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풍수

대명당은 아닐지라도 길지임은 분명
명주군왕릉의 풍수지리…‘용진혈적하고 수산수수하다’

삼국시대의 왕릉은 신라의 경주나 백제의 부여를 연상하는데,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 보광리에 신라의 ‘명주군왕능(溟洲郡王陵)’이 현존하고 있다. 명주군왕릉은 명주군(지금의 강릉)에 있는 왕릉이라는 의미로, 신라 태조무열왕의 6세손이며 강릉김씨의 시조인 김주원(金周元)의 묘다. 비록 정식 왕은 아니지만 왕릉의 호칭을 사용하고 있으며, 김주원은 강릉김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 명주군왕릉의 전경. 앞쪽에는 왕의 묘이고 뒤쪽에는 왕비의 묘다.

신라의 김주원과 조선의 단종은 동병상련

대관령에서 새봉을 지나고 선자령을 지나면 곤신봉(坤申峰·1,127m)에 이른다. 곤신봉에서 백두대간 길을 따라 계속 가면 노인봉으로 가는 백두대간 능선이고, 대공산성으로 가는 길을 따라가면 명주군왕릉에 이른다. 이 왕릉은 영동고속도로 상행선 강릉휴게소 뒤편 가까운 곳에 있다.

신라 37대 선덕왕(재위 780-785)이 후계자가 없이 죽자 김주원은 왕위계승자로 가장 유력한 위치에 있었으나 김경신(金敬信)이 왕위에 오르게 되었는데, 이가 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선덕왕이 후사가 없는 상태에서 군신회의를 열고 김주원을 추대하기로 계획되었다. 김주원은 경주의 왕궁으로부터 북쪽으로 20리 밖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마침 폭우로 인하여 알천(閼川·현 경주 부근의 하천)을 건널 수 없게 되어 결국 회의에 참석을 못하게 되었다. 이에 신하들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원성왕을 추대했다.

▲ 명주군왕의 능향전과 석상은 황제 능의 양식이다.

그 후 원성왕은 김주원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어머니의 고향인 강릉에 은거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에 원성왕은 김주원을 명주군왕으로 봉하고 명주를 중심으로 양양, 삼척, 울진, 평해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김주원은 정식 왕은 아니지만 왕의 칭호를 받게 되었으며, 강릉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명주군왕릉 입구에 있는 숭열전(崇烈殿)은 신라 29대 무열왕의 위패를 봉안한 곳이며, 숭의제(崇義齊)는 명주군왕의 제실이며, 청간사(淸簡祠)는 김시습의 영정을 봉안한 사당이다.

잘 알다시피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통분하여 읽던 책을 모두 불태워버리고 승려가 되어 방랑길에 오른 생육신 중 한 사람이다. 물론 김시습은 명주군왕의 23세손으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한 평생을 야인으로 남은 인물이다. 이러한 이유로 강릉김씨 대종회에서는 김시습을 강릉김씨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정신적 지주로 생각하고 이곳에 특별히 청간사를 건립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김주원이 명주군왕의 작위를 받았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있다. 왕위계승전에서 원성왕에게 억울하게 왕위를 빼앗긴 김주원은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강릉까지 도피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김주원의 차남인 김헌창(金憲昌)은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하게 된 사실에 대해 불만을 품고 822년(헌덕왕 14)에 웅주(熊州·현 충남 공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도모하였으나 실패하였다는 사실과,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金梵文)도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왕권에 도전하지만 이루지 못한 사실은 조선시대 단종 복위운동과 비슷하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은 강릉김씨인 김시습의 가슴에 울분을 쌓게 만들었을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무열왕의 숭열전(崇烈殿)은 김주원의 왕위에 대한 정통성을 확보하고, 김시습의 청간사는 왕위에 대한 당위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며, 또한 이승만 대통령이 1959년 일국의 대통령이 지은 명주군왕 신도비문은 김주원의 왕위에 대해 확고한 인정을 받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 2 강릉김씨인 김시습의 사당인 청간사도 명주군왕의 재실과 함께 있다.(왼쪽) 명주군왕의 무덤은 일반 묘의 형식이다.(오른쪽)

묘인가, 왕릉인가

김주원의 능은 조선의 왕릉처럼 입구에는 홍살문이 있고, 고종황제의 홍릉처럼 일자형의 능향전(陵享殿)과 능향전 앞쪽 좌우에는 문인석과 무인석을 비롯하여 석수(石獸)가 있다. 다만 능향전 뒤에 있는 묘는 일반 묘 형식으로 되어있다. 그러니까 일반 묘 형식에서 황제 능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선시대의 묘제는 능(陵)·원(園)·묘(墓)로 구분하여,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이고, 원은 왕의 사친(私親·임금의 부모)·왕세자·왕세자비의 무덤이고, 묘는 대군·공주·옹주·귀인 등의 무덤으로 벼슬의 품계에 따라 명칭과 분묘 양식이 각기 다르다.

다만 정식 왕이 아닐지라도 왕과 왕비로 추존되면 왕릉이 된다. 예들 들면 서오릉에 있는 경릉(敬陵)은 덕종(德宗·세조의 장남)과 소혜왕후의 능,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장릉(章陵)은 원종(元宗·선조의 다섯째 아들이자 인조의 아버지)과 인헌왕후의 능, 파주시에 있는 영릉(永陵)은 진종(眞宗·영조의 세자)과 효순왕후의 능, 화성시에 있는 융릉(隆陵)은 장조(莊祖·영조의 둘째아들로 사도세자)과 헌경왕후의 능, 구리시 동구릉에 있는 수릉(綏陵)은 문조(文祖·순조의 장남이며 헌종의 아버지)과 신정왕후의 능이 있다. 한편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묘라고 부른다.

김주원의 무덤이 묘인지, 아니면 왕릉인지에 대한 구분은 기존의 묘제형식보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여야 할 것이다.
능향전 뒤쪽에 명주군왕과 왕비의 묘가 상하로 안장되어 있다. 비석에 보면 ‘王妃墓在後(왕비묘재후)’라고 적혀있다. 즉 앞쪽이 왕의 묘이고 뒤쪽은 왕비의 묘다. 묘가 좌우로 있을 때에는 상석의 위치에서 묘를 바라보고 ‘남좌여우(男左女右)’라 하여 왼편에는 남자, 오른편에는 부인의 위치가 된다. 다만 남녀가 서로 바뀌는 경우에도 종종 있으며, 이런 경우에는 비석에 ‘부우( 右)’라고 기록한다. 길흉화복에는 영향력이 없고 전통적인 관습일 뿐이다.


길흉은 좌향(坐向)·산수(山水)·시운(時運)에 달려

이곳의 묘는 백두대간의 곤신봉에 출발하여 시계바늘 방향으로 회룡고조(回龍顧祖)한 지세다. 회룡고조는 풍수용어로 조종산(祖宗山)이 조산이 되는 산세다. 곤신봉에서 출발한 산줄기가 180도 번신( 身)하여 다시 곤신봉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혈이 역결(逆結)하는 산세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산세는 현공풍수이론으로는 쌍성회향(雙星會向)에 적합하다. 쌍성회향은 앞쪽에 물이 있고 물 뒤에는 안산과 조산이 있어야 합국(合局)이 된다.

김주원의 묘의 길흉화복을 알기 위해서는 풍수지리의 3대 요소인 좌향(坐向), 산수(山水), 시운(時運)의 기본자료가 있어야 한다. 묘의 좌향은 나경(羅經·나침반)으로 측정하면 되고, 산수는 형기풍수이론으로 용혈사수(龍穴砂水)를 보면 되지만, 운명한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어 길흉을 판단하는 데 어려움이 남는다.

