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르포

하늘을 대신한 숲의 바다에 빠져들다
진고개~동대산~두로봉~신배령~만월봉~응복산~약수산~구룡령 구간

숲의 바다에 몸을 싣는다. 서핑 보드 같은 건 필요 없다. 오로지 두 발로, 한 걸음 한 걸음 노 저어 나갈 뿐이다. 숲의 바다를 헤쳐 가는 서퍼는 스스로 파도가 되어야 한다. 포말도 스스로 땀방울로 만들어야 한다. 그 파도는, 모래톱에서 스러지지 않는다. 파랑의 정점에서 햇살로 몸을 씻고, 아주 행복한 얼굴로 산마루 위에 스러진다. 비로소 파도는, 들꽃과 함께 먼산바라기를 한다.

이번 구간, 진고개에서 구룡령까지는 말 그대로 숲의 바다다. 더없이 건강한 숲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더욱이, 이번 구간의 가장 낮은 등성마루인 진고개(970m)에서 천천히 걸어도 10분 정도만 오르면, 산행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1,000m 아래로 내려설 일이 없다. 산행 들머리인 진고개에서 동대산(1,433.5m)까지는 실거리 1.6km로 1시간 넘게 올라야 하지만, 이후부터는 산 주름이 느슨하다. 두로봉을 오를 때나 마지막 약수산 기슭만 가파를 뿐, 대부분 순하게 오르내린다. 이번 구간은 실제 거리(23.5Km)와 도상거리(22Km)의 차이도 거의 없다.

사실 이번 구간을 시작하기 전에는 심리적 부담이 컸다. 태풍 에위니아가 남긴 상처가 너무 짙은데다, 이틀이나 염천을 견뎌야 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옅은 구름이 한여름 햇살을 무디게 해 주었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이 그늘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하여 해발 1,000m 이상 고도의 위력은 대단했다. 한낮에도 걷지만 않으면 거의 더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복병은 있었다. 일찍 서울을 떠났지만 휴가철의 길 사정은 시간을 무력화시켰다. 고속도로를 버리고 국도를 돌고 돌아 진고개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2시. 계획대로 오전 10시에 출발했더라면 두로봉쯤에서 땀을 식히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모든 계획을 없던 일로 했다. 되는 대로 산에 몸을 맡기기로 마음을 고쳐먹자 오히려 느긋해졌다.

▲ 하늘과 맞닿은 숲의 바다. 진고개에서 동대산으로 30m만 오르면, 한번도 1,000m 아래로 떨어지는 일 없이 구룡령까지 갈 수 있다. 그것도 대부분 하늘을 대신한 숲 사이로.

만 생명의 자궁 숲

진고개에서 동대산까지는 코방아를 찧을 듯한 된비알이다. 1.6km를 걷는 동안 고도를 460m 정도 올린다. 우습게 볼 높이가 아니다. 우리나라 산의 평균 해발고도(440m)를 웃돈다.

산으로 들자마자 무성한 다래 넝쿨이 온몸을 감싼다. 다소곳이 졸고 있는 달맞이꽃 옆에서 쑥부쟁이가 보랏빛으로 웃고 있다. 10분쯤 지나자 싸리나무와 조릿대 위로 참나무가 하늘을 대신하고 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겹다. 거의 2시간(평균 1시간)만에 동대산에 오른다. 질경이가 가득한 산마루엔 동자꽃, 나리꽃, 당귀꽃이 한창이다. 그 위로 고추잠자리가 군무를 펼치고 있다.

두로봉을 향한다. 숲은 원시의 생명력으로 충만하다. 터널을 이룬 참나무 숲은 초록 햇살을 땅 위에 드리운다. 만약 인간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온몸이 초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오대산의 숲은 건강하다. 참나무를 중심으로 극상림을 이루고 있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우러진 모습은 3대가 함께 사는 집 같다.

