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풍수
봉정암은 노승예불의 대명당
간(艮)방의 한반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지리산 천왕봉에서 한반도의 등뼈인 백두대간 등산의 종착점은 백두산이다. 우리나라 헌법 제3조를 보면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명시되어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북한을 마음대로 갈 수 없기 때문에 통일 이전까지는 보통 설악산이나 진부령에서 백두대간을 일단락 짓는다.

설악산에 이어 백두대간 상의 금강산 비로봉을 지나고, 익숙하지 않는 숱한 산과 고개도 넘고, 험하다고 잘 알려진 삼수갑산(三水甲山)도 지나고, 백두산 정상에 이르는 북쪽의 백두대간을 갈 수 있는, 즉 통일은 언제쯤이나 될까?


콩 심은 데 콩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풍수지리는 공간성과 관계가 깊은 학문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공간에 시간을 배합하여야 비로소 진정한 풍수지리학이 된다. 우리나라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다. 모든 일은 원인에 따라 결과가 나타난다는 뜻이다.

공간개념인 토양에 따라 농산품의 수확량이나 품질에 차이가 난다. 여기에 또 시간개념을 추가하여 다시 생각해보면 콩을 심는다고 해서 항상 콩이 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는, 난다면 콩이 난다는 말이지 반드시 난다는 것은 아니다. 만약 부적절한 시기에 파종하였다면 제대로 성장발육을 하지 못하게 되어 수확할 수 없게 된다.

중국에서 천 년이 넘도록 비전된 현공지리풍수법이 최근에 국내에도 전파되어 각광을 받고 있는데, 현공풍수법은 기존의 풍수지리의 공간성에 시간성을 배합한 소위 ‘타이밍’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풍수법이다. 이 현공풍수지리를 적용하면 통일이 되는 시기도 알 수 있다.

우리나라는 공간적인 위치상 간(艮·동북방)에 속하고, 시간적으로는 1∼9운에서도 8운(2003∼2024년)에 속한다. 이 이론의 근거는 주역의 팔괘 중에서 간(艮· )괘의 낙서수는 8이 되기 때문이다. 즉 우리나라의 공간적인 위치는 간괘(艮卦)가 되는데, 마침 시간적으로도 간괘의 시점에 있게 되므로 간(艮)의 기운이 특별히 강하게 작용되는 시기에 있다.

간방에 속하는 곳에서도 유독 우리나라에게 영향력이 큰 이유는 간의 의미는 산인데, 우리나라의 지형은 산이 많기 때문에 더욱 큰 영향을 받게 된다. 또한 간은 오행 상으로는 토(土)에 해당되며, 변혁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면 국토에 대한 각종 변화가 아주 심하게 일어날 것이라는 예측되는데, 그중에서도 남북한의 국토통일이 8운 기간 중에 된다고 예측할 수 있다.


주역의 간(艮)괘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주역에서는 간(艮)에 대해 ‘艮, 其限’이라 하여, 사람이 걸어가다가 멈추므로 기본적인 의미는 정지, 제한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우주는 쉬지 않고 항상 운행하므로 영원한 멈춤이란 본래부터 있을 수가 없는 것이므로, 여기에서 멈춤이란 일시적인 멈춤을 의미한다. 움직임이 절정에 이르면 잠시 멈추게 된다는 의미에서의 지(止·멈춤)가 되며, 또한 멈춤의 의미에는 출발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휴전이라는 멈춤에서 다시 통일이라는 출발의 의미가 있다.

낙서의 8간(艮)의 대표적인 형상으로 산이 되는 이유는 산은 정지하는 시간이 비교적 오래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남(少男)이 되어 몽매하고 유치하여 경험이나 지식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있다.

불가에 ‘종과득과 종두득두(種瓜得瓜 種豆得豆·오이를 심으면 오이가 나고 콩을 심으면 콩이 난다)’라고 하였는데,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기 마련인데, 간은 인과응보의 시대가 되어 자신이 지은 선악에 따라 그 갚음을 바로 받게 된다.

또한 간은 산이나 토석이 되므로 광의적으로 해석하면 고궁, 여관, 종묘(宗廟) 등의 건축이 활성화 되고, 또한 개나 쥐가 되므로 명견이나 애완동물을 취미로 기르는 사람도 많게 된다.

그리고 방위로는 동북방이므로 요동(遼東), 한국, 몽고, 시베리아 동부, 일본의 북해도, 알래스카 등지가 이에 속한다. 이 지역은 자원이 풍부하지만 아직도 미개발지역이어서 장차 아시아의 주춧돌이 될 지역이다.

한편 하도(河圖)에 근거하면 3과 8은 오행으로 목(木)이 되므로 길상으로는 문재(文才)나 우수한 인물이 나오지만, 흉상으로는 젊은 사람이 상하게 되고 자살자가 많아지고 심지어는 절손이 되는 집안이 발생한다. 또한 낙서(洛書) 이론으로의 8간은 백토(白土)가 되고, 소남(少男)이 된다. 따라서 길하면 효의충량(孝義忠良)하고 부귀가 따르는데, 특히 젊은 세대나 삼남(三男)에게 유리하다. 흉하면 젊은 세대나 삼남이 피해를 보고 전병염이 발생하고 비만증환자가 발생한다.

일상생활에서도 곧잘 사용하는 ‘성인도 여세추이(與世推移·세상이 변하는 대로 따라서 변함)’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본래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데, 어부가 답답한 굴원(屈原)에게 한 마디 하기를 “聖人不凝滯於物 而能與世推移(성인불응체어물 이능여세추이·성인은 사물에 얽매이지 않아, 세상과 더불어 변하여야 한다)”라고 하였다. 우리도 어부 말처럼 시대 변화에 따라 융통성 있게 사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표〉의 간(艮)의 상의를 잘 살펴보면 미래에 대한 상황을 예측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중국 폄석정도 봉정암 사리탑에 족탈불급

▲ 중국의 절강성 소흥에 치수의 신으로 잘 알려진 우왕(禹王)의 묘인 폄석정( 石亭). 중국 최고의 대명당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설악산 봉정암의 사리탑에 비하면 역부족이다.

남쪽 백두대간의 마지막 구간에는 등산객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아름다운 설악산이 있다. 설악산을 찾는 등산객은 최고봉인 대청봉을 목표로 등산하지만, 불자들은 어김없이 백담사에서 출발하여 영시암, 오세암에 이어 봉정암으로 직행한다.

해발 1,244m에 위치한 봉정암(鳳頂庵)은 5대 적멸보궁에서도 최고 성지로 유명하다. 이곳은 지금부터 1360여 년 전인 신라 선덕여왕 13년(644년), 자장율사가 당나라 청량산에서 21일 동안의 기도를 마치고 문수보살에게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금란가사를 받고 귀국하여 불사리를 봉안할 곳을 찾고 있었는데 어디에서인가 날아온 봉황새가 스님을 인도한 곳이 바로 지금의 봉정암이라는 신비한 창건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자장율사는 봉정암 뒤편에 있는 부처님처럼 생긴 바위를 보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실 명당임을 알고 탑을 세워 사리를 봉안하고 조그마한 암자를 건립하였다고 전한다. 암자 뒤에는 불두암(佛頭岩)을 중심으로 좌우에 일곱 개의 바위인 가섭, 아난, 기린, 할미, 독성, 나한, 산신봉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 해발 1,244m에 위치한 설악산 봉정암(鳳頂庵)은 5대 적멸보궁에서도 최고의 성지로 유명한 곳이다.

봉정암 사리탑을 보고 필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동안 20년이 넘도록 풍수지리를 연구하면서 국내외의 명당 중에 중국의 절강성 소흥에 치수의 신으로 잘 알려진 우왕(禹王)의 묘인 폄석정( 石亭)이 천하의 대명당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설악산 봉정암의 사리탑에 비하면 족탈불급이었다.

