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문화

호랑이 두려워하며 화전 일구던 시절
석병산 일대의 화전농업·호식총(虎食塚)·서낭당 등 산림생활사

백두대간의 문화사는 백두대간의 산지에 태어난 사람들이 산을 삶터로 삼아 경작하고 마을을 형성해 살다가 죽어 일생을 마치는 전 과정의 생활사가 중요한 구성요소를 이룬다. 생활사에는 경제사, 사회사, 문화사, 풍속사, 주거사, 신앙사 등이 모두 포괄되어 복합적인 체계를 구성하는데, 그 중에서도 중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경제적 생활, 다시 말해 산림경제라고 할 만한 것이다.

백두대간을 주 무대로 산지가 개간되고 산촌이 형성된 시기는 언제부터이고, 또 지역적인 분포는 어떻게 나타날까? 그리고 백두대간 구간에서 석병산 일대 주민들의 산림생활은 어떠했을까?

백두대간 산지 개간의 과정은 화전농업사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학계의 연구 성과(옥한석, ‘한국의 화전농업에 관한 연구’, <지리학연구> 10집, 1985)에 의하면, 한국에서 화전농업이 언제 본격화됐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기록에서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 이르러 화전 면적이 늘어갔으며, 조선 중기에는 강원도 산간지대에서 나무를 베고 불을 질러 1~2년 경작하다가 지력이 쇠퇴하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는 기록이 보인다.

조선 후기에는 일반 전답 규모로 커져

조선 후기의 화전에 관해서 정약용은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 화전의 규모가 평전(平田)과 비슷하다고 한 점으로 보아 상당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 영농합리화 등으로 농촌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산간에 화전을 일구는 경우가 많았고, 해방과 함께 화전민수는 급격히 줄었다.

한국전쟁 이후에 식량난으로 화전민이 다시 급증했으나, 1968년의 화전정리법을 제정 공포해 법령으로 화전을 금지하기에 이르렀고, 강원도 산간지방의 화전마을을 다른 지방으로 이주시키기도 했다.

지역별 화전 면적은 평북,함남,강원,평북,황해도의 순으로 많이 분포했다. 화전경작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지역은 개마고원을 중심으로 한 백두대간 지대, 청남정맥의 산악지대, 태백산에서 금강산에 이르는 백두대간 지대와 낙동정맥 일대였다.이 중에서 맹부산, 희색봉, 연화산, 백암산을 잇는 개마고원 일대가 가장 화전이 성했다.강원도는 한북정맥과 백두대간의 접경지대, 오대산과 태백산을 잇는 고위평탄면 일대에서 화전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강원도에서는 화전을 일굴 수 있는 국유림의 큰 산을 중심으로 골골마다 화전민들이 둥지를 틀고 살았고, 그 현장에는 골이름이나 마을이름이 남아 있다. 강원도 산간지역에 터를 일구던 사람들의 부류는 여러 가지였는데, 화전으로 생계를 유지하려는 사람, 북한에서 승지를 찾아온 비결파들, 정치 사회의 혼란을 피해 들어온 피난민들, 이미 터를 잡고 살던 사람의 연고에 의해 들어온 사람들이다.

화전민들은 개간할 땅이 정해지면 터를 정하고 살기 때문에, 마을 형태는 동족마을처럼 집촌(集村)이 이루어지지는 않고, 골에 두세 집씩 흩어져 사는 산촌(散村) 형태를 띤다.

서낭당은 호환에 대한 대비 의례

그러면 강원도에서 행해진 화전의 주요 작물과 경작과정도 잠깐 살펴 보자. 강원도 화전의 주요 작물은 조와 콩이었고, 지역에 따라서는 메밀도 경작했다. 화전은 농사지을 땅을 미리 알아본 다음 가을에 나무나 풀을 베어 놓았다가 다음해 봄에 불을 놓아 땅을 일구는 것이 보통이다.

