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식생

천연기념물급 노간주나무가 자란다
석회암지대의 식물특성 뚜렷 …한계령풀, 노랑무늬붓꽃 새로 발견

백두대간 백복령~삽당령 구간에는 우리나라의 석회암 산지 가운데 매스컴을 가장 많이 타는 자병산(873m)이 포함되어 있다. 90년대 초반부터 백두대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대간의 생태계 보전운동도 시작됐다 할 수 있겠는데, 자병산은 그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석회석 채광을 위해 백두대간 마루금까지 완전히 파들어온 현실에 대해 산악인들과 생태보전 운동가들은 한 목소리를 냈다. 자병산 자체는 이제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린 채 일대에 대한 훼손지 복구 논의가 일고 있다.

벌깨풀, 자병취 등 호석회암 식물 다수 분포

당시 등산잡지 기자 생활을 하던 필자는 백두대간의 물리적인 훼손뿐만 아니라 이에 따라 훼손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자병산 일대의 식물 생태계를 취재해 기사를 쓴 적이 있다. 5월 초순경 일대를 돌아보았는데, 여러 곳의 돌리네 습지에서 만개하여 노란 꽃밭을 만들었던 동의나물이 생생하게 기억된다. 또한, 한 뼘 남짓만 남아 풍전등화 같은 운명에 놓여 있던 자병산 정상과 그 사면에서 보았던 희귀식물 만리화와 백리향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자병산은 백봉령~삽당령 구간의 백복령쪽 초입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백두대간은 북서쪽으로 뻗어 올라가며, 산계령(생계령), 고병이재를 거쳐 석병산(1,055m)을 솟구친 후 두리봉(1,033m)을 거쳐 삽당령에 이른다. 이 구간의 최고봉인 석병산 일대도 자병산 못지않게 석회암이 발달한 지역이다.

정상 일대에는 석병산(石屛山)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단번에 짐작할 수 있는 거대한 석회암벽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데, 말 그대로 돌로 병풍을 두른 듯하다. 북쪽으로는 아찔한 벼랑을 이루고 있고, 동쪽 일대도 급경사 벼랑을 형성하고 있는데, 동쪽과 북쪽은 강릉시 옥계면, 서쪽과 남쪽은 정선군 임계면에 속한다.

산 동쪽으로는 절골과 상황지미골 등 두 개의 큰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상황지미골은 허공에서 떨어지는 폭포수가 장관을 이루는 쉰길폭포를 품고 있는 협곡으로서, 곳곳에 석회암반으로 이루어진 담과 소가 발달해 있다. 골짜기가 깊고 험해서 쉰길폭포를 지나 정상까지 올라가는 데는 4시간 정도 잡아야 한다. 절골에는 예전에는 관광지로 이름이 높았으나 지금은 폐쇄된 석화동굴이 자리 잡고 있고, 이곳을 통해 오르면 백두대간의 고병이재에 올라서게 된다.

겉으로 보아서는 석회암벽이 드러난 석병산 정상 일대와 석회암반으로 이루어진 골짜기만이 석회암의 성질을 가진 듯해 보이지만, 백두대간 석병산 구간 전체가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지역이다. 대간의 남쪽과 서쪽, 즉 내륙 쪽을 이루는 곳이 임계면이고, 이 임계면이 바로 그 유명한 임계카르스트 지형이라는 말이 생겨난 곳이다. 곳곳에 크고 작은 돌리네가 형성되어 석회암 지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드러낸다.

이 일대는 지형적으로 뿐만 아니라 식물학적으로 보면 석회암 지대의 특성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곳에 터를 잡고 사는 식물종들 가운데 석회암 지대가 아니면 자라지 못하는 식물이 많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이번 취재에서 확인한 것만 해도 가는대나물, 당조팝나무, 산조팝나무, 백선, 소영도리나무, 회양목, 민대극, 분꽃나무, 털댕강나무, 벌깨풀, 백리향, 돌마타리, 뻐꾹채, 자병취, 바위솜나물, 방울비짜루 등의 호석회암 식물을 꼽을 수 있다.

민대극은 붉은대극이라고도 부르는 식물로서 절골과 상황지미골 초입 일대에 매우 큰 군락을 이루어 자라고 있다. 백두대간 덕항산 자락의 석회암 지대에서 이 식물의 대군락을 만났던 것을 기억하면, 이 식물 분포 역시 석회암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정해 볼 수 있다.

석회암반이 드러난 계곡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산조팝나무와 당조팝나무 역시 석회암 토양을 좋아하는 식물이다. 두 식물 모두 산자락에서뿐만 아니라 정상부 능선의 석회암벽 지대에서도 나타남으로써 고도보다는 토양 성분이 이 식물의 분포를 결정하는 요인임을 알 수 있다. 꽃이 피면 화장분 냄새가 나는 분꽃나무 역시 이러한 생태적 습성을 보여준다.

