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대장정 제18구간] 석병산 지명

'산'의 뜻인 '닥'이 '닭'으로 옮아가
강릉의 '닭목'도 '깊은 산골'의 뜻

‘가재울 안쪽 노루목 골짜기를 타고 올라가면 꿩말이 있고, 거기서 더 올라가 매봉 줄기의 닭재를 넘어 소내를 따라 한참 내려가면 돝골에 이른다.’

억지로 만든 문장이지만, 이 속에는 무려 7가지나 되는 동물 이름이 나온다. 그런데, 가재가 많아 가재울이고, 노루가 많아 노루목이며, 꿩이 많아 꿩말일까? 매(鷹)처럼 생겨서 매봉이고, 닭 전설이 있어서 닭재이며, 소(牛)와 관련이 있어 소내이고, 돝(돼지)을 많이 길러 돝골일까?

동물 관련 이름이 전국에 많지만

우리 땅 곳곳에는 동물 관련 이름이 무척 많다. 이러한 예는 다른 나라에서는 그 유례가 드물다. 전국에 동물 이름의 음(音)을 가진 땅이름이 너무 많은 것에 주목해 오다가 이에 흥미가 있어 그러한 이름들을 취합해 보았다. 그리고, 그러한 이름들이 붙게 된 이유에 관해 생각을 많이 해 보았다. 그런데, 상당수의 이러한 땅이름들이 그 동물과는 전혀 관계 없음에도 그 이름을 달고 있음을 알게 됐다. 그 몇 가지를 펼쳐 보기로 한다.

①가장자리의 뜻 ‘갖’이 ‘가재’로
가재울이라는 땅이름이 무척 많다. 그리고, 비슷한 땅이름에 가잿골, 가잿말 등이 있는데, 대개 가재가 많아 그 이름이 붙었다고 말하고 있다. 한자로는 주로 음차(音借)되어 ‘가좌(佳佐. 加佐)’로 표기되고 있다.
-가재목(加佐) ; 문경시 산북면 가좌리(加佐里)
-가재올(佳材月) ; 용인시 원삼면 가재월리(佳材月里)
-가재울(佳才) ; 화성시 팔탄면 가재리(佳才里)
-가재울(加佐) ; 고양시 일산서구 가좌동(加佐洞)
-가재울(加佐) ; 이천시 부발읍 가좌리(加佐里)
-가재울(佳佐) ; 청원군 남이면 가좌리(佳佐里)
가재가 많아 가재울이라면 붕어골, 새웃골 같은 것도 있어야 할 텐데, 그런 땅이름은 별로 없다. 가재울이나 가잿골 중에는 가장자리의 뜻으로 이름 붙은 것이 무척 많다. 즉, 들의 가장자리거나 내의 가장자리에 있을 때 이러한 이름이 곧잘 붙는다.
‘?’은 가장자리의 옛말이다. 이 말과 마을의 뜻인 ‘울’ 또는 ‘골’과 합해질 때 그 사이에 ‘애’가 개입되어 이런 이름이 될 수 있다.
-갖+울=갖애울>가재울
-갖+골=갖애골>가재골(가잿골)
② 구석의 뜻 ‘구억’이 ‘꿩’으로
구석의 옛말 또는 방언은 ‘구억’이다. 그리고, 이 말의 뿌리말은 ‘???’이다. 이 ‘???’은 ‘구시’, ‘구세’, ‘구이(귀)’ 들의 말로도 옮겨지면서 많은 관련 구서(부산시 금정구 구서동), 구셋골(울산시 울주군 두서면 서하리의 구수곡) 등의 이름을 이루어 놓더니, 마을이란 뜻의 ‘말’ 앞에서는 구석말, 구억말이 되다가 결국 경음화하여 꿩과 전혀 관계 없는 꿩말까지 만들어 놓았다.
-구억+말>구억말>구엉말>꾸엉말>꿩말
그래서, 구억이나 꿩 자가 들어간 땅이름 중에는 구석의 마을이란 뜻의 것이 많다.
-궉말(꿩말)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시미리의 궉말
-꿩마(雉洞) ;예천군 풍양면 풍신리의 치동(雉洞)
-꿩매(雉山) ;영광군 군남면 설매리의 치산(雉山)
-꿩뫼섬(雉島) ; 부안군 위도면 치도리(雉島里)
③늘어진 곳의 ‘너르(느르)’가 ‘노루’로
‘넓다’를 전라도쪽에서는 ‘누릅다(노릅다)’, 충청도쪽에서는 ‘느릅다’, 경상도나 강원도쪽에서는 ‘널따’라 한다. 땅이름에서도 넓다는 뜻이 지방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한자로 옮겨지는 과정에서는 넓다는 뜻과는 전혀 관계없는 쪽으로 옮겨가기도 한다.
즉, 넓다는 뜻의 ‘너르’가 음의 변화로 ‘누르’가 되어 누렇다는 뜻으로 간 것도 있고, ‘널’로 되어 날판지와 같은 뜻으로 간 것도 있으며, ‘널’이 ‘날’로 되어 날다의 뜻으로까지 간 것도 있다. 입을 많이 오무려 발음하는 전라도 등의 지방에서는 노루(獐)가 되기도 했다.
-노루목(獐項) ; 남원시 산내면 장항리(獐項里)
-노루고개(獐峙) ; 영월군 북면 연덕리
-노루골(獐里) ; 양양군 현북면 장리
④산의 뜻 ‘뫼’가 ‘매(鷹)’로
산이 매(鷹)처럼 생겼다거나, 산에서 매 사냥을 했다거나, 매처럼 생긴 바위가 있다거나 하는 얘기와는 달리 산의 옛말이 메(뫼)이므로 매산, 매봉, 매봉산이 되고, 이것이 한자로 옮겨져 응산(鷹山), 응봉(鷹峰), 응봉산(鷹峰山)이 된 경우가 많다.
-매봉(鷹峰) ; 인제군과 양구군 사이
-매봉(鷹峰) ;가평군 상면
-매봉산(鷹峰山) ; 청송군 부남면
-매산등(鷹山) ; 장수군 산서면 학선리
⑤작거나 좁은 곳의 뜻 ‘솔’이 ‘소’로
‘새‘가 ‘쇠’로 되면서 쇠머리, 쇠꼬리 같은 낱말에서의 ‘쇠’처럼 소(牛)의 뜻으로 가기도 해서 그와 관련된 뜻으로 생각하게 된 땅이름도 많다. 그리고, 사이의 뜻인 ‘새’가 ‘쇠’로 됐다가 ‘쇠(소)’로 취해진 땅이름도 적지 않다.
-소내(牛川)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소놋골(손오) ; 거창군 남상면 송변리
-쇠골(牛洞) ;김제시 금구면 하신리
-쇠내(牛川) ;영동군 황간면 우천리
-쇠묵(牛項) ;논산시 가야곡면 중산리
-쇠일(牛谷) ;이천시 백사면 우곡리
-쇠재(牛峙) ;영월군 수주면 도원리
⑥크다는 뜻이나 산마루는 ‘말’로
말뫼(말미)라는 땅이름이 전국에 무척 많다. 더러는 말(馬)과 관련한 내력이나 전설이 깃든 것도 있으나, 대개는 꼭대기라는 의미의 ‘?’에 연유한 것들이다. ‘?(말)’은 한자로 옮겨질 때 곡식의 양을 재는 그릇의 말(斗) 로 생각하여 두산(斗山)이 되기도 했고, 짐승의 말로 생각하여 마산(馬山), 마봉(馬峰), 마현(馬峴), 마치(馬峙)가 되기도 했다. 마등령의 마등(馬等)은 묏등의 취음이다. 또 함안군 가야읍의 말산(末山)은 말미의 ‘말’을 음 그대로 딴 것이다. 말뫼는 지방에 따라 말무, 말매라고도 한다.
말무덤‘은 대개 말을 묻은 무덤이라고 전해지면서, 충성스러운 말 이야기와 관련되는 전설이 얽혀 있는 것이 많다. 그러나 말무덤은 ‘?+무덤(마루무덤)’으로 큰 무덤 또는 꼭대기에 있는 무덤이란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산마루를 넘는 고개란 뜻의 ‘마루티(?티)’는 ‘말티’라는 이름으로 정착됐다. 말티 자체가 고개 이름인 셈인데, 여기에 또 고개가 붙어 ‘역전(驛前) 앞’과 같은 식의 첩어식 지명이 돼버렸다.
고양시의 정발산(59.3m)은 말의 머리처럼 생겨서 말머리(馬頭)라고도 부른다. 또, 평택시 서탄면 지역은 땅 모양이 말의 머리처럼 생겨서 말머리라 했다면서 행정 지명의 마두리(馬頭里)로 됐다고 한다. 의령군 유곡면에도 말 머리처럼 생긴 말머리덤(말대가리)이 있어 마을 이름이 말머리인데, 역시 행정지명이 마무리이다.
그러나, 산 모양이나 지형이 말대가리 형상이어서 말머리라 했다는 것은 일반적인 지명 정착의 과정으로 볼 때 타당성이 적다. 말머리는 바로 ‘?머리’, 즉 산정을 뜻하는 것이다.
평북 안주와 태천에는 마두산(馬頭山)이 각각 있는데, 모양이 말 머리 같아서가 아니라 ‘말모루’‘가 말머리로 불리다가 한자로 붙여진 것이다.
⑦ 도드라진 지형 ‘돋’이 ‘돼지’로
돼지의 옛말은 ‘돝’이다. 그래서, 지금도 ‘멧돝 잡으려다 집돝까지 잃는다’라는 속담이 전해져 온다. 지금의 돼지란 말은 ‘돝’이란 말과 ‘아지’란 말이 합해서 된 ‘돝아지’가 ‘도야지’로 변했다가 정착된 말이다.
땅이 도드라진 곳이면 ‘돋골(돗골)’이 된다. 우리 조상들은 땅이름을 짐승과 결부시키기를 좋아했기에 ‘돋’을 ‘돝’으로 풀어 적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전국에는 실제 ‘돝(돼지)’과 전혀 관계 없음에도 ‘돝골(돗골)’이라 하는 곳이 적지 않다. 돌의 옛말이 ‘돍’ 또는 ‘돗’이어서 이것이 ‘돝’으로 옮겨가 돼지 관련 지명처럼 된 것도 있다.
-돝골(猪洞) ;정읍시 소성면 신천리, 진주시 진성면 이천리
-돝머리, 도투머리(猪頭) ; 무안군 몽탄면 사창리,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리
-돝울음삼(猪鳴山) ; 이천시(도드람산)
-돝너리봉(猪?峯) ;서울 은평구 불광동
-도토성이(猪城) ; 홍성군 홍북면 내법리, 서산시 해미면
-돝마루(猪旨) ; 서산시 서산읍 석남리
-돝귀동 ; 남제주군 대정읍 보성리
-돝밭(猪田) ;의성군 안평면 신안리, 강진군 군동면 화산리
-돝내(猪川) ;강화군 선원면 창리(돈내)

