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문화

자국 영토임을 각인시키려는 의지의 표현
한국 오대산신앙의 본거지는 신라의 호국사찰

▲ 오대산 사고. 오대산의 위치가 조선시대의 영토로는 오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고를 설치했다.

산은 자연적인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이고 문화적으로 구성된 산물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산이란 사람이 일정하게 개념화하여 이름붙인 대상으로서의 자연경관이지만, 여기에 시간, 곧 역사가 더해지고 문화집단이 직간접적으로 관계를 맺어 독특한 의미와 기능이 형성된 문화경관이기도 하다.

백두산을 생각해 보자. 백두산은 우리에게 있어 자연경관을 넘어서 겨레문화와 정신사의 아이콘(icon)이자 상징이라고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적으로 공유된 어떠한 집단적인 의미체계가 형성되어있다. 따라서 백두산은 이미 우리에게 있어 사회적 의미가 집적된 문화경관인 것이다.

문화경관에는 그 경관을 만든 문화집단의 이데올로기가 투영되어 있는 법이다. 그것은 산의 이름을 비롯하여 상징성, 의미, 문화적 건축물, 사회 집단의 생활공간 등으로 지명 혹은 문헌을 통해 인지할 수 있거나 가시적인 경관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역으로 이러한 매개를 통해 문화경관으로서 산에 투영된 집단적 이데올로기의 문화와 역사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에서 산은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으로 시대와 지역 환경이 바뀜에 따라 사람과 새로이 관계를 가지게 되었고, 새로 의미가 구성되어 인식되었다. 이렇게 보자면 백두대간이라는 것도 사회적으로 의미를 공유하는, 다시 말해 문화적 의미가 구성된 산맥의 인식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백두대간이라는 개념 속에 반영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는 국토의 중추이자 근간에 대한 인식, 땅을 유기체의 시스템으로 인식하는 풍수적 사유, 조선시기의 지리정보 등 수많은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에서 10년 전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백두대간이 무엇인지도 몰랐다. 사실 백두산도 역사적으로 보면 조선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지도에 본격적으로 표현되고 있으니 당시부터 집권 왕조에 의해서 지리적으로 중시되었다는 것을 반영한다. 조선시대 후기에 비로소 지리적 인식의 확장과 더불어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하는 1대간, 1정간, 13정맥의 산맥 체계가 정립된 것은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에서 국가안보와 지방통치의 필요상 국토지리적 정보를 체계적으로 인식할 필요가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근래에 들어 새로이 우리에게 각인된 백두대간이라는 주제의 사회적 담론은 국토에서 백두대간이라는 산맥체계가 지니는 환경생태적 중요성과 일방적 서구문화의 수용에 대한 반성과 아울러 전통적 가치의 각성 등이 결합된 것이다.
일제시기 일본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한반도의 서구적 산맥체계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은 백두대간이라는 전통적 인식과 가치의 도전을 강력하게 받게 되었고, 백두대간의 사회적 인식은 이미 상당한 고지를 점령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으로 지리적 개념은 사회적으로 해당 시기를 주도하는 집단의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역사가 바뀜에 따라 또 도전되는 변증법적인 경로를 겪게 된다.



신라 호국사찰로 등장한 중대 사자암

오대산도 문화경관이라는 시선의 맥락에서 조명할 수 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얻은 문화적 상징적 배경은 무엇이며, 오대산이 자연경관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면서 문화경관으로서 사회적이고 집단적인 의미체계를 형성한 것은 언제부터이고, 그 내용과 배경은 무엇일까? 오대산이라는 문화경관의 형성을 주도한 세력집단은 어떤 계층인가?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처음 가지게 되고, 이 영역에 사찰을 필두로 하는 문화적 경관이 형성된 것은 불교집단의 이데올로기와 불교적 문화적 요소가 투영된 결과다. 그리고 문화경관이 새롭게 형성되고 기능이 변경되는 데는 문화집단 간의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세력 관계가 배경이 되고 있는데, 문화경관에 또한 신라의 정치사회적인 세력관계가 공간적으로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권근이 쓴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라는 글에는 사찰의 정치적이고 사회적 기능이 잘 나타나 있다. 곧 사자암이라는 절은 왕실집단이 원찰로 설치하여 호국 기능을 담당하였던 사찰이라는 것이다.

▲ 오대산 북대(미륵암).

‘강릉부의 오대산은 빼어난 경치가 옛적부터 드러났다기에, 원찰(願刹)을 설치하여 승과(勝果)를 심으려 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늙은 중 운설악(雲雪岳)이 이 산에서 와서 고하기를 '산의 중대(中臺)에 사자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국가를 보비(補裨)하던 사찰입니다.’

문화경관으로서의 오대산은 지리적 역사적 특성에 따라 그 기능이 새로 더해지기도 하였다. 신라시기에 오대산이라는 이름을 얻고 국토의 요충지이자 승경(勝景)으로 선택되어 처음 불교적 문화경관이 입지하였고,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 위치가 조선시대의 영토로는 오지라는 지리적 특성으로 말미암아 사고(史庫)가 설치되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조선 후기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오대산은 흙산이면서 천 바위, 만 구렁이 겹겹으로 막혀져 있다. 가장 위에는 다섯 축대가 있어 경치가 훌륭하고 축대마다 암자 하나씩이 있다. 그 중 한 곳에는 부처의 사리를 갈무리하였다. 한무외(韓無畏)가 여기에서 선도(仙道)를 깨치고 신선이 되었는데 연단(練丹)할 복지(福地)를 꼽으면서 이 산이 제일이다 하였다. 예로부터 병란이 침입하지 않았으므로 국가에서는 산 아래 월정사 옆에다가 사고(史庫)를 지어 실록을 갈무리하고 관원을 두어서 지키게 하였다’고 소개하고 있다.

오대산이 불교의 문화적인 속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서 구성되기 시작한 것은 신라 선덕여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국유사에서 적고 있듯이 신라의 자장율사 이래로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1만의 권속을 거느리고 살고 있는 성지로 알려져 왔으며, 오대신앙의 본산으로 일컬어졌다.

오대산의 지리적 위치는 당시 신라 영토와 국경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따라서 당시 호국불교의 관념에 비추어 볼 때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사찰을 배치하여 불보살의 호국적 보위를 상징화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오대산이라는 이름은 동아시아적인 문화영역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같은 이름은 중국과 일본에도 있다. 다시 말해 중국에 있는 오대산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와 일본에 공간적으로 확산된 지리적인 속성도 띠고 있다. ‘한중일 오대산신앙의 연구’(박노준)에 의하면(이하 관련 내용은 연구를 요약한 것임), 원래 오대산신앙은 불교의 화엄경에 의거하고 있지만, 불교와 산악숭배 관념이 결합된 것으로, 중국 태원의 오대산, 한국의 오대산, 일본 쿄토 부근의 애탕산(愛宕山)이 오대산에 비정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 보현사.

오대산이라는 이름에 접두사로 붙은 오(五)라는 이름에는 동아시아의 가치체계가 반영되어 있다. 오대 혹은 오봉(五峰)의 신성한 산 관념은 인도의 숫타니파타에서도 드러나며, 문수사리반열반경에서는 히마바트(Himavat)의 신령스러운 곳에 다섯 봉우리로 둘러싸인 호수가 있다는 내용도 있다.

중국과 한국에서 오(五)라는 숫자는 만물을 아우르는 상징성을 내포한 성수(成數)였기 때문에 세계와 자연경관을 오의 의미체계로 읽거나 해석하였는데, 세계관의 운행질서로서 오행과 방위의 오방(五方)이 그 대표적인 사례가 될 수 있다.

