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4구간 / 설악산] 문헌고찰
금강의 미모를 능가하는 山中美人
설악산 봉우리·능선·계곡·폭포·암자의 옛 기록들

백두대간 상의 한계령(寒溪嶺<五色嶺·920m)에서 진부령(陳府嶺<珍富嶺·520m)에 이르는 구간의 주산 설악산은 산수미에 있어서는 천하절승의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남한 제일의 명산이다. 일찍이 백화산인(白華山人) 설월(雪月·1885-1980)은 설화산백담사신종서(雪華山百潭寺新鐘序)에서 ‘우리나라 산수 중에 아름답고 수려함이 천하에 으뜸인 것은 설화산(雪華山·설악산)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다.

설악산은 비록 예로부터 천하명산으로 소문난 삼신산(三神山·금강산·지리산·한라산)에 끼지는 못하였으나, 일찍이 신라 때부터 소사(小祀)를 지내온 전국 명산대천 중의 하나다.

일찍이 최남선(崔南善·1890-1957)은 명승으로서의 금강산과 설악산의 우열 문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탄탄이 짜인 상은 금강산이 승하다고 하겠지만, 너그러이 펴인 맛은 설악이 도리어 승하다고 하겠지요. 금강산은 너무나 현로(顯露)하여서 마치 노방(路傍)에서 술파는 색시 같이 아무나 손을 잡게 된 한탄이 있음에 비하여, 설악산은 절세의 미인이 그윽한 골속에 있으되, 고운 양자(樣姿)는 물 속의 고기를 놀래고 맑은 소리는 하늘의 구름을 멈추게 하는 듯한 뜻이 있어서, 참으로 산수풍경의 지극한 취미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금강보다도 설악에서 그 구하는 바를 비로소 만족케 할 것입니다…수렴동이란 것이 금강산·설악산에 다 있지마는, 금강의 수렴은 오막살이집 쪽들창에 친 발쯤 된다 하면 설악의 수렴은 경회루 넓은 일면을 뒤덮어 가린 큰 발이라고 할 것입니다…이밖에 옥련을 늘어 세운 듯한 봉정과 석순을 둘러친 듯한 오세와 같이, 봉만과 동학의 유달리 기이한 것도 이루 손을 꼽을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이 설악의 경치를 낱낱이 세어보면 그 기장함이 결코 금강의 아래 둘 것이 아니언마는, 워낙 이름이 높은 금강산에 눌려서 세상에 알리기는 금강산의 몇 백천 분의 1도 되지 못함은 아는 이로 보면 도리어 우스운 일입니다.’(<조선의 산수> 참조)

육당 최남선은 금강예찬(金剛禮讚)·풍악기유(楓嶽記遊) 등과 같은 금강산기와 백두산근참기(白頭山覲參記) 등을 지은 이이기도 하므로, 그의 설악관은 매우 주목되는 관점이다.

필자 생각에도 희운각대피소 인근의 무너미고개에 올라 바라본 신선대쪽 암봉군과 천불동계곡 방면의 암봉군, 또는 양폭 인근의 만경대(萬景臺)에 올라 바라본 공룡릉·용아릉·천화대 등의 암봉군은 금강산 천선대에 올라 바라본 만물상이나 중향성 못지않은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또한 마치 하늘에서 물줄기가 떨어지는 듯한 토왕성폭포, 소승폭포, 대승폭포는 모두 금강산의 구룡폭포를 능가하는 경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십이선녀탕의 8폭 8탕의 모습 또한 금강산의 상팔담(上八潭) 못지않은 기이하고 수려한 경관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설악산의 산 이름 유래

설악(雪岳)이란 산 이름은 삼국사기 제사지에 의하면, 국가에서 소사(小祀)를 지내던 전국 명산대천의 하나다. 상악(霜岳·금강산) 등과 함께 신라시대 사전(祀典)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일찍이 고대시절부터 불리어온 산 이름임을 살필 수 있다.

노산 이은상(李殷相·1903-1982)은 이 설악의 雪 자를 산다의 명사형 살음·삶의 어근이 되는 신성을 의미하는 ?의 음역자로 보고, 곧 신산(神山) 성역을 의미하는 살뫼에서 온 산이름이라 풀이했다(<노산문선>의 설악행각 참조).

