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3구간] 소백산 - 르포

피해갈 수 없는 바람이라면 차라리 즐기자
죽령~연화봉~비로봉~국망봉~늦은맥이~고치령

소백산은 바람의 나라다. 그 바람이 전제군주를 닮았다고 말할 것까지는 없다. 하지만 소백산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다음 요소들, 춤을 추는 듯한 주목, 6월에야 피는 철쭉, 여름 운무, 겨울 설화 같은 것들과 바람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소백산의 바람은 단순한 기상현상이 아니다. 설악산의 울산바위나 지리산의 노고단처럼, 일종의 붙박이 상징물이다. 여름철의 남동풍이든 겨울철의 북서풍이든, 일단 그것이 소백산으로 들어서면 절대강자로 바뀐다. 여름 소백산에서 비를 동반한 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누구나 어금니가 부딪치는 경험을 했을 것이다. 잔뜩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등성마루에서 비를 뿌리며 기온을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겨울철은 또 어떤가. 거의 빈도 80%를 보이는 북서풍은 수직으로 소백산릉에 안긴다. 올올이 탄성 좋은 금속 줄 같은 그 바람을 맞아본 사람은 알 것이다. 고통의 임계점을 넘으면 화끈거릴 정도가 된다는 것을.

소백산 북서쪽에 있는 제천과 남동쪽 영주는 겨울철 온도차가 무려 3℃(북서풍 기준)에 가깝다. 소백산이 바람막이 구실을 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주시민들은 난방비 절약분을 소백산에 내놓아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유쾌한 얘기는 아니지만 이왕 바람 얘기가 나온 만큼 안전사고에 대한 이야기를 피해갈 수 없을 것 같다. 2001년의 경우 지리산은 239건의 안전사고 중 사망 2건, 설악산은 82건 중 2건, 소백산은 6건 중 2건이었다. 사고건수 대비 사망률을 백분율로 환산하면 지리산 1%, 설악산 2%, 소백산 33%다. 다른 해를 봐도 사고건수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이지만 사망사고 건수는 비슷하다.

소백산의 경우 사고건수는 산악 국립공원 중 가장 낮다. 산세가 워낙 너그럽고 계곡이 발달하지 않아서 부상 사고도 거의 없다. 그런데도 해마다 사망자가 발생한다. 겨울철 바람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책을 통해 저체온증으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얘기를 보면, 죽음을 맞는 순간에는 거의 무감각 상태가 된다고 한다. 그 다음부터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심장박동수가 급격히 떨어진다는 것이다.

어쨌든 소백산은 바람의 나라다. 어떤 방법으로든 소백산에서는 바람을 피해갈 수 없다. 가장 현명한 선택은 바람과 연인으로 지내는 것밖에 없다. 그 사랑의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겹겹이 껴입고 꽁꽁 여며서 스킨십을 어렵게 하는 것이다.

▲ 제1연화봉을 지나며 바람과 상견례(?)를 나누고 있다.

‘등산은 맹목적이어야 한다’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죽령터널이 뚫리는 바람에 늘 저잣거리처럼 붐비던 죽령 마루는 인기척이 없다. 그나마 주인 잃은 강아지처럼 떨지 않을 수 있는 건 옛 휴게소 건물을 일부분씩 임대해 지역 특산품과 커피를 파는 아주머니들 덕분이다.

소백산 산행은 사실상 천체관측소에서 시작된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제2연화봉 전 송신소 입구까지 1시간 반 정도의 포장길, 이후 천체관측소까지 1시간 정도의 비포장도로를 걷는 일은 사실 좀 지루하다. 그렇다고 투덜댈 일은 아니다. 제2연화봉(1357m)에서부터 북동쪽으로 휘돌면서 소백산 연봉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겨울 산행 전 굳은 몸을 풀기 위한 스트레칭으로 딱 좋은 거리다.