국토의 명산 역시 오악으로 지정하였는데, 중국의 오악은 동 태산(산동성), 서 화산(섬서성), 남 형산(호남성), 북 항산(산서성), 중 숭산(하남성)이고, 신라의 오악은 동 토함산, 서 계룡산, 남 지리산, 북 태백산, 중 팔공산이었으며, 일본(헤이안시대)의 오악은 조일봉, 대취봉, 고웅산, 용상산, 하마장산이었던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중국 태원의 오대산이나 한국의 오대산이 화엄경에 문수보살이 머문다는 청량산으로 지정될 수 있었을까? 화엄경에는 ‘동북쪽에 보살이 머무는 청량산이 있다. 과거 이래로 보살이 거주하였는데 현재 문수보살이 만 명의 보살을 거느리고 항상 설법한다’는 내용이 있지만, 여기에 청량산은 실제의 산이라기보다는 불교의 경전문학에서 가공된 산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오대산은 중국 중원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고 기후적 조건이 청량하며 산수 경관이 신비스럽고 탁월하다는 점도 문수보살이 머무는 곳으로 신앙되는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한국의 오대산은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전국을 순례하다가 중국의 오대산과 닮아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환경이나 이상향을 닮은 곳에 입지하는 성향이 있다. 이러한 관습은 역사적으로 사찰의 입지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의 통도사가 있는 영취산이라는 이름은 기사굴산의 역어로서 인도의 산과 닮아서 이름 지었고 사찰이 입지하였던 것이다. 고승전에 의하면, 중국의 경우에도 인도의 승려인 구나발마(求那跋摩·377-431)가 시흥에 머물렀을 때 호시산이 기사굴산과 비슷하여 영취산이라고 이름하고 절을 세웠다고 한다.

▲ 보현사 석물
중국의 오대산은 산서성 성도인 태원시에서 동북쪽으로 230㎞에 위치해 있고 둘레가 250㎞, 5개 산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동대 망해봉, 남대 면수봉, 서대 계월봉, 북대 엽두봉, 중대 취암봉이라 한다. 중국에서 오대산은 불교 4대 명산 중 하나로 손꼽히며, 나머지 세 곳으로는 관세음보살을 모신 절강성의 보타산, 보현보살을 모신 사천성의 아미산, 지장보살을 모신 안휘성의 구화산이 있다.

한국의 오대산은 삼국유사에 나와 있듯이, 신라의 자장율사가 중국의 오대산의 태화지라는 못가에서 7일 동안 기도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는데, 그 때 문수보살이 하는 말이 “너희 나라 동북방 명주 경계에는 오대산이 있는데 만 명의 문수보살이 항상 그 곳에 있으니 참배하라”고 하여 귀국 후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다는 것이다.
그 때 이후로 오대산은 해발 1,563m의 비로봉을 주봉으로 동대산(1,434m), 두로봉(1, 422m), 상왕봉(1, 491m), 호령봉(1, 561m) 등 다섯 봉우리가 지정되었다. 오대의 옛 이름에 대해서 권근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강원도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함께 우뚝하다. 크고 작기가 비슷하면서 고리처럼 벌렸는데, 세상에서는 오대산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의 가운데 것은 지로(地爐), 동쪽은 만월(滿月), 남쪽은 기린(麒麟), 서쪽은 장령(長嶺)이라 하며, 북쪽은 상왕(象王)이라 한다.’(오대산 서대 수정암 중창기)

최원석 경상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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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식생

토심 깊은 육산이 키워내는 짙고 푸른 숲
전나무·신갈나무숲에 좀개미취·구실바위취·금강초롱꽃 자생

▲ 전나무숲. 오대산 명물 가운데 하나인 이 숲은 월정사 부근에 있다. 수령 100년에서 500년 사이의 아름드리 전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으며, 그 사이로 난 900여m의 길을 걷는 맛이 일품이다.

오대산 상봉인 비로봉(1,563m)은 백두대간 마루금에 솟아 있는 산이 아니다. 백두대간 상의 두로봉(1,422m)에서 남서쪽으로 무려 6km나 물러나 앉아 있다. 두로봉에서 상왕봉(1,491m)을 거쳐 비로봉(1,563m)까지는 15리가 넘는 높고 긴 능선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대산을 백두대간의 산이 아니라고 말하는 이는 없다.

주봉이 대간 능선에 서 있지 않으면서도 대간의 산으로 여기는 오대산. 그 이유는 오대산의 너른 산세와 높은 고도에서 기인한다. 비로봉을 호위하듯 남북으로 서 있는 상왕봉, 호령봉(1,561m) 등의 주봉 부근의 산봉우리는 물론이고 저 멀리서 백두대간 마루금을 이루고 있는 노인봉(1,338m), 동대산(1,434m), 두로봉 등의 산봉우리들을 거느려 넓은 산역을 자랑하는 오대산은 높이 면에서도 국립공원 가운데 다섯번째 높이를 자랑한다.

넓은 산역, 높은 고도, 높은 고도에 형성된 능선들, 이 능선들 사이를 흐르는 끝을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깊은 계곡들은 오대산의 식물을 풍부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환경을 제공하고 있다.


오대천 상류에 북방계 희귀식물 좀개미취 생육

▲ 좀개미취 - 영월 이북의 습지에 자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핀다. 남한에서는 드물게 발견되는 희귀식물이며, 월정사 부근 계곡에 분포한다.
월정사 입구의 전나무숲은 오대산의 숲을 대표할 만하다. 수령 100~500년이나 되는 아름드리 전나무 1백만 여 그루가 250만 평의 짙푸른 숲을 만들어내고 있는 모습에 감탄이 절로 난다. 낮에도 어두컴컴할 정도로 짙은 그늘을 만드는 전나무숲 사이로 난 산책로와 숲속에 자리 잡은 큰스님들의 부도밭은 자연의 신비감, 그리고 숲과 사람의 조화를 실감하게 한다.

더욱이 이 전나무숲 부근에서는 여간해서 만나기 어려운 귀한 풀꽃 하나가 발견된다. 좀개미취라는 국화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백두산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지만, 남한에서는 영월, 태백산 등지에서만 발견되는 북방계 희귀식물이다. 8월10일경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데, 한 포기에 여러 개의 머리 모양 꽃이 달려서 아름답기 그지없다. 오대천 계곡을 따라서 분포, 훼손되기 쉬운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하루 빨리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 종에 대한 보전의 중요성을 깨달아 보전대책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밖에도 월정사 부근의 길가와 숲속에는 매화노루발, 은대난초, 여우오줌, 왕고들빼기 등이 자라고 있다.

▲ 할미밀망 - 중부 이남의 숲 가장자리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낙엽 덩굴나무로 꽃은 6~8월에 핀다. 꽃이 3개씩 모여 달리며, 사위질빵에 비해서 줄기가 굵다.
월정사에서 오대천을 따라 상원사쪽으로 올라가는 동안에는 신갈나무, 소나무, 전나무, 분비나무, 까치박달, 난티잎개암나무, 피나무, 고로쇠나무 등의 나무가 관찰되며, 풀로는 환삼덩굴, 쇠별꽃, 모시물통이, 이삭여뀌, 가시여뀌, 동의나물, 눈괴불주머니, 눈개승마, 짚신나물, 물봉선, 기름나물, 애기괭이눈, 바늘꽃, 초롱꽃, 진득찰, 고려엉겅퀴, 두메고들빼기, 각시둥굴레 등이 나타난다.

한편, 오대천을 따라 난 도로를 통해 차량 출입이 가능한 이곳에는 애기수영, 소리쟁이, 흰명아주, 붉은토끼풀, 토끼풀, 달맞이꽃, 돼지풀, 미국가막사리, 지느러미엉겅퀴, 개망초, 뚱딴지, 원추천인국, 겹삼잎국화, 서양민들레 등의 귀화식물도 침입해 자라고 있다.

