳을 답산하였을 때 명명한 것이라 전한다. 동해시 삼화동 일대의 무릉계곡 하류쪽과,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일대의 천은사계곡 하류쪽의 경관은 필자가 이곳을 답산하기 한 해 전이던 2002년도에 대대적인 홍수피해로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다행히도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금란정 일대의 무릉계곡 입구와 천은사 일대의 계곡부터는 많이 훼손되지 않은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긴 적이 있다.

무릉계곡에 들어서면 수백 명이 앉아서 놀 만한 무릉반석이 펼쳐져 있고, 그 무릉반석 냇가에 아담한 금란정(金蘭亭)이 서 있다. 금란정은 삼척의 유림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한말까지 유학강론에 전념하였는데, 한일합방으로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金蘭契)를 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일본 관헌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이에 금란계원과 그 후손들이 과거 선인들의 뜻을 계승하여 1949년 봄에 정자를 건립하고, 1956년 9월에 현재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 전한다.

그 옆 등산로 길가에는 큰 반석을 떼어다 석축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 놓은 듯한 직사각형 반석 위에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 쓴,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호쾌한 필력이 넘치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곳 냇가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는 양봉래의 절묘한 글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점점 선명치 못하여져 감상하는 이들을 위해 이를 복각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세 용어 ‘선원·천석·동천’이란 말은 모두 도교사상·신선사상과 관련한 무릉도원의 선경을 상징하고 있는 말들이므로, 양사언이 두타산의 진면목을 단 3개 용어를 통하여 참으로 적절하게 잘 표현해 놓고 있다고 생각된다.

삼화사 뒤쪽 산중턱에는 중대천석의 중대와 관련 있는 중대사터가 있다. 삼화사 일대를 지나면 폭포수가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명승 학소대(鶴巢臺)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두타산의 암릉은 기막힌 절경이다. 허목의 두타산기에 의하면, 이 일대 경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폭포수가 흐르는 바위를 천주암(?珠巖)이라 하고, 그 앞산 봉우리에는 옛날 학의 둥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학이 오지 않은 지가 60년이라고 한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암(指祖庵·현 관음사)을 유람하였다. 이 산(지조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그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쪽으로는 옛 성(城)이 보인다.’

위에 보이는 옛 성은 곧 관음사 일대에서 무릉계곡 건너편 산쪽으로 보이는 신라 파사왕 23년(102)에 축성하고, 조선 태종 14년(1414)에 수축하였다는 두타산성을 지칭한 것이다.

관음사 건너편 두타산 정상부로 오르는 코스로 가파른 등산로를 약 20분 정도 오르면, 허물어진 산성 주변에 두타산성이라 쓴 안내표목이 서 있다. 이곳에서 반대로 무릉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면 관음폭포와 관음사가 한눈에 조망되고, 또 그 동쪽 아래쪽으로 삼화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 암벽에 올라서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듯한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산성12폭이 있는 절경을 연출하고 있는 협곡이 내려다보인다.
▲ 천은사. 이승휴가 삼화사에서 빌린 불경을 용안당에서 읽었는데 후에 간장암이라 고친 암자가 이 부근 이승휴 유허지(사적 제421호)에 있었다.


이쪽 두타산성과 관음사 사이의 무릉계곡 일대를 허공다리라고 일컫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항쟁을 벌일 때 이 계곡 양편 사이에 줄을 매고 허수아비 신장을 매달아 골짜기 반공을 오가게 하면서 왜군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이곳을 지나 약 15분 정도 가면 계곡을 건너 문간재로 올라 학등[鶴背]을 타고 곧 바로 두타산 최고봉인 청옥산으로 오르거나, 또는 바른골 일명 사원터골을 경유하여 망군대·연칠성령쪽으로 오르게 된다. 옛날 어느 선비가 층암절벽의 높은 학소대에서 종이로 학을 접어서 날렸는데, 그 종이학이 진짜 학이 되어 날아가 청옥산에서 문간재로 내려온 산줄기의 산등에 앉았다고 한다. 그 학이 앉았던 산등이 바로 지금의 학등이라 전한다.

계곡 건너 문간재로 가는 길을 무시하고, 곧장 계곡 따라 오르면 수량이 풍부한 거대한 물줄기가 약 45도 각도로 양쪽에서 내리쏟는 쌍폭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좀더 오르면 신선봉 남쪽 절벽 아래에 수수만년을 내려오면서 물줄기의 힘으로 오묘한 절경을 연출해 놓은 폭포가 있으니, 곧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폭포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3단 폭포인 용추폭포(龍湫瀑布)다. 날씨가 가물 때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두타산 정상부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내려간 산허리 부근에는 현재 무속인들이 신성시하며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한 쉰움산이 있다. 쉰움산은 두타산 산허리에 있는 산으로, 산정에 약 50개 우물이 있는 산이라 하여 쉰우물산, 곧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 부른 신비의 산이다. 척주지(陟州誌)에서는 그러한 쉰움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흑악사(黑岳寺·현 천은사) 위쪽에 오십정산이 있다. 암석 위에 돌웅덩이 [石?]가 50개인데, 깊은 것은 이끼 색이 짙고 물이 맑아서 신정(神井)이라 한다. 가물면 이곳에서 비를 빈다. 풍속에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대대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쉰움의 움은 움푹 들어가다, 또는 우묵하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며, 한편 그러한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 고인 물을 신정(神井)으로 여기던 옛 사람들은 이를 쉰우물산 곧 오십정산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신성시하여 두타산의 신사를 이곳에 두고 봄·가을로 치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쉰움산 기슭 내미로리에는 천은사(天恩寺)가 있다. 이 일대는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며 학자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가 은거하였던 이승휴 유허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는 이 일대 천은사계곡을 용계(龍溪), 이 일대 땅이름을 귀동(龜洞), 또는 귀산동(龜山洞)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이승휴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충렬왕 때 그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곳 귀동 용계변에 용안당(容安堂)이란 별장을 짓고,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또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여 늘 삼화사에 있는 대장경을 빌려다 읽었는데, 10년만에 다 완독하였다고 한다. 용안당의 ‘容安’ 은 곧 진 도연명(陶淵明·365-427)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그가 머무는 집을 무릎을 펼만한 편안한 공간만 살필 뿐이라는 말로 언급한 용슬이안(容膝易安)에서 딴 당호다. 뒤에 이 별장을 승려에게 희사하여 절로 만든 후 그가 대장경을 보던 곳이라는 의미로 절의 현판을 간장암(看藏庵)으로 고쳐 달았다.

현재 이곳은 사적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허지 안내판 개울 건너편에는 이승휴의 사당인 동안사(動安祠)가 건립되어 있다.

글=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