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문화

자국 영토임을 각인시키려는 의지의 표현
한국 오대산신앙의 본거지는 신라의 호국사찰

▲ 오대산 사고. 오대산의 위치가 조선시대의 영토로는 오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고를 설치했다.

산은 자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산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산이란 사람이 일정하게 개념화하여 이름붙인 대상으로서의 자연경관이지만, 여기에 시간, 곧 역사가 더해지고 문화집단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 독특한 의미와 기능이 형성된 문화경관이기도 하다.

백두산을 생각해 보자. 백두산은 우리에게 있어 자연경관을 넘어서 겨레문화와 정신사의 아이콘(icon)이자 상징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어떠한 집단적인 의미체계가 형성되어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사회적 의미가 집적된 문화경관인 것이다.

문화경관에는 그 경관을 만든 문화집단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되어 있는 법이다. 그것은 산의 이름을 비롯하여 상징성, 의미, 문화적 건축물, 사회 집단의 생활공간 등으로 지명 혹은 문헌을 통해 인지할 수 있거나 가시적인 경관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역으로 이러한 매개를 통해 문화경관으로서 산에 투영된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문화와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산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시대와 지역 환경이 바뀜에 따라 사람과 새로이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 의미가 구성되어 인식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백두대간이라는 것도 사회적으로 의미를 공유하는, 다시 말해 문화적 의미가 구성된 산맥의 인식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 속에 반영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는 국토의 중추이자 근간에 대한 인식, 땅을 유기체의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풍수적 사유, 조선시기의 지리정보 등 수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서 1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두대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실 백두산도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지도에 본격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당시부터 집권 왕조에 의해서 지리적으로 중시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비로소 지리적 인식의 확장과 더불어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의 산맥 체계가 정립된 것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서 국가안보와 지방통치의 필요상 국토지리적 정보를 체계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새로이 우리에게 각인된 백두대간이라는 주제의 사회적 담론은 국토에서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체계가 지니는 환경생태적 중요성과 일방적 서구문화의 수용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전통적 가치의 각성 등이 결합된 것이다.
일제시기 일본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의 서구적 산맥체계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백두대간이라는 전통적 인식과 가치의 도전을 강력하게 받게 되었고, 백두대간의 사회적 인식은 이미 상당한 고지를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리적 개념은 사회적으로 해당 시기를 주도하는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역사가 바뀜에 따라 또 도전되는 변증법적인 경로를 겪게 된다.



신라 호국사찰로 등장한 중대 사자암

오대산도 문화경관이라는 시선의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문화적 상징적 배경은 무엇이며, 오대산이 자연경관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문화경관으로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의미체계를 형성한 것은 언제부터이고, 그 내용과 배경은 무엇일까? 오대산이라는 문화경관의 형성을 주도한 세력집단은 어떤 계층인가?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가지게 되고, 이 영역에 사찰을 필두로 하는 문화적 경관이 형성된 것은 불교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불교적 문화적 요소가 투영된 결과다. 그리고 문화경관이 새롭게 형성되고 기능이 변경되는 데는 문화집단 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세력 관계가 배경이 되고 있는데, 문화경관에 또한 신라의 정치사회적인 세력관계가 공간적으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권근이 쓴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라는 글에는 사찰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기능이 잘 나타나 있다. 곧 사자암이라는 절은 왕실집단이 원찰로 설치하여 호국 기능을 담당하였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 오대산 북대(미륵암).

‘강릉부의 오대산은 빼어난 경치가 옛적부터 드러났다기에, 원찰(願刹)을 설치하여 승과(勝果)를 심으려 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늙은 중 운설악(雲雪岳)이 이 산에서 와서 고하기를 '산의 중대(中臺)에 사자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국가를 보비(補裨)하던 사찰입니다.’

문화경관으로서의 오대산은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따라 그 기능이 새로 더해지기도 하였다. 신라시기에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얻고 국토의 요충지이자 승경(勝景)으로 선택되어 처음 불교적 문화경관이 입지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위치가 조선시대의 영토로는 오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오대산은 흙산이면서 천 바위, 만 구렁이 겹겹으로 막혀져 있다. 가장 위에는 다섯 축대가 있어 경치가 훌륭하고 축대마다 암자 하나씩이 있다. 그 중 한 곳에는 부처의 사리를 갈무리하였다. 한무외(韓無畏)가 여기에서 선도(仙道)를 깨치고 신선이 되었는데 연단(練丹)할 복지(福地)를 꼽으면서 이 산이 제일이다 하였다. 예로부터 병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史庫)를 지어 실록을 갈무리하고 관원을 두어서 지키게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오대산이 불교의 문화적인 속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선덕여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서 적고 있듯이 신라의 자장율사 이래로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성지로 알려져 왔으며, 오대신앙의 본산으로 일컬어졌다.