습기 많은 돌리네에 희귀식물 군락 형성
벌깨풀은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자병산, 석병산, 덕항산 등 석회암벽이 발달한 백두대간 고지대에서만 분포가 확인된 희귀식물이다. 석병산에서는 이번에 처음으로 분포가 확인된 것으로서, ‘석회암 지대는 북방계 고산식물들의 피난처가 된다’는 필자의 생각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중요한 증거를 확보한 셈이다.

자병취는 전남대 임형탁 교수에 의해 최근에 자병산에서 발견되어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기록된 여러해살이풀로서 석병산, 덕항산, 석개재 등 석회암 지대에서만 나타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석병산 일대의 능선에는 곳곳에 돌리네가 형성되어 있다. 이곳 주민들이 쇠곳이라고 부르는 이러한 지형은 백두대간 능선 또는 능선 가까운 사면에 움푹 꺼진 습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번 취재에서 둘러본 고병이재에서 석병산 정상에 이르는 백두대간 능선에서도 3곳 정도의 돌리네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일대에서는 어김없이 습지를 좋아하는 동의나물, 피나물, 홀아비바람꽃 등의 봄꽃들을 만날 수 있었다.

백두대간 능선에는 신갈나무가 가장 많이 자라고 있다. 이곳 능선의 우점종이 신갈나무인 것인데, 7부 능선 정도까지 세력을 확장하여 숲을 이루고 있다. 신갈나무와 함께 간혹 피나무가 군락을 이루어 자라는 곳이 있고, 당단풍나무, 함박꽃나무, 소나무, 물박달나무, 물푸레나무, 산돌배, 층층나무 등이 섞여 자라고 있다. 경사가 완만한 남쪽 임계쪽에서부터 시작된 일본이깔나무 조림지가 능선까지 올라온 곳도 있다. 숲의 중간층을 이루는 떨기나무로는 생강나무, 줄딸기, 조록싸리, 철쭉나무, 진달래, 산앵도나무, 고추나무, 미역줄나무, 짝자래나무, 노린재나무, 개옻나무 등을 꼽을 수 있다.

신갈나무숲 아래에는 많은 곳에서 조릿대가 빽빽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초본식생의 발달을 방해하고 있다. 하지만, 조릿대가 없는 능선 지역에서는 어김없이 여러 종류의 초본이 자라고 있다. 가장 풍부한 초본식생을 자랑하는 고병이재 일대에서는 꿩의바람꽃, 홀아비바람꽃, 회리바람꽃, 요강나물, 투구꽃, 현호색, 노랑제비꽃, 참나물, 벌깨덩굴, 당개지치, 멸가치, 얼레지, 퉁둥굴레, 풀솜대, 말나리, 박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밖에도 석병산 구간의 백두대간 능선에는 참개별꽃, 홀아비꽃대, 동의나물, 병조희풀, 노란장대, 금강제비꽃, 광릉갈퀴, 터리풀, 붉은참반디, 참당귀, 당개지치, 족도리풀, 참배암차즈기, 수리취, 서덜취, 사창분취, 대사초, 각시붓꽃, 처녀치마 등이 자라고 있다.

능선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희귀식물로서 환경부가 법정보호종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도 있다. 솔나리, 노랑무늬붓꽃, 한계령풀 등 3종이 그것인데, 이들은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멸종위기식물 2급으로 지정되어 있다.

노랑무늬붓꽃은 화피에 노란색 무늬가 있어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진 식물로서, 백두대간 능선 4곳에서 무리 지어 자라는 모습이 관찰됐다. 능선에는 각시붓꽃도 대군락을 이루며 여러 곳에 피어 있었지만, 두 종이 같은 장소에서는 자라지 않는다는 것이 관찰되어 흥미로웠다. 노랑무늬붓꽃은 하나의 줄기에서 꽃이 2개씩 피는 습성이 있는데, 우리나라의 붓꽃 종류들 가운데는 이 종과 노랑붓꽃만이 그런 특징을 보인다. 전라도 일부 지역에만 자라는 노랑붓꽃 역시 법정보호종으로 지정되어 있는 희귀식물이다.

