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대간 대장정 제20구간 / 노인봉] 르포

물과 바람과 구름의 오케스트라
대관령~선자령~곤신봉~매봉~소황병산~노인봉~진고개 구간

비에 젖고 있는 숲으로 들 때, 마음은 충분히 ‘맞을’ 준비가 돼 있어도 몸은 머뭇거리게 마련이다. 당연하다. 인간은 양서류가 아니니까.

장마전선이 남쪽으로 향한다는 기상 캐스터의 전언에 한 가닥 희망을 걸었지만, 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면서 더 피둥피둥해지기 시작한다. 심란함의 도가 한계에 이르기 직전, 비가 멎는다. 거짓말처럼 구름이 옅어진다. 이런 우아한 유혹 앞에서, 계속 ‘햄릿형’ 고민에 빠질 대간 종주자는 없다.

국사성황사쪽 길을 택한다. 소위 대간 ‘마루금 밟기’를 고집할 경우 대관령 성황사와 산신각은 눈 아래로 스쳐 지나게 된다. 하지만 마루금을 고집하는 태도는 기계적일 뿐만 아니라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대간은 스카이라인에 해당하는 ‘등마루’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기슭 없이 등성이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간 종주는 기슭이든 마루든 산이 허락해 준 길을 따라 산줄기 전체를 더듬는 일이다. 하물며 영서와 영동을 가르는 고갯마루를 지키는 성황과 산신을 어찌 그냥 지나칠 것인가.

▲ 이틀 동안 비와 안개 속을 걸었다. 지우는 비는 하늘과 땅을 맞대 놓았고, 안개는 풍경에 깊이를 더해 주었다. 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눈이 오면 오는 대로 좋은 산.

우산을 받쳐들고 산행하는 재미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에서 30분 못 미처 국사성황사와 산신각에 이른다. 다 알다시피 대관령 성황신은 범일국사(810-889)다. 확언할 수는 없지만, 우리나라 역대 고승 중 성황신으로 모셔지는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강릉 단오제의 주신도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국사와 강릉 지역의 인연은 깊다. 대간 오른쪽인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굴산사지가 있는데,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산사찰인 굴산사의 창건주가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국사의 탄생설화를 보면, 어머니가 샘물에 뜬 해를 마시고 잉태했다고 한다. 마땅히 동햇가 사람들에게 신으로 받들어질 탄생의 드라마라 하겠다.

전해오는 이야기가 또 있다. 임진왜란 때, 범일국사가 대관령에 올라 기도를 올리자 나무와 풀들이 왜군들에게 군사의 모습으로 보여 감히 공격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전설은 시대가 맞지 않는다.

산신각은 성황사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김유신을 이곳 산신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문화재청 사이트에는 ‘장군 왕순식이 고려 태조를 모시고 후백제의 신검군을 정복코자 할 때, 두 귀신이 꿈에 나타나 도움을 주어 싸움에 이겼다고 한다. 그 뒤 두 분을 산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지낸다고 한다’고 소개돼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곡해한 것으로 보인다. 신검이 이끄는 후백제군을 제압한 왕순식에게 왕건이 “내 꿈에 기이한 중이 나타나 갑병(甲兵) 3천 명을 거느리고 왔더니, 그 다음날에 경이 도와주었으니 그 꿈이 들어맞는 것”이라고 했다. 이에 왕순식이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대관령)으로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어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습니다. 임금께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강릉의 옛 향토지인 임영지에도 왕순식이 꿈에 승속(僧俗)을 만나 제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그 승속 2인이 바로 범일국사와 김유신이라는 것이 이 지역 사람들의 오랜 믿음이다. 또한 임영지에는 한글 소설의 효시인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이 산신제를 구경하다 우두머리 관리에게 산신이 누구인지 물어본즉, 김유신이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김영기 저 <백두대간 민속기행>(강원일보사 간) 참조).