형기풍수로 보아 명주군왕의 묘는 대명당은 아닐지라도 용진혈적(龍眞穴的)하고 수산수수(秀山秀水)하여 길지임에는 분명하다. 다만 김주원의 슬하에는 3형제를 두었는데, 장남인 김종기(金宗基)의 손자인 김양(金陽)의 자손은 대가 끊기고, 차남인 김헌창의 부자는 반란으로 무후(無后)하고, 삼남인 김신(金身)이 유일한 강릉김씨로 김주언의 증손 3형제에서 강릉김씨의 최초 분파가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미루어 보면, 김주원의 묘는 길지이기는 하지만 시운이 맞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시운은 어느 묘이든지 어느 집이든지 적용되며, 설령 시운이 맞지 않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본래 일기(一氣)는 음양으로 나누어지면서 소식영허(消息盈虛)하고 순환무단(循環無端)한 변화가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길한 것도, 영원히 흉한 것도 없다. 하늘의 시간변화에 따라 조화를 이루면 순천(順天)하는 자는 흥하게 되고, 부조화하면 역천(逆天)하게 되어 망하게 된다는 이치다.

▲ 강릉김씨 시조 명주군왕릉 입구 안내석.(왼쪽) 명주군왕릉은 회룡고조(回龍顧祖)의 산세로 정면에 조산(朝山)인 곤신봉이 바라다보인다.(오른쪽)

한편 명주군왕릉의 좌향은 현재의 상석이나 둘레석을 기준으로 측정하면 지반으로 갑좌(甲坐·75도)와 묘좌(卯坐·90도) 사이, 즉 82.5도다. 풍수이론에 어느 좌이든지 좌와 좌 사이는 공망(空亡)이라고 하여 흉상(凶象)이 되므로 절대로 공망의 좌향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철칙이다.

다만 명주군왕의 묘는 조장(造葬)한 당시의 좌향, 즉 관(棺)의 좌향은 지반 갑좌경향(甲坐庚向·75도)으로 입향하였을 것이다. 만약에 공망으로 입향하였다면 강릉김씨의 후손들이 번창하여 백자천손(百子千孫)할 리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관상의 좌향은 공망이다. 상석을 비롯한 각종 석물을 공망으로 입향한 이유는 조선 후기 1747년에 묘역을 새로 단장할 당시에 좌향이론을 잘못 적용하였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형기풍수이론에서 좌향을 결정하는 방법은 안산 또는 조산이 정면과 묘의 좌향을 일직선상에 둔다. 특히 길지일수록 묘의 좌향과 안대(案對)는 일직선상에 자연적으로 위치하고 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 명주군왕릉에서 가까이에 있는 안산과 일치하고 멀리로는 곤신봉도 정면에 위치하여, 즉 묘와 안산 그리고 곤신봉이 일직선상에 놓여있다.

곤신봉(坤申峰)에서 곤(坤)과 신(申)은 좌향에 관한 용어로 곤방(坤方)은 225도이고 신방(申方)은 240도다. 특정지점에서 곤신방을 향하면 곤신봉이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특별한 지역이 없다. 그리고 우리나라 산 이름 중에 방위와 관련한 용어를 사용한 산이름은 극히 드물어 곤신봉을 ‘坤申峰’으로 표기한 점에 대해 의문이 있는데, 명주군왕과 관련한 산이름이라면 ‘곤신봉(困臣峰)’이 아닐까.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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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대장정<20구간>노인봉] 문헌고찰

선자령은 산인가 고개인가
대관령 ·선자령 ·진고개 ·청학동에 대한 옛 기록들

강원도 강릉시와 평창군의 경계를 이루는 백두대간 상의 대관령에서 진고개[泥峴(니현)]에 이르는 노인봉 구간은 백두대간의 허리 부분에 위치한 주요 산줄기이다. 이 산줄기 구간은 동고서저형(東高西低形)의 특이한 산세를 이루면서 동쪽은 높은 산릉과 깊은 골짜기를 이루고, 서쪽은 낮고 평평한 초원지대를 이루고 있는 고원지대이다.
이 일대는 바람이 많고 겨울철에는 눈이 많이 쌓여 대관령 북쪽의 선자령과 남쪽의 능경봉·고루포기산 구간은 심설(深雪) 산행지로도 유명하며, 바람이 강력한 고원지대에는 최근에 세운 풍력발전기가 구릉 곳곳에 서 있어 마치 풍차가 서 있는 듯 이국적 풍경을 보는 것 같다.

조선 중종 때 고형산이 자력으로 길 넓혀

대관령은 예부터 영동과 영서를 잇는 동서교류 상의 큰 관문[大關]이었다. 서울로 통하는 큰 길로 아흔 아홉 구비를 이루고 있는 높고 큰 영마루다.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관동(關東)과, 대관령 이동의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영동, 대관령 이서의 강원도 지역을 일컫는 영서라는 땅이름도 이 영마루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대관령은 동국여지승람 강릉조에 의하면, 강릉부의 진산으로서, 일명 대령(大嶺)으로도 불리었다. 고려시대 김극기(金克己)의 차권적시(次權迪詩)와 고려사절요 고종 4년조 기사 및 산경표에 의하면, 대관산(大關山)으로도 불리어진, 큰 영마루를 이루고 있는 산이다. 고개가 험준하여 오르내릴 때 ‘대굴 대굴 구르는 고개’ 라는 뜻에서 대굴령이 음차(音借)되어 대관령이 되었다는 속설이 전하기도 하는데, 어디까지나 속설일 뿐이다.

▲ 청학동 소금강. 이 계곡을 둘러싼 산 전체를 청학산이라고도 했다.

대관령은 조선 초기까지는 사람만 겨우 통행하는 토끼길만 있었는데, 조선 중종 때 고형산(高荊山·1453-1528)이 자력으로 몇 달에 걸쳐 도로를 개설해 놓았다고 한다. 이로 인해 병자호란 때 오랑캐 군사가 주문진에 상륙하여 고형산이 개설한 도로를 통하여 대관령을 쉽게 넘었으므로 한양 함락에 있어서 적을 이롭게 하였다 하여 왕명으로 고형산의 묘를 파내어 육시의 형을 내린 바 있다고 한다.

그러나 병자호란과 대관령과는 밀접한 관련이 없고, 또 고형산이 1519년(중종14)에 남곤(南袞) 일파와 함께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켜 신진사류들을 축출하기도 하여 이로 인해 강릉사회에 상당한 영향이 미치기도 하였으므로 뒷날 의도적으로 조작한 이야기로 보기도 한다.

여지승람 강릉 역원(驛院)조에 의하면, 대관령 위에 대령원(大嶺院), 고을 서쪽 28리 현 강릉시 성산면 어흘리 부동(釜洞·가맛골) 남쪽에 제민원(濟民院), 고을 서쪽 20리 현 성산면 구산리(丘山里)에 구산역(丘山譯) 등의 역과 역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대관령은 조선시대에 영동과 영서를 잇는 주요 교통로였음을 충분히 살필 수 있게 한다.
위의 제민원에서 대관령 고갯마루에 이르는 대관령 길은 현 대관령터널 위쪽의 옛 고속도로 대관령 구간이 개설된 이후 ‘대관령 옛길’로 불리고 있다. 승용차로 현 대관령을 넘어 옛 고속도로를 따라 조금 내려가다 보면 도로 우측에 붓글씨체로 크게 ‘大關嶺옛길’ 이라 쓰고, 그 밑에 좀 작게 ‘반정(半程)’이라 쓴 우람한 돌비(유래비)가 세워져 있다. 반정 속칭 반쟁이는 이곳이 대관령 아래쪽 제민원에서 옛길 따라 올라오다 보면 대관령 길의 절반의 노정이 되는, 절반 정도의 지점이라 하여 일컬어진 땅이름으로 보인다.
▲ 대관령 성황사. 범일 국사가 신위로 모셔져 있다.