조선시대 이만부(李萬敷·1664-1732)의 지행록(地行錄)에 의하면, ‘설악산은 산이 매우 높아 음력 8월(중추)이면 눈이 내리기 시작하며, 이듬해 음력 5월(여름)에 가서야 눈이 녹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른다. 또 그 바위 봉우리의 돌 빛이 희고 깨끗하기 때문에도 또한 설악이라 이른다’고 하였다. 증보문헌비고와 여지고의 양양 산천조에도 보이는데, 특히 ‘온갖 산봉우리들이 우뚝 우뚝 솟아 늘어서 있는데, 그 돌의 빛깔이 모두 눈과 같이 희기 때문에 (설악이라) 이름한 것’이라고 하여 좀더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필자도 30여 년에 걸쳐 여러 차례 설악산을 등정한 바 있지만, 암봉군의 돌빛이 마치 눈을 뿌려 놓은 듯한 흰 빛으로 보이기 시작한 것은 근년에 이르러서다. 이름과 관련한 그 진경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를 염두에 두고 주마간산의 간산(看山)이 아닌 관산(觀山)의 심안(心眼)으로 관하자 비로소 설악의 진경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한 것이다.

▲ 설악산 침봉군. 아침 햇살이나 노을이 비낄 때에는 마치 눈이 내린 듯 하얗게 빛난다. 해서 설산, 설화산이란 이름을 얻음직하다.

특히 청명한 10월 단풍철에 한계령을 넘어갈 때, 또는 오색의 만경대나 흘림골의 등선대에 올랐을 때, 또는 희운각 인근의 무너미고개에서 천불동계곡으로 하산할 때 마침 석양의 가을 햇살이, 또는 아침햇살이 눈부시게 그 암봉군을 비쳐줄 때 조망되는 설악 암봉들의 돌빛은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하얀 눈빛 그대로가 실감나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일찍이 설월(雪月)의 설화산백담사신종서에서도 설악산을 설화산(雪華山)으로도 일컫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은 또 신라시대의 성주사 낭혜화상탑비문(聖住寺朗慧和尙塔碑文)과 건봉사본말사적(乾鳳寺本末史蹟)의 설산영혈사시주기(雪山靈穴寺施主記), 설산원명암창건기(雪山園明庵創建記) 등에 의하면, 설산(雪山)으로도 일컬어졌다. 이는 설악산의 약칭으로 볼 수도 있으나, 그 보다는 아마도 불승들이 부처의 설산구법(雪山求法)을 사모하여 일컬은 또 다른 설악산의 일명이 아닐까 한다.

설악산은 또 동국여지승람 양양조에는 설악(雪岳), 인제조에 한계산(寒溪山)으로 언급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양양·인제조에도 같은 산 이름의 기록이 보이고, 조선 후기 성해응(成海應·1760-1839)의 동국명산기 등에도 설악산과 한계산으로 이름을 달리하여 따로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는 양양군과 속초시 일대에 속하는 설악권 지역의 산을 설악산, 인제군 일대에 속하는 설악권 지역의 산을 한계산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설악산은 현재 백두대간 상의 공룡능선을 중심으로 그 동쪽 지역을 외설악, 그 서쪽 지역을 내설악이라 하고, 서북능선을 경계로 한 그 남쪽 지역의 장수대지구·한계령지구·오색지구 일원과 44번 국도 남쪽의 가리봉?·등선대·점봉산 일대를 남설악이라 일컫고 있다. 이 중 남설악은 손경석 선생이 1970년에 雪嶽山이란 성문각 판 등산 소책자를 편찬하기 위해 실지조사를 하면서 44번 국도 남쪽의 설악권 지역을 편의상 구분하여 명명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범위가 조금 확대되어 그대로 정착되어 쓰이고 있다.

또 최근에 이르러서는 등산 애호가들이 설악산 국립공원 권역의 경계 북쪽 매봉산(1,271m) 일대, 신선봉(1,204m)·마산(1,052m) 일대를 더러 북설악이라 일컫기도 한다.

청봉이 곧 설악의 최고처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은 조선시대에는 본래 청봉(靑峯)이라 일컫던 봉우리다.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그 봉우리가 높아서 높고 푸른 하늘을 만질 듯하고, 멀리서 보면 단지 아득하고 푸르기만 하므로 그 최고 정상을 가리켜 靑峯이라 이름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또 이 봉우리의 모습을 ’둥글둥글하면서 가파르지 않고, 높으면서도 깎아지른 듯 험준하지 않고, 우뚝 솟아 서 있는 것이 마치 큰 거인 같다‘고 하였다. 여름에 중청봉쪽에서 대청봉을 바라보면 그러한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현대로 오면서 중청봉·소청봉·끝청봉과 그 귀때기 부위에 해당되는 귀때기청봉도 모두 대청봉과 유사한 면이 있다고 하여 함께 청봉이란 이름을 붙여 그 이름을 세분화하여 부르고 있다.