어차피 전설인데 아무렴 어떠냐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전설이란 당시대인들의 믿음이 투영된 것이다. 그래서 가치 판단이나 사실 여부를 떠나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얘기들이 지역민의 믿음과 무관하게 몇 가지로 유통되는 것은 곤란하다. 강릉은 물론 강원 지역에서는 일반인들은 물론 언론에서도 대관령 산신을 김유신이라 믿는다.

성황과 산신에 인사를 올리고 등성마루로 걸음을 옮긴다. 비에 젖은 숲에서 ‘풀 비린내’가 펄떡인다. 걸음을 따라 낙엽 냄새가 섞여든다. 몸속으로 숲이 들어온다. 기꺼이 우중(雨中) 산행을 즐기기로 마음을 고쳐먹는다. 사실 이번 산행에서 비를 피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버렸다. 횡계의 여관에서 하룻밤을 보내며, 어차피 그럴 거라면 우산을 받쳐 들고 걷기로 했다. 마침 이번 구간은 시작과 마지막을 제외하곤 거의 대부분이 평탄한 풀밭이 아닌가.

친구들과 우산을 쓰고 학교로 가던 어릴 적의 기억이 선명한 영상으로 떠올랐다. 대관령으로 이동하기 전 우산을 샀다. 어린이용밖에 없었다. 번개 소년 아톰이 그려진 캐릭터 우산이었다. 간신히 상체나 가려줄 자그마한 우산을 펼쳐들고 마음껏 낄낄거렸다. 배낭 뒤에 우산을 찔러 넣은 모습은 영락없는 노숙자였다. 우리는 또 낄낄거렸다. 절로 다가오는 즐거움이 진짜겠지만, 이렇게 노력해서 얻는 즐거움도 나쁘지 않다. 노력하는 동안 이미 즐거워지니까.


자연을 위해 자연의 한 부분을 파괴해야 하는 모순

▲ 선자령으로 향하는 취재팀. 비가 오락가락한다.
새봉을 지나 목초지를 만날 때까지는 서서히 키를 높이는 숲길이다. 선자령을 앞두고 삼양축산의 목초지가 시작되면서 비로소 하늘과 맞닿은 초원을 느낄 수 있다. 동쪽(강릉)은 숲이 우거진 가파른 기슭이지만 서쪽(평창)은 황소의 잔등 같은 구릉이 끝없이 펼쳐진다. 강원도에서는 하늘이 내려주는 비만 바라보며 화전을 일구던 이곳을 1980년대 초반부터 목장으로 탈바꿈시켰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이러한 풍광이 조선 숙종 연간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중환은 택리지의 팔도총론에 그때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려 놓고 있다.
'내 나이 열넷이던 계미년에 아버지께서 강릉의 원이 되어 가셔서 나도 가마를 따라갔다. 은교역에서 강릉부 서쪽 대관령에 이르도록 평평한 곳이거나 고갯길이거나 가릴 것 없이 깊고 빽빽한 숲이었다. 무릇 나흘 동안 걸으면서 쳐다보아도 하늘과 해를 볼 수 없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산과 들이 모두 개간되어서 농사터가 되고, 마을이 잇닿아서 산에는 한 치 굵기의 나무도 없다. 이로 미루어 보면 딴 고을도 이와 같을 텐데, 착한 임금 밑에서는 인구가 점점 늘어난다는 것을 알겠으나 산천은 손해가 많다.

예전에 인삼이 나는 곳은 모두 고개의 서쪽 깊은 두메였는데 산골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느라 불을 질러서 인삼이 점차로 줄어들었고, 장마 때면 산이 무너져서 한강에 흘러드니 한강이 차츰 얕아진다.‘

참으로 놀랍도록 정교하고 긴 안목이다. 마치 오늘의 형편을 예측이나 한 듯하다. 이때가 18세기 초반이니 300년 가까이 화전을 일구던 땅이 현재 목초지로 바뀐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곳에서 송천이 발원하는데, 비가 올 때면 송천 상류는 거의 황토물이 된다고 한다. 물론 고랭지 채소밭인 횡계고원이 주된 영향이겠지만, 현재 풍력 발전을 위해 등선마루의 길까지 넓히고 포장을 하면서 더 악화되는 측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 대관령 풍력발전단지. 목초지에 이국적 풍광을 더하고 있다.

