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2구간 / 갈전곡봉] 문헌고찰

5만 보살의 진신(靈)이 상주하는 영산
삼국유사가 우통수 한강 발원지 설의 원조

오대산(五臺山·1,563.4m)은 백두대간 상의 진고개에서 구룡령에 이르는 구간 일대의 주산으로, 신라시대부터 5만 보살의 진신(眞身=靈)이 상주한다고 전하는 한국의 불교 영산이다.

특히 5대의 중심봉인 중대에는 고대시절부터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상주하고 있으며, 때때로 근처 상원사 일대에 문수대성이 36가지 형상으로 변해 그 모습을 나투기도 한다는 문수성지로 일컬어져온다.

또한 금강산 보개산(寶蓋山)과 함께 지장보살의 진신이 상주하는 한국 3대 불교 명산의 하나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이로 인해 산 안에는 신라시대 이래로 많은 불교문화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동대봉 기슭에 자리한 월정사는 우리나라 31본산의 하나인 대찰로서,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개산한 이후 조선 세조 때 크게 중창됐으며, 경내에는 팔각구층석탑과 약왕보살이라 전하는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중대봉 기슭에 자리한 상원사는 신라의 보천(寶川) 태자 형제가 개산한 이후 성덕왕 때 중창된 신라 명찰로, 경내에 동종, 목조문수동자상, 중창권선문 등의 귀중한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다.

오대산은 또 조선시대에 선가(仙家)의 수행자들이 선도를 수행하던 명산승지였던 곳으로 보인다. 곧 택리지 산수조에 ‘오대산은 흙산으로 많은 바위와 골짜기가 겹겹으로 싸여 깊숙하게 막혀져 있다···상당(上黨) 한무외(韓無畏·?-1610)는 이곳에서 도를 얻어 혼백이 육신을 떠나 신선으로 화해 갔으므로 수단복지(修丹福地)로 일컫기를 이 산을 제일로 삼는다’고 했다.

또 조선 중기에 조여적(趙汝籍)이 저술한 선가서(仙家書) 청학집(靑鶴集)에도 그의 스승 편운자(片雲子) 이사연(李思淵·1559-?)이 남대 기린봉에서 금선자(金蟬子) 등의 선인들을 만나 선도에 입문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오대산의 혈이 맺혀 있는 최고의 명당처는 곧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으로, 상봉인 비로봉 동쪽 중대봉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적멸보궁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자장율사가 개산한 것이라 전한다. 이 곳은 풍수지리적 견해에 의하면 나는 용이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국인 비룡함주형(飛龍含珠形)으로 일컬어진다.

이 중대봉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동대·서대·남대·북대가 중대를 호위하듯 자리하고 있으면서 누대처럼 전망 좋은 오대를 형성하고 있는 산이 오대산이다. 1975년에 진고개 동북쪽 일원의 청학동 소금강을 아울러 우리나라 대표적 명산의 하나인 산악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오대산의 오대 봉이름

오대산 일대의 백두대간 주능선 상에는 진고개 서쪽에 동대산(東臺山·1,433.5m), 그 북쪽에 두로봉(頭老峯·1,422m)이 위치하고, 두로봉에서 서남쪽 방면으로 큰 산줄기가 갈려 나가면서 상왕봉(象王峯·1,491m), 비로봉(1,563.4m), 호령봉(虎嶺峯·1,561m)이 자리하고, 호령봉 동남쪽에 1336.8m 봉과 남대봉으로 보이는 1301.2m봉이 자리하고, 상봉인 비로봉 동쪽에 중대봉인 1190m봉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불리고 있는 봉우리 이름들은 고대부터 불려온 본래의 봉이름에서 변화된 것들이다. 핵심을 이루고 있는 5대의 이름을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臺山五萬眞身) 조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 정신대왕(淨神大王=神文王)의 태자 보천·효명(孝明) 두 형제가 속세를 벗어날 뜻을 은밀하게 약속하고는 남모르게 도망하여 오대산에 들어갔다…하루는 형제가 함께 다섯 봉우리로 참례하러 올라가니 동대 만월산(滿月山)에는 1만 관음보살의 진신이 나타나 있고, 남대 기린산(麒麟山)에는 팔대보살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지장보살이 나타나 있으며, 서대 장령산(長嶺山)에는 무량수여래(無量壽如來=아미타불)를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나타나 있고, 북대 상왕산(象王山)에는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이 나타나 있으며, 중대 풍로산(風盧山) 일명 지로산(地盧山)에는 비로자나불을 우두머리로 한 1만의 문수보살이 나타나 있다.

그들은 이같은 5만 보살의 진신에 일일이 예를 올렸다. 또 매일 새벽이면 문수대성이 지금의 상원(上院)인 진여원(眞如院)에 이르러 36가지 형상으로 변하여 어떤 때에는 부처의 얼굴 모양으로, 어떤 때에는 보구형(寶球形)으로 …·어떤 때에는 청사형(靑蛇形)으로 나타나 보였다. 두 태자는 매양 이른 아침에 골짜기 속의 물을 길어다가 차를 달여 공양하고 저녁이면 각기 암자에서 도를 닦았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오대의 원래 이름은 동대 만월산(봉), 서대 장령산, 남대 기린산, 북대 상왕산, 중대 풍로산(일명 지로산)이다. 그렇다면 현재 불리고 있는 오대의 이름 중 그 이름과 위치가 원래 이름과 일치하는 것은 북대 상왕산(봉)뿐이고, 위치상으로 동대가 분명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이름으로 동대산을 들 수 있을 뿐이다. 문제는 중대·서대·남대의 이름과 위치다.

현재 오대산에 관한 각종 산행기나 사적기 따위에 의하면, 대부분 비로봉을 중대인 지로봉으로 잘못 인식하고 있으며, 또는 오대에서 대와 봉우리를 분리해 달리 보기도 한다. 예컨대 김장호의 <한국명산기>에 의하면, 대는 적멸보궁터와 같은 제단이나 불단을 차릴 만한 알맞은 높이의 대지를 말한 것이고, 산(봉) 이름은 그 뒤쪽 봉우리를 가리킨 것이라 하여 중대는 적멸보궁터이고, 그 뒤 봉우리가 바로 비로봉이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산의 백운대·만경대, 관악산의 연주대, 속리산의 문장대 따위와 같이 대 또한 봉우리 이름일 뿐이다. 백운대·문장대 따위의 봉우리처럼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형성되어 있고, 누대에 올라선 듯 조망(전망)이 좋은 이러한 산봉우리를 대체로 ‘~대’라 일컫는다.

오대산의 오대도 비록 백운대·만경대처럼 석벽을 이루고 있는 봉우리는 아니나, 그 정상부가 마치 누대에 올라선 듯 전망이 좋은 평평한 대를 이루고 있으므로 ‘대’라 지칭한 것이다. 곧 삼국유사 기록대로 중대가 지로산·풍로산이고, 지로산·풍로산이 중대이지, 비로봉이 중대의 봉우리는 아니다. 다른 봉우리에 있어서도 동대가 만월산이고, 만월산이 곧 동대일 뿐이다.

미수(眉?) 허목(許穆·1595-1682)의 오대산기에서도 전망 좋은 오대의 각 봉우리 정상부가 바로 대이고, 비로봉은 중대가 아니라 북대인 상왕산의 최고봉이라 언급하고 있는 것을 살필 수 있다. 중대는 현재의 비로봉이 아니라 옛 사자암(獅子庵) 자리에 근년에 새로 크게 중창한 비로전 뒤편에 솟아 있는 배후 산봉인 1190m봉이다.

비로전에서 오른쪽 비로봉 가는 길로 오르다가 용안수(龍眼水) 샘터를 조금 지나면 나오는 두 갈래 갈림길에서 왼쪽에 솟아올라 정상부가 마치 전야(田野)처럼 평평한 대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유형원(柳馨遠·1622-1673)의 오대산기에서는 이 봉우리를 지로전(智爐田)이라고도 표현하고 있다. 이 지로봉 정상부에 적멸보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중대 적멸보궁에서 서북쪽에 상봉인 비로봉이 위치하고, 서남쪽에 호령봉이 위치한다. 그렇다면 중대 서쪽의 두 봉우리 중 비로봉은 북대인 상왕산의 최고봉이었으므로 서대은 자연스럽게 현재 호령봉으로 개명되어 불리고 있는 봉우리임을 알 수 있다.

▲ 사고사의 사각. 실록을 보관하기 전부터 영감사가 있었고, 그 배후 산봉인 1190m봉이 남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오대산 남부의 봉우리들 중에는 이름이 붙은 봉우리가 하나도 없으므로 남대는 오대 중에서도 그 이름과 위치가 가장 분명치 않다. 미수의 오대산기에 ‘장령봉 동남쪽이 기린봉(산)이고, 그 정상이 남대다. 그 남쪽 기슭에 영감사(靈鑑寺)가 있고, 이곳에 사서(史書=조선왕조실록)를 소장하고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현재 영감사와 사각을 재건한 사고지의 배후봉인 1301.2m봉이었음을 살필 수 있다.