▲ 두로봉을 내려서서 가던 길 멈추고, 자연의 아름다움은 생로병사와 무관하다.
오대산 숲의 건강성은 태풍 에위니아가 증명해 주었다. 아주 작은 흔적을 제외하고는 사태도 거의 없다. 숲이 우리에게 내려준 축복이다. 숲의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불경을 무릅쓰자면, 1년 동안 약 35조원이라고 한다. 산소를 공급하고(1ha에 연간 12톤), 물을 저장하고(소양댐 10개), 공기를 정화(활엽수림 1ha가 걸러내는 먼지의 양은 연간 68톤)한다. 또한 흙을 보호한다. 뿌리는 물론이거니와 삭정이와 낙엽까지 힘을 합쳐 흙을 감싸안는다. 숲의 토사유출 방지능력은 황무지의 227배에 이른다고 한다. 어디 그뿐인가. 온도를 조절해 주고, 동물을 거두어 먹이고, 소음을 흡수해 주고, 인간의 심성까지 정화해 준다. 숲은 만생명의 자궁이다.

<침묵의 봄>이라는 책으로 환경오염의 위험을 경고한 레이첼 카슨(1907-1964) 여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있는 능력만큼 소중한 것이 또 있을까? 어느 봄날 아침에 울려 퍼지는 새들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아이가 자라나도록 내버려두지 말자. 아이의 새벽 단잠을 깨워서라도 바깥으로 나가 보자. 새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특별히 일찍 깨어나기로 약속한 날,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에 안기는 날, 그런 날의 경험을 아이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렇게 말했다.
“내 가슴은 나무들 속에서 수런거리는 바람 소리에 전율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지리멸렬한 삶에 지쳐있던 내가 돌연 그 소리를 통해서 내 힘과 정신성을 발견하는 것이다.”
이 땅의 시인 정현종은 이렇게 노래했다.

파랗게, 땅 전체를 들어올리는
봄 풀잎
하늘 무너지지 않게 떠받치고 있는 기둥

숲 예찬이 길었다. 고백하건대, 육체적으로는 너무 힘이 들어서, 그것에 대한 심리적 보상이라도 받아야겠다는 심사에서다.

멧돼지는 최고의 포식자이자 대적할 자 없는 맹수

차돌배기를 지나 편안한 내리막길을 걷는다. 앞서 가던 사진기자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다. 한 30m 정도 앞에서 멧돼지 두 마리가 지나가고 있다. 대간 종주를 하면서 수없이 멧돼지의 흔적은 봤지만 이렇게 눈으로 보기는 처음이다.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멧돼지가 사람을 공격하는 걸 보면서, 내가 만약 산길에서 맞닥뜨리면 어떻게 할까 하는 걱정을 해 본 적이 있다. 하지만 실제로 만나고 보니 놀라움보다는 반가움이 더 크다. 그러나 그건 잠시다. 이후로 거의 끊임없이 파헤친 흔적을 보자 간담이 서늘해진다. 가급적이면 일행과 떨어지지 않게 주의를 기울인다.

▲ 초록의 태양으로 이글거리는 대간 길. 사람도 광합성을 할 수 있다면 온몸이 초록으로 물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대간 종주를 했지만 멧돼지에게 공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어 본 적은 없다. 마을이나 도시에서 사람을 공격한 경우는 멧돼지에게 닥친 최악의 생존 상태에서 빚어진 아주 예외적인 경우다. 그 근거는, 농작물에 피해를 주는 경우가 다반사이면서도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멧돼지는 청각과 후각이 대단히 발달했기 때문에 인기척을 느끼면 먼저 피한다고 한다. 지나치게 예민하고, 의심이 많고, 겁이 많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멧돼지 얘기가 나온 김에 좀 더 해 보자면, 오대산이야말로 멧돼지의 천국이다. 대식가인 멧돼지에게 이보다 좋은 환경은 없을 것이다. 천적이 없다보니 전국 어디고 멧돼지가 흔하지만, 대간 등성마루에서 이 정도로 많은 흔적을 본 적은 없다. 사실상 우리나라 동물 생태계에서 멧돼지는 최고의 포식자이자―인간을 제외하고는―대적할 자가 없는 맹수다.