▲ 산외 - 중부 이북의 높은 산 숲 가장자리에 자라는 박과의 한해살이풀로 덩굴지어 자라며, 꽃은 8~9월에 핀다. 두 갈래로 갈라진 덩굴손이 다른 물체를 감고 올라간다.
오대산의 전나무숲은 상원사 부근에서도 한 번 더 발달한다. 이곳의 전나무숲에는 숲 밑에 귀한 풀꽃도 많이 자라고 있다. 참개별꽃,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꿩의바람꽃, 매발톱꽃, 점현호색, 태백제비꽃, 당개지치, 산외, 노랑무늬붓꽃, 연령초, 관중 등이 전나무숲 속 곳곳에서 발견된다.

오대산의 숲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전나무숲을 이루는 전나무는 북쪽에 고향을 둔 북방계 침엽수로서, 남한에서는 지리산, 소백산, 태백산, 설악산 등 높은 산에서만 자생한다. 설악산의 경우에는 해발 800m쯤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해발 1,300m쯤 되어 분비나무로 대치될 때까지 생육한다. 백양사 등 고도가 낮은 곳에 위치한 사찰 주변에서도 전나무 노거수를 만날 수 있는데, 자연적인 분포는 아닌 듯하고, 사찰을 통해 오래 전에 전래된 듯하다.

▲ 흰송이 풀 - 전국의 높은 산에 자라는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핀다. 홍자색 꽃이 피는 송이풀과는 달리 흰 꽃이 피므로 품종으로 구분한다.
오대산의 경우, 월정사나 상원사는 해발고도가 700~900m나 되므로, 자연적인 분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월정사 주변의 전나무숲은 이곳에 전나무만이 순군락을 이뤄 자라는 것으로 보아 천연림은 아닌 듯하다. 이 전나무 숲은 자연적인 것에 인위적인 관리가 보태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오대산 전체로 보면 전나무숲은 너른 품세, 그것도 바위가 거의 없는 대표적인 육산(肉山)인 오대산이 가꿔내는 숲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전나무 군락뿐만 아니라 굴참나무 군락, 피나무 군락, 고로쇠나무 군락, 당단풍나무 군락, 사스래나무 군락, 서어나무 군락 등 여러 큰키나무들이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서도 참나무의 일종인 신갈나무가 오대산 전역에 걸쳐 가장 광범위하게 분포하며, 특히 고지대 능선에는 어김없이 이 숲이 발달해 있다. 비로봉의 주변의 능선과 사면, 진고개에서 노인봉 일대의 해발 1,000~1,200m에는 신갈나무가 순군락에 가깝게 무리를 지어 자라고 있다. 또한 저지대와 바위지대에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명개리 계곡, 월정사, 호령봉 등 해발 500~1,000m 지역에 주로 분포한다.


높낮이 없는 고산능선에 아름드리 활엽수가 숲 이뤄

▲ 냉초 - 추풍령 이북의 높은 산에 자라는 현삼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6~8월에 핀다. 잎이 마주나는 꼬리풀 종류들과는 달리 3~9장씩 돌려나므로 구분된다.
주봉인 비로봉 일대에는 점현호색, 왜현호색 등이 큰 무리를 지어 자라며, 이밖에도 요강나물, 누른종덩굴, 꿩의바람꽃, 양지꽃, 산꼬리풀, 냉초, 털쥐손이 등이 자라고 있다. 비로봉에서 백두대간까지 이어지는 오대산 주능선에 자라는 식물들은 오대산의 특징적인 식물상을 대변해 준다. 비로봉에서 북대사나 두로령까지 가는 동안에 오대산의 귀한 식물 대다수를 관찰할 수 있고, 능선에는 키 작은 떨기나무숲이 발달하는가 하면, 오대산이 자랑하는 신갈나무가 주종을 이루는 낙엽활엽수림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비로봉에서 상왕봉까지의 능선에는 키 작은 나무들이 숲을 이룬 떨기나무숲과 큰키나무로 된 낙엽활엽수림이 함께 발달한다. 비로봉에서 상왕봉쪽으로 주능선을 따라 헬기장이 있는 봉우리(1,539m)에 이르는 능선에는 떨기나무숲이 이어진다. 해발 1,500m가 넘는 지역으로 이곳에서는 신갈나무도 떨기나무처럼 키를 낮춘 채 자라고 있으며, 민둥인가목, 산개벚지나무, 백당나무, 매발톱나무, 진달래, 만병초, 시닥나무, 꽃개회나무, 나래회나무 등의 떨기나무가 숲을 이뤄 자라고 있다. 고산성 침엽수인 주목도 여러 그루 발견된다.

▲ 투구꽃 - 전국의 산에 자라는 미나리아재비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8~10월에 핀다. 투구처럼 보이는 부분은 꽃받침이며, 작은 꽃잎 2장이 꽃받침 속에 들어 있다.
이곳의 숲 밑에 자라고 있는 풀로는 투구꽃, 요강나물, 홀아비바람꽃, 숙은노루오줌, 광릉갈퀴, 광대수염, 둥근이질풀, 냉초, 흰송이풀, 소경불알, 두메고들빼기, 연령초, 감자난초 등이 있다.

떨기나무숲이 끝나도 능선은 고도 1,400m 이상을 유지하며 상왕봉까지 이어진다. 높낮이가 거의 없어 콧노래 부르면서 걷기에 좋은 능선이 1.5km쯤 계속해서 이어진다. 이 능선은 평탄할 뿐만 아니라 아름드리 활엽수들이 짙은 숲을 만들고 있어 어디 딴 세상에라도 든 듯한 느낌을 준다. 한여름에 산행을 하더라도 시원한 그늘 속을 걸으며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그런 숲길이 이어진다.

▲ 개벚지나무 - 강원도 이북의 높은 산 계곡 근처에 드물게 자라는 장미과의 큰키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상원사 부근의 오대천 상류에 몇몇 그루가 자라고 있다.
이 숲은 신갈나무가 주종을 이루면서도 피나무와 주목 노거수들이 가끔씩 나타나고, 층층나무, 당단풍나무, 돌배나무, 산벚나무 같은 큰키나무들이 섞여 자라고 있다. 숲의 중간층에는 철쭉나무, 꽃개회나무, 백당나무, 회나무, 물참대 등이 자라고 있다. 숲 바닥에는 흰진교, 투구꽃, 촛대승마, 터리풀, 노루오줌, 모싯대, 금강초롱꽃, 서덜취, 당분취, 연령초, 감자난초 등이 생육하고 있다.

상왕봉에서는 노랑무늬붓꽃이 발견된다. 환경부가 법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는 보호식물로서, 오대산에서 처음 발견되어 기록되었다. 이 식물의 라틴어 학명에는 ‘오대산에 자라는’ 또는 ‘오대산에서 발견된’이라는 뜻을 가진 ‘odeasanensis’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오대산에서는 이곳 외에도 몇몇 곳에서 더 발견되며, 주왕산, 소백산, 태백산을 비롯한 중부 이북의 여러 산에 분포한다. 처음에는 우리나라에만 분포하는 특산식물로 알려졌지만, 최근 중국 만주 일대에서도 발견되어 중국 식물도감에도 기록된 바 있다.

▲ 새며느리밥풀 - 지리산 이북의 높은 산에 자라는 현삼과의 한해살이풀로 꽃은 8~9월에 핀다. 꽃이 필 때 주변의 꽃싸개잎도 꽃과 더불어 빨갛게 변한다.
상왕봉에서 446번 지방도가 뚫려 있는 두로령까지의 능선에도 짙은 숲이 발달해 있다. 특히 이곳은 녹지자연도(綠地自然度) 9등급에 해당하는 숲으로서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 녹지자연도 9등급은 극상림에 해당하는 자연림으로, 남한의 산지 중에는 설악산 등 몇몇 곳에만 볼 수 있는 녹지자연도 최상 등급이다.