이곳 반정에서 옛길을 따라 약 300m 정도 내려가면 길 옆 산소 앞에 ‘記官李秉華遺惠不忘碑(기관이병화유혜불망비)’라 쓴 비석이 서 있다. 곧 조선 말기 순조 24년(1824)에 대관령을 오르내리는 여행자들이 쉴 수 있게 각종 편의를 제공하던 반쟁이 오두막(주막)을 짓게 하여 농사를 짓지 않고도 이를 관리하며 살 수 있게 하여준 이병화의 선덕을 기려 세운 비다.

이곳을 지나 계속 내려가면 제민원이란 역원 이름에서 땅이름이 유래된 상제민원·하제민원을 지나게 되고, 이곳에서 약 600여m 더 내려가면 원읍현(員?峴), 속칭 원울이재에 이르게 된다. 원울이재는 여지승람 강릉조에 의하면, ‘세간에 전하기를, 어떤 원이 강릉부사로 있다가 갈려서 돌아갈 때 여기에 와서는 되돌아보며 슬프게 눈물을 흘렸으므로 이로 인해 원읍현[원울이재]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속설에 의하면 곧 옛날 고을원이 영서에서 강릉으로 올 때는 길이 험하여 이곳에 앉아 쉬면서 울고, 강릉을 떠날 때에는 강릉의 경치가 너무 좋아 떠나기 싫어 이곳에서 앉아 쉬면서 울었다고 하여 일컬어진 고개 이름이라 전한다.

원울이재에서 옛길 따라 약 900m 정도 내려가면 옛 고속도로 옆에 있는 대관령박물관에 이르게 되고, 대관령박물관 몇m 정도 못미처 제민원터였던 작은 기와집 옆에도 반정과 같이 ‘大關嶺옛길-濟民院’ 이라 쓴 우람한 돌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이 곧 대관령 옛길의 초입이다.

이곳 옛길 초입에서 역으로 대관령 반정 방면으로 조금 들어가면 대관령과 제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합류하여 형성된 계곡이 나타나는데, 수량도 꽤 풍부하고 계곡과 수석이 매우 수려하다. 초입의 계곡가 우측 큰 바위에는 영해이씨(寧海李氏)들이 이곳에 들어와 산 곳이라는 의미로 새겨놓은 ‘영해이씨세장동(寧海李氏世藏洞)’이란 각자도 보인다.

대관령의 국사성황신과 산신의 정체
대관령 옛길의 반정에서 옛 고속도로를 건너 다시 대관령 옛길과 이어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대관령에서 선자령 방면으로 가는 백두대간 주능선에 올라선다. 여기서 대간을 건너 반대편 산기슭으로 약 5분 정도 내려가면 ‘성황사(城隍祠)’와 ‘산신당(山神堂)’이라 쓴 현판을 단 두 동의 당집 건물이 있는 곳에 이른다. 또 그 앞 등산로 가에는 두 당집의 제례 따위를 돕고 관리하는 곳으로 보이는 살림집 건물 한 동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서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약 20~30분 정도 내려가면 옛 대관령휴게소 근처에 ‘대관령국사성황당(大關嶺國師城隍堂)’ 이라 쓴 거대한 돌비가 서 있는 곳에 이른다.
성황사가 바로 ‘대관령국사성황지신주(大關嶺國師城隍之神主)’라 쓴 위패와 그 국사성황신의 영정을 봉안한 대관령국사성황사이고, 산신당은 ‘대관령산신지신주(大關嶺山神之神主)’ 라 쓴 위패와 그 대관령산신의 영정을 봉안한 대관령산신당이다.
▲ 대관령 산신당. 김유신 장군을 신위로 모시고 있다.

국사성황신은 통일신라시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문(?堀山門)의 개창조 범일국사(梵日國師·810-889)가 죽어서 되었다는 강릉지방의 수호신이라 전한다. 고려사 왕순식전(王順式傳)에 의하면, 명주장군(溟州將軍) 왕순식이 태조 왕건의 신검 토벌을 도우려고 출정할 때 대관령에 이승(異僧)의 사당이 있어 제사를 베풀고 기도한 일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그 이승사(異僧祠)가 바로 범일국사를 봉향하던 지금의 국사성황사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지금의 국사성황사는 일찍이 고려 초부터 건립되어 이에 봉안한 범일국사를 영동 일대의 수호신으로 봉향하여 온 것으로 보인다.

산신당의 대관령산신은 허균(許筠·1569-1618)의 성소부부고(惺所覆?藁) 대령산신찬(大嶺山神贊)에 의하면, 신라 대장군 김유신(金庾信)이라 전해 온다. 곧 김유신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면서 산신에게 검술을 배운 일 등의 인연으로 백제를 평정한 후 이곳 대관령의 산신이 되어 조선시대까지도 그 신령스러운 이적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조선 경종 때 강릉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를 취사 선별하여 다시 간행한 강릉지(江陵誌) 풍속조에 의하면, 고려 태조가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남정(南征)하였을 때 꿈에 승속이신(僧俗二神) 곧 승려와 속인의 두 신이 병졸을 이끌고 와서 구해준 꿈을 꾸고서 싸워 이기게 되어 대관령산신에게 제사하고 치제(致祭)하기에 이르렀다는 내용에 보이는, 두 신도 바로 범일국사와 김유신 장군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선자령 정상. 강릉쪽에서 오를 때는 엄청난 산이지만, 횡계쪽에서 보면 둔덕의 고개처럼 느껴진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은 강릉단오제 때 그 주신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행사 내용 중에 국사성황신의 배위(配位)인 대관령 국사여성황신이 된 강릉정씨가의 딸과 관련한 내용, 곧 두 성황신 내외를 합사(合祠)하는 따위의 일이나, 국사성황신이 호랑이를 시켜 정씨가의 딸을 납치하여 영혼결혼하는 따위의 전설적 이야기는 불교사상적 관점에서 볼 때 무속적인 민간신앙과 결부되어 불교의 본질이 왜곡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범일국사는 조당집(祖堂集) 권 17에 의하면, 당에 유학하였을 때 염관 제안(鹽官 濟安) 선사에 의해 동방의 보살로 칭송된 당대의 고승이다. 법명 그대로 불교의 태양과 같은 당대 최고의 불교지도자로서 국왕들에게도 국사로 예우를 받은 인물이다. 그러한 대선승의 신이 정씨가의 딸을 납치하여 영혼결혼하였다면, 이는 음사(淫祠)의 신으로 전락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근대로 오면서 범일국사를 봉향하던 성황사가 무속적 민속신앙에 접합되어 민속제에서 본질이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영정의 모습에 있어서도 수염 기른 얼굴에 모자를 쓰고 활통을 메고 말을 타고서 좌우에 두 호랑이를 거느리고 있는 국사성황신의 모습은 민간신앙대상의 성황신일 뿐 큰 절의 조사전(祖師殿) 등에 봉안되어 있는 고승의 모습과 같은 국사의 모습은 아니라 생각된다.

남효온(南孝溫·1454-1492)의 추강집(秋江集) 유금강산기(遊金剛山記)에 보이는 영동민속제에 관한 내용이나 허균의 대령산신찬에 의하면, 조선시대 강릉단오제 때의 주신은 성황신이 아닌 대관령산신으로서, 김유신 장군의 신이었다.

선자령은 신선이 사는 곳
선자령(仙子嶺·1,157.1m)은 대관령 북쪽 백두대간 상에 둥그런 영마루를 이루고 있는 큰 산봉우리다. 정상 부근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내려가면 초막골이 자리하고 있고, 북쪽 안부 동쪽으로는 계곡이 수려한 보현사골과 통일신라시대 선종 사찰 보현사(普賢寺)가 자리하고 있다. 북쪽 안부에서 북으로 뻗어 가면서 다시 솟아오른 곤신봉(坤申峯·1,131m) 동쪽 산줄기에는 고구려 때 쌓은 석축 산성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발해시조 대조영이 영토확장을 위해 강릉지역까지 진출하였을 때 쌓은 산성이라고도 전해오는 보현산성(普賢山城), 일명 대공산성(大公山城)이 자리하고 있다.

