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두타산] 댓재~두타산~청옥산~~백봉령

'아직 겨울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것 같다'

갓 밝은 봄빛은 병아리 솜털 같다. 산수유꽃, 생강나무꽃이 그렇고, 악취가 진동하는 도심 천변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양지꽃이 그렇다. 개나리는 또 어떤가. 하루가 다르게 툭툭 쏟아내는 그 꽃들은 ‘낯가리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나를 감동시킨다.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동네방네 축제를 열며 난리법석을 떠는 벚꽃에 견주면 잡초 대접에 가까운데도, 어쩌자고 그리도 천연덕스럽게 잘도 피어나는지.

개나리꽃을 보며 느끼는 새삼스러운 감동은, 목이 터져라 호객을 하는 남대문 시장 상인의 목소리나 지하철 한 귀퉁이에서 더덕을 파는 할머니가 나눠주는 알싸한 냄새를 닮았다. 남루할지언정 비루하지 않은 그 빛깔과 소리, 냄새. 꾸미지 않은 몸짓의 건강한 아름다움이다.

▲ 이기령과 원방재 사이에 있는 상월산 직전 조망바위. 백봉령으로 오르는 42번 국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지만 동서로 휘어돌며 10㎛정도 더 가야한다. 날씨만 좋다면 이곳에서 백봉령까지는 대부분 동해를 볼 수 있다.


도시 길가의 진달래도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댓재에서 바라본 두타산 기슭에는 아직 겨울이 한 발짝도 물러선 것 같지 않다. 바람살이 냉기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바람의 방향은 아직 북서 계절풍의 지배 하에 있다. 일찍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댓재 민박집에 배낭을 풀고 주인에게 꽃 소식을 물었다. 아직 멀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동쪽의 동해시와 비교하면 한 달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북쪽인데다 아직 바다의 영향을 받기에도 이른 탓일 것이다.

"꽃 소식은 아직도 멀었다"

민박집에서 차린 아침 밥상에 콩가루를 듬뿍 묻힌 냉이국이 올라 있다. 봄기운을 뱃속 가득 채우고 두타산을 오른다. 초입의 트레일은 두 갈래다. 산신각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과 등성마루로 오르는 방법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대간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계곡으로 오르는 길이 20분쯤 절약되므로 시간과 체력에 따라 선택할 일이다. 우리는 능선길을 택한다. 학기 초에는 누구나 모범생인 것처럼.

이번 구간의 기점인 댓재(810m)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 사이의 고개로 동해와 태백·삼척 내륙을 이어주는 4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종점인 백봉령까지 대간을 넘는 찻길은 없다. 실거리 약 29km로 당일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12~13시간에 주파하는 구간이다. 무박2일 일정으로 걷는 방식인데, 깜깜한 새벽에 출발해야만 어두워지기 전에 백봉령에 닿을 수 있다. 야영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운행방법이긴 한데, 제대로 보고 느끼기엔 무리다. 짐을 가볍게 지긴 하지만 뛰다시피 12시간을 걸으려면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참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소나무가 보이는 들머리는 된비알은 아니지만 제법 경사가 높다. 한 10분쯤 지나자 왼쪽으로 잘 생긴 금강소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또 10분쯤 진행하자 트레일이 완전히 꺾어지는 지점에 명품 소나무가 서 있다. 살포시 허리를 낮추며 기슭을 지나던 길은 서서히 키를 높이며 조릿대밭을 지난다.

어른 팔로 한 아름은 더 돼 보이는 소나무가 베어진 자리에서 휴식하며 등걸의 나이테를 세어 본다. 얼추 90살 정도다. 흔히 이 정도 굵기의 나무를 보면 멋대로 200~300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빗나간 추측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생육 조건에 좋은 곳에서는 30년만 잘 가꾸어도 직경 50cm 정도의 재목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두타산 초입의 참나무 숲길.
기암절벽은 물론 야박스런 땅에서도 잘 자라는 소나무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특성과 닮은꼴이 많다.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 평생을 함께 살고, 죽어서도 소나무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태어날 때 금줄에 솔잎을 걸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텐데, 말인즉슨 그렇다는 얘기지 정색을 하고 할 말은 못 된다. 요즘 그렇게 태어나 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시골에서도 드물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런 얘기로 소나무 사랑을 강조하는 얘기를 들으면 거부감을 느낀다. 교조적 냄새가 물씬하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실제 생태는 동양화 속의 이미지보다는 진달래와 개나리에 더 가깝다. 양수이다 보니 잎 넓은 큰키나무에 밀려나는 운명은 어쩔 수 없지만, 재선충 같은 병충해만 잘 막아내고 보살피면 우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참나무로 천이가 끝난 산에서도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많은 걸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근거다.