▲ 대청봉. 중청·소청·끝청·귀청 등 정상부의 봉우리들은 모두 근래에 청봉에서 비롯된 이름들이다.

용아장성릉이 시작되는 봉정암 사리탑 뒤 큰 봉우리를 이룬 석가봉(釋迦峯), 암자를 중심으로 오른편 동쪽에 기린봉(麒麟峯)·할미봉, 북쪽에 독성나한봉(獨聖羅漢峯)·지장봉(地藏峯)·가섭봉(迦葉峯)·아난봉(阿難峯) 등이 자리하고 있다. 진신사리를 봉안한 불교성지답게 불교적 이름을 지닌 봉우리들이 마치 신장(神將)이 암자를 호위하듯이 두르고 서 있다.

노산은 설악행각에서 대청봉의 모습이 ‘푸른 모전[靑氈]으로 빈틈없이 투갑(두겁)을 입힌 것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곧 혹독한 바람에 시달려 키가 크지 못한 2~3척(尺) 짜리 전나무들이 정상부위에 널리 퍼져 있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노산은 또 ‘묘고봉두(妙高峯頭)에 서서’란 대목에서 청봉과 봉정을 설악의 가장 높은 산봉, 곧 상봉을 일컬은 같은 산 이름으로 보고, 이를 광명을 일컫는 ‘불’에서 온 우리말 산 이름 ‘불매’를 한역한 것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는 노산이 설화산인의 오세암사적기에 보이는 ‘묘고봉 이름을 봉황대라 한다’고 한 대목과, 동국명산기 설악조에 ‘봉정은 곧 뫼[嶽]의 극처(極處·궁극에 다다른 곳)’라 한 대목을 오해한 데에서 비롯된 견해일 뿐이다.

위에서의 묘고봉은 불가에서 제석천의 주처로 언급한 수미산과 같은 의미의 말로서, 봉황대는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사리탑이 서 있는 대의 이름을 언급한 것일 뿐이고, 또 봉정이 뫼의 궁극에 다다른 곳이란 말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용아능선의 정상부를 일컬은 말일 뿐이다. 동국명산기 설악조에서는 분명하게 ‘청봉이 곧 설악의 최고처이고, 봉정은 그보다 못하다(미치지 못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서북릉의 서쪽 끝자락 대승령과 안산 사이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진 십이선녀탕계곡은 일명 탕수동계곡(?水洞溪谷)이라고도 한다. 여지도서 인제조 및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김유동의 팔도명승고적(1929년간) 등에 의하면, 조선시대·일제시대에는 본래 지리실(地理室)이라 불리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지리한 골짜기란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었을 것이다.

옛부터 12탕 12폭이 있었다고 하여 12선녀탕계곡이라 불렀다고 할 만큼 약 8km에 이르는 협곡에 구슬 같은 푸른 물이 온갖 기교를 부리며 절경을 연출하고 있다. 다만 근래 몇 년 사이에 큰 태풍과 폭우가 많이 지나가면서 설악산의 이름난 계곡 여러 곳의 수려한 경관이 많이 훼손된 점은 상당히 안타까운 일이다.

설악산에는 대청봉 동쪽 골짜기의 둔전골, 수렴동계곡 하류쪽에서 마등령으로 오르는 곰골, 저항령으로 오르는 길골 등 아직 사람의 발길이 뜸하여 천연의 미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계곡들이 많다. 이 중에서도 곰골·길골은 동국명산기에도 웅정동(熊井洞)·길동(吉洞)으로 언급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등산로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적어도 수백 년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승폭·독주폭·토왕폭이 설악의 3대 폭포

▲ 토왕성폭포. 신광폭포로 불린 한반도 최대의 폭포다.
설악산은 장대한 산줄기 사이 곳곳에 골이 형성되면서 수많은 폭포가 비경 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 중 대승령 중복의 대승폭포(大勝瀑布·88m)와 서북릉 남쪽 독주골의 독주폭포(獨走瀑布)와 권금성 동쪽 토왕골의 토왕성폭포(土王城瀑布)를 설악산의 3대 폭포라 이른다.