남대가 서대 남쪽에 있는 것으로 현재의 호령봉 정남쪽에 위치한 1368.5m봉이나 1336.8m봉을 지칭한 것으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정확하게는 서대 동남쪽에 자리한 영감사의 배후봉임을 알 수 있다.

영감사는 조선 선조 39년(1673)에 사명대사가 바람과 물과 불의 3재를 막을 수 있는 길지라 하여 그 곁에 사고를 건립한 이후 일명 사고사로도 불렸다. 때문에 이 절을 사고의 수직승려나 머물던 암자 따위로 오해할 소지도 있으나, 기록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4년(645)에 자장율사가 본사인 월정사와 함께 수행처로서 개창한 것으로 전하는, 역사가 매우 오래된 사찰이다.

이곳 오대산사고는 조선 후기에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보략(璿源譜略)을 보관했던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임진왜란 이후 전란의 화를 면한 전주사고본 3부를 재인(再印)하여 춘추관·태백산·마리산[摩尼山]에 보관하고, 그 교정본을 이곳 오대산사고에 소장했다. 그러나 일제 때 일본인들이 이를 가지고 가서 동경대학에 이관했는데, 1923년 관동대지진 때 상당수가 소실되고 당시 교수 등에게 대출해준 책들만 남았다.

금년에 일본에서 이를 서울대에 반환(기증 방식으로)했는데, 오대산 월정사에서는 이를 본래의 소장처였던 이곳 사고지로 옮겨 관리하고자 추진하고 있다.


오대산의 산수 이름

김수온(金守溫·1409-1481)의 상원사중창기에서는 오대산에 대해 ‘그 웅장함과 깊고 높고 큰 것이 금강산과 1·2위를 다툴만하다·…산에 다섯 봉우리가 있는데 높이가 고루 대등하고, 크기가 서로 가지런하다. 이들 봉우리들을 바라보면 마치 연꽃이 물에 나와 피어 있는 듯하고, 누각이 공중에 떠 있는 듯 하므로 오대라 이름하였다’라 했다.

또 동국여지승람에서는 ‘동쪽이 만월, 남쪽이 기린, 서쪽이 장령, 중앙이 지로인데, 다섯 봉우리가 빙 둘러가며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루 대등하므로 오대라 이름하였다’ 고 했다.

오대산의 산봉 이름과 물 이름 등에 대해서는 미수의 오대산기에 잘 요약해 언급하고 있다. 이보다 뒤에 쓴 유형원·이만부·성해응 등의 오대산기는 대부분 이 기록을 그대로 답습한 것으로 보인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이 높고 크고 깊은데, 산의 기운이 가장 많이 쌓인 것이 다섯이니 그것을 오대라 한다. 그 중 가장 북쪽에 있는 것이 상왕산으로, 매우 높고 험준하다. 그 정상을 비로봉이라 하고, 그 동쪽으로 두 번째 높은 봉우리를 북대(현 상왕봉)라 하는데, 감로정(甘露井)이 있다. 비로봉 남쪽이 지로봉이고, 지로봉 정상이 중대가 된다.

산이 깊고 기운이 맑아서 새나 짐승이 이르지 않는다. 불제자들이 이곳에서 상 없는 부처(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적멸보궁엔 불상이 없음. 곧 부처의 진신사리)에 새벽 예를 올리니, 이곳은 최고의 자리다.

중대에서 조금 내려가면 사자암이 있는데, 우리 태조대왕께서 중건하신 것이다.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권근(權近)에게 명하여 사자암 중창기를 짓게 했다. 옥정(玉井)이 있고, 그 물이 아래로 흘러 옥계(玉溪)가 된다. 북대 동남쪽이 만월봉이고, 그 북쪽이 설악산이다. 만월봉 정상이 동대이며, 동대의 물은 청계(靑溪)가 된다. 동대에 오르면 붉은 바다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볼 수 있다.

상왕봉 서남쪽이 장령봉이고, 그 정상이 서대다. 서대에는 신비한 샘물을 길으니, 그 샘을 우통수(于筒水)라 일컫는다. 한송(寒松)의 선정(仙井·강릉 북쪽 15리 한송정 옆에 있었던 찻물 샘)과 함께 영천이라 병칭된다. 장령봉 동남쪽이 기린봉이고, 그 정상이 남대다. 그 남쪽 기슭에 영감사가 있고, 이곳에 사서를 소장하고 있다.

상원사는 지로봉 남쪽 기슭에 있는데, 산중의 아름다운 절이다…상원사를 유람한 후 중대에 오르기까지가 5리이고, 또 북대에 오르기까지가 5리다. 서쪽으로 장령봉에 오르기까지가 10리이고, 또 남쪽으로 10리를 가면 월정사다. 월정사 위쪽에 관음암이 있는데, 서쪽으로 종봉암(鐘峯庵)과 마주 대하여 굽어보고 있다. 종봉은 장령봉 서남쪽에 위치한다. 이상은 그 중 가장 큰 봉우리들을 들어서 기록한 것이다.

산이 대체로 흙이 많고 바위가 적으며, 나무는 노송나무가 많다. 산 중의 물은 합류하여 큰 내(大川·오대천 상류)가 되고, 남대의 동쪽 구렁에 이르러 반야연(般若淵)이 되고, 월정사 밑에 이르러 금강연(金剛淵)이 된다.

‘위의 내용에 의하면, 오대의 위치와 이름, 그리고 주요 명천(名泉)과 시내 이름 등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앞에서도 조금 살펴보았지만, 비로봉과 중대 지로봉 및 남대 기린봉에 관한 내용은 오대의 위치와 이름이 실전(失傳)되거나 개명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 오대산조에서는 각 오대에서 발원하는 샘물 이름을 좀더 보완하여 서대 우통수, 동대 청계(수), 북대 감로(수), 남대 총명수(聰明水), 중대 옥계(수)로 일컫고, 이 중 우통수를 한강의 근원이 되는 영천으로 언급하고 있다.

중국과 한국의 오대산 신앙

오대산의 산 이름과 개산의 역사는 중국 4대 불교 영산의 하나인 오대산과 관련이 있다. 중국의 오대산(3,058m)은 산서성 오대현 동북쪽에 있으며, 그 상봉인 북대봉은 화북(華北)의 최고봉으로서 화북의 지붕이라고도 일컬어진다.

산이 높기 때문에 주봉의 그늘진 곳에는 만년빙설이 늘 남아 있으며, 산 중에는 한 여름에도 늘 맑고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고 있어서 일명 청량산(淸凉山)이라고도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서도 오대산을 청량산이라고도 일컫는 것은 이를 따른 것이라 본다.

상봉인 북대는 엽두봉(葉斗峯·3,058m)이라 하고, 남대는 금수봉(錦繡峯·2,474m), 동대는 망해봉(望海峯·2,796m), 서대는 괘월봉(掛月峯), 중대는 취암봉(翠巖峯)이라 일컫는다. 다섯 봉우리 복판에 널따란 복지(腹地)가 있는데, 대회(臺懷)라 일컫는다.

산 중 사찰 중 가장 큰 사찰은 현통사(顯通寺)다, 이 산은 후한 영평(永平·58-75) 연간에 인도 고승 가섭마등(迦葉摩騰)과 축법란(竺法蘭)이 개산했다. 후한 명제 때 이 두 고승의 주청에 의해 창건한 대찰 대부영취사(大孚靈鷲寺)가 곧 지금의 현통사다.

5대에도 우리나라 오대산의 가람배치와 같이 북대에 영응사(靈應寺), 서대에 법뢰사(法雷寺), 그리고 중대 남쪽 기슭에 길상사(吉祥寺)가 자리하고 있다. 또 대회 서남부 수상사(殊像寺)에는 문수보살의 소상(塑像)을 안치하고 있는데, 이 또한 우리나라 오대산의 상원사 청량선원 법당에 문수보살상을 안치하고 있는 가람 형태와 유사하다.

▲ 중국 오대산 용천사 일주문. 중국의 오대산 신앙은 서기 1세기에 인도로부터 전수됐다. 우리나라는 7세기 경 중국으로부터 받았다.