그림자가 짧아지면서 양지바른 쪽의 트레일이 질척거리기 시작한다. 귀에 고이는 새 울음소리는 지난 번 산행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짝짓기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런 계절에 딱 어울릴 시 한 편 읽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희끗희끗 양지에 남은 눈이 녹는
봄이 되면 서둘러서 산으로 가야겠다.

산이 좋아.
무엇보다 세상에선
산이 제일 좋아

산으로 가는 날은 내가 산을 사는 날.
내가 나를 사는 날.

산이 좋아.
아내와 같이일 땐
화목을 지펴
깊은 골 양지쪽에 원시를 생활하고,

짐승이 밟는 길목
가다가 반짝 드는
진한 꽃 빨간 산꽃.

포릉포릉 멋대로 잔가지를 날으는
어린, 또,
예쁜 딸년처럼 몸짓 가벼운
죄그만 지줄대는 산새들도 좋다. -박두진, ‘산이 좋다’(부분)

시인은 '산으로 가는 날은 내가 산을 사는 날'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이 곧 산이고 산이 곧 시인인 경지다. 또한 시인은 ‘산으로 가는 일’을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아직 산으로 가지 못 하고 있다. 산에서 멀어진 곳에서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삶에서 얻은 통찰일 것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상당히 먼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의 메시지에서는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시인이 살던 시대에도 깊은 산속에서 원시를 생활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시인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의 강물을 유유히 따라 흐르는 산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산은, 자연이라는 종교의 경전이다. 신독(身讀) 즉 몸으로 읽어야 할 경전이다. 이 문자 없는 경전의 가르침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새긴 사람은 노자다. 도덕경 제25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무위(無爲)를 ‘함이 없음’으로 오독한 글을 종종 만난다. ‘조작함이 없음’이라고 새겨야 옳을 것이다. 과연 현실에 발을 담은 인간으로서 조작함이 없는 삶은 어떤 경지일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무위자연의 한계치가 아닐까?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하인리히 하러는, 함께 인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티베트로 간 아우프슈나이터라는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우프슈나이터는 자신이 젊었을 때 선택한 좌우명에 따라 살았다.” 아우프슈나이터의 좌우명은 라틴어로 ‘에세 쾀 비데리(Esse Quam Videri)’인데, 남에게 보이기보다는 그냥 존재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감히 나는 이런 경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아우프슈나이터의 삶에서 무위자연을 읽을 수는 있다. 아우프슈나이터의 정신세계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아니었을까.

쉰움산 자락에 걸린 운해

다시 대간으로 돌아오자. 댓재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꾸준히 키를 높이는 대간은 1243m봉에서부터 두타산(1,355.2)m 정상까지 줄곧 오른다. 정상 일대는 키 작은 참나무와 철쭉이 드문드문하고 묘가 있는 정상은 제법 넓다. 날씨가 좋으면 동해가 닿을 듯이 조망되는 곳이지만 동쪽은 안개에 갇혀 있다.

▲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표지기. 대간 종주는 이제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다.


두타산 정상에서 빵과 과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청옥산을 향한다. 길게 떨어졌다 그만큼 오르는 두타와 청옥 사이는 반달의 곡면처럼 부드럽다. 경사면의 바닥을 친 뒤 살짝 올라서면 박달령이다. 박달령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무릉계. 박달령에서 청옥산 정상을 향하는 길은 능선 왼쪽 기슭으로 돌아 오르기 때문에 시각적 가파름보다 실제 경사가 훨씬 약하다.

아직 잎을 내밀지 않은 다래 덩굴과 참나무로 둘러싸인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청옥산(1,403.7m)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돌올한 분위기도, 호쾌한 조망도 없다. 청옥산에서 연철성령까지는 내리막이 계속이다. 군데군데 보호수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은 주목이 서 있다.