취재팀이 천체관측소에 도착한 시각은 정오 무렵. 첨성대를 흉내 낸 옛 건물 옆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연화봉을 오르기 전 관측소를 기웃거려 본다. 낮 시간에는 ‘별 볼 일 없는 사람들’은 한밤중이다. 오후 시간에 견학이 가능하다는 안내판이 밤낮을 바꿔 사는 사람들의 현재 상태를 준다. 밤마다 별을 보며 사는 그 분들의 눈동자가 늘 궁금했었는데, 오늘도 글렀다.

▲ 6월이면 철쭉꽃 만발할 제1연화봉 오름길.

천체관측소에서 연화봉(1,383m)까지는 5분 남짓. 이곳에서부터 트레일은 북쪽으로 허리를 곧추세우며 제1연화봉을 향한다. 나무계단으로 된 오르막이다. 봄철 철쭉 산행 시즌에 20만~30만 명이 몰리는 소백산의 특성상 불가피한 시설로 보인다. 자연과 인간의 타협이다(산이 동의한 바는 없지만, 인간도 자연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에 입각하면 못 할 말도 아닐 것이다).

듣자 하니, 최근 ‘국립공원 정책포럼’에서 등산을 반자연적?반문명적 행위로 간주하여 등산 자체를 억제하자는 얘기들을 하는 모양이다. 자동차도 안 타고 이슬만 먹고 사는 분들의 얘기 같아서 가타부타 끼어들 생각은 없다. 하지만 이 분들에게 세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먼저, 국회의원회관 같은 데서 얘기만 하지 말고 휴일 날 아무 때고 우이동이나 도봉동으로 한번 나와 보시라. 골프 칠 형편이 못되는, 그렇다고 돈 안 들이고 마땅히 취미생활을 할 게 없는 사람들이 하루 산행을 마치고 소주잔을 기울이며 행복해하는 모습을. 그것이 나와 당신들의 나라 ‘대~한민국’을 살리는 에너지다. 등산이 반자연 행위라면 산지가 70% 이상인 나라에서, 농약을 쏟아 붓지 않고는 기를 수 없는 자연 조건에서 가꾼 잔디밭에서 즐기는 골프는 얼마나 친자연적이라고 믿으시는지?

다음으로, 등산로 훼손은 ‘정상 정복’ 등산 패턴에 기인한다고 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초점이 틀렸다. 이 말은 ‘모든 음식은 또한 독이다’는 진술과 같은 맥락에서 쓰일 말이다. 그 말이 제대로 쓰일 번지수는 에베레스트에 대한 경도처럼 높이에만 집착하는 ‘등정주의’다. 1,000m도 안 되는 동네 뒷산 오르기에 갖다 붙일 말이 아니다.

이는 용어에 대한 약간의 오해 때문인 듯한데, 영미권의 ‘마운틴’과 우리의 ‘산’이라는 말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마운틴은 우리 개념의 산과 대응하는 말이 아니라 산맥에 대응한다. 우리의 대부분 산은 영어의 피크나 돔에 해당한다. 우리는 영어의 피크에 해당하는 지리공간에 대부분 산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산이 많은 나라여서 생긴 자연관의 소산이다. 그래서 우리의 등산 행위는 필연적으로 정상을 밟고 또 밟아 나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걸 두고 ‘정상 정복’ 패턴이라고 말하는 건 좀 민망하다. 차라리, ‘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산 망친다’고 얘기하라. 말인 즉 옳다. 하지만 이런 식의 어법은, 모든 인간 행위는 엄격한 의미에서 자연에 대한 테러 행위라고 얘기하는 것과 같다. 댐을 막고, 지하수를 뽑아 올리고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문제 제기의 초점은 그게 아니다. 문제는 인간중심주의에 있다. 이에 대한 철학적 성찰과 민주적 생태주의에 대한 방법론이 필요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과격한 논의도 수용돼야 한다. 등산=반자연주의로 단순화할 문제가 아니다.

▲ 제1연화봉을 오르기 직전. 바람보다는 지루한 계단이 더 편하다.