봉정암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즉 비봉포란(飛鳳抱卵)의 명당이라고 하는데, 봉정암의 명칭은 봉황새가 인도하였다는 의미에서의 봉정암이고, 풍수지리 형국론으로는 봉정암의 불사리탑은 노승이 목탁을 치며 예불을 드리는 소위 노승예불(老僧禮佛)의 대명당이다. 이런 연유에서 불자들은 봉정암에 이르는 험한 산길을 마다하지 않고 사리탑에는 불자들이 늦은 밤에도 불공을 드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로 역시 명불허전의 장소이다.

풍수지리 형국론에서 명당의 이름이 지을 때 산의 형상을 보고 적당히 짓는 것이 아니고, 특별한 방식으로 산의 구성(九星)으로 구분하고, 다시 세분하여 명명하는 방법이 요금정(廖金精) 선생의 저서인 穴格(혈격)이라는 책에 나온다.

노승예불은 모양은 혈격이라는 책에 의하면 ‘이 성(星)의 뇌(腦)는 둥글거나 네모지며 신(身)은 곧고 면(面)은 평평하다. 모량은 다리를 벌려 유(乳)가 되므로 일명 현유고요(懸乳孤曜)이다’라고 하였다.


호남 최고의 명당은 무안의 노승예불

호남의 팔대명당에서도 최고 명당으로 손꼽는 명당이 전남 무안의 노승예불의 명당이 있는데, 발복이 무려 98대에 이른다고 하는 대명당이다. 그러나 무안의 노승예불도 봉정암의 노승예불에는 역부족이지만, 두 곳이 서로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도선국사가 지었다고 전해지는 옥룡자유산록이라는 명당결에 있는 무안의 노승예불 대목을 보자.

‘그 날로 길을 떠나 무안으로 작로(作路)하니 / 산진수회(山盡水回)하는 곳에 대소명당 없을소냐(중략) / 사십사절(四十四節) 건해맥(乾亥脈)에 승달산(僧達山) 특립(特立)하니 / 금수병장(錦繡屛帳) 두른 곳에 우리 스승 계시도다 / 당국(當局)이 평순(平順)하여 규모가 광대하고 / 제좌기상(帝坐氣象)은 높았고 산수(山水)가 회동(會同)하였구나 / 천장지비(天藏地秘)한 혈(穴)을 저마다 구경하리 / 백천(百川)이 회조(回朝)하고 만산(萬山)이 폭주(輻輳)하니 / 갑산정기(甲山精氣) 모은 곳에 설법가사(說法袈娑) 벌였으니 / 아름다운 저 형상(形象)이 십이상좌(十二上佐) 분명하다 / 발우(鉢盂)는 동쪽에 있고 운암(雲岩)은 남쪽에 있도다 / 저 노승의 거동 보소 백팔염주 손에 쥐고 / 팔폭장삼 떨쳐입고 모든 제자 강(講)받을 제 / 그 중의 늙은 중이 스승께 문안할 제 / 염주 하나 떨어져서 수구원봉(水口圓峰) 되었고 / 간태금성(艮兌金星)이 충천하니 혈재방원개정처(穴在方圓蓋粘處)라 / 사륜석(四輪石)은 뒤에 있고 금어옥대(金魚玉帶)는 아래에 있고 / 팔백연화(八百煙花) 놓여있고 삼천분대(三千粉袋) 모였도다 / 건곤간손(乾坤艮巽)이 특립(特立)하니 왕자사부(王子師傅) 흔히 나고 / 병정손신(丙丁巽辛) 높았으니 장원급제 대대로다 / 호로산(葫蘆山) 나타나니 여작왕비(女作王妃) 할 것이요 / 운증국내(雲蒸局內)하였으니 응천상지삼광(應天上之三光)이라 / 토불토이작금(土不土而作金)하니 현목혹심(眩目惑心) 되리라 / 북신천주(北辰天柱) 높았으니 각우주지무궁(覺宇宙之無窮)이라 / 태극한문(太極햵旱門) 놓았으니 명진타방(名振他邦)하리로다 / 교쇄직결(交鎖織結)하는 모양은 사자(四字)가 분명하다 / 회천명개조화(回天命改造化)는 귀신이 조응(助應)하리라 / 금강(錦江)이 백리(百里)를 둘렀으니 어관대진(漁貫大陳) 되었구나 / 성현은 여덟이요 장상은 대대로다 / 이후 자손은 천억(千億)되어 만세만세 장구(長久)하리 / 이 산 운수(運數) 추술(推術)하니 구십팔대(九十八代代) 향화(香火)하리 / 주인 나서 찾으면 일야간(一夜間)에 영장(永葬)하리 / 칠척하(七尺下) 금반석(金盤石)은 귀신이 도우리라 / 걸음을 바삐 하여 죽전(竹田)으로 내려오니’
명당결에 의하면 노승예불의 명당은 현재 목포대학교 뒷산인 승달산(僧達山·318m)에 있는데, 도선국사는 이 명당을 찾아보고 죽전이라는 마을로 내려온다는 기록에 의거하면 대강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죽전은 무안군 몽탄면 감돈저수지 근처의 마을이다. 지금도 많은 풍수지리가들이 노승예불 명당을 찾기 위하여 승달산에 올라 찾아보지만, 아직도 천장비지(天藏秘地)하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문헌고찰
금강의 미모를 능가하는 山中美人
설악산 봉우리·능선·계곡·폭포·암자의 옛 기록들

백두대간 상의 한계령(寒溪嶺<五色嶺·920m)에서 진부령(陳府嶺<珍富嶺·520m)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 설악산은 산수미에 있어서는 천하절승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일찍이 백화산인(白華山人) 설월(雪月·1885-1980)은 설화산백담사신종서(雪華山百潭寺新鐘序)에서 ‘우리나라 산수 중에 아름답고 수려함이 천하에 으뜸인 것은 설화산(雪華山·설악산)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설악산은 비록 예로부터 천하명산으로 소문난 삼신산(三神山·금강산·지리산·한라산)에 끼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를 지내온 전국 명산대천 중의 하나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명승으로서의 금강산과 설악산의 우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탄탄이 짜인 상은 금강산이 승하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이 도리어 승하다고 하겠지요. 금강산은 너무나 현로(顯露)하여서 마치 노방(路傍)에서 술파는 색시 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이 있음에 비하여,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운 양자(樣姿)는 물 속의 고기를 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미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다도 설악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입니다…수렴동이란 것이 금강산·설악산에 다 있지마는, 금강의 수렴은 오막살이집 쪽들창에 친 발쯤 된다 하면 설악의 수렴은 경회루 넓은 일면을 뒤덮어 가린 큰 발이라고 할 것입니다…이밖에 옥련을 늘어 세운 듯한 봉정과 석순을 둘러친 듯한 오세와 같이, 봉만과 동학의 유달리 기이한 것도 이루 손을 꼽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설악의 경치를 낱낱이 세어보면 그 기장함이 결코 금강의 아래 둘 것이 아니언마는, 워낙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리기는 금강산의 몇 백천 분의 1도 되지 못함은 아는 이로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조선의 산수> 참조)

육당 최남선은 금강예찬(金剛禮讚)·풍악기유(楓嶽記遊) 등과 같은 금강산기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등을 지은 이이기도 하므로, 그의 설악관은 매우 주목되는 관점이다.

필자 생각에도 희운각대피소 인근의 무너미고개에 올라 바라본 신선대쪽 암봉군과 천불동계곡 방면의 암봉군, 또는 양폭 인근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바라본 공룡릉·용아릉·천화대 등의 암봉군은 금강산 천선대에 올라 바라본 만물상이나 중향성 못지않은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또한 마치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듯한 토왕성폭포, 소승폭포, 대승폭포는 모두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능가하는 경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십이선녀탕의 8폭 8탕의 모습 또한 금강산의 상팔담(上八潭) 못지않은 기이하고 수려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설악산의 산 이름 유래

설악(雪岳)이란 산 이름은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내던 전국 명산대천의 하나다. 상악(霜岳·금강산) 등과 함께 신라시대 사전(祀典)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일찍이 고대시절부터 불리어온 산 이름임을 살필 수 있다.