연칠성령에서 고적대를 오르는 순간부터 빗줄기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안개비보다 약간 굵은, 맞고 있는데도 그리 춥지는 않다. 고적대 정상은 날씨만 좋다면 남으로 소백산, 북으로 대관령이 조망될 정도로 사방이 열려 있다. 고적대에서 갈미봉으로 내려서는 동안 동남쪽으로 마주하는 무릉계의 동쪽 쉰움산 자락은 비로 인하여 오히려 장관을 연출한다. 구름을 두른 산허리가 그림에서나 보던 선계를 펼쳐 준다. 안개에 가려진 무릉계는 아득히 깊어 신비감이 더하고.

갈미봉(1260m)을 지나 이기령으로 향하면서 자주 너덜을 만난다. 조금 지루하다. 그러다가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인공 조림한 자작나무 군락이 시원하게 눈에 안긴다. 약간은 이국적인 모습이다. 목표로 삼은 이기령을 1km 정도 남겨둔 지점에서 야영하기로 한다. 땅거미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는 데다 체력도 바닥났기 때문이다.

을씨년스런 날씨는 텐트 속을 아늑하게 한다. 바로 이런 한심한 행복감은 지상의 모든 정상적인 집을 여우의 신포도로 만들어 버린다. 여우는 역시 현명한(?) 동물이다. 밥을 짓느라 켜 놓은 버너 열기는 젖은 몸에서 모락모락 안개를 피워 올린다. 여덟 명이서 3~4인용 텐트 안에서 밥을 먹는다. 인간의 적응력도 바퀴벌레 못지않은 것 같다.

“지금 내가 사는 집도 자병산 뭉갠 대가”

밤새 비는 그쳤지만 안개는 자욱하다. 바람이 제법 차다. 빗물은 온기까지 땅속으로 끌고 들어간 모양이다.

이기령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이기령에서 상월산(970.3m) 오름길은 말끔하다. 산책로 같은 낙엽송숲을 지나면 상월산이다. 상월산에서 원방재(730m)를 향하는 대간은 크게 한 번 내려섰다 불끈 솟은 후에는 길게 허리를 낮춘다. 원방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백봉령(780m)까지는 고개로 내려선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 원방재보다 백봉령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경쾌하게 내려서는 길을 기대했다가는 실망감만 커질 정도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날씨만 좋으면 시야가 열린 어디서나 동해를 볼 수 있지만, 비가 올듯 말듯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백봉령으로 내려서기 직전 조망처에서 자병산을 바라본다. 동해를 감상하라는 의도로 만든 곳이지만 자병산만 눈에 아프다. 거의 산이 통째로 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 편히 삿대질할 자신이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 산을 뭉갠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포식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ㅣㅣ덧붙임ㅣㅣ
백봉령의 공식 지명은 백복령(白伏嶺)이다. 택리지에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표기돼 있고, 신증동극여지승람에는 희복현(希福峴)으로 표기돼 있다. 현재 대간 종주자들 사이에는 옛 기록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백복령(白伏嶺) 대신 백봉령(白鳳嶺)이란 이름이 널리 쓰인다. 이 글도 그것을 따랐다. 동해시의 공식 인터넷 사이트에는 두 표기가 혼용되어 있다.

ㅣㅣ백두대간의 명소ㅣㅣ
무릉계곡 … 용추폭포·학소대·호암소 등 가경 즐비
두타산과 청옥산이 빚어 놓은 무릉계곡은 달리 무릉도원이라 불릴 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올곧은 정치를 직언하다 파직당한 이승휴가 이곳으로 몸을 숨기고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계곡의 반석에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의 필적을 비롯한 명필의 붓 자국이 새겨져 있다(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계곡 곳곳에 용추폭포와 학소대, 호암소와 같은 가경이 베풀어져 있다. 계곡 초입의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 스님이 창건한 천년 고찰로, 보물 제1277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92호인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있다.

1979년에 쌍용시멘트 공장에 자리를 내어 주고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바람에 옛 모습을 잃었지만, 빼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정취는 그윽하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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