필자는 위의 세 폭포에 토왕성폭포 아래쪽 토왕골에 자리한 용이 날아오르는 듯한 모습의 비룡폭포(飛龍瀑布·40m)와 귀때기청봉 정남쪽 기슭에 병풍처럼 두른 양쪽 절벽 사이로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듯한 소승폭포(小勝瀑布)를 추가하여 설악산의 5대 폭포라 일컫고 싶다. 이 중에서도 소승폭포는 일부 강원도 토박이 주민들이 대승폭포보다도 더 경관이 좋다고 할 만큼 명승을 이루고 있어, 필자 생각에는 독주폭포가 설악산 3대 폭포의 명성을 양보해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승폭포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한계산에는 만 길 되는 큰 폭포가 있다. 옛날 임진년에 중국의 장수가 보고서 여산폭포(廬山瀑布·중국 강서성 여산에 있는 폭포)보다 났다고 말하였다’라고 하였을 만큼 예로부터의 천하 명폭으로, 개성의 박연폭포, 금강산의 구룡폭포와 함께 우리나라의 3대 폭포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폭포 맞은편 망폭대(望瀑臺) 반석에는 ‘九天銀河(구천은하)’라 쓴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조선 전기 4대 명필의 한 사람인 봉래 양사언이 쓴 것이라 전한다. ‘구천은하’라는 말은 이태백의 망여산폭포시(望廬山瀑布詩)에 ‘날리어 흐르며 삼천길을 떨어지니, 아마도 은하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가(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라고 한 시구에서 따온 말로 보인다.

필자의 관견으로는 두타산 무릉계곡의 무릉반석에 양봉래가 썼다는 ‘武陵仙源(무릉선원)’ 등의 글씨보다는 호쾌하고 유려한 맛이 없다고 여겼으나, 시간적인 차이인지 안목의 차이인지 노산 같은 이는 용이 날아오르는 듯 웅려한 필세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설악행각 참조).

대승폭포라는 폭포 이름은 동국명산기에 의하면, 대승폭포 위쪽에 대승암(大乘庵)이 있고, 또 그 위쪽에 상승암(上乘庵)이 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대승암이란 암자 이름에서 유래된 폭포 이름이 아닐까 생각된다. 처음에는 ‘大乘瀑布’라 쓰던 것이 후대에 동음이표기인 ‘大勝瀑布’로 바뀌게 된 것으로 보인다. ‘大勝瀑’의 표기는 김정호의 대동지지(大東地志)에도 보인다. 또 속전에 의하면, 대승폭포는 처음에는 한계폭포로 불리었다고 하며, 신라 경순왕의 피서지였다고도 한다.

토왕성폭포는 일명 신광폭포(神光瀑布)라고도 하며, 석가봉(釋迦峯)·문수봉(文殊峯)·보현봉(普賢峯)·노적봉(露積峯) 등의 암봉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가운데 암벽을 3단을 이루며 낙하하는 연폭이다. 여름철 수량이 풍부해졌을 때 권금성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하늘에서 폭포가 떨어지고 있는 것처럼 폭포 상단부가 조망되고, 토왕골 비룡폭포 위쪽에서 바라보면 마치 선녀가 흰 비단을 바위 위에 펼쳐 늘어뜨려 놓은 듯이 보인다.
토왕성폭포의 이름은 권금성의 일명 토왕성에서 딴 것으로 보인다. 현재는 토왕성의 王 자를 旺 자로 표기하고 있는데, 동국명산기와 대동지지 양양조에 의하면, 王 자로 쓰는 것이 옳다고 본다.

울산암의 원이름은 울타리의 뜻인 이산

설악동 신흥사 북쪽으로는 북주릉에서 동쪽으로 한 산줄기가 뻗어 내려와 형성된, 단일 암봉으로는 우리나라 최대, 또는 동양 최대의 암봉으로 일컬어지는 울산바위(蔚山巖·950m)가 있다. 이 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한다.

조물주(일설에는 산신 또는 신선)가 강원도 땅 지금의 금강산 자리에 봉우리수가 1만2천이 되는 천하의 명산을 만들려고 전국에 있는 빼어난 산들은 다 그곳으로 모이라고 하였다. 이 때 경상도 울산(蔚山) 지역에 있던 한 암산도 그 소식을 듣고 금강산 지역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워낙 육중한 몸집이라 빨리 걸을 수 없어 지금의 설악산 지역에서 하루 쉬어 가게 되었다.