노산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이 설악의 雪 자를 산다의 명사형 살음·삶의 어근이 되는 신성을 의미하는 ?의 음역자로 보고, 곧 신산(神山) 성역을 의미하는 살뫼에서 온 산이름이라 풀이했다(<노산문선>의 설악행각 참조).

조선시대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설악산은 산이 매우 높아 음력 8월(중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음력 5월(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른다. 또 그 바위 봉우리의 돌 빛이 희고 깨끗하기 때문에도 또한 설악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와 여지고의 양양 산천조에도 보이는데, 특히 ‘온갖 산봉우리들이 우뚝 우뚝 솟아 늘어서 있는데, 그 돌의 빛깔이 모두 눈과 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하여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필자도 3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설악산을 등정한 바 있지만, 암봉군의 돌빛이 마치 눈을 뿌려 놓은 듯한 흰 빛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근년에 이르러서다. 이름과 관련한 그 진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염두에 두고 주마간산의 간산(看山)이 아닌 관산(觀山)의 심안(心眼)으로 관하자 비로소 설악의 진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 설악산 침봉군. 아침 햇살이나 노을이 비낄 때에는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빛난다. 해서 설산, 설화산이란 이름을 얻음직하다.

특히 청명한 10월 단풍철에 한계령을 넘어갈 때, 또는 오색의 만경대나 흘림골의 등선대에 올랐을 때, 또는 희운각 인근의 무너미고개에서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할 때 마침 석양의 가을 햇살이, 또는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그 암봉군을 비쳐줄 때 조망되는 설악 암봉들의 돌빛은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하얀 눈빛 그대로가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일찍이 설월(雪月)의 설화산백담사신종서에서도 설악산을 설화산(雪華山)으로도 일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은 또 신라시대의 성주사 낭혜화상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塔碑文)과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史蹟)의 설산영혈사시주기(雪山靈穴寺施主記), 설산원명암창건기(雪山園明庵創建記) 등에 의하면, 설산(雪山)으로도 일컬어졌다. 이는 설악산의 약칭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아마도 불승들이 부처의 설산구법(雪山求法)을 사모하여 일컬은 또 다른 설악산의 일명이 아닐까 한다.

설악산은 또 동국여지승람 양양조에는 설악(雪岳), 인제조에 한계산(寒溪山)으로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양양·인제조에도 같은 산 이름의 기록이 보이고,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 등에도 설악산과 한계산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따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양양군과 속초시 일대에 속하는 설악권 지역의 산을 설악산, 인제군 일대에 속하는 설악권 지역의 산을 한계산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은 현재 백두대간 상의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그 동쪽 지역을 외설악, 그 서쪽 지역을 내설악이라 하고, 서북능선을 경계로 한 그 남쪽 지역의 장수대지구·한계령지구·오색지구 일원과 44번 국도 남쪽의 가리봉?·등선대·점봉산 일대를 남설악이라 일컫고 있다. 이 중 남설악은 손경석 선생이 1970년에 雪嶽山이란 성문각 판 등산 소책자를 편찬하기 위해 실지조사를 하면서 44번 국도 남쪽의 설악권 지역을 편의상 구분하여 명명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범위가 조금 확대되어 그대로 정착되어 쓰이고 있다.

또 최근에 이르러서는 등산 애호가들이 설악산 국립공원 권역의 경계 북쪽 매봉산(1,271m) 일대, 신선봉(1,204m)·마산(1,052m) 일대를 더러 북설악이라 일컫기도 한다.

청봉이 곧 설악의 최고처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은 조선시대에는 본래 청봉(靑峯)이라 일컫던 봉우리다.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그 봉우리가 높아서 높고 푸른 하늘을 만질 듯하고, 멀리서 보면 단지 아득하고 푸르기만 하므로 그 최고 정상을 가리켜 靑峯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또 이 봉우리의 모습을 ’둥글둥글하면서 가파르지 않고, 높으면서도 깎아지른 듯 험준하지 않고, 우뚝 솟아 서 있는 것이 마치 큰 거인 같다‘고 하였다. 여름에 중청봉쪽에서 대청봉을 바라보면 그러한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현대로 오면서 중청봉·소청봉·끝청봉과 그 귀때기 부위에 해당되는 귀때기청봉도 모두 대청봉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여 함께 청봉이란 이름을 붙여 그 이름을 세분화하여 부르고 있다.

▲ 대청봉. 중청·소청·끝청·귀청 등 정상부의 봉우리들은 모두 근래에 청봉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용아장성릉이 시작되는 봉정암 사리탑 뒤 큰 봉우리를 이룬 석가봉(釋迦峯), 암자를 중심으로 오른편 동쪽에 기린봉(麒麟峯)·할미봉, 북쪽에 독성나한봉(獨聖羅漢峯)·지장봉(地藏峯)·가섭봉(迦葉峯)·아난봉(阿難峯)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성지답게 불교적 이름을 지닌 봉우리들이 마치 신장(神將)이 암자를 호위하듯이 두르고 서 있다.

노산은 설악행각에서 대청봉의 모습이 ‘푸른 모전[靑氈]으로 빈틈없이 투갑(두겁)을 입힌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혹독한 바람에 시달려 키가 크지 못한 2~3척(尺) 짜리 전나무들이 정상부위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노산은 또 ‘묘고봉두(妙高峯頭)에 서서’란 대목에서 청봉과 봉정을 설악의 가장 높은 산봉, 곧 상봉을 일컬은 같은 산 이름으로 보고, 이를 광명을 일컫는 ‘불’에서 온 우리말 산 이름 ‘불매’를 한역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노산이 설화산인의 오세암사적기에 보이는 ‘묘고봉 이름을 봉황대라 한다’고 한 대목과, 동국명산기 설악조에 ‘봉정은 곧 뫼[嶽]의 극처(極處·궁극에 다다른 곳)’라 한 대목을 오해한 데에서 비롯된 견해일 뿐이다.

위에서의 묘고봉은 불가에서 제석천의 주처로 언급한 수미산과 같은 의미의 말로서, 봉황대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리탑이 서 있는 대의 이름을 언급한 것일 뿐이고, 또 봉정이 뫼의 궁극에 다다른 곳이란 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용아능선의 정상부를 일컬은 말일 뿐이다. 동국명산기 설악조에서는 분명하게 ‘청봉이 곧 설악의 최고처이고, 봉정은 그보다 못하다(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북릉의 서쪽 끝자락 대승령과 안산 사이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십이선녀탕계곡은 일명 탕수동계곡(?水洞溪谷)이라고도 한다. 여지도서 인제조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김유동의 팔도명승고적(1929년간) 등에 의하면, 조선시대·일제시대에는 본래 지리실(地理室)이라 불리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리한 골짜기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옛부터 12탕 12폭이 있었다고 하여 12선녀탕계곡이라 불렀다고 할 만큼 약 8km에 이르는 협곡에 구슬 같은 푸른 물이 온갖 기교를 부리며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다만 근래 몇 년 사이에 큰 태풍과 폭우가 많이 지나가면서 설악산의 이름난 계곡 여러 곳의 수려한 경관이 많이 훼손된 점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설악산에는 대청봉 동쪽 골짜기의 둔전골, 수렴동계곡 하류쪽에서 마등령으로 오르는 곰골, 저항령으로 오르는 길골 등 아직 사람의 발길이 뜸하여 천연의 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계곡들이 많다. 이 중에서도 곰골·길골은 동국명산기에도 웅정동(熊井洞)·길동(吉洞)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등산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적어도 수백 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승폭·독주폭·토왕폭이 설악의 3대 폭포

▲ 토왕성폭포. 신광폭포로 불린 한반도 최대의 폭포다.
설악산은 장대한 산줄기 사이 곳곳에 골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폭포가 비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대승령 중복의 대승폭포(大勝瀑布·88m)와 서북릉 남쪽 독주골의 독주폭포(獨走瀑布)와 권금성 동쪽 토왕골의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를 설악산의 3대 폭포라 이른다.