천연 에너지인 풍력으로 전기를 만드는 기술은 분명 친환경적이다. 자연을 위해 자연의 한 부분을 파괴해야하는 모순은 심층생태주의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배려는 최대치도 모자란다. 그런데도 도로 옆 절개면은 아무런 조치도 없이 황톳물과 토사를 흘려보내고 있다. 물론 나중에 보강공사를 하겠지만, 비용면에서도 한꺼번에 공사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지속가능한 발전’이란 구호가 말장난에 그치지 않으려면 테크놀로지가 모든 걸 해결할 것이라는 미망부터 버려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 삶의 규모를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는 것이야말로 자연을 벗 삼는 사람들의 태도가 아닐까.


공간에 깊이와 신비를 더하는 안개

선자령(1,157.1m)에서부터 대간 트레일은 거침없이 초원을 달린다. 가끔 숲을 들락거리지만 서쪽으로 내려서지만 않으면 곧장 도로를 따라가도 길 잃을 염려는 없다. 어디로 가느냐는 순전히 취향 문제다. 햇볕 쨍쨍한 날이면 당연히 숲으로 들어가게 되겠지만, 지금처럼 비가 내리는 날에 굳이 숲으로 들 이유가 있을까.

선자령 정상표지석에서 점심을 먹으려 하자 빗줄기가 굵어진다. 서둘러 비박용 가림막으로 천막을 급조한다. 아늑하다. 별것 아닌 일에서도 마치 큰 일을 해낸 듯한 이 유치한 행복감이라니. 산에 드는 또 다른 즐거움이다.

▲ 소황병산 가는 길. 드문드문 선 소나무는 하늘로 오르는 사다리 같고, 그 옆 취재팀은 신선을 만나러 가는 것 같다.
따로 또 같이. 우산을 받쳐 들고 산길을 걷는 취재팀의 모습이 딱 이렇다. 아니, 인간들이 살아가는 모양새가 대체로 그렇지 않을까? 하지만 도심 보도 위를 제각각 우산을 쓰고 종종걸음 치던 것과 지금 산에서 우산을 쓰고 가는 일은 질적으로 다르다. 도심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빗소리를 즐길 여유는 없다. 오직 비라는 ‘이물질’로부터 나를 격리시키는 일만이 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누가 조금만 뒤처져도 고개를 돌려 확인을 하고 속도를 늦춘다. 그러면서도 나만의 우주를 거니는 듯한, 나와 대지가 한 몸이 된 듯한 충만감을 느낀다.

도로가 비탈을 휘어돌 때, 간간히 풀 우거진 트레일로 들어선다. 풀잎에 묻어있던 물방울이 와락 바지에 안긴다. 바지가 살갗에 찰싹 달라붙는다. 작은 우산이지만 바람이 불지 않아서 거의 젖지 않았는데, 한 순간 풀잎을 스친 물방울이 하루 종일 젖은 양보다 더 많다. 흔히 숲을 강물을 가두는 인공댐에 빗대어 녹색댐이라 부른다. 우리나라의 숲이 저장할 수 있는 물의 양은 소양댐 10개와 맞먹는 180억 톤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모든 인공댐으로 얻을 수 있는 126억 톤의 1.6배다. 실감되지 않는 이 수치를 바짓가랑이에 묻은 물방울로 체감한다.

곤신봉(1,127m)을 지나면서부터는 안개가 짙어진다. 1,000m가 넘는 고지대지만 워낙 편안한 길인데다, 서쪽에 비해 기울기가 가파른 동쪽 기슭이 구름에 갇혀있어 고도감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가가면 새로이 길이 열리고, 가끔 바람이 안개를 지우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가끔씩 홀로 선 소나무들이 안개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드러낸다. 울창한 숲보다 더 존재감이 뚜렷하다. 안개는 공간에 깊이와 신비를 더한다. 익숙한 것들에 경이의 옷을 입힌다.