중국의 오대산은 문수신앙의 요람으로서 고대부터 1만 보살을 거느린 문수보살이 상주하는 곳으로 전한다. 이 오대산(청량산)이 후대에 문수성지로 일컬어지게 된 것은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그의 권속 1만 보살 가운데 있으면서 법을 연설하고 있다고 한 화엄경 권45의 제보살주처품(諸菩薩住處品)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수신앙을 우리나라 오대산에 전래한 이가 바로 신라의 자장율사다. 이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자장정률 조에 자세히 전한다. 그것을 요약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자장은 선덕여왕 5년(636)에 당에 유학하고자 건너갔다. 그는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청량산(오대산)에 들어가 북대의 문수보살 소상, 일설에는 태화지(太和池)가의 문수석상이 있는 곳에 이르러 경건하게 7일 동안 기도했더니, 꿈속에 문수보살이 나타나 범어로 된 4구의 게를 전해 주었다. 다음 날 한 승려의 모습으로 몸을 나툰 문수보살이 찾아와 잘 이해하지 못했던 4구 게에 관한 해석을 전해주고, 그에게 부처의 가사 한 벌, 주발 하나, 정골사리 한 조각을 전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그대의 본국 동북방 명주(溟州=강릉) 경계에 오대산이 있다. 1만의 문수보살이 항시 그곳에 거주하니 그대는 가서 보라.”

그리하여 자장이 선덕여왕 12년(643)에 본국으로 귀국한 후 오대산에 들어가 문수보살을 친견하려고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는데, 바로 지금의 월정사 자리다. 이렇듯 우리나라 오대산이 진성(眞聖)의 상주처, 곧 1만 문수보살의 상주처로서 문수성지로 여겨지게 된 것은 신라시대 자장율사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자장 이후 보천·효명 태자가 자장의 신앙사상을 더욱 계승 발전시키고, 후대에도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 신효거사(信孝居士·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사굴산문 범일국사(梵日國師)의 10성 제자의 한 사람인 신의 두타(信義 頭陀), 수다사(水多寺·강릉 정동진 괘방산 기슭의 낙가사)의 유연장로(有緣長老)가 자장이 머물던 곳에 와서 머물면서 그 신앙정신을 계승하고 있다.

1752년(영조 29) 이휘진(李彙晋)의 오대산월정사중건사적비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4년에 자장이 월정사를 개산한 이래 뒤이어 이를 중창하고 이곳에 머문 위의 4인을 4성으로 높여 일컫고 있다. 신효거사의 사적은 삼국유사의 대산월정사오류성중 조에도 자세히 전한다.


보천태자의 수행처 신성굴

삼국유사의 대산오만진신·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의하면, 자장 이후 그 신앙사상을 계승하여 오대산 신성굴(神聖窟)과 울진국(경북 울진군) 장천굴(掌天窟=聖留窟)에서 수도하여 성도한 신라 정신대왕(신문왕)의 태자 보천은 신성으로 일컬어질 만큼 신인의 경지에 이르렀던 인물로 보인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보천태자가 신통력을 발휘해 새처럼 하늘을 날아다녔다기 보다는 그의 도력이 높아지고 수차력(水借力)에 의한 경신술이 상당한 경지에 이르러 축지법도 행할 수 있는 고도의 수행 경지에 도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성굴은 송광연(1638-1695), 김창흡(金昌翕·1653-1722), 강재항(姜再恒·1689-1756)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현 두로봉 남쪽 골짜기인 신선골 입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계곡가 왼쪽 산기슭에 있었던 굴로 추정된다. 김창흡은 ‘(상원사 방면으로 가다가) 동쪽으로 다른 시내가 흘러와 모이는데, 그것을 살펴보니 제법 맑고 그윽하였다. 그 골짜기를 뚫고 가면 양양의 부연동 계곡에 이른다고 한다. 그 곁에 신성굴이 있는데, 옛날 명승이 살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터가 폐지되었다’고 했다.

신성굴이 있는 계곡은 곧 오늘날의 신선골로서, 이 계곡으로 들어가 백두대간 주능선 상의 신선목을 넘어 양양(현재는 강릉시 연곡면)의 부연동계곡으로 넘어가는 등산로를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신선골은 곧 신성골이 전음된 것으로 보인다. 이 신선골 입구에는 현재도 보천태자의 수행정신을 계승하고자 신성암(神聖庵)이란 건물을 지어놓고 수도처로 삼고 있다.

송광연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동굴만을 지칭하던 이름이 아니라, 금강산의 보덕굴(普德窟), 삼각산(북한산)의 문수굴(文殊窟) 등과 같이 동굴을 이용해 조성한 암자, 또는 굴 안에서 수행정진을 하기 위해 굴 주변에 주거공간으로 조성한 초암 따위를 포함하여 일컫던 수행처가 아니었을까 한다.

일생을 거의 월정사에서 주석한 현대 고승 탄허(呑虛·1913-1983)도 말년에 그가 머물던 암자를 방산굴(方山窟)이라 했듯이 후대에도 불승들은 위와 같은 고사를 본받아 자신들이 머무는 수행공간을 ‘~굴’이라 즐겨 불렀다. 송광연은 그 신성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월정사 방면에서)곧장 중대쪽을 향하여 시내를 따라 십수 리를 가 신성굴에 이르니 한 층의 암석이 시냇가에 우뚝 솟아 있고, 아래쪽에 작은 굴이 있었다. 그 위에 한 칸짜리 정사를 새로 창건하여 수좌승 의천(義天·1603-1690)이 머물면서 환적당(幻寂堂)이라 붙이고 정좌수도하는데, 정신과 풍채가 의연하였다. 나이가 지금 74세라 하는데, 밝은 광채가 얼굴에 가득하였다. 어려서부터 늘 솔잎을 복용하여 득력한 것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위의 내용에 보이는 환적 의천은 편양 언기(鞭羊彦機·1581-1644)의 문인으로서, 21세에 청량산에 들어가 31년 동안 벽곡(?穀) 수행한 특이한 고승이다. 그는 아마도 불도를 수행하면서 선가의 수행방법도 실행한 인물로 보인다.

현 신성암 뒤편 석벽에 신성굴로 지칭되던 자그마한 석굴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되기도 한다. 그러나 민간인 접근을 불허하고 있는 승려들의 조용한 수행처라 확인해 보지는 못했다. 이곳에서 계곡가를 따라 약 10분쯤 더 올라가면 또 절터로 볼 수 있는 빈 터가 보이기는 하지만, 신선골에는 현재 신성굴로 볼 만한 굴은 보이지 않는다.

상원사 승려나 이곳 관리공단 직원들도 잘 몰랐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모르나 현대에 이르러서는 이 신성굴의 위치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거나 기록하고 있는 예는 아직 보지 못했다.


한강의 발원샘 우통수

서대의 우통수는 미수의 오대산기에 의하면 신정, 신천, 또는 영천으로도 일컬어진 신령한 샘물로, 권근의 오대산 서대 수정암중창기 등에 의하면 여말선초 이후 한강의 발원샘이라 전하여 온다.

권근은 한강이 비록 여러 군데서 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것이지만, 우통수는 중령(中?)이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아 마치 중국의 양자강과 같다고 언급하고 있다. 이는 우통수를 중국 강소성 진강시(鎭江市) 옛 장강(양자강) 복판에 위치한 금산사(金山寺) 앞쪽 부용루에 있는 찻물로 유명한 천하제일천(天下第一泉) 일명 중령수(中?水)와 비견하여 언급한 것이다.

삼국유사의 명주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에 보이는, 우통수에 대한 최초의 표기 우동수(于洞水)는 대산오만진신조의 같은 내용에 어조사 于 자를 쓰지 않고 그냥 동중수(洞中水) 또는 영동지수(靈洞之水)라 한 것으로 보아 본래는 서대 골짜기 속의 물, 또는 신령한 골짜기의 물이란 뜻으로 말한 것으로 보인다. 곧 于 자는 목적격 조사 ‘를’로 새길 수 있는 어조사였을 것이다.

다시 말해 원문의 급우동수(汲于洞水)는 ‘우통(동)수를 길어’가 아니라 ‘동수(洞水·골짜기의 물)를 길어’의 의미이고, 복우동영수(服于洞靈水)는 ‘우통영수를 마셔’가 아니라 ‘동령수(洞靈水·골짜기의 신령한 물)를 마셔’의 의미라 하겠다.

뒤에 이 샘물을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게 되면서 아래 상원사 일대의 샘물에 대하여 ‘웃동(윗동)의 물’로 언급하게 되면서 이를 소리옮김한 것으로 인식하고 于洞水로 끊어 읽게 되고, 다시 동음의 글자를 빌려 于筒水란 차자표기로 좀더 분명하고 고상한 표기로 옮겨간 것이 아닐까 한다.