필자는 위의 세 폭포에 토왕성폭포 아래쪽 토왕골에 자리한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의 비룡폭포(飛龍瀑布·40m)와 귀때기청봉 정남쪽 기슭에 병풍처럼 두른 양쪽 절벽 사이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소승폭포(小勝瀑布)를 추가하여 설악산의 5대 폭포라 일컫고 싶다. 이 중에서도 소승폭포는 일부 강원도 토박이 주민들이 대승폭포보다도 더 경관이 좋다고 할 만큼 명승을 이루고 있어, 필자 생각에는 독주폭포가 설악산 3대 폭포의 명성을 양보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승폭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한계산에는 만 길 되는 큰 폭포가 있다. 옛날 임진년에 중국의 장수가 보고서 여산폭포(廬山瀑布·중국 강서성 여산에 있는 폭포)보다 났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을 만큼 예로부터의 천하 명폭으로,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폭포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폭포 맞은편 망폭대(望瀑臺) 반석에는 ‘九天銀河(구천은하)’라 쓴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이 쓴 것이라 전한다. ‘구천은하’라는 말은 이태백의 망여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에 ‘날리어 흐르며 삼천길을 떨어지니, 아마도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고 한 시구에서 따온 말로 보인다.

필자의 관견으로는 두타산 무릉계곡의 무릉반석에 양봉래가 썼다는 ‘武陵仙源(무릉선원)’ 등의 글씨보다는 호쾌하고 유려한 맛이 없다고 여겼으나, 시간적인 차이인지 안목의 차이인지 노산 같은 이는 용이 날아오르는 듯 웅려한 필세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설악행각 참조).

대승폭포라는 폭포 이름은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대승폭포 위쪽에 대승암(大乘庵)이 있고, 또 그 위쪽에 상승암(上乘庵)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승암이란 암자 이름에서 유래된 폭포 이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처음에는 ‘大乘瀑布’라 쓰던 것이 후대에 동음이표기인 ‘大勝瀑布’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大勝瀑’의 표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보인다. 또 속전에 의하면, 대승폭포는 처음에는 한계폭포로 불리었다고 하며, 신라 경순왕의 피서지였다고도 한다.

토왕성폭포는 일명 신광폭포(神光瀑布)라고도 하며, 석가봉(釋迦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노적봉(露積峯) 등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가운데 암벽을 3단을 이루며 낙하하는 연폭이다. 여름철 수량이 풍부해졌을 때 권금성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하늘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폭포 상단부가 조망되고, 토왕골 비룡폭포 위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선녀가 흰 비단을 바위 위에 펼쳐 늘어뜨려 놓은 듯이 보인다.
토왕성폭포의 이름은 권금성의 일명 토왕성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토왕성의 王 자를 旺 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동국명산기와 대동지지 양양조에 의하면, 王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울산암의 원이름은 울타리의 뜻인 이산

설악동 신흥사 북쪽으로는 북주릉에서 동쪽으로 한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형성된, 단일 암봉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또는 동양 최대의 암봉으로 일컬어지는 울산바위(蔚山巖·950m)가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물주(일설에는 산신 또는 신선)가 강원도 땅 지금의 금강산 자리에 봉우리수가 1만2천이 되는 천하의 명산을 만들려고 전국에 있는 빼어난 산들은 다 그곳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이 때 경상도 울산(蔚山) 지역에 있던 한 암산도 그 소식을 듣고 금강산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워낙 육중한 몸집이라 빨리 걸을 수 없어 지금의 설악산 지역에서 하루 쉬어 가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금강산 지역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금강산에 이미 1만2천 봉우리가 다 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금강산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산수가 수려한 이곳 설악산 지역에 눌러앉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암산이 바로 지금의 울산바위라 한다(일설에는 금강산에 가서 1만2천 봉이 다 찬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다가 이곳에 눌러앉은 것이라고도 함).

▲ 울산암. 울타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어 이산이 원래 이름이었다.

이는 호사가들이 부회하여 지어낸 전설일 뿐, 울산의 본명은 울처럼 둘리어 있는 산이란 뜻의 이산(籬山)이었다. 동국여지승람 양양조에 의하면, ‘이산 양양부 북쪽 63리, 쌍성호(雙成湖·현 청초호) 서쪽에 있다. 백두대간의 동쪽 가닥이다.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울타리(울)를 친 것과 같으므로 이름하였다. 세속에서는 울산(蔚山)이라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이산은 울산의 뜻옮김 표기이고, 울산은 울산의 소리옮김 표기일 뿐이다. 특히 노산의 설악행각에 ‘이 암자(내원암)를 지나, 다시 반 시간을 비(費)하면, 돌아보아 멀리 토왕성폭포가 떨어지고 바라보아 병풍 같은 리산바위가 둘렀음을 봅니다. 리산바위 밑 계조굴에 이르니, 어느덧 석양이 빗겼습니다’라 쓴 글을 보면 1940년대 후반까지도 오히려 토박이 산 이름 울산 보다는 이를 뜻옮김(의역)하여 불러온 전통적 산이름 이산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또 다른 속설로는 설악산에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바위산에 부딪혀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리를 내므로 ‘울산’ 또는 ‘천후산(天吼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천후산에 대하여 양양조의 이산과 따로 간성조에 별개의 산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 양양조 및 조선 후기의 승려 용암(龍巖) 체조(體照·1714-1779)가 영조 때 쓴 설악산신흥사대법당중창기·설악산신흥사대법당석체기에 의하면, 울산바위는 적어도 조선 후기부터는 일명 천후산 또는 천후봉으로도 불리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중 신흥사대법당중창기에 보면, ‘(신흥사) 남쪽에는 하늘을 버티고(괴고) 있는 높은 산봉이 있으니, 권씨와 김씨가 피난하였던 성이요, 북쪽에는 대지에 치솟은 웅악이 있으니, 옛날에 천후산이라 일컫던 산이다’라고 하여, 울산을 옛부터 천후산으로도 일컬어왔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비선대 근처 미륵봉의 금강굴은 신라 때 원효가 수도하였던 곳으로, 일명 비발라굴(毘鉢羅窟)이라고도 한다. 이는 가섭존자가 금란가사와 푸른 옥으로 된 기이한 발우를 지니고 비발라굴에서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린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신흥사대법당석체기 참조). 금강굴이란 이름은 원효의 대표적 저서인 금강삼매경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고려 때 야별초가 몽고군 격퇴한 한계산성

설악산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역사상의 문화유적은 별로 없으나, 고성 유적으로서 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한계산성과 권금성이 있다. 한계산성은 내설악의 안산 남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옥녀탕을 지나 계곡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다가 계곡 왼쪽 안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가에 성이 보인다. 전설에는 신라 경순왕 때 쌓았다고 하며,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운동을 할 때 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고려사 조휘전(趙暉傳)에는 고종 46년(1259)에 조휘 일당이 자칭 관인(官人)이라 하면서 몽고군을 이끌고 와서 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방호별감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를 인솔하고 나가서 몽고군을 모조리 섬멸한 전적지로 언급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인제조에 의하면,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279척, 높이가 4척이고, 안에 우물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성곽의 용도(甬道)에 올라서면 골짜기 건너편으로 안산의 수려한 모습이 조망된다. 용도와 여장에 이용된 성돌들은 벽돌만한 크기로 축조되어 마치 중국 만리장성의 성도(城道)를 보는 듯하다.

▲ 용아장성릉.