극상림은 식물사회가 오랜 세월에 걸쳐 변화하는 천이단계에서 맨 마지막에 볼 수 있는 숲의 형태로서 먹이그물이 복잡하게 얽혀 있고, 외부 교란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태계다. 또한, 생산량과 소비량이 비슷한 단계이고, 생물다양성의 매우 높은 특징을 보인다. 보전적인 측면에서 국가적으로 보아 절대적으로 보전해야 할 보전순위 1등급에 해당하는 지역이라 할 수 있다. 오대산의 이 극상림에는 사스래나무, 신갈나무, 피나무 등의 활엽수와 전나무, 잣나무, 분비나무, 주목 등의 침엽수가 섞여 자라고 있다.

숲의 중간층에는 함박꽃나무, 매발톱나무, 백당나무, 철쭉나무, 붉은병꽃나무, 물참대, 까치밥나무 등이 생육하고 있다. 풀로는 눈개승마, 벌깨덩굴, 눈빛승마, 산꿩의다리, 동자꽃, 꿩의다리아재비, 투구꽃, 미나리냉이, 네일갈퀴나물, 터리풀, 노랑제비꽃, 광대수염, 금마타리, 금강초롱꽃, 단풍취, 삿갓나물, 연령초, 금강애기나리, 풀솜대, 두루미꽃, 박새, 은방울꽃 등이 자란다. 이들 나무와 풀 가운데 많은 것들이 고산식물 또는 북방계 식물로서 오대산이 높은 고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생육이 가능한 것들이다.


톱바위취로 오인하는 특산식물 구실바위취

두로령에서 446번 지방도를 타고 상원사쪽으로 내려가면서 오대천 최상부 사면의 식물상을 엿볼 수 있다. 두로령에서 북대사 부근까지 가는 길가에서 금강초롱꽃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밖에도 눈빛승마, 흰진교, 투구꽃, 눈개승마, 도깨비부채, 선괭이눈, 참당귀, 물레나물, 송이풀, 큰용담 등을 길가에서 볼 수 있다.

▲ 금강초롱꽃 - 중부 이북의 높은 산에 자라는 초롱꽃과의 여러해살이 특산식물로 꽃은 8~10월에 핀다. 오대산에서는 북대사 부근에서 많은 개체가 자라고 있다.
북대사에서 상원사까지에는 갯버들, 난티나무, 쉬땅나무, 다릅나무, 풀싸리, 고추나무, 복장나무 등의 활엽수가 자라고 있으며, 병조희풀, 물양지꽃, 구실바위취, 노랑물봉선, 개시호, 참좁쌀풀, 등골나물 등의 풀을 관찰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구실바위취는 학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식물이다. 높은 산의 계곡가나 습한 사면에 드물게 자라는 범의귀과의 여러해살이풀로, 잎은 바위떡풀의 둥근 잎을 닮았다. 학자들조차 백두산 등지에 자라는 톱바위취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국립공원 자연자원조사에서 종종 톱바위취로 잘못 기록되는 식물이다.

▲ 광릉갈퀴 - 한반도와 일본에 자라는 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꽃은 6~8월에 핀다. 오대산 숲속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며, 어린 줄기와 잎을 나물로 먹는다.
톱바위취는 남한에 분포하지 않는 식물이며, 구실바위취는 우리나라 특산식물로서 백두대간의 소백산, 응복산, 점봉산, 한북정맥의 광덕산, 복주산, 강원도의 방태산 등지에서 생육을 확인한 바 있다. 필자도 10여 년 전 응복산에서 이 식물을 처음 발견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사진으로 발표할 때, 톱바위취로 잘못 인식한 적이 있다. 1996년 발간한 필자의 저서 <꽃산행>에서도 같은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많은 이들이 구실바위취를 톱바위취로 오인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현재까지 알려진 자료를 종합할 때, 오대산에서 보호해야 할 식물로는 속새, 등칡, 누른종덩굴, 할미밀망, 세잎종덩굴, 나도바람꽃, 홀아비바람꽃, 너도바람꽃, 세잎승마, 구실바위취, 도깨비부채, 개벚지나무, 산개벚지나무, 민둥인가목, 생열귀나무, 청시닥나무, 산겨릅나무, 부게꽃나무, 금강제비꽃, 금마타리, 산외, 회목나무, 만병초, 꽃개회나무, 소경불알, 금강초롱꽃, 노랑무늬붓꽃, 좀개미취, 금강애기나리, 말나리, 산마늘, 연령초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이밖에도 환경부의 멸종위기종인 한계령풀이 생육하고 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에 대한 정밀조사와 함께 보전대책을 세워야 할 것이다.

▲ 인가목조팝나무 - 태백 이북에 드물게 자라는 장미과의 떨기나무로 꽃은 5~6월에 핀다. 높이 1m쯤이며, 가지가 많이 갈라지고 어린 가지에 뚜렷한 능선이 있다.
오대산에 분포하고 있는 식물은 최근 조사에서 468종류로 조사되었다. 학술적 증거로 쓰이는 확증표본이 모두 확보된 것만을 센 것이나 일단은 믿을 만한 숫자다. 하지만, 조사기간, 인력, 예산 등이 불충분한 상태에서 이루어진 결과이므로 이것이 오대산 식물의 전모를 밝혔다고 할 수는 없다. 오대산의 몇몇 골짜기들은 아직도 사람의 발길을 거부한 채 원시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이런 곳의 조사를 포함하여 오대산 식물에 대한 정밀조사가 이루어지면 800~1,000종류의 식물이 오대산 식물목록에 올려질 것으로 추정된다. 관리공단, 식물분류학자들, 아마추어 식물연구가들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글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koreanplant.info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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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지명

가라매 고을의 다섯 봉우리 오대
오대산의 대(臺)는 단순히 봉(峰)의 의미

강줄기가 좁은 골 지나 활짝 열린 곳
굽이진 곳 백 길 높이 자리한 선원(禪院)
맑은 물엔 하얀 자갈 환히 보이고
오솔길엔 푸른 이끼 온통 뒤덮였구려
세상을 그냥 초월하면 그만인 것을
뭣 때문에 오대산을 굳이 가려 하시는고
동쪽 개울에 병들어 누운 거사님
한 해 쉬고 돌아올 그대를 기다림세
(江出峽門開 / 禪房百尺외 / 淸流分素礫 / 細逕入蒼苔 / 直可超三界 / 何須向五臺 / 東溪病居士 / 遲汝隔年回)
-이식(李植)의 택당집(澤堂集)에서(울암 鬱巖에서 노닐 적에 오대산으로 들어가는 혜종 惠宗 선사에게 작별 선물로 준 시. 울암은 지금의 강원도 원주 지정면 월송리의 한 지명)


문헌에 나타난 오대산의 이름 유래

옛 문헌들에서는 강원도의 오대산을 ‘오대산(五臺山)’으로 쓴 것 외에 뒷음절 산을 뺀 오대로 쓴 것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즉, 대(臺) 자체를 그대로 산이란 말에 대신한 것이다. 대동여지도에서는 대를 굴(窟), 덕(德)과 함께 산지 지명에 포함시켰다. 이 지도에서는 대가 무려 96개나 나온다.

산지에서 고원이나 대지(臺地)에 해당되는 지명이 바로 대와 덕이다. 즉, 대는 경포대(鏡浦臺·강릉), 강경대(江景臺·논산), 낙수대(落水臺·안동)와 같이 정자를 지을 수 있을 정도의 야산을 뜻한다. 덕은 오늘날의 고원을 뜻한다. 고원이라는 용어는 조선시대엔 별로 사용치 않았으므로 학자들은 덕을 고원의 개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고 있다.

