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문헌고찰

복을 비는[希福] 고개가 복이 많은[百福] 고개로
백복령·삽당령·석병산·능경봉·선자령의 지명 고찰

산경표에 의하면, 닭목재[鷄項嶺]에서 대관령에 이르는 능경봉 구간과 전 구간인 백봉령(百福嶺)에서 삽당령(揷當嶺)에 이르는 석병산 구간의 대간 주능선 상에는 백봉령과 삽당령 이외에는 다른 산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백두대간의 큰 산줄기를 지도상에 분명하게 표시해 놓은 고산자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는 이 구간에 백복령, 삽운령(揷雲嶺), 삽현(鈒峴)을 표기하고, 이 일대의 주요 산 이름으로서 삽운령 북동쪽 방면으로 뻗은 가지 산줄기 상에 담정산(淡定山), 삽현 북서쪽 방면으로 뻗은 가지 산줄기 상에 소은백이산(所隱伯伊山)을 표기하고 있으나, 오늘날 이 일대에 자리하고 있는 석병산, 두리봉, 석두봉, 화란봉, 닭목재, 고루포기산, 능경봉 같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이 구간의 산봉 이름과 고개 이름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와 고지도 상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가장 불분명한 곳 중 하나다.

때문에 이 일대의 산봉 고개 이름 등은 잘못 불리기도 하고, 땅이름 표기와 위치 따위가 잘못 인식되고 있는 것들도 꽤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땅이름들은 본래의 땅이름 의미와 유래에서 점점 거리가 멀어지면서 그 왜곡성이 심화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산봉 고개 이름이 바로 전 구간의 석병산, 백봉령, 삽당령과 이번 구간의 주산인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이다.

▲ 석병산. 역대 지리지에 '기암괴석의 바위산이 병풍을 두른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기록을 지닌 담정산이 바로 석병산일 것으로 추정된다.

백봉령의 땅이름 표기와 유래

석병산 남동쪽에 자리한 ‘백복령’은 현금에 이르러 대체로 ‘白茯嶺’이라 쓰고, 그 유래에 대해서는 속설에 의하면, 예부터 이곳에서 한약재로 쓰이는 백복(白茯)이 많이 나서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그러나 한약재로 쓰이는 ‘복령(茯笭)’은 한 글자로 ‘복(茯)’이라고만 지칭한 예가 없으며, 또한 그 빛깔에 따라 ‘백복령(白茯岺)’, ‘적복령(赤茯?)’이라고는 칭하여도 이를 ‘백복’, ‘적복’이라 지칭하지는 않았다.
이는 1915년 전후에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이 고개 이름을 일제가 ‘白茯嶺’이라 잘못 표기한 데에서 유래된 왜곡된 표기로, 곧 한약재 ‘백복령’과 고개 이름 ‘백복령’의 음의 동일성에서 호사가들이 착각하고 오해한 땅이름일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강원도에 속한 여러 고을의 토산물로서 거의 모두 복령(茯笭)을 언급하고 있음을 볼 때 백복령이란 토산물이 단지 이곳 석병산 구간의 백복령에만 많이 나는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백복령’이란 본래의 고개 이름은 동국여지희복승람과 동국여지지 삼척조에 의하면, ‘희복현(希福峴)’ 또는 ‘희복령(希福嶺)’이었다. 이는 글자 그대로 새긴다면 ‘복을 바라는 고개’, ‘복을 희망하는 고개’ 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아마도 이 고개 일원에 부근 지역 사람들이 복을 빌던 산신당 같은 당집이나, 신수(神樹)로 여기는 당목 따위가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뒤에 ‘희복현(희복재)’은 발음하기가 좀 불편하여 ‘희’ 자를 희다는 ‘白’ 의 훈(訓)을 빌어 ‘백복령(白福嶺)’ 이라 칭하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뒤에 또 ‘白福’ 이 의미상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겨져 다시 음은 그대로 두고 복이 많다는 의미로서 ‘百福嶺’이라 개칭된 것으로 추측된다. 곧 조선 전기까지의 기록에는 ‘希福峴’이라 일컬은 것으로 보이나, 조선 후기 유형원의 동국여지지 삼척조에 의하면, 본명으로서 ‘白福嶺’, 그 일명으로서 ‘希福嶺’이라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후 조선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 삼척조에 의하면, 희복현의 일명으로서 ‘百福嶺’을 언급하고 있고, 또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조에도 ‘百福嶺’ 이라 표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천 과정에 의하면, 백복령은 ‘百福嶺’이라 표기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또는 19세기 후엽의 대동여지도에서도 ‘白福嶺’ 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처럼 원 이름을 미루어 살펴볼 수 있는 ‘白福嶺’으로 표기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일 것이다.