한계산성과 대승폭포가 있는 설악산 일대와 주변 지역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의 전설이 많이 전한다. 한계산성 위 언덕으로 된 터를 대궐터라 일컫는데, 경순왕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金富里←金傅里)에도 경순왕이 와 있었다는 김부왕촌(金傅王村←金傅洞)’과 경순왕의 옥새를 감추어 두었던 옥새바우란 땅이름이 보이고, 경순왕을 위하여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는 대왕당(大王堂)이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바로 그 사실이 실증되지 않는 속전이기는 하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권금성은 외설악에 있는 석축산성이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일명 설악산성이라고도 하였으며, 대동지지에 의하면, 토왕성도 동일산성의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때문에 대동지지에 보이는 권금성과 여지승람에 보이는 권금성 둘레 길이가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여지승람에는 둘레 1,112척, 높이 4척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대동지지에서는 그 둘레를 2,112척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 권씨·김씨 두 집안이 여기에 피난한 까닭에 권금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수어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곧 이 성일 것이라고 하였다.

설악산은 고대부터 명산대천의 하나로 중시되어 왔으므로 이 산에도 많은 불교유적이 남아 있다. 내설악에는 백담동계곡에 백담사, 수렴동계곡에 영시암(永矢庵), 수렴동계곡과 마등령 중간지점 만경대 근처에 오세암, 구곡담 계곡 상단에서 소청봉 오르는 길에 봉정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담사는 무진(無盡)의 백담사중건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 이 자리는 장수대 건너편 대승령 오르는 등산로 입구 왼쪽에 한계사란 이름으로 개산되었다. 창건 이후 일곱 차례나 되는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이건하면서 절 이름도 운흥(雲興)·심원(深源)·영취(靈鷲) 등으로 계속 바뀐 끝에 지금의 위치와 절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또 백담사중건기에 의하면, 이 산중 폭포의 물이 수없이 꺾이며 얽히고 돌면서 담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총수를 들어서 이름붙인 것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물이 많으면 불을 이기므로, 곧 수극화(水克火)의 의미를 담아 화재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백담사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유신론·님의 침묵을 집필한 바 있다.

봉정암과 오세암은 한계사 창건보다 앞선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되었다. 봉정암은 자장법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다.

오세암은 본래 관음암(觀音庵)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고려조 때 설정조사(雪頂祖師)가 중수하였다. 설정조사의 조카인 5세 동자가 견성득도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며, 그로 인해 오세암이란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설화산인 무진자 無盡子의 오세암사적기 참조). 그러나 노산은 이 전설(설정이 영동에 일을 보러 갔다가 눈 때문에 암자에 돌아오지 못했을 때 5세 조카아이가 관세음보살의 보살핌으로 한해 겨울을 혼자 보내며 해동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 불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전설로 믿을 것이 못되는 것으로 보고, 어려서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일컬어졌던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머물렀던 인연에서 유래된 암자 이름으로 보고 있다. (설악행각 참조).

곧 오세암은 매월당의 승적 입문지로서, 그는 여기서 삭발한 후 ‘머리를 깎는 것은 속세를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은 장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削髮逃塵世, 存髥表丈夫)’라는 시를 남긴 바 있다(매월당집 부록1 참조). 일설에는 오세암의 오세동자 전설을 조선 인조 때의 설정선사(雪淨禪師)의 일로 보기도 하고, 중건 연혁도 인조 21년(1643)에 설정이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개명한 것이라 한다(백담사 속암 기록 등 참조). 만해도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고 사색한 일이 있다.

영시암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영원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이곳에 살기로 맹세하고 창건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일명 삼연정사(三淵精舍)라고도 하였다.

외설악에는 울산바위 등산로 초입에 신흥사, 그 위쪽에 내원암(內院庵), 또 그 위쪽에 계조암(繼祖庵)이 있다. 모두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자장법사가 초창한 것으로 전한다. 계조암은 원효·의상 두 대사가 수도를 계승했던 곳이라 하여 일컫는 암자 이름이며, 그 앞쪽에는 한 사람의 힘으로도 흔들리는 명물 흔들바위(動石)가 있다. 또 대청봉 동쪽 관모봉 기슭에 영혈사(靈穴寺)가 있는데, 신라 신문왕 9년(68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이라 전한다.

남설악에는 오색약수에서 큰고래골 상류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오색석사(五色石寺), 일명 성국사(城國寺)가 있다. 또 같은 시기에 창건된 고찰로서 대청봉 동쪽 기슭 둔전골 둔전리에 진전사지(陣田寺址)가 있다. 두 절 모두 통일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당시 사상계의 선구적인 고승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오색석사는 이 절 화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는 오색나무(→오상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설에는 다섯 가지 색의 돌 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돌들이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에 오색석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 의하면, 신라 문성왕 때 고승으로서 성주산파(聖住山派) 선문의 개조가 된 무염선사(無染禪師)도 이 절에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 비문에 이미 오색석사란 절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절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신라고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둔전리 진전사지에는 9세기 통일신라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로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또 둔전골 저수지 제방 밑에서 우측 산등성이길로 한 5분 정도 올라가면 도의선사의 부도탑으로 추정되는 진전사지 부도가 있다.

도의는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다. 당시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최초로 남종선을 전한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귀의 소리’라 하여 기존의 승려들에게 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이에 은거하여 때를 기다리며 40년 동안을 수도하면서 지낸 곳이 바로 설악산 진전사다. 선사는 곧 서당 지장(西堂智藏)과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어 받았는데, 백장선사가 이르기를, ‘강서(江西)의 선맥이 몽땅 동국(한국)으로 돌아가는 구나!’하고 크게 칭송한 바 있다(조당집 참조).

둔전골에 향산폭포(香山瀑布)가 있는데, 강서성 여산의 향로봉폭포(곧 여산폭포)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속전되고 있다. 향로봉폭포는 곧 이태백의 망여산폭포시에 등장하는 여산폭포다. 이에 의하면 도의선사는 그가 수학하던 곳 부근의 천하명산인 여산의 산수를 사모하여 설악산 대청봉 동쪽 기슭의 둔전골 일대를 그곳의 산수와 닮은 곳으로 여기고 평생 동안 수도하며 살 은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 대장정 제23구간 / 점봉산] 르포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망대암산~한계령 구간

숲이 다비식(茶毘式)을 하는 계절이다. 단풍은 지난 몇 달 동안 모아둔 여름 햇볕을 사르고 있다. 단풍의 불길이 지나가는 숲길에 도토리가 뒹군다. 나는 그것을 ‘빛의 사리’라 불러 본다.

숲의 다비식에서 사리 수습 따위의 번다한 절차는 필요치 않다. 더러는 다람쥐의 살이 될 것이고, 나머지 것들은 다시 빛으로 돌아가거나 저마다의 우주를 탄생시킬 것이다.

이번 구간은 조침령에서 한계령까지로 실거리 약 24km. 느긋한 하루 산행 거리로는 부담스럽지만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기 때문에 10시간 정도면 느긋한 산행을 할 수 있다. 특히 이번 산행의 클라이맥스인 점봉산 일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숲 가운데 하나고, 점봉산에서 한계령까지는 골산의 진수를 눈과 몸으로 느낄 수 있다.

▲ 잎 내려놓은 나무, 붉게 물든 단풍. 사철 푸른 나무들이 이루어 내는 상생의 만다라. 점봉산 정상에서 망대암산을 바라본 풍광이다.

이번 산행 전체를 파도에 비유하지면, 큰 파도가 두 번 솟구친다고 보면 된다. 조침령에서부부터 느긋하게 일어서는 파도는 1333m봉에서 정점을 이룬 다음, 북암령(920m)을 지나 단목령(750m)에 이르기까지 허리를 낮춘다. 단목령에서부터 다시 허리를 세워 점봉산(1,424m)을 일으킨 다음, 서서히 키를 낮추었다가 망대암산(1,236m)에서 불끈 힘을 한번 준 다음 암릉지대를 지나 한계령에 이른다. 물론 1333m봉과 점봉산을 오르내리는 과정에서 작은 기복이 있긴 하지만 야박스러운 경사를 이룬 곳은 거의 없다.