시조 설화에도 나오는 닭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외국과 달리 우리 땅이름들에는 동물 이름이 들어간 것이 무척 많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동물 중에도 상서로운 동물의 것이 많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생활과 밀접한 동물, 예컨대 집짐승 관련 땅이름이 많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부터 닭을 어느 정도 상서로운 동물로 여겼던지 나라땅 곳곳에서 닭 관련 땅이름들을 적잖이 볼 수 있다. 닭은 우리의 시조 설화에도 나온다. 경주의 계림(鷄林) 숲은 경주김씨 시조의 설화가 깃들어 있다. 계림은 교동 1번지 경주향교 북동쪽에 있는 숲으로, 예부터 신성한 숲으로 여겨와 원래 시림(始林)이라 불리던 곳인데,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 온다.

신라 제4대 탈해왕 9년(65) 3월 어느 날 밤, 임금이 이 근처를 거닐다가 나무 사이로부터 닭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이상히 생각한 임금은 다음날 새벽 호공(瓠公)을 보내 알아보게 했더니 그가 돌아와 아뢰기를, 한 절터에 금빛의 작은 궤가 걸려 있고, 그 아래에서 흰 닭이 울고 있다고 했다. 임금이 궤를 가져오게 해서 열어 보니 옥동자가 그 안에서 나왔다.

임금은 크게 기뻐 하늘이 보내준 아들이라 하고 잘 길렀다. 아이는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많았다. 그래서, 임금이 그 이름을 알지(閼智)라 하고 성을 금(金)이라고 하였다. 이가 바로 경주김씨의 시조가 되고 뒤에 그 후손이 신라의 김씨 왕계를 잇는 영광을 얻는다. 숲의 이름은 닭이 울었다 해서 계림(鷄林)이 되었고, 그 뒤엔 이것이 국호로도 되었다. 알지의 7대손 미추가 조분왕의 왕녀에게 장가들었으나 아들이 없어 추가 대신 왕위에 오름으로써 신라에서 처음으로 김씨 왕이 생기게 되었다.

계림에는 현재 계림김씨(경주김씨)의 시조 탄강 유허비가 있다. 이곳엔 1930년경까지도 아름드리 느티나무, 팽나무, 홰나무, 쥐엄나무 들이 90여 그루 있었는데, 지금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이 숲은 1936년 2월21일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사적 제18호이다.

닭의 울음은 밝음 즉 희망을 가져다 준다고 믿었던 우리 조상들은 닭 울음과 관련한 땅이름을 즐겨 붙였다. 닭우리(달구리), 계명(鷄鳴) 등의 땅이름이 바로 그것이다.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에는 닭국재라는 고개가 있는데, 원래 이 이름은 닭이 울었다는 듯의 달국재(닭울재)라는 이름에서 나왔다고 전하고 있다. 이 이름은 이 고개를 처음 낼 때 닭 우는 소리가 났었다는 전설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닭이 우는 형국의 산이라 해서 계명산이라 이름 붙은 산을 많이 볼 수 있다. 고창군 부안면, 합천군 봉산면, 안동시 길안면, 춘천시 북산면 등에 있는 계명산이 모두 그런 설에 따라 붙여진 것이라 전한다.

충주시에 계명산이 있는데, 이 고을의 진산이 된다. 이 산의 원래 이름은 닭의 발의 뜻인 계족산(鷄足山)이었는데, 이 이름에는 연유가 있다. 옛날 이 고장에 지네가 너무 많아 주민들이 골치를 앓고 있었는데 지네는 닭과 상극이니 닭을 길러 없애라는 어느 도인의 말을 따라 그 말대로 하니 지네가 없어져 계족산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산으로 인해 충주 읍내의 부자들이 자주 망하므로 객망산(客亡山)이라 부르다가, 계족산, 객망산의 산이름이 별로 좋지 않다 하여 1958년에 현재 이름으로 바꾸었다. 계명산은 닭이 운다는 뜻이고, 닭이 울면 날이 밝을 것이므로 이 고을에 새 광명이 찿아들라는 주민들의 기원이 담긴 이름이라 하겠다.

금빛의 닭이 알을 품고 앉은 모습의 명당을 금계포란형(金鷄包卵形)이라고 한다. 이러한 곳에 집을 짓거나 묘를 쓰면 자손이 번성하고 부를 누린다고 믿어 왔다. 전국에는 이런 명당이 많은데, 대개 닭 자 땅이름이 붙어 있다. 부안군 변산면 격포리, 남해시 삼동면 물건리 등에 있는 달기봉(계봉·鷄峰), 닭섬(계도·鷄島) 등에 그런 명당이 숨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예천읍 생천리의 나붓들 서쪽 고개인 닭우리고개는 닭이 울었다고 해서 붙은 이름으로 한자로는 계명현(鷄鳴峴)이다. 이 고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을 가지고 있다. 근처 용문면 선리에 사는 가난한 서씨가 짚신장사를 해서 아들을 가르쳐 마침내 아들이 벼슬을 하여 고을 원으로 도임하게 되었다.

서씨는 아들을 보려고 하인에게 업혀서 백전리 신거리에 가서 아들을 만나 보고 어찌나 기쁘던지 정신없이 즐기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오는데, 이 고개에 이르러 닭이 울었다. 그런데, 힘이 없어 하인에 업혀 넘어오던 서씨는 닭 울음 소리를 듣더니 금방 힘이 솟아 단숨에 집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이 고개를 닭우리고개라 했고, 한자로 계명현이 되었다 한다.

근처 백전리 신거리도 이 짚신장수 서씨의 전설에 연결돼 있다. 서씨가 짚신장사를 할 때 신을 삼아 가지고 장날마다 예천읍에 가는 길에 늘 대추나무가 있던 길목에서 쉬어 갔는데, 그것은 무거운 짚신 뭉치를 땅에 놓지 않고 그 대추나무 가지에 걸어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서씨가 쉬어 가던 그 길목을 신거리(신걸이)라 했다. 나무에 신을 걸어 놓고 쉬어 갔던 자리라 해서란다.

닭이 울면 새벽이 오기에 닭의 울음은 그 자체가 밝은 꿈이었다. 그래서 달구재, 덜구니 등의 마을 이름이 닭의 울음과는 관계 없음에도 한자로 옮겨질 때는 계명(鷄鳴)이 되었다. 고창군 심원면 만돌리, 파주시 광탄면 용미리 등에 있는 달구재나 달구니 등의 산이나 마을이 그런 예다.

여기서의 ‘달구’는 바로 산(山)을 나타내는 옛말 ‘닥’, ‘닭’을 바탕으로 나온 이름으로 보인다. 대구의 옛 땅이름 달구벌(닭?벌)은 산의 벌 즉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안의 들판이란 뜻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깊은 산중이라 '닭목' 이름 얻어

땅이름의 원뜻을 풀이하는 데 있어서 현음(現音)의 글자 그대로 무조건 뜻을 연관 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예를 들어, 땅이름에 말의 음(音)이 들어가면 말(馬)과 관련 짓고, 노루의 음이 들어가면 노루(獐)과 관련을 짓는 일이 많은데, 좀더 신중을 기할 일이다. 앞에서의 여러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땅이름은 같은 뜻의 것이라도 지방에 따라 조금씩 달리 불리거나 표기될 수 있으며, 시대에 따라서 상당한 음의 변천을 겪은 것도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닭의 음이 들어간 땅이름이라 하더라도 무조건 닭과 연관을 지어서는 안 될 것이다.