삼척의 경우는 양력 2월이나 3월쯤 풀이나 잡목을 베어서 깔아 놓았다가 4, 5월쯤 이것이 마른 다음에 불을 놓고, 불이 타서 재가 남으면 그 위에 좁씨 등을 뿌리고 괭이로 판다. 첫해에 조를 심으면 이듬해에는 콩을 심으며, 이렇게 해마다 경작물을 바꾸어서 4년 정도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화전민들은 촌락을 이루게 되면 마을의 수호신으로 서낭당(성황당)을 모셨다. 서낭당의 형태는 커다란 신목을 중심으로 주위를 둘러 담을 쌓은 형태와 당집을 모신 형태가 많다. 동해안 바닷가 마을의 경우 여서낭은 바위서낭의 형태가 많고, 남서낭은 당집이 많다.

서낭당에는 쇠나 흙으로 조그맣게 말 모양을 빚어 놓은 경우도 있다. 서낭의 신격은 말을 탄 할아버지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고, 특히 삼척의 일부지역에서는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는 경우도 있으며, 영월과 정선 등지의 단종서낭과 강릉의 범일국사와 같이 인물이 서낭으로 모셔지기도 한다.

삼척에서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는 경우에서 짐작하겠지만, 강원도 화전민들의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두대간 태백산 권역의 생활사에서 장묘(葬墓)의 풍속으로 호식총(虎食塚)과 호식장(虎食葬)이라고 있는데, 이것은 호랑이와 관련한 민간신앙(산멕이)과 가옥의 호환 방지시설과 함께 호랑이의 서식 생태와 관련된 지역주민의 자연적응 양태가 문화적 양상으로 표현된 것으로 관심을 끈다.

산지 주민이 호랑이에게 피해를 입었을 경우, 유해를 화장하고 그 자리에 돌무덤을 만든 후 시루를 뒤집어 엎어놓고 가락을 꽂은 무덤을 호식총(虎食塚)이라고 부른다. 호식총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김강산, <호식장>, 태백문화원), 그 분포는 전국에 흩어져 있으나 태백산 권역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호식총으로 확인되는 것만 하더라도 태백시에서 50개소, 정선군에서 80개소, 삼척군에서 70개소가 발견됐다. 백봉령-자병산-석병산-닭목재 구간에서도, 자병산 남사면 자락의 임계면 도전리 수병산의 호식터가 보고됐다.

호식총의 형태가 흥미로운데, 왜 돌무지 위에 시루를 엎어놓고 가락을 꽂아두었을까? 가락은 물레의 실꾸리를 감기 위해 물레줄에 의해 빙글빙글 돌아가는 쇠꼬챙이로, 시루에 가락을 꽂는 이유는 가락의 모양이 창처럼 생겨서 귀신을 찔러 제압한다는 의미와 함께 창귀(호랑이에게 물려 죽은 귀신)가 물레의 가락처럼 시루 안 제자리에서 맴돌기만 하고 빠져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뜻이라고 한다. 민간의 민속에서 시루는 귀신을 쫓아내는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졌으며, 귀신이 들어와서 몸이 아프다고 여길 때 시루와 가락으로 제압하는 의식이 있다.

그밖에도 산촌 사람들은 호랑이의 피해를 막기 위해 여러 가지 방책도 마련했다. 가옥에 설치하는 것으로는 호망, 빗장, 참나무장작발 등이 있는데, 호망(虎網)은 호랑이의 침해를 방지하기 위해 굵은 밧줄로 망을 엮어 서까래에서 마당으로 늘어뜨려 그물을 치는 것이고, 빗장은 방문에 두꺼운 나무판자를 끼우는 것이며, 참나무장작발은 참나무 장작을 발처럼 엮어 방문에 드리움으로써 호랑이의 침해를 막는 지혜였다.

그밖에 신앙적이고 심리적인 호환 방지 노력의 일환으로 산멕이라고 있었다. 정해진 날에 산제를 올리며 호환 방지를 기원하는 의례이다. 산멕이의 대상은 산신 혹은 호랑이였으며, 산간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 둘은 구분되지 않았다. 강원도에는 산멕이 신앙이 성황신앙과 함께 널리 퍼져있다.