긴 가을장마 탓에 계곡물 말라

이내가 흐르는 아침 산색이 푸르다. 안개에 걸러진 햇살은 단풍 색마저 차분히 가라앉히고 있다. 관목 숲을 뚫고 서서히 키를 높여 900.2m봉에서 살짝 키를 낮추며 한숨을 돌린다. 다시 완만한 오름길이 이어진다. 943m봉 일대의 진달래와 철쭉들은 이미 잎을 다 내려놓고 긴 휴식에 든 상태다. 나무들도 사람들처럼 일찍 깨어나면 일찍 잠드는 모양이다. 산허리는 절정의 단풍을 펼쳐 놓고 있지만, 1,000m 가까운 지대의 큰키나무들은 동면에 든 상태다.

▲ 여름 내내 모아두었던 햇빛을 사르고 있는 단풍나무. 버려야 할 때 버릴 줄 아는 자의 아름다운 뒷모습.

943m봉에서 살짝 솟구쳤다 내려서면 962m봉. 이 봉우리 아래로 양양 양수발전소의 터널이 지난다. 이곳 상부댐에서 하부댐까지의 터널 길이는 6km. 상부댐과 하부댐의 낙차는 819m. 동쪽으로 경사가 급한 백두대간의 지세 덕분에 양수발전소로는 국내 최대 규모의 발전소가 들어선 것이다. 발전 용량은 100만kw로 원자력 1기와 맞먹는다고 한다. 96년 9월5일 첫 삽을 뜬 지 10년만인 지난 달 12일에 준공했다.

양수발전소에서 1시간쯤 서서히 오르자 1136m봉이다. 점봉산과 설악산의 위용을 한눈에 넣을 수 있는 곳이지만, 오늘 그것은 구름의 몫이다. 가까이에 있는 점봉산은 옅은 안개를 뚫고 순후한 모습을 보여준다.

북암령 일대에서부터 원시림의 분위기가 짙어진다. 이곳에서부터 점봉산 정상까지의 서쪽 기슭 2,049ha는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된 숲이다.

긴 가을장마 탓에 등성이에 가까운 계곡은 물이 다 말랐지만, 갓 떨어진 낙엽들은 바스러질 정도로 바스락거리지는 않는다. 발바닥과 귀에 닿는 느낌이 폭신하다. 잎사귀들이 말라갈 때 풍기는 감미로는 냄새는 감지되지 않는다.


부부 싸움하고 깎았나?

북암령에서 1시간쯤 지나자 단목령이다. 백두대장군과 백두여장군이라고 쓰인 장성이 서 있다. 장성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유난히 울퉁불퉁한 표정이다. 이정표를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모습도 썩 사이 좋아 보이진 않는다. 웃는 데 인색한 분이 장승을 깎았을까, 아니면 부부 싸움을 한 다음 깎았든지, 하는 웃기는 생각을 해 본다.

단목령에서 점봉산을 향하는 초입은 그림자마저 붉게 보일 정도로 단풍이 곱다. 설악산 조망이 좋지 않은 데 따른 아쉬움도 일거에 날아가 버린다. 왼쪽(남쪽) 기슭은 선홍빛 일색인데 오른쪽은 드문드문 노란 단풍도 섞였다. 일조량 차이인 것 같다.

사실 숲은 사람들의 눈을 즐겁게 해 주려고 단풍을 들이는 것은 아니다. 어떤 생물보다도 빛에 민감한 그들은 태양의 미세한 변화에도 기민하게 반응한다. 겨울이 다가오면서 일조량이 줄고 기온이 낮아지기 시작하면 다이어트에 들어가기 시작한다. 잎자루와 연결된 세포층이 활동을 멈추면서 수분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얼마나 비장하고 놀라운 절제력인가? 한때 푸르렀던 시절에도 그들은 자신이 일한 대가의 40%만을 취한다.

▲ 암릉 위에서 낙조를 감상하고 있는 취재팀.

낮 동안 생산한 산소의 60%는 세상에 내놓고 나머지 40%를 밤에 쓰는 것이다. 얼마나 위엄 넘치는 삶인가? 물론 나무들이 의식적으로 이런 삶을 사는 것을 아닐 것이다.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성은 어떤 것일까? 여기서 성선설 성악설을 따질 생각은 없다. 다만, 인간의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을 비인간화시킬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러면 어떨까. 국세청이나 국회의 작동 원리를 나무가 사는 방식에 맞춘다면? 물론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유능한 식물학자가 역사책에 이름을 올린 인간이나 앞으로 그렇게 될 가능성이 다분한 인간의 자질을 나무에 빗대어 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간디 500살 느티나무, 세종 임금 500년 소나무, 테레사 수녀 500살 은행나무 식으로. 만약 이렇게 된다면 남의 인생에 간섭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인간들이 함부로 하는 일들은 없어지지 않을까.

역사책이야 아무리 두꺼워도 좀이 슬게 마련이고, 때로는 불에 태워버릴 수도 있겠지만, 나무야 지구가 멸망하지 않는 다음에야 영원할 테니 도처에 자신을 비추는 거울 투성인데 어떻게 막된 삶을 살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일도 해서는 안 될 것 같다. 히틀러 같은 인간에 빗될 나무는 지구 어디에도 없을 것이니까. 그것은 나무에 대한 씻을 수 없는 모독이 될 테니까.

(독자 여러분, 엉뚱한 소리가 좀 길어서 죄송합니다. 흔히 나무의 공익적 기능을 돈으로 환산하는 등 그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자기 주머니에 들어오는 돈이 아닌 만큼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상상을 한 번 해 본 겁니다. 어쨌든, 나무가 없는 세상이 인류의 종말이라는 사실만큼은 항상 가슴에 새기고 살면 좋겠습니다.)

▲ 점봉산 정상부. 키 작은 철쭉들이 바람의 몸짓을 화석처럼 새겨 놓고 있다.

단목령에서 점봉산까지는 꾸준한 오름길이지만 가파르지는 않다. 정상 전 1km 정도를 제외하고는 하이킹을 즐긴다고 생각해도 좋다. 드디어 점봉산이다. 단목령에서 출발한 지 3시간 남짓이다.

점봉산(1,424.2m)의 정상은 두루뭉술하다.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21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숲으로 선정된 곳입니다’ 하고 세긴 비석 글이 실감될 만큼 수림이 울창한 것도 아니다. 북서풍을 받는 서쪽 기슭의 철쭉은 바람에 굽은 등을 한 채 땅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다. 그러나 기슭은 울창한 원시림으로 이루어져 있다. 나무는 높이와 온도에도 아주 민감하다.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숲바다

▲ 점봉산 오름길. 원시의 생명력으로 충만한 숲길이다. 캡션
점봉산 정상에서 그 동안 대간 종주를 하면서 늘 소원(?)해 왔던 일 한 가지를 해결한다. 일요일에 유명산을 지날 때마다 하루 산행객들의 푸짐한 도시락이 늘 부러웠었는데, 드디어 그걸 해본 것이다. 사실 중간에 하루 야영 계획을 세웠지만 산행을 시작하기 전날 계획을 바꾸었다. 도시락을 준비하고 짐을 가볍게 하면 어둑해질 무렵에는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춥지도 덮지도 않은 산정에서 풀벌레 울음소리를 들으며 먹는 오찬은 식도락 이상이었다. 원래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은 법. 취재팀 중 몇몇은 따듯한 햇살 아래 잠깐 눈을 붙인다.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느라 자투리 잠의 명수가 된 사진기자는 그 짧은 시간에도 연하게 코를 곤다. 딱 풀벌레 울음소리 정도로. 이 대단한 몰입의 경지에 경의를.

점봉산에서 한계령 쪽을 향한 풍광은 이번 산행 전 구간 중 최고다. 설악산은 구름에 가려 귀떼기청봉만 살짝 보인다. 설사 날씨가 좋아서 설악산이 잔주름까지 다 보여준다 해도 이 모습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정상에서 망대암산까지는 푸른 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숲바다를 어떻게 냉큼 한달음에 지날 것인가. 보고 또 보며 가슴에 새긴다.