▲ 한강 발원지인 대덕산 검룡소. 한동안 오대산 우통수를 한강 발원리로 여겼으나 도상거리로 이곳이 더 길다는 것이 증명됐다.
우통수가 한강의 발원이라는 권근의 내용은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지리지 강릉조에 거의 그대로 수용되고 좀더 보완되어 ‘(우통수는)금강연에 이르러 한수(한강)의 근원이 된다’고 언급한 이후 부동의 정설로 정착되어온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내용을 현대적 시각으로 종합해 보면 우통수는 한강의 발원샘이고, 금강연은 낙동강 발원지 황지와 같은 한강의 발원지(發源池·발원소)이고, 우통수가 있는 산봉우리 서대 장령봉은 한강의 발원지역(산)이라 하겠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오랫동안 이어온, 위와 같은 전통적 한강 발원설은 1981년 이형석(한국하천연구소장)에 의해 한강의 최상 발원지역이 태백시 골지천 상류의 금대산 지역으로 문제가 제기된 후(월간山 1981년 5월호 참조) 김강산(태백문화원)과 전상호 교수(강원대) 등에 의해 좀더 발전적으로 조사 연구되어 지금은 발원지역을 태백시 백두대간 상에 자리한 금대산(금대봉·1,418m)으로, 발원샘을 금대산의 1351m봉에 자리한 제당굼샘으로, 발원지(발원소)를 태백시 창죽동의 창죽천 상류, 금대산 북쪽 금대봉골에 지리한 검룡소(儉龍沼)로 보고 있다(<한강의 발원지와 강원도> 강원개발연구원, 2000년 참조).

특히 태백시는 유로(流路)가 끊기는 제당굼샘, 또는 고목나무샘과 같은 발원샘 보다는 둘레 20여m에 석회암반을 뚫고 올라오면서 하루 5천여 톤 가량의 지하수를 용출하고 있는 검룡소를 황지와 같은 한강의 공식 발원지로 주장하고 있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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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2구간 / 갈전곡봉] 르포

고만고만한 오르내림의 반복에 어느덧 조침령
구룡령~갈전곡봉~조침령 구간

구룡령(1,013m)의 밤하늘은 낮고 희붐하다. 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지만, 보름을 하루 지난 달빛을 다 삼키지는 못한다. 가끔씩 고개를 넘는 바람이 구름을 흔들면, 바람과 함께 흐르는 달이 구름 사이로 환하게 웃는다. 안개는 대간 마루를 지웠다 되살리기를 반복한다. 전국적으로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가 있었지만 개의치 않기로 했다. 운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많은 비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 예보’에 스스로 최면을 걸었다.

1,000m가 넘는 구룡령 마루는 겨울을 무색케 한다. 혹시나 싶어서 준비해온 재킷을 입고도 한기를 이겨내기 힘들다. 지금은 구실을 잃어버린 산림문화관 주차장에 텐트를 치고 침낭 속으로 들어가자 비로소 한기가 가신다. 새벽녘 선잠 사이로 빗소리가 끼어든다. 예감이 좋지 않다.

▲ 비 지난 뒤 숲속은 청신한 기운으로 가득하다. 절정의 초롱꽃이 여름의 뒷모습을 곱게 물들이고 있다.

오전 9시쯤 되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한여름 같으면 즐거이 맞을 만한 수준이지만, 지금은 아니다. 더욱이 시계가 전혀 확보되지 않아서 사진 취재는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다음 날 출발하기로 계획을 수정했다. ‘관광 버전’으로 하루를 보내기로 작정하고는 양양 시내로 차를 몰았다. 일단 이틀 동안 혹사당할 몸뚱이에 아부를 하기로 했다. 양양의 명물 중 하나인 뚜거리탕(양양 사람들이 즐기는 민물고기 매운탕 비슷한 음식)으로 점심을 해결한 다음 낙산사 의상대로 가기로 계획을 세웠다.

뚜거리탕을 다 먹고 나자 비는 그치고, 창밖으로 보이는 설악 일대의 산들이 씻은 듯이 맑다. 역시 사람의 일은 한 치 앞을 모르는 법이다. 이왕 한뎃잠 자는 거라면 산으로 가지는 의견이 감성과 이성 두 쪽을 동시에 점령해 버린다. 1시간 전 우리의 굳은(?) 결의는 꼬리가 보이지 않는다.


주변 산릉보다 낮은 대간의 산세

다시 구룡령으로 돌아와 대간에 선 시간은 오후 1시. 양양쪽과 달리 구룡령 일대는 구름이 걸터앉아 있다. 그래도 비는 더 올 것 같지 않다. 생태이동통로가 이어지는 초입부터 숲이 무성하다. 나무와 풀들이 물기를 머금고 있는데도 산색은 지난 달에 비해 훨씬 수굿하다. 맹렬히 타오르던 푸른 기운은 이미 가야할 곳을 알아버린 표정이다. 작은 일에도 미련을 떨치지 못하는 인간의 표정과는 천지현격이다.

구룡령에서 갈전곡봉까지는 꾸준히 오른다. 1,000m가 넘는 봉우리 두 개를 넘는 동안 오르내르기를 반복하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꾸준히 오른다. 1100.3m봉과 1121m봉 일대는 혼효림 조성을 위해 인공으로 조림한 지역이다. 2002년에 전나무와 종비나무 각 200그루씩을 심었다는데, 썩 잘 자라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무성한 활엽수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 맹렬히 타오르던 짙푸른 숲은 어느새 수굿해졌다. 그 푸른 기운은 이제 하늘을 푸르게 하고, 땅을 붉게 물들일 것이다.
갈전곡봉(1,240m)은 이번 구간을 대표하는 봉우리지만 우뚝한 느낌은 거의 없다. 그 이유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숲으로 가려져 전망이 좋지 않고, 서쪽으로 1,200~1,400m대의 우람한 가지줄기가 뻗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서쪽으로 뻗은 가지 줄기는 갈전곡봉보다 더 알려진 산들인데, 가칠봉(1,240.4m), 응봉산(1,155.6m), 구룡덕봉(1,388.4m), 방태산(1,443.7m)이 연이어 있다.

이들 봉우리들은 모두 주목 받을 만하다. 삼봉약수와 달둔, 월둔, 살둔이 모두 이들 산이 빚어놓은 계곡을 기대고 있다. 달둔, 월둔, 살둔을 일러 3둔이라 하는데, 이들 모두는 갈전곡봉에서 방태산에 이르는 줄기의 남쪽에 있고, 북쪽으로는 4가리라 이르는 적가리, 아침가리, 명지가리, 연가리가 있다. 모두 계곡가의 따비밭을 이르는 이름인데, ‘가리’란 곧 ‘갈이’의 연음(連音)이다. 대표적 오지마을의 하나인 조경동은 아침가리의 한자말이다. 산이 워낙 깊어 아침에 잠깐 드는 볕에 받을 간다 해서 ‘조경(朝耕)’인 것이다.

갈전곡봉을 우리말로 풀면 ‘칡밭골 봉우리’가 될 텐데, 지금은 칡보다는 참나무숲으로 둘러싸여 있지만, 두루뭉술한 봉우리에 칡넝쿨이 우거져 있을 때는 말 그대로 칡밭으로 보였을 법도 하다.

하지만 갈전곡봉에서 북진하는 대간은 제법 가파른 내리막이다. 왼쪽으로 아침가리골을 끼고 길게 내려서다가 968.7m봉으로 올라선다. 사실 조금 지루하다. 전망이 트이는 곳에서는 점봉산과 설악산을 볼 수 있지만 숲과 구름이 이중으로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눈길을 발 아래로 돌리면 사정이 좀 달라진다. 북쪽이자 고지대여서 그런지 여름 들꽃들이 지천이다. 초롱꽃이 절정을 이루고 있고, 투구꽃과 물봉선, 참취, 곤드레나물도 2세 준비에 한창이다.

평해손씨 묘를 지나자 조그마한 캠프사이트가 나타난다. 여기서 좀더 키를 높이자 968.1m봉이다. 시계청소를 해 놓아서 사방이 열려 있지만 그림의 떡이다. 다만 동쪽으로 구룡령을 오르는 56번 국도는 눈 아래로 걸린다. 968.1m봉을 내려서면서부터는 고만고만한 오르내림이 반복된다.

내리막이 오히려 힘들어지기 시작한다. 1년에 한두 번씩 말썽을 부리는 무릎이 시큰거린다. 오늘 저녁 야영지로 택한 연가리골 샘터까지는 무리일 것 같다. 도무지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날씨가 덥지 않아서 물을 많이 마시지 않은 덕분에 샘터까지 가지 않아도 물 걱정이 없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연가리골 샘터를 1시간 정도 앞둔 산허리에 맞춤한 캠프사이트가 나타난다.

늦은 저녁을 먹고 나자 하늘이 말끔해진다. 숲속으로 내려앉는 달빛이 서늘하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텐트 플라이를 가져오지 않은 탓에 레인 재킷까지 껴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간다. 바람이 거세다.