백복령은 또 택리지 팔도총론 강원도조에 의하면, 이를 소리 나는대로 표기하여 ‘白鳳嶺(백봉령)’으로 표기하기도 하고, 또 해동지도에 의하면, ‘百復嶺’, ‘百腹嶺’으로 달리 표기한 예도 살필 수 있다.

한약재 백복령(白茯?)과 연관 시킨 이름은 전혀 관련이 없는 잘못된 이름 유래로 보이며, 이는 1915년도 전후 시기의 일제시대 지도에 ‘福’ 자를 ‘복령 茯’ 자로 잘못 표기한 데에서 유래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오늘날 최신교학세계지도집이나 한국지명총람 등에서 대체로 백복령을 ‘白茯嶺’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의 왜곡된 땅이름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1963에 국립건설연구소에서 편집 제작하여 초판한 오만분의일지형도에는 또 백복령을 ‘百伏嶺’이라 표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아마 이를 참조하여 ‘白伏嶺’을 백복령의 공식적인 한자어 표기로 보기도 하지만(월간山 2006년 5월호), 이 또한 백복령의 본래 의미에서 더 많이 벗어난 것이다. 오늘날 백두대간과 관련한 책자에서 이 고개 이름을 더러 소리 나는 대로 적어 ‘백봉령’이라고도 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다.


삽당령의 옛 이름은 삽운령

백복령에서 서북쪽 방면으로 올라가는 백두대간 상에는 강릉시 옥계면 산계리에서 정선군 임계면 직원리로 넘어가는 고개인 생계령(生溪嶺)이 있다. 생례령은 동쪽 산계리에서, 또는 산계리쪽으로 넘나드는 고개라 하여 ‘산계령’이라 일컫던 것이 전음(轉音)되어 ‘생계령’이 된 것으로 보인다. 생계령은 또 ‘쌍계령’이라고도 일컫는데, 이는 아마도 산계령이 경음화한 것으로 보인다.

고산자의 대동여지도에는 강릉시 서남쪽 백두대간 상에 ‘삽현(鈒峴)’과 ‘삽운령(揷雲嶺)’이란 두 고개를 표기하고 있는데, 삽운령을 삽현 남동쪽에 있는 것으로 표기한 것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삽당령 고갯마루. 현재 이름의 뜻은 삼지창처럼 생겼다는 것인데, 어디에서 보아도 그런 형상을 찾아볼 수 없다.

삽당령은 석병산 서쪽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고개로,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와 송현리·고단리 사이에 위치한 고개다. ‘揷當嶺’이란 표기는 산경표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조에 보인다. 이 이름은 ‘揷雲嶺’이란 표기와 유사해 혹시 삽운령에서 유래된 것이 아닐까 추측되기도 한다.

고산자의 대동지지 강릉 산천조에 의하면, 삽운령의 본명을 ‘목계령(木溪嶺)’으로도 언급하고 있다. 또 대동여지도에도 강릉시 목계리 방면에서 남쪽으로 넘어가는 고개로 표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삽운령은 분명 삽당령으로 보아야 하나, 문제는 이 삽운령 북서쪽 백두대간 상에 삽현을 표기하고 있어서 혼란이 야기된다. 이는 아마도 고산자가 대동여지도를 제작할 때 고단리가 목계리 북쪽에 위치한 것으로 착오를 일으켜 삽현과 삽운령의 위치를 바꾸어 표기한 것으로 추측된다.