이렇듯 호식총을 비롯해 가옥의 방호(防虎)시설과, 호랑이와 관련된 서낭당 신앙은 백두대간 일대에 광범위하게 서식했던 호랑이의 생태와 관련한 주민의 적응 양상이 반영된 문화생태적인 현상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산삼 세금 폐해 커 계 조직해 해결

이제 석병산 일대 산지 주민의 생활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석병산(1,055m)은 백두대간의 태백산을 넘어 동해안 방향으로 두타산과 대관령 사이에 있으며, 강원도 정선군과 강릉시 옥계면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석병산은 비경의 천연동굴과 석회암이 용해되어 형성되는 카르스트지형을 이루고 있으며 일월문, 비선굴, 가셋골굴, 영밑굴 등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러있어 비경을 자아낸다.

석병산 동사면에는 동쪽으로 흐르는 하천을 따라 드문드문 취락이 형성돼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옥계면 산계리와 북동리에 해당한다. 산계리는 골이 많고 깊어 물이 깨끗해 산자수명한 곳이라 옛부터 시인묵객이 많이 찾아서 반암팔경(泮岩八景)과 산계팔경(山溪八景)이 생겼다.

가새골, 검단이, 곰밭골, 반바우, 곱실, 쇠바우, 서낭댕이, 절골, 영밑, 원뜨루, 조월뜰, 황지미를 합하여 이 마을에 산계사(사찰)가 있어 산계라 했다. 산계리의 입지는 옥계면 소재지에서 서쪽으로 뚫린 큰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 제일 뒤에 석병산이 있고, 동쪽 낙맥으로 자병산(紫屛山·873m)이 있으며, 그 사이에 조그마한 남산(南山 혹은 鳳璋山)이 있다. 1970년대 한라시멘트 공장이 들어서서 여러 마을들이 없어지고 다른 곳으로 이주했다.

산계리 입구에는 강릉 산계리 금옥계 방역사적비(江陵山溪里金玉契防役事蹟碑))와 종선비(種善碑)라는 유적이 있다. 조선시대의 산계리는 옥계면의 5개 마을에서 가장 인구가 많았으며, 농업과 산채를 생업으로 했다고 한다. 18세기에 들어서 조세와 삼세(蔘稅)의 부담에 겹쳐서 흉년이 들어 폐동의 위험에 처하자 자구책 차원으로 금옥계를 만들어 일정한 자본금을 모아 공전(公田)을 확보하고, 그 이익금으로 조세와 삼세를 해결했다.

금옥계 방역사적비는 이러한 업적을 기리고 후손에게 모범을 보이고자 1796년(정조 20)에 건립했는데, 1828년(순조28)에 비석이 마모되자 새로이 비석(종선비)을 마련하고 비각(종선각)을 아울러 건립했다.

조선조의 삼세 폐해는 극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공삼(貢蔘)으로서 호삼(戶蔘)이라 하여 평상적으로 부과하는 것, 세삼(稅蔘) 또는 상평삼(常平蔘)이라 칭해 삼군(蔘軍)을 입산시켜 채취하게 한 것, 무삼(貿蔘)이라 하여 종친부 등에 상납하는 것, 단삼(單蔘)이라 하여 쓰시마에 급여용으로 쓴 것, 신삼(信蔘)이라 하여 일본 도쿠가와((德川) 정부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필요한 것 등등 실로 각종 명목으로 삼세를 긁어내었다. 이 과중한 부담으로 인한 폐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으며, 지역민 중 유산(流散)하는 자가 속출했다.

옥계면을 지나 석병산 깊은 가슴 속으로 들어서다 보면 산계리의 옥계동굴과 자연마을의 삼거리 길목에 성황댕이 마을이라고 있다. 마을 이름은 이 마을에 현존하고 있는 성황당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성황당은 당집에 돌담을 두른 모양으로, 마을 한 가운데에 자리 잡고 석병산을 등지고 배치돼 있다.

글=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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