다음날 다시 금강산 지역으로 떠나려고 하는데 금강산에 이미 1만2천 봉우리가 다 찼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금강산으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산수가 수려한 이곳 설악산 지역에 눌러앉아 그 자태를 뽐내고 있는 암산이 바로 지금의 울산바위라 한다(일설에는 금강산에 가서 1만2천 봉이 다 찬 것을 보고 다시 돌아오다가 이곳에 눌러앉은 것이라고도 함).

▲ 울산암. 울타리처럼 길게 이어져 있어 이산이 원래 이름이었다.

이는 호사가들이 부회하여 지어낸 전설일 뿐, 울산의 본명은 울처럼 둘리어 있는 산이란 뜻의 이산(籬山)이었다. 동국여지승람 양양조에 의하면, ‘이산 양양부 북쪽 63리, 쌍성호(雙成湖·현 청초호) 서쪽에 있다. 백두대간의 동쪽 가닥이다. 기이한 봉우리가 꾸불꾸불하여 울타리(울)를 친 것과 같으므로 이름하였다. 세속에서는 울산(蔚山)이라 하기도 한다’고 하였다.

이에 의하면 이산은 울산의 뜻옮김 표기이고, 울산은 울산의 소리옮김 표기일 뿐이다. 특히 노산의 설악행각에 ‘이 암자(내원암)를 지나, 다시 반 시간을 비(費)하면, 돌아보아 멀리 토왕성폭포가 떨어지고 바라보아 병풍 같은 리산바위가 둘렀음을 봅니다. 리산바위 밑 계조굴에 이르니, 어느덧 석양이 빗겼습니다’라 쓴 글을 보면 1940년대 후반까지도 오히려 토박이 산 이름 울산 보다는 이를 뜻옮김(의역)하여 불러온 전통적 산이름 이산으로 불리고 있었음을 살필 수 있다.

또 다른 속설로는 설악산에 천둥이 치면 그 소리가 바위산에 부딪혀 마치 울부짖는 듯 소리를 내므로 ‘울산’ 또는 ‘천후산(天吼山)’이라 불리게 되었다고도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천후산에 대하여 양양조의 이산과 따로 간성조에 별개의 산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여지도서 양양조 및 조선 후기의 승려 용암(龍巖) 체조(體照·1714-1779)가 영조 때 쓴 설악산신흥사대법당중창기·설악산신흥사대법당석체기에 의하면, 울산바위는 적어도 조선 후기부터는 일명 천후산 또는 천후봉으로도 불리어 왔음을 살필 수 있다.

이 중 신흥사대법당중창기에 보면, ‘(신흥사) 남쪽에는 하늘을 버티고(괴고) 있는 높은 산봉이 있으니, 권씨와 김씨가 피난하였던 성이요, 북쪽에는 대지에 치솟은 웅악이 있으니, 옛날에 천후산이라 일컫던 산이다’라고 하여, 울산을 옛부터 천후산으로도 일컬어왔던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

비선대 근처 미륵봉의 금강굴은 신라 때 원효가 수도하였던 곳으로, 일명 비발라굴(毘鉢羅窟)이라고도 한다. 이는 가섭존자가 금란가사와 푸른 옥으로 된 기이한 발우를 지니고 비발라굴에서 미륵불이 세상에 출현하기를 기다린다는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다(신흥사대법당석체기 참조). 금강굴이란 이름은 원효의 대표적 저서인 금강삼매경에서 딴 이름이라 한다.

고려 때 야별초가 몽고군 격퇴한 한계산성

설악산에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역사상의 문화유적은 별로 없으나, 고성 유적으로서 도기념물 제17호로 지정된 한계산성과 권금성이 있다. 한계산성은 내설악의 안산 남쪽 계곡을 에워싼 포곡식 석축산성이다. 옥녀탕을 지나 계곡을 따라 40분 정도 오르다가 계곡 왼쪽 안산으로 오르는 등산로 가에 성이 보인다. 전설에는 신라 경순왕 때 쌓았다고 하며, 마의태자가 신라 부흥운동을 할 때 성을 수축하고 군사를 훈련시켰다고 한다.