옛사람들은 이곳을 지나며 어떤 심경이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전하는 몇 구절을 보자. 고려 명종 때의 시인 김극기는 '높은 절벽에 붉은 노을은 낮부터 밤까지 잇닿고, 깊숙한 벼랑엔 검은 안개가 음천(陰天)에서 갠 날까지 잇닿았네. 손을 들면 북두칠성 자루를 부여잡을 듯, 발을 드리우면 은하(銀河)에 씻을 듯하다'고 노래했다. 예나 지금이나 대관령은 늘 안개와 구름을 벗 삼으며 보는 이들의 시적 상상력에 날개를 달아주고 있다.

매봉을 앞두고 동해전망대에 이르자 한기가 들기 시작한다. 전망이라고는 동해를 삼켜버린 구름밖에 없다. 그렇다고 눈 아래로 깔린 운해도 아니다.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고 있는 무거운 비구름이다.


여름은 한뎃잠 자는 이들의 편

▲ 소황병산에서 노인봉으로. 소황병산 일대는 강아지처럼 막 뛰놀고 싶은 풀밭이다.
커피 한 잔 생각에 간이휴게소로 들어갔으나 막걸리를 보자 금방 생각이 바뀐다. 메밀전 안주가 간식 이상의 막걸리를 삼킬 즈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매봉에서 합류하기로 한 에코로바 임직원들이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반가움의 정도를 증폭시킨다. 에코로바팀이 적당히 지친 취재팀에 활력을 나눠준다.

에코로바팀을 앞장세우고 느릿느릿 뒤따른다. 도로와 트레일을 넘나든다. 에코로바팀들의 화사한 펀초 우의가 곱다. 사람도 분명 자연의 일부지만 그걸 자각하면서 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자연의 품에서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결이 삭으면 절로 자연성을 회복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행동인지를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몸이 절로 터득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토끼에게 한뎃잠을 자는 요령을 배우지 않아도, 노루에게 계곡에서 물 찾는 법을 배우지 않아도 웬만한 경우는 해결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문제는 지나친 자기확신이나 방심이다.

매봉(1,173.4m)에서 배낭을 부린다. 이번 구간에 지나온 대부분의 봉우리가 그렇듯이 매봉 또한 봉우리 같은 느낌은 없다. 멀리서 보면 구릉에서 솟아올라 있지만 봉우리의 속성은 느껴지지 않는다.

텐트와 가림막으로 대충 잠자리를 만든 다음 산상 만찬에 들어간다. 밥과 술이 끼니의 자리를 넘나든다. ‘기갈이 감식’이듯, 악조건은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를 쉽게 무너뜨린다. 되는 대로 걸판지게 즐겁다.

오락가락하던 비가 멈추더니 금방 하늘 한 귀퉁이가 열린다. 구름 사이로 상현 반달이 얼비친다. 맑은 하늘의 달보다 더 가까워 보인다. 야, 별이다, 하고 누군가 외친다. 하늘바라기에 인색한 도회의 삶 때문도, 과장된 감정 탓도 아니다. 산이 ‘치레’의 옷을 벗겨 준데다 비가 그칠 것이라는 기대감이 확신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소주 한 잔 먹고 하늘 한 번 보고, 옆 사람과 눈 마주치다 또 하늘 한 번 보고 하는 사이 별빛이 물결처럼 쏟아진다. 하지만 그것도 한순간이다. 상쾌한 내일에 대한 기대가 영글기도 전에 구름은 다시 비를 흩뿌린다. 슬그머니 한둘씩 자리를 뜬다. 아무렇게나 누워도 내일 안녕할 것이다. 비가 올지라도 여름은 한뎃잠 자는 이들의 편이다.

불편한 잠자리가 일찍 아침을 부른다. 갓 밝은 하늘 아래로 펼쳐진 운해는 선잠에 대한 보상으로 충분하다. 지난밤의 흔적을 지우고 서둘러 아침을 먹는다. 하늘이 다시 무거워진다.