끝으로 한 가지 더. “맹목적으로 오르는 등산이 등산로를 훼손한다”고 하는데, 듣기 참 그렇다. 등산에 있어 ‘맹목’이란 본질 아닌가. 그럼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하는가. 물론 도토리 줍고, 산나물 캐고, 고로쇠 물 빼먹는 행위를 합목적적 행위라고 하는 게 아니라는 건 안다. 따라서 당연히 등산은 ‘맹목’이어야 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돌보는 행위가 그런 것처럼.

맹목적으로 오른다는 말은, 무턱대고 등산로 아닌 곳으로 올라 가로 세로로 길을 내고, 봄 산행 때 질척거리는 트레일을 피해 옆으로 다니면서 등산로를 넓히는 행위에 해당하는 말이다. 바로 이런 문제 때문에 인공적인 보강 시설과 트레일 관리가 필요한 것이다.

▲ 따뜻한 음식이라면 무엇이든 OK
국립공원의 정책은 바로 이런 문제들을 최소화시키는 데 맞춰져야 한다. 어떤 방식의 시설물이 산에 가장 부담을 줄이는 길인가에 대한 기술적 연구와, 가장 자연스런 등산 문화에 대한 국민적 공감을 형성하는 일이 포럼의 의제가 돼야 한다. 모든 국민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듯한 태도는 경찰국가에서나 할 일이지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할 일이 아니다.

덧붙여 우리말 ‘등산’은 행위자인 인간이 아닌 대상인 ‘산’을 주체로 하는 말이다. 그 말 속에는 이미 산에 대한 외경이 내포돼 있다. 반대로 ‘등반’이란 말은 ‘오르는 행위’ 자체 즉 인간을 주체로 한 말이다. ‘입산’이라는 말은 다른 차원에서 얘기돼야 할 성질일 것이고.

(독자 여러분. 엉뚱한 얘기가 길어져서 대단히 죄송합니다. ‘등산이 능선종주와 정상등산 위주로 이뤄지고 있어 등산로 훼손이 가중된다’고 하는데, 사실 이 말은 등산 자체를 범죄시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등산의 모든 것이니까요. 만약 그 주장이 산기슭을 산책하듯이 산을 찾자는 것이라면 그것이야말로 등산로가 아니라 산 자체를 훼손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사실 나는 90년대 말에서 2000년대 초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를 마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수없이 거미줄을 걷으며 ‘과연 나는 무슨 권리로 거미 가정을 파괴하는가’ 하는 등의 문제를 놓고 심각히 고민했었다. 아직도 그 문제는 나의 화두 중 하나다.

하지만 나는 한편으로 다른 분들에게도 꼭 해볼 것을, 아니 우리 국민 모두가 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됐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 남의 자식도 사랑할 수 있듯이, 백두대간 종주를 하고 나면 국토관이 바뀐다. 정녕 자연과 지속적이고 민주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연 속에서 배우는 수밖에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산 위에서 골프장을 보면 그곳의 농약이 우리 몸에 쌓이는 경로가 금방 그려진다. 반대로 울창한 숲을 걷다 보면 그 소중함이 가로수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환경담론은 구름을 타는 것이어서도 안 되고, 도덕적 우월감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서도 안 된다. 자칫하면 도덕적 자기기만이나 지적 허영으로 흐르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 갓 내린 눈을 밟으며 국망봉에서 상월봉으로 나아가고 있다.
왼쪽 뺨 때리는 바람은 난폭한 점령군

늦은 봄이면 철쭉이 만발할 산허리는 설핏 눈을 덮고 있다. 발의 촉감이 나쁘지 않다. 약간 미끄러운 눈길에 거의 적응이 돼 가자 제1연화봉(1,394.4m)이다. 비로봉과 국망봉으로 이어지는 장쾌한 능선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구름을 탄 기분이다. 하지만 하염없이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기에는 바람이 너무 맵다. 조금만 멈추어 서 있어도 체온이 떨어지는 게 느껴진다.