▲ 순도 100%의 햇빛 아래로.

멧돼지의 생존력은 경이로울 정도다. 못 먹는 것이 거의 없다. 식탐을 제외하고는 대단한 절제력의 소유자이기도 하다. 성장기 이후로 평생 홀로 지내는 수컷의 금욕은 수도사에 가깝다. 근친 교배를 막기 위해 생후 2년 정도가 지나면 무리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한겨울(12~3월)이 짝짓기 기간인데, 이 기간 내에도 암컷의 발정 기간은 3일에 불과하다. 힘없는 수컷은 그 기간조차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열악한 계절이 짝짓기 기간인 것도 생존전략이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때에 임신을 하고 봄에 새끼를 기르는 것이다. 이런 점들이 빈약한 우리나라의 동물 생태계에서 멧돼지가 번성하는 주된 이유다. 그런데 천적이 없다는 점이 멧돼지에게는 불행이다. 개체 수 조절이 안 되는 것이다. 오대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좋은 환경이 부메랑이 되고 있는 셈이다. 어쨌든, 오대산 숲의 건강성은 또한 멧돼지가 보증하고 있다.

두로봉을 목표로 삼았지만 신선목이에 이르자 어둠살이 돋기 시작한다. 엎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히려 잘 됐다 싶은 생각이 든다. 신선목이 왼쪽(서쪽) 기슭에 샘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면 물이 있는 이곳에서 잘 것인지, 물을 지고 갈 것인지를 놓고 갈등했을 테니까. 신선목이는 두로봉을 2km 정도 앞둔 곳으로, 동대산에서 이곳까지 긴 내리막을 이루다가 두로봉(1421.9m)으로 솟구친다.

▲ 만월봉 전 조망처에서.

취재팀의 좌장인 김종현 형은 물 냄새를 맡는 데는 낙타에 버금간다. 어느 새 약간 허물어진 샘을 복구해서 물을 떠 온다. 여름 산행에서 물은, 겨울 살림에서 김장보다 지위가 높다. 양껏 행복해진 우리는 맹렬히 먹고 마신다. 이제 눈만 감으면 아침일 것이다.

두로봉에 도착한 시각은 아직 공무원 출근시간 전이다. 기분 좋은 시작이지만 조망은 좋지 않다. 사방을 참나무와 드문드문 자작나무가 에워싸고 있는데다 옅은 구름이 깔려있다.

두로봉은 대간과 오대산 주능선이 만나는 지점이다. 두로봉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오대산의 주능선은 상왕봉(1,491m), 비로봉(1,563.4m·오대산 정상), 호령봉을 일으켜 세우는데, 이 줄기는 남서로 계속 이어져 계방산, 태기산을 지나 팔당까지 뻗어나가면서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수령을 이룬다(요즘 이 산줄기를 ‘한강기맥’이라고 부름).

대간과 오대산 주능선의 관계를 간략히 정리하면 동대산에서부터 두로봉, 두로봉에서 반시계 방향으로 호령봉까지 신선골과 상원사 계곡을 감싸안는다. 그리고 상원사 적멸보궁 아래 중대(사자암)를 중심으로 동대(관음암), 서대(수정암), 남대(지장암), 북대(미륵암)가 있다.

그런데 삼국유사에 나오는 오대 즉 ‘동대 만월산, 남대 기린산, 서대 장령산, 북대 상왕산, 중대 풍로산을 현재의 봉우리를 대응시켜 보면, 동대는 동대산이고, 북대는 상왕산일 것 같은데, 나머지는 어떤 봉우리인지 알 길이 없다.