혼곤한 잠 사이로 바람 소리가 수시로 끼어든다. 아직 잎이 무성한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가 온 산을 뒤흔든다. 엄청나게 높은 폭포 소리 같기도 하고,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기도 하다. 소리는 금방이라도 텐트를 날려버릴 것 같은 기세인데, 실제로는 텐트를 그리 흔들지 않는다. 숲에 바람이 부서지기 때문일 것이다




대간의 주요 지점에 공식 야영장 마련돼야

▲ 끝없이 이어지는 숲의 바다를 유영하듯 걸을 수 있다는 것. 대간 종주의 매력 가운데 하나다.
산 속의 기후는 곧잘 달력을 비웃는다. 아침을 먹고 배낭을 꾸리는데 손이 시릴 정도다. 어제 내린 비가 급격히 기온을 끌어내린 것 같다. 레인 재킷을 입은 채 걸어도 땀이 나지 않는다. 연가리골 샘터에 이르자 차가운 기운이 사라진다.
연가리골 샘터의 물은 사실 평소에도 내가 먹고 있는 물이다. 이 물은 진동리를 가로지르는 방태천으로 흘러들어 내린천과 소양강을 거쳐 결국은 한강에 이를 것이다. 과거 우리네 전통 사회는 같은 물을 먹는 단위로 공동체를 형성했다. 같은 우물물을 먹는 마을 공동체는 결속력이 더 강했다. 놀부의 패악 목록 가운데 ‘우물에 침 뱉기’가 들어 있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도시의 식수 문화는 수돗물 문화에서 이제는 정수기나 생수 문화로 바뀌었다. 같은 물을 마시는 생명의 공동체라는 생각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사회의 단위가 커지면 커질수록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희박해지는 건, 생명의 근원이라 해도 좋을 물의 뿌리에 대한 의식의 공유가 없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한여름에 모든 서울 시민을 한강가로 불러내어 1시간만 뙤약볕 아래 세워 두어도 한강물은 훨씬 맑아질 것이라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본다.

956m봉을 지나 단풍나무가 많은 곳을 지나면서부터 단체로 대간 종주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보송보송한 솜털에 잔뜩 땀방울을 매달고 우리 곁을 지나고 있다. 한 학생에게 학교를 물어 보았다.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경기도 분당에 있는 한 대안 중고등학교 아이들이었다. 한국 교육의 모순을 몸으로 보여 주는 아이들이다. 제도 교육에서는 생각하기조차 힘든 일을 하고 있는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부러워할 일이지만, 한국 교육의 현실을 생각하면 서글퍼진다.

이 아이들에게는 분명 대안이겠지만 그것이 한국 교육의 대안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점에서. 나는 지금 대안 학교도 또 다른 형태의 교육 불평등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대안 학교의 의미 있는 실험이 어느 정도는 제도권에 전염돼야 한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은 것이다. 만약 그런 상호 작용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대안 학교도 또 다른 형태의 특수학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비전문가의 기우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한편, 대간 종주를 하는 그 아이들이 ‘극기 훈련’ 따위의 생각에 매몰되지 말고 공동체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사실 힘든 일이다. 숨차고, 다리 아프고, 배고픈 게 전부이기가 쉽다. 하지만, 끝난 이후라도 백두대간의 사전적 의미 외에 산과 물, 대지, 그리고 인간이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그들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더 큰 자부심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단풍나무가 밀집된 곳에서 30분쯤 내려서자 제법 큰 공터가 나타난다. 흔히 대간꾼들이 대야영장이라고 말하는 곳이다. 이 일대도 가을이면 장관을 이룰 단풍나무가 즐비하다. 지정된 곳 외에 산에서 취사야영이 금지된 나라에서 대야영터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난감하다. 버젓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자인하는 셈이다.

그런데 산림청이나 지자체에서는 트레일을 정비하고 이정표를 세우는 등 대간 종주를 지원한다. 바람직한 일이긴 하지만 모순인 것도 사실이다. 가까운 시일 내에 주요 지점에 데크를 설치한 공식 야영장을 만드는 식의 합리적 방안이 마련돼야 할 것이다.

▲ 옛 조침령길을 취재하기 위해 쇠나드리 마을로 내려서는 길.
대야영장에서 1시간30분쯤 지나자 옛 조침령이라고 쓴 안내판이 나온다. 현재의 조침령으로 찻길이 열리기 전 진동리 사람들이 양양이나 속초쪽으로 나갈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길이었을 것이다.

옛 조침령 서쪽은 쇠나드리다. 5~6월에 동해에서 불어오는 높새바람이 어찌나 센지 황소가 날아갈 것 같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라 한다. 쇠나드리에서 찻길을 따라 오르면 설피 마을이다. 더 이상 찻길은 없다. 걸어서 대간의 고개인 단목령을 넘으면 한계령 아랫마을인 오색리에 닿는다.

옛조침령(약 700m)에서 조침령(760m)까지는 1시간 남짓 거리다. 고도 차이도 거의 없다. 끝없이 배낭을 당기는 수풀을 헤치면 조침령을 오르는 도로 절개지 옆 난간을 따라 조침령 표석이 있는 곳에 닿는다.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기린면을 잇는 고개로 1984년에 열렸다. 현재는 아래로 터널 공사가 마무리 단계다. 이 길도 곧 교통로로서의 구실은 사라질 것이다. 대간꾼들에게는 계속 요긴하게 쓰이겠지만.

북암령과 단목령으로 이어지는 대간은 표석에서 도로를 따라 조금 더 올라야 한다. 안내판과 전망대를 세워둔 곳으로 연결된다.

산경표에는 조침령의 한자 표기가 曹枕嶺이다. 우리말로 풀어 보자면 ‘무리를 지어 자고 넘는 고개’쯤이 되겠다. 그런데 현재 신문을 비롯한 글들을 보면 鳥寢嶺이라 하여 ‘새들도 자고 넘어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친절한 설명까지 곁들이고 있다. 최근에 만들어진 얘기인 것 같다. 굳이 시비할 것까지야 없지만 전혀 개성이 느껴지지 않을 뿐 아니라, 실제로 그리 가파른 고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보면 맞장구쳐 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 곰배령

봄이면 들꽃으로 천상의 화원을 이루는 곰배령은 일부러라도 가볼 만한 곳이지만 대간 주능선에는 들지 않는 고개다. 설악산 국립공원에는 포함되며 점봉산에서 1시간 남짓한 거리다. 대간 종주길에 이곳을 지나려면 조침령~북암령~단복령~점봉산을 포기하고, 곰배령에서 작은점봉산~점봉산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기계적인 대간 종주를 고집하지 않겠다는 약간의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겠다. 이런 방법이 께림칙하면 2~3시간 정도 시간을 할애해서 빈 몸으로 곰배령을 올랐다가 내려오는 방법도 있겠다.

굳이 대간 종주가 아니더라도 단풍 좋은 계절엔 진동리에서부터 곰배령까지 걷는 것도 멋지다. 가족 여행 코스로 잡아도 좋을 곳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길의 하나로 꼽힌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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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2구간 / 갈전곡봉] 지명

돋달(양양) 고을 변두리의 치밧골(갈전곡) 봉우리
인제의 옛이름 저족(猪足)은 높은 산지의 뜻

훈민정음이 반포된 직후, 김수온(金守溫)이 지은 내불당낙성기(內佛堂落成記)인 사리영응기(舍利靈應記)에 보면 47개의 인명이 성씨와 함께 기록돼 있다. 특히, 고유어 인명을 한글로 적고 있어서 그 시대 사람들의 이름에 관한 생각을 조금이나마 읽어 볼 수 있다.

막동, 타내, 올마대, 오마디, 오마대, 오망디, 오미디, 쟈가둥, 마딘, 도티, 고소미, 매뇌, ?리대, 올미, 더믈, 샹재, 검불, 망오지, ?구디, 수새, 쇳디, 랑관, 터대, ?둥, 우루미, 어리딩, 돌히, 눅대, 아가지, 실구디, 검둥, 거매, 쟈근대, 북쇠, 은뫼, 망쇠, 모리쇠, 강쇠, 곰쇠….

어떤 것은 외래어나 외국어 같은 것도 있고, 우리식 이름이라고 하기에 너무도 이상한 것도 많다. 지금으로서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이름도 꽤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 이름들은 모두 우리말에 바탕을 둔 것이라는 점이다.

마른 풀이나 나뭇잎이란 뜻의 검불이 그대로 들어가 있는가 하면, 끝에 낳았다는 뜻이 들어간 막동이 있고, 늑대라는 짐승의 이름을 딴 듯한 눅대도 있다. 망아지(말 새끼)란 뜻의 망오지(망아지), 돼지란 뜻의 도티, 검은 사람의 뜻인 검둥이나 거매, 망할 놈의 뜻의 망쇠, 똥구덩이란 뜻의 ?구디처럼 무척 천박스러운 뜻을 가진 것도 있어 더 눈길을 끈다.