제1연화봉을 지나면서부터는 거의 평지에 가까운 길이다. 왼쪽 뺨으로 때리는 바람은 난폭한 점령군 같지만 그래도 싫지 않다. 모자에 발라클라바를 착용하고 후드를 또 써도 덥지 않다. 하지만 살짝 동쪽 기슭으로 트레일이 기울면 기가 막히게 몸이 그것을 알아챈다. 따뜻하다. 바닥은 어김없이 눈이 녹아 있다.

거의 고원을 걷는 듯한 마른 풀밭 길 위로 거침없이 달려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 느낌이 아주 좋다. 천지간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오직 ‘나’ 하나라는 느낌. 우주와 합일이라고 하면 좀 과장일 테고, 어떤 심미적 충일감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철쭉 군락지인 1382m봉을 지나면서부터 참나무 숲길로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다. 크게 솟구치지 않는 1394.4m봉을 지나자 다시 시야가 열린다. 좀 더 나가자 나무마루로 이루어진 트레일이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곧장 가면 정상인 비로봉이고, 왼쪽으로 들면 주목군락 감시초소가 있는 곳이다. 이곳 감시초소는 사실상 대피소처럼 쓰인다. 고맙고 또 고마운 집이다.

감시초소에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비로봉을 오른다. 왼쪽 기슭의 주목들이 누런 풀밭 위에 시린 기운을 드리우고 있다. 이곳의 주목 군락은 천연기념물 제244호로 100여 그루씩 작은 무리를 이루고 있다. 수령 200~700여 년, 3,400여 그루라고 안내판에 적혀 있다. 고지인데다 바람이 워낙 세어서 나이에 비해서 키가 작다. 평균 높이는 7m밖에 되지 않는데도 가슴둘레 높이가 2m 정도인 나무도 있다고 한다. 위로 자라지 못한 대신 옆으로 자란 것이다. 가지들은 하나 같이 바람이 불어가는 방향, 즉 동남쪽으로 치우쳐 있다. 그 모습을 나는 ‘바람의 화석’이라고 불러 본다.

드디어 비로봉(1,439.5m)이다. 사방 어디고 걸릴 것이 없다. 그래서 이름이 비로(毘盧)인 것이다. 비로란 비로자나불의 준말로, 그 어원은 산스크리트어 ‘바리로차나(Vairocana)’다. 우리말로 하면 ‘광명의 부처’라는 말이겠다. 진리의 빛으로 온 세상을 감싸는 부처의 세계를 일컫는 말인데, 이 세상 자체를 부처의 몸으로 여기는 것으로 이해해도 그리 허물이 아닐 것이다.

대간 으뜸줄기를 지리산쪽으로 틀도록 한 산

▲ 대간 마루에 선 고치 산신각. 소백과 태백. 이른바 양백의 산신을 모신 곳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간 점검 차원에서 백두대간 전체에서 차지하는 소백산의 위상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실 산줄기로서 대간을 이루는 모든 산의 지위는 동등하다. 구릉에 가까울지라도 그것이 없으면 ‘대간’의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그렇긴 하지만 위치상 그 의미가 각별한 산을 설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꼭 거명해야 할 산을 개인적으로는 백두산, 매봉산, 소백산, 지리산을 들고 싶다.

그 가운데서도 소백산의 존재 의미를 헤아리기 위해서는 과거로 거슬러 올라야 한다. 이중환(1690-1752)은 자신의 저서 택리지의 복거총론 산수편에서 다음과 같이 우리 땅의 전체 형세를 말한다.

‘(백두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수천 리를 내려가 경상도 태백산까지 한 줄기 마루로 통한다…중략…태백산에서 줄기가 좌우로 갈라져서 왼편 지맥은 동해가를 따라 내려갔고, 오른편 지맥은 소백산에서 남쪽으로 내려갔는데, 태백산쪽으로 내려간 것과 비교할 바가 못 된다.’