대의 사전적인 의미는 ①차나 항공기, 기계 같은 것의 수를 세는 데 쓰는 말, ②수, 연수(年數), 액수 따위의 다음에 쓰여 그 대체의 범위를 나타내는 말, ③(흙, 돌 등으로 높이 쌓아 올려) 사방을 바라볼 수 있게 만든 곳, ④물건을 받치거나 올려놓는 물질의 통틀어 일컬음 등이다.

땅이름에서 대의 뜻은 ③에 해당할진대, 이것은 옛 사람들이 흔히 생각해 왔던 뜻과는 좀 거리가 있는 것 같다. 대(臺)의 한자는 형성문자로, 土(토)와 高(고)의 생략 글자인 至(지)가 합쳐진 것이다. 즉, 흙을 높이 쌓고, 사람이 올 수 있게 만든 전망대란 뜻으로 만들어진 글자로 보인다(台를 臺의 약자로 쓰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오대산이란 이름에서의 대는 위의 자원(字源) 설명처럼 ‘사람이 올 수 있게 만든 전망대’란 의미는 아닐 것이다. 여말선초의 학자이며 문신인 권근(權近·1352-1409)은 오대산의 이름 유래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강원도의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함께 우뚝하다. 크기가 비슷하면서 고리처럼 벌렸는데, 세상에서는 오대산(五臺山)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의 가운데 것은 지로(地爐), 동쪽은 만월(滿月), 남쪽은 기린(麒麟), 서쪽은 장령(長嶺)이라 하며, 북쪽은 상왕(象王)이라 한다. 드디어 오류성중(五類聖衆)이 항상 머문다는 말이 있고 불가에서 성대히 칭송하지만, 우리 유가에서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자세하게 적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오대산이란 이름은 다섯이라는 뜻과 산(봉우리)의 뜻인 대가 합쳐져 나온 이름임은 두말할 것이 없다. 다시 말하지만, 여기서의 대는 인공적인 것이 아닌, 자연적인 것임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사전적인 뜻처럼 꼭대기가 평탄해서이거나 야산의 뜻으로 대를 취한 것도 아니다. 편하게 말한다면, 오대산은 오봉(五峰)과 뜻이 거의 같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 두로봉 동쪽 상공에서 본 오대산. 앞쪽 능선이 두로봉 부근의 백두대간 마루금이고, 그 뒤로 한강기맥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들이 펼쳐졌다.

‘가라매’로 불렸을 오대산 일대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오대산 일대의 고을 이름이 지산현(支山縣)으로 나온다. 즉, 지금의 강릉시 연곡면, 사천면, 주문진읍 일대를 그렇게 불렀는데, 이 이름은 고려시대에 와서 연곡현(連谷縣)으로 바뀐다. 즉, 지(支)가 연(連)으로 대역되었고, 산(山)이 곡(谷)으로 대역되었음을 알 수 있다. 연곡현은 뒤에 강릉(명주) 고을에 속한 연곡면으로 되었고, 이 이름은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강릉시의 한 면이름으로 자리잡는다.

한자가 보편화되지 않았던 삼국시대 이전에는 모든 고을이 거의 순 우리말 이름으로 불렸을 것이다. 당시에 한글이 있었다면 당연히 이를 제대로 표기했을 것이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았던 우리 조상들은 뒤에 이를 문자화할 때 어쩔 수 없이 한자를 빌어 표기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토박이 땅이름들이 소리빌기(음차)나 뜻빌기(의차)의 한자 옷을 입고 후세에 전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당시의 한자 지명을 잘 뜯어 풀어나가 보면 그 원이름을 어렴풋이나마 알아낼 수가 있다.

오대산 일대의 삼국시대 지명 지산과 고려시대의 지명 연곡을 결부시켜 보면 이곳의 원래 땅이름은 가라매 또는 갈매,갈메일 가능성이 짙다. 지(支)는 재의 음차로 쓰인 경우가 많지만, 여기서는 뒤에 연(連)이 지(支)에 바탕을 두었을 것으로 보아 ‘갈’ 또는 ‘가라’라는 원말을 유추할 수 있다.

갈은 갈라짐 또는 연달아 이어짐을 뜻한다. 따라서, 가라매(갈매)는 갈라져 나간 산, 또는 산이 이어져 나간 줄기(支脈)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한다. 실제 지형을 보더라도 오대산 일대에서 큰 산줄기가 서쪽으로 크게 갈라져 나와 있다. 동해안쪽으로 이어져 내린 백두대간이 오대산 부근에 큰 산무리를 만들고, 여기서 서쪽으로 큰 산줄기를 뻗혀 계방산, 태기산, 금물산, 용문산, 유명산 등의 봉우리를 솟구며 남한강과 북한강의 분수령을 만들고 있음을 본다.

지산 또는 가라매라는 이름이 꼭 산줄기를 크게 가른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어떻든 이 이름이 오대산의 지형과 관련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지형과 거리가 먼 산맥 이름들

오대산에서 산줄기가 길게 갈라져 나갔음을 얘기한 김에 산맥(山脈)이라는 명칭과 관련해서 언급할까 한다. 우리 한반도의 큰 동맥이라 할 수 있는 백두대간은 개마고원을 따라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동해안을 따라 동남쪽으로 뻗어 내리고, 태백산 부근에서 다시 서남쪽으로 꺾여 멀리 남해안 끝까지 닿는다. 따라서, 지금의 남해안의 한 산줄기에서 백두대간을 따라 계속 북쪽으로 가면 어느 하천도 건너지 않고도 백두산에 이르게 된다.

우리가 지금까지 익히 배워 온 산맥의 이름들은 장백, 마천령, 함경, 낭림, 강남, 적유령, 묘향, 언진, 멸악, 마식령, 태백, 추가령(구조곡), 광주, 차령, 소백, 노령산맥 등이었다.

이 이름들은 일본의 지질학자 고토 분지로(小藏文次郞)가 1903년에 발표한 <조선의 산악론>에 기초하여 일본인 지리학자 야스 쇼에이(失洋昌永)가 재집필한 <한국지리>라는 교과서에 기인한다.

이 산맥 이름들은 지질구조선 즉, 암석의 기하학적인 모양, 이것들의 삼차원적 배치의 층층을 기본선으로 한 것으로 땅속의 맥 줄기를 산맥의 기본개념으로 한 것이다. 예를 들면, 광주산맥은 금강산 북쪽에서 시작하여 북한강 상류를 건너 북한산에 이르고, 다시 남쪽으로 한강을 건너 관악산과 광교산으로 이어 놓고, 차령산맥은 설악산과 오대산 근처에서 시작되어 남한강을 건너 금강 하류를 끼고 돌아 대천 뒤쪽으로 이어 놓고 있다. 즉, 이러한 지도로만 보면 많은 산맥들이 강이나 내를 건너뛰고, 능선과 능선을 넘나들고 있다.

일제 때는 산맥이라는 개념 자체를 땅 위의 어떤 선상(이어짐)을 기준하지 않고 땅속의 구조선을 기준하고 있어 우리 조상들의 산경-수경 개념과는 전혀 달랐다. 쉽게 얘기하면, 우리 조상들은 땅의 모양(지형)을 기초로 하여 산줄기를 이어 표시한 데 반해 일본인은 땅의 성질(지질)을 따라 선을 이어나가 이를 광주산맥, 차령산맥 식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일제 이후부터 최근까지 교과서를 통해 익혀온 여러 산맥들 중에는 그것이 우리 옛 지도에서 어느 정맥에 해당한다는 식의 논리로 말하기 어려운 것이 많다.

한 세기 전의 낡아빠진 한 학설이 ‘우리’라는 ‘채’에 아직도 전혀 걸러지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우리 땅의 산줄기와 아무 관계도 없이, 우리 생활과 아무 관계도 없이, 그리고 자연지리의 활용면에서도 별 도움 없이 지금도 학교에서 그대로 교육하고 있어 이의 시정이 시급하다(북한에서는 지리 용어로 산맥 대신 산줄기란 말을 사용한다. 따라서, 북한 지도에서는 □□산맥 식의 이름은 없다).