대동지지 강릉 산천조에 의하면, 목계령 일명 삽운령은 강릉부 남쪽 50리 목계리 부근에, 삽현은 강릉부 남쪽 60리 고단리 부근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현재 강릉시 서쪽 35번 국도 상에는 북쪽에서 남쪽 정선군 임계 방면으로 가면서 목계리→송현리→고단리→임계 순으로 위치하고 있으므로, 강릉 부근의 백두대간 상에는 삽현 보다는 삽운령이 더 위쪽인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표기해야 맞다. 이에 의하면 ‘揷當嶺’ 은 ‘揷雲嶺’에서 유래된 표기로서, 삽당령의 옛 고개 이름은 ‘삽운령’ 일명 ‘목계령’ 이라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서는 삽당령을 ‘揷唐嶺’으로, 생계령을 ‘雙溪嶺’으로 왜곡 표기하여 그것이 의도적이던 비의도적이던 본래의 땅이름에서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하고 있다. 1963년 국립건설연구소가 제작한 오만분의일 지형도에서도 이 표기를 그대로 답습한 이후 오늘날까지도 대체로 ‘揷唐嶺’이란 표기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은 크게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속설에 더러 이 고개 모습이 삼지창처럼 세 가닥으로 되어 있어서, 삽당령이라 불리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기도 하나, 창과 관련한 고개 이름은 오히려 창 삽(鈒) 자를 쓰고 있는, 생계령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삽현(鈒峴)’이 더 근접하지 않을까 한다.

강릉시 왕산면 목계리 방면에서 삽당령으로 올라가 보면 좀 험준하기는 하지만 세 갈래 삼지창 같은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특히 남쪽 송현리·고단리 방면으로 고개를 넘어 내려가는 길은 매우 완만하여 그러한 모습은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다.

삽당령이란 이름의 의미를 우리말 관점에서 풀어보면 이 고개의 위치가 강릉과 임계 사이, 또는 동쪽 석병산과 서쪽 대화실산 사이에 있다는 의미의 ‘사이’의 옛말 ‘샅’과 산신당과 같은 당집을 뜻하는 ‘당’이 합해져 ‘샅(사이)’ 에 당집이 있는 고개’ 라는 뜻으로 ‘샅당령’이라 일컬은 것이 전음되어 ‘삽당령’이 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이 고개의 옛 이름으로 보이는 ‘삽운령(揷雲嶺)’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새기면 ‘구름 속에 꽃혀 있는 고개’, 곧 이 고개가 동해 주변 백두대간 상에 위치하여 자주 구름과 안개 속에 솟아 있다고 하여 그러한 땅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사굴산문 굴산사와 범일국사

석병산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삽운령 북동쪽 줄기 상에 자리하고 있는 큰 산으로서 ‘담정산(淡定山)’이라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담정산으로 불리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담정산이란 이름은 동국여지승람·대동지지등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도 일찍부터 드러나고 있는 이름이다.

담정산이란 이름은 주봉(상봉)이 자리한 석병산이 기암괴석의 바위산이 병풍을 두른 듯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고 하여 20세기 무렵부터 석병산으로 불리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실전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일대의 주산 이름이 담정산이었다는 근거는 아직도 남아 있다. 석병산 북쪽 줄기 상의 만덕봉 북쪽 골짜기를 지금까지도 담정계곡, 곧 담정골이라고도 하고, 일명 단경골[壇京谷·檀京洞]이라고도 부른다. 담정계곡은 그 맑은 물줄기가 2.5km나 이어지면서 비경을 이루고 있는 곳으로, 현재 강릉시 강동면 언별리 산 253번지에는 단경골 휴양지구로서 담정관광농원이 있다.

단경골[壇京洞]이란 이름은 속전(俗傳)에 의하면, 고려 멸망 후 고려조의 유신들이 우왕(禑王)의 사패(祠牌·사당의 신주)를 모시고 이곳으로 피신하여 석병산에 사패를 안치한 후 임금이 계신 곳이라는 의미로 이곳 북쪽 골짜기의 동명(洞名)을 ‘壇京洞’으로 개명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어떤이들은 담정계곡 서쪽에 위치한 칠성산의 옛 이름이 담정산이었던 것으로 오해하기도 하나, 담정계곡 상류 쪽에 위치한 큰 산봉은 만덕봉이고, 이의 주산은 석병산이다. 강릉 일대 대관령 동쪽 성산면·왕산면 경계 지역에는 제왕산(帝王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는데, 고려 말에 우왕이 이곳에 와서 성을 쌓고 피난했던 곳이라 전하는 제왕산성이 남아 있다. 이에 의하면, 고려 멸망 후 일부 충신들이 우왕과 인연이 있는 이곳 강릉의 깊은 산골 담정산 단경골에 들어와 은거했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

석병산의 큰 산줄기가 북으로 뻗어가면서 만덕봉에서 북동쪽 망기봉 방면으로 뻗어가는 산줄기와 갈라지면서 계속 북쪽으로 뻗어가 형성한 칠성산 북쪽 기슭,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 일대는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의 하나였던 사굴산문(??山門)의 본산 굴산사(?山寺)가 자리했던 곳이다.