▲ 하늘에서 내려다 본 진고개. '긴 고개'가 구개음화해 진고개로 됐다.
선자령은 동국여지승람 등 역대 지리지 강릉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소은백이산(所隱栢伊山), 또는 약칭되어 소은백산(所隱栢山)으로 불린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여지승람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릉부 서쪽 65리에 있다. 세속에 전하기를 신선이 사는 곳이다. 옛적에 사냥꾼이 짐승을 쫒다가 높은 봉우리에 올라 골 안을 바라보니, 늙은 나무와 띠집과 길들이 삼연(森然)하고, 시냇가에는 베를 마전하고 옷을 빨아 널어서 의연히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하였다. 그리하여 산에서 내려가 찾아보았으나 구름과 아지랑이가 골짜기에 가득하고 어지러워 그곳을 알지 못하였다.’

소은백이산은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강릉조에는 약칭하여 ‘소은백산’으로도 언급하고 있다. 이 산은 강릉 서쪽에 있는 산 중 어느 산을 지칭한 것인지 지금까지 분명하게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산의 위치를 알려면 같은 여지승람 강릉조에서 이 산보다 더 많이 알려진 대관령과 보현산의 위치를 가지고 살펴보는 수밖에 없다. 곧 같은 책 강릉조에서는 대관령을 강릉부 서쪽 45리, 또는 부의 치소지에서 50리 거리에 위치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고, 보현산에 대해서는 부의 서쪽 35리에 위치한 산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소은백산은 이 중의 대관령보다 15~20리 정도 더 서쪽에 있는 산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강릉 서쪽 45~65리 정도의 거리에 있는 여러 산 중에서 선자령 이외에는 신선이 사는 곳으로 또는 신선의 전설과 관련한 산으로 전해오는 산이 없다.

이는 여지승람에서 소은백산 곧 선자령의 높이가 대관령보다 훨씬 더 높은 것 등으로 인하여 거리가 실제보다 부정확하게 기재되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역대 지리지에서는 이 산이 구체적으로 어느 산을 가리키고 있는지도 분명하지 않은 채 여지승람의 기록을 그대로 수용하여 왔다.

단지 조선 말기에 여지학의 대가 김정호(金正浩·1804-1866?)만이 이를 조금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을 뿐이다. 그는 곧 대동여지도에서 소은백이산을 대관령 남쪽, 강릉시 왕산면과 평창군 도암면 경계에 위치한 고루포기산(1,238.3m)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리고 또 여지승람에서 강릉 서쪽 80리에 위치한 산으로 언급한 소우음산(所?音山)을 일명 발음봉(鉢音峯)이라 하여 지금의 고루포기산 서남쪽의 발왕산(發旺山·1,458.1m) 위치에 표기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김정호가 所 자의 훈(訓)을 ‘바’ 또는 ‘곧(곳)’으로 보고서 所隱栢伊山을 곧은백이산→고루포기산 으로, 所?音山을 바우음산→발음산(발왕산)으로 읽은 것으로 보인다. 곧 우리말의 음과 훈을 빌려 혼용한 산 이름 표기로 보고 이를 대동여지도에 구체적으로 표기해 놓은 것이라 본다.

여지승람에서 밝히고 있는 강릉 치소지 서쪽의 선자령과 서남쪽의 대관령·고루포기산·발왕산의 거리상 위치로 보면 김정호의 지리적 견해는 매우 근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88년 강릉부사 맹지대(孟至大)가 편찬한 강릉부지를 1871년에 강릉부사 윤종의(尹宗儀)가 재정리하여 편찬한 강릉부지에 의하면, 소은백이산을 대관령의 북맥(北脈)으로 언급하고 있으며, 또 소우음산(所?音山)을 대관령 남쪽 기슭에 있는 산으로, 일명 능정산(凌頂山)으로도 불렸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맹지대와 윤종의 등은 소은백이산을 지금의 대관령 북쪽에 위치한 선자령으로, 소우음산을 대관령 남쪽에 위치한 능경봉으로 보고 언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앞에서 언급한 강릉 서쪽의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은 능경봉에서 서남쪽으로 더 먼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들 산을 본래의 소은백이산과 소우음산으로 볼 수는 없다.

물론 현재 불리고 있는 고루포기산과 발왕산의 산 이름과 위치는 김정호의 견해와 거의 일치하고 이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나, 여지승람에서 신선이 사는 곳으로 언급하고 있는 명승을 지닌 신비의 산으로 연관시켜 볼 수 있는 내용은 고루포기산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이 산은 본래의 소은백이산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앞의 강릉부지에서는 소은백이산을 이미 대관령 북쪽 산줄기로 언급하고, 또 이 산을 신선이 사는 곳으로 속전의 기록을 그대로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소은백산은 바로 지금의 선자령을 지칭한 산 이름이라 하겠다. 선자(仙子)는 곧 신선 또는 선녀를 뜻하는 말이므로, 선자령은 이름 그대로 신선이 사는 영마루인 것이다.

여지승람·강릉부지 등에서 높은 봉우리에 올랐을 때 신선이 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골 안은 곧 지금의 선자령 안부 동쪽 골짜기 보현사골을 언급한 것으로 추측된다. 속전에 의하면, 이 계곡이 아름다워 선녀들이 아들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목욕을 하고 놀다가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 전설이 전한다.

선자령의 본래 옛 이름으로 보이는 所隱栢伊山과 그 약칭 所隱栢山의 본래 의미는 ‘잣(재)이 숨겨져 있는 산’이 아니었을까 한다. 곧 잣 또는 재는 성(城)의 고훈(古訓)인데, 이를 훈차하여 栢伊 또는 栢으로 달리 표기한 것이라 본다.

이는 곧 선자령 북쪽 봉인 곤신봉 줄기가 동으로 뻗어가는 산줄기 상에 예부터 보현산성(일명 대공산성)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컬어진 산 이름이라 본다. 그러다가 음과 훈이 복잡한 산 이름을 피하고 좀더 쉽게 음과 훈을 혼용하여 소은잣산→손잣산→선잘산→선자산’으로 전음되어 불리어 오다가, 후대로 오면서 영동과 영서 지역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보현사골을 경유하여 선자령을 넘나들던 사람들이 이 산을 하나의 영마루(재)로 인식하게 되면서 선자령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특히 영동지방 사람들이 교통량이 많지 않던 옛날에 동쪽에서 이 산을 올라보면 매우 높고 가파르면서 계곡도 아주 수려하고, 산정에 올랐을 때는 동쪽으로 탁 트인 동해 바다가 잘 조망되어 예부터 신선이 살고 있는 산으로 여길 법도 하지만, 넓은 초원지대와 구릉이 펼쳐져 있는 영서지방쪽에서 이 산을 오르내리던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산이 산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영마루로 여기게 되어 교통량이 많아지는 후대로 내려오면서 이 산이 산이 아닌 선자령이라는 재 이름으로 불리며 정착된 것이 아닐까 한다.

일제시대에 제작한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에도 이 산이 ‘仙子嶺’으로 표기된 것을 보면, 적어도 교통이 좋아지는 20세기 무렵부터는 이 산이 선자령으로 불렸을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대관령 방면에서 이 산을 경유하여 진고개 방면으로 가다 보면 주능선 동쪽 초막골 하산로 표지기둥이 서 있는 삼거리에서 기둥에 세로로 ‘선자령 정상’이라 쓴 것을 볼 수 있을 만큼 선자령은 어디가 정상인지 헷갈리게 한다. 지금은 이곳에서 조금 더 가다보면 왼쪽 정상지대에 약 80cm 높이의 돌비에 한글로 ‘선자령’이라 쓴 표지석을 세워 놓아 등산가들이 분명하게 정상을 인식할 수 있게 하고 있다.