똥이나 쇠 자와 같은 천스럽게 들리는 말을 써가면서까지 이와 같은 천명(賤名)을 쓴 것은 그들의 신분이 천하거나 자식이 아무렇게나 자라기를 바라는 생각에서 지은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오히려 일부러 그런 이름을 붙임으로써 복이나 장수를 기원하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성은 한자로 적고 이름을 한글로 적었는데, 이렇게밖에 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이름들을 한자로는 모두 표기하기가 어렵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 약수산에서 내려다본 구룡령 도로와 양양쪽 산줄기들. 갈천리 깊숙한 곳으로 후천 골짜기가 들어오고, 그 왼쪽에 백두대간, 오른쪽에 조봉 능선이 높다랗게 솟았다.

돼지의 원이름은 돝 또는 도티

우리네는 집짐승 중 좋은 꿈을 꾸라고 하면 개나 닭 같은 동물을 들지 않고 대개 돼지를 든다. 돼지는 잘 먹고 잘 크기 때문일까? 지저분하고 잘 생기지 않은 짐승임에도 잘 먹고 잘 자라서 그랬던지 우리네는 돼지를 부(富), 나아가서는 행복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고, 지금도 그 흐름은 별로 달라지지 않고 있다.

멧돝(멧돼지) 잡으려다 집돝(집돼지)까지 잃는다는 속담은 부를 추구하되 지나친 욕심은 자제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데, 역시 돼지를 돈(재산)과 관련지은 것이다. 그런데다가 돼지가 한자로 돈(豚)이어서 금전을 뜻하는 우리말인 돈과 음이 같아 돼지=돈이라는 인식을 머리에 뿌리박게 만들었다.

도티의 뿌리말은 돝(돋) 또는 도티이다.
·현무문(玄武門) 두 도티 한 사래 마?니 (용비어천가 43)
·돋 시(豕) (훈몽자회 상19)
·돋? 고기? 사다가 (소학언해 4-5)
·쇼와 양과 돋티라 (소학언해 2-33)

옛사람들 이름에 도야지 또는 대아지, 도지, 도치(도티) 등의 이름을 더러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모두 돼지라는 뜻을 지닌다. 집짐승 이름들을 보면 말, 소, 개, 닭, 양처럼 한 음절 이름이 많다. 그런데, 돼지만은 두 음절이다. 그러나, 돼지란 말도 원래 돝(돋)이라는 한 음절이었다. 옛날에는 집짐승을 나타내는 외자 낱말에 ?지(아지)라는 말을 덧붙여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새로 태어난 것(새끼)에 그런 일이 더 많았다.

·쇼(소)+?지>쇼?지(소?지)>송아지
·말+?지>마?지>망아지
·가(개)>가?지>강아지
·돝+아지>돝아지>도야지(돼지)

그렇다고 보면, 지금의 돼지(도야지)란 말은 돼지의 새끼란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 돝이 아닌 돝아지(도야지) 자체가 돼지란 뜻을 대신하게 되었다. 돝이란 음 자체가 조금 힘들어 나온 현상으로도 보인다.

땅이름에서도 돝(돋)이란 음을 많이 사용한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 중엔 돼지와 관련하여 나온 것이 많지만, 오랜 옛날에는 지형적인 의미로 붙여진 것이 더 많았다. 즉, 돝(돋)을 돼지가 아닌 돋음(솟아오름)의 의미로 새겨 한자의 도(刀)나 동(冬)으로 음역하여 붙인 것이다. 지금의 경북 영천시 일부였던 곳의 삼국시대 지명은 돋??로 유추되는 도동화(刀冬火)이고, 경기 과천시의 삼국시대 별칭은 돗?홀(돗골, 돋골)로 유추되는 동사힐(冬斯?)이다.

일부에서는 도(刀)나 동(冬)으로 취한 돋(돗)을 일출(日出)의 의미로도 보고 있으나, 대개의 땅이름이 지형적인 면을 고려하여 붙인 것임을 생각할 때 돋아오른(두드러져 오른), 즉 높은 의미로 새기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높은 산의 고장 인제 고을의 돋달
▲ 인제 진동리에서 양양 서림으로 넘어가는 조침령

백두대간 중에서 강원도 구룡령과 조침령 사이의 구간은 근처 다른 구간에 비하여 조금 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산지는 엄첨나게 넓어 주위가 온통 산이다. 한계산(漢溪山) 이남의 광활한 산지는 북한강 지류들과 남대천 지류들의 분수령을 만들어 놓고, 양양과 인제라는 큰 산고을을 갈라놓는다.

이러한 산지 고을임에도 이 근처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우리 조상들이 터박아 살아왔다. 산지 지역에서 좀 떨어져 있는 곳이긴 하지만,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서는 한반도 내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 유적이 발굴되어 이 지역에서 인간이 오래 전부터 거주해왔음을 알 수 있다.

양양 일대는 삼국시대 이전에 예(濊)나라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구려 영역이었던 이곳은 삼국시대에는 이문현(伊文縣) 또는 익현현(翼峴縣)이었다. 이문(伊文)의 음운반절(音韻反切)은 ‘일’로, 그 뿌리말은 ‘읻’일 것이며, 익현(翼現)의 익(翼)도 ‘읻’의 음차로 보인다. 이 ‘읻’은 지금의 우리말 얕다의 ‘얕(얃)’에 대응되는 말로 보인다.

익현은 통일신라시대인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익령현(翼嶺縣)으로 개칭되었고, 고려시대에 들어 1018년(현종 9)에 5도양계제(五道兩界制) 실시에 따라 현령이 파견되고 동계(東界)에 속했던 그 당시에 동산현(洞山縣)을 속현으로 병합했다. 1221년(고종 8)에 양주(襄州)로 승격하면서 지금의 양양(襄陽)이라는 이름의 바탕이 된다.

양양의 양(襄)도 ‘얃'을 근거로 한 이름으로 보인다. 양양은 낮은 산의 고을의 뜻인 얃골일 것이다. 지금의 양양 고을은 고구려 때의 이문(익현) 지역만이 아니며, 고을 땅의 남서쪽(백두대간 서쪽) 일대는 대부분 큰 산골짜기임을 뜻하는 혈산(穴山) 또는 동산현(洞山縣) 지역이었다.

백두대간 동쪽의 양양 지역이 오랜 옛 지명으로는 낮다는 뜻으로 나오는 데 반하여 서쪽 지역은 높다는 뜻으로 나온다. 그 대표적 지명이 바로 저족(猪足)이다. 저족을 한자 뜻대로 풀이하면 돼지 다리가 되지만, 이 뜻으로 되었을 리는 거의 없다. 그리고, 삼국시대 무렵엔 실제 돼지란 말을 쓴 일도 없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돼지의 옛말은 돝(돋)이다. 따라서, 다리의 뿌리말 달이 돝이란 말 뒤에 붙어 돝달이 이 고을의 이름으로 자리 잡아 갔을 가능성이 짙다. 즉, 돝달이 돝다리가 되고, 이것이 한자의 저족(猪足)이 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언어학자 고 신태현(辛兌鉉)님도 저(猪)의 훈이 돋이고, 족(足)은 다리로 산(山)의 뜻인 달의 훈차라고 하였다. 그래서, 인제 고을의 옛 토박이 이름은 돋달이며, 이것은 바로 일출산(日出山)을 의미한다고 하였다.

돝달이 저족이란 한자 이름으로 갔을 것이라는 것은 동감하나 이를 해 돋는 산을 뜻한다는 것에는 의문이 생긴다. 고대의 땅이름에서는 돋이 대개 두드러져 오른 곳 즉 높은 지대를 일컬었던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달은 산의 옛말

하늘이 높다 하고 / 발저겨 서지 말며 / 따이 두텁다고 / 마이 밟지 말을 것이 / 하늘 따 높고 두터워도 / 내 조심하리라.
(하늘이 높다고 하더라도 발꿈치를 돋우고 서지 말고, 땅이 두텁다고 마구 밟지 말아야 하리, 하늘과 땅이 높고 두텁다고 하더라도 나는 조심을 하련다).

이것은 조선 숙종 때의 정치가이면서 가객으로 이름 높았던 주의식(朱義植·연대 미상)의 글이다,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는 것이 군자의 몸가짐임을 깊게 강조한 것이다.