솔나리는 여름에 꽃을 피우는 백합과 식물로서, 솔잎처럼 가느다란 잎을 가진 나리 종류이므로 어렸을 때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삽당령 구간 가운데 바위가 발달한 능선에서 발견됐다. 아름다운 꽃이 사람들 눈에 띄기 쉬운 법이라 불법채취될 위험이 있고, 등산객에게 밟혀서 생장을 방해받을 수 있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정상 석회암벽에 가는대나물, 백리향, 만리화 분포

4월 말에 노란 꽃을 피우는 한계령풀은 백두대간 능선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서 큰 무리가 발견됐다. 자병산 부근에도 자생지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여러해살이풀이지만, 북방계 식물로서 남한에서는 극소수의 자생지만이 알려져 있을 정도로 희귀하다. 세계적으로도 러시아와 중국의 일부 지역에서만 불연속적으로 분포하는 희귀종이다. 일찍 꽃을 피운 후 6월이 되면 열매를 모두 익히고, 줄기와 잎 등 식물체 지상부가 완전히 사라져버려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특이한 생태적 특성을 가진 식물이기도 하다.

정상 일대에는 개박달나무, 털진달래, 털댕강나무, 만리화, 돌갈매나무, 회양목, 정향나무, 민둥인가목, 산조팝나무, 백리향 등 키 작은 나무들이 석회암벽에 붙어서 자라고 있다. 이들 가운데 많은 나무들이 석회암 지대가 아니면 볼 수 없는 것으로서,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석병산 식물상의 특성을 잘 드러내준다.

초본으로는 자병취, 돌마타리, 각시붓꽃, 시호, 가는대나물, 솔체꽃, 바위솜나물, 백작약, 벌깨풀, 참배암차즈기 등이 자라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희귀식물 범주에 넣을 수 있는 것들이어서 정상부 식생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한편, 석병산 일대의 계곡에는 굴참나무나 까치박달이 우점종으로서 숲을 형성하고 있다. 여기에 가래나무, 서어나무, 졸참나무, 산뽕나무, 복자기, 당단풍나무, 고로쇠나무, 산벚나무, 말채나무, 들메나무, 쪽동백나무 등이 섞여 자라고 있다.

상황지미골의 쉰길폭포 일대의 숲에는 큰 까치박달이 많이 자라고 있어 이채롭다. 떨기나무로는 생강나무, 으름덩굴, 진달래, 철쭉나무, 산조팝나무, 당조팝나무, 산초나무, 화살나무, 고추나무, 소영도리나무 등이 관찰된다. 숲 바닥의 풀 종류로는 홀아비꽃대, 덩굴개별꽃, 큰꽃으아리, 노란장대, 미나리냉이, 큰앵초, 미치광이풀, 백선, 민대극, 개감수, 쥐오줌풀, 단풍취, 윤판나물, 용둥굴레, 개불알꽃 등이 있다.

높이 15m, 흉고직경 60cm의 노간주나무 자라

이번 석병산 구간의 취재에서 가장 큰 수확이라면 두메닥나무 군락을 발견한 것이다. 전국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몇몇 높은 산에서만 발견되는 매우 희귀한 떨기나무로서, 키가 30~40cm밖에 되지 않는다. 석병산의 두메닥나무 군락은 고도 1,000m쯤 되는 지역에서 발견됐는데, 꽤 넓은 면적에서 자라고 있었으며 한창 꽃을 피우고 있었다. 이 자생지는 아직까지 학계에 보고되지 않은 곳임은 물론이다. 일대에는 백작약이 군락에 가까울 정도로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는 모습도 관찰됐다.

또한, 이번 취재에서는 천연기념물급 노간주나무가 자생하고 있는 것도 발견됐다. 높이 15m, 흉고직경 60cm에 이르는 커다란 노거수 10여 그루가 석병산 가지능선에 자라고 있었다. 측백나무과에 속하는 이 나무는 석회암 지대를 좋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높이는 보통 2~3m로서 크게 자란 것이라 하더라도 높이 8m, 흉고직경 20cm쯤이 고작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곳에 자라는 개체들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2002년 환경부의 전국자연환경조사를 통해 조사된 석병산 일대의 식물은 89과 291속에 속하는 482종류이다. 서울대 박종욱 교수팀에 의해 이루어진 이 조사는 석병산을 중심으로 일대의 만덕봉(1,035m), 칠성대(954m), 망덕봉(781m)을 포함해 이루어졌으며, 구상난풀, 나도수정초, 큰제비고깔, 태백기린초, 산새콩, 회목나무, 만리화, 자주쓴풀, 사창분취 등의 희귀식물이 기록됐다.

하지만, 이 조사에서는 가는대나물, 두메닥나무, 벌깨풀, 백리향, 바위솜나물, 자병취 등 석회암 지대 식물상의 특징을 드러내는 몇몇 식물들과 환경부 법정보호종인 노랑무늬붓꽃, 한계령풀, 솔나리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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