선자령 북쪽 대공산성이 자리한 보현산 기슭에는 범일국사의 제자 낭원 개청(朗圓 開淸·834-930)이 지장선원을 열고 주석하면서 사굴산문을 크게 번창시켰던 선찰 보현사(普賢寺)가 자리잡고 있다. 보현사 축대 아래쪽에는 보물 제192호로 지정된 낭원대사오진탑비가 서 있고, 삼성각 뒤 산속으로 약 100m 정도 올라가면 보물 제191호로 지정된 낭원대사부도(오진탑)가 자리하고 있다.

낭원대사는 함양 엄천사(嚴川寺)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사굴산문의 범일국사에게 불법을 전하여 받은 당대 고승이다. 신라 경애왕 때 국사를 지냈으며, 뒤에 이곳에 보현사를 창건하고 선풍을 전하다가 96세에 입적하였다. 고려 태조가 시호를 낭원(朗圓), 탑명을 오진(悟眞)이라 하였다.

청학동 소금강과 진고개 장천의 유래
현재 오대산 소금강으로 불리고 있는 청학동 소금강(靑鶴洞小金剛)은 노인봉(1,338.1m) 동북쪽 계곡을 일컫는 말이다. 그 이름이 시사하고 있듯이 절승의 경관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 명승 제1호로 지정된, 장대하고 수려한 계곡이다.

금강산(金剛山·1,638.2m)은 본래 현재의 강원도 금강군과 고성군에 걸쳐 있는 천하제일의 수려한 명산이다. 그 때문에 조선시대 이래 가장 빼어나고 아름다운 산을 지칭하는 일반명사화한 산 이름으로서 금강산이라 일컫기도 하고, 규모면에서 또는 그 경관 면에서 본래의 금강산 보다 조금 작거나 버금가는 산 이름, 계곡 이름 등의 명승을 소금강산, 또는 소금강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예컨대 보은 속리산, 봉화 청량산, 포항 내연산, 양산 천성산 등이 그러한 산 이름이다.

청학동 소금강은 위의 예와는 달리 산 이름이 아닌, 골짜기 이름, 계곡 이름으로서 소금강이라 칭한 것이다. 다만 소금강이라고만 칭하면 어느 곳을 일컫는 이름인지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으므로 예전에는 앞에 청학동이란 말을 붙여 썼고, 현대에 이르러 이 일대가 오대산 산악국립공원에 편입한 이후로는 앞에다 오대산이란 말을 붙여 써서 어느 곳의 명승인지를 좀더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일컫고 있다.

물론 율곡 이이(1536-1584)의 유청학산기(遊靑鶴山記)에 의하면, 청학동을 산 이름으로도 언급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그 의미는 청학동계곡 곧 소금강계곡 일원의 전체 산을 통틀어 일컬은 산 이름일 뿐(摠名其山曰靑鶴), 노인봉 구간의 최고봉을 이루고 있는 주산격 황병산(黃柄山·1,433.5m)이나 주능선상의 소황병산(1,328m), 또는 노인봉 등의 산을 구체적으로 지칭한 산 이름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 대관령 옛길 표지석 앞의 필자

율곡의 유청학산기에 의하면, 소금강계곡을 품고 있는 전체적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일컫고, 소금강계곡의 주요 동부(洞府) 이름은 천유동(天遊洞)이라 일컫고 있다. 그러나 김정호의 대동지지 강릉조와 대동여지도에 의하면, 율곡의 견해를 그대로 산수 이름에 반영하여 지금의 소금강계곡 중심부에 위치한 식당암·삼선암·구룡폭 일원의 동부 이름을 천유동, 그 배후 산을 이루고 있는 노인봉·백마봉 산줄기의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일컫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견해를 종합하여 볼 때 지리적으로 소금강계곡을 품고 있는 노인봉을 일명 청학산으로도 일컫는 것이 적합할 듯하다. 물론 이 구간 주변에서 가장 높고 큰 산이 황병산이므로 이 산을 청학산으로 지칭함이 옳을 듯하지만, 대간길 주능선 상에서 조금 벗어나 소황병산 서남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합리적이지 못하고, 또 황병산이 품고 있는 계곡은 오히려 서남쪽의 개자니골 계곡이 옳을 듯하다.

소금강계곡은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청학동구룡연기(靑鶴洞九龍淵記), 입재(立齋)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언고시(五言古詩·입재유고1), 여지도서와 대동지지 강릉조에 의하면, 조선시대에 청학동으로 불렸으며, 이에 있어서는 비록 구체적 언급은 없으나, 이 계곡 일원의 전체적 산 이름을 청학산이라 명명한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 유래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세속에서 청학동의 일명으로 불리기도 하다가 현재 공식 이름으로 정착된 소금강이란 계곡 이름은 일반적으로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 유래된 것으로, 곧 율곡이 지칭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으나(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등), 이는 유청학산기를 접해보지 않은 이들의 속설일 뿐이다. 율곡의 유청학산기에서는 소금강을 언급한 적이 없다.

소금강은 강재항의 입재선생유고(立齋先生遺稿) 권1 오언고시조에 ‘세속에서는 청학(동)을 소금강이라 한다’고 한 예가 보이고, 여지도서 강릉조에도 세간에서는 청학동을 소금강이라 칭한다고 언급한 것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소금강계곡은 조선 후기에 청학동의 속칭으로 불리다가 현대에 이르러 본 이름으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소금강계곡 곳곳의 구체적 명소에 관한 이름은 율곡의 유청학산기와 허미수의 청학동구룡연기에 비교적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다.

오대산의 동대산과 노인봉 사이에는 진고개가 자리하고 있는데,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 그리고 일제시대의 근세한국오만분지일지형도 등에 의하면 조선시대에는 니현(泥峴)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니현은 진고개의 뜻옮김 표기로, 긴 고개라는 의미로 일컬은 고개 이름일 것이다.

삼국사기 일성왕 4년조 기사에 의하면, 진고개는 고대에 장령(長嶺)으로도 표기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 신라 자비왕 11년(468)조 기사에 하슬라(河瑟羅·현 강릉) 사람 중 15세 이상 되는 청소년을 징발하여 니하(泥河)에 축성한 일과, 신라 조지왕 3년(481)에 고구려·말갈의 연합군과 백제·가야의 구원병의 지원을 받은 신라군과의 전투 기사에 등장하는 니하 또한 진고개의 옛 이름으로 추리해 볼 때 진강(긴 강)이라는 의미로 일컬은 뜻옮김 표기로 보인다. 당시의 지리적 형세로 볼 때 고대에 진고개 북쪽 연곡천(連谷川)을 일컫던 하천 이름으로 보인다.

신라 자비왕대 기사의 주에 의하면 니하는 일명 니천(泥川)이라고도 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진내(긴 내) 곧 장천(長川)의 의미를 뜻옮김한 표기일 것이다. 연곡천 중류 지역인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에는 마을 앞으로 연곡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고 하여 현대에 이르러서도 마을 이름을 장천(長川) 또는 장내라 한다.

신라 자비왕 때 니하에 쌓은 니하성은 이곳 니하에 합류하는 소금강계곡의 구룡폭포 옆 능선으로 올라 천마봉 방면으로 오르는 산줄기 상에 위치한 아미산성(娥媚山城), 일명 청학산성으로 추측된다. 통일신라 말엽에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군사들을 이끌고 이곳에 들어와 성을 중수하고 신라 부흥을 꿈꾸며 군사들을 훈련하며 머물던 곳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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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르포

고즈넉한 고랭지 채소밭에
뻐꾸기 울음소리 나른하다
닭목재~고루포기산~능경봉~대관령 구간

대관령 휴양림에서 아침을 맞는다. 안개로 하여 원근감이 지워진 소나무숲이 가까이 다가선다. 솔향기 머금은 바람이 몸속으로 숲을 옮겨준다. 지난 밤, 뜻밖의 비가 오는 바람에 닭목재에서 야영하기로 한 계획을 접었다. 한밤중에 무작정 휴양림을 찾았다. 다행히 빈 산막이 있었다. 예정에 없던 호사가 아침까지 계속된다.