고려사 조휘전(趙暉傳)에는 고종 46년(1259)에 조휘 일당이 자칭 관인(官人)이라 하면서 몽고군을 이끌고 와서 이 성을 공격하였으나, 방호별감 안홍민(安洪敏)이 야별초를 인솔하고 나가서 몽고군을 모조리 섬멸한 전적지로 언급하고 있다. 동국여지승람 인제조에 의하면,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6,279척, 높이가 4척이고, 안에 우물 1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성곽의 용도(甬道)에 올라서면 골짜기 건너편으로 안산의 수려한 모습이 조망된다. 용도와 여장에 이용된 성돌들은 벽돌만한 크기로 축조되어 마치 중국 만리장성의 성도(城道)를 보는 듯하다.

▲ 용아장성릉.

한계산성과 대승폭포가 있는 설악산 일대와 주변 지역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이었던 경순왕의 전설이 많이 전한다. 한계산성 위 언덕으로 된 터를 대궐터라 일컫는데, 경순왕이 머물던 곳이라 한다. 인제군 상남면 김부리(金富里←金傅里)에도 경순왕이 와 있었다는 김부왕촌(金傅王村←金傅洞)’과 경순왕의 옥새를 감추어 두었던 옥새바우란 땅이름이 보이고, 경순왕을 위하여 음력 5월5일과 9월9일에 온 마을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는 대왕당(大王堂)이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바로 그 사실이 실증되지 않는 속전이기는 하나,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으로서 불우한 말년을 보냈던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권금성은 외설악에 있는 석축산성이다. 현재 성벽은 거의 허물어지고 터만 남아 있다. 일명 설악산성이라고도 하였으며, 대동지지에 의하면, 토왕성도 동일산성의 이름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 때문에 대동지지에 보이는 권금성과 여지승람에 보이는 권금성 둘레 길이가 달리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곧 여지승람에는 둘레 1,112척, 높이 4척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대동지지에서는 그 둘레를 2,112척으로 언급하고 있다.

여지승람에 의하면, ‘예전에 권씨·김씨 두 집안이 여기에 피난한 까닭에 권금성이라 이름하였다 한다. 낙산사 기문에 ‘원나라 군사가 우리 강토에 마구 들어왔는데, 이 고을에서는 설악산에다 성을 쌓아서 수어하였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곧 이 성일 것이라고 하였다.

설악산은 고대부터 명산대천의 하나로 중시되어 왔으므로 이 산에도 많은 불교유적이 남아 있다. 내설악에는 백담동계곡에 백담사, 수렴동계곡에 영시암(永矢庵), 수렴동계곡과 마등령 중간지점 만경대 근처에 오세암, 구곡담 계곡 상단에서 소청봉 오르는 길에 봉정암이 자리하고 있다.

백담사는 무진(無盡)의 백담사중건기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 15년(646)에 자장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원래 이 자리는 장수대 건너편 대승령 오르는 등산로 입구 왼쪽에 한계사란 이름으로 개산되었다. 창건 이후 일곱 차례나 되는 화재로 인하여 여러 차례 이건하면서 절 이름도 운흥(雲興)·심원(深源)·영취(靈鷲) 등으로 계속 바뀐 끝에 지금의 위치와 절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또 백담사중건기에 의하면, 이 산중 폭포의 물이 수없이 꺾이며 얽히고 돌면서 담소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총수를 들어서 이름붙인 것이라고도 하고, 일설에는 물이 많으면 불을 이기므로, 곧 수극화(水克火)의 의미를 담아 화재를 예방하자는 차원에서 백담사로 명명하게 되었다고 한다. 만해 한용운이 이곳에 머물며 불교유신론·님의 침묵을 집필한 바 있다.

봉정암과 오세암은 한계사 창건보다 앞선 신라 선덕여왕 13년(644)에 창건되었다. 봉정암은 자장법사가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다.

오세암은 본래 관음암(觀音庵)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고려조 때 설정조사(雪頂祖師)가 중수하였다. 설정조사의 조카인 5세 동자가 견성득도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며, 그로 인해 오세암이란 절 이름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설화산인 무진자 無盡子의 오세암사적기 참조). 그러나 노산은 이 전설(설정이 영동에 일을 보러 갔다가 눈 때문에 암자에 돌아오지 못했을 때 5세 조카아이가 관세음보살의 보살핌으로 한해 겨울을 혼자 보내며 해동할 때까지 살아 있었다는 전설)이 불교적 교리에 맞지 않는 전설로 믿을 것이 못되는 것으로 보고, 어려서 오세신동(五歲神童)으로 일컬어졌던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에서 수행하며 머물렀던 인연에서 유래된 암자 이름으로 보고 있다. (설악행각 참조).