도선에 의해 ‘대간’이란 낱말 처음 나와

대간(大幹)이란 말은 고려 초(10세기 초)에 유명한 풍수가이며 승려인 도선(道詵)에 의해서 최초로 언급되었다. 그러나, 백두대간을 의미하는 대간(大幹)이란 말이 문헌에 처음 나타난 것은 이중환의 택리지(1751)다. 그리고, 백두대간이라는 고유명사적 용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그 10년쯤 후인 1760년경 이익(李瀷)의 성호사설에 의해서였다.

그 뒤, 산경표(1770년경)의 저자 신경준은 백두대간의 산줄기 상황을 보다 상세화하고 표로써 제시하였다. 그에 의해서 백두대간이란 용어는 당대에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그 대간의 구체적 내용도 알기 쉽게 체계화되었다. 그 후에도 다산 정약용이 그의 대동수경(大東水經)(1814)에서 백산대간(白山大幹)이 풍수지리 상의 용(龍)에 해당된다며 백두대간에 관해 언급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산맥이란 말을 써오기는 했지만, 일반인들은 산줄기란 말을 더 많이 써 왔다. 풍수에서는 지맥(地脈)이란 말을 많이 써왔는데, 이것은 산맥이라는 개념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산맥이란 말을 지금의 우리 국어사전에서는 ‘산맥=산줄기(산지가 좁고 길게 연속되어 있는 지형)’, ‘산줄기=뻗어나간 산의 줄기. ‘산발’과 같은 말‘로 풀이해놓고 있다. 즉, 산맥의 사전적 의미는 이처럼 버젓이 지형과 결부하여 정의되어 있다. 이러한 지형적 의미의 산맥이라는 단어 앞에 광주니 차령이니 하는 지명을 달아, 지형적이 아닌 지질적으로 설명되는 그 줄기들에 광주산맥이니 차령산맥이니 하는 고유명사를 만들어 붙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것이 지표면의 줄기가 아닌, 지하의 줄기(지질맥)임에도 실제의 산줄기가 그렇게 지나고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차령산맥이라고 하면 사실상 지하의 맥을 기본으로 한 것임에도 차령을 지나는 산줄기(지상의 줄기)로 인식하게 만든 것이다.

요즘 학계에서 백두대간, 한북정맥, 호남정맥 식의 산줄기 이름을 공식화하자는 주장이 일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학자들은 우리 조상의 지형 개념인 산줄기 개념이 보다 과학적이고, 산줄기 이름이나 모든 지리 용어가 일본식으로 된 점을 지적하고, 지금부터라도 교과서를 우리식으로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러는 한북정맥이니 금남정맥이니 하는 것이 단순히 강을 기준으로 붙여진 것이어서 합당치 않다며 아예 새로운 이름을 붙이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만한 일이다.


사라진 차령산맥, 그 진실은?

10여 년 전 나는 회원들(한국땅이름학회 한강탐사반)과 함께 남한강의 발원지인 강원도 태백시에서부터 한강 줄기를 따라, 도보로 또는 고무보트를 타고 경기도 김포의 한강 하구까지 답사한 일이 있다. 물줄기만 따라 탐사했으므로, 즉 물의 흐름을 따라 계속 흘러내려가기만 했으므로 우리 일행이 작은 고개 하나라도 넘었을 리 없다.

그런데, 따라간 물줄기를 우리가 보통 보아온 지도로 보니 두 개의 산줄기를 넘은 것이 아닌가. 그 하나는 경기도 여주 부근에서의 차령산맥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리시와 광주땅을 잇는 광주산맥이었다. 분명히 지도상에서는 이 두 산줄기가 우리 일행이 지난 남한강 줄기를 가로지르고 있었던 것이다(당시 살펴본 지도는 국립지리원에서 발행한 지형도였다).

이 어찌 된 일인가? 지도가 이렇게 된 것은 지도 속에 표시된 산맥이 지형에 따라 그려진 것이 아님을 답사를 통해서도 확실히 알게 된 나는 우리 조상들이 그린, 산줄기를 평지에까지 올바르게 지형적으로 자세히 그려낸 옛 지도의 가치를 더욱 높이 사게 되었다.

2005년 1월14일 KBS 뉴스를 통해 ‘사라진 차령산맥, 그 진실은’이라는 제목으로 산맥지도에 관한 보도가 나간 일이 있었다.

-앵커 : 최근 국토연구원이 새로 발표한 산맥지도가 논란과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있습니다. 차령산맥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교과서에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처럼 쓰여졌던 차령산맥이 왜 없다는 것일까요? 그 근거를 김태욱 기자가 추적해 봤습니다.
-기자 : 강원도에서 충청도까지 한반도 남쪽을 가로질러 이어지고 있다는 차령산맥. 하지만 이번에 국토연구원이 새로 발표한 산맥지도에는 이런 산줄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KBS 항공 1호기는 지금 차령산맥이 태백산맥으로부터 갈라져 뻗어나가기 시작하는 지점으로 알려져 있는 오대산 상공을 날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차령산맥 방향인 서남쪽으로 계속 내려가 보겠습니다. 북쪽에 보이는 설악산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차령의 중간 기착지라는 치악산이 구름 사이로 수줍게 봉우리를 드러냅니다. 굽이굽이 이어진 오대산 줄기를 따라 계속 내달리다 보면 어느새 치악산 정상이 눈앞입니다. 하지만, 산을 넘어서자마자 산세가 눈에 띄게 작아집니다. 이 낮은 구릉지대마저 곧 남북을 관통해 흐르는 남한강에 가로막히고 맙니다.
-김송걸(KBS 항공 1호기 기장) : 이거 맥이 끊어진 거야.
-기자 : 위에서 보면 확실히 끊긴 거예요?
-김송걸 : 끊겨 있지.
-기자 : 이곳 남한강을 만나면서 오대산에서부터 치악산을 넘어 이어져 내려오던 산줄기는 완전히 맥이 끊겼습니다. 충청도까지 길게 가로질러 있다던 차령산맥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처럼 산맥과 실제 지형이 서로 다르다는 주장은 산악인들 사이에서는 오래 전부터 제기되어 왔습니다.
-현진상(산악인·<한글 산경표> 저자) : 산악체계의 지도로는 산을 다닐 수가 없습니다. 고지도에 나타난 산줄기대로라면 얼마든지 종주가 가능합니다.
-기자 : 실제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우리의 대동여지도나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이 끊김 없이 이어지는 반면, 차령산맥은 아예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체적인 산맥 모습도 새 산맥지도와 거의 일치합니다. 일본인 지질학자가 현재 산맥체계를 만든 시기는 산경표보다 100년이나 후대인 1903년. 과거에 없었던 차령산맥이 갑자기 생겨나게 된 이유는 뭘까?
-양보경(성신여대 지리학과 교수) : 지리학계에서는 지질구조라든가 또 여러 가지 단층선, 이런 것에 의거해서 교과서에서 활용을 해 왔었던 거죠.
-기자 : 강으로 단절돼 있더라도 같은 지질구조를 가졌기 때문에 한 산맥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국토연구원의 조사 결과 근거 없는 주장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김영표(국토연구원 CJS연구센터장) : 한반도의 산이 지질 구조로 돼 있는지 한번 살펴봤습니다. 살펴보니까 지질 구조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기자 : 오히려 애초부터 조사 자체가 빈약했거나 잘못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김영표 : 망아지 4마리와 인부 6명을 데리고 가서 우리나라 전부를 답사했다고 하는데, 14개월 동안 답사해 봤자 얼마나 답사를 했겠습니까?
-기자 : 결국 우리 지리학계가 지난 100년 동안 아무 비판이나 검증 없이 일본인이 만든 산맥지도를 받아들여 후대에 가르쳐온 셈입니다. 이 때문에 혈맥처럼 이어진 백두대간은 허리가 끊겼고, 있지도 않은 차령산맥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정용미(환경운동연합 백두대간 보전팀장) : 사실 80년대부터 산맥체계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져 왔었는데, 정부나 학계에서 노력을 게을리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기자 : 이번 새 산맥지도의 발표가 우리 산의 본모습을 되찾았다는 기쁨보다 더 큰 충격과 허탈감을 주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KBS뉴스 김태욱입니다.
이러한 주장이나 흐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 주위에 맴도는 산맥 관련 지식은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일부 학계의 입김이 워낙 거세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오대산과 차령이 직접 손잡았다고?