이번 구간 닭목재에서 대관령까지는 실거리 약 13km로 운행 시간은 개인차를 고려했을 때 6~8시간 정도다. 따라서 대부분 구간 종주자들은 닭목재~대관령보다는 백봉령~삽당령, 삽당령~대관령으로 구간을 나눈다. 그러나 우리는 백봉령에서 삽당령까지를 한 구간으로 설정하여 조금 더 걷고, 이번 구간은 우리 스스로를 위한 보너스로 삼기로 했다. 다음 대관령 구간은 중간에 끊기가 애매하다는 점도 이번 구간을 최대한 짧게 설정하도록 했다.

애초의 계획은 닭목재 근처에서 야영하며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하룻밤을 보낼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상에도 없던 대관령 휴양림의 밤도 즐거웠다. 어쩌면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수많은 뜻밖’이 합쳐져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대관령에 승용차 한 대를 옮긴 다음 닭목재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9시. 비는 멎었다. 닭목재는 해발고도 680m로 제법 높은 고개다. 하지만 수직적 상승감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일대가 높은 지대이기 때문이다. 고갯마루 입간판에 쓰인 ‘전국 최고 감자 채종포 마을’이니 ‘청정 고랭지 채소 마을’이니 하는 말들이 이를 증명한다. 과거 겨울 폭설기면 고립되는 마을이었지만 요즘은 이러한 자연 조건이 오히려 마을을 살리고 있다. 고랭지 채소 재배뿐만 아니라 다양한 산촌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웰빙’이라는 시절 인연이 강원도 산골 마을을 활짝 열린 마을로 탈바꿈시킨 것이다.

산행 들머리는 산신각 오른쪽으로 난 농로다. 10분쯤 걸어 오르자, 이제는 모든 잎을 다 내놓은 낙엽송숲이 나타난다. 오른쪽 기슭으로 자작나무가 눈길을 끈다. 숲으로 든다. 어둑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녹음이 짙다. 잎사귀를 헤집고 간신히 땅으로 내려온 햇빛이 사금파리처럼 반짝인다. 잠시 후 숲을 빠져나오자 길과 맞닿은 두둑에 두릅을 심어 놓은 고랭지 채소밭이 나타난다. 뻐꾸기 울음소리가 나른하다.

임도를 버리고 오른쪽으로 기슭 전체가 풀밭으로 바뀐 능선 위에 몸을 세운다. 맹덕목장을 지나는 길이다. 5년 전 이 길을 지날 때는 한가로이 풀을 뜯던 한우와 양들을 봤었는데 지금은 그림자조차 없다. 멀리 보이는 축사에도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955.6m 봉우리에서 오른쪽으로 휘돌자 고랭지 채소단지가 나타난다. 오른쪽의 서득봉(1,052.6m)은 안개에 갇혀 있다.

▲ 고루포기산과 능경봉 사이 대간 등성마루에서 바라본 옛 영동고속도로와 횡계 일대.
고루포기산을 향하는 길은 꾸준히 키를 높이지만 숨을 턱까지 차오르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군데군데 쉼터를 만들어 벤치까지 놓아두어서 자주 쉬어가게 한다. 취재팀 모두의 발걸음은 거의 예비군 수준이다.

지난 취재 때 수줍게 곱던 얼레지는 어느 새 씨앗을 달고 있고, 화사한 꽃그늘을 드리우던 철쭉 잎도 거뭇거뭇해지기 시작한다. 아직 원추리는 꽃을 내놓지 않고 있다. 계절은 초록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경구도 이런 숲길에서는 공연한 잔소리다. 나무들은 마치 익명성을 즐기기라도 하듯 숲이라는 한 몸으로 동화되어 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하늘로 곧추 설 수 없는 다래덩굴과 자신의 몸을 빌려준 참나무가 형제애를 나누는 관계인지 그 반대인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들은 한 몸을 이루고 있다. 인간관계의 상호의존성도 이와 다르지 않을 텐데, 인간사는 왜 이리 서로를 물어뜯지 못해서 안달일까?

초여름 숲길을 걸을 때는 나무도 보고 숲도 봐야 한다. 갈참나무 잎과 굴참나무 잎이 어떻게 다른지를 살피는 일도 즐겁다. 그런데 왜 이 나무들을 우리는 참나무로 싸잡아 부르는 것일까? 숲이 아름다운 건 전제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숲은 나무라는 개별자를 배제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그저 제 본성에 충실하며 저마다 빛나는 숲의 구성원이 된다. 굳이 이런 의식을 하지 않아도 숲은 우리의 심신을 정화한다.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부으며 숲길을 걷는 사람을 상상하기는 힘들다.

“내 가슴은 나무들 속에서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에 전율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있던 내가 돌연 그 소리를 통해서 나의 힘과 정신성을 발견한다”고 말한 사람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다. 나는 소로의 이 말을 신뢰한다. 그가 살았던 월든 호수가의 숲이 그에게 들려준 말이기 때문이다.

맹덕목장을 벗어나서 두 시간쯤 키를 높이자 고루포기산(1,238.3m) 정상이다. 고압송전탑이 지나는 정상의 분위기는 볼썽사납지만 조망은 빼어나다. 북서쪽에서 북동쪽으로 황병산에서부터 대관령, 능경봉에 이르는 대간의 근골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대관령 고원 초지의 이국적 풍광에는 풍력발전기가 더해져서 더 이채롭다. 자연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 과학기술에 더 의존해야 하는 현실을 어둡게만 보고 싶지 않다. 언제 바람 좋은 날을 잡아서 아이와 바람개비를 돌려 봐야겠다. 물론 제 것은 제 스스로 만들어서.

▲ 폭염과 폭풍우를 앞둔 초여름의 정적을 머금고 있는 민들레 홀씨.

고루포기산을 내려서는 길은 경쾌하게 미끄러진다. 참나무 무성한 편안한 능선 위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김으로 대충 모양을 낸 주먹밥이다. ‘기갈이 감식’이라지만 마른 밥이 매끄럽게 뱃속으로 들어가기는 어렵다. 취재팀 가운데 최고령이자 가장 도회적(?)인 이동민 형이 취나물 몇 잎을 뜯어온다. 시장에서라면 참나물과 미나리도 구분하지 못 할 것 같은 손이 용하게도 취나물을 찾았다. 이것이 숲의 교수(敎授) 능력이다.

점심을 마친 다음 깜짝 이벤트를 벌였다. 이름 하여 ‘산상 시낭송회!’ 그 동안 봄가을에 몇 번을 별렀지만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게으른 탓도 있지만 그동안은 무리였던 것이 사실이다. 갈 길은 멀고 다리는 무거운데 누가 시를 읽고 들을 것인가. 시는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것이 전부인 시대에.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넉넉한 시간과 편안한 길이라는 든든한 후견자가 있지 않은가.


취재팀 모두에게 프린트한 시를 나누어 준 다음 김석우씨의 목소리를 빌렸다. 영화감독답게 낭송 솜씨가 훌륭했다.

메아리도 오지 않는 산 아래 앉아
그리운 이름 하나 불러 봅니다.
먼 산이 물소리에 잠길 때까지
입속말로 입속말로 불러봅니다.
내 귀가 산보다 더 깊어집니다.
슬픈 귀만 자꾸만 자라납니다.
마음 문을 활짝 열고 귀 기울이면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귓속말로 귓속말로 들려옵니다.
내 눈이 어둠보다 밝아집니다.

박정만, ‘내 귀가 산보다’ 전문

▲ 이제는 구실을 잃어버린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 재생에너지 전시관과 연구용 풍력발전기가 들어서 있다.