오대산의 지리적 위치는 당시 신라 영토와 국경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당시 호국불교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사찰을 배치하여 불보살의 호국적 보위를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은 동아시아적인 문화영역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같은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다시 말해 중국에 있는 오대산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공간적으로 확산된 지리적인 속성도 띠고 있다. ‘한중일 오대산신앙의 연구’(박노준)에 의하면(이하 관련 내용은 연구를 요약한 것임), 원래 오대산신앙은 불교의 화엄경에 의거하고 있지만, 불교와 산악숭배 관념이 결합된 것으로, 중국 태원의 오대산, 한국의 오대산, 일본 쿄토 부근의 애탕산(愛宕山)이 오대산에 비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보현사.

오대산이라는 이름에 접두사로 붙은 오(五)라는 이름에는 동아시아의 가치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오대 혹은 오봉(五峰)의 신성한 산 관념은 인도의 숫타니파타에서도 드러나며, 문수사리반열반경에서는 히마바트(Himavat)의 신령스러운 곳에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호수가 있다는 내용도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오(五)라는 숫자는 만물을 아우르는 상징성을 내포한 성수(成數)였기 때문에 세계와 자연경관을 오의 의미체계로 읽거나 해석하였는데, 세계관의 운행질서로서 오행과 방위의 오방(五方)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국토의 명산 역시 오악으로 지정하였는데, 중국의 오악은 동 태산(산동성), 서 화산(섬서성), 남 형산(호남성), 북 항산(산서성), 중 숭산(하남성)이고, 신라의 오악은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남 지리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이었으며, 일본(헤이안시대)의 오악은 조일봉, 대취봉, 고웅산, 용상산, 하마장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중국 태원의 오대산이나 한국의 오대산이 화엄경에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청량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을까? 화엄경에는 ‘동북쪽에 보살이 머무는 청량산이 있다. 과거 이래로 보살이 거주하였는데 현재 문수보살이 만 명의 보살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여기에 청량산은 실제의 산이라기보다는 불교의 경전문학에서 가공된 산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대산은 중국 중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기후적 조건이 청량하며 산수 경관이 신비스럽고 탁월하다는 점도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오대산은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다가 중국의 오대산과 닮아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이나 이상향을 닮은 곳에 입지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역사적으로 사찰의 입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이라는 이름은 기사굴산의 역어로서 인도의 산과 닮아서 이름 지었고 사찰이 입지하였던 것이다. 고승전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에도 인도의 승려인 구나발마(求那跋摩·377-431)가 시흥에 머물렀을 때 호시산이 기사굴산과 비슷하여 영취산이라고 이름하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 보현사 석물
중국의 오대산은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에서 동북쪽으로 230㎞에 위치해 있고 둘레가 250㎞, 5개 산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동대 망해봉, 남대 면수봉, 서대 계월봉, 북대 엽두봉, 중대 취암봉이라 한다. 중국에서 오대산은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로 손꼽히며, 나머지 세 곳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절강성의 보타산,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지장보살을 모신 안휘성의 구화산이 있다.

한국의 오대산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듯이,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의 태화지라는 못가에서 7일 동안 기도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는데, 그 때 문수보살이 하는 말이 “너희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는 오대산이 있는데 만 명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 곳에 있으니 참배하라”고 하여 귀국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이후로 오대산은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동대산(1,434m), 두로봉(1, 422m), 상왕봉(1, 491m), 호령봉(1, 561m) 등 다섯 봉우리가 지정되었다. 오대의 옛 이름에 대해서 권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원도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함께 우뚝하다. 크고 작기가 비슷하면서 고리처럼 벌렸는데, 세상에서는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의 가운데 것은 지로(地爐), 동쪽은 만월(滿月), 남쪽은 기린(麒麟), 서쪽은 장령(長嶺)이라 하며, 북쪽은 상왕(象王)이라 한다.’(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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