위의 언급은 택리지가 편찬될 때까지도 백두대간의 개념이 확립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소백산에서 지리산으로 흐르는 줄기의 우위를 인정하면서도, 동해가를 따라 내려간 줄기도 간과하지 않고 있다. 태백산에서 동해로 흐르는 줄기가 곧 낙동정맥인데(정확히는 매봉산 동쪽의 1145m봉에서 갈라짐), 등줄기의 개념으로 보자면 그것이 더 합당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이중환은 으뜸줄기 하나를 설정하지 못하고 두 줄기를 언급했을 것이다.

하지만 산경표의 편찬 시점에 이르러서는 으뜸 줄기를 설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소백산의 존재감이 그곳으로 대간의 줄기를 설정하게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건 상상에 가까운 생각이고, 그래야만 호서정맥에서 호남정맥에 이르는 정맥들이 대간에 수렴된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에 오늘과 같은 대간이 설정됐을 것이다.

백두대간을 세 부분으로 나누면, 백두산~매봉산, 매봉산~속리산, 속리산~지리산이 될 것이다. 이중 매봉산~속리산의 가운데에 소백산이 있다. 우리 국토의 허리 중에서도 허리가 소백산인 것이다. 지금 우리는 동북방향으로 서서히 동해로 다가서는 소백산의 마루에 서 있다.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걷는 고치령 능선

비로봉에서 국망봉을 지나 상월봉에 이르는 대간의 등성마루는 장쾌함과 부드러운 곡선미에 있어 우리 산 가운데서도 으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이 구간은 봄에서 여름까지 다양한 들꽃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국망봉(1420.8m)에서 이우는 햇살을 바라본다. 춥고 긴 밤이 돋아나기 시작한다. 영주 시내의 불빛들이 주는 따뜻함이 오히려 몸을 더 움츠리게 한다.

밤새 눈이 내렸다. 무릎까지 빠질 정도는 아니지만 세상을 순백으로 바꿔 놓기에는 충분하다. 바쁘게 산을 넘는 구름이 아침 해를 삼켰다가 토해내기를 반복한다. 언뜻 하늘이 열릴 때, 그 빛기둥을 따라 일어서는 산허리의 풍광은 천지창조의 순간을 재현하는 듯하다.

국망봉 앞에 선 우람한 자태의 상월봉(1394m)까지는 1Km 남짓.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고 가는 기분은 칼바람에 대한 보상으로는 과분할 정도다. 상월봉에서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치까지는 실거리 10Km 정도로 4~5시간 소요되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다. 늦은맥이재를 지나 신선봉 갈림길에서부터는 서서히 키를 낮추며 고치를 향한다. 특별한 조망은 없지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걸을 수 있을 정도로 순하다.

고치 고갯마루의 산신각이 반가운 얼굴로 서 있다. 대간 마루에 선 산신각으로는 처음이다. 몇 년 전 불이 나서 새로 세웠다는데, 그 과정에서 영주시 단산면과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꾀나 신경전을 벌였던 모양이다. 함부로 끼어들 얘기는 못되지만, 산을 신으로 아는 이 아름다운 믿음을 더 장려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고치에서 단산면 좌석리까지는 아스팔트 포장이 잘 돼 있다. 에누리 없는 10리 길이다. 부지런히 걸어도 1시간은 잡아야 한다.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소수서원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

이번 산행의 종점인 고치에서 좌석리쪽으로 하산하게 되면 반드시 소수서원을 지나게 된다. 길가에 있기 때문에 일부러 많은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된다.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 있는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 즉 임금이 이름을 지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본디 이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주자학자인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다. 1542년(중종 37) 주세붕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안향의 뜻을 기려 이곳에 서원을 세웠다.

최초에 주세붕이 이곳에 서원을 세웠을 때는 백운동서원이라 불렀다. 이후 퇴계 이황이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1550년(명종 5)에 사액을 받았다. 조선 말 서원이 당쟁과 민폐의 온상이 되자 대원군이 이의 철폐를 단행하여 600여 군데를 없애고 40여 군데를 남겼는데, 그때도 소수서원은 살아남았다.

서원을 둘러 산 명품 소나무숲만으로도 일부러 찾을 만한 곳이다.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