나는 산을 찾는 일과 시를 가까이 하는 것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정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시 한 편 쓴 적이 없어도 이미 시인이라고 믿는다. 또한 시인은 가슴 속에 늘 산을 품고 산다고 믿는다. 우리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5공 군부의 고문) 시인의 요절을 애도하며 다시 한 번 시를 읽은 다음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루포기산에서 능경봉까지 대간 마루는 길게 허리를 낮추었다가 또 그만큼 허리를 든다. 물론 잔물결 같은 높낮이는 계속된다. 왼쪽으로 시야가 탁 트인 조망처에서 횡계와 옛 영동고속도로를 내려다보며 땀을 식힌다.

능경봉을 앞둔 지점에 제법 규모가 큰 둥근 돌탑이 서 있다. 근년에 만든 것 같은데 ‘행운의 돌탑’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대간 종주자들을 위한 일종의 성황이겠다. 앞으로 이 돌탑은 오가는 대간꾼들이 올려놓는 돌로 하여 더 높아질 것이다. 그 높이와 무게만큼, 세상사 짐스러운 것들이 가벼워졌으면 좋겠다.

돌탑에서 능경경봉으로 오르는 길은 돌탑과 같은 재질의 얇은 돌이 깔려 있다. 순례의 길 같은 분위기가 풍긴다. 천천히 한 걸음 한 걸음을 의식하며 능경봉을 오른다. 제법 가풀막이다.

▲ 고루포기산으로 오르는 길에서 만난 금강송.

능경봉(1,123m)은 기품 넘치는 봉우리다. 올려다볼 때는 그저 평범한 봉우리 같지만 정상에 서 보면 도저한 무언가가 느껴진다. 능경봉은 ‘강릉을 굽어보는(陵景)’ 봉우리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국립지리정보원 지도에는 한자 표기가 없지만, 날씨만 좋으면 강릉 시내는 물론 경포호와 동해도 눈에 넣을 수 있다.

누구나 높은 봉우리에서 세상을 보면 관조적 자세가 될 것이다. 아등바등하는 현실이 한바탕 꿈 같기도, 작은 일에 목숨 걸듯 하는 세간사가 가소롭기도 할 것이다. 능경봉은 옛부터 영동 지역의 사람들에게 호연을 가르친 산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능경봉에서 대관령까지는 30분 남짓 편안한 내리막이다. 대관령 마루의 옛 영동고속도로 휴게소는 재생에너지전시관으로 바뀌어 있다. 고갯마루에 선 풍력발전기는 연구용이라고 한다.

대관령은 이제 고개로서의 쓸모를 거의 잃어 버렸다. 터널이 뚫리면서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관문으로서의 기능은 옛 이야기가 되어 버린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길을 버리는 것은 길이다. 가깝게, 빨리, 직선을 지향하는 길의 속성은 모든 길을 옛길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크다.

아흔아홉 번 산주름을 굽이돌았다는 대관령 옛길 초입에는 애절하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신사임당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만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
한송정 가에는 한 줄기 바람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지락모지락
언제나 내 고향 돌아갈거나.

만약 신사암당이 다시 살아난다면 오늘의 대관령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 꿈결에도 달려가고 싶었던 고향이 가까워져 기뻐할까? 아니면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며 가슴을 쓸어내릴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다. 아니, 변해야 한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절대로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우리가 산을 오르고 자연을 가까이 하며 배워야 할 것들이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우리 모두 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쉽게 모른 체한다.


대간 고샅의 명소
대관령 소나무숲

소나무에 대한 한국인의 감정은 신앙에 가깝다. 소나무 외에는 잡목으로 여기는 태도를 문제 삼아야 할 정도로. 소나무에 대한 특별한 감정이 없는 사람도 하늘로 곧게 뻗은 금강송을 보면 감탄 이상으로 숙연함마저 느낀다. 강직과 운치와 푸른 기상 등 나무의 미덕을 사철 보여 주기 때문일 것이다.

온 산을 덮은 금강송을 만나고 싶으면 대관령 소나무숲으로 갈 일이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에서 강릉 방향으로 가다 보면 ‘대관령 옛길’이라는 팻말을 볼 수 있다. 이 산길로 들어서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송을 만날 수 있다. 강원도 강릉시 어흘리 일대로 그 면적은 400ha에 이른다. 산림청 기록에 따르면 1922년부터 1928년 사이에 사람이 일일이 씨를 뿌려 가꾼 숲이고, 소나무의 평균 연령은 약 80년이라고 한다.

한때 소나무는 우리나라 산림의 60% 이상이었으나 지금은 26% 정도다. 만약 재선충이나 솔잎혹파리로부터 지켜내지 못하면 이 땅에서 소나무는 영영 사라질지도 모른다. 자연스러운 천이의 결과가 아니라 병충에 의한 것이라면 방치해서는 안 된다.
대관령의 소나무숲은 특별하다. 그곳의 소나무를 보면 누구라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글=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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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19구간 / 대관령] 문화

산신제·성황제·세시풍습의 습합
비빔밥 문화의 전형인 강릉단오제와 대관령

▲ 대관령 가는 길. 영동과 영서를 잇고, 산촌과 어촌을 이어주는 대관령은 민간신앙이 깃들 여지가 충분한 고개다.

백두대간의 생활사와 문화사를 이루는 요소 중의 하나로 대동제(축제)가 있다. 백두대간의 터전에서 둥지를 튼 고을과 마을에는 역사와 문화생태적 배경을 반영한 대동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하고 규모가 큰 고을 대동제가 대관령의 강릉단오제다.

강릉단오제는 백두대간의 지역문화축제 중에 생활문화, 놀이문화, 세시문화, 제의문화, 산촌문화, 농촌문화, 어촌문화, 공연문화, 조형문화 등을 아우르는 종합적 대동제로 자리매김될 수 있다. 대동제는 축제를 개최하는 세력의 정치적 주체, 혹은 사회집단과 역사문화적 성격, 그리고 지리적 배경 등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계층적 측면으로는 왕실 혹은 귀족의 국가적 축제가 있는 반면, 호족 및 지방토호나 관리의 지방축제가 있고, 마을 단위에서도 세시풍습에 따라 여러 가지 축제가 있다.

역사문화적 성격으로는 불교, 유교, 굿과 민간신앙, 세시풍습에 관련된 다양한 축제가 있으며, 지리적이거나 문화생태적인 속성으로는 산간, 해안, 들판에 터전을 일구고 사는 사람들의 입지특성에 따라 축제의 성격과 의례에서 조금씩 차이가 난다.
이런 관점으로 분류해 볼 때, 대관령의 강릉단오제는 사회적으로 지방축제이고, 역사문화적으로 불교, 유교, 굿 혹은 샤머니즘, 세시풍습, 민간신앙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되어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대관령과 동해안을 끼고 자리 잡은 강릉 지역의 축제에 해당된다.

강릉단오제의 내용을 이루는 구조를 살펴보면 산신제와 성황제와 민속놀이가 복합된 형태를 띠고 있다. 다시 말해 산신제라는 지리풍토적 특성과, 성황제라는 읍치(邑治) 향리들을 주축으로 한 지방적 제의의 사회적 속성이 단오제라는 세시풍습의 축제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특히 강릉단오제는 유교, 불교, 굿, 민간신앙, 세시풍습, 놀이가 한데 어우러져 일대 난장을 이루고 있는 소위 비빔밥 문화의 전형적인 축제이기도 하다. 계층의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고, 문화적 프리즘의 폭이 매우 넓고 다양하며, 역사적 성격과 시간적 속성이 적절히 반영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대관령과 강릉이라는 장소적 현장성도 구비하고 있어서 역동적인 한마당 축제의 전형적인 양태를 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강릉단오제에서도 가장 역사적 원형에 가까우며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다.