굴산사는 신라 문성왕 9년(847)에 사굴산문을 개산한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가 창건한 대가람으로, 당시 사찰 당우의 반경이 300m에 이르렀으며, 수도 승려가 200여 명에 달하고, 쌀 씻은 물이 동해까지 흘러갔다고 한다.

현재 폐사지로 남아 있는 이곳 학산 마을 굴산사터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일컬어지는, 보물 제86호로 지정된 두 개의 당간지주가 넓은 벌판에 우뚝 서 있고, 마을 뒷동산 기슭에는 보물 제85호로 지정된, 범일국사의 사리부도라 전하는 8각원당형의 굴산사지 부도가 남아 있다. 당간지주가 서 있는 굴산사지 벌판 남쪽 방면을 바라보면 석병산 줄기가 뻗어온 칠성산과 망기봉·망덕봉의 웅장한 산세가 마치 병풍을 쳐놓은 듯, 또는 독수리가 날개를 펼친 듯 둘리어 있다. 이곳의 선문 이름 사굴산은 아마도 부처가 설법했던 기사굴산(耆??山)의 약칭으로서 이른 말이라 생각된다.

학산 마을의 범일국사 부도가 있는 곳으로 가다보면 길옆 들판에 돌우물[石泉]이 있고, 부도 뒷동산 산길 옆에는 학바위라 불리는 바위가 있는데, 모두 범일국사의 출생과 관련한 전설적 유적지다. 이에는 다음과 같은 땅이름 유래와 전설이 전한다.

옛날 학산 마을의 한 처녀가 아침에 굴산사 석천에 가서 바가지로 물을 떴는데, 그 물 속에 해가 떠 있었다. 처녀가 그 물을 마신 후 태기가 있어 마침내 옥동자를 낳게 되었다. 처녀의 몸으로 아이를 낳아 아비 없는 자식이라 하여 아이를 강보에 싸서 뒷산 바위 밑에 버렸다. 처녀는 아이가 마음에 걸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이튿날 그곳에 다시 가보니 뜻밖에도 학들이 아이에게 조그맣고 새빨간 구슬 같은 것을 입에 넣어 먹어주며 품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보고 비범한 아이로 여겨졌으며 마을 사람들도 하늘이 점지하신 아이라 하므로 데려다 키웠다. 뒤에 자라서 서울 경주에 가서 불경을 공부하고 득도하여 마침내 국사가 되고, 그 이름이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아이를 버렸던 뒷산 바위는 학들이 아이를 보호해준 바위라 하여 학바위라 불리었으며, 해가 뜬 물을 마시고 태어난 아이가 바로 범일(梵日)이다.

범일국사는 흥덕왕 6년(831)에 당에 유학하여 선사인 염관 제안(鹽官 齊安)의 불법을 전해 받았으며, 일찍이 범일국사가 제안선사를 처음 만났을 때 제안이 범일을 진실로 동방의 보살이라고 칭송한 바 있는 당대의 고승이었다. 문성왕 9년(847)에 귀국한 후 백달산(白達山)에서 계속 정진하며 머물다가 뒤에 이곳 학산 일원에 사굴산문을 개산하고 크게 종풍을 떨쳤다. 국사는 입적 후 후대에 이르기까지 강릉의 수호신으로 섬김을 받고 있으며, 그의 신위를 봉안한 곳이 곧 대관령의 국사성황사(國師城隍祠)다.


고루포기산과 능경봉

▲ 능경봉 정상. 강릉부지에는 소우음산, 일명 늦어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소우음산은 발왕산을 지칭하기도 한다.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 경계지역 백두대간 상에 위치한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은 역대 지리지 등의 고문헌 상에는 한자말 이름이 무엇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 1915년 전후에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 의하면, 우리나라 전국의 산 이름을 거의 모두 한자말 이름으로 표기하고 있는데, 고루포기산에 있어서는 한자말이 아닌 일본어로 표기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고산자는 일찍이 동국여지승람 등의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소은백산(所隱栢山)’ 또는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을 고루포기산으로 본 것으로 보인다. 그의 대동여지도 13쪽에 의하면, 대관령 남서쪽으로 횡계천(橫溪川)을 사이에 두고 소은백이산과 발음봉(鉢音峯·현 발왕산)을 표기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의 지도 상에 수하호 물을 사이에 두고 동북쪽과 서남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는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의 위치와 같은 것으로 보인다.

