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사(浮石寺)는 신라 문무왕 16년(서기 676년)에 의상조사가 창건한 화엄종찰이며, 특히 대웅전격인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최고의 목조건물로 유명하다. 무량수전 안에는 무량수불(無量壽佛)인 아미타여래를 봉안했는데, 다른 불전과는 달리 불전을 측면에 모시고 있다. 부석사가 유명하게 된 사연의 허실[백두대간 대장정 제14구간] 선달산 풍수
안양루가 조금만 더 낮았더라면…
문은 기(氣)의 출입구…부석사 무량수전의 풍수지리▲ 부석사 전경과 백두대간의 연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은 눈맛의 즐거움을 넘어 가슴까지 후련할 정도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의상대사가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그를 흠모한 선묘(善妙)라는 여인이 용으로 변해 이곳까지 따라와서 줄곧 의상대사를 보호하면서 절을 지을 수 있게 도왔다고 한다. 이곳에 숨어 있던 도적떼를 선묘가 바위로 변해 날려 물리친 후 무량수전 뒤에 내려앉았다고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량수전 뒤에는 ‘부석(浮石)’이라고 새긴 바위가 지금도 남아있다.
남한의 5대 명찰은 충남 서산의 개심사, 전남 강진의 무위사, 전북 부안의 내소사, 경북 청도의 운문사, 경북 영주의 부석사라고 한다. 부석사가 왜 유명한 사찰이 되었는가. 이에 대해 이중환 선생은 그 이유를 택리지 복거총론 산수편에 이렇게 적고 있다.
‘기이한 흔적과 이상한 경치가 있는 것은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에 부석사(浮石寺)가 있는데, 신라 때의 절이다. 불전 뒤에 큰 바위 하나가 옆으로 섰고, 그 위에 큰 돌 하나가 지붕을 덮어 놓은 듯하다. 얼른 보면 위아래가 서로 이어진 것 같지만, 자세히 살피면 두 돌 사이가 서로 눌려져 있지 않다. 약간의 빈틈이 있어 실을 건너 넘기는데 걸림이 없으니 비로소 떠 있는 돌인 줄 알다. 절이 이것으로써 이름을 얻었으나 이 이치는 자못 알 수가 없다’고 했다.▲ 무량수전에 바라본 안양루. 안양루가 안산을 가로막고 있다.
또한 의상대사가 꽂아 놓은 지팡이에서 가지와 잎에 생겼다는 기록이 있고, 이 나무는 비선화수라고 하는데 지금까지도 살아 있다. 그런데 부석(浮石)이란 말은 비과학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지금은 한낱 과장된 이야기에 불과하다며 문화에 대한 관심과 자연경관에 대한 완상(玩賞)에만 관심을 둘 뿐이다.
무량수전은 우리나라 목조건축물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고, 특히 기둥의 배흘림이 아름다운 곡선은 학창시절에 책으로 배운 지식을 확인하는 정도의 시선을 끌지만, 이것도 잠깐동안 눈여겨볼 뿐이다.
유흥준씨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2)>에서 부석사의 인상을 ‘몇 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이라고 표현했다. 무량수전 앞에 있는 안양루에서 바라보면 백두대간 연봉들이 즐비하게 늘어선 모습은 눈맛의 즐거움을 넘어 가슴까지 후련할 정도다. 이렇게 좋은 곳에 시가 빠질 수 없지 않는가.
김삿갓과 두보의 자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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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량수전에 바라본 안양루. 안양루가 안산을 가로막고 있다. |
平生未暇踏名區(평생미가답명구)
白首今登安養樓(백수금등안양루)
江山似畵東南列(강산사화동남열)
天地如萍日夜浮(천지여평일야부)
風塵萬事悤悤馬(풍진만사총총마)
宇宙一身泛泛鳧(우주일신범범부)
百年幾得看勝景(백년기득간승경)
歲月無情老丈夫(세월무정노장부)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다 된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있고
천지는 부평같이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 타고 달려온 듯
우주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관 보겠는가
세월은 무정하여 나는 벌써 늙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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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양루에 있는 김삿갓의 부석사 시(詩). |
昔聞洞庭水(석문동정수)
今上岳陽樓(금상악양루)
吳楚東南坼(오초동남탁)
乾坤日夜浮(건곤일야부)
親朋無一字(친붕무일자)
老去有孤舟(노거유고주)
戎馬關山北(융마관산북)
憑軒涕泗流(빙헌체사류)
옛날에 동정호를 들었더니
이제야 악양루에 오르는구나.?