대관령성황사와 산신각

대관령은 강원도 강릉시 성산면과 평창군 도암면의 경계에 있는 높이 832m, 총연장 13km에 이르는 고개로서, 조선시대에 강릉대도호부의 진산(鎭山)이었고,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예로부터 백두대간의 등줄기를 넘는 고개의 하나이자 영동과 영서를 연결하는 관문이었으니, 대관령 일대는 황병산·선자령·노인봉·발왕산에 둘러싸인 고위평탄면으로서 고개의 굽이가 99개소에 이른다고 하여 아흔아홉구비라고도 한다. 대관령을 분수령으로 하여 동쪽으로 흐르는 오십천은 동해로 흘러들며, 서쪽에서는 송천의 지류가 발원하여 남한강에 흘러든다.

대관령 정상에서 북쪽으로 1km쯤 떨어진 곳인 도암면 횡계리에는 시도기념물 제54호로 지정된 대관령성황사와 산신각이 있다. 성황당에는 범일국사(810-889)를 모시고 있고, 산신각에는 고려의 왕순식과 후백제의 신검을 모시고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낸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강릉은 옛 동예(東濊)의 땅이고, 기록에 의하면 예국(濊國)에서는 10월에 무천(舞天)이라는 축제를 행하였으니 강릉지역 대동제의 뿌리는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강릉단오제는 산신제와 성황제, 그리고 세시풍습의 민속놀이가 결합되어 있는데, 우선 대관령 산신제의 내력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대관령 길에서 내려다본 관동지방.

조선시대에 이르러 대관령을 신성시한 기록은 경종 때(1721-l724) 편찬된 <강릉지>에도 남아있다. 산신제에 관한 구체적인 역사 기록을 보면, 조선 초기(15세기) 남효온(南孝溫·1454-1492)은 <추강냉화>(秋江冷話)에서,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 동안 굿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고, 허균(許筠)의 <성소부부고>에는 1603년(선조 36년)에 산신제를 구경하였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계묘년(1603) 여름 내가 명주에 있었는데 그 당시 명주사람들은 5월 길일을 택해 대관령 산신을 맞이하였다. 나는 수사에게 물었다. 이에 수리가 대답하기를 "이 신은 신라대장군 김유신입니다"라고 했다. 김유신이 어려서 명주에 유학하였는데 검술을 산신이 가르쳤고, 그가 소지한 칼은 명주 남쪽에 있는 선지사에서 만들었는데, 90일만에 그 칼이 완성되어 빛은 달빛을 능가하였다고 한다.

김유신은 그 칼을 차고 고구려를 멸하고 백제를 평정했으며 죽은 뒤에 대관령의 신이 되었다 한다. 이 신이 지금까지 영험하기 때문에 고을 사람들이 신봉하여 해마다 5월 길일에 번개와 향화를 갖추어 대관령에 가서 그 신을 맞이하여 부사에 모신 다음 5일에 이르면 온갖 자비를 베풀어 신을 즐겁게 해준다고 한다. 신이 즐거우면 길상이 깃들어 풍년이 든다 하고, 신이 노하면 반드시 풍수의 천재지변을 준다고 하였다. 내가 이상히 여겨 그 광경을 보았는데 명주 사람들이 모두 모여 노래하며 서로 경하하고 춤을 추었다.’

또한 <고려사>와 경종 때 간행된 <강릉지>에 보면 고려 태조를 도와 왕순식이 신검을 토벌하였는데, 이때 태조가 왕순식에게 말하기를 “꿈에 이상한 중이 갑옷을 입은 병사 3천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는데, 다음날 그대가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도와주었으니 이것이 바로 감응이다” 하니 왕순식이 “제가 명주에서 출발할 때 대현(大峴-대관령)에서 승사(僧祠)가 있어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상감께서 보신 꿈은 이것입니다” 라고 하여 신성시되어온 대관령 산신제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신목이 떨어야 신이 강림한 것으로 간주

한편, 대관령 국사성황 신위를 모시고 행하는 성황제에서는 강릉시장이 초헌관을 맡고 민관 합동으로 제의를 행한다. 제사가 끝나면 무당이 부정을 가시고 성황을 모시는 굿을 하며, 이어서 산에 올라가 신목을 베는데 요란한 제금 소리와 무녀의 축원으로 신목을 잡은 신장부의 팔이 떨리면 신이 강림한 것으로 믿는다. 이때 사람들은 다투어 청홍색의 예단을 걸며 소원 성취를 빈다. 성황신의 위패와 신목을 모신 일행은 신명나는 무악을 울리면서 대관령을 내려온다.

영조 대에 편찬된 강릉의 향토지인 <임영지>(臨瀛誌)에 의하면, 성황신을 모시러 가는 행차는 아주 장관이었다고 한다. 나팔, 태평소, 북, 장고를 든 창우패들이 무악을 울리는 가운데 호장, 부사색, 수노(首奴) 등의 관속, 무당패들 수십 명이 말을 타고 가고, 그 뒤에는 수백 명의 마을 사람들이 제물을 진 채 대관령 고개를 걸어 올라갔다는 것이다.

‘매년 4월 보름에 강릉부에서 임명된 호장(戶長)이 남자와 여자 무당을 인솔하고 대관령 정상에 있는 신령을 모신 사당으로 간다. 호장이 먼저 사당 앞에 나가 고유(告由)하고, 남자와 여자 무당으로 하여금 살아있는 나무 가운데 서신이 내린 나무를 찾아 모시고 오라 시킨다. 갑자기 나무 하나가 미친 바람이 불고 지나간 듯이 나뭇잎이 저절로 흔들리면 마침내 신령이 그 나무에 내린 것으로 알고 나뭇가지 하나를 잘라 건장한 장정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고는 이를 국귀(國歸)라 하였다…’

대관령 성황신은 강릉 태생의 범일국사(泛日國師)이며, 여성황신은 강릉 정씨(鄭氏) 집 딸이다. 단오제 때에는 대관령 서낭당에 있는 성황을 모셔다가 시내에 있는 여성황당에 며칠 동안 머물게 한 다음 서낭 내외분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게 된다. 대관령성황신은 호랑이를 데리고 있고 여성황신도 호환을 당한 여인을 모시고 있는데, 이것은 영동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던 호환에 대한 두려움과 그 대응양상이 신앙적 형태로 표현된 것이다.


범일국사는 구산선문 사굴산파 개창조

호랑이 숭배에 관하여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동예는 호랑이를 신으로 여겨 제사를 지냈다(祭虎以爲神)’는 대목도 나오고 있어 그 역사적 기원의 아득함을 짐작할 수 있으며, 실제 영동지역에서는 호랑이 숭배신앙이 널리 확산되어 한 예로 삼척시 원덕면 갈남리는 백호를 서낭으로 모시고 있다.

대관령 국사성황신으로 모셔진 범일은 강릉 출신으로 성은 김씨이고,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신라 구산선문 중 사굴산파(堀山派)의 개창조다. 범일은 15세에 출가하여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흥덕왕 6년(831) 2월에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은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리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도이다”라고 하였다.

▲ 고갯마루 부근의 대관령 옛길.

이 말을 들은 범일은 크게 깨우쳐 제안의 문하에서 6년간 수학하고 나서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을 나누고 크게 인정을 받았다. 귀국 후 4년 동안 백달산에 머물다가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堀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선문을 펼치면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하였다.

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지자체가 주최한 지역 축제는 2004년 현재 1,178개에 이른다고 한다. 그런데 감사원이 2003년에 열린 496개 지역 축제를 감사한 결과 대부분이 사업타당성 검토가 부족하고 예산집행 등에 있어서 여러 가지 문제를 드러냈다고 보도된 바 있다. 축제 종류만 하더라도 대게축제, 송이축제, 인삼축제, 머드축제, 철쭉축제 등 수많은 아이템이 있지만, 강릉단오제가 종합적인 축제이듯이, 백두대간의 줄거리로 여러 축제를 연합하는 학술제와 문화대동제라도 한번 열어볼 판이 되었다. 우리 겨레에게 있어서 백두대간이 지니는 정신과 생활문화를 올바로 전해주고 함께 배울 수 있다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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