매봉에서부터는 등성마루로 난 찻길은 없다. 트레일은 제법 이슥한 숲으로 이어진다. 완만한 내리막길이다. 20분쯤 지나서 살포시 올라섰다 내려서자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이루는 숲길이다. 제각기 카메라에 안개가 흐르는 숲을 담느라 분주하다. 숲 사이로 안개가 흐른다. 안개를 따라 숲이 흐른다. 흐르는 숲을 따라 우리도 흐른다. 안개로 하여 사라진 원경은 사람과 사람, 사람과 숲의 관계를 한층 좁혀준다.

▲ 매봉을 지나 소황병산으로.

숲길을 벗어나자 다시 하늘이 열린다. 소황병산(1,328m)이다. 트레일에서 소황병산 표지석까지는 맘껏 달리고 싶은 분위기의 목초지다. 송아지처럼 즐거운 에코로바팀의 젊은 에너지가 눈부시다. 바위에 등을 붙이고 하늘을 본다. 구름뿐인 하늘인데도 왠지 마주하기가 민망하다. 헛울음 우는 아이처럼 노래 한 곡 불러본다.

소황병산에서 노인봉산장까지는 편안한 내리막길이다. 산장 조금 못 미친 곳에 있는 전망대 바위는 누워서 낙조를 보기에 딱 좋은 곳이지만 오늘은 무망한 일이다. 이제는 폐쇄된 노인봉산장에서 라면으로 늦은 점심을 해결하고 노인봉을 오른다. 천지는 구름과 안개뿐이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집중하며 진고개를 향한다. 물과 바람과 구름의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자연의 음악에 흠뻑 젖은 이틀이었다.


즐거운 대간 종주를 위한 제언

피할 수 없는 비, 디카로 즐기자

대간 종주자들에게 여름은 겨울만큼이나 부담스럽다. 비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구간종주를 할 경우 폭풍우가 아니면 산행을 접기도 께름칙하다. 그래서 비 맞을 각오하고 종주를 시도한다. 전망도 좋지 않다. 이럴 경우 차라리 구름이나 안개를 디카(디지털 카메라)에 담는 즐거움으로 운행의 불쾌감을 날려버리자. 디카는 콤팩트해 무게 부담도 없다.

직업 사진가가 아니면 흐리거나 비가 오면 사진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하지만 산에서 이런 날씨는 풍경에 극적인 요소를 더하기 때문에 기대 이상의 좋은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운해, 안개, 비, 바람을 찍어 보자. 그런데 이런 날씨는 적정 노출이 확보되지 않는다는 문제가 있다. 운행 중에는 사용하지 않더라도 우산을 준비하고, 소형 삼각대를 챙겨야 한다.

▲ 노인봉 가는길, 소풍나온 아이들처럼 사진 찍고 찍히기에 바쁘다.

일반적으로 녹음이 우거진 숲을 찍을 경우는 반드시 노출은 적정보다 부족하게 하는 것이 좋다. 안개나 구름을 찍을 경우 카메라가 가리키는 대로 찍으면 원하는 효과보다 노출이 부족한 사진을 얻기 쉽다. 안개나 구름은 빛을 확산시키기 때문에 카메라의 노출은 부족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노출을 약간 더해 주는 것이 좋다.

원경만 찍으면 눈으로 보는 느낌과 달리 밋밋한 사진을 얻게 된다. 근경이나 나뭇잎의 물방울, 잎맥, 나무껍질 등을 찍어 보자. 더 재미있는 사진을 얻으려면 망원을 즐겨 사용하자. 산기슭의 일부만 잘라내어(cropping) 찍어도 전경 사진과 전혀 다른 느낌의 사진을 얻을 수 있다. 첩첩 산줄기나 산 주름을 망원으로 클로즈업시키면 원근감이 압축되면서 겹치기 효과가 극대화된다. 판에 박힌 사진에서 벗어나 보자.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글 허재성 기자

Posted by 동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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