‘닭’이란 음은 ‘닥’과 비슷하다. 따라서, ‘닥’을 동물로 실체화해서 닭으로도 표기함은 뜻의 생성을 위해서 바람직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 것이다. 닭의 옛말은 ‘?’으로, ‘닭’, ‘돍’ 등으로 불러왔다. 전남과 제주 지방에서는 ‘닭’을 주로 ‘돍(독)’으로 많이 불러왔다. 지금도 제주도에선 달걀을 독새끼라 한다. 독새끼는 글자 그대로 독(닭)의 새끼란 뜻이다. 닭의 새끼라면 당연히 병아리여야 할 텐데도 제주도에선 병아리를 따로 빙애기 또는 비야기라고 한다.

‘닭’이 ‘?’이었음은 두시언해 등의 옛 문헌들에서 나타난다.
·‘하? ?기 춤츠놋다’(하늘 닭이 춤을 춘다)
·‘?? 해 기르놋다’(닭을 많이 기른다)
·‘새뱃 ? 소리? 드러’(새벽 닭 소리를 들어)

달걀은 옛말로 ‘??알’인데, 북한에선 현재 ‘닭알(닥알)’로 불러 남한과 조금 다르다. ‘달’은 산이란 뜻 외에 단순히 땅의 뜻을 갖기도 했다. 이것은 지금의 말의 달구질이란 말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가 있다. 달구질이란, 집 지을 터를 단단히 다지는 짓을 뜻한다. 이 말은 ‘달(땅)’과 ‘질(행동)’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달(닭)+질=닭?질(달구질)

즉, 땅이라는 말과 질이라는 말이 합쳐 달구질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전국에 퍼져 있는 땅이름 중에 닭실, 닭재 등 ‘닭’이 들어간 것이 적지 않은데, 이 중에는 그것이 단순히 산의 뜻으로 들어간 것이 많다. ‘달’이나 ‘닭’의 음이 들어간 이름들이 평야지방에서는 별로 볼 수 없고, 주로 산지에 많음은 이것이 원래 산의 뜻이었음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의 닭목(계항동 鷄項洞)에서 왕산리로 가는 고개가 닭목재(닥목재)다.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의 묘자리가 있다 해서 이 이름이 나왔다고 하고는 있지만, 아마도 산골짜기의 목(길목)이란 뜻으로 나왔을 가능성이 짙다.

닭목재란 이름을 낳은 그 고개 밑의 닭목 마을은 아주 깊은 산골 마을이다. 좁디좁은 긴 골짜기 안에 폭 파묻힌 마을이다. 여북하면 이 마을에서 한참 내려간 곳에 약간 들이 있는 마을 이름이 벌마을일까? 골짜기 안에 콕 박힌 닭목 마을이고 보니 그나마 골짜기라도 조금 넓고 다리 정도라도 있는 냇가, 숨통이라도 틔어 줄 듯한 마을이니 벌마을로 불렀음직하다.

닭목의 ‘닭’은 분명히 산골의 의미를 깊이 지녔음직하다. 또, 닭목의 ‘목’도 길목의 뜻보다는 골목의 ‘목’처럼 좁다는 뜻을 가졌음직하다. 전국에는 닭목(닥목)이란 마을이 성주군 수륜면 계정리, 고성군(경남) 회화면 당항리 등 무척 많은데, 대개 이곳처럼 깊고 깊은 산중이다.

글=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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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두타산] 댓재~두타산~청옥산~~백봉령

'아직 겨울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은 것 같다'

갓 밝은 봄빛은 병아리 솜털 같다. 산수유꽃, 생강나무꽃이 그렇고, 악취가 진동하는 도심 천변에서도 곱게 피어나는 양지꽃이 그렇다. 개나리는 또 어떤가. 하루가 다르게 툭툭 쏟아내는 그 꽃들은 ‘낯가리지 않는 아름다움’으로 나를 감동시킨다. 귀하게 여기지도 않고, 동네방네 축제를 열며 난리법석을 떠는 벚꽃에 견주면 잡초 대접에 가까운데도, 어쩌자고 그리도 천연덕스럽게 잘도 피어나는지.

개나리꽃을 보며 느끼는 새삼스러운 감동은, 목이 터져라 호객을 하는 남대문 시장 상인의 목소리나 지하철 한 귀퉁이에서 더덕을 파는 할머니가 나눠주는 알싸한 냄새를 닮았다. 남루할지언정 비루하지 않은 그 빛깔과 소리, 냄새. 꾸미지 않은 몸짓의 건강한 아름다움이다.

▲ 이기령과 원방재 사이에 있는 상월산 직전 조망바위. 백봉령으로 오르는 42번 국도가 손에 잡힐 듯 가까워 보이지만 동서로 휘어돌며 10㎛정도 더 가야한다. 날씨만 좋다면 이곳에서 백봉령까지는 대부분 동해를 볼 수 있다.


도시 길가의 진달래도 꽃망울을 터트렸는데, 댓재에서 바라본 두타산 기슭에는 아직 겨울이 한 발짝도 물러선 것 같지 않다. 바람살이 냉기를 거두고 있긴 하지만 바람의 방향은 아직 북서 계절풍의 지배 하에 있다. 일찍 산행을 시작하기 위해 댓재 민박집에 배낭을 풀고 주인에게 꽃 소식을 물었다. 아직 멀었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동쪽의 동해시와 비교하면 한 달 정도 차이가 난다고 한다. 북쪽인데다 아직 바다의 영향을 받기에도 이른 탓일 것이다.

"꽃 소식은 아직도 멀었다"

민박집에서 차린 아침 밥상에 콩가루를 듬뿍 묻힌 냉이국이 올라 있다. 봄기운을 뱃속 가득 채우고 두타산을 오른다. 초입의 트레일은 두 갈래다. 산신각 왼쪽으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길과 등성마루로 오르는 방법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대간을 벗어나는 건 아니다. 계곡으로 오르는 길이 20분쯤 절약되므로 시간과 체력에 따라 선택할 일이다. 우리는 능선길을 택한다. 학기 초에는 누구나 모범생인 것처럼.

이번 구간의 기점인 댓재(810m)는 삼척시 미로면과 하장면 사이의 고개로 동해와 태백·삼척 내륙을 이어주는 42번 지방도가 지나는 곳이다. 이곳에서부터 종점인 백봉령까지 대간을 넘는 찻길은 없다. 실거리 약 29km로 당일 종주를 하는 사람들은 12~13시간에 주파하는 구간이다. 무박2일 일정으로 걷는 방식인데, 깜깜한 새벽에 출발해야만 어두워지기 전에 백봉령에 닿을 수 있다. 야영하지 않기 위한 최선의 운행방법이긴 한데, 제대로 보고 느끼기엔 무리다. 짐을 가볍게 지긴 하지만 뛰다시피 12시간을 걸으려면 상당한 인내가 필요하다.

참나무 사이로 드문드문 소나무가 보이는 들머리는 된비알은 아니지만 제법 경사가 높다. 한 10분쯤 지나자 왼쪽으로 잘 생긴 금강소나무 군락이 나타난다. 또 10분쯤 진행하자 트레일이 완전히 꺾어지는 지점에 명품 소나무가 서 있다. 살포시 허리를 낮추며 기슭을 지나던 길은 서서히 키를 높이며 조릿대밭을 지난다.

어른 팔로 한 아름은 더 돼 보이는 소나무가 베어진 자리에서 휴식하며 등걸의 나이테를 세어 본다. 얼추 90살 정도다. 흔히 이 정도 굵기의 나무를 보면 멋대로 200~300년은 되었을 것이라고 말들을 하는데, 빗나간 추측이었음을 확인한 것도 재미있는 경험이다. 전문가들의 말에 따르면 생육 조건에 좋은 곳에서는 30년만 잘 가꾸어도 직경 50cm 정도의 재목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 두타산 초입의 참나무 숲길.
기암절벽은 물론 야박스런 땅에서도 잘 자라는 소나무의 특성은 우리 민족의 특성과 닮은꼴이 많다. 그래서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지도 모를 일이다. 흔히 우리 민족은 소나무와 함께 태어나 평생을 함께 살고, 죽어서도 소나무의 품으로 돌아간다고 한다. 태어날 때 금줄에 솔잎을 걸고,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살다가 소나무로 만든 칠성판을 진다는 의미에서 나온 말일 텐데, 말인즉슨 그렇다는 얘기지 정색을 하고 할 말은 못 된다. 요즘 그렇게 태어나 살다 갈 수 있는 사람은 시골에서도 드물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런 얘기로 소나무 사랑을 강조하는 얘기를 들으면 거부감을 느낀다. 교조적 냄새가 물씬하기 때문이다. 소나무의 실제 생태는 동양화 속의 이미지보다는 진달래와 개나리에 더 가깝다. 양수이다 보니 잎 넓은 큰키나무에 밀려나는 운명은 어쩔 수 없지만, 재선충 같은 병충해만 잘 막아내고 보살피면 우리와 함께 영원할 것이다. 참나무로 천이가 끝난 산에서도 절 주위에는 소나무가 많은 걸 흔히 볼 수 있다는 사실이 그 근거다.