정상에서 조금 내려서자 숲 바다의 느낌은 금방 사라진다. 눈에 넣어 아프지 않을 것 같은 대상일수록 가끔씩은 먼눈으로 바라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망대암산으로 내려서는 숲길의 색 스펙트럼도 근사하다. 조릿대와 단풍, 서어나무의 삼색이 이루어내는 조화. 일년 중 이맘때만 볼 수 있는 절경일 것이다. 숲길 걷기는 시간 예술이다.

망대암산을 가볍게 올랐다 내리면 암릉지대가 나타난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곳이다. 위험한 곳에는 줄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운행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일부 줄이 부실한 고사목에 묶여 있는 것이 더 위험해 보였다. 이런 구간에서는 가급적 줄에 의지하지 말거나, 잡더라고 체중을 싣지 않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좀더 사실에 가깝게 상황을 설명하자면, 비가 오는 날이나 밤이 아니라면 리지나 암벽등반 기술을 배우지 않는 사람도 줄에 의지하지 않고 넘을 수 있는 구간이다. 중요한 건 방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이 암릉지대는 수고에 비해 과분한 눈맛을 안겨준다. 암릉이 끝나기 직전 조망처에서 서쪽 기슭으로 열린 풍광도 한참이나 발길을 묶어둔다. 침봉과 소나무, 단풍, 마침 이우는 저녁 햇살이 안개를 뚫고 다가오는 모습은 동양화폭의 선경 그대로다. 그러나 나는 조금 전 점봉산 정상에서 한계령 쪽을 바라본 풍광이 최고라고 느낀 바를 수정할 생각이 없다. 비교의 의미가 없지만, 사실 이런 풍광은 설악산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점봉산 정상에서 얻은 것은 고유성이 짙다. 그곳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구름이 한계령으로 오르는 찻길을 지웠다 살리기를 반복한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자동차 소리가 들릴 즈음, 군사시설이 나타난다. 이곳에서는 오른쪽으로 난 길로 내려서야 한다. 양양에서 한계령(1,003.6m)으로 오르는 찻길을 만나는 길이다. 대간 주능선을 포기하고 찻길로 우회하는 셈인데, 한계령으로 오르는 44번 국도에서 인제군 기린면으로 갈라지는 포장도로가 대간을 관통하면서 생긴 절개지 때문이다.

도로에 내려서자 어둠과 안개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코앞을 분간하기 힘들게 만든다. 이곳에서 한계령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10분 정도. 택리지나 대동여지도에는 오색령이라 한 고개였는데, 지금은 아무 색도 분간할 수 없다. ‘나’라는 색도 그렇게 지워졌으면 좋겠다.

▲ 망대암산을 지나 암릉 지대에서 바라본 남설악의 선경.

# 백두대간 고샅의 명소
주전골

남설악으로도 불리는 점봉산이 북쪽 기슭에 베풀어 놓은 절승지가 바로 주전골이다. 여름 녹음, 가을 단풍, 겨울 설경 등 설악산 산수미의 절정을 사철 맛볼 수 있는 곳이다. 특히 주전골의 단풍은 선홍색과 노란 색의 조화가 일품이어서 설악 단풍 제1경으로 꼽힌다.

주전골은 조선시대에 승려를 가장한 도적떼들이 엽전을 만든 곳이고, 점봉산 아래 망대암산은 도적떼들이 망을 보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전설로만 전하던 주전동굴이 올 태풍 때 앞을 가리고 있던 바위와 나무가 쓸려 내려가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주전골의 또 다른 매력은 접근이 쉽다는 것이다. 오색약수까지 차로 접근하여 성국사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그곳부터 하늘에 닿을 듯한 계곡의 절벽 이쪽저쪽을 오가며 선녀탕, 용소폭포, 십이폭포 같은 절경을 즐길 수 있다. 가족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단풍 여행지로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 것이다.


글 윤제학 현대불교신문 논설위원
사진 허재성 기자 heophoto@chosun.com

Posted by 동봉
,

[백두대간 대장정 제23구간 / 점봉산] 문화
본이름은 심·인삼…지금 인삼은 재배삼 뜻해
초목을 대표하는 상징물 산삼의 문화적 가치

백두대간에는 천연기념물이나 여러 종의 보호 동식물 및 멸종위기의 생물들이 살고 있다. 백두대간은 국토의 등줄기로서 생태축이자 중첩된 산악군으로 인하여 접근도가 낮고 상대적으로 개발이 덜된 지리적 특성 때문에 고유한 동식물종들도 다양하며, 우리는 그들을 토종 동식물, 혹은 자생 동식물종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 중에 산삼은 백두대간 영역에 자생하는 식물을 대표하는 약용 식물이자 세계에 자랑할 만한 토종 식물이라고 할 만하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산삼에 대하여 ‘백두대간의 정기가 응축된 토종 식물’이라고 문화적이고 상징적인 정의를 덧붙여도 과장됨이 없겠다.

▲ 심마니들은 삼을 찾으러 나갈 때 항상 산신령께 절을 한다. 제단은 주변에서 구한 평평한 돌을 사용하고, 제단 뒤에는 흰 색, 노란 색, 파란 색, 빨간 색 무명천을 걸고 그 위에 무명실을 덮었는데, 천은 산신령께 새 옷을 입히는 것이고, 무명실은 삼뿌리가 길게 나와 달라고 비는 것. 왼쪽부터 심마니 심상준, 전양환-명환 형제, 본지 전현석 기자.<2006년 7월 촬영>

풍수에서 땅에는 생명의 기운(生氣)이 있다고 하고, 지리학에서 장소에는 혼(魂·genius loci)이 있다고 하는데, 백두대간이라는 복합적 생태계 속에서 산삼은 산맥의 비장처(秘藏處)에 드러나지 않게 뿌리내려 오랜 기간 동안 백두대간의 기운이 응축된 상징적이고 특징적인 식물이기 때문이다.

대관령 부근서 매년 산삼심기 행사

▲ 110년 된 산삼과 그 이하인 가족삼들.<2005년 11월 촬영>
지리적으로 산삼은 북반구 일대에 분포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나는 산삼의 약효가 단연 뛰어나다고 알려진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우리나라에서 산삼은 제주도를 제외한 전역에서 나는데, 백두대간에 산삼 분포지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특히 조침령에서 한계령에 이르는 구간에서 양양군 서면 오색리 남설악의 설악산 일대는 유명한 산삼 산지로 알려져 있다.

2006년 10월12일 강원도 평창군 도암면 백두대간 주능선인 대관령 일대에서는 ‘백두대간 산삼심기’ 행사가 열렸다. 올해로 6회째를 맞은 이 행사는 백두대간 복원의 상징인 산삼을 심어 백두대간의 생태계 보전과 중요성을 알리기 위해 추진된 것이라 한다.

이 날 행사에는 평창군수를 비롯한 각급 기관의 단체장과 시민들 및 시민단체가 참가했는데, 1천여 명의 참가자들은 3년생 어린 산삼 4천 뿌리와 씨앗 2만5천 개를 배부 받아 활엽수림이 우거진 해발 800~1,200m의 대관령 능경봉 일대에 심었다. 이 행사는 백두대간 권역에 산삼을 심는 것을 통해 국민들이 백두대간의 상징성과 자생식물로서 산삼의 중요성을 체감하고 홍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해석될 수 있다.

이렇듯 산삼은 우리 겨레에 있어 금수강산에서 자생하는 초목을 대표하는 문화상징물이라고 할 만하다. 산삼은 우리의 전통적 인식에 있어 하나의 식물을 넘어서는 상징적이고 문화적이며 역사적인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단순한 약용식물 이상으로 산삼에는 수많은 전설과 교훈과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며, 명칭만 하여도 동자삼, 용삼, 봉황삼 등 의인화되거나 신비로운 대상으로 높여 부르는 다양한 별명이 있다.

산삼에 대한 흥미로운 설화도 전국적으로 많이 전승되고 있는데, 그 중에 동자삼 설화는 산삼에 대해 전통적 효행 윤리와 결부된 신비로운 관념을 잘 표현하고 있다.