▲ 불에 타 죽은 나무와 새로 돋는 숲이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구룡령 직전 내리막길.

두로봉은 곧장 북쪽을 향하며 허리를 낮추어 고개 하나를 열어준다. 신배령이다. 옛날, 강릉시 연곡면 삼산리와 홍천군 내면 명개리를 이어주던 고개였을 것인데, 지금은 고개로서의 구실이 없다. 신배령이라는 이름은 돌배가 많아서 비롯됐다는데, 실제로 주위에 돌배나무가 많다. 트레일에 다래만한 돌배가 흔하게 눈에 띈다. 현재 신배령에는 근사한 나무벤치가 놓여 있고, 서쪽 기슭에 샘이 있어 쉬어가기에 아주 좋다.

신배령에서 1시간 정도 곧장 나아가는 대간 마루는 1210.1m봉에서 서쪽으로 몸을 틀며 만월봉(1,280.9m) 일으켜 세운다. 다시 내려섰다 크게 솟구치면 응복산(1,491m)이다. 양양 남대천의 상류이자 청정하기로 이름 높은 법수치 계곡이 바로 이 산 동쪽에서 시작한다. 북쪽으로 미천골도 이 산에서 시작된다. 응복산에서 남동쪽으로 바라보는 눈맛도 근사하다. 오대산은 물론 동대산과 황병산까지 한눈에 안긴다.

▲ 구룡령으로 내려서는 급전직하의 내리막길에서. 구룡령으로 오르는 56번 지방도가 아스라하다.
응복산에서부터는 오르내림을 반복하며 북서쪽으로 휘돌다가 불끈 서면 약수산(1,306.2m)이다. 동쪽으로 불바라기약수, 남쪽으로 구룡약수와 명계약수, 서쪽으로 삼봉약수, 북서쪽으로 갈천약수가 있어서 그 이름이 비롯된 것 같다.

약수산에서 구룡령(1,013m)까지는 급전직하하는 내리막이다. 내리막이 끝나는 곳에서부터는 등성마루를 걸을 수 없다. 철망으로 막혀 있는데, 이 길의 본래 주인인 식물과 동물을 위한 생태이동통로가 구룡령 위를 지난다. 휴게소로 문을 열었다가 삼림전시관으로 이름을 바꾼 휴게소는 동물들의 이동에 방해가 된다 하여 문을 닫았다. 진전된 생태의식은 기껍지만, 시원한 음료수 한 잔 할 수 없는 점은 솔직히 아쉽다.

구실을 잃어버린 휴게소 주차장에 앉아 노점에서 산 자두를 베어 먹으며 하늘을 본다. 땀만 흘리지 않고, 배만 고프지 않고, 다리만 아프지 않았다면 신선이 부럽지 않았을 텐데, 하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 본다. 23.5km에 이르는 끊임없이 이어지는 숲길은, 또 나를 유혹한다.


#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구룡령 주변에는 이름난 약수가 많다. 그 중 오래 전부터 알려져 있고 자동차로 접근이 가능하며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있는 약수터를 소개한다.

불바라기약수
강원도 양양군 미천골에 있는 약수다. 미천골의 벼랑에서 흘러나오며, 물맛이 뜨겁게 느껴질 정도라 하여 불바리기로 불린다. 미천골 자연휴양림의 임도를 이용하면 근처까지 접근할 수 있다.

삼봉약수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리에 있다. 구룡령에서 홍천쪽으로 가다가 명계교에서 삼봉 자연휴양림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북쪽으로 가칠봉, 서쪽으로 응봉산, 남쪽으로 사삼봉 사이에 있다 하여 삼봉약수로 불린다. 장기간 요양하는 사람들을 위한 산장도 있다.

갈천약수
강원도 홍천군 서면 갈천리에 있다. 구룡령에서 양양쪽으로 내려서면 된다. 주변에 휴양시설이 많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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