▲ 예부터 한강의 상징적 발원지로 알려진오대산 우통수.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보면 차령산맥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해 놓고 있다.
‘태백산맥은 힘찬 기세로 금강산, 설악산을 지나 대관령, 소백산, 태백산으로 이어지는데, 태백산맥이 대관령을 넘기 전에 곁가지 하나를 늘어뜨린다. 이것이 바로 차령산맥으로, 이 산맥은 치악산을 걸쳐 충청남북도를 관통해 서해의 대천 앞바다로 이어지는 성주산에서 마감한다. 태백산맥이 차령산맥으로 갈려나가는 지점, 즉 차령산맥의 발원지가 되는 곳에 우뚝 솟은 산이 바로 오대산이다.’

즉, 오대산에서 가지를 친 차령산맥이 서해안까지 직접 달려갔다는 것이다.
‘충남 예산군 신양면과 공주시 유구읍 경계에 있는 고개 높이 240m, 예산 남동쪽 11km, 공주 북서쪽 22km 지점으로, 동국여지승람에는 차유령으로 기록되어 있다. 차령산맥을 넘는 고개로 양장로를 이루며, 남금강의 지류인 유구천과 북서류하는 무한천이 이곳에서 발원하며, 두 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높이 180m, 공주 북쪽 22km, 천안 남쪽 16km 지점으로 차령산맥을 넘는 고개이다. 예로부터 이 고개를 경계로 하여 호서와 호남지방을 지방을 구획해 왔으며, 금강의 지류인 정안천과 곡교천이 여기서 발원하여 두 하천의 분수령이 된다.‘

이것은 공주시의 한 농협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에서의 ‘차령’ 설명 내용.
그러나, 지형 상으로 차령산맥은 실제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우리는 지금의 지형도에서 오대산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충남의 서해안까지 닿는 산줄기를 접하게 되는데, 실제 등고선을 따라 선을 그려 나가 보면 그러한 차령산맥의 선이 절대로 그려질 수 없다.

위에서 언급한 성주산, 차령 등의 산과 고개가 있는 곳은 대동여지도 상에서 보면 금북정맥이다. 이 정맥은 백두대간 속리산에서 북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한 맥으로, 죽산(안성)의 칠현산에서 시작하여 경기도 안성, 충청도의 공주, 천안, 청양, 홍주, 덕산, 태안의 안흥진에 이어지는 금강 북쪽의 산줄기다. 즉, 오대산에서 뻗어 내려왔다는 종래의 차령산맥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충청북도와 경계를 이루는 차령산맥에는 서운산(瑞雲山·547m)을 최고봉으로 500m 안팎의 산지가 솟아 있고, 이 산맥 중의 덕성산(德成山·519m)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칠현산(七賢山·516m), 칠장산(七長山·492m), 도덕산(道德山·366m) 등이 솟아 있으며, 이들 산지가 형성하는 능선을 따라 안성시는 동서 2개의 지형구로 나누어진다. 또한 북쪽 용인시 경계 부근에는 구봉산(九峰山·465m), 비봉산(飛鳳山), 쌍령산(雙嶺山) 등의 구릉성 산지가 이어진다. 그러나, 군의 남서쪽과 북동쪽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지는데 특히 남서쪽의 안성평야는 넓고 비옥하다.’

여행 관련의 한 홈피에서도 경기도 안성시 부분에서 이처럼 차령산맥을 설명하며 거기에 속한 여러 산들을 들고 있는데, 사실 이들 산이 모두 금북정맥과 한남정맥에 있는 것이지, 오대산쪽에서 남서쪽으로 길게 뻗어 한강을 넘어온다는, 실제 있지도 않은 차령산맥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백두대간 중의 오대산은 산과 물의 관계에서 두 가지의 큰 의미를 지닌다. 하나는 이 산에서 갈라져 나간 산줄기가 남한강과 북한강의 유역권을 구분지어 놓은 것이고, 또 하나는 그 한강물의 발원지가 되어 준다는 점이다. 실제, 물줄기의 길이로 보아서는 오대산에서 나온 물줄기가 한강의 발원지라고 보기 어려우나, ‘큰 강은 명산(名山)에서 그 물줄기를 시작한다’는 옛 사람들 생각에 근거하여 보면 이 산은 분명히 한강의 상징적 발원지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배우리 한국땅이름학회 명예회장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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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대간 대장정 제21구간 / 두로봉] 풍수


유물은 제 자리에 있어야 제 구실 한다
삼재불입지처의 사고(史庫)와 비룡입수의 적멸보궁

▲ 사고 원경. 선조 39년(1606년)에 이 지역이 물, 불, 바람의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길지라고 하여 사각과 선원보각을 건립하고, 왕조실록과 선원보략(璿源譜略·조선왕실 족보)을 이관하였다.
일제 강점기인 1913년에 조선총독부가 조선왕조실록을 동경대학 도서관으로 반출한 불행한 사건이 있었다. 더욱이 1923년에 관동대지진으로 인하여 도서관에 소장된 장서와 함께 조선왕조실록도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만 대출되어 화재를 모면한 27책이 1932년에 경성제대(현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편입되었고, 이번에 동경대학 도서관에 반납되었던 47책을 지난 7월 서울대학교에서 환수했다.

▲ 오대산 적멸보궁. 풍수지리 상으로는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 즉 비룡함주(飛龍含珠) 형국이다.
조선왕조실록은 태종 13년(1413)에 태조실록을 편찬하면서 시작되었으며, 세종 때에는 동활자로 4부를 인쇄하여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하여 충주사고, 성주사고, 전주사고에도 보관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를 제외한 실록은 모두 소실되었다.

임진왜란 후 1부밖에 없는 왕조실록을 안전하게 보존하기 위하여 당시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건에서도 1603년부터 3년에 걸쳐 전주사고본을 저본으로 실록을 인쇄하여 춘추관(1623년 이괄의 난으로 소실)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정족산, 봉화의 태백산, 무주의 적상산, 평창의 오대산의 사고에 각각 1부씩 분산하여 보관하였다.

돌아온 조선왕조실록

조선왕조실록은 본래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1392∼1803)의 모든 분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역사서다. 최고의 통치자이며 막강한 권력을 가졌던 임금도 열람할 수 없는 조선왕조실록은 위대한 우리 민족의 문화재로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 적멸보궁 입수처. 적멸보궁 뒤편에는 용의 뿔에 해당되는 암석이 강력한 지기를 품고 있다.
왕조실록을 보관한 곳은 강화도의 정족산을 제외하고는 우연하게도 봉화의 태백산, 평창의 오대산, 무주의 적상산 세 곳이 백두대간 근처에 위치하였다. 이중 오대산 사고는 조선 선조 39년(1606년)에 이 지역이 물, 불, 바람의 삼재(三災)를 피할 수 있는 길지라고 하여 사각(史閣)과 선원보각(璿源譜閣)을 건립하고 왕조실록과 선원보략(璿源譜略·조선왕실 족보)을 이관하였다. 이 건물은 한국전쟁 중에 소실되었으나 1992년에 선원보각과 사각을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런데 일본으로부터 반환된 왕조실록을 서울대 도서관에 보관하겠다고 하여 월정사측과 시비가 일고 있는데, 문화재는 원래 있었던 자리에 있어야 역사적 가치도 빛나며 장소성의 의미도 있는 법이다.