이 글에는 ‘따’라는 낱말이 두 번이나 들어갔다. 따는 땅의 옛말. 지금은 대개 땅이라는 말을 쓰고 있으나 옛날에는 보통 따라는 말을 썼다. 옛 문헌에 보면 땅은 따 외에 ‘따?’로도 나온다
·따 디(地) <왜어유해> 상7
·? 허위며 소리 하고 ?라 오거? <석보상절> 6-32
·? 디(地) <훈몽자회> 상1
·세세에 난 ?마다 <석보상절> 6-8
·?호로 향?야 <박통사언해-초간> 상 8
따는 경음화한 말이고, 그 전에는 다 또는 달이었다. 그리고, 또 그 이전에는 폐음절(閉音節)인 닫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닫>달>다>따>땅

달이 땅의 뜻이었음은 지금 말의 많은 낱말들을 통해서도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달구질이란 말을 예로 들 수가 있다. 달구질이란, 집 지을 터를 단단히 다지는 짓을 뜻한다. 이 말은 달(땅)과 질(행동)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이다. 달(닭)+질=닭?질. 즉, 땅’라는 말과 질이라는 말이 합쳐 달구질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전국에 퍼져 있는 땅이름 중에 닭실, 닭재 등 닭이 들어간 것이 적지 않은데, 이 중에는 그것이 땅 또는 산의 뜻으로 들어간 것이 많다. 달은 ‘다’가 되고 다시 격음화하고 모음도 변하여 터가 되기도 했다. 달이 또 산(山)의 뜻으로 많이 쓰이기도 했음은 지금의 산이름들에 유달산, 팔달산, 추월산, 월출산 등 달, 월(月) 등의 이름이 많이 들어가 있음을 보아서도 짐작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 보면 중국의 위서(魏書)를 인용하여 ‘단군이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이라고 불렀다’라고 했는데, 여기의 아사달도 이르다(朝)는 뜻의 앗과 산의 뜻인 달이 합쳐져 이루어진 말로 보인다. 즉, 아사달을 앗?달(아?달), 즉 앗+달의 구조로 된 이름으로 보는 것이다.


골짜기 이름에서 나온 갈전곡봉

높은 산을 의미하는 돝달(저족) 일대에 갈전곡봉(葛田谷峰)이 1,204m의 높이로 자리하고 있다. 양양군 서면과 인제군 기린면, 홍천군 내면의 경계에 있는데, 봉의 원이름은 치밧골봉으로, 주로 홍천군 방향에서 이 이름으로 많이 불려 왔다. 치밧골이란 이름에서의 치밧이 칡밭에서 나온 것임을 한자명 갈전(葛田)을 통해서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칡밭이 근거가 된 이름이라면 원래 츨긔밧골 또는 츨밧골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칡의 옛말이 츩이기 때문이다. 슳다, 승겁다, 며츨, 몸즛, 즘승이 전설모음화(前舌母音化) 현상에 따라 싫다, 싱겁다, 며칠, 몸짓, 짐승이 된 것처럼 츩도 칡으로 되었다. 따라서, 츨밭골(츨밧골)도 칠밧골이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데, 실제 이 산에 정말 칡이 많아서였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금의 산이름이나 봉우리 이름들 중에는 골짜기 이름을 바탕으로 해서 나온 이름이 적지 않다. 산을 오르려면 대개 골짜기를 따라 오르므로 골짜기 이름 자체가 산이름이나 봉우리 이름으로 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불곡산(佛谷山), 장곡산(長谷山)처럼 곡(谷) 자가 들어간 산이름이 적지 않다.

골짜기는 한자로 곡(谷) 외에 계(溪)로 많이 나타내므로, 두계산(斗溪山), 송계산(松溪山)과 같이 산이름이 많다. 서울과 경기도 성남시, 안양시, 과천시 경계에 있는 청계산(淸溪山)도 골짜기 이름이 그 바탕이다. 이 산이름은 ‘맑개’ 골짜기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즉, 맑개의 ‘맑'을 청(淸)으로 개를 계(溪)로 취하여 청계(淸溪)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지금의 과천시에 있는 막계동(莫溪洞)이라는 이름도 바로 이 골짜기에 마을이 있어서 나온 이름이다.

갈전곡이 칡밭골이고 이는 칡+밭+골의 구성일진대, 이것이 치밭골(치밧골)로 되는 데는 이해가 쉽게 따르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치목골(경남 합천 삼가면 외토리 등), 치밧등(경남 남해 이동면 무림리 등), 치실(경북 경주 천북 갈곡리 등)처럼 칡의 합성 땅이름 중에 칡이 치로 된 것이 적지 않음을 보면 이해가 쉬워진다.
또, 옛 문헌을 퉁해서도 츩이 다른 말과 합성된 말에 ㄱ이 탈락한 츨로 된 것을 볼 수 있다.

·?? 츨오시 (박통사언해-重刊) 12-10 *츨오시=츨+옷+이(츨옷=칡옷, 베옷)
치밧골봉은 그리 잘 알려진 봉우리는 아니다. 홍촌쪽에서는 도리어 이 봉우리 이름보다 치밧골(갈전곡) 골짜기가 더 잘 알려져 있다. 높이로 보아서도 치밧골 골짜기 서쪽의 가칠봉(柯七峰·1,240m)에도 이르지 못한다. 다만, 백두대간 중에 여러 고을을 가르는 중요한 목이어서 산행자들이 이 봉을 많이 주목하고 있을 뿐이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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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르포

하늘을 대신한 숲의 바다에 빠져들다
진고개~동대산~두로봉~신배령~만월봉~응복산~약수산~구룡령 구간

숲의 바다에 몸을 싣는다. 서핑 보드 같은 건 필요 없다. 오로지 두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노 저어 나갈 뿐이다. 숲의 바다를 헤쳐 가는 서퍼는 스스로 파도가 되어야 한다. 포말도 스스로 땀방울로 만들어야 한다. 그 파도는, 모래톱에서 스러지지 않는다. 파랑의 정점에서 햇살로 몸을 씻고, 아주 행복한 얼굴로 산마루 위에 스러진다. 비로소 파도는, 들꽃과 함께 먼산바라기를 한다.

이번 구간, 진고개에서 구룡령까지는 말 그대로 숲의 바다다. 더없이 건강한 숲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더욱이, 이번 구간의 가장 낮은 등성마루인 진고개(970m)에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만 오르면, 산행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1,000m 아래로 내려설 일이 없다. 산행 들머리인 진고개에서 동대산(1,433.5m)까지는 실거리 1.6km로 1시간 넘게 올라야 하지만, 이후부터는 산 주름이 느슨하다. 두로봉을 오를 때나 마지막 약수산 기슭만 가파를 뿐, 대부분 순하게 오르내린다. 이번 구간은 실제 거리(23.5Km)와 도상거리(22Km)의 차이도 거의 없다.

사실 이번 구간을 시작하기 전에는 심리적 부담이 컸다. 태풍 에위니아가 남긴 상처가 너무 짙은데다, 이틀이나 염천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옅은 구름이 한여름 햇살을 무디게 해 주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이 그늘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해발 1,000m 이상 고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낮에도 걷지만 않으면 거의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복병은 있었다. 일찍 서울을 떠났지만 휴가철의 길 사정은 시간을 무력화시켰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돌고 돌아 진고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계획대로 오전 10시에 출발했더라면 두로봉쯤에서 땀을 식히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모든 계획을 없던 일로 했다. 되는 대로 산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을 고쳐먹자 오히려 느긋해졌다.

▲ 하늘과 맞닿은 숲의 바다. 진고개에서 동대산으로 30m만 오르면, 한번도 1,000m 아래로 떨어지는 일 없이 구룡령까지 갈 수 있다. 그것도 대부분 하늘을 대신한 숲 사이로.

만 생명의 자궁 숲

진고개에서 동대산까지는 코방아를 찧을 듯한 된비알이다. 1.6km를 걷는 동안 고도를 460m 정도 올린다. 우습게 볼 높이가 아니다. 우리나라 산의 평균 해발고도(440m)를 웃돈다.

산으로 들자마자 무성한 다래 넝쿨이 온몸을 감싼다. 다소곳이 졸고 있는 달맞이꽃 옆에서 쑥부쟁이가 보랏빛으로 웃고 있다. 10분쯤 지나자 싸리나무와 조릿대 위로 참나무가 하늘을 대신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겹다. 거의 2시간(평균 1시간)만에 동대산에 오른다. 질경이가 가득한 산마루엔 동자꽃, 나리꽃, 당귀꽃이 한창이다. 그 위로 고추잠자리가 군무를 펼치고 있다.

두로봉을 향한다. 숲은 원시의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터널을 이룬 참나무 숲은 초록 햇살을 땅 위에 드리운다. 만약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온몸이 초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오대산의 숲은 건강하다. 참나무를 중심으로 극상림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3대가 함께 사는 집 같다.

▲ 두로봉을 내려서서 가던 길 멈추고, 자연의 아름다움은 생로병사와 무관하다.
오대산 숲의 건강성은 태풍 에위니아가 증명해 주었다. 아주 작은 흔적을 제외하고는 사태도 거의 없다. 숲이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숲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불경을 무릅쓰자면, 1년 동안 약 35조원이라고 한다. 산소를 공급하고(1ha에 연간 12톤), 물을 저장하고(소양댐 10개), 공기를 정화(활엽수림 1ha가 걸러내는 먼지의 양은 연간 68톤)한다. 또한 흙을 보호한다. 뿌리는 물론이거니와 삭정이와 낙엽까지 힘을 합쳐 흙을 감싸안는다. 숲의 토사유출 방지능력은 황무지의 227배에 이른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온도를 조절해 주고, 동물을 거두어 먹이고, 소음을 흡수해 주고, 인간의 심성까지 정화해 준다. 숲은 만생명의 자궁이다.