그림자가 짧아지면서 양지바른 쪽의 트레일이 질척거리기 시작한다. 귀에 고이는 새 울음소리는 지난 번 산행 때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짝짓기의 계절이 돌아온 것이다. 이런 계절에 딱 어울릴 시 한 편 읽고 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희끗희끗 양지에 남은 눈이 녹는
봄이 되면 서둘러서 산으로 가야겠다.

산이 좋아.
무엇보다 세상에선
산이 제일 좋아

산으로 가는 날은 내가 산을 사는 날.
내가 나를 사는 날.

산이 좋아.
아내와 같이일 땐
화목을 지펴
깊은 골 양지쪽에 원시를 생활하고,

짐승이 밟는 길목
가다가 반짝 드는
진한 꽃 빨간 산꽃.

포릉포릉 멋대로 잔가지를 날으는
어린, 또,
예쁜 딸년처럼 몸짓 가벼운
죄그만 지줄대는 산새들도 좋다. -박두진, ‘산이 좋다’(부분)

시인은 '산으로 가는 날은 내가 산을 사는 날'이라고 노래한다. 시인이 곧 산이고 산이 곧 시인인 경지다. 또한 시인은 ‘산으로 가는 일’을 ‘자기 자신으로 사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시인은 아직 산으로 가지 못 하고 있다. 산에서 멀어진 곳에서 ‘나 아닌 나’로 살아가는 삶에서 얻은 통찰일 것이다.

시인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상당히 먼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렇지만 시인의 메시지에서는 거리가 느껴지지 않는다. 어차피 시인이 살던 시대에도 깊은 산속에서 원시를 생활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시인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시간의 강물을 유유히 따라 흐르는 산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것이다.

산은, 자연이라는 종교의 경전이다. 신독(身讀) 즉 몸으로 읽어야 할 경전이다. 이 문자 없는 경전의 가르침을 ‘무위자연(無爲自然)’이라고 새긴 사람은 노자다. 도덕경 제25장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사람은 땅을 따르고, 땅은 하늘을 따르고, 하늘은 도를 따르고, 도는 자연을 따른다.'

무위(無爲)를 ‘함이 없음’으로 오독한 글을 종종 만난다. ‘조작함이 없음’이라고 새겨야 옳을 것이다. 과연 현실에 발을 담은 인간으로서 조작함이 없는 삶은 어떤 경지일까? 자신의 삶을 살아내는 것, 이것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무위자연의 한계치가 아닐까?

'티베트에서의 7년'이라는 영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하인리히 하러는, 함께 인도의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해 티베트로 간 아우프슈나이터라는 자신의 파트너에 대해 상당한 존경을 담아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아우프슈나이터는 자신이 젊었을 때 선택한 좌우명에 따라 살았다.” 아우프슈나이터의 좌우명은 라틴어로 ‘에세 쾀 비데리(Esse Quam Videri)’인데, 남에게 보이기보다는 그냥 존재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감히 나는 이런 경지를 엄두조차 내지 못하지만, 아우프슈나이터의 삶에서 무위자연을 읽을 수는 있다. 아우프슈나이터의 정신세계는 에베레스트보다 더 높은 경지가 아니었을까.

쉰움산 자락에 걸린 운해

다시 대간으로 돌아오자. 댓재에서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꾸준히 키를 높이는 대간은 1243m봉에서부터 두타산(1,355.2)m 정상까지 줄곧 오른다. 정상 일대는 키 작은 참나무와 철쭉이 드문드문하고 묘가 있는 정상은 제법 넓다. 날씨가 좋으면 동해가 닿을 듯이 조망되는 곳이지만 동쪽은 안개에 갇혀 있다.

▲ 백두대간 종주자들의 표지기. 대간 종주는 이제 하나의 문화현상이 되었다.


두타산 정상에서 빵과 과일로 간단히 점심을 해결한 다음 청옥산을 향한다. 길게 떨어졌다 그만큼 오르는 두타와 청옥 사이는 반달의 곡면처럼 부드럽다. 경사면의 바닥을 친 뒤 살짝 올라서면 박달령이다. 박달령에서 오른쪽으로 떨어지면 무릉계. 박달령에서 청옥산 정상을 향하는 길은 능선 왼쪽 기슭으로 돌아 오르기 때문에 시각적 가파름보다 실제 경사가 훨씬 약하다.

아직 잎을 내밀지 않은 다래 덩굴과 참나무로 둘러싸인 헬기장으로 이루어진 청옥산(1,403.7m) 정상은 이름의 분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돌올한 분위기도, 호쾌한 조망도 없다. 청옥산에서 연철성령까지는 내리막이 계속이다. 군데군데 보호수임을 알리는 표지가 붙은 주목이 서 있다.

연칠성령에서 고적대를 오르는 순간부터 빗줄기가 흩날리기 시작한다. 안개비보다 약간 굵은, 맞고 있는데도 그리 춥지는 않다. 고적대 정상은 날씨만 좋다면 남으로 소백산, 북으로 대관령이 조망될 정도로 사방이 열려 있다. 고적대에서 갈미봉으로 내려서는 동안 동남쪽으로 마주하는 무릉계의 동쪽 쉰움산 자락은 비로 인하여 오히려 장관을 연출한다. 구름을 두른 산허리가 그림에서나 보던 선계를 펼쳐 준다. 안개에 가려진 무릉계는 아득히 깊어 신비감이 더하고.

갈미봉(1260m)을 지나 이기령으로 향하면서 자주 너덜을 만난다. 조금 지루하다. 그러다가 시야가 활짝 열리면서 인공 조림한 자작나무 군락이 시원하게 눈에 안긴다. 약간은 이국적인 모습이다. 목표로 삼은 이기령을 1km 정도 남겨둔 지점에서 야영하기로 한다. 땅거미가 스멀거리기 시작하는 데다 체력도 바닥났기 때문이다.

을씨년스런 날씨는 텐트 속을 아늑하게 한다. 바로 이런 한심한 행복감은 지상의 모든 정상적인 집을 여우의 신포도로 만들어 버린다. 여우는 역시 현명한(?) 동물이다. 밥을 짓느라 켜 놓은 버너 열기는 젖은 몸에서 모락모락 안개를 피워 올린다. 여덟 명이서 3~4인용 텐트 안에서 밥을 먹는다. 인간의 적응력도 바퀴벌레 못지않은 것 같다.

“지금 내가 사는 집도 자병산 뭉갠 대가”

밤새 비는 그쳤지만 안개는 자욱하다. 바람이 제법 차다. 빗물은 온기까지 땅속으로 끌고 들어간 모양이다.

이기령까지는 편안한 내리막이다. 이기령에서 상월산(970.3m) 오름길은 말끔하다. 산책로 같은 낙엽송숲을 지나면 상월산이다. 상월산에서 원방재(730m)를 향하는 대간은 크게 한 번 내려섰다 불끈 솟은 후에는 길게 허리를 낮춘다. 원방재에서 이번 구간의 종점인 백봉령(780m)까지는 고개로 내려선다는 느낌이 거의 없다. 원방재보다 백봉령이 더 높기 때문이다. 경쾌하게 내려서는 길을 기대했다가는 실망감만 커질 정도로 오르내리기를 반복한다. 날씨만 좋으면 시야가 열린 어디서나 동해를 볼 수 있지만, 비가 올듯 말듯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이 바다를 가로막고 있다.

백봉령으로 내려서기 직전 조망처에서 자병산을 바라본다. 동해를 감상하라는 의도로 만든 곳이지만 자병산만 눈에 아프다. 거의 산이 통째로 사라진 모습이다. 하지만 나는 마음 편히 삿대질할 자신이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도 그 산을 뭉갠 대가로 얻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포식자는 되지 말아야겠다.

ㅣㅣ덧붙임ㅣㅣ
백봉령의 공식 지명은 백복령(白伏嶺)이다. 택리지에는 백봉령(白鳳嶺)이라 표기돼 있고, 신증동극여지승람에는 희복현(希福峴)으로 표기돼 있다. 현재 대간 종주자들 사이에는 옛 기록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백복령(白伏嶺) 대신 백봉령(白鳳嶺)이란 이름이 널리 쓰인다. 이 글도 그것을 따랐다. 동해시의 공식 인터넷 사이트에는 두 표기가 혼용되어 있다.

ㅣㅣ백두대간의 명소ㅣㅣ
무릉계곡 … 용추폭포·학소대·호암소 등 가경 즐비
두타산과 청옥산이 빚어 놓은 무릉계곡은 달리 무릉도원이라 불릴 만큼 절경을 이루고 있다. 고려 충렬왕 때 올곧은 정치를 직언하다 파직당한 이승휴가 이곳으로 몸을 숨기고 제왕운기를 저술했다. 계곡의 반석에는 조선의 명필 양사언의 필적을 비롯한 명필의 붓 자국이 새겨져 있다(오늘날의 기준으로는 바람직한 일이 아니지만).