곧 오세암은 매월당의 승적 입문지로서, 그는 여기서 삭발한 후 ‘머리를 깎는 것은 속세를 피하기 위함이요, 수염을 깎지 않는 것은 장부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함이다(削髮逃塵世, 存髥表丈夫)’라는 시를 남긴 바 있다(매월당집 부록1 참조). 일설에는 오세암의 오세동자 전설을 조선 인조 때의 설정선사(雪淨禪師)의 일로 보기도 하고, 중건 연혁도 인조 21년(1643)에 설정이 관음암을 중건하고 오세암으로 개명한 것이라 한다(백담사 속암 기록 등 참조). 만해도 이곳에 머물며 수행하고 사색한 일이 있다.

영시암은 조선 인조 26년(1648)에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1653-1722)이 어지러운 세상을 떠나 영원히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이곳에 살기로 맹세하고 창건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일명 삼연정사(三淵精舍)라고도 하였다.

외설악에는 울산바위 등산로 초입에 신흥사, 그 위쪽에 내원암(內院庵), 또 그 위쪽에 계조암(繼祖庵)이 있다. 모두 신라 진덕여왕 6년(652)에 자장법사가 초창한 것으로 전한다. 계조암은 원효·의상 두 대사가 수도를 계승했던 곳이라 하여 일컫는 암자 이름이며, 그 앞쪽에는 한 사람의 힘으로도 흔들리는 명물 흔들바위(動石)가 있다. 또 대청봉 동쪽 관모봉 기슭에 영혈사(靈穴寺)가 있는데, 신라 신문왕 9년(689)에 원효대사가 창건한 것이라 전한다.

남설악에는 오색약수에서 큰고래골 상류쪽으로 약 1.5km 지점에 오색석사(五色石寺), 일명 성국사(城國寺)가 있다. 또 같은 시기에 창건된 고찰로서 대청봉 동쪽 기슭 둔전골 둔전리에 진전사지(陣田寺址)가 있다. 두 절 모두 통일신라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귀국한, 당시 사상계의 선구적인 고승 도의선사(道義禪師)가 창건한 절이다.

오색석사는 이 절 화원에 다섯 가지 색의 꽃이 피는 오색나무(→오상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일설에는 다섯 가지 색의 돌 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돌들이 주변에 많이 있기 때문에 오색석사라 부르게 되었다고도 한다. 성주사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문에 의하면, 신라 문성왕 때 고승으로서 성주산파(聖住山派) 선문의 개조가 된 무염선사(無染禪師)도 이 절에서 출가하였다고 한다. 이 비문에 이미 오색석사란 절 이름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이 절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신라고찰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둔전리 진전사지에는 9세기 통일신라의 대표적 석탑 중 하나로 국보 제122호로 지정된 진전사지 삼층석탑이 있다. 또 둔전골 저수지 제방 밑에서 우측 산등성이길로 한 5분 정도 올라가면 도의선사의 부도탑으로 추정되는 진전사지 부도가 있다.

도의는 신라 후기 구산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다. 당시 교종 불교가 절대적이었던 신라에 최초로 남종선을 전한 진보적 사상가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마귀의 소리’라 하여 기존의 승려들에게 심한 배척을 당하였다. 이에 은거하여 때를 기다리며 40년 동안을 수도하면서 지낸 곳이 바로 설악산 진전사다. 선사는 곧 서당 지장(西堂智藏)과 백장 회해(百丈懷海)의 법을 이어 받았는데, 백장선사가 이르기를, ‘강서(江西)의 선맥이 몽땅 동국(한국)으로 돌아가는 구나!’하고 크게 칭송한 바 있다(조당집 참조).

둔전골에 향산폭포(香山瀑布)가 있는데, 강서성 여산의 향로봉폭포(곧 여산폭포)와 같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속전되고 있다. 향로봉폭포는 곧 이태백의 망여산폭포시에 등장하는 여산폭포다. 이에 의하면 도의선사는 그가 수학하던 곳 부근의 천하명산인 여산의 산수를 사모하여 설악산 대청봉 동쪽 기슭의 둔전골 일대를 그곳의 산수와 닮은 곳으로 여기고 평생 동안 수도하며 살 은거지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윤우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전문위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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