<침묵의 봄>이라는 책으로 환경오염의 위험을 경고한 레이첼 카슨(1907-1964)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어느 봄날 아침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아이가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아이의 새벽 단잠을 깨워서라도 바깥으로 나가 보자. 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특별히 일찍 깨어나기로 약속한 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에 안기는 날, 그런 날의 경험을 아이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가슴은 나무들 속에서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에 전율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있던 내가 돌연 그 소리를 통해서 내 힘과 정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땅의 시인 정현종은 이렇게 노래했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숲 예찬이 길었다. 고백하건대,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이 들어서, 그것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심사에서다.

멧돼지는 최고의 포식자이자 대적할 자 없는 맹수

차돌배기를 지나 편안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앞서 가던 사진기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한 30m 정도 앞에서 멧돼지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대간 종주를 하면서 수없이 멧돼지의 흔적은 봤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멧돼지가 사람을 공격하는 걸 보면서, 내가 만약 산길에서 맞닥뜨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고 보니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더 크다. 그러나 그건 잠시다. 이후로 거의 끊임없이 파헤친 흔적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진다. 가급적이면 일행과 떨어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다.

▲ 초록의 태양으로 이글거리는 대간 길. 사람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온몸이 초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대간 종주를 했지만 멧돼지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마을이나 도시에서 사람을 공격한 경우는 멧돼지에게 닥친 최악의 생존 상태에서 빚어진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그 근거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면서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멧돼지는 청각과 후각이 대단히 발달했기 때문에 인기척을 느끼면 먼저 피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의심이 많고, 겁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멧돼지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해 보자면, 오대산이야말로 멧돼지의 천국이다. 대식가인 멧돼지에게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천적이 없다보니 전국 어디고 멧돼지가 흔하지만, 대간 등성마루에서 이 정도로 많은 흔적을 본 적은 없다. 사실상 우리나라 동물 생태계에서 멧돼지는 최고의 포식자이자―인간을 제외하고는―대적할 자가 없는 맹수다.

▲ 순도 100%의 햇빛 아래로.

멧돼지의 생존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못 먹는 것이 거의 없다. 식탐을 제외하고는 대단한 절제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성장기 이후로 평생 홀로 지내는 수컷의 금욕은 수도사에 가깝다. 근친 교배를 막기 위해 생후 2년 정도가 지나면 무리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한겨울(12~3월)이 짝짓기 기간인데, 이 기간 내에도 암컷의 발정 기간은 3일에 불과하다. 힘없는 수컷은 그 기간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열악한 계절이 짝짓기 기간인 것도 생존전략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임신을 하고 봄에 새끼를 기르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빈약한 우리나라의 동물 생태계에서 멧돼지가 번성하는 주된 이유다. 그런데 천적이 없다는 점이 멧돼지에게는 불행이다. 개체 수 조절이 안 되는 것이다. 오대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환경이 부메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오대산 숲의 건강성은 또한 멧돼지가 보증하고 있다.

두로봉을 목표로 삼았지만 신선목이에 이르자 어둠살이 돋기 시작한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히려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든다. 신선목이 왼쪽(서쪽) 기슭에 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면 물이 있는 이곳에서 잘 것인지, 물을 지고 갈 것인지를 놓고 갈등했을 테니까. 신선목이는 두로봉을 2km 정도 앞둔 곳으로, 동대산에서 이곳까지 긴 내리막을 이루다가 두로봉(1421.9m)으로 솟구친다.

▲ 만월봉 전 조망처에서.

취재팀의 좌장인 김종현 형은 물 냄새를 맡는 데는 낙타에 버금간다. 어느 새 약간 허물어진 샘을 복구해서 물을 떠 온다. 여름 산행에서 물은, 겨울 살림에서 김장보다 지위가 높다. 양껏 행복해진 우리는 맹렬히 먹고 마신다. 이제 눈만 감으면 아침일 것이다.

두로봉에 도착한 시각은 아직 공무원 출근시간 전이다. 기분 좋은 시작이지만 조망은 좋지 않다. 사방을 참나무와 드문드문 자작나무가 에워싸고 있는데다 옅은 구름이 깔려있다.

두로봉은 대간과 오대산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두로봉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오대산의 주능선은 상왕봉(1,491m), 비로봉(1,563.4m·오대산 정상), 호령봉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 줄기는 남서로 계속 이어져 계방산, 태기산을 지나 팔당까지 뻗어나가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수령을 이룬다(요즘 이 산줄기를 ‘한강기맥’이라고 부름).

대간과 오대산 주능선의 관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동대산에서부터 두로봉, 두로봉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호령봉까지 신선골과 상원사 계곡을 감싸안는다. 그리고 상원사 적멸보궁 아래 중대(사자암)를 중심으로 동대(관음암), 서대(수정암), 남대(지장암), 북대(미륵암)가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오대 즉 ‘동대 만월산, 남대 기린산, 서대 장령산, 북대 상왕산, 중대 풍로산을 현재의 봉우리를 대응시켜 보면, 동대는 동대산이고, 북대는 상왕산일 것 같은데, 나머지는 어떤 봉우리인지 알 길이 없다.

▲ 불에 타 죽은 나무와 새로 돋는 숲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룡령 직전 내리막길.

두로봉은 곧장 북쪽을 향하며 허리를 낮추어 고개 하나를 열어준다. 신배령이다. 옛날,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이어주던 고개였을 것인데, 지금은 고개로서의 구실이 없다. 신배령이라는 이름은 돌배가 많아서 비롯됐다는데, 실제로 주위에 돌배나무가 많다. 트레일에 다래만한 돌배가 흔하게 눈에 띈다. 현재 신배령에는 근사한 나무벤치가 놓여 있고, 서쪽 기슭에 샘이 있어 쉬어가기에 아주 좋다.

신배령에서 1시간 정도 곧장 나아가는 대간 마루는 1210.1m봉에서 서쪽으로 몸을 틀며 만월봉(1,280.9m) 일으켜 세운다. 다시 내려섰다 크게 솟구치면 응복산(1,491m)이다. 양양 남대천의 상류이자 청정하기로 이름 높은 법수치 계곡이 바로 이 산 동쪽에서 시작한다. 북쪽으로 미천골도 이 산에서 시작된다. 응복산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보는 눈맛도 근사하다. 오대산은 물론 동대산과 황병산까지 한눈에 안긴다.

▲ 구룡령으로 내려서는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에서. 구룡령으로 오르는 56번 지방도가 아스라하다.
응복산에서부터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북서쪽으로 휘돌다가 불끈 서면 약수산(1,306.2m)이다. 동쪽으로 불바라기약수, 남쪽으로 구룡약수와 명계약수, 서쪽으로 삼봉약수, 북서쪽으로 갈천약수가 있어서 그 이름이 비롯된 것 같다.

약수산에서 구룡령(1,013m)까지는 급전직하하는 내리막이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서부터는 등성마루를 걸을 수 없다. 철망으로 막혀 있는데, 이 길의 본래 주인인 식물과 동물을 위한 생태이동통로가 구룡령 위를 지난다. 휴게소로 문을 열었다가 삼림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꾼 휴게소는 동물들의 이동에 방해가 된다 하여 문을 닫았다. 진전된 생태의식은 기껍지만, 시원한 음료수 한 잔 할 수 없는 점은 솔직히 아쉽다.

구실을 잃어버린 휴게소 주차장에 앉아 노점에서 산 자두를 베어 먹으며 하늘을 본다. 땀만 흘리지 않고, 배만 고프지 않고, 다리만 아프지 않았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본다. 23.5km에 이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길은, 또 나를 유혹한다.


#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구룡령 주변에는 이름난 약수가 많다. 그 중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고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하며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있는 약수터를 소개한다.

불바라기약수
강원도 양양군 미천골에 있는 약수다. 미천골의 벼랑에서 흘러나오며, 물맛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라 하여 불바리기로 불린다. 미천골 자연휴양림의 임도를 이용하면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다.

삼봉약수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에 있다. 구룡령에서 홍천쪽으로 가다가 명계교에서 삼봉 자연휴양림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북쪽으로 가칠봉, 서쪽으로 응봉산, 남쪽으로 사삼봉 사이에 있다 하여 삼봉약수로 불린다. 장기간 요양하는 사람들을 위한 산장도 있다.

갈천약수
강원도 홍천군 서면 갈천리에 있다. 구룡령에서 양양쪽으로 내려서면 된다. 주변에 휴양시설이 많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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