어느 아버지가 병이 들었는데 백약이 무효였다. 그런데 자식에게 누가 말하기를 오직 손자를 삶아먹어야 낳을 병이라고 하였다. 아들 부부는 아버지를 위하여 자식을 희생시키려 작정하고 서당에서 돌아오는 아들을 솥에 삶아 그 물을 아버지에게 드리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

그런 후 조금 있으니 아들이 서당에서 집으로 들어오기에 부부는 놀라서 솥을 열고 보니 산삼이 떠 있었다.

영조 때 중국에서 역수입하기도

▲ 채삼인 은어 분포도. <심메마니 은어의 연구 2>(연호탁).
산삼은 불로초(不老草)로서 죽는 사람도 살린다는(起死回生) 약효로 하늘이 만든 것으로까지 높이 존숭되었는데, 최치원 선생도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서 ‘해동국에 사람의 모양을 하고 있는 산삼(海東國人形蔘)은…모양과 품성이 하늘이 만든 것(形稟天成)’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산삼에 대한 신비로운 인식으로 말미암아 심마니들에게 있어서 산삼이 나는 산은 산신숭배의 신앙과 연계되었고, 성스러운 영물로서 산삼에 대한 심마니들의 금기도 생겨났다.

식물학적으로 산삼은 오갈피나무과에 분류된다. 산삼은 추위에 강한 한지(寒地) 식물로서, 생육환경은 온도가 높지 않고 직사광선이 비치지 않는 산간 경사지의 소나무와 활엽수의 혼합림 밑에 발달한 갈색토에서 잘 자란다.

약리학적으로 산삼의 약효는 한반도에서 자란 산삼이 사포닌 등의 종류에서 월등하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기후와 지형적인 이유 등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일부 연구보고서에 의하면 산삼의 효능 차이를 한국의 고려 산삼-고려산 재배산삼-길림 산삼-시베리아 산삼-미국·캐나다 산삼 순으로 발표한 바 있다.

산삼이 문헌에 기록된 것은 약 2천 년 전 전한(前漢) 원제시대(元帝時代)에 사유(史遊)가 쓴 급취장(急就章)에서 볼 수 있다고 한다. 삼이 서양인에게 알려진 것은 1692년 네덜란드인의 저술을 통해서이며, 그 후 프랑스 신부가 중국에 파견되어 산삼에 대한 기록을 유럽으로 보내고, 아울러 캐나다의 원주민도 산삼을 약용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산삼의 채취는 고려 시대까지만 하여도 매우 많았는데,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중국(원)의 요구와 왕실의 수요 증가로 인하여 급격히 부족해지다가 급기야 조선 세종 조에는 희귀한 상태에 이르렀으며, 이후 계속되는 화전(火田)의 확대로 인하여 산삼의 생육과 채취 환경이 더욱 나빠졌으니 영조 대에는 중국에서 역수입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하였다.

산삼 분포지역은 북위 30도에서 48도에 이르는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세계적인 주요 자생지는 중국의 태행산맥 일대, 만주의 봉천·길림·흑룡 일대의 밀림지대, 러시아의 흑룡강 연안지역, 캐나다의 퀘벡과 마니토바 주의 타이가 기후지역, 미국의 애팔래치아 산맥 일대, 한국의 제주도를 제외한 전 지역이다.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산삼산지로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한계리 내설악과 양양군 서면 오색리 남설악의 설악산 일대, 지리산 일대로 알려져 있으며, 그밖에 태백산, 소백산, 치악산 등이 있는데, 이들 지역에는 심마니들이 집단적으로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원래는 인삼이 산삼…재배삼은 가삼

▲ 산에서 발견한 다섯잎짜리 줄기가 4개인 4구 산삼의 캐기 전 모습. 빨간 것이 산삼 열매인 삼달이다.<2006년 7월 전현석 기자 촬영>
산삼에 대한 우리 고유의 명칭은 심이며, 산삼을 캐는 사람을 심마니라고 부른다. 조선시대에 산삼은 인삼이라고도 하였고, 집에서 키우는 것을 가삼(家蔘)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요즘에 부르는 인삼은 재배하는 삼을 일컫는 말이지만, 예전에는 산삼을 가리키는 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심마니(심메마니)들에 있어서 산삼은 신앙의 대상물로 여겨지기도 하였으며, 산삼이 나는 산은 산신숭배의 대상으로도 되었다. 규원사화(18세기)에 의하면 ‘백두산 일대에 때로 산삼이 나서 세상 사람들이 불로초라 하니 산에 사는 사람들이 캐내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산에 제사를 지낸 뒤에야 비로소 캐낸다고 한다’고 하였다.

심마니들은 산삼에 대한 금기가 있다. 그들은 산삼을 캐러 들어가기 전에 1주일 전부터 부정 탈 것을 꺼려 주로 집안에서만 생활하고 사람들을 만나지 않으며 거리 출입조차 삼간다. 자주 목욕을 하여 신체를 청결히 하고 여자와 동침도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일정기간동안 어육류를 먹지 않고 채식만 하였으며, 입산 날짜의 택일과 산신께 바칠 공물 준비 등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고 한다.

이러한 산삼과 산악신앙을 연계하는 문화적 전통은 지금까지도 지속되어 2006년 4월28일 심마니 산신대제가 강원도 홍천군에서 개최된 바 있다. 심마니 경력 60년인 어인마니(오랜 경험을 가진 심마니) 김진성 옹(80)이 조상 대대로 유래되어 온 산신께 바치는 축문을 읽고, 제관들이 제를 올리는 전통 산신제를 재현하였는데, 심마니들이 한자리에 모여 산신께 풍삼(豊蔘)과 무탈을 기원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산삼은 예전에 사람 인(人) 자를 붙여서 인삼이라고도 불렀으니 그 모양도 사람처럼 생긴 영물(靈物)로 인식되었다. 산삼의 별명으로는 생김새에 따라서 동자삼(어린 애의 모습으로 생긴 산삼으로 최고로 친다), 봉황삼(봉황이 하늘을 가로질러 나르는 모습), 용삼(용틀임 삼·용이 무지개를 타고 승천하는 모습), 구삼(거북이 모습), 덥석부리(털이 많은 삼), 음양삼(남녀의 생식기를 닮은 모습), 꿩부리삼(목이 긴 삼), 거미삼(뿌리에 가달이 많은 삼) 등의 이름으로도 불렀다.

지역에 따라 산삼의 형태 차이도 있다는데, 설악산에서 나는 삼은 빛깔이 누렇고 약통이 날렵한 뼈삼이며, 오대산에서 나는 삼은 색이 희고 통통하게 살이 많이 쪘다고 하니, 각기 설악의 골산(骨山)과 오대의 육산(肉山)의 모양이 산삼의 유형에 반영되고 있기에 흥미롭다.

그리고 천연 삼인지 재배 삼인지에 따라서 구별되는 명칭도 있다. 천연 삼을 천종(天種)이라고 하고, 새에 의해 삼씨가 퍼뜨려져 난 삼을 지종(地種)이라 하며, 사람이 삼씨를 산에 뿌려서 채취한 것을 인종(人種), 혹은 포삼이라고 한다. 장뇌 역시 인종의 일종으로 사람이 집에서 재배한 삼을 일컫는 말이다.

재배산삼에 대한 지리학적 연구(정월숙, 1990년)에 의하면, 산삼의 재배지로 알려졌던 곳은 강원도 삼척군 노곡면 여삼리와 상반천리, 인제군 북면 한계리와 진부리, 기린면 현리, 상남면 미산리와 미다리, 홍천군 내촌면 화상대리, 정선군 북면 남평리 등지인데, 근자에 와서는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추세라고 한다.

백두대간에서 산삼을 성공적으로 재배한다면 ‘백두대간 산삼’이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상표로 등장할 날도 그리 멀지 않은 듯한데, 국토의 상징축인 백두대간을 널리 알리는 계기도 되고, 산삼의 탁월한 약효를 온 인류에 보급하는 기회도 될 듯하여 전략상품으로서 기대가 크다.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Posted by 동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