계곡 곳곳에 용추폭포와 학소대, 호암소와 같은 가경이 베풀어져 있다. 계곡 초입의 삼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1년(642)에 자장 스님이 창건한 천년 고찰로, 보물 제1277호인 삼층석탑과 보물 제1292호인 철조노사나불좌상이 있다.

1979년에 쌍용시멘트 공장에 자리를 내어 주고 지금의 자리로 옮기는 바람에 옛 모습을 잃었지만, 빼어난 자연을 배경으로 한 정취는 그윽하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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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7구간] 두타산 식생

신갈나무숲에 금강초롱·대흥란 자란다
만병초, 두루미꽃, 산마늘 등 고산식물 생육…보춘화는 절멸상태

태백시 피재에서 낙동정맥을 가른 직후 백두대간은 줄곧 동경 129도선 오른쪽을 달려 올라간다. 피재에서 푯대봉(1,010m), 덕항산(1,071m), 황장산(1,059m), 댓재를 거쳐 두타산(1,353m)에 이르기까지 30여km를 북으로 달리는 동안 직선에 가까운 남북 방향의 산줄기를 형성한다. 이런 백두대간이 두타산에 이른 후에는 청옥산(1,404m)을 거쳐 고적대(1,353m)까지 북서쪽으로 똑바로 뻗어나간다. 이후 백두대간은 계속 서쪽으로 치우친 채 북진을 계속하게 되는데, 평안도에 이르면 동경 127도선까지 서진하게 된다.

동경 129도선보다 동쪽으로 치우쳐 달림으로써 백두대간에서 가장 동쪽에 자리 잡은 구간이 되는 건의령에서 두타산에 이르는 30여km 산줄기. 그 산줄기 가운데서 가장 높은 산이 두타산이다. 이 구간 최고봉인 두타산은 구간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구간의 맨 북쪽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다.

태백 일대에서 해발 1,500m대를 자랑하던 백두대간이 이 구간을 달리며 숨을 고른 후 다시 1,300~1,400m대의 고도를 유지하는 곳이 바로 두타산인 셈이다. 이렇게 다시 높아진 고도는 고적대를 기점으로 다시 낮아져서, 고루포기산(1,238m)에 이를 때까지 한참 동안이나 1,000m대 고도를 유지한다.

금강초롱꽃 남방한계선으로 추정돼

이렇게 높아진 산의 높이는 식물상에도 그대로 반영되기 마련이다. 고도가 높은 태백산 근처에서 볼 수 있었던 분비나무, 털진달래, 만병초, 꽃개회나무, 털쥐손이, 두루미꽃, 산마늘 같은 북방계 고산식물들이 다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밖에도 희귀식물로 꼽을 수 있는 미치광이풀, 도깨비부채, 등칡, 수정난풀, 왜우산풀, 털댕강나무, 청괴불나무, 게박쥐나물, 연령초 등이 분포함으로써 식물학적인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한 조건을 이룬다.

두타산의 주요 식물 가운데 하나인 수정난풀은 전국에 자라기는 하지만 드물어서 보기 어려운 노루발과의 여러해살이풀이다. 전체가 흰 빛을 띠어 녹색 부분이 전혀 없는 식물이며, 엽록소가 없으므로 광합성을 하지 못하고 주변의 부엽토에서 영양분을 흡수하여 살아간다. 이런 특성 때문에 초여름에 잠깐 나와서 꽃을 피운 후 지상부가 시들어 죽는다. 두타산 몇몇 곳에서 6월 초순에 꽃이 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데, 저지대의 소나무숲에서도 살고 고도가 높은 낙엽활엽수림에서도 생육하고 있다.

설악산과 금강산 일대에 가장 많이 자라는 금강초롱꽃도 이곳에 나타나는데, 두타산은 이 식물 분포의 남쪽 경계선으로 추정되어 의의가 크다. 세계적으로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임에도 불구하고, 정확한 분포지역을 알 수 없는 식물이기도 하다. 북한지역을 답사할 수 없어서 아직 그 분포상태를 정확히 밝힐 수 없기 때문인데, 남한에서의 분포는 최근 거의 밝혀지고 있다. 즉, 동해쪽 남쪽으로는 이곳 두타산, 내륙쪽 남쪽으로는 원주 치악산, 남서쪽으로는 양평 용문산과 유명산 등을 경계선으로 하여 분포지도를 그려 볼 수 있는 것이다.

진달래과의 만병초는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는 상록성 떨기나무지만 남방계 식물이 아니라 북방계 식물이다. 설악산 등 높은 산의 고지대 능선에 자라며, 남쪽으로는 지리산까지 내려와 분포하기는 하지만 지리산에서는 개체수가 많지 않고, 지리산 이후에는 태백산부터 다시 나타나기 시작해서 강원도의 높은 산들에서 자라고 있다. 두타산과 청옥산 일대의 해발 1,200m 이상의 능선에서 여러 개체가 발견된다.

백합과의 두루미꽃은 북방계 여러해살이풀로서 남한의 여러 산들에서 발견되기는 하지만 자생하는 곳이 모두 고산지역이다. 빙하기때 남하했다 기온이 높아지면서 높은 산으로 피신하여 살아남은 대표적인 빙하기 잔존식물 가운데 하나다. 고산지역이 아니고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진정한 고산식물이라 할 수 있다.

두타산 일대는 동해쪽으로는 경사가 급하고, 내륙쪽으로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는 피재 이후 백두대간이 계속해서 보여주는 경동지괴 지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급경사를 이룬 동해쪽 북쪽은 삼화사를 품은 무릉계곡을 길게 형성하고 있으며, 백두대간과 두타산~쉰움산 능선으로 구획되는 지역은 넓은 분수계를 이루고 있는데, 이곳의 물은 삼척 오십천으로 유입된다. 또한, 경사가 완만한 두타산 서쪽과 남쪽에서는 골지천이 발원하여 한강 상류로 흘러든다.

골지천이 발원하는 두타산의 남서쪽 사면에는 가슴둘레 지름이 80cm 이상 되는 신갈나무나 피나무 같은 오래된 낙엽활엽수가 많이 남아 있는 등 식생이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다. 군데군데 지름 1m가 넘는 소나무 고목들이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아름드리 큰 소나무들이 붉은 줄기를 자랑하며 군락을 이루어 자라기도 한다. 계곡 주변에서는 황철나무와 갯버들 고목이 발견되며, 자연성이 높은 지역에 분포하는 양치식물 속새가 큰 무리를 지어 자라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또한 큰황새냉이, 선괭이눈, 박쥐나물, 도깨비부채, 곰취 등 습한 곳을 좋아하는 식물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남서쪽 사면의 식생을 살펴보면 900m 이하의 지역에는 신갈나무 군락과 소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고, 900m 이상의 지역에는 신갈나무 군락 외에 사시나무 군락, 잣나무 군락, 거제수나무 군락 등이 발달해 있다.

동쪽 자락은 대흥란 북방한계선

해발 900m 이하 지역에는 신갈나무와 소나무 외에도 물박달나무, 서어나무, 까치박달, 굴참나무, 당단풍나무, 피나무, 함박꽃나무, 층층나무, 쪽동백나무 등의 큰키나무와 생강나무, 철쭉나무, 진달래, 개옻나무, 조록싸리, 다래나무, 등칡, 고광나무, 물참대, 산수국 등의 떨기나무, 그리고 구실사리, 노루오줌, 수정난풀, 기름나물, 꽃며느리밥풀, 초롱꽃, 단풍취, 참취, 맑은대쑥, 대사초, 산거울 등의 풀이 자라고 있다.

해발 900~1,200m에는 신갈나무 군락, 사시나무 군락, 소나무 군락 등이 발달해 있는데, 잣나무, 거제수나무, 사스레나무, 팥배나무, 고로쇠나무, 당마가목, 다릅나무 등의 큰키나무가 섞여 자라고 있다. 중간층에는 고광나무, 산앵도나무, 털진달래, 철쭉나무, 오갈피나무, 회나무, 괴불나무, 털댕강나무, 붉은병꽃나무, 쇠물푸레나무, 조릿대 등이 생육하고 있다. 숲 바닥에 자라는 풀로는 꿩고비, 산꿩의다리, 병조희풀, 도깨비부채, 노루오줌, 민눈양지꽃, 터리풀, 눈개승마, 애기괭이밥, 큰앵초, 벌깨덩굴, 쥐오줌풀, 참취, 풀솜대, 우산나물, 은방울꽃, 산거울, 은대난초, 감자난초 등이 있다.

이 지역에 분포하는 털댕강나무는 중국과 우리나라에 분포하는 떨기나무로 석회암지대 지표식물 가운데 하나다. 충청북도 단양, 음성, 강원도 영월, 정선, 평창, 태백, 삼척, 경기도 명지산 등지에 분포하며, 두타산의 중복 이상에서 자라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나라 특산식물로 취급하기도 했으나, 고 김태진 박사의 최근 연구에서 중국에 분포하는 것과 같은 종으로 밝혀졌다. 이에 따르면 이 종은 황하 이북에서 만주, 우수리를 거쳐 중북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울릉도에 분포하는 섬댕강나무도 같은 것으로 취급하였다. 어린줄기와 화관, 열매 등에 털이 많아서 우리말 이름이 붙여졌다. 꽃은 4월 말부터 피기 시작하여 5월까지 볼 수 있으며, 보통 2개씩 달리고, 꽃받침은 4갈래로 갈라진다.