▲ 고루포기산 정상. 고산자 김정호는 동국여지승람에 있는 소은백이산을 이 산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이 숨어 있는 산'으로 풀이해 선자령 북쪽에 있는 대공산성을 가리킨다는 옛 견해도 있다.
고루포기산은 곧 ‘所隱栢伊山’을 우리말 음과 훈(訓)으로 새겨 읽은 것에서 유래된 것이라 하겠다. 고산자는 이 한자말 이름의 ‘所’ 자의 훈(訓)을 ‘곧(곳)’으로 보고 ‘所隱栢伊山’을 곧은백이산→고른배기산→골패기산→골포기산(고루포기산)’으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곧 우리말의 음과 훈을 빌려 혼용한 표기로 보고 이를 대동여지도에 구체적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라 본다. 그렇다면 고루포기산이란 이름은 고산자와 같은 견해에서 비롯되어 방언 상에서 오늘날 불리고 있는 것과 같이 전음(轉音)되어 정착된 우리말 이름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와 같은 고산자의 견해와 달리 1788년에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가 편찬한 강릉부지(江陵府誌)를 1871년에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가 재정리하여 편찬한 강릉부지에는 소은백이산을 대관령 북쪽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所隱栢山’ 또는 ‘所隱栢伊山’의 본래 의미는 ‘잣[城]이 숨겨져 있는 산’으로, 곧 대관령 북쪽, 선자령(仙子嶺) 북쪽에서 동으로 뻗은 산정에 보현산성 일명 대공산성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 일컫게 된 이름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그러다가 후인들이 또 이 이름을 음과 훈을 혼용하여 달리 부르면서 ‘소은잣산→손잣산→선잘산→선자산’으로 전음되어 불리다가, 영동지역에서 보현사골을 경유하여 선자령을 넘어 영서 지방으로 다니는 사람들이 둥그렇고 원만한 모습의 이 산을 영마루(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선자령’으로 지칭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앞의 강릉부지에서는 또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소우음산(所于音山)’을 대관령 남쪽 기슭에 있는 산으로서, 일명 능정산(凌頂山)으로도 불리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기에 보이는 소우음산, 일명 능정산이 곧 지금의 대관령 남쪽 능경봉을 지칭한 것임은 음의 유사성으로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능경봉은 곧 능정봉(능정산)이 전음된 산봉 이름이라 하겠다.

능경봉은 동해 조망이 좋은 곳으로 새해 일출 산행지로도 좋은 산이다. 능경봉에 해 돋는 광경을 능정출일(能政出日)이라 하여 그 아름다운 경관을 횡계팔경(橫溪八景)의 하나로 일컫기도 한다. 때문에 대관령 이남에서 전망이 좋은 가장 높은 산봉을 이루고 있으므로 ‘높은 산정의 산’, ‘높은 산정의 봉우리’란 의미로 불리던 ‘능정산·능정봉’이 전음되어 ‘능경봉’으로 불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능경봉의 본래 이름은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보이는 ‘所于音山(소우음산)’이었던 것으로 보이나, 고산자의 대동지지 강릉조에 의하면, 이 산의 속명을 ‘발음봉(鉢音峯)’이라 언급하고 있고, 그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지금의 평창군 용평리조트의 주산인 발왕산과 같은 산으로 표기하고 있다. ‘소우음산’은 발음봉(산)→발왕산으로 전음되어 지금의 능경봉과는 다른 이름으로 이미 정착되어 불리고 있다.

그러나 1940년에 편찬된 강원도지(江原道誌) 산천조에 이 산 이름을 ‘소궁음산(所弓音山)’이라 하여 ‘于(우)’ 자를 ‘弓(궁)’ 자로 오기해 놓은 것을 보고 1996년에 강릉문화원에서 발행한 강릉시사(江陵市史) 지명조에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고, 또 어떤 이들은 이에 근거하여 이 산봉을 대관령 혹은 강릉쪽에서 능경봉 정수리를 올려다보면 그 모양새가 팽팽히 당겨서 파르르 떨리는 활시위 같다고 언급하기도 한다. 이러한 땅이름 유래와 의미 따위는 오자(誤字) 지명에 의거한 왜곡된 풀이일 뿐이다. 조선총독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는 또 능정봉의 ‘頂(정)’ 자를 ‘項(항)’ 자로 잘못 표기한 경우도 볼 수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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