오나라와 초나라가 동남쪽에 갈라졌고
하늘과 땅이 밤낮으로 떠 있다.?
가까운 친구의 편지도 없으니
늙어감에 외로운 배 뿐이로다.?
싸움터의 말이 관산 북쪽에 있으니(고향은 전쟁 중이므로 갈 수 없다는 의미)
난간에 의지해 눈물콧물 흘리노라.
두 시인은 비록 장소는 다르지만 천하 절경에서 고향으로 갈 수 없는 자신의 불우한 신세를 한탄하고 있어서 내용이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김삿갓은 장괘한 백두대간을 바라보았고, 두보는 드넓은 호수를 바라보고 읊었다.
무량수전에서의 전경 대문은 기(氣)의 출입구
양택 풍수에서는 양택삼요(陽宅三要)라 하여 세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 즉 문(門), 주(主), 조( )라고 하여 대문과 안방과 부엌인데, 이중에서도 대문은 기(氣)의 출입구라는 의미에서 ‘기구(氣口)’라 하며, 납기(納氣)와 출살(出殺)의 작용이 대문을 통해 이루어지므로 주택에서 가장 중요한 곳이 된다. 문루는 근대 건축에서는 거의 보기 드물지만, 절이나 서원 등의 건축에는 문루가 있고, 일부 주택에서도 문루 형식을 만들기 때문에 풍수지리에서 고건축물의 출입문에 대한 길흉을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 1. 앞에 있는 문은 양에 속하고, 뒤에 있는 문은 호(戶)라고 하며 음에 속한다. 이는 천문(天門)과 지호(地戶)의 의미에서 유래한 말이다. 2. 문은 두 개의 문짝을 사용하고, 호는 하나의 문짝을 사용한다. 이는 음양교제(陰陽交濟)의 의미다. 3. 문은 항상 열려 있어야 하고, 호는 항상 닫혀있어야 한다. 이는 양벽음흡(陽闢陰翕)의 의미다. 4. 앞문과 뒷문은 반드시 서로 비례가 맞아야 되는데, 뒤의 호가 앞의 문보다 더 높고 커서는 안 된다. 이는 천존지비(天尊地卑)의 의미다. 5. 한 채의 주택에서 출입문이 너무 많아서는 안 되며, 문이 벽보다 더 높아도 안 되며 더욱이 어지럽게 문을 내면 기가 흩어지므로 삼가야 한다. 6. 문을 열었을 때 정면으로 기둥이 마주하고 있거나, 두 개의 문짝이 가운데 기둥 중심으로 있거나, 집은 큰데 문이 작거나, 또는 집은 작은데 문이 크거나, 또는 문 앞에 곧은 길, 곧은 물, 큰 나무, 큰 바위, 절, 묘지 등이 있어 문을 가로 막거나 마주치는 것이 주택의 앞에 있거나 뒤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꺼린다. 7. 문이 너무 높고 크면 딸이 많다. 앞에 담장 모퉁이가 보이면 여자가 손해를 보고, 문루 정면에 뾰쪽한 물체가 쏘는 모양을 하면 사람을 폭행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폭행당한다. 8. 대문은 마치 사람의 입과 같아서 오장육부를 주관한다. 옛말에 ‘千斤門樓四兩屋(천근문루사양옥·대문은 천 근만큼 중요하고 집은 비중이 적다)’라는 말이 있다. 문루가 너무 좁으면 사람과 재물을 모두 잃고, 누각이 너무 높으면 과부가 되거나 낙태를 한다. 문루 규모가 너무 크면 주로 구설이나 소송이 생기거나 죽는 수도 있다. 문루 아래에 두 개의 출입구를 이용하면 재물이 아무리 많아도 이를 지키기 어렵다(한 쪽으로 다니면 무방하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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