해발 1,200m부터 정상에 이르는 지역에서는 잣나무~주목 군락이 발견된다. 주목과 분비나무가 많고, 어린 잣나무도 관찰된다. 생열귀나무, 산앵도나무, 개회나무, 꽃개회나무 등의 떨기나무가 자라고 있다. 풀로는 눈개승마가 대표적이며, 그밖에도 혹쐐기풀, 요강나물, 누른종덩굴, 털쥐손이, 둥근이질풀, 큰앵초, 개시호, 독활, 금강초롱꽃, 두루미꽃, 풀솜대 등이 눈에 띤다.

주목, 분비나무 등의 큰키나무와 생열귀나무, 산앵도나무, 꽃개회나무 등의 떨기나무는 모두 고산성 나무로 볼 수 있다. 분비나무는 일반적으로 침엽수로서 비슷하게 생긴 전나무보다 더욱 높은 고도에서 나타나는 수종으로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고산성 침엽수 가운데 하나다. 꽃개회나무의 경우에도 지리산을 포함해서 전국적인 분포양상을 보이기는 하지만, 생육장소가 모두 해발 1,000m가 넘는 고산지역이다. 이곳에 분포하는 풀들 가운데는 털쥐손이, 둥근이질풀, 두루미꽃 등이 고도가 낮은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확실한 고산식물들이다.

두타산 동쪽 지역에 자라는 식물 가운데 중요한 것으로 보춘화와 대흥란이 있다. 두 식물 모두 난초과에 속하는 희귀식물로서 관상가치가 매우 높다. 특히 이들은 주로 남쪽 지방에 자라는 식물임에도 불구하고 동해안을 따라 이곳까지 올라와 자라는 것이 그 가치를 더한다. 두 식물 모두 이 일대가 동해안의 최북단 자생지로 여겨지고 있다.

춘란이라고도 부르는 보춘화는 이른 봄에 꽃이 피는 여러해살이풀로 겨울철에도 잎이 상록성인 상태로 남아 있어서 잎과 꽃을 모두 감상할 수 있는 자원식물이다. 이 때문에 채취의 표적이 되어 왔고, 분포의 북방한계선이어서 애초부터 개체수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절멸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과거에는 환경부가 법정보호종으로 지정해 보호하기도 했으나, 법률이 바뀌면서 보호종의 숫자를 줄이는 과정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남부 지방에는 흔하므로 국가적인 보호종에서 제외된다 하여도 문제가 없겠지만, 두타산 일대 등 강원 남부 지역은 이 식물분포의 북방한계 지역에 해당하므로, 강원도 보호식물로 지정해 보호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대흥란은 현재 환경부가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멸종위기야생식물 II급으로 지정해 보호하는 법정보호종이다. 남방계 부생난초로서 우리나라에서는 해남 대둔산 대흥사에서 처음 발견됐으며, 제주도와 남해안 지역에 드물게 자라고 있다. 꽃이 필 때까지는 녹색인 부분이 없어서 주변에서 영양분을 흡수하는 부생식물의 습성을 보이지만, 늦여름 열매가 열릴 때가 되면 줄기와 열매가 녹색이 되어 광합성을 하는, 아주 특이한 생태를 보여주는 식물이기도 하다.

국가적인 법정보호종일 뿐만 아니라 두타산 일대가 북방한계선이기 때문에 보전은 더욱 중요한데, 보춘화의 경우에는 서해안을 따라 황해도까지 올라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대흥란은 아직까지 그런 보고가 없으므로 이곳이 서해안과 동해안을 통틀어서 분포의 북방한계선이라 할 수 있다. 이 귀중한 대흥란 자생지는 몇 해 전 강릉대 이규송 교수팀에 의해 발견됐다.

고산식물 포함 700여 종류 생육

강원대 이우철 교수 등에 의해 1999년에 발표된 자료에 의하면 두타산 일대에는 100과 358속에 속하는 573종 95변종 18품종 등 686종류의 식물이 생육하고 있다. 이 자료에서는 두타산의 한국특산식물로 홀아비바람꽃, 누른종덩굴, 할미밀망, 터리풀, 노랑갈퀴, 금강제비꽃, 새며느리밥풀, 봉래꼬리풀, 병꽃나무, 금강초롱꽃, 고려엉겅퀴 등 30여 종류를 제시하고 있으며, 희귀식물로는 요강나물, 채고추나물, 참고추냉이, 생열귀나무, 금강제비꽃, 털댕강나무, 금강애기나리, 두루미꽃 등을 꼽은 바 있다.

또한, 다닥냉이, 붉은토끼풀, 겹달맞이꽃, 돼지풀, 미국가막사리, 망초, 서양민들레, 오리새 같은 귀화식물 20여 종류가 침입해 생태계를 교란하고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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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 17구간] 두타산 문헌고찰

산에 드는 것 자체가 두타행인 청정 명산
두타산과 청옥산의 관계·삼화사의 이승휴

강원도 삼척시의 미로면과 하장면, 동해시와 정선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댓재[竹峙·810m]와 백복령(百福嶺·780m) 구간의 주산 두타산(頭陀山·1,352.7m)은 이 산에 드는 것 자체가 두타행인 청정 도량의 명산이다.

두타산의 ‘두타(頭陀)’는 범어(梵語) dhuta의 음역으로서, 번뇌의 티끌을 털어 없애고, 의·식·주에 탐착하지 아니하며 청정하게 불도를 수행하는 것을 이른다. 후세에는 산야와 세상을 순력하면서 온갖 신고를 인내하는 행각의 수행, 또는 그러한 수행자를 지칭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두타산은 서울에서 원거리에 있는 동해가의 영산으로서 고도 1,300~1,400여m의 큰 산세를 이루고, 그 동북쪽 두타동천에 무릉도원(武陵桃源)의 선경을 이룬 무릉계곡을 품에 안고 있는 심산유곡의 명산이니, 이 산에 드는 것, 이 산에 오르는 것 자체가 바로 두타행이라 여겨진다. 두타 12행 중 그 첫 번째 행이 바로 인가를 멀리 떠나 산숲·광야의 한적한 곳에 있는 것, 곧 아란야처(阿蘭若處)에 머무는 것이다.

조선 중기에 삼척부사(三陟府使)를 지낸 성암(省菴) 김효원(金孝元·1532-1590)은 ‘두타산일기(頭陀山日記)’에서 명산으로서 두타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 무릉계곡 안쪽의 용추폭포
‘천하에 산수로서 이름난 나라는 우리나라만한 데가 없고, 우리나라에서도 산수로 이름난 고을은 영동만한 데가 없다. 영동의 산수 중에서도 기이한 형승으로 이름난 것은 금강산이 최고이고, 그 다음이 두타산이다. 산의 근원이 백두에서 일어나 동쪽으로 달려와 철령이 되고, 금강산이 되고, 대관령이 되었으며, 구덩이처럼 움푹 파인 곳은 계곡이 되고, 우뚝 솟은 것은 산봉우리가 되었다. 우뚝 선 것, 급하게 기울어진 것, 높고 험한 것, 탄탄하게 뻗은 것 거의가 한두 가지 형상으로는 말할 수 없는 수많은 모습을 지니고 있다. 두타산은 실로 삼척부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골짜기의 깊음과 수석의 기이함이 인구에 회자된 지 오래되었다’(성암선생유고 권2).

두타산의 산수와 산령 이름

두타산은 남쪽 424번 지방도 상에 큰 고개를 이룬 댓재가 위치하고, 북서쪽으로는 백두대간을 따라 올라가면서 박달령(朴達嶺)과 최고봉인 청옥산(靑玉山·1,403,7m) 및 연칠성령(連七星嶺·1,180m)·망군대(1,247m)·고적대(高積臺·1,353.9m)가 위치하고, 고적대에서 정북쪽으로 뻗어가고 있는 산줄기 상에는 갈미봉(1,260m)과 이기령(耳基嶺·810m)·상월산(上月山·970.3m) 등의 산봉과 고개가 자리하고 있다.

또 동북쪽으로 뻗어내린 가지산 줄기 상에는 예전에 오십정산(五十井山)으로 불리던 쉰움산(688m)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상봉인 청옥산 근처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학등 산줄기 좌측 바른골 우측에는 박달골의 물이 흘러내려가 용추폭포·쌍폭포 등의 비경을 연출하면서 선경인 무릉계곡을 형성하고, 하류로 흘러가면서 전천이 되어 동해로 흘러들어간다.