태백산사고본은 국가기록원에서 안전하게 보관하고 있고, 정족산사고본과 산엽본은 서울대 규장각에 보관중이며, 적상산사고본은 북한에서 보관중이다. 따라서 오대산사고만이라도 비록 왕조실록의 일부이지만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왕조실록 반환의 진정한 의미가 있는 일이다.

오대산사고는 삼재불입지지

▲ 오대산 사고지 안내판.
선조실록 192권 38년(1605) 10월8일의 기록을 보면 강원감사와 정선군수가 동행하여 오대산사고의 안전성 확인과 함께 새로 인출한 실록을 사고에 봉안할 일로 실록청이 아뢰는 대목이 나온다.

‘강원감사 윤수민(尹壽民)이 치계하였다. 실록을 봉안할 곳의 지세를 살피는 일로 건각차사원(建閣差使員) 정선군수이여기(李汝機)를 거느리고 오대산에 들어가 간심(看審)하였는데, 금년 수재에 이 산이 가장 많은 피해를 입어 곳곳이 무너져 내렸으므로 평탄한 곳이 없었습니다. 오직 상원사가 동구부터 30리에 위치하였는데 지세도 평탄하고 집이 정결하므로 임시 봉안하기에는 아마 편리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막중한 선왕의 실록을 사찰에 소장하는 것이 또한 미안한 것 같습니다. 다시 해조(該曹)로 하여금 요량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실록의 중요성 때문에 감사와 군수가 사고의 터를 직접 살핀 기록이 나온다. 사고의 위치선정에 있어 풍수지리적인 이론을 감안하여 적용하였을 것이다. 실로 오대산 사고는 깊은 산중 해발 817m에 자리 잡았으며, 풍수지리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사각 건물을 중심으로 전주작, 후현무, 좌청룡, 우백호가 사각을 감싸며 보호하고 있는 안전한 자리다.

그런데 사람에게 생노병사가 있고 풍수지리에도 생왕휴수(生旺休囚)가 있으므로 일정한 시기가 되면 지운이 끝나기 마련이다. 지운이 끝나는 시기를 현공풍수이론에서는 ‘입수(入囚)되었다’고 용어를 사용하는데, 입수가 되면 지기가 휴식상태가 되기 때문에 재정양패(財丁兩敗)가 되며, 그 피해의 정도가 아주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최근에는 풍수지리를 실생활에 활용하여 행복한 삶을 만든다는 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인정을 한다. 그리고 좋은 명당을 찾기 위하여 수고도 아끼지 않지만, 지운이 언제 끝나며 지운이 끝나게 되면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은 잘 모르고 있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조상의 묘를 오랫동안 보존한다는 것은 언젠가는 피해를 보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아울러 지운이 끝나는 시점이 되어 화장한다면 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현공풍수의 대가인 중국의 우설행(尤雪行·1873-1957) 선생의 이택실험(二宅實驗)이라는 내용을 보면 화장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는 내용이 있다. 화장할 경우 길흉화복의 유무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화장하는 동시에 인체에 유전인자의 근본이 되는 DNA도 파괴되어 없어지게 된다. 따라서 화장하면 모든 것이 소멸되어 ‘무극(無極)’의 상태가 되기 때문에 길흉화복도 자연히 없을 뿐더러 풍수지리 이론도 적용할 수 없게 된다.
명당이 아닌, 즉 일반적인 땅의 경우 음택과 양택의 지운기간은 표와 같다. 표를 보면 24개 좌향 중에서 특히 술(戌), 건(乾), 해(亥) 3개 좌향은 어느 운에 용사(用事)하더라도 대개 160년이라는 장기간 지기가 지속되지만, 진(辰), 손(巽), 사(巳) 3개 좌향은 비교적 기간이 짧다.

지운기간표에서 하(下)는 1개 좌향의 범위인 15도 중 중앙의 9도 범위로 입향(立向)하였을 경우이고, ‘체(替)’는 15도 중 양변의 3도씩의 범위로 입향하였을 경우다. 그리고 운은 20년 주기이며, 현재 2006년은 8운(2004-2023년)에 속한다. 지운기간표의 숫자는 해당 운의 첫해에 용사하였을 때의 기간이다.

그리고 좌향에 따라 미치는 영향력과 발복하는 속도가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오대산사고의 건축시기인 1606년은 6운 3년차이며, 좌향은 해좌손향(하괘)이므로 지운기간은 160년이며 5운이 되면 입수가 된다. 즉 6운 3년차인 1606년부터 158년(160-2)이 지나 5운(1764-1783년)이 돌아오면 지기가 끝나지만 오대산사고는 좋은 명당이기 때문에 또 180년을 추가하여 338년(158+180)이 지나면 두번째 5운(1944-1963년)기간 중인 1950년 한국전쟁을 계기로 지운이 끝나게 된다.

▲ 서울 국립고궁박물관에서는 일본 동경대학으로부터 환수받은 오대산사고본 조선왕조실록을 전시 중이다.

적멸보궁은 비룡함주의 명당

오대산에는 유명한 월정사가 있지만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적멸보궁이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는 절을 적멸보궁이라고 하는데, 적멸보궁은 바깥 경계에 마음의 흔들림이 없고 번뇌가 없는 보배스런 궁전이라는 뜻이다. 이곳 적멸보궁은 부처님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보궁 뒤편에 1m 높이의 석탑이 있을 뿐이다.

이 적멸보궁은 신라 고승인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오대산 중대사를 비롯하여 설악산 봉정암, 취서산 통도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등 5곳 명당에 나누어 모셨다. 자장율사는 오대산 중대를 문수진성의 주처라 생각하여 적멸보궁을 짓고 부처 사리를 봉안하였다.

비로봉(毘盧峰·1,563m)을 주산으로 좌청룡에는 상왕봉(象王峰·1,493m)과 우백호에는 호령봉(虎嶺峰·1,560m)을 양쪽에 두고 해발 1,168m의 높은 곳에 결혈(結穴)한 천하 대명당인 적멸보궁은 풍수지리상으로는 나는 용이 여의주를 문 형상, 즉 비룡함주(飛龍含珠)의 형국이다.

그런데 1,168m의 높은 지대에도 명당이 있을까에 대한 의문이 있지만, 풍수지리에서는 결혈이 되는 모양과 위치에 따라 전통적으로 다섯 가지의 격으로 구분한다. 즉, 직룡입수(直龍入首), 횡룡입수(橫龍入首), 비룡입수(飛入龍首), 잠룡입수(潛龍入首), 회룡입수(回入龍首)가 있는데, 적멸보궁은 비룡입수에 해당된다.

풍수고서에 의하면 비룡입수는 높은 산중에 작은 평지를 이룬 곳으로 실제로 올라가서 보면 높은 줄을 모르며 뒤편에는 작게 솟은 곳이 있다고 하였다. 실제로 이곳 적멸보궁 뒤편에는 용의 뿔에 해당되는 암석이 강력한 지기를 품고 있다.

적멸보궁은 천하 명당인 관계로 언제나 기도하는 신도들이 끊이지 않는다. 다만 적멸보궁은 명당이기는 하지만 음택명당이 되기 때문에 사람이 살기에는 적당하지 않고, 일시적으로 짧은 시간에 강한 지기를 받기 위한 기도처로 아주 적합한 곳이다.

글 최명우 대한현공풍수지리학회 연구소장 http://cafe.daum.net/gusrhdvndtn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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