두타산은 현재 최고봉인 1,404m봉이 청옥산, 그 동쪽 1,353m봉이 두타산이라 불리고 있으나,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본래는 최고봉인 청옥산이 두타산, 현 1353m봉인 두타산이 청옥산으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곧 산경표에서는 태백산을 향하여 남하하는 백두대간 상의 산 이름 순서를 백봉령→두타산→청옥산→죽현(竹峴·댓재)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대동여지도에도 백봉령 남쪽에 두타산이 있고, 그 동남쪽에 청옥산이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그려져 있으며, 두타산과 청옥산의 산줄기 사이에 무릉계가 위치하는 것으로 그려져 있다.

또 조선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동국여지지의 삼척군 산천조에 관내의 대표적 명산으로서 두타산은 언급하고 있으나, 청옥산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동해시 일원에서 삼화동 방면으로 들어가다가 멀리 보이는 두타산의 모습을 보면 현재의 청옥산이 푸른 색을 띤 둥그런 육산의 모습으로 조망된다. 그러한 모습으로 인해 본래 두타산이란 이름이 현대로 오면서 청옥산으로 바뀌어 불리어지고, 두타산이란 산 이름은 자연스럽게 바위산으로 형성되어 있는 현 1353m봉쪽으로 이동되어 불리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두타산 정상부에 올라보아도 청옥산은 곧 원만한 형상을 한 육산 모습이고, 두타산은 첨봉(尖峯)을 이룬 골산(骨山) 모습이다.

또 조선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 삼척 두타산조에 의하면, 현재 쉰움산(688m)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오십정산(五十井山)과 그 옆에 있던 두타산 신사(頭陀山神祠)를 두타산 산허리[山腰]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러한 위치개념에 의해서도 자연스럽게 현 1353m봉이 두타산의 중심 산봉으로 자리 잡혀 갔을 것으로 추측된다.
▲ 쉰움산. 정상에 돌웅덩이가 많아 옛부터 신성시 돼 왔는데, 조선시대에는 신사를 두고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다.


청옥산이란 이름은 19세기 후엽 고산자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 삼척조에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다. 이러한 두타산 최고봉과 제2봉에 대한 보편적 산 이름 정서는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남아 삼척의 대표적 명산하면 두타산을 언급할 뿐 청옥산이라고 언급하는 예는 드물다.

다만 18세기 후엽 영조 때 편찬한 여지도서 산천조에 수록한 삼척부지도에 현재의 두타산·청옥산의 이름과 같은 위치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일례도 있으나, 여지도서 삼척부 산천조에 청옥산 이름이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당대 지도가 아닌, 후대 지도를 삽입해 놓은 것이 아닌가 한다.

청옥산과 두타산을 잇는 7.5km 능선은 해발 1,300여m의 백두대간 능선길로서 마치 거대한 횃대 같다고 하여 옷걸이 고갯길이라는 의미로 의가등(衣架嶝)이라 불리기도 한다.
청옥산과 고적대 사이의 연칠성령(連七星嶺)은 글자 그대로 새기면 하늘에 계신 칠성님께로 이어지는 고개라는 의미로 풀이해 볼 수 있겠으나, 이 고장 땅이름 유래에 의하면, 동쪽 사원터 방면에서 서쪽 하장면 방면으로 넘어가는 높은 고개로 7개 등성이가 있다고 하여 일컬어진 고개 이름으로 보인다.

두타산 구간의 최북단에 위치한 백복령(百福嶺)은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복을 희망하는 고개, 다복하기를 희망하는 고개라는 의미로 희복현(希福峴) 이라 불린 이름으로 보이는데, 희다는 白 의 훈을 빌려 白福嶺으로, 많다는 百의 훈을 빌려 百福嶺으로 불렸고, 이를 소리나는 대로 적어 白鳳嶺으로 쓰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두타산 남쪽 댓재 에는 두타산 방면으로 오르는 등산길 입구쪽 북쪽 언저리에 두타영산지신(頭陀靈山之神)이란 신위를 모신 산신각이 자리하고 있다. 본래의 두타산 신사는 조선시대에는 쉰움산 정상 부근에 있었는데, 지금도 그 석축제단의 모습이 일부 남아 있다. 그 일대 산을 오르다 보면 신에 의지하려는 무속인들이 지금도 치성을 드리고 있는 모습을 가끔 목격하기도 한다.

댓재라는 이름은 곧 큰 산줄기의 고개라는 의미로 일컬은 ‘대고개’ 라는 뜻의 말이라 생각된다. 대동여지도에는 이를 죽치(竹峙)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대고개·댓재를 뜻옮김한 표기다. 여기서의 대는 곧 대들보·대보름 등과 같은 크다는 의미로서 竹의 훈을 빌려 표기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댓재 서쪽 기슭 죽현천(竹峴川) 부근에 고대 죽령현(竹嶺縣) 터가 있었던 곳으로 표기하고 있다. 삼국사기 지리지(권 35) 삼척군조에 의하면, 죽령현은 고구려 시기에는 죽현현(竹峴縣)으로 불리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이후 죽령현으로 개칭되었다. 이에 의하면 댓재는 고대시절에는 竹峴→竹嶺으로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竹峙로도 불렸고, 우리말 땅이름으로 댓재 로도 속칭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동국여지승람 삼척 고적조에서는 고죽령현(古竹嶺縣)터를 현 삼척시 원덕읍 옥원리에 있던 옛 옥원역(沃原驛)자리로 보기도 하였으나, 댓재의 위치와 비교할 때 신뢰할 만한 설이 못되는 것으로 보인다.

두타산의 이름과 삼화사 사적

두타산이란 이름은 고려시대 두타산인(頭陀山人) 이승휴(李承休·1224-1300)의 보광정기(?光亭記·동안거사집, 잡저)와 최해(崔瀣·1287-1340)의 두타산간장암중영기(頭陀山看藏庵重營記) 등에 의하면, 적어도 고려시대 이래로 현재까지 두타산으로 불려오고 있다. 다만 최고봉과 제2봉의 이름이 바뀌었을 뿐 전체의 산 이름은 시종여일하게 두타산으로 불리고 있다.

▲ 삼화사. 신라 말 두타삼선 창건설과 범일국사 창건설, 자장국사 창건설 등이 있는 천년고찰이지만, 한 때 폐허됐다가 근래에 들어와 옛터는 쌍용시멘트에 내주고, 현재의 위치에 새로 마련했다.
최해의 간장암중영기는 동국여지승람 삼척부조에는 안축(安軸·1287-1348)의 기문으로 언급되어 있으나, 최해의 졸고천백(拙藁千百)· 이승휴의 동안거사집·동문선 등에 모두 최해의 기문으로 전문이 수록되어 있고, 안축의 근재집(謹齋集)과 여지승람에는 일부만 게재하고, 끝을 ‘~云’으로 끝맺음하고 있어 곧 남의 글 이야기하듯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동국여지승람에 인용된 안축 기문설은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

또 고려시대 석식영암(釋息影菴)의 삼화사 사적에 관한 기문에, 신라 말에 세 신인(神人)이 이곳 두타산 기슭, 삼화사 맞은편 삼공암(三公巖)으로 보이는 삼공봉 근처에 자리 잡고 오랫동안 일을 의논하며 머물다 간 일이 있고, 뒤에 사굴산문(??山門)의 개조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 일명 품일(品日)이 그 자리에 절을 세우고 삼공암(三公庵)이라 현판을 달았다는 내용과,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頭陀山三和寺古今事蹟)에 고적(古蹟)을 인용하여 자장조사가 본국 오대산에 들어가 성적(聖蹟)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두타산을 유력(遊歷)하고 신라 선덕왕 11년(642)에 비로소 이곳에 흑련대(黑蓮臺)를 창건하니, 지금의 삼화사였다는 기록 내용에 의하면, 두타산이란 산 이름은 더 거슬러 올라가 신라 때부터 불려온 이름으로도 추측해 볼 수 있다.

신라 말에 두타산 삼화사 일대에 들어와 있었다는 세 신인은 후대에 두타 삼선(頭陀三仙)으로도 지칭되고 있는데, 이들이 많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에 많은 행적을 남기고 있는, 도의로써 서로 연마하고 산수를 즐겨 찾아다니며 수행하던 통일신라시대의 사선랑(四仙郞)과 같은 대표적 화랑의 무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또 두타산삼화사고금사적과 진주지(鎭珠誌) 등에 보이는 삼화사 창건설화에 의하면, ‘삼화사 숲속 삼층보탑에 이르기를, 약사삼불인 백(伯)·중(仲)·계(季) 삼형제가 처음 서역에서 동해를 유력(遊歷)하면서 한 척의 돌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와서 정박한 후 맏형은 흑련(黑蓮) 한 송이를 가지고 흑련대(黑蓮臺)에, 둘째는 청련(靑蓮) 한 송이를 가지고 청련대(靑蓮臺)에, 막내는 금련(金蓮) 한 송이를 가지고 금련대(金蓮臺)에 머물렀다고 하는데, 흑련대가 지금의 삼화사이고, 청련대가 지금의 지상사(池上寺), 금련대가 지금의 영은사(靈隱寺)였다고 전한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약사삼불이 타고 온 용의 몸이 변하여 바위가 되었으며, 바위 뒤쪽에는 약사삼불이 앉았던 자리가 완연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보이는 약사삼불은 1657년 천재지변으로 흩어지고, 맏형인 백의 불상만 하나 남은 것이 바로 현 삼화사 적광전에 안치되어 있는 보물 제 1292호 철조노사나불좌상이라 전한다. 또 석식영암의 기문에 의하면, 조선 태조 때 칙령을 내려 이 절의 이름을 문안(文案)에 기록하고 후사(後嗣)에 전하게 하면서 신인이 절터를 알려준 것이니 신기한 일이라 하고, 그 옛날 왕건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부처님 영험의 덕택이었으므로 이 사실을 기리기 위하여 절 이름을, 삼국을 화합하여 통일하였다는 의미로 삼화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두타산의 명승과 고적

두타산 무릉계곡 일원에 자리한 여러 명승에 대한 이름은 김효원의 두타산일기와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두타산기에 의하면, 김효원이 삼척부사 재임시 이곳을 답산하였을 때 명명한 것이라 전한다. 동해시 삼화동 일대의 무릉계곡 하류쪽과, 삼척시 미로면 내미로리 일대의 천은사계곡 하류쪽의 경관은 필자가 이곳을 답산하기 한 해 전이던 2002년도에 대대적인 홍수피해로 거의 폐허화되었으나, 다행히도 절경이 펼쳐지기 시작하는 금란정 일대의 무릉계곡 입구와 천은사 일대의 계곡부터는 많이 훼손되지 않은 모습을 지니고 있어서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여긴 적이 있다.

무릉계곡에 들어서면 수백 명이 앉아서 놀 만한 무릉반석이 펼쳐져 있고, 그 무릉반석 냇가에 아담한 금란정(金蘭亭)이 서 있다. 금란정은 삼척의 유림들이 향교 명륜당에 모여 한말까지 유학강론에 전념하였는데, 한일합방으로 폐강하기에 이르자 이에 분개하여 우의를 다지는 금란계(金蘭契)를 결성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정자를 건립하기로 결의하였으나, 일본 관헌들의 제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945년 해방을 맞이하게 되자 이에 금란계원과 그 후손들이 과거 선인들의 뜻을 계승하여 1949년 봄에 정자를 건립하고, 1956년 9월에 현재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 전한다.

그 옆 등산로 길가에는 큰 반석을 떼어다 석축 위에 비스듬하게 세워 놓은 듯한 직사각형 반석 위에 ‘武陵仙源 中臺泉石 頭陀洞天’이라 쓴,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1517-1584)의 호쾌한 필력이 넘치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마도 이곳 냇가 무릉반석에 새겨져 있는 양봉래의 절묘한 글씨가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점점 선명치 못하여져 감상하는 이들을 위해 이를 복각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들 세 용어 ‘선원·천석·동천’이란 말은 모두 도교사상·신선사상과 관련한 무릉도원의 선경을 상징하고 있는 말들이므로, 양사언이 두타산의 진면목을 단 3개 용어를 통하여 참으로 적절하게 잘 표현해 놓고 있다고 생각된다.

삼화사 뒤쪽 산중턱에는 중대천석의 중대와 관련 있는 중대사터가 있다. 삼화사 일대를 지나면 폭포수가 암반을 타고 흘러내리는 명승 학소대(鶴巢臺)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두타산의 암릉은 기막힌 절경이다. 허목의 두타산기에 의하면, 이 일대 경관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폭포수가 흐르는 바위를 천주암(?珠巖)이라 하고, 그 앞산 봉우리에는 옛날 학의 둥지가 있었는데, 지금은 학이 오지 않은 지가 60년이라고 한다. 줄사다리를 딛고 몇 층을 올라가 지조암(指祖庵·현 관음사)을 유람하였다. 이 산(지조산)의 암석이 끝나는 곳 옆으로 석굴이 있으며, 그 속에는 마의노인(麻衣老人)이 쓰던 토상(土床)이 있고, 남쪽으로는 옛 성(城)이 보인다.’

위에 보이는 옛 성은 곧 관음사 일대에서 무릉계곡 건너편 산쪽으로 보이는 신라 파사왕 23년(102)에 축성하고, 조선 태종 14년(1414)에 수축하였다는 두타산성을 지칭한 것이다.

관음사 건너편 두타산 정상부로 오르는 코스로 가파른 등산로를 약 20분 정도 오르면, 허물어진 산성 주변에 두타산성이라 쓴 안내표목이 서 있다. 이곳에서 반대로 무릉계곡 건너편을 바라보면 관음폭포와 관음사가 한눈에 조망되고, 또 그 동쪽 아래쪽으로 삼화사 일대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이곳 암벽에 올라서서 바로 아래를 내려다보면 깎아지른 듯한 천길 낭떠러지 아래로 산성12폭이 있는 절경을 연출하고 있는 협곡이 내려다보인다.
▲ 천은사. 이승휴가 삼화사에서 빌린 불경을 용안당에서 읽었는데 후에 간장암이라 고친 암자가 이 부근 이승휴 유허지(사적 제421호)에 있었다.


이쪽 두타산성과 관음사 사이의 무릉계곡 일대를 허공다리라고 일컫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의 공격에 맞서 의병항쟁을 벌일 때 이 계곡 양편 사이에 줄을 매고 허수아비 신장을 매달아 골짜기 반공을 오가게 하면서 왜군들을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에서 유래된 땅이름으로 보인다.

이곳을 지나 약 15분 정도 가면 계곡을 건너 문간재로 올라 학등[鶴背]을 타고 곧 바로 두타산 최고봉인 청옥산으로 오르거나, 또는 바른골 일명 사원터골을 경유하여 망군대·연칠성령쪽으로 오르게 된다. 옛날 어느 선비가 층암절벽의 높은 학소대에서 종이로 학을 접어서 날렸는데, 그 종이학이 진짜 학이 되어 날아가 청옥산에서 문간재로 내려온 산줄기의 산등에 앉았다고 한다. 그 학이 앉았던 산등이 바로 지금의 학등이라 전한다.

계곡 건너 문간재로 가는 길을 무시하고, 곧장 계곡 따라 오르면 수량이 풍부한 거대한 물줄기가 약 45도 각도로 양쪽에서 내리쏟는 쌍폭이 나타난다. 이곳에서 좀더 오르면 신선봉 남쪽 절벽 아래에 수수만년을 내려오면서 물줄기의 힘으로 오묘한 절경을 연출해 놓은 폭포가 있으니, 곧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폭포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3단 폭포인 용추폭포(龍湫瀑布)다. 날씨가 가물 때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고 한다.

두타산 정상부에서 동북쪽으로 뻗어내려간 산허리 부근에는 현재 무속인들이 신성시하며 치성을 드리는 곳으로 유명한 쉰움산이 있다. 쉰움산은 두타산 산허리에 있는 산으로, 산정에 약 50개 우물이 있는 산이라 하여 쉰우물산, 곧 오십정산(五十井山)이라 부른 신비의 산이다. 척주지(陟州誌)에서는 그러한 쉰움산을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흑악사(黑岳寺·현 천은사) 위쪽에 오십정산이 있다. 암석 위에 돌웅덩이 [石?]가 50개인데, 깊은 것은 이끼 색이 짙고 물이 맑아서 신정(神井)이라 한다. 가물면 이곳에서 비를 빈다. 풍속에 고을 사람들이 봄·가을로 대대적으로 제사를 지낸다.’

쉰움의 움은 움푹 들어가다, 또는 우묵하다는 말에서 온 것으로 추측되며, 한편 그러한 움푹 들어간 웅덩이에 고인 물을 신정(神井)으로 여기던 옛 사람들은 이를 쉰우물산 곧 오십정산이라 일컬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조선 시대에는 이곳을 신성시하여 두타산의 신사를 이곳에 두고 봄·가을로 치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쉰움산 기슭 내미로리에는 천은사(天恩寺)가 있다. 이 일대는 고려 충렬왕 때 문신이며 학자인 동안거사(動安居士) 이승휴가 은거하였던 이승휴 유허지이기도 하다. 고려시대에는 이 일대 천은사계곡을 용계(龍溪), 이 일대 땅이름을 귀동(龜洞), 또는 귀산동(龜山洞)이라 하였는데, 이곳은 이승휴의 외가가 있었던 곳이다.

충렬왕 때 그의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이곳 귀동 용계변에 용안당(容安堂)이란 별장을 짓고, 이곳에서 우리 민족의 역사 서사시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저술하였다. 또 천성이 불도를 좋아하여 늘 삼화사에 있는 대장경을 빌려다 읽었는데, 10년만에 다 완독하였다고 한다. 용안당의 ‘容安’ 은 곧 진 도연명(陶淵明·365-427)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그가 머무는 집을 무릎을 펼만한 편안한 공간만 살필 뿐이라는 말로 언급한 용슬이안(容膝易安)에서 딴 당호다. 뒤에 이 별장을 승려에게 희사하여 절로 만든 후 그가 대장경을 보던 곳이라는 의미로 절의 현판을 간장암(看藏庵)으로 고쳐 달았다.

현재 이곳은 사적 제421호로 지정되어 있고, 유허지 안내판 개울 건너편에는 이승휴의 사당인 동안사(動安祠)가